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고린도전서 7:10-16
10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11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12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13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14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15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16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본문에는 혼인한 자들이 갈라서는 문제, 이혼에 대한 문제가 나옵니다.
요즘은 이혼이 일반화되어 크게 문제 될 것도 없는 세상이지요. 우리나라만 해도 결혼한 커플 세 쌍 중 한 쌍이 이혼한다는 통계가 있어요. 그래서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식들이 이혼하지 않고 살아주는 것만 해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결혼은 죄인들끼리 만나서 같이 사는 것이라서 충돌이나 갈등이 없을 수가 없어요.
결혼식 할 때는 검은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겠다고 서약하지만, 살다 보면 서로 원수 되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게다가 요즈음 젊은 사람들 생각은 옛날과 달라서 참고 살지 않습니다. 너 없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는 능력 있다면서 성질대로 갈라서지요.
그런데, 현대 사회뿐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도 이혼 문제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 19장)
3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5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7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8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10 제자들이 이르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
11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12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여기 보면 모세 율법이 나오죠? 예수님이 그러십니다.
(마 5장)
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시비를 거는 데는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신 24:1) 라는 모세의 율법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 왜 당신은 모세의 율법을 따르지 않고 이혼하지 못하게 하느냐고 시비를 건 겁니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이혼해도 좋으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당시 고대 사회에서의 여성의 위치는 그냥 남자들의 소유물이었습니다, 재산의 일부였어요. 그래서 같이 살다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에는 그냥 내버리면 됐습니다. 여기에 이용되는 게 모세의 율법이었어요. 이혼 증서만 써주면 끝이었죠. 예수님은 이런 인간들의 완악함을 고발하신 거예요.
살다가 마음에 안 들면 이혼 증서를 주고 내버리면 된다는 게 당시 유대 사회의 남성 우월주의였습니다. 이혼해도 율법대로 한다는 거죠. 이렇게 율법 본래의 정신을 무시하고 율법을 이용해 먹는 사람들이 소위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사회에 팽배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고르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걸 이용해서 부모를 돌보지 않고 내버리고 했었죠.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의 진의를 다시 가르치고 계십니다. 방금 읽은 32절을 보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하시죠? 너희는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과 뜻을 왜곡하고 있어서 다시 가르쳐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웃기는 건 예수님의 이 말씀에 제자들까지도 ‘그럼 차라리 장가들지 않는 게 좋겠나이다’라고 합니다. 이 말에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한 반발이 들어있습니다. 결혼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보다 차라리 혼자 사는 게 낫지 않느냐는 말이거든요.
이렇게 모든 인간은 자기밖에 몰라요. 제자이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해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끝까지 이방인으로 살다 가셨습니다. 유대인들과 같은 히브리어 아람어를 해도 알아듣지 못하니까요.
제자들이 못 알아듣자 예수님이 다시 설명하십니다. 누구나 독신으로 사는 게 아니라 타고난 고자가 있고 스스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고자 된 자도 있으니 받을 만한 사람은 받으라고 하십니다. 물론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지만 듣는 자들이 알아들을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으셨겠죠. 당시 유대인들과 예수님 사이에는 어떤 접점이 없었어요. 예수님의 현실과 세상 인간들의 현실은 층이 다르니까요. 서로 오갈 수 없는 층이란 말에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셔서 성령이 오신 후에야 제자들이 알아듣게 됩니다. ‘아, 그게 그 말씀이었구나’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예수님과의 관계가 생겼다는 뜻입니다. 이게 다른 말로 믿음이에요. 믿음 안에서 성령 안에서 서로 교제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바울, 성령을 받은 바울이 예수님이 가르치셨던 결혼과 이혼에 대해서 고린도 교회에 다시 풀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고린도 교회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 민족이기 때문에 그들은 율법을 알지 못하고 율법에 매일 필요도 없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보다는 자유분방해요.
