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고린도전서 7:1-24
1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2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3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4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6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니라
7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8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9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10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리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11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12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13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14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15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16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할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18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19 할례 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20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4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오늘 본문에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행복한 부부 생활 지침서? 행복한 가정? 아니면 정욕의 절제? 자유인으로 산다는 것? 이 말씀을 표피적으로 읽게 되면 이런 내용으로 이해하게 되죠?
오늘 본문도 1장에서 말한 대로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과 구원함이 되신 예수님에 관한 복음이라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라는 복음을 이야기하던 바울이 갑자기 7장에서 결혼, 부부관계, 행복한 가정, 대인관계.. 같은 일상생활에 대한 처세술을 가르치려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1장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이야기하던 사도가 갑자기 결혼생활이나 세상 처세에 관해서 이야기하지는 않을 거잖아요. 7장의 말씀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알기 위한 결혼이요, 남과 여의 관계요, 주종관계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주되심을 아는 게 곧 하나님의 영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하는 것은 편지를 쓴 사도 바울의 관심은 세상 사람들과 다르고, 또 사는 현실도 다르다는 사실이에요.
그래서 진리의 영이 없는 세상 사람들이 이런 편지를 읽게 되면 오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세상 교회 역시 세상이다 보니 이런 말씀을 가지고 엉뚱한 소리들을 합니다. 본문의 단어를 그들처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 진의를 알 수 없습니다. 남자, 여자, 음행, 의무, 결혼, 정욕, 절제, 거룩, 화평, 구원 등의 단어는 사전적 의미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가령 음행이라는 말도 남녀 사이의 성관계나 불륜의 의미가 아니에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다 음행하는 자입니다. 이게 성경의 진술이에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나라도 이제는 간통으로 인한 처벌이 없어졌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남녀 사이의 성행위나 부도덕한 관계에 대해서 국가가 처벌하는 게 시대정신에 맞지 않다는 거예요. 그래서 간통죄 자체가 없어졌습니다. 그렇게 윤리, 도덕이나 사회법 등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고 없어질 수도 있어요.
그런데 생명의 문제, 진리의 문제를 다루는 사도가 기껏 그런 남녀 간의 문제나 세상 윤리, 도덕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런 편지를 썼겠습니까? 그런데도 세상 교회들이 이런 본문을 윤리적인 문제로 설교하니까 한심하다 못해 통탄할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다는 말이 바로 이런 종말에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이런 건 모두 자기기만에서 나온 비 복음적인 성경 해석입니다. 쉽게 말하면 인간 중심의 인본적인 구원론에 바탕한 신학과 교리에 갇힌 게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인 것입니다.
자, 차치하고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이 기록된 배경부터 먼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고린도 지역에는 헬라 철학의 이원론이 넓게 퍼져 있었습니다. 그 이원론이 교회에까지 들어왔어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헬라적인 이원론이란 물질은 악하고 더럽고 정신은 선하고 고귀하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이 신의 영역에 더 가깝다고 보는 거예요. 여기에서 금욕주의와 쾌락주의가 나왔습니다. 이런 이원론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가 초대교회 때부터 교회에 침투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들의 서신에도 보면 영지주의에 대한 경고가 여러 차례 나와요. 초대교회 영지주의자들은 육체로 오신 예수는 가짜라고 가르쳤어요. 예수님은 육신의 껍데기만 일시적으로 보인 것이고 진짜 우리 인간과 같은 육체로 오신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도 진짜 죽음이 아니고 우리 눈에 죽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쇼였다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 4:2-3) 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 신의 간계가 참 놀랍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가리기 위해서 먼저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 사람과 같이 되신 것부터 비틀고 부정합니다. 이러면 십자가 죽음 자체가 왜곡되죠. 그래서 고린도 교회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때 교회 안에 헬라적인 이원론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두 패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금욕주의자들과 쾌락주의자들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의 기록을 보면 음행을 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금욕주의자들도 있었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과 같은 질문이 나온 겁니다. 1절을 보면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이라고 하는데, 이건 바울이 편지를 쓰기 전에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바울에게 질문을 했다는 뜻입니다. 이런 문제로 교회 내에서 다툼이 있자 사도에게 질문한 것인데, 그게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하는 게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하는 거예요. 이제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이 나오게 된 이유를 이해하시겠죠? 복음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결혼 문제, 이혼 문제가 나온단 말이에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오해할 만하게 답변합니다.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라고 하는데, 그럼 모든 사람이 독신으로 사는 게 더 좋다는 말입니까? 그게 아니라 사도 바울이 한 말의 전체적인 논리는 ‘지금 있는 그대로 지내라’입니다.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8절),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17절),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24절)라고 해요. 이게 결론이에요.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고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 합니다.
