본문 : 고린도전서 6:12-20
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13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14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15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6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18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전 시간에 고린도 교인들 간에 벌어진 송사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의 판결을 통해서 우리 성도들은 왜 세상 송사가 무의미한지를 살펴보았는데, 이번 시간에도 예수님 앞에서 벌어진 재판을 하나 더 보겠습니다.
(요 8장)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이 사건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게 있는데,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께 끌고 온 사람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착각입니다. 그들은 이 재판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고 여겼어요. 재판에는 재판장이 있고, 한쪽에 검사가 한쪽에는 변호인이 있고, 또 피고가 있죠. 그럼 재판 당사자들은 재판장과 검사와 변호사와 피고잖아요. 그런데 간음한 여인을 끌고 온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자기 자신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집행할 수 있는 당사자라고 착각한 거예요. 앞에 계신 예수님과 자신들이 똑같은 위치에 있는 소송 당사자라고 여겼어요. 그래서 예수님에게 율법을 들이대면서 당신 같으면 이 여자를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고 묻는 것인데, 이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셨어요. 이 말은 너희 모두는 이 재판에 참여할 수 없는 죄인들이라는 뜻이에요. 너희는 오히려 나로부터 판결을 받아야 할 죄인들이건만 누가 누구를 정죄하고 재판할 수 있느냐는 거예요.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율법 앞에서는 똑같이 부정한 자이며, 그래서 그들 역시 앞에 계신 예수님의 판결을 받아야 할 자들인데, 그들은 그 자리를 떠나버렸고, 그 자리에는 간음한 여인만 남았습니다.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간음한 여인처럼 예수님의 용서를 받을 기회를 스스로 차버린 겁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를 가지지 못한 죄인인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의 양심이나 세상 법 등으로 예수님과의 관계를 가지는 것에는 어떤 연결점이 없어요. 세상에서 존경받는다고 하는 사람들일수록 예수님과의 관계를 가지기 더 어렵더라는 말입니다.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들이잖아요. 그럼에도 그들은 얼굴도 들지 못하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있는 간음한 여인보다도 용서받을 기회, 구원의 기회가 더 없더라는 말입니다.
율법사나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이 계신 자리를 떠나서는 안 되는 죄인들이잖아요. 자신들이 간음한 자요 탐하는 자요 불의한 자임을 예수님에 의해서 들켜야 하는데 그게 싫어서 다들 제 갈 길로 가버렸어요. 오늘 본문 10절처럼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죄인임을 폭로 당해야 하는데, 그 기회를 놓친 겁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본문을 오해해서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재판하면 안 된다고 이해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불의함과 음행이 주님에 의해서 낱낱이 폭로 당하고 간음한 여인처럼 얼굴도 들지 못한 채 면목 없이 용서받게 되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거룩함과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입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본문을 나누면서 일부러 요한복음 8장의 예수님의 재판을 인용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처럼 단순히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세상 법정에 가져가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의 본질적인 문제는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의 용서를 받는 것, 우리 죄를 대신 지고 가신 예수님의 피의 용서이지 세상 법정에서 누가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게 아닙니다.
성도는 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샅바 싸움하는 사람들이잖아요. 주도권 싸움을 한단 말이에요. 이게 야곱이죠. 이 야곱이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야곱이 특별히 성격이 더러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안에 그 야곱이 있어요. 하나님한테 마저 지지 않으려는 야곱이에요.
