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죽고 싶다는 말을 했다. 정확히는 죽을 것 같다는 말이었던 것 같다.
죽음에 대해서는 나도 줄곧 화두로 간직해왔었는데 막상 녀석의 입(메신저였으니 정확히는 손)을 통해 들으니
그 단어가 매우 낯설었다. 마치 생판 모르는 남이 씹던 껌을 받아 내 입으로 씹는 기분 이랄까.
혼자서는 잘 씹던 게 누군가를 통해 내 입으로 들어왔다. 이건 정말 당장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양치질을 몇 번이고 하고 다시 입을 수 차례 게워내도 시원치 않을 판이었다.
이러쿵 저러쿵 누가 뭐라 했든 간에 적어도 내가 아는 이 친구는 진취적이고,
사회에 대해 나름 명민한 생각과 시각을 갖고 있었고, 자신감에 넘쳐있는 등등
굳이 이런 수식어를 붙이지 앉고 간단히 말하면 그런 말을 할만한 화상이 아닌 사람이었다.
분명 이 죽고 싶다 와 같은 류의 말은 언젠가 누군가들에게 꽤나 여러 번 들었던 말들이었는데,
그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아팠다. 만약 모니터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친구가 내 눈을 보고 이 얘길 꺼냈다면 그 녀석을 껴안고 울었을지도 모른다.
(술을 들이키지 않은 맨 정신으로도 말이다.)
실제로 모니터를 보면서 내 눈엔 눈물이 맺혀있었다. 그만큼 참담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좀비같다는 것이었다.
수 많은 좀비들이 세상을 활보하면서 아직 사람인 사람들을 물어 그들도 똑같이 좀비로 만들어 버리는 악순환.
그리고 우리 친구들-철 없던 꼬꼬마 시절부터 이런저런 이유들로 모여들어,
지금은 꽤 진한 감정적 유대를 공유하는 이들-도 그런 좀비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에 친구는 더욱 괴로워했다.
그렇다. 친구 말대로 청백리 검사도 스폰서를 받는 사회,
즉 성공적인 검사=basic능력+스폰서+etc라는 공식이 버젓이 통용되고 아무도 그것을 나무랄 수 없는 곳.
싱가포르는 4세 때 바이올린과 놀았고, 10세 때 뉴욕필하모니와 협연을 했으며
지금은 전세계를 누비는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바네사 메이를 배출했지만,
우리는 3세 때 바이올린을 잡아 8세 때 줄리어드 음대 예비학교를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다녔고,
10세 때 역시 웨인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했던 ‘천재가 될 뻔했던’ 유진 박을
수년간 등쳐먹고 감금, 폭행했으며, 어딘지도 모를 동네로 끌고가 무대 구석에서
초라하게 연주를 하게 만든 사기꾼을 배출했다.
이러한 좀비들이 널려있고, 그들은 세상 구석구석에서 돈 아니면 권력으로 간단히 압축될 수 있는
‘그들만의 진리’를 좋은 학교를 나와야 해, 놀지 말고 공부해야 해, 세상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야'
등등의 말들로 보기 좋게 포장을 해놓는다.
죽음을 얘기한 이 친구의 친구이자 나의 친구이며 위에서 말한 우리 친구들에 포함되는 어떤 친구가 예전에 이런 말을 했다.
자신의 인생관을 정립해준 한 줄의 말이 있다고,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선 지금 해야만 하는 것을 해야 한다.’ 출처는 ‘탐그루.’
우리가 꼬꼬마 때 대유행 했던 유명 판타지 작가의 야심작이다. ‘지금 해야만 하는 것? 그게 뭔데?’ 라는 물음에
그 어떤 친구는 토익, 자격증, 토플, 기타등등 자기계발을 위한 공부를 열거했고,
‘하고 싶은 건 뭔데?’라는 물음엔 ‘나이 먹어서 조그만 카페나 바’라는 대답이 나왔고,
주저리 주저리 이어지던 이런 소논제는
‘그걸 위해 앞에서 말한 토익, 토플, 기타 등등이 필요한 건가?’라는 물음과 ‘그럼 대체 그 해야만 하는 것은 누가 시키는 걸까?’ 라는 물음을 기폭제로
문과vs 이과의 사고 방식과 세계관 차이라는 거대 논쟁으로 불이 옮겨 붙었었다.
말이야 판타지라고 하지만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 지금 해야만 하는 것을 하라’는 말로 미루어 볼 때
실은 탐그루는 실제론 대기업 사장이나 회장 부류의 사람이 썼을 법한 사회 실용서가 아니었을까?