본문 10절을 보면 여자가 먼저 나옵니다. 당시 헬라 사회는 여자도 남편이 싫을 경우 헤어지면 끝이에요. 그러나 바울 편지의 수신자는 일반 헬라인들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라는 특별한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고 하면서 남자든 여자든 갈라서지 않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갈라섰더라도 그대로 지내라고 합니다. 결혼이나 이혼이 중요한 게 아니라 결혼 생활을 통해서 배워야 할 게 따로 있다는 겁니다. 결혼 생활 자체가 본질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뭡니까?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배우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배우기 위해서 결혼도 하고 갈라설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이렇게 바울이 말하는 결혼의 관점은 일반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알아듣지 못하는 말씀을 하시는 것과 같아요. ‘교회야, 너희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느냐? 너희가 세상과 같은 것을 보고 있다면 니들은 교회 아니야’ 라는 말입니다. 종말을 사는 교회가 남녀의 문제, 결혼과 이혼의 문제로 어리석은 질문을 할 때가 아니라는 거예요.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7장 1절) 라고 한 건 누군가 사도 바울에게 질문을 했다는 것인데, 지금은 그런 어리석은 질문을 할 때가 아니라는 말이에요. 바울 편지의 결론은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지내라’는 겁니다.
여기에 대한 설명이 25절에서 31절에 나옵니다.
(고전 7장)
25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러운 자가 된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
26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27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28 그러나 장가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당시 헬라사회에는 헬라적 이원론적 사고 때문에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을 죄짓는 것처럼 생각하는 금욕주의가 있었어요. 그래서 바울이 장가가고 시집가는 게 죄짓는 게 아니고, 또 장가나 시집을 가지 않는다고 해서 옳은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중요한 건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성도요 교회라면 이 세상 것들이 전부인 양 생각해서 그런 것들에 매이지 말라는 거예요.
바울은 이렇게 세상과 세상에서부터 불려 나온 교회(에클레시아)를 정확하게 구별합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에서 ‘나는 위에서 왔고 너희는 아래에서 났다’고 하시면서 ‘내가 누구인 줄 모르면 너희는 죄 가운데서 죽는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셔서 이 땅에 하나님의 사람들, 즉 교회가 세워졌어요. 그러니까 그때는 예수님과 세상으로 나누어졌었지만, 지금은 교회와 세상으로 구분이 되는 거에요. 바울의 모든 서신에는 이렇게 세상과 교회를 철저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이걸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너희는 그냥 지내라, 세상 것들에 얽매이지 말고, 세상을 좇지 말고 위에 것을 쳐다보라.’는 말입니다. 지금은 종말이고, 세상의 외형은 다 지나가는 것들이니까 우리의 마음을 이렇게 가지라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고 말입니다.
지금 세상살이, 즉 결혼이든 이혼이든 장사하는 일이든 다 의미 없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종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끝났다는 거예요. 왜? 예수님이 창세전 약속대로 이 땅에 언약의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하나님 나라를 몰고 왔다.’고 하셨잖아요. ‘예수님의 약속대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셨다. 모든 세상과 역사는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있지 너희의 행복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니다. 너희가 그렇게 바라고 추구하고, 못 가져서 안달하고, 마치 내 것을 빼앗긴 것처럼 슬퍼하고 울고 하는데 (이것을 성경은 정욕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하십니다. 이제 이 세상은 끝났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의 기약이 이르렀으므로 너희는 그것으로 기뻐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너희가 진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누려야 할 것은 바로 그거라는 거예요.
(계 19장)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이게 진짜 현실이에요. 우리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이 현실 말고 진짜 현실은 따로 있어요. 그것을 볼 수 있고 그것을 누릴 수 있어야 성도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다 선악과 범죄로 인해서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들이에요. 그러나 이제는 우리 신랑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그의 피로 빤 깨끗하고 빛나는 세마포 옷을 입게 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들이란 말입니다. 이게 우리의 신분이고 정체성이에요. 우리가 잠시 하나님과 이혼한 상태로 세상을 살고 있지만, 그런 우리, 즉 진짜 신랑을 두고 세상과 간음하고 있는 고멜 같은 우리를 예수님께서 자기 피 값으로 사시고 깨끗하고 흠 없는 자기 신부로 완성하셨습니다. 그렇게 묵시 안에 여러분은 거룩하고 흠 없는 하나님의 신부로 완성되어 있습니다.
