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에게 영이 임함
민 11:24-35
24 모세가 나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에게 알리고 백성의 장로 칠십 인을 모아 장막에 둘러 세우매
2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영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영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하지 아니하였더라
26 그 기명된 자 중 엘닷이라 하는 자와 메닷이라 하는 자 두 사람이 진영에 머물고 장막에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나 그들에게도 영이 임하였으므로 진영에서 예언한지라
27 한 소년이 달려와서 모세에게 전하여 이르되 엘닷과 메닷이 진중에서 예언하나이다 하매
28 택한 자 중 한 사람 곧 모세를 섬기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여 이르되 내 주 모세여 그들을 말리소서
29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30 모세와 이스라엘 장로들이 진중으로 돌아왔더라
31 바람이 여호와에게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영 곁 이쪽 저쪽 곧 진영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쯤에 내리게 한지라
32 백성이 일어나 그 날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열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진영 사면에 펴 두었더라
33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34 그 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불렀으니 욕심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
35 백성이 기브롯 핫다아와에서 행진하여 하세롯에 이르러 거기 거하니라
민 11:25-35 / 그러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서 내려오셔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내리셨던 영을 장막 주위에 둘러서 있는 장로 70명에게도 내려 주셨다. 이렇게 여호와의 영이 장로들을 휘감자 그들이 예언자들처럼 예언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26) 장로 70명 가운데 엘닷과 메닷 두 사람이 만남의 장막문 앞으로 가지 않고 그냥 진영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그 두 사람도 하나님의 영을 받아 예언하였다. 27) 소년 하나가 모세에게 달려와 `엘닷과 메닷이 진영 안에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고 전하였다. 28) 젊었을 때부터 모세 곁에서 그의 일을 거들어 주던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소년이 전하는 말을 듣고는 모세에게 말하였다. `그들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29) 그러자 모세가 대답하였다. `지금 네가 나 때문에 염려가 되느냐? 나는 차라리 온 무리가 모두 다 여호와의 영을 받아 예언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모두가 다 예언자가 되면 좋겠다!' 30) 모세와 백성의 지도자들인 장로 70명은 각자 자기들 진영으로 돌아갔다. 31) [메추라기 고기] 여호와께서 바다가 있는 서쪽에서부터 바람을 일으켜 메추라기를 몰아다 주셨다. 땅 위에 무려 1미터 정도나 높게 쌓일 만큼 엄청나게 많은 메추라기 떼가 진을 친 곳 사방에 마구 떨어졌다. 백성들은 하룻길 되는 곳까지 떨어져 쌓이는 메추라기를 주워 모았다. 32) 그들은 몰려 나와 하루 밤낮과 그 다음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잡았다. 어찌나 많이 잡았던지 아무리 적게 잡은 사람도 10가마니 이상씩 잡아서는 진지 이곳저곳에 널어놓았다. 33) 그들은 이렇게 잡아들인 고기를 실컷 먹었다. 그렇게 실컷 먹은 메추라기 고기가 아직 이빨 사이에 끼여 있는데 여호와께서 전염병을 퍼뜨리셨다. 여호와께서 노하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34)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그곳을 `탐욕의 무덤'이라는 뜻으로 기브롯핫다아와라 이름 지어 불렀다. 욕심 때문에 죽은 사람들을 그곳에 묻었기 때문이다. 35) 그들은 그곳 기브롯핫다아와에서 떠나 하세롯에 이르러 그곳에 진을 쳤다.
여호와의 영이 장로 70인에게 임하고 하나님께서 메추라기 떼를 통하여 고기를 먹이십니다.