그런데 그 야곱처럼 하나님에 의해서 나의 실체가 발가벗겨져서 하나도 숨김없이 폭로 당하는 게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는 과정이에요. 밤새 하나님과 씨름한 야곱은 그의 환도뼈(씨방)이 위골되고 깨져서 평생을 지팡이에 의지해서 살아야 했어요. 그 지팡이는 하나님이 쥐어주신 지팡이에요. 그런데 이게 싫어서 예수님을 떠나버린 게 바리새인과 서기관이에요.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지 못한 자, 하나님에 의해서 씨방이 깨진 적이 없는 자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이 더 착합니까, 야곱이 더 착합니까? 그런데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인생을 계속 간섭하시고 동행하셔서 자기유익을 위해 남을 속이면서 살던 그를 마침내 하나님밖에 의지할 게 없는 자로 만드시는데,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고 은총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평생을 주님의 책망을 들으면서 주님의 손길에 의해 거저 주시는 은혜의 구원을 면목 없이 덥석 받을 수밖에 자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의로 여겨주십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는 이런 거예요. 야곱처럼 긴 밤의 씨름 가운데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서 환도뼈가 위골 당하는 사건, 그로 인해서 평생을 절뚝거릴 수밖에 없는 야곱, 하나님이 쥐어주시는 지팡이, 그 말씀의 지팡이만 붙들고 살게 되는 야곱, 이게 새로 태어난 야곱인데, 이 야곱이 지팡이에 의지해서 세상 왕 바로 앞에서 바로를 축복해주잖아요. 그런 야곱을 만드시는 게 바로 하나님의 열심이고 전능하심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승리 이스라엘의 승리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일생 동안 하나님을 이겨 먹으려고 하다가 결국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그런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완성되어 마침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됩니다. 그래서 그 일을 위해 먼저 불가능한 죄인으로 폭로되는 사건이 우리 인생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거 없이 천국 가는 사람은 없어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밖에는 붙들 게 없음을, 자신에게는 구원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아는 자리까지 끌려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들처럼 불의한 자가 되지 말아야겠다, 간음한 자 속이는 자가 되지 말아야겠다는 쪽으로 이해하게 되면 바울의 진의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 나의 본질과 속성이 있는 그대로 폭로 당하고, 또 폭로 당하면서도 하나님께 아등바등 대드는 성질머리까지 다 드러내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종교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스스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오해하는데, 그렇게 야곱처럼 하나님마저 속이려는 이런 우리의 실체가 낱낱이 들켜야 해요. 어쭙잖게 성화 연극, 셀프 거룩, 자체 발광 하면 안 돼요. 그냥 폭로 당하면서 사시는 게 하나님과의 동행이에요. 그렇게 폭로 당하면서 우리에게 남는 건 우리 주님의 십자가 그 은혜의 필연성입니다. 십자가 피 외에는 어떤 구원 가능성도 없음을 알고 그 음혜만 꼭 붙들게 되는 자리로 우리를 끌고 가세요.
오늘날 세상 기독교처럼 하나님의 은혜 더하기 나의 열심과 나의 착함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만약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에요. 로마 감옥에서 마지막까지 그는 자기를 죄인의 괴수라고 했어요. 나 같은 죄인이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분의 불쌍히 여기심 외에는 나에게 어던 구원 가능성도 없다는 말이에요. 이게 바로 구원받은 성도예요. 그런데 우리의 감추어진 악한 죄성이 무언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에 내 땀 한 방울, 내 시간, 내 돈 한푼이라도 보태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야 당당한 구원이 될 수 있으니까. 이게 종교인들의 구원관이에요.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가 그렇게 가르치고 있단 말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마지막까지도 그분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한 간음한 여인처럼 예수님 십자가 옆의 강도처럼 정말 빈손으로 면목 없이 구원받는 겁니다. 우리 인간 편에서 보면 완전한 실패죠. 아무리 봐도 구원받을 건덕지가 전혀 없는 죄인의 괴수 같은, 그러나 그게 바로 하나님의 성공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용서 외에는 아무것도 붙들 게 없다는 자리까지 끌고 가시는 게 하나님의 성공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자존심을 챙기려고 예수님의 은혜에 다른 것을 섞고 보태려고 하는 것이 음녀의 술, 사단의 간계입니다. 사도 바울은 서신서 군데군데에서 그것을 언급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죠. 예수님도 그러셨어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요 7:7)고 하셨습니다. 악한 세상, 이게 예수님과 성령받은 사도가 보는 세상관,인간관인 것입니다.