신랑 예수의 은혜와 사랑만 꼭 붙들 수밖에 없는 면목 없는 고멜들.. 이것을 계시록 19장 8절에서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한 것입니다.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란 착하고, 윤리 도덕적이고, 법 잘 지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 신랑이 입혀주신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말합니다. 바꾸어서 말하면 신랑 예수를 믿는 믿음이 바로 옳은 행실이에요.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성경에서 믿음이 등장하면 행위는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행위도 의로 여겨주시지 않는다는 거죠. 죄인에게서 나오는 것은 다 죄이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이 행하는 어떤 착한 행실과 의로운 일도 그 중심에는 내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주께서 입혀주신 그 세마포 옷을 입은 자들만 자신들의 행위를 기대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지금 고린도 교회에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현실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예요. 예수님처럼 성령 받은 사도 바울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수신자인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설득하고 알아듣도록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 성도 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알아듣게 되죠. 모든 성경이 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준 게 아니라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에 주신 겁니다. 그리고 그 교회가 아직은 세상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묵시 안에서 이루어진 진짜 현실, 영원한 현실을 안다면 지금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그냥 지내면 된다는 거예요. 세상은 금방 지나가니까. 이렇게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세상 끝에서 세상을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아담 안에는 그의 신부인 하와가 들어있는 겁니다. 여기서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아담이에요. 그러니까 아담은 여러 가지 역할을 동시에 합니다.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과 단절된 범죄한 아담도 있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모형으로 예수가 하실 일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 아담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그리스도에 관한 신학 서적들도 많이 있어요.
아담에게서 하와(여자)가 나왔다는 것은 여자가 아니면 아담이 온전치 않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 교회가 아니면 스스로 충만치 않기로 하셨다는 것을 아담을 통해서 미리 예표하셨고, 또 바울도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엡 1장)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같은 이야기예요. 그러니까 교회가 아니면 우리 주님이 충만하시지 않다는 말이에요. 바꾸어서 말하면 스스로 하나님이 안 되시겠다는 뜻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그런 존재들이에요.
그래서 에덴의 선악과 사건도 여자가 먼저 범죄함으로 아담이 죽음에 이르게 됨을 보여주므로 해서 유일한 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 된 교회는 죽음 안에서 한 몸이다... 그 교회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십자가에 우리도 같이 넘겨지는 그 복음 이야기를(고후4:11) 이미 창세기에서 은유하고 있다, 메타포하고 있단 말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 속에서 간음하고 있는 너희의 현실이 마치 노예 시장에 팔려 간 창녀 고멜처럼 얼마나 비참한지를 너희의 인생을 통해서 절실히 체험하고 또 그런 우리를 자기 피 값으로 사신 ... 호세아가 노예 시장에 팔린 고멜을 은 열다섯과 보리 한 호멜 반에 사오는데, 이게 은 삼십이거든요.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판 돈이 은 삼십이었잖아요.
그렇게 예수님의 죽음에 자기 신부들을 자기 피 값으로 불러들이시고 그 지불한 피 값으로 자신의 부활 생명까지도 나누어주시는 신랑 예수, 그분의 그 은혜와 사랑을 알아가는 세월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인생살이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이 이것입니다.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남길 게 없단 말입니다.
지난 시간에 얘기했죠? 자식 낳아봤자 세상에 죄인 하나 추가한 것밖에 안 돼요. 이게 하나님이 보시는 시각이거든요. 레위기에 나오잖아요 여자가 출산하면 속죄제 지내야 한다고 그것도 여아를 낳으면 두배에요 여자가 먼저 범죄했다고...우리 가족들이 우리와 같은 하늘 가족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냥 원수란 말예요.
어떤 분이 자기 모친 임종이 다가오자 죽기 전이라도 복음 전해서 예수 믿게 해달라고.. 나만 구원받아 천국 가고 엄마는 지옥 가면 어떻게 하느냐고 ... 그런데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몰라요. 천국 가족은 따로 있어요. 혈통으로 이루어진 가족이 아니에요. 한번 생각해보자고요. 여러분은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있는데, 여러분 가족이 지옥에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게 천국이겠습니까? 그거 아니거든요.
우리가 육신을 벗는 순간 시간에서 튕기어 나가서 영원으로 들어가게 되면 거기에서는 이 세상에서의 관계성이 다 끊어지고 없어요. 거기서는 지금 이 몸이 아니라 하늘의 형상으로 입혀진 새 몸, 새 사람이 있어요. 원래 그 사람이 먼저 있었고, 우리는 그리로 돌아가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 잘 믿고 성화되고 천사와 방불한 죄 안 짓는 사람이 되어서 가는 게 아니라 본래 우리는 이미 하나님 안에 거룩한 아들들로 이루어져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고 흠 없는 아들들이 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게 무엇인지를 배우기 위해서 우리 인생이 있는 것입니다. 순서가 바뀌면 안 돼요. 그래서 지옥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는 곳이기 때문이죠. 우리 인생의 목적은 이거 하나밖에 없어요. 그거 배우라고 우리가 잠시 하늘나라를 떠나서, 하나님 품을 떠나서 이 세상에 있는 거예요. 이 땅에서 피를 흘리신 그 하나님을 알고 다시 돌아가면 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 남길 건 아무것도 없다니까요.
