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강>
본문 : 고린도전서 8:1-13
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주시느니라
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7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8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9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서울 모임의 1강 제목이 ‘우상’이에요. 우상(偶像)의 ‘우’는 ‘짝, 허수아비’ 등의 뜻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이 허수아비는 알겠는데 어떻게 ‘짝’인가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들과 늘 짝하는 게 우상이란 뜻이에요.
여러분, 교회와 세상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세요? 성도와 세상 사람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건 한 마디로 성도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교회는 거룩한 교회입니다. 성도라는 말의 의미도 ‘거룩한 무리’죠. 세상과의 차이가 거룩이에요.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는 그렇게 거룩한 교회입니다. 이 ‘거룩’은 어떤 죄도 없다는 뜻이에요. 그게 죄악된 세상과의 다름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드리면 대부분 사람의 표정이 밝지 않아요.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어떤 죄도 어떤 흠도 없는 거룩한 성도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그렇게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생각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성경은 우리를 죄가 전혀 없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하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그것도 우리가 있기도 전인 창세 전에 이미 확정된 거예요. 제 얘기가 아니라 성경이 그렇게 말을 합니다.
(엡 1장)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게 모두 완료형이에요. 이미 묵시 안에 이루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은 ‘그리스도 안’입니다. 이게 바울 서신의 특징인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조그마한 흠도 없고 죄도 없는 거룩한 백성, 아들들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우리 스스로 자꾸 ‘나는 아닌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죠.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거룩한 백성이라고 하시면 거룩한 백성이에요.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에게 주신 자들은 그들이 어떤 행위를 해도 하나님이 죄로 여기시지 않습니다. 기가 막힌 이야기죠?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 자신을 정죄하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악의 율법으로 우리를 정죄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은 그의 몸 된 교회이기 때문에 우리를 모두 아들 예수로 보십니다.
(롬 8장)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율법의 요구를 우리는 연약해서 할 수 없는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율법의 요구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게 세상과 성도의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 밖은 모두 심판이에요. 어느 누구도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어떤 행위를 해도 하나님은 그것을 죄로 여기시지 않습니다.
본래 죄는 없습니다. 그럼 죄는 뭡니까? 하나님이 성도들을 위해 선악과로 시작된 죄를 잠시 허용하신 겁니다. 그 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게 죄의 용도요 기능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죄와 관계가 없습니다. 죄든 의든 모든 것은 주가 되신 한 분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니까요. 내가 이걸 하면 되고 안 되고, 착한 일과 나쁜 일로 나누고 하는 것은 우리 몸 자체가 선악의 몸이기 때문이에요. 선악과를 따먹은 우리 몸 안에 선악 체계가 장착되어 있거든요.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하신 이유가 바로 그것이에요.
마귀가 무엇이라 유혹했습니까?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게 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져서 알게 선악은 자기중심의 선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하다고 하시는 게 선이고 악하다고 하시는 게 악인데, 그렇지 않고 자기중심의 선악관을 가지게 된단 말이에요.