세상이 규정한 어떤 것에도 매이지 말라는 겁니다. 자유 하라는 거예요. 결혼하든 안 하든, 이혼하든 안 하든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 받은 은사대로 어떤 사람은 독신으로, 어떤 이는 결혼한 상태로, 어떤 이는 이혼한 채로 그렇게 살면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사는가에 있는 게 아니라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무리, 즉 성도로 사는 것에 중점이 있다는 말입니다. 너희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알라는 것이죠. 결혼하고 안 하고가 문제가 아니라 너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거예요. 유월절 어린양 그리스도의 희생을 아는 자로 세상 속에서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사는 게 하나님의 뜻이지 결혼하고 안 하고, 이혼하고 안 하고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 자신과 같이 결혼을 안 하고 사는 게 좋다고 합니다. 우리의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성도는 하나님과 결혼한 사람인데, 범죄로 인해서 잠시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이혼한 상태로 있어요. 그러니까 그런 너희가 결혼하고 안 하고에 얽매이지 말라는 겁니다.
에베소서 5장의 말씀처럼 성경적인 결혼의 목적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배우는 결혼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서로 체휼하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가지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정욕을 절제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어서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는 겁니다. 한 마디로 우리 수준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젊어서는 모두가 결혼에 대한 환상을 가지죠. 행복하고 아름다운 결혼생활에 대한 환상입니다. 그런데, 살아보니 어떻습니까? 결혼생활이 그렇게 행복합니까? 수십 년 살다 보면 환상은 깨지고 정 때문에 산다고 하죠. 제가 아는 어떤 여자분 명함에는 남편 이름도 같이 새겨져 있는데, 남편 이름 옆에 ‘평생 원수’라고 해놨더라고요. ㅎㅎ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남녀가 만나서 결혼하는 것까지는 별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그 결혼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비밀을 알지 못하면 아무 의미 없는 결혼입니다. 그런 결혼을 통해서 자식을 생산해봐야 세상에 죄인 하나 추가하는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제 말이 아니라 성경의 진술이에요. 오죽하면 자식을 낳으면 속죄제를 드리게 했어요.(레 12:16) 그것도 딸을 낳으면 두 배, 즉 두 이레 동안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여자가 먼저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인간 세상을 보시는 시선입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윤리, 도덕적인 결혼생활, 성적 욕구의 절제, 종교 행위로 성결 지키기 등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주신 게 아닌 겁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지난번 강론 제목처럼 ‘너희 몸이 누구의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고, 이것을 계속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의 몸은 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한 몸 된 지체, 곧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의 몸임을 생각하면서 오늘 본문을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 성도가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한다는 건 그에게 주가 계심을 부정하는 게 됩니다. 그런 상태가 창녀입니다. 주가 없는 상태, 주인이 없는 상태, 남편이 없는 상태, 매임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음행을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고전 6장)
16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18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분명하죠? 우리 몸은 그리스도께서 피로 사신 바 된 그의 소유 된 몸임을 우리는 너무 자주 잊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시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되어 살아가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본문을 우리 교회에 다시 확인하라고 주신 겁니다. 과연 너희의 몸을 주님의 것으로, 주님의 뜻대로 사용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느냐.. 그것을 설명하고 가르치는 것 중의 하나가 결혼생활이라는 말입니다. 부부가 어떻게 자기 몸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사는가.. 하는 것을 지금 사도가 말하고 싶은 겁니다. 한 마디로 유니온 크라이스트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 예수의 씨 심는 죽음에도 연합된 교회라면 세상 사람들의 부부관계나 결혼이나 이혼 문제에 매이지 말고 자유 하라. 너희의 주가 누구신지, 너희의 진짜 신랑이 누구신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게 바울 사도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교회는 하나님의 신부 된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여성명사입니다. 그런 너희는 이 세상의 풍속이나 이 세상의 가치나 윤리, 도덕에 갇힐 수가 없다.. 세상 사람들처럼 나의 유익과 나의 행복을 위해서 내가 판단하고 내 것으로 소유한 것들로부터 자유 하라,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그게 설사 나에게 손해되고 불리한 것일지라도 이 세상 보이는 현실이 아닌 다른 현실을 보라는 거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실 때도 세상 사람들과 아무 접점이 없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인자는 이 세상에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교회)라면 태생적으로 이 세상과 섞일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 다른 현실을 살아야 하는 너희가 세상과 같이 결혼, 이혼, 음행, 직장생활, 장사하는 일 등에 얽매이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것이 된, 그리스도의 소유된 성도의 현실을 살아갈 수 있기를 사도가 편지를 통해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사신 게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여기서 영광을 돌린다는 건 날마다 홀리홀리하게 살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인지 빌립보서를 보겠습니다.