여호와께서 구름가운데 강림하사(24-25)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70인의 장로들을 모아 회막 주위에 세우십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임한 영을 주셔서 권위를 그들에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은혜 가운데 진행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70인의 장로들에게 내린 영도 이번뿐이었습니다. 본보기로 세우신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영이 임하였으므로(26-30) 기명된 자 중에 진영에 머물러 있던 엘닷(하나님의 친구)과 메닷(우정)에게도 영이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를 세우실 때 능력도 함께 허락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세움을 받은 자는 자신의 부족함을 핑계대지 말고 부르심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상황과 장소와 시간에 구애됨이 없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활동합니다(시 139:7). 여호수아는 일이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모세에게 일이 멈추어지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하지만 모세는 그런 여호수아를 책망하고, 일을 계속 진행시킵니다. 모세는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실 더 큰 일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을 통해 선지자를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알고 선포하며, 가르치고 타락한 백성들의 마음을 변화시키시기 원하십니다. 성령의 은사는 독점하거나 주어진 능력을 동원하여 자기의 지위를 절대화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성령의 은사대로 일하는 사람을 시기해서는 안 됩니다.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31-35) 하나님은 만나로 만족하지 않고 불평하며 원망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메추라기 떼를 동원하여 고기를 먹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과 불만을 토하며 고기를 구했을 때, 그들을 무조건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탐욕을 부린 백성들에게 자신의 탐욕이 이루어졌다고 기뻐하던 순간에 하나님의 진노로 다 죽어 장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곳을 ‘탐욕의 무덤’이라는 뜻으로 기브롯 핫다아와라 불렀습니다. 끝없는 욕심은 자신을 파멸로 이끌게 될 것입니다. 또한 배부른 생활이 항상 개인에게 유익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악인의 번영은 멸망을 앞당기는 역할을 합니다(잠 23:17; 전 2:26). 시내 산 이전에는 이스라엘의 범죄에도 징벌을 내리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내 산을 출발한 뒤에는 백성들의 범죄에 하나님은 매우 단호하셨습니다. 신앙의 연륜이 더해질수록 하나님 앞에 책임 있는 삶의 모습이 있어야겠습니다.
적용: 부르심 앞에 당신의 부족함을 핑계로 무엇을 회피하고 있나요? 동역자는 시기의 대상이 아니라 격려와 협력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빌 1:27).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진정으로 내가 살고 성공하고 평안하기 원한다면 인간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를 말하지 말고 미래를 말하며, 내 크기에 머물지 말고 하나님의 크기를 바라보고, 육적인 것을 버리고 영적인 것을 추구하고, 일반상식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가장 현명한 성도가 되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 설 교 >
주님의 손이 짧으냐?
민수기 11:21-23 / 이영훈 목사
오늘은 민수기 11장 21절~23절 말씀 가지고 “주님의 손이 짧으냐?” 이와 같은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제목을 한 번 따라 해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손이 짧으냐” “주님의 손이 짧으냐”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믿음의 사람을 찾고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을 찾으시고 믿음의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믿음의 사람을 찾고 계시고 믿음의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문제에 둘러싸여서 헤매고 있는 이유는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고 연약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인정받는 그러한 큰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의 사람이 될 때 하나님의 귀한 일을 잘 감당해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가운데 저들이 해방 받아서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들이 절대긍정, 절대감사의 믿음으로 무장하고 전진해 나갔더라면 한 달이 되지 못해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저들이 절대긍정의 믿음으로 무장하지 않고 입만 열면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았습니다.
1.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
먼저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어느 날 저들이 광야에서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 도중에 출애굽 할 때 따라 나왔던 이방 족속들이 탐욕을 품고 불평을 쏟아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불평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방 거기에 전염되어서 그 말을 듣고 울며 같이 원망과 불평을 했습니다. 민수기 11장 4절입니다.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그들이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민수기 11장 10절입니다.
백성의 온 종족들이 각기 자기 장막 문에서 우는 것을 모세가 들으니라 이러므로 야훼의 진노가 심히 크고 모세도 기뻐하지 아니하여
입만 열면 불평하는 저들이 이제는 고기가 먹고 싶다고 원망, 불평을 했습니다. 저들이 다 광야에서 천막을 치면서 거기서 거주하고 또 이동을 했는데 그 천막 앞에 종족 대표들이 나와서 울면서 불평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얘기를 듣고 크게 진노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모세도 마음이 매우 불편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삽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우리 주변에 습관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에 가득차서 원망과 불평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과 어울려 지내다 보면 알게 모르게 우리도 부정적이 되고, 쉽게 원망과 불평을 하는 사람들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평생 살아가면서 부정적인 생각을 쫓아내고 부정적으로 말하고 늘 원망, 불평하는 사람들을 멀리해야 되는 것입니다. 가까이 있다 보면 알게 모르게 우리가 전염되는 것입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스크를 하지 아니하고 그 바이러스가 있는 사람과 같이 대화를 나누고 식사를 하다 보면 그냥 알게 모르게 전염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정적인 생각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침투해 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말씀을 묵상하고 깨어있어서 기도하며 성령으로 충만함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절대로 부정적인 생각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되고 쉽게 원망과 불평하는 그러한 모습으로 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잠시 방심하고 기도를 소홀히 하고 말씀 묵상을 소홀히 하고 영적으로 나태해지면 금방 부정적인 생각이 우리에게 침투해 들어옵니다. 신천지를 비롯한 각종 이단들이 이 틈을 노리고 들어와서 우리 성도들을 미혹시켜서 이단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늘 성령으로 충만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물리치고 우리 입술에서 원망과 불평이 나오지 않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차단시키고 절대긍정, 절대감사의 믿음으로 무장해서 믿음으로 전진, 또 전진, 또 전진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잠언 4장 23절에 마음을 지키라고 말씀했습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철저하게 마음을 지켜서 어떤 경우에도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서 원망과 불평을 하지 않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들은 절대긍정, 절대감사로 무장해서 믿음의 전진, 또 전진, 또 전진하여 하나님의 큰 복을 받는 복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모세의 탄식
이 원망과 불평의 말을 듣고 모세가 마음이 아팠습니다. 모세가 탄식하는 장면이 그 뒤에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2백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한 이래로 끊임없이 원망과 불평을 하는 부정적인 얘기가 쏟아져 나와서 너무너무 힘들고 지쳤습니다.