제가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그런 사람들이 하도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진리로 자유 한다고 하고, 예수님이 우리가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내려주신다고 하셨는데 자신이 판단자가 되어서 오히려 짐을 더 짊어지고 있어요.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주구장창 죄 타령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팔공산 밑에 있는 ‘십자가 마을’ 사람들을 보면 마치 죄 경쟁을 하는 것 같아요. 앉아도 죄, 일어서도 죄, 숨 쉬는 것도 죄, 밥 먹어도 죄, 청소하는 것도 죄, 김장하는 것도 죄.. 어떻게 하면 좀 더 죄인이 될 수 있을까를 경쟁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 그들이 이야기하는 십자가는 결국 자기 합리화입니다. 어차피 죄밖에 안 나오는데 십자가만 알면 되지..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아들로 여겨주세요. 아들과 아들 아닌 자의 차이가 뭡니까? 혈통이 달라요. 내가 낳은 자식을 내 핏줄이라고 하잖아요.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피가 있어요. 그래서 교회를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해요.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면서 장로들을 모아놓고 이야기하잖아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고 말입니다. 이게 차이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똑똑하고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그 피가 없습니다. 혈통이 달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 내내 죄인 된 우리를 참고 기다려주시는 겁니다. 왜요? 아버지시니까요. 우리 행위 하나하나를 처벌하시지 않고 다만 징계를 하십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8).. 하나님의 징계가 없으면 내 아들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그렇게 오래 참으심과 긍휼하심을 우리가 알기 때문에 우리는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인의 괴수라는 고백이죠. 이게 참 역설적이에요. 하나님으로부터 죄가 전혀 없는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들로 여김을 받은, 그런 긍휼하심을 받은 자일수록 자기 자신이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진짜 성도는 이런 죄인 위에 덮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 감당할 수 없는 은혜,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평생 체휼하고 살기 때문에 그런 성도에게서는 ‘나에게는 당신의 불쌍히 여기심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긍휼과 사랑은 같은 말입니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는 말씀이 그런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조건이나 자격이 있어서 우리가 구원받는 게 아니라 그냥 일방적입니다. 창세 전에 우리가 아무것도 요청한 것이 없잖아요. 우린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창세 전에 죄가 나오고 피가 나와요. 그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들이 이미 완료된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사랑이에요. 우리는 이 사랑을 알기 위해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복음을 살아내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복음은 머리로 아는 게 아니라 인생 동안 십자가 복음을 직접 살아내는 거예요. 그런 자들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어요. 왜 십자가가 아니면, 피가 아니면, 하나님 아들의 죽음이 아니면 안 되는지를 고백하기 위해서 우리 인생이 있는 거예요. 은혜의 필연성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는 그냥 덮으시는 은혜입니다. 엘리야가 과부 아들이 죽었을 때 자기 몸을 덮어서 살려내는데, 그게 그런 그림을 미리 보여주시는 겁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죠? 유두고라는 청년이 밤에 창가에 앉아 설교를 듣다가 떨어져서 죽자 바울이 가서 몸으로 덮잖아요. 이런 그림 모두가 하나님의 덮으심의 은혜, 하나님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피를 쏟으시고 자기 몸과 살을 내어주시는 것을 그림으로 보여주시는 거예요. 그게 은혜죠.
그런데, 그 은혜를 인생 사는 동안 체험하지 못하고 그냥 학습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많은 정도가 아니라 대부분 세상 교회 교인들이 그래요. 그냥 종교성을 가지고 교회에서 가르치는 하나님과 예수를 학습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의 세계를 경험하지 못한 거지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왕 노릇 하는 세계를 살아보지 못한 겁니다. 어거스틴이 말한 죄가 왜 거룩한 죄인지를 몰라요. 어떻게 해서든지 죄를 안 짓고 자기를 깨끗이 다듬어서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서려고만 하지 그 죄가 어떤 죄인지, 무엇을 위한 죄인지를 몰라요.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조차도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복음을 안다는 게 굉장히 위험할 수가 있어요. 그렇게 머리로 아는 복음으로 다른 사람을 비판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아는 것을 가지고 안다고 하지 않습니다.
(엡 4장)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온전한 사람을 이룬다고 해요. 누구나 성경 공부를 할 수는 있습니다. 성경을 오십독, 백독 할 수 있고, 신학교에 가서 공부할 수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 앎과 믿음이 하나가 되는 건 우리 소관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다는 말은 그분과 관계를 가진다는 것인데, 이것은 그분의 선택이고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의 속임수와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나야 해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자라남은 생명 현상이에요. 생명이 있는 자들에게만 자라남이 있어요. 그런데 그 생명은 머리이신 예수에게서 공급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자라나게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은 모두 주께서 하십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성경이 안다고 하는 의미는 부부간에 한 몸이 됨을 말해요. 그러니까 주님과 한 몸이 된 자들만 그분을 알게 되고 또 자라게 됩니다. 그래서 어설프게 성경 좀 안다고 하면서 자신은 세상 교인들이랑 다르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예수 안 믿는 사람 많아요.