저자는 작가가 아니라 거대한 부를 축적한 그 어떤 벤처기업의 사장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 이 어떤 친구도 나에게 죽음이라는 말을 했던 그 친구 입장에선
좀비로 변할 싱크로율 99.9프로인 친구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도 인정했듯 자신도 좀비가 될 수 있다는 공포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악하다라는 판단마저도 할 수 없는 사회악 그 자체인 좀비가
이 세상을 활보하며 아직 사람인 자들을 물어서 감염시키는 상황. 그야말로 공포가 아닌가?
이런 세상이라면 나부터 당장 자결을 해버릴 것이다.
실은 내가 바로 그 좀비의 왕이다. 그러니까 스폰서 찾기에 눈이 벌겋게 충혈된 그 검사이고, 유진 박을 거쳐 소녀시대,
심지어는
열심히 구상하는 그 사기꾼이며, 가출한 길거리 십대들을 잡아다 유린하고
화류계로 팔아 넘기는 파렴치한이라는 것이다. 나를 위해 조금 합리화를 하자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런 파렴치한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이 좀비면 나도 좀비고 그렇다면 너도 좀비, 좀비들로 넘치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단지 좀 B형인 적극적인 좀비, 혹은 A형의 소극적인 좀비,
그냥 좀비 같은 O형 좀비, 좀비인지 또라이인지 알 수 없는 AB형 좀비 등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이 분류가 신통치 않다면 MBTI든, 별자리든 어떤 분류라도 좋다)
그러니까 꾸역꾸역 서로를 등쳐먹으며 살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만약 세상이 정말 감염된 좀비와 아직은 순수한 사람들의 양립이라면
지금 당장 아직 감염되지 않은 사람들은 치열하게 그들과 싸울 태세를 하거나 그저 공포에 떨다 도망 다니고 있을 것이다.
(물론 좀 거친 학자들 혹은 음모론에 경도된 이들, 종교인들 일부는 사회 자체를 이런 시각으로 바라보고
싸움을 종용하거나 신세계로 떠날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에서 그런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왜일까?
우리가 좀비가 아닌 모두 사람이기 때문이다. 드물지만 가끔은 ‘그 까짓 돈 따위’라고 외치면서
전 재산을 훌렁 기부하는 김밥할머니나 쪽방할머니,
전남 XX군 군청에 현금 수 억원이 든 박스를 던져 넣으며 역시 ‘그 까이 현금다발 따위’를 외쳤을 법한
익명의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을 보면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이지 않은가?
그리고 이러한 행동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곳곳에서 나타나고 곧
다른 선행의 불씨를 퍼뜨리고 있지 않는가?
돈과 권력으로 관통될 수 없는 이들이 가진 진리는 대체 무엇인가?
이런 X와 같은 때엔 파시즘이 필요하다며 차라리 전쟁을 일으키고 싶다는
털 끝의 진심도 담기지 않은 친구의 말에 난 을사오적을 처단하기 위해 모인 옛사람들처럼
암살단을 조직하는 것은 어떤가라고 말했다.
물론 그의 말대로 암살단 따위로는 이 세상을 바꾸지도 못하고
역사의 한 구석에서 이름만 연명하겠지만, 설령 전쟁으로 좀비였든 사람이었든 그런 말종들이 사라질 수 있다 해도,
그래도 어디선가 ‘그 까짓 돈 따위’ ‘그 까짓 권력 따위’를 외치며
이번엔 어느 곳에 내 평생의 돈을 이 힘을 쏟을까 고민하는 우리의 할머니들 익명의 그들까지
고통당하는 것은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젊은 시절, 그 몇 십 년을 감옥에서 보냈던
나라면 자신을 그렇게 만든 세상에 대한 원한을 간직한 채 불행했던 한 범인으로 살았겠지만,
그 분은 그 곳에서 수 십 편의 편지 글을 남겼다. 그리고 그 대가의 글은 나 같은 범인에게 깊은 종소리 같은 울림을 준다.
극한의 고통, 절망과 고독에서 자신이 삶을 연명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곳에서 겪었던 사소한 기쁨이었다는 것이다.
‘땅을 파고 묻혀 죽고 싶을 정도의 침통한 슬픔에 함몰되어 있더라도.
참으로 신비로운 것은 그 침통한 슬픔이 지극히 사소한 기쁨에 의해 위로된다는 사실이다.
큰 슬픔이 인내되고 극복되기 위해서 반드시 동일한 크기의 커다란 기쁨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작은 기쁨이 이룩해내는 엄청난 역할이 놀랍다.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커다란 기쁨이 작은 슬픔으로 말미암아
그 전체가 무너져내리는 일은 아무래도 드물 것이라 생각된다.