며칠전 카페에 올린 대로 나이가 칠십이 넘도록 살다 보니 전에는 보이지 않던 세상의 실체가 보입니다. 예수님이 왜 세상을 악하다고 하셨는지를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 사람 누구에게도 자신을 의탁하지 않았다고 했어요.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죄인에게서 나오는 것은 죄밖에 없어요. 왜 그럴까요? 모두 자기만 사랑하고 자기를 위해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기가 확대된 게 가정이고 직장이고 더 나아가 나라입니다. 우리 처음 인간은 원래 자기를 위해서 살도록 지어지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지음을 받은 게 인간인데,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먹고 난 후부터 자기라는 의식이 생겼어요. 하나님은 거기 계시고 나는 여기 있고. 심지어 하나님이 찾아오시자 아담은 나무 뒤에 숨어버렸죠. 그때부터 내 공간이란 걸 따로 만들었어요.
이런 인간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기대도 하지 않습니다. 그 인간들을 고쳐 쓰실 생각을 안 하신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근본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아들을 보내신 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 먼저 필요한 게 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그 죄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정상이 아니란 것을 인정하기 싫은 거에요
고린도 교인들이 세상 법정에 송사하는 이유도 자기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들에 말하기를 너희들에 당장 필요한 생명의 문제, 죄의 문제는 보지 못하고 엉뚱한 데 정신을 팔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7장을 보면 결혼 문제, 남자와 여자의 문제, 주인과 종의 문제 등 다양한 내용들이 있는데, 이런 말씀들 역시 오해하게 되면 결혼은 어떻게 해야 하고, 남자와 여자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고, 상사와 나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받게 됩니다. ‘지혜로운 성도의 세상살이’그런 거죠. 그런데 7장, 8장 모두 복음 이야기, 예수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그런 인생살이 지침서나 교훈집이 아니란 말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손길에 그냥 폭로 당하면서 살면 됩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폭로 당할 사건들이 없다는 겁니다. 주께서 내어버려 두시면 그런 사건들이 없어요. 그런 찔림이 없고 그런 엎드림이 없어요.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주님 앞에 개처럼 납작 엎드리는 엎드림이 없어요. 저는 개가 맞습니다.. 당신에게서 어떤 은혜도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이 맞습니다.. 그런데 개들도 주인 상에서 떨어지는 걸 먹잖아요.. 하는 그 자리로 가야 해요.
자기 착한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사람은 지옥 갑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에 나오죠? 구원받은 자들은 말하기를 주님 제가 언제 주를 위해 그런 것을 했습니까?.. 그런데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할 말이 많죠. 착하게 살고 주를 위해 한일이 많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옥에서 이를 갈아요. 억울하다는 거죠. 어떻게 나한테 이럴수 있냐고...
성도는 일평생 주님에 의해 폭로 당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보다 돈이 더 좋습니다.. 저는 예수 이름보다 내 이름을 높이는 게 더 좋은 죄인 맞습니다.. 그렇게 야곱처럼 얍복강 가의 긴 밤을 지내면서 왜 나 대신에 하나님의 아들이 피를 흘리셔야 했는지, 왜 그분이 나의 옛사람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는지를 처절하게 배우고 돌아가는 게 성도의 일생이에요. 예수님이 나의 거룩이고 나의 의고 나의 생명인 것을 고백하는 자리까지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끌려가는 모든 과정이 있은 후에 우리는 우리가 있어야 할 그 처음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인생에 많은 사건들을 준비해두고 계십니다. 우리 산 자가 십자가의 죽음에 넘기우는 자기부정의 고난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 그 죽음이 없이는 생명도 없음을 아시고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한다는 그 사도의 고백이 우리 교회의 고백과 찬송이 되기를 빕니다.
12절부터 보겠습니다
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13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14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이 말씀 역시 성도의 몸이 누구의 것인지를 묻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얼마든지 자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미 선악의 법으로부터 자유를 얻었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고 하잖아요. 그럼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자유하고 계십니까? 갈라디아서에도 같은 말씀이 있어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이 말씀은 율법의 종이 다시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율법 행위로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으니까 결코 정죄함이 없는 그리스도 안을 벗어나지 말라, 한마디로 자기 행위를 믿지 말고 예수 믿으라는 거예요.