여러분 주변에 한, 두 사람이 계속 와서 불평하고 또 불평하고 또 불평하면 얼마나 마음이 불편하고 짜증이 나겠습니까. 그런데 한, 두 명도 아니고 2백만이나 되는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입만 열면 불평하고 또 불평하고 또 불평하니까 모세가 너무 힘들고 지쳤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고통을 하나님 앞에 쏟아놓습니다. 민수기 11장 11절, 12절입니다.
모세가 야훼께 여짜오되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을 내가 배었나이까 내가 그들을 낳았나이까 어찌 주께서 내게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14절에 말합니다.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끊임없이 계속되는 불평 가운데 너무 힘들고 지쳐서 “주님! 내가 저들을 낳은 부모도 아니고 내가 저들의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있는 그러한 모든 것을 갖춘 사람도 아닌데 왜 저들을 다 품게 하셔서 이렇게 내게 고통을 주십니까. 저는 너무나 감당하기 힘듭니다.”라고 탄식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한 이래로 지금까지 원망과 불평을 끊이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홍해가 가로막히니까 뒤에 바로 군대가 따라오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과 불평을 했습니다. 우리가 죽을 곳이 없어서 그냥 내버려 두지 끌고 여기까지 왔느냐.
그들이 10가지 재앙을 통하여 큰 기적을 체험하고 마지막 유월절 사건을 통하여 해방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은혜는 금방 잊어버리고 우리를 장사지낼 곳이 없어서 여기까지 끌고 왔느냐 원망과 불평을 했습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홍해를 육지처럼 건넌 다음에도 그들은 물이 없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또 물을 발견한 후에는 물이 쓴물이라고 불평을 했습니다. 그 쓴물이 단물이 되고 나서 그들이 목을 축이고 난 다음 행군하는데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셔서 매일 같이 일용할 양식을 다 채워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저들은 고기가 먹고 싶다고 불평을 하는 것입니다.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하다가 저들이 해방받았는데 그 은혜에 대한 감사는 다 사라져버리고 하나님과 지도자 모세에게 계속 원망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부정적인 이야기만 쏟아놓았던 것입니다.
‘어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럴 수 있는가?’하고 우리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제가 기도를 하는데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쉽게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입만 열면 불평하며 광야에서 40년을 멤돌았습니까. 주님께 물어보았더니 그것이 바로 너희들의 모습이다. 주님이 말씀하셨어요.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나 같은 죄인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습니다. 죄와 허물 많은 나 같은 죄인을 주님이 택하여 그 놀라운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힘든 일이 생기고 내게 조금만 어려움이 생기면 쉽게 남탓하고 원망과 불평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들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하나님과 모세 앞에 불평한 것과 전혀 다름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 믿고 나서도 ‘내가’ 삶의 중심이 되면 우리는 쉽게 불평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내게 조금만 어려움이 다가오고 내게 조금만 문제가 생기고 누가 조금만 나를 무시하고 누가 나를 조금만 어렵게 하고 힘들게 하고 비난하면 우리는 참고 견디지 못하고 부정적인 이야기를 쏟아놓습니다. 교회를 다니다가도, 열심히 봉사하다가도, 자기가 교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당한다고 생각하면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결단해야 됩니다. 하나님 내가 일평생 주님 앞에서 원망, 불평하지 아니하고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교회를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주의 종들과 직분자들에게 늘 힘들고 어렵게 하는 그러한 부정적인 이야기만 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더운 여름날 차가운 생수처럼 그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주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워싱턴에서 땅을 3천 평을 사고 5년에 걸쳐 교회를 지었습니다. 눈물로 그 교회를 헌당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짓자마자 불평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왜 우리 부서의 방은 없습니까. 왜 우리 방은 저쪽 부서보다 방이 작습니까. 방이 크다, 작다, 있다, 없다 불평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몇 년 동안 학교에서 강당을 빌려 예배를 드릴 때 학교 강당이 어른들 대예배 장소였고 교실 두 개 빌려서 하나는 중고등부, 하나는 유년부 이렇게 예배를 드렸는데 지금 새로 교회를 지어서 교회학교 예배 장소도 생기고 많은 교실도 생기고 여러 부서 방도 생겼는데도 불구하고 내 방, 내 방, 내 방 하면서 너도, 나도 나와서 불평을 쏟아놓았습니다.