(호 6장)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이게 우리 하나님이에요.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죠. 우리 인생의 목적은 그것이에요. 하나님은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시는 그런 분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자기 신부인 우리를 죽음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에 의해서만 우리는 존재(있음)가 됩니다. 우리는 원래 없음이었잖아요. 피조물의 의미가 그것이거든요.
그 하나님을 아는 게 영생이란 말입니다.
그럼 이렇게 없음인 우리가 어떻게 있음이 되는가? 하나님은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고 정해놓으셨어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는 분명한 목적이 있고 또 창조에 대한 근거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거룩하심과 그 모든 것들이 그 안에 근거로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없음인 우리가 하나님과 같은 하늘적인 존재가 되는 데는 반드시 하나님의 희생과 하나님의 섬김이 있는 거예요. 그것을 사랑이라고 하고 은혜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잠시 이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그 사랑 하나 알고 가는 거예요. 우리가 다른 피조물과 다른 점이 바로 그거예요. 하나님의 죽음 안에 있는 그 사랑, 심하게 말하면 우리 같은 죄인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불륜입니다. 거룩하신 그분은 우리 같은 죄인을 사랑하시면 안되니까요. 그래서 천사들도 알기를 원한다고 하죠. 하나님이 죽기까지 사랑하신 저 인간은 뭐냐는 거죠. 천사들은 그런 사랑을 모르거든요.
그렇게 우리는 그분만 사랑하고 그분만 즐거워하도록 지음을 받았어요. 그래서 그분 외에 다른 것을 좇고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까지도 잠시 허락하셨어요. 우리가 누구의 것인가, 나의 주가 누구인가를 가르치시기 위해서입니다. 인생은 그거 배우라고 있어요. 그리고 어린 양 예수에 의해서 그의 신부들이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혼인 잔치에 들어가기까지 이 세상과 역사는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그렇게 때가 차면 이 세상의 행적은 다 지나갑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아는 성도들은 세상 끝을 사는 사람들이에요. 끝을 안단 말이에요.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끝을 모릅니다. 그냥 오늘 하루를 사는 거예요. 왜 사는지도 모르고, 세상 끝도 모르고, 세상이 왜 있는지도 모르고, 세상이 영원히 있는 줄 알고 그냥 사는 거예요. 그러나 성도는 끝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 시작과 끝을 안단 말이에요. 그들이 알파와 오메가이신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하나님, 죄인의 괴수를 사랑하신 이런 하나님.. 죄인을 위해 자기 몸을 내어주신 신랑 예수 (롬5:8-11) 이런 신랑이라면 여러분의 영원을 맡기셔도 괜찮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 신랑을 알면 지금 있는 신랑은 신랑이 아닌 줄 알면 된다는 거지요. 그 신랑한테 아무리 실망하고 배신당해도 그건 아무것도 아님을 아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러죠. 이혼해도 괜찮고 그냥 살아도 괜찮아. 혹시 아니? 지금 예수 안 믿는 그 신랑이 너 때문에 구원받을지를 말이야.. 그 이야기를 한 거예요.