우리 몸은 자체가 율법의 몸이에요. 끊임없이 자기중심의 선과 악을 나눕니다. 하나님이 창세기 2장에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그거예요. 너희에게는 선과 악을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너희는 원래 선악 체계와 상관없는 몸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건데, 처음부터 죄와 상관없는 신분, 곧 그리스도 안에서 아들로 지음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아담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해서 나 중심의 선악 체계가 몸 안에 장착되었어요. 나 중심의 선악 체계라는 건 내게 유익한 건 선이고 나에게 해롭게 하는 것은 악이라는 거예요. 이게 자기중심의 선악 체계예요. 이것 때문에 세상에는 끊임없이 전쟁, 살인, 도둑질, 사기 등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런 모든 것이 선악과로 인해 자기라는 자아가 생기고 그 자기의 유익을 위해, 그 자기를 지키기 위해 일어나는 범죄들입니다. 그러니까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자기사랑, 자기숭배인 거에요.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신 후에 보시기에 좋았더라(토브)고 하셨지요. 이게 하나님의 善이란 뜻인데 요즈음은 이 토브란 말이 유행이에요 토브 미용실, 토브 식당, 토브 찻집... 다들 뜻도 모르고 사용하는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은 ‘내가 만들어도 그 것 참 보기 괜찮네’ 그런 뜻이 아니라 이 말은 하나님의 선에 합당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시는 말씀입니다.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아담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에덴에서 쫓겨났어요. 그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아담은 어떤 아담이에요? 고린도후서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첫 사람 아담은 반드시 선악과를 먹고 역사속에서 죽고 또 죽어야 하는 아담이에요. 그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서 새생명으로 완성되는 아담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담을 보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거예요. 세상과 역사는 그 하나님의 선을 이루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과정이 왜 필요할까요? 그냥 아무 문제 없이 만들어서 천사들처럼 그렇게 같이 사시면 될 텐데, 왜 그렇게 선악과 범죄와 쫓겨남 죽음 그리고 구원 그런 과정이 필요한가 말입니다
현대 기독교가 이 부분을 오해하고 있어요. 우리는 그냥 천사들 같은 피조물이 아니에요. 천사들이 성도들을 살펴보기를 원한다’고 할 정도로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서 사람, 즉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져서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그런 관계입니다. 어느 정도의 사랑인가 하면 하나님 자신의 죽음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그런 사랑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사랑으로 온전해지고 충만케 되는 그런 존재로서 아들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예수그리스도로 통일되는 것, 이게 하나님의 뜻이고 영광입니다. 우리가 지음을 받은 목적이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데,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자로 완성하는 것이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뜻이고 목적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편지 마지막에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 16:22)라고 하면서 편지를 맺습니다. 의미심장하죠? 내가 지금 너희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이 누구인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지를 긴 편지를 통해서 분명히 알려주고 싶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이 누구인지...
하나님의 새 창조의 목적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만들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쭙잖은 종교 행위, 율법 행위 내어놓지 말고 결코 정죄함이 없는 그리스도 안이 무엇인지를 알라는 거예요. 요한복음에 보면“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고 하잖아요 하나님은 자기사람들에게 자신을 알게 하시려고 아들을 보내신 거에요 그분 안에서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 때문에
문제는 이 앎이 신학이나 수도 고행 같은 학습 훈련으로 알게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아는 길은 다 막혀 있어요. 세상 모두가 죄 아래 가두어져 있기 때문이에요. 죄의 권세 아래에 있다는 말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에요. 생명 나무로 가는 길은 이미 천사와 화염검으로 막혀 있어요. 그런데도 그냥 성경 읽고 예수 알면 하나님 알면 구원받겠구나.. 내가 수십 년 교회 다니면서 들은 설교만 수백, 수천 편인데 내가 왜 예수를 몰라?.. 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그사람들 예수를 아는 게 아니에요. 그럼 예수를 어떻게 압니까? 그분이 찾아와서 눈과 귀를 열어 알게 해주실 때만 아는 겁니다.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이몸으론 그 예수를 알수가 없어요 그래서 성령이 오시면 새사람을 지으시고 새피조물로 눈과 귀가 그분을 향해 열릴 때 그분의 주되심을 알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어떤 방법으로도 예수를 알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는 공부로 아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어던 면에선 성경공부가 아주 위험할 수가 있습니다 신학 물론이고..