슬픔보다는 기쁨이 그 밀도가 높기 때문일까. 아니면 슬픔이든 기쁨이든
우리 모든 정서는 우리의 생명에 봉사하도록
이미 소임이 주어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이렇게 길고 장황하게 썼지만 난 누구보다도 그 친구가 실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임을 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적어도 나보다는.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 일류대에 들어가 대기업에 입사를 하고
보기 좋게 IMF 여파로 정리해고를 당했으며, 아내와도 이혼한 주인공에게 친구 성훈은 이렇게 말한다.
‘넌 9회말 투아웃 투스트라이크 쓰리볼의 상황에 서 있었어. 그리고 마지막 공이 네게로 왔지.
넌 그 공이 스트라이크라고 생각을 했겠지. 물론 심판도 그렇게 선언했고. 어차피 그 심판도 세상과 한 통속이니까.
그런데 그거 알아? 그 공은 스트라이크가 아닌 볼이었다는거. 즉, 투스트라이크 포볼이었지.
그러니까 인상구기며 거기 쓰러져 있지 말고 어서 1루로 달려가서 좀 쉬라고!’
–
군데군데 쓰러져 있는 이 시대 많은 사람들에게 성훈처럼 논리도 앞뒤도 맞지 않은 말이더라도
참말같은 그 말을 해줄 사람. 김밥할머니와 같은 행동으로라도 보여줄 숨겨진 성인과 현인들은
내 머리카락 수 만큼은 된다고 본다.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했던 소돔과 고모라처럼
지금의 세상이 그랬다면 그리스도는 벌써 이 땅에 와서
세상의 군상들을 일렬 종대 내지는 일렬 횡대로 세워놓고(지구는 둥그니까. 온세상 사람 다 만나려면..)
하나하나를 심판하고 있을 것이다.(지극히 기독교적 관점에서말이다.)
이제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지금의 심정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물론 나 좋자고 썼다. 그런데 다른 한 편으론 나에게 죽음을 언급하며
세상을 등지고 죽든지 떠나든지 등등을 설파한 그 친구.
그 녀석이 이 글을 보고 ‘뭐야 이거 이딴 걸 글이라고 썼어? 아직 부족해 부족해.’ 라며
그 특유의 빈정거림을 보여주었으면 하기를 바란다. 물론 나는 발끈하지만 넉살 가득한 그 친구는
실은 내가 달려가면 언제든 따듯한 라면을 끓여주고 밤새 소설 나부랭이든 사회비판이든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리를 정말 씨나락을 까먹으면서 하든 간에 마음 대 마음을 나눌 것이다.
그리고 그의 건투와 건승을 빌며, 조만간 나도 어디로 떠나든지 사회와 맞짱을 뜨든지 결판을 낼 것이다.
아, 참고로
‘작은 기쁨에 대한 확신을 갖는 까닭도, 진정한 기쁨은
대부분이 사람들과의 관계로부터 오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것이 만약 물(物)에서 오는 것이라면 작은 기쁨에 대한 믿음을 갖기가 어렵겠지만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믿어도 좋다.
수많은 사람을 만날 것이기 때문이다.’ –
또 참고로 난 지금 몹시 외로운 상태이다. 사람이 그립다는 말이다.
라면도 좋지만 ‘돈 그 까잇 거를 외칠 법한’ 그런 김밥할머니 혹은 쪽방할머니께서 끊여주시는 된장찌개가 그립다.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의 사장이 삼성타워 스카이 라운지에 데려간다 할지라도, 그 된장찌개의 감동보다는 못할 것 같다.
아, 물론 할머니가 아니라 내 또래의 젊은 여자라면 더더욱 좋을 것이다.
내가 만약 천체를 짊어지던 아틀라스처럼 이 세상의 모든 걱정, 근심, 증오마저도 다 내 몫이네 하면서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을 때, ‘그 까잇꺼 좀 저 쪽에 치워버리고 이 된장찌개와 김밥 좀 같이 먹을래?’하는 그런 여인 말이다.
이상형 제대로 확립했다.
시장에서 우리를 위한 ‘양질의 된장찌개’를 위해 호박과 멸치를 고르는 그녀의 눈빛이 유난히도 그리울 새벽이다.
나? 물론 그녀의 시장바구니를 들어주며 동행하고 있겠지..이건 정말이다.
첫댓글 좀 길지만 제 친구에게 개인적으로 보내면서 이 곳의 동문들과 함께 읽고 느낌을 나누고 싶군요. 방학이니 이런 문제에 대해서 한번쯤은 고민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글을 잘쓰시는군요 좀비라...저도 외로움을 탈출하고싶습니다 ㅎ
깊은 글이군요. 저도 깊은 사색이 필요한 때입니다. ㅠㅠ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느낌이 좋네요..
크항 'ㅅ'
난 참 행복한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