옛날에 저어기 팔공산 밑에 있는 어떤 목사가 그야말로 십자가 복음은 자기 전매특허처럼 알고 있었는데, 그 제자 중 한 사람이 당돌하게 ‘목사님, 예수 믿습니까?’하고 물었어요. 그 목사 끝까지 '예수 믿습니다' 라는 말을 못했지요. 예수 믿습니다 라고 말하는 순간 자기 신학이 다 깨지기 때문입니다. 나 여기 있고 예수 거기 계셔서 거기 계신 예수를 연구하고 탐구하고 학습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분을 믿는 건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성경은 믿음을 선물이라고 합니다. 선물의 의미는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이고, 또 선물 주는 사람 마음이라는 겁니다. 생떼 쓴다고 주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분과의 관계가 없어도 얼마든지 그분을 연구하고 학습할 수 있는데, 관계를 가지는 일은 이미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확정된 자들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 약속 안에 있는 자들이 인생을 살면서 그분의 어떠하심, 그분의 하나님 되심, 그 은혜의 필연성을 평생 알아가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7장 서두에 보면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이라고 하는데, 이건 고린도 교인 누군가가 이미 바울에게 질문을 했다는 겁니다. 편지로 물었어요. 그 질문들이 7장에 나오듯이 남자와 여자의 문제, 결혼 문제, 이혼 문제, 주종관계 등등입니다. 그리고 8장에 우상의 제물까지 나와요. 그런데 이런 모든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시작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고싶은 예수와 믿음에 의해 믿음에 이르게 된 것과의 차이죠.
그러니까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런 저런 나쁜 일 하지 말고 좋은 교회 하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편지를 쓴 게 아닙니다. 바울의 관심은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느냐, 너희가 십자가를 아느냐, 그의 몸 된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를 아느냐는 매우 근본적인 문제를 1장에서부터 계속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아예 이렇게 못을 박고 들어갑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1:18).. 너희가 십자가의 도를 아무리 배우고 토론하고 연구해도 멸망 받을 자에게는 그것이 미련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겠다고 생명 나무에 손을 뻗치지 말라는 거죠. 그게 탐심이니까.
출발이 잘못되면 문제가 자꾸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의 이야기는 좋은 교회 할 생각 하지 말고 예수가 누구신지부터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건 고린도전서뿐 아니라 바울 서신 전체, 또 모든 사도의 서신이 말하는 내용입니다. 모든 서신서는 교회의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의 핵심을 가르쳐주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했지요 모든 건 이 한 가지로 모입니다. 이 예수와 십자가에 대한 올바른 지식 없이 예수 백날 믿어도 헛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복음을 안다는 것에는 많은 함정이 있습니다. 우리가 정상적인 존재들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잖아요. 우린 죄인이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믿는 예수는 항상 가짜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나를 위한 예수 나를 긍정해주는 예수만 알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나로부터 시작된 믿음, 내가 시도하는 주님과의 관계 설정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로 모였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갈등과 분쟁이 발생하는 겁니다. 각자 믿는 예수가 다르고, 나를 구원한 십자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왜 그리 많은 교단과 교파가 있습니까?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가톨릭, 순복음.. 아니 장로교 안에도 많잖아요. 합동, 통합, 고신, 합신... 등등 장로교 교단만도 수십 개입니다. 같은 성경을 읽고 한 주, 한 하나님, 한 세례, 한 성령인데 왜 그렇게 갈라집니까? 그리고 또 다 자기들이 옳다고 하죠?
장로교는 캘빈이 교리거든요. 딴 건 다 용서가 되는데, 캘빈을 부정하면 잘립니다. 아니, 장로교를 떠나서 우리나라 교회들이 참 재미있는 게 뭔가 하면 목사가 바람피우고 돈 횡령하고 다 용서되는데 딱 두 가지를 하면 잘립니다. 그게 주일 성수와 십일조예요. 이 둘을 부정하면 바로 잘려요. 사도는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면 예수 십자가가 헛것이라고 했는데, 세상 교회들 주일 성수를 해야 한다잖아요. 성수, 거룩하게 지키는 건 예수님이 다 이루신 거예요. 우리는 그런 능력조차 없어요. 십일조는 십자가의 예수가 십일조란 말입니다. 그럼에도 주일 성수와 십일조를 강요합니다. 왜 그러겠어요? 교회 하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죠. 이 둘이 없으면 한국 교회가 이렇게 커질 수 없어요. 결국 목사들이 진리보다 교회하기에만 올인하다 보니 한국교회가 이 모양이 된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주일’이라는 말 자체가 없다는 거 아세요? 주일은 없고 요한계시록에 ‘주의 날’만 있습니다. 성도에게는 매일이 주의 날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성수’는 구약에서 율법을 지킬 때 해당하는 말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율법 지킴에 실패한 것을 이미 우리에게 보여줬잖아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계명 어느 한 가지라도 거룩하게 지킬 능력이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거란 말이에요. 십자가에서 그러셨지요 테텔레스 타이 내가 다 이루었다
이스라엘을 보세요. 전쟁이 나도 안식일을 지키겠다고 그날에는 뛰지도 않았어요. 뛰면 일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적군이 쳐들어 와도 그냥 맞아 죽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 계명, 율법 모두 오해한 겁니다. 하나님이 지키지도 못할 율법을 주셨을 리가 없다는 거지요. 율법을 온전히 지키실 분이 따로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율법도 열심히 지키고 이방신도 섬기고 그랬던 게 이스라엘의 실패에요 오늘날 대한 유대교도 다를 게 없지요.