안다는 말이 ‘야다(히)’, ‘기노스코(헬)’인데, 이건 부부가 동침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상태를 ‘안다’고 합니다. 그분과 평생을 동행하면서 그분의 주되심, 우리의 하나님 되심을 체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럼 그런 자들 주님과 동행하는 자들에게서 어떤 반응이 나타나겠습니까? 저에게는 어떤 선도 의도 깨끗함도 없습니다.. 당신의 은혜, 당신의 불쌍히 여기심이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이게 동행이에요
(고전 1장)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독교의 구원은 불교처럼 내 안에 있는 불성을 깨닫고 계발해서 신과 합일되는 게 아니에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죄의 권세아래 절대 불가능한 우리를 외부의 그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건져내어 주시는 것이에요. 마귀의 세간으로 붙들려 있는 우리에게 더 강한 분이 오셔서 마귀를 결박하고 우리를 건져내 주시는 거예요. 그 싸움의 전리품이 된 상태가 우리의 구원이란 말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런 은혜의 구원을 알게 하시려고 우리 인생에 많은 전투가 준비되어 있어요. 우리가 하는 싸움이 아니라 이미 그분이 싸워 이기신 그 십자가의 승리에 참여된 우리가 그 싸움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시는 전투가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악한 영과의 싸움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영역의 문제입니다. 죄의 권세, 마귀의 권세, 사망의 권세 아래에 있던 우리가 결코 정죄함이 없는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진 것, 우리 발로 찾아 가는 게 아니라 이미 옮겨 놓으신 그것을 알라는 겁니다. 그런 우리는 이제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서 생명의 법, 성령의 법의 적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죽는 순간까지 짓는 어떤 죄도 이미 용서받은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할 법 자체가 없다는 게 성령의 법, 은혜의 법이에요.
그래서 그 믿음 안에 있어야지 또 거짓 영, 거짓 교사들에 속아서 다시 율법 행위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게 사도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고린도 교회나 갈라디아 교회처럼 복음 아래에 있는 자유를 자기를 위한 방종, 자기 합리화로 착각하는 일이 생기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이나 갈라디아서 말씀 같은 내용이 성경에 기록된 것입니다.
(갈 5장)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복음 안에 있는 자유는 분명한 방향성이 있어요. 그러니까 육체의 기회, 자기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닌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 할 수 있는 자유예요. 이게 바로 그리스도의 종이 된 자유입니다.
율법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그 핵심인데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신 분은 예수님 한분이시죠.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 나오잖아요? 거반 죽게 된 우리를 살려내신 분이 진짜 이웃 사랑을 하신 분이거든요. 그러니까 그 사랑을 모르는 상태에서 복음 안다고 하면서 복음을 육체의 기회, 즉 자기 쾌락, 자기 유익, 자기 합리화를 위해서 사용하는 자들이 교회 안에 생겨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이 군데군데 우리 주님을 소개하면서 그러는 거예요.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랑해선 안되는 죄인을 사랑하신 그 불륜 때문에 자기를 낮추시고 너희의 종이 되신 것처럼 너희도 사랑 안에서 서로 종이 되는 자들이 교회이고 그들이 복음으로 자유 할 수 있는 자라는 말입니다.
(빌 2장)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와 같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분 이름 앞에 납작 엎드리는 게 우리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한 몸 된 지체로서 교회라면 이런 사랑, 이런 마음을 품고 내가 부인 된 믿음의 행위가 나타나는 게 세상과 구별된 교회인 것입니다. 그렇게 복음을 이용하는 것과 복음을 살아내는 것은 방향이 달라요.
나는 나를 위해서 살 수 있는 자가 아니라는 것, 나의 유익과 나의 쾌락을 위해서 살 수 없음을 알지만, 그럼에도 우리 몸에 남아있는 육체의 소욕, 죄의 잔재, 자기 사랑, 자기 영광, 자기 숭배라는 묵은 누룩으로 인해서 우리는 늘 탄식하고 절망합니다. 이건 우리의 육체를 벗는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벗어날 수 없으니까요. 그러나 성도는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십자가의 피로 나를 대속하신 주님의 은혜, 그 사랑 앞에 그럴 때마다 다시 무릎을 꿇게 되는, 주님의 십자가 뒤로 숨게 되는 그 믿음 안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살피고 확증하라는 게 사도가 편지를 쓴 이유입니다.