아가서는 이 하나님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 8장)
6 너는 나를 도장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스올은 지옥입니다. 질투의 불길이 지옥불 같단 말이에요. 이 정도로 우리를 질투하시는 하나님, 죽음같이 사랑하시는 하나님,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안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좀 더 가볍게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현실이 전부인 줄 알고 있는데 그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사도는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고 기다릴지니라’ 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진짜 신랑, 진짜 가족이 따로 있어요. 그리스도의 한 몸 된 교회로서 천국 가족들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어요. 히브리서에 나오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한 몸, 여러분 한 사람만 빠져도 그 몸은 완성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주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자기 눈동자처럼 지키고 계십니다. 그래서 구약에 보면 하나님의 성도들을 해치는 자들을 하나님의 눈을 찌르는 자라고 했어요. 여러분은 그런 신분이에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의 눈을 이 세상으로부터 하나님 나라로 향할 수 있도록 우리의 걸음 하나하나를 지키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심장이 잡ㅁ자는 동안에도 뛰고 있는 거와 같은 거에요.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매일 하는 게 뭐예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누구를 만나서 행복하게 살까, 오늘은 어디서 어떻게 장사해서 이익을 남길까, 이놈의 직장 확 때려치우고 다른 데 찾아볼까.. 이런 세상 것들로부터 우리의 눈과 마음을 위로, 우리 신랑 예수에게로,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향하도록 바꾸어 주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세상 나그네들이에요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고 하셨습니다. ‘너희의 살 곳은 이 세상이 아니고 너희의 진짜 신랑은 하나님이야. 그리고 그 사랑만 영원한 거야. 그러니까 너희를 나의 사랑으로만 만족하는 자, 충만한 자로 새롭게 창조할 거야. 이런 하나님의 보살피심과 다스리심이 있어서 너희는 이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너희는 이 세상에 가두어질 수 없는 자요 이 세상과 함께 멸망할 수 없는 자다.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너희를 끊을 수 없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안다면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울의 결론이에요.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이 이해되죠? 성도는 부득불 세상 현실과 다른 현실을 살고 있고, 또 묵시로부터 이 세상은 공격받고 있어서 그래서 성도의 인생이 피곤합니다. 세상에 뿌리내리지 못해요. 고난입니다. 특별한 어려움이 없어도 성도의 삶 자체가 고난입니다. 그러나 이 고난이 없으면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의 고난까지도 유익이라고 합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이런 다윗의 고백이 모든 성도들의 고백이에요.
이제 본문이 말하는 성도의 삶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직접 살아봐서 잘 아시겠지만, 예수를 믿는다는 건 그 자체로 참 외로운 인생입니다. 실감하시죠? 가족도 있고 직장도 있고 많은 인간관계가 있어도 성도는 외롭습니다. 오죽하면 성경이 이방인 나그네라고 하겠습니까? 스스로 외톨이가 되려고 해서 그런 게 아니라 우리와 동행하시는 예수, 우리 안에 계신 주님으로 인해서 이 세상과 섞일 수 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거예요. 세상을 사랑하고 싶고, 세상 사람들과 잘 어울려 살고 싶고, 세상에서 인정받고 싶은데 그 무언가가 우리를 자꾸 이 세상으로부터 끊어내고 분리해내고 있단 말이에요. 이게 우리의 거룩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이에요.
그러니까 세상 교회들처럼 예수 믿고 일 잘 풀리고 어려운 문제가 다 해결되고 사업도 성공하고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한 결혼을 하고..그렇게 오복 다 누리면서 考終命 한다면 그 사람은 한 번 생각해봐야 해요. 내가 믿는 예수가 이 땅을 다녀가신 그 예수가 맞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 세상 교회들이 모두 그런 쪽으로 가버리니까 복에 환장한 사람들이 다들 교회로 오는 거예요. 오죽하면 절에 스님이 교회비판을 하겠습니까? 인터넷에서 목사 사모가 스님한테 가서 상담을 하더라고요 법륜스님한테 질문하는데 우리 남편은 좋은 신학교 나오고 큰 교회에서 부목으로 있는데 월급도 적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언제 제대로 큰 목사 되겠냐고 하니까 법륜 스님이 말하길 당신이 믿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인지 확인 좀 해보라고 해요. 와! 깜짝 놀랐어요. 도대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스님한테 그런 소리 들어서 되겠습니까? 중도 그런 하나님 없다는데 대체 세상 교회선 전부 복 주는 하나님 나를 위한 하나님만 가르치고 있어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모두 자기를 위한 하나님이에요. 나에게 복 주시는 하나님. 교회가 그렇게 가르치니까, 신학교에서부터 복을 그렇게 가르치니까 교회에서조차 십자가는 그냥 내 존재를 장식하는 액세서리예요. 십자가를 몰라요. 왜 십자가인지를 모른단 말이에요. 그래서 교회가 나라는 우상 숭배자들의 모임이 되었어요. 그런 사람들에게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이 어떻게 들릴까요? 다들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만 들어요. 어떻게 하면 나를 행복하게 하는 말씀으로 챙겨가질 수 있을까 그런 궁리나하는 거죠.