(빌 2장)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과의 약속대로 죽기까지 십자가에서 순종하신 것,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를 우리가 주(아도나이= 하나님)로 시인하는 것, 그리고 그 이름 앞에 무릎 꿇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씀에 뒤이어 7장 내용이 나오는 겁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한 후에 그 설명으로 나오는 게 7장의 말씀이에요. 그들이 질문한 대로 음행을 하고 안 하고, 금욕을 하고 안 하고, 결혼을 하고 안 하고의 문제와 상관없이, 종이냐 자유자냐 하는 세상 현실과 상관없이 그들에게는 주가 계신다는 다른 현실을 이야기하고 싶은 겁니다. 그 다른 현실을 보지 못하고 왜 세상과 똑같이 휩쓸려 가고 있느냐..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 해라... 너희가 결혼하든 이혼하든 무엇을 하든 이미 묵시 안에 이루어진 다른 현실을 배우기 위한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네가 누구의 것이고 누구의 몸인지를 배우기 위해서 부부 생활, 직장생활이 있다는 말입니다.
부부가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은 각자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모두 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이런 문제는 단지 성적인 문제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결혼생활 전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질서란 말입니다.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이듯이 성경이 말하는 한 가정의 주인은 남자입니다. 구약을 보면 사라가 아브라함더러 ‘나의 주여’라고 해요. 하나님이 여자를 먼저 지으신 게 아니라 남자를 먼저 지으셨다니까요. 이게 창조의 질서예요. 그런데 현대인들의 가정생활에서는 이 질서가 거의 다 깨져버렸습니다. 결혼생활을 통해서 자기 몸을 자기가 주장하지 못한다는 게 바로 그런 뜻이에요. 직장생활을 해보신 분은 잘 알겠지만, 하루에도 열두 번씩 때려치우고 싶은 게 직장생활이잖아요. 그렇지만, 내 가족을 위해서, 내 자식을 위해서 참는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내 마음대로 살지 못하도록 하는 가족이 있다는 게 감사한 일입니다.
그럼 그런 결혼생활에는 문제가 없는가? 결혼했다고 해서 음행을 저지르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깨끗하다, 인품이 훌륭하다, 신앙이 좋다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음행.. 음행이라는 게 단순히 불륜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가장 큰 음행은 자기 사랑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게 음행이에요. 이게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게 불륜이요 간음이요 비도덕적 행위들입니다. 우리 안에 꼭꼭 숨겨져 있는 간음, 살인, 도적질이 환경과 조건만 주어지면 언제라도 나타나는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의 그 몸으로는 천국 못 간다고 하셨어요. 몸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에요. 선악과 따먹은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이 몸은 모두 자기중심의 선악 판단을 하는 몸이기 때문입니다. 내게 유익 되는 건 다 선이고, 내게 해로운 건 다 악이거든요. 그런 선악 체계가 장착된 몸으로 천국에 가면 그 천국도 지옥이 돼요.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을 보는 눈부터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눈을 먼저 빼고, 우리의 손모가지를 먼저 다 잘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그렇게 눈 빼고 손 자르면 천국 갑니까? 그런 뜻이 아니죠. 이 말의 뜻은 너희의 구원은 너희의 소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너희가 죽었다가 깨어나도 갈 수 없는 천국, 얻을 수 없는 영생을 내가 너희에게 거저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죽음 바꿔치기입니다. 너희가 죄의 삯으로 죽게 되는 죽음을 하나님 언약의 죽음, 십자가의 죽음으로 바꾸어주시는 거예요.