어차피 내 몸이 죄고 나에게서는 죄밖에 안 나온다면서 막살기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거 아니에요 믿음 안에 있다는 말은 우리의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추함과 악함과 더러움과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누구를 바라보느냐 하는 것, 우리의 의가 되고 거룩이 되고 구원이 되시는 그분을 바라보는 방향성을 말합니다. 막 살자는 건 결국 자기를 보는 거죠. 주체가 자기예요. 그건 결국 자기 사랑의 다른 표현일 뿐이에요. 그게 복음을 이용하는 것이고 자기 합리화예요. 그래서 사도의 편지에 빠지지않고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라는 말이 들어있는 거에요. 다른 말로 에수 믿음입니다.
이렇게 복음에는 자유를 빙자한 방종이라는 함정이 있어요. 초대교회에도 이런 방종들이 많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음행과 탐심, 도둑질, 우상숭배를 해도 성도는 구원이 취소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11절)는 말씀이 있는 거예요. 음행하고 우상숭배하고 악한 짓을 한 자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깨끗하게 됨과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그것, 이게 복음이에요. 그러니까 그들의 불의와 악한 행위가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에 어떤 장애도 되지 않더라는 게 복음의 능력이에요. 십자가 피의 용서는 이런 거예요.
그럼 우리가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음에 있어서 음행하고 간음하고 탐색하고 도둑질하고 탐욕을 부리고 술 취하고 모욕하고 속여 빼앗는 짓을 한다 해도 거룩함과 의롭다 하는 일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죠? 맞습니까? 그럼 어떤 사람들은 그럴 거예요. 세상 교회를 다니는 종교인들은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신자가 그런 나쁜 짓을 할 수 있어? 속여 빼앗는 악행을 저지를 수 있지?’라고 할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실체를 한 번도 들켜보지 않은 사람들이에요.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죄성들이 자기 속에 꼭꼭 감추어져 있을 뿐이고, 기회만 있으면 얼마든지 행동으로 나올 수 있어요. 자기를 속이고 있을 뿐이지요 그렇게 종교행위를 하면서 자기기만에 빠져있도록 내어버려 두는 것이 심판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앞서 말씀드린대로 주께서 준비하신 사건들을 통해 자신의 자격없음과 불가능을 철저하게 폭로 당하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의 현재성이에요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어요. 너희가 율법을 오해하고 있구나.. 율법은 너희가 지키라고 주신 게 아니란다.. 내가 증거를 대볼까?.. 너희 마음속으로 한 번이라도 음욕을 품지 않은 사람 있어?.. 형제를 미워해보지 않은 사람 있어?.. 없잖아.. 너희 모두 연쇄살인범들이야..
이게 산상수훈이에요. 그러니까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눈, 귀, 입으로는 천국 못 간다는 게 산상수훈이에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눈 빼고 지옥 안 가는 게, 손목 자르고 지옥 안 가는 게 낫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이 산상수훈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단 말입니다. 간디같은 사람은 아침에 눈을 뜨면 산상수훈을 읽었다고 해요. 그에겐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진의가 안 보이는 거예요. 똑같은 성경인데, 성경 문자층 밑에 있는 진리가 안 보이는 것이에요. 이게 예수님과 관계를 가지지 못한 자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의 저주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그렇게 오해할 수밖에 없어요.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치기도 하죠. 자신의 불가능을 한 번도 들켜보지 못한 사람들이 현대의 교회인들이에요. 말씀을 세상 윤리, 도덕 수준으로 생각하고 도덕적 행함을 하나님의 뜻으로 오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도덕적 실천 정도를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것 아무리 행해도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해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같은 거룩이란 말입니다.