참 웃기는 게 젊었을 때 교인들 심방 가서 보면 벽에 걸린 성구가 마귀가 한 말인 경우도 있어요. ‘네 시작은 미약하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 이건 마귀가 욥을 시험할 때 한 말이에요. 우리 동네 돼지갈비집 간판이 ‘다복식당’인데, 한쪽 벽에 히브리서 6장 14절 말씀이 걸려 있어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음에 관한 것인데, 그것을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한 거지요.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이거 영업하는 사람에게는 최고의 말씀 아닙니까? 그런데 같은 6장에는 이런 말씀도 있어요.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다시 말하면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의 진리를 깨달아서 말씀을 받은 자들이 진리가 되면.. 그런 뜻이 거든요.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말씀의 진의를 모르고 지 맘대로 알아버리면 결국 가시와 엉겅퀴만 내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교인이란 사람들이 뭐가 복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이 없어요. 성경의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모른단 말이에요.
이렇게 세상은 우리와 살아가는 현실이 달라요. 성도에게는 주가 계시고, 그분이 세상을 사셨던 삶, 세상 왕따로 사셨던 삶에 연합된 것까지가 유니언 크라이스트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교인은 그 예수를 믿는 게 아니라 자기 목적을 위해 예수를 이용해 먹으면서 입으로만 ‘오직 예수’라고 합니다. 그들의 예수는 알라딘의 램프 거인 지니에 다름 아닌 거지요. 한마디로 저주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만 믿는 거예요. 예수로만 충분하다는 뜻이에요. 예수를 주신 것을 복으로 아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에요. 다른 복이 없어도 예수만 있으면 충분한 상태가 성경이 말하는 복이에요. 그게 하나님의 축복이란 말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생육과 번성이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축복하신 내용이거든요.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는데, 이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육과 번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에요. 돼지갈비 많이 팔아서 부자가 되는 게 복이 아니에요. 진자 복은 모르고 그런 걸 자꾸 복이라고 가르치는 게 오늘날 하나님의 원수 된 세상 교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어요. 그런 세상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로 예수님이 머리 둘 곳을 새롭게 창조해내신 거예요. 그게 그의 몸된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교회이며, 그래서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며 그분으로부터 모든 것을 공급받는 교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완성하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어린양의 신부 된 거룩한 교회의 탄생입니다. 세상으로부터 구별해내시고 불러내신 에클레시아.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을 예수의 능욕을 지고 십자가를 함께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는 교회라고 합니다. 종교의 성전인 예루살렘 성문 밖 골고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선 그곳을 향해서 아담으로부터 오늘 여러분까지 그 성문 밖을 나가는 긴 행렬이 그곳을 향하고 있습니다. 천국 문은 그 골고다 십자가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천국 문이에요. 시편에 나오는 영원한 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앞서가신 그 길, 십자가의 길, 그 행렬 속에서 누구는 결혼하고 누구는 자식 낳고 누구는 이혼하고 누구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한 가지 우리에게 주가 계심을, 자기의 피 값으로 우리를 구속하신 진짜 신랑이 계심을 배우고 있습니다. 죄 있는 육신으로 사는 내 목숨을 미워하고 자기를 부인당하면서 그렇게 주님과의 관계를 체득하는 인생을 살고있는 것입니다.
천국을 향해 가는 긴 행렬, 우리가 찾아가는 길도 아니고 우리 능력으로 가는 길도 아니지만, 생명 길로 오신 그분 안에서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오늘 여러분들까지 성도는 본의 아니게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듯이 좁은 길과 넓은 길입니다. 좁은 길이든 넓은 길이든 그 반대쪽 길로는 넘어가지 못합니다. 확정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모든 세상 현실로부터 자유 해야 합니다. 설사 우리가 스스로 자유 하지 못하더라도 여러분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 한 자들인 것을 잊지 마세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7장은 종으로 있는 자는 그냥 종으로 있으라고 해요. 어던 형편에 있던지 상관없다고.. 그러나 자유 할 수 있는 자는 자유 하라고 합니다. 우리의 신분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가시는 그 길은 이미 확정되어 있고 하늘길로 오신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에 이 어둠의 세상을 통과해서 그 찬란한 새벽빛에 눈을 뜨는 그날 우리는 우리 아버지 집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날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만날 수 있기를 빕니다.
지나가는 세상에 얽매이지 마시고 사도의 말처럼 이미 그 세상에 대해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날마다 확인당하면서 감사하는 우리가 되길 빕니다.
(롬 8장)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이렇게 우리는 아담의 혈통에서 끊어져서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진 자들이에요.