얼마나 속이 상하는지 보통 사람 같으면 화를 낼 수가 있었을 텐데 제가 목사라 꾹꾹 참고 “그러면 우리가 교육관을 지읍시다!” 그래 가지고 연이어서 교육관을 지었습니다. 교육관을 지어서 방을 다 나눠주고 나니까 불평이 거의 다 사라지더라고요. 여러분 불평하려면 끝이 없습니다. 복 받은 인생을 살아가려면 감사가 넘쳐나야 합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 이렇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무슨 일이든지 범사에 감사하라, 감사하라, 감사하라. 보통 감사가 아니라 넘치는 감사를 드리라고 골로새서 2장 6절, 7절은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넘치는 감사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힘들어도 감사하고 괴로워도 감사하고 억울해도 감사하고 답답해도 감사하고 슬퍼도 감사하고 무조건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또 감사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3.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
성경은 이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역사에 대해서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을 하나님이 들으시고,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너희 중에 지도자 70명을 뽑아서 내 앞에 서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11장 16절입니다.
야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노인 중에 네가 알기로 백성의 장로와 지도자가 될 만한 자 칠십 명을 모아 내게 데리고 와 회막에 이르러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라
하나님께서 먼저 이 무거운 짐을 함께 나눠 들 70명의 지도자를 뽑아서 하나님의 성막 앞으로 데려와 서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셔서 그 귀한 사명을 감당하게 하실 것을 말씀합니다. 민수기 11장 17절입니다.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영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네가 지도자 70명을 세워 놓으면 내가 와서 너에게 부어진 성령을 그들에게도 부어줄 것이라. 교회 교역자, 장로, 재직들은 교회의 모든 무거운 짐을 함께 나누어지는 자들입니다.
그 일로 인해서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우리가 준비가 되면 우리는 주님이 맡기신 귀한 사명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어떤 경우에도 교회 재직들이 교회에 문제를 일으켜서 교회에 무거운 짐을 얹으면 안 됩니다. 재직들은 문제를 해결하라고 세운 하나님의 일꾼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라고 교회에 장로님도 세우시고 권사님도 세우시고 안수집사님도 세우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재직들이 주의 종과 한마음이 되어서 교회의 모든 무거운 짐을 함께 지고 믿음으로 전진해 나갈 때 하나님께서 복에 복을 더해주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11장 18절~20절입니다.
또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몸을 거룩히 하여 내일 고기 먹기를 기다리라 너희가 울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좋았다 하는 말이 야훼께 들렸으므로 야훼께서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실 것이라 하루나 이틀이나 닷새나 열흘이나 스무 날만 먹을 뿐 아니라 냄새도 싫어하기까지 한 달 동안 먹게 하시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중에 계시는 야훼를 멸시하고 그 앞에서 울며 이르기를 우리가 어찌하여 애굽에서 나왔던가 함이라 하라
오늘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큰 복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 앞에 거룩하게 하라. 축복을 받을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거룩이란 무엇입니까. 분리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면 내 삶의 모습에서 ‘죄’가 분리되고 ‘부정적인 생각’에서 분리되고 ‘원망과 불평’에서 분리되고 ‘잘못된 모습’에서 분리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려주십니다. 주님 앞에 철저히 회개하고 성결한 모습으로 변화될 때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여시고 복을 내려주십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준비된 다음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도자 모세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이와 같이 답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달 동안 고기를 먹게 해준다고 하시니까 그 말씀에 무조건 아멘하면 됐을 터인데 모세도 많이 마음이 지쳤던가 봅니다. 민수기 11장 21절, 22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이르되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의 보행자가 육십만 명이온데 주의 말씀이 한 달 동안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 하시오니 그들을 위하여 양 떼와 소 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
60만은 이십 세 이상 장정들만 말합니다. 나와 함께 있는 20세 이상의 장정만 60만이고 다 합치면 200만이 넘는데 하나님 그들에게 어떻게 한 달 동안이나 고기를 배불리 먹게 해주실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있는 양 떼, 소 떼를 다 잡은들 그것이 가능하겠사오며, 바다에 있는 고기를 다 잡아 온들 이 200만이 넘는 사람들이 한 달 동안 먹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생각으로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기도를 주님께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민수기 11장 23절에 말씀하십니다.