안식일이라는 건 뭔가 하면요 하나님께서 시간을 7일 단위로 접으신 거예요. 1,2,3,4,5,6,7 하고 나서 다시 1,2,3,4,5,6,7이에요. 인간들이 시간에는 손을 대지 못하니까 하나님이 안식이라는 시간을 거룩하게 하셨단 말입니다. 안식일의 주인, 즉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 그렇게 시간이 인격화된 게 예수예요. 그럼 시간이 장소화 된 건 뭡니까? 성전이죠. 그렇게 구약의 모든 율법은 오신 한 분을 가리키는 것이지 인간들이 지키라고 주신 게 아니에요. 지킬 수도 없어요 그 사실을 밝히 보여주신 게 예수님의 산상수훈입니다. 그래서 산상수훈 첫머리에 “산에 올라 가라사대”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신약의 시내산이란 뜻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오해하다 보니 교회 안에도 여러가지 갈등과 분쟁이 자꾸 생기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심각한가 하면 구교와 신교 사이의 분쟁 정도가 아니에요. 교회사를 보면 개신교 안에서도 심각한 분쟁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침례 문제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아십니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복음을 알고 예수를 제대로 믿으면 머리에 물을 뿌리는 것과 물속에 집어넣었다 꺼내는 게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그런데 이 침례 문제로 대량 학살이 일어났어요. 침례 교인들 보고 너희가 좋아하는 물에 담궈 줄게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수장시켜버렸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가, 복음이 종교화되어 버리면 그때부터 문제가 발생합니다. 나의 옳음, 우리 교회의 옳음, 우리 교단의 옳음을 증거 하려고 사람들을 학살까지 한 게 교회사예요. 그런데 교회가 이런 이야기는 잘하지 않습니다. 덕이 안 된다고 덕이 뭔지도 모르면서
이게 어디서 나온 문제예요? 예수에 대한 오해, 십자가에 대한 오해에서 왔어요. 인간들이 자꾸 말씀에 손을 대서 그렇습니다. 인간은 말씀에 손을 대면 안 됩니다. 우리가 손을 댈 수 있는 말씀이 아니에요. 말씀은 창세 전에 있던 말씀이에요. 그런 말씀에 우리가 어떻게 손을 댑니까? 말씀에 손을 댄 게 무엇입니까? 신학이에요. 조직신학, 성경신학 역사신학, 주경신학... 인간들이 성경을 갈기갈기 찢어놨어요. 그렇게 말씀을 조직화해서 우리가 알아듣고 우리가 챙겨가질 수 있는 말씀으로 만드는 겁니다. 탐심입니다.