구약에서는 이것을 할례라고 합니다. 할례라는 말은 그냥 생식기 끝을 자르는 걸 말하지 않고 아담의 혈통으로부터 끊어져서 예수의 혈통으로 옮겨졌다는 뜻이에요. 바울은 이것을 두고 주님의 십자가에서 우리 육적 몸을 벗은 것, 세례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이 세상도, 종교도, 율법에서도 자유 한 자들이에요.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그 무엇도 부족하지 않은, 주께서 부르신 그 자리에서 그대로 지내는 자유와 평안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 중에 혹 그런 분이 있을 수 있죠. 말씀 나누는 이 자리만 벗어나면 당장 세상 현실이 있는데 어떻게 자유 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런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여러분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위를 하든 하나님은 여러분의 생각이나 행위에 따라서 여러분을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여러분과 내가 나를 보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해요. 성경 전체가 이런 믿음 안에 있는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도의 말대로 우리 자신이 그 믿음 그 세계 안에 있는지를 확인하고 시험하라는 게 그런 뜻이에요
여러분 안에 계시는 예수, 하나님은 그 예수를 보시고, 그 피를 보시고 여러분을 거룩하고 흠 없는 아들들로 여겨주십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어떤 행위로도 십자가의 긴 행렬에서 벗어나거나 뒤로 물러나는 일은 없다는 것을 아시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분을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로 옮겼다고 해지요.
그러니까 그 하늘에서, 이 시간과 공간 밖에서, 묵시 안에서 이 세상을 볼 수 있고 해석할 수 있는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해석 공동체라고 합니다. 이 모든 세상과 역사는 교회에 의해서만 해석되는 것이란 뜻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사람들이에요. 아침에 신문을 한 줄 읽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보는 것과 다른 눈으로 읽게 되는 거예요. 해석이 달라요
여러분은 하늘 가는 밝은 길, 그 생명 길 위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늘 길로 오신 그 예수 안에서 반드시 우리 목적지가 아닌 그분의 목적지로 가고있기 때문에 길을 잃어버릴 걱정은 전혀 안 하셔도 됩니다. 내가 다른 길로 가는 건 아닌가, 이러다가 중간에 탈락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지 마시란 말이에요. 그렇게 은혜 더하기 나의 행위, 가능성성을 가르치는 게 오늘 세상 교회들이지만
성도는 은혜의 왕노릇을 날마다 경험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죄도 사망도 제 역할을 하고 있을 분입니다.
7장 마지막을 보면 ‘무엇을 하든지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고 합니다. 7장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시집을 가든지 안 가든지, 이혼을 하든지 안 하든지 성도는 주 안에 있습니다. 결코 바뀌지 않는 현실이 바로 그리스도 안이란 말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어둠의 세상, 눈물 골짜기를 지나 밝고 빛나는 그곳에 있을 때 이 세상살이에서 그토록 염려하고 걱정했던 것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부족함, 믿음 없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말씀으로 우리를 띠 띠어서, 예수님의 믿음으로 우리를 띠 띠어서 우리가 원치 않는 그곳으로 데려가신 우리 주님의 사랑 앞에 우리는 그날 면목 없이 면류관을 내려놓게 될 것입니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
내가 천성 바라보고 가까이 왔으니
아버지의 영광 집에 나 쉬고 싶도다
나는 부족하여도 영접하실 터이니
영광 나라 계신 임금 우리 구주 예수라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부른 이 찬송이 오늘 우리들의 찬송이 되길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왜 이 세상을 굳이 살아야 하는지, 왜 이런 죄 있는 육신으로 아버지의 품을 떠나야 했는지를 이제 알았습니다. 우리 주님, 우리 신랑 예수님을 아는 그 영생을 주시려고 우리로 잠시 이 세상을 살게 하셨으니 주께서 부르신 그 자리에 있는 그대로 주님과 함께하는 그 행복을 날로 더 크게 누리게 하시고, 또 우리의 남은 날들을 그 찬송으로 채워지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
이해가 되지 않아서 접어 두었던 부분들이였는데 복음을 접하고 다시 보니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을 통해 말씀의 교제를 하는데 왜 믿음을 선물로 주셔야 했으며
왜 은혜의 영광을 찬송 할수밖에 없는지를 선포된 말씀을 통해 위로와 평안으로 이끄시는 군요 ~감사합니다
요한계시록 20장
3.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그렇습니다, 죄도 사망도 사탄까지도 하나님의 성도들을 위해 배치해두신 것입니다.
그것을 알 때 우리는 거룩한 죄로 인해 찬송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