제가 오늘 아침에도 카페에 글을 올리고 왔는데, 오늘날 현대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의 언약의 죽음, 그 십자가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 우회하는 기독교, 죽음 없는 기독교, 하나님의 저주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기독교라는 것입니다. 교회 설교의 대부분이 죄 이야기, 심판 이야기, 저주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자기 존재를 증명해주는 액세서리일 뿐이에요. 목에 걸고 차에 붙이고 다니는 그런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수님 죽음 안으로 자기 사람들을 불러들이시겠다는 겁니다. 이게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 기도입니다. 그 죽음 안에서 예수님 부활의 생명도 같이 나누어지는 게 영생이에요. 그렇게 예수님의 소유가 된 그리스도인들, 예수님의 관리를 받는 자들은 어떤 환경에 있든지 어떤 인생을 살든지 그 모든 게 합력해서 하나님의 선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그 인간 안에는 먼저 언약의 피가 전제됩니다. 성자 예수님의 피가 뿌려진 자들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성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그 안에 전제되는 것입니다. 그게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하나님의 선’입니다. 골로새서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죠.
그래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게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그럼 거꾸로 생각했을 때 이 세상 신이 무엇만 가리면 됩니까? 예수님의 죽음만을 쏙 빼버리면 되는 거예요. 자크 엘륄은 예수님의 죽음이 없는 기독교를 가리켜 ‘뒤틀려진 기독교’라고 했습니다.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인간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시선, 우리의 마음을 세상과 우리 자신으로부터 예수님께로 돌리게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순종, 다 이루신 약속으로 우리의 눈과 마음을 돌려 바라보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만 오늘 본문이 이해되고 적용됩니다.
세상 종교인들에게는 오늘 본문이 오해하기 딱 좋은 말씀이에요. 성경 전체가 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오해하라고 주신 말씀이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교회를 다니는 종교인일수록 그들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예수 믿기 전보다 자유가 더 없어요. 지키고 실천해야 할 게 많거든요.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 하게 하리라고 하셨는데, 자유 하지 못해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후인데도 율법에 매인 자들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입니다.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어요.
성경 문자 층 밑에 있는 진리의 층을 보지 못하고, 성경을 예수로 읽지 못하고 하나하나 지켜야 하는 법으로 아는 사람들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에요. 이스라엘이 이미 실패했잖아요. 하나님의 자기들에게 지키지 못할 법을 주셨을 리가 없다고 목숨 걸고 지킨 그들이 실패했어요. 율법이 가리키는 예수가 자기 백성들에게 오셨는데, 합심해서 그 예수를 죽여버렸잖아요. 그 이스라엘의 실패를 보면서도 오늘날 교회 교인들이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오늘 7장 본문을 대부분 세상 교회들이 윤리, 도덕적인 것으로 가르칩니다. 그래서 교회에 잘 나오던 사람들이 이혼하면 쪽팔린다고 나오지 않아요.
이렇게 무엇을 하든지 무엇을 보든지 말씀을 실천해야 하는 법으로 보기 때문에 성경을 지켜 의롭다함을 얻는 법으로 생각합니다. 구약은 그렇다 쳐도 신약 서신서들에 나오는 ‘하라’와 ‘하지 마라’도 법으로 봅니다. 그런데 서신서의 명령들은 지키면 구원받고 못 지키면 탈락이라는 뜻이 아니에요. 그럴 것 같으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헛것이 되죠. 그럼 뭐냐? 너희는 이미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들로 십자가 안에서 새로워진 피조물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말씀이에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이 몸은 우리가 관리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에게는 주가 계신단 말입니다. 결혼했든 안 했든, 이혼하든 안 하든 주님의 관리를 받는 몸이에요. 그래서 우리 몸이 무엇을 해도 하나님께서는 주 안에서 한 것으로 여겨주십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를 보고, 피로 빤 세마포 옷을 우리에게 입혀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입고 있는 주님의 피로 빤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 빛나는 세마포 옷을 두고 요한계시록은 우리의 옳은 행실이라고 합니다. 교회 충성하고 밥 퍼주기하고 선교하는 게 옳은 행실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로 빤 깨끗하고 빛나는 세마포 옷을 입은 것을 두고 옳은 행실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내 몸을, 내 인생을 자꾸 내가 다듬으려고 하지 마세요. 나 스스로 깨끗하게 하지 마시란 말이에요. 그건 자체 발광이에요. 그리고 그건 아무리 해봤자 금방 더러워집니다. 우리가 아무리 정수해도 수원지 자체가 오염되어 있어요. 선악과 따먹은 아담이 오염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정수해도 안 돼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 결론처럼 부르신 그대로 사시면 돼요. 그렇다고 막 사시란 말이 아니에요. 여러분을 침 삼킬 틈도 없이 다스리고 계신 주가 계시는데 어떻게 막 살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막 살라고 가르치는 그 사람에게는 주가 안 계신 겁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없다 보니, 즉 믿음이 없어서 예수를 안 믿으니까 막 살라는 말이 나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행위도 카운트하지 않으세요. 착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아예 카운트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서 어떤 기대도 하시지 않기 때문이에요. 우리를 고쳐 쓰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기셨어요. 그래서 그분이 중보자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이 계신다는 말이 그런 뜻이에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라고 합니다.