이게 세상이에요. 그럼 세상과 다른 성도는 뭐예요? 내가 말씀을 해석하고 다루고 챙겨가지는 게 아니라 내가 말씀에 의해서 해석되고 해체되어서 말씀의 소유가 된 사람들이 성도입니다. 그렇게 말씀으로 채워지는 게 성도의 일생인 것입니다. 계시록에 가면 주님이 우리보고 말씀이라고 하시잖아요
자 이런 문제가 모든 초대 교회에 다 있었고, 그 문제들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어요. 이런 게 종교의 민낯입니다. 복음의 반대편에 있는 종교의 민낯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원수는 딴데 있는 게 아니라 세상교회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구약으로 하면 전쟁하시는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상대로 전쟁 하신거에요
그럼 그런 종교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종교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자기를 믿고 자기 교회를 믿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아는 내가 우상이 되어버렸어요. 우상은 다른 게 아닙니다. 부처상, 마리아상 앞에 절하는 것만 우상이 아닙니다. 십계명에는 어떤 하나님의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했는데 다 만들어버렸지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안 보이는 하나님을 믿을 믿음이 없어서 보이는 하나님으로 만든 거예요. 그 대표적인 게 교회입니다. 교회 자체가 우상이 됐어요. 목사가 우상이 됐어요. 그렇게 자신들의 신학과 교리로 파당을 짓고 신의 이름으로 학살극을 벌였다는 것은 자기라는 우상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해서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나의 옳음을 믿고 나 여기 있음이 진리가 된 것입니다. 내가 믿는 예수가 아니라고 하는 자는 다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가인의 아벨 살해의지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입니다.
본래 인간은 어느 누구와도 공유가 안 됩니다. 각각의 개체의 속성과 본질을 다른 개체에 넘겨줄 수가 없어요. 부부가 한 이불을 덮고 같이 잠을 자도 서로 꾸는 꿈이 달라요. 각각의 개체는 서로를 공유할 수가 없어요. 세상에 70억의 인구가 있다면 각자가 인지하는 시공간 즉 70억개의 우주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내 신학, 내 믿음, 내 예수가 다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것을 확장시켜서 힘으로 전환하려는 모든 시도가 오늘날의 수많은 교회와 교단을 만든 것입니다. 이게 선악과를 먹고 신이 된 아담의 죄성입니다.
여러분, 죄가 뭡니까? 성경이 말하는 죄는 자기로부터 시작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자기’라는 건 선악과 이후에 생겼습니다. 그전까지는 하나님과 나의 구분이 없었어요. 교육학에 보면 그게 나온대요. 아기를 낳고 한 살까지인가 아기는 엄마와 자기를 한 몸으로 안다고 해요. 그러다가 커 가면서 엄마와 자기의 다름을 안답니다. 그러니까 자라면서 아담의 DNA가 작동하는 겁니다. 이렇게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모든 게 죄예요. 다른 말로 처음 자리의 이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그 처음 자리입니다.
그럼 그 처음 자리는 무엇을 위한 자리입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이 잘못 보신 겁니까? 왜 아담이 범죄했어요? 하나님이 범죄한 아담을 지으셨습니까?
이 문제에 대해서 교회가 아직까지 대답을 못합니다. 그래서 가장 많은 질문 중 하나가 하나님이 왜 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셨을까? 그리고 거기에 왜 뱀을 풀어놓으셨을까? 그리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 고생 안 하고 행복하게 잘 살 텐데..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실수하신 거예요? 아니 하와가 뱀에게 속아서 선악과에 손을 뻗칠 때 말리기라도 했어야 하지 않나요? 맞잖아요. 먹고 죽을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왜 내버려 두십니까? 이 문제가 이천 년간 교회의 딜레마예요.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 5장에서 설명해주잖아요.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표상)이라고 말입니다. 표상이라고 함은 아담과 오실 예수님이 연합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는 의미예요. 그러니까 아담은 반드시 선악과 따먹고 죽어야 하는 아담이에요. 따먹고 생명 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가서 완성되는 아담이에요. 이것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아담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아담, 에베소서 1장에 나오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보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겁니다.