오늘날 대부분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건 그런 수준이에요 구약 율법 가운데 제사법, 정결 규례법 등은 없어졌지만 윤리 도덕법은 아직 유효하기 때문에 신자는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착함을 그런 정도로 아는 겁니다. 율법의 요구가 어떤 것은 십자가로 도말되었고 어떤 것은 아직 유효하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불완전한 거잖아요. 그렇게 십자가의 다이루심을 부정하고 그 십자가의 공로에 자꾸 인간의 행위를 보태려고 하는 것 이게 바로 사탄의 궤계입니다. 모든 종교인들이 원하는 것을 사단이 알고 교회로 하여금 그것을 부추기게 만든 것입니다. 그렇게 이천년간 사탄이 펼쳐놓은 거대한 그물망에 세상교회들이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모두 율법적 행함으로 오해하는 것이 바로 믿음 없음이에요. 그래서 성경에서 믿음이 등장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우리의 행함은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런데도 외적 행함이 많이 나타나는 것을 믿음 좋은 것으로 다들 알고 있잖아요 성경 많이 읽고 기도 많이 하고 교회 봉사 많이 하고 전도 많이하면 믿음 좋은 사람으로 인정한단 말이지요 그러나 그런 거틍로 드러난 행위를 성경은 외식이라고 합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어떤 사람처럼 막살아도 된다는 게 아니에요. 우리 아담에게서 난 인간들은 막 살든 막 살지않든 그것을 선택할 자유도 없습니다. 이 말은 모든 인간은 다 막살고 있다는 거예요. 자기를 위해서 사는 모든 삶이 막사는 거란 말입니다. 그게 로마서에서 말하는 육신대로 사는 거거든요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나 막살라고 가르치는 건 또 다른 문제예요.
막사는 것도 자기를 위해서 막살지 않는 것도 자기를 위해서인데, 그런 인간 중에서 주어가 바뀐 사람들이 생긴 거예요.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께 소유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들의 모든 행위가 자기가 아닌 주를 위한 것들로 바뀐 사람들이에요. 우리는 여전히 자기를 위해서 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주를 위해서 사는 인생으로 바꾸어버리셨어요.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약속이 그들 인생에 작동하면서 그들은 모두 세상과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세상과 다른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모든 사고와 행위를 주를 위한 것을 하나님이 여겨주시는 겁니다. 그것이 주 안에 있는 자들의 자유이며 행복이에요 이게 세상과 다른 점이란 말에요. 여러분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사는 게 있습니까? 더 착하고 더 의롭습니까? 그렇지 않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달라요. 아까 제가 말하길 영역의 문제라고 했잖아요. 이미 여러분은 본의 아니게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진 사람이에요. 결코 정죄함이 없는 그리스도 안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은 다 주 안에서 의롭고 거룩합니다.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이 다 주를 위한 것이에요. 여러분에게는 십자가로 하나님의 약속을 다 이루신 주가 계신 것입니다.
(롬 14장)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8절의 ‘없도다’라는 말은 선언입니다. 그렇게 살아야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니에요 이미 너희들은 예수의 피로 사신바 된 주의 것이라는 선언이란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주가 계십니다. 원치않는 길로 띠 띠어 끌려감을 당하면서 그분이 누구신지를 평생 알아가고, 마침내 그분을 사랑하게 되는 게 우리의 신앙생활이고 인생입니다.
내가 착한 일을 많이 하고 하나님을 잘 섬겨서 의로워지는 게 아니에요. 우리의 모든 행위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즉 선이 된 자들이 성도입니다. 그들만 십자가 지신 예수가 이땅을 다녀가신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 마침내 그분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런 사랑 안에서 성도는 율법 행위로 자기를 가두지 않는, 종교행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입니다. 그들의 인생에 주님이 계시기에 그들 인생을 그들 원하는대로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게 주의 종이 된 자유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이런 자유입니다. 무엇이든지 해도 되고 무엇을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는 무엇이든지 가하다고 합니다. 성도는 무엇을 하든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입은 자이기 때문에, 즉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있기 때문에 이미 죄와 상관없는 자가 된 것입니다. 죄의 권세 아래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진 그 현실입니다.
이렇게 예수 믿음은 선악의 율법 행위로부터 자유 하게 된 것이고, 또한 그리스도의 법, 성령의 법, 은혜의 법을 적용받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게 현재적 구원이에요.
성도에게는 이렇게 다른 세계와 다른 현실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과 세상에만 고정되어 있던 시선이 다른 현실, 다른 세계로 차츰 옮겨지는 것을 두고 소망으로 구원 얻었다고 합니다. 우리 안에 소망으로 채워지고 우리 눈이 이 땅에서 하늘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롬8:24-25)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