우리 구원은 원래 우리에게 있을 수 없는 겁니다. 원래 죄인은 구원될 수 없어요. 그런데 외부의 어떤 분에 의해서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죄의 권세 아래서 우리가 탈취당한 것이고, 그게 구원이에요. 우리가 여기에 협조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만약 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헛것이에요.
그러니까 마귀는 하나님이 다 이루신 그 일에 우리 것을 자꾸 보태게 해요. 그래서 세상 교회가 하나님의 원수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라고 자꾸 가르치니까요. 너희가 똑바로 안 살고 열심히 교회 봉사 안 하면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고, 탈락이 안 되더라도 나중에 천국 가면 상급이 다르다고 가르쳐요. 이게 모두 마귀 신학, 마귀 교리입니다. 이 모든 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영광의 광채를 가리고자 하는 데서 나온 겁니다.
막 사는 거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 몸을 깨끗이 하려고 고행하고, 수행하고, 수도하라는 뜻이 아니에요. 우리 인생에는 주가 계시는 거예요. 우리에게 의가 되시고, 거룩이 되시고, 구원이 되시는 그분이 우리 주님이에요. 바울이 말한 믿음 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선악과의 독성, 율법의 저주 같은 자기중심의 선악 체계로부터 자유 하게 되는데, 그것이 그리스도 안이라는 새로운 세계예요. 우리가 선택한 것도, 우리가 스스로 찾아간 것도 아닌데, 어느 날 보니 그리스도 안에 있더라는 말입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는 그리스도 안이에요.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씨가 있기 때문이에요. 다른 말로 약속입니다. 우리가 있기도 전에 하나님들끼리 하신 약속, 하나님들과 같은 존재, 그런 아들들로 영원히 함께 사시겠다는,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겠다는 약속, 그 씨가 심겨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 한 것 없이, 평생을 나를 위해 산 것밖에 없는데, 어느새 보니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놓으셨더란 말입니다. 눈을 떠보니, 내가 그분을 알고 나니, 성령을 받고 나니, 우리 몸이 주님의 십자가에서 육적 몸을 벗는 할례를 받고 나니 내가 비로소 다른 세계로 옮겨졌음을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구원은 영역의 문제입니다. 우리 행위의 문제가 아니고, 심지어 믿음의 문제도 아닙니다. 믿음이 잘못되면 믿음도 행위가 됩니다.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았다고 하면 그 예수 믿음도 행위가 돼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우리의 구원은 은혜입니다. 그냥 그분께서 강제로 옮겨놓으신 거예요. 더 강한 자를 결박하시고 우리를 탈취해가신 전리품, 십자가 전쟁으로 승리하신 그분의 전리품으로 우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이라는 세계에 있는 우리에게는 아예 정죄함 자체가 없습니다. 죄와 상관없는 신분이에요. 본래 죄란 건 없었거든요.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죄가 잠시 우리에게 허용된 거예요.
여러분이 잘나서, 똑똑해서, 믿음이 좋아서 죄의 권세 안에서 벗어나서 그리스도 안으로 찾아간 게 아니에요. 성도에게는 창세 전부터 약속이라는 씨가 있어서 처음부터 죄와 상관없는 신분으로 구별된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 전에 확정된 그것이 역사 속에서 우리 행위에 의해서 바뀔 수 없습니다. 그것을 확증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우리처럼 죄 있는 육신으로 오셔서 이 땅에 씨 심는 죽음을 죽으시고 우리에게 그것을 확증시켜 주셨어요. 그게 십자가예요. 그리고 우리는 그 죽음에 불가불 연합되었기 때문에, 그 약속이 우리에게 작동했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은 본의 아니게 세상과 다른 현실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갈라놓으셨어요. 아무리 이 세상을 사랑하려고 하고 이 세상과 섞여보려고 해도 안 섞인단 말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거룩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 삶에 역사함으로 해서 예수의 생명도 나타나게 됩니다. 이건 우리의 선택도 실천도 아닌 운명적인 것입니다. 약속이라는 말이 그런 뜻이에요. 창세 전에 확정된 약속이라는 게 성도들에게는 팔자입니다. 바꿀 수 없는 팔자예요.