그럼에도 이게 교회의 딜레마인 것은 자꾸 나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이 안 말리셔서 죄 때문에 고통스러워해야 하는가 왜 우리가 죽어야 하는가 하는 모든 중심에는 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사람만 사람이고, 그리스도 밖은 그냥 죽은 흙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없으면 태어나지 않는 게 제일 좋은 거에요
오늘날 대부분의 신학교에서 지옥을 부정하지요. 사랑의 하나님께서 자기가 지으신 인간들을 지옥에서 영원토록 고통받게 내버려 두실 리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의 지옥은 우리를 겁주기 위한 것이지 실제는 없다고 합니다. 맞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지옥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있어요. 단언하지만 사람은 지옥에 안 갑니다. 그러니까 지옥은 사람이 아닌 자들이 가는 거예요. 악마, 사탄의 말에 연합된 죽은 흙들이 사탄을 위해서 예비하신 불못에 그와 연합되어 같이 들어가는 거예요. 그리고 그들은 주의 영광을 위해 영원토록 지옥에서 불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부정하고 대적하는 악의 무리들 우리는 그들을 세상교회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언약의 대상은 딱 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이 된 아들들과 악한 영과 연합되어 그와 같이 심판 받는 자들.. 이렇게 둘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에요. 어느 누가 지옥 가고 싶겠습니까? 이건 창세 전에 이미 결정이 된 거죠. 로마서에서 그러잖아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세상은 이해하지 못해요. 그런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거죠. 그런 하나님이라면 나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게 인간들이에요. 이게 피조물의 자리를 벗어난 죄인의 죄성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의 은혜와 생명력으로만 존재가 가능하다는 것을 애써 부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의 처음 자리는 우리 좋으라고 지으신 게 아니에요. 우리를 지으신 목적은 주를 위해서입니다. 모든 만물은 주로 말미암고 주를 위해서 있어요. 그것을 아는 게 처음 자리예요. 주님을 위해서 존재하는 그곳이 우리의 처음 자리란 말예요.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자신이 주를 위해 있다는 그것부터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나 있고 예수 있고 이게 처음자리 이탈이에요
그렇게 주를 위해서 존재해야 하는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후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이용하려고 하는 것을 우상 섬김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우상이에요. 본문에서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게 이것인데,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는 모든 게 우상이에요. 심지어는 교회, 목사, 성경, 예수도 우상이 될 수 있어요. 여러분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의 우상은 성전이었어요. 그런데 그 성전 안에 가나안의 신들도 같이 있었지요. 이스라엘 역사 내내
그렇게 평생 우상을 섬기면서도 우상을 우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게 종교인들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합니까? 먹고 마시고 입을 게 필요하죠? 그런데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길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를 위해서 하라고 합니다. 이게 정말 됩니까?
(롬 14장)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주를 위해서 먹고 마시지 않는 모든 게 우상이라는 겁니다. 자기를 위해 살고 자기를 위해 죽는 게 우상섬김이에요 그렇게 자기로부터 시작되는 모든 게 우상 섬김입니다. 나의 생존을 위해서 당장 필요한 게 먹고 마시는 것인데, 성경은 그것마저도 주를 위해서 하라고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생존에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아는 게 믿음 안이에요
생명이 어디에 있습니까? 생명이 뭡니까? 예수께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잖아요. 예수만 생명이고, 그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이 죽은 세상 속 산 성도들입니다. 온 세상이 죄로 인해서 다 죽어있는데, 그 죽은 세상 속에 생명 있는 자들이 생겨나더라는 겁니다. 아직은 이 세상에 생명 있는 자들이 있단 말이에요.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오늘도 해가 뜨고 하늘도 땅도 제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세상을 보시는 시각이에요. 하나님은 생명있는 자들에게만 관심이 있다니까요. 그들만 존재로 여기시는 거에요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말씀을 주신 겁니다. 말씀은 그들에게만 이해되는 말씀이에요.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를 위해서 하라.. 우리가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주를 위해서 마시자 하고 마시진 않지요. 그럼 무슨 뜻이에요? 우리가 무슨 말을 하든지 무슨 생각을 하든지 무슨 행위를 하든지 그 모든 것을 주를 위한 것으로 하나님이 여겨주신단 말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우리가 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에요. 바울이 서신서마다 엔 크리스토스를 쓴게 그 때문입니다.