야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야훼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야훼의 손이 짧으냐. 왜 너의 적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무한대의 능력을 제한하고 있느냐. 그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우리의 생각으로 우리의 적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할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을 찾고 계신 것입니다. 큰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절대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적은 믿음의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약속의 말씀을 꼭 붙잡고 부르짖어 기도하며 절대긍정, 절대감사의 믿음으로 무장해서 무한대의 믿음을 갖고 나아갈 때 무한대의 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놀라운 기적을 우리에게 행하고 계십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할렐루야. 동일하신 주님이 지금도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을 통하여 그 일을 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후에 저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고 그리고 주님의 일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저들이 준비되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더하여 바다에서 바람이 불게 하시니 메추라기 떼가 날아와서 그들의 진에 덮였습니다. 민수기 11장 31절입니다.
바람이 야훼에게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영 곁 이쪽 저쪽 곧 진영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쯤에 내리게 한지라
막 하나님의 바람이 부는데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메추라기 떼가 막 쏟아지는데 하룻길, 1km 사방으로 메추라기가 막 쌓입니다. 얼마나 쌓이느냐, 두 규빗, 90cm. 메추라기가 얼마나 쌓이는지, 두 규빗이 되게 쌓이는데 그 메추라기를 가져다가 볶아먹고, 지져 먹고, 삶아 먹고, 먹고, 먹고, 먹어도 그 메추라기가 차고 넘쳐서.
저 메추라기가 아주 통통해가지고 삶아 먹고, 구워 먹고, 먹으면 몸에도 좋고 맛도 있고 건강한 몸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데 이것이 두 규빗 쯤 쌓였다고 생각해보세요. 내 허리 높이로 쌓여서 진 1km를 뒤덮었으니 저들이 한 달 내내 얼마나 먹었던지 이제 메추라기 고기 물려서 못 먹겠다 할 정도로 쏟아 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와 같은 놀라운 기적을 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다에서 바람이 불어와 메추라기가 쏟아진 것처럼 지금 이 메마른 땅 한국에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야 되는 것입니다.
코로나-19로 메마른 모든 교회에 성령의 바람이 불어야 하는 것입니다. 텅텅 빈 교회에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서 메추라기가 쌓이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주님 앞에 감사하고 찬양하는 놀라운 은혜의 시간이, 은혜의 날이 우리에게 다가와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야 합니다. 성령이여 임하시옵소서. 성령의 바람이 우리에게 불어와서 텅텅 빈 교회당마다 성도들이 가득가득 차고 넘쳐서 주님의 은혜가 충만히 임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온 천하에 드러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마음에 부흥의 불길이 타올라야 합니다. 이 텅 빈 성전에서 우리가 성전이 가득 차 보조의자를 놓고 예배드리는 그때를 생각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주여 우리 마음이 다시 성령의 불길로 타오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부르짖어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19세기, 20세기 영국이 영적인 암흑기를 지나갈 때 ‘이반 로버츠’라고 하는 한 청년이 일어나서 놀라운 성령의 불길을 일으켰습니다. 1904년 영국 웨일즈에서 일어난 부흥이 온 영국을 뒤덮고 온 유럽을 뒤덮고 온 세계를 뒤덮었습니다.
이 웨일즈 출신의 한 젊은 광부 26세 이반 로버츠 신학생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읽는 유일한 책은 성경책이었고 그의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올랐습니다. 10년 동안 주님이여 이 땅에 부흥을 허락하여주옵소서.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데 1904년 어느 날 새벽에 성령의 불이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 가운데 거룩한 비전을 주셨는데 이 웨일즈에서 큰 부흥이 일어나서 10만 명의 불신자들이 주님 앞에 돌아 나올 그러한 놀라운 꿈을 그의