그래서 본문에서 사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24절).. 이게 너희가 있어야 할 자리라는 겁니다. 비록 몸은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과 섞일 수 없는 하늘적 존재, 묵시적 존재로 이미 구별되어 있어서 무엇을 하고 어떤 모습으로 살든지 결혼하든 안 하든 이혼하든 안 하든 너희 자신을 기쁘게 하는 자가 아니라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로 살아야 한다는 선언입니다. 충고도 권면도 아닌 우리 신분에 대한 선언입니다. 세상 무엇도 너희를 가둘 수가 없고 예수 안에 있는 너희의 생명을 빼앗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주께서 부르신 그 자리에서 주와 함께 거하라. 오직 사랑 안에서 그에게까지 자라나는 게 하나님의 뜻이다.
(엡 4장)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세상살이가 현실이 아니라 이게 진짜 현실이에요. 여러분은 그 사랑 안에서 주님의 극진한 관리를 받으면서 지금도 자라나고 있습니다. 실감 안 되세요? 여러분이 알든 모르든, 느끼든 못 느끼든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지금도 빈틈없이 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을 부르신 그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먹이시고 입히시면서 가르치고 계신단 말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 잠자는 중에도 심장이 뛰는데, 그 심장을 여러분이 관리합니까? 아니잖아요. 여러분이 숨 쉬는 것, 걷는 발걸음 하나까지도 주께서 돌보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여러분의 자라남은 이 세상 교회에서 말하는 것처럼 믿음이 좋아지고, 성화되고, 깨끗한 자가 되어 죄도 안 짓는 천사 같이 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자라난다는 말은 진리를 안다, 복음의 진리가 나의 삶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 말은 나 같은 죄인이 구원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 때문이었다는 바울의 고백과 같습니다. 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내 속에 나오는 건 흉악한 죄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끄럽고 비겁하지만, 그럴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뒤로 숨게 되는 것, 나를 보지 않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게 되는 것, 이게 자라남이에요.
이런 자라남이 없으면 죽은 겁니다. 자라남은 생명 현상이에요. 생명이 있는 자들에게는 자라남이 있어요. 이런 자라남이 우리 성도에게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아니면 나는 안 되는 자가 맞구나.. 그 은혜의 필연성과 절대성만을 꼭 붙드는 자로 자라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그 은혜만 꼭 붙드는 자.. 이게 하나님의 완성이고 성공이에요. 세상이 보기에는 찌질이 같다 싶을지 모르지만, 세상의 눈으로 보면 실패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게 성도의 성공이고 하나님의 성공이에요. 십자가의 공로,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자로 자라나는 겁니다. 나에게는 더 이상 기대할 게 없음을 아는 것, 그래서 다시는 아담이 따먹었던 선악과를 안 따먹는 자로, 그건 정말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을 아는 자로 우리가 있어야 할 그 나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러분이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여러분의 속사람은 이 땅을 다녀가신 하나님을 아는 자로, 또 그 영광을 찬송하는 자로 지금도 자라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을 돌아보시란 말이에요. 그 걸음 하나하나마다 주님의 피가 뿌려진 것을 안다면 오늘 어떤 어려움이 있고 자신에 대한 어떤 실망이 있고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그 모든 게 다 우리의 거룩을 위한 것인 줄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희미하지만, 우리 주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그날에는 분명히 알 거예요. 그러니까 그날까지 잘 살아계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금방 지나갑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런 놀라운 사랑을 저희에게 부어주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저희가 살아났고 이제 저희에게 주가 계심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이 삶을, 이 인생을 다하는 날까지 그 사랑으로만 부족함이 없는 우리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 사랑을, 그 은혜를, 그 영광을, 그 찬송을 배우고 갈 수 있는 우리 인생살이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