아담 이후로 이 모든 세상이 죄로 말미암아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또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어요. 노아홍수에서부터 반복되는 게 그거예요. 우리가 나누고 있는 요한복음 얘기도 계속 가르시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는 위에서 났고 너희는 아래에서 낫다고 하셨죠. 그래서 너희가 나를 믿지 않으면 죄 가운데서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나는 너희를 안 믿어.. 나는 세상 인간 누구도 안 믿어.. 너희가 이스라엘이라고?.. 너희가 하나님을 안다고?.. 너희가 성전에서 제사 지낸다고?.. 웃기고 있네.. 나는 너희들 믿지 않아.. 왜? 너희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없음을 내가 알기 때문이야.. 다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기 영광을 위해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유대인들, 바리새인들, 율법사들, 제사장들이 이런 이야기 들어보세요. 당장 때려죽이고 싶죠. 예수 네가 뭔데?.. 이게 성령 받은 성도, 그러니까 아들의 영을 받은 성도와 받지 못한 자의 차이입니다. 이렇게 세상 인간 어느 누구도 자기라는 우상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 땅을 다녀가신 예수님이 왜 살해당하셨습니까? 너희가 믿는 하나님이 가짜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거 정말 엄청난 폭탄입니다. 목숨 걸고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섬기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했으니까요. 맞아 죽을만 하지요
그리고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들이 목숨처럼 여기는 성전을 뒤집어엎으셨어요. 하나님은 이 성전에 안 계신다는 거에요 그리고는 ‘내가 삼일 만에 이 성전을 다시 세우겠다’고 하셨죠. 그때부터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일 궁리를 한 것입니다.
이 세상 현실, 인간들의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분은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이 세상 밖에서 세상을 봐야 세상이 바로 보일 것이잖아요. 세상 안에서는 세상을 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교회를 해석공동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을 제대로 해석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교회 뿐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가 할 일은 예수님 처럼 세상을 향해 심판을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 토닥토닥해서 교회로 불러들일 생각하지 말고...그렇게 예배당에 사람들 가득 채우면 뭐할 겁니까? 배나 지옥자식 만들 거면서
유대인 중에도 가장 열심이 있고 경건하다는 바리새인, 율법사들을 보고 예수님은 독사의 새끼,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셨어요. 너희의 율법 행위와 어떤 열심도 결국은 너희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거죠. 에덴에서 하와를 유혹했던 뱀의 말, 뱀의 속성이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 너희가 하나님의 원수라는 겁니다. 그래서 길가의 돌들로도 내가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다고 하신 겁니다. 자기라는 우상성에 오염된 니들은 길가 돌들보다 못하다는 거지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한 하나님이신 줄 알았어요. 자기들은 하나님의 선민이고, 나머지는 개 같은 이방인인 거죠. 이스라엘과 전쟁하시는 하나님은 상상도 못했단 말입니다. 오늘날 세상 교회들 정신차려야 해요 내가 믿는 하나님이 정말 성경의 그 하나님인지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도 성령의 개입과 책망이 없이는 불가능입니다.
이스라엘 그들이 아는 메시아는 민족 메시아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메시아예요. 그게 이스라엘의 착각이었어요. 그래서 진짜 메시아가 오시자 때려죽였어요. 그런 하나님은 없어..그런 메시아는 없어.. 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있는 한 자기들이 하나님의 선민이 아닌 거예요. 예수님만 사라지면 자기네들에게 아무 일이 없겠다 싶어서 빌라도에게 죽이라고 했지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세상 교회들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버린 거예요. 사람들이 저더러 교회를 깨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교회를 깨는 게 아니라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진짜 교회는 이 세상 속에 감추어져 있어요. 대한예수교장로회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피로사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이기 때문이에요. 모든 세상 우주 만물이 내 중심으로 존재한다는 아담의 본성적인 사고가 바로 하나님의 원수 된 악한 생각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1장 6절에서 확인 도장을 찍습니다.
(고전 1장)
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예수를 믿는다는 말을 쉽게 표현하면 나를 믿지 않는 거예요. 이거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나는 아니요 십자가 지신 당신이 나의 주님이요 하나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건 성령으로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부터 인정해야 해요. 우리 몸은 여전히 내 중심의 사고, 내 중심의 판단밖에 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을 교회에 주신 것입니다. 세상 정신, 세상 가치관, 시대 정신 등에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말씀을 맡은 직분자들을 그 시대마다 자기 몸된 교회에게 보내주신단 말입니다. 몇백년 간 말씀이 없었던 암흑시대도 있었지만, 오늘 이자리에 창세전 약속 안에 있는 여러분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말씀을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숫자는 많지 않지만 예수 이름으로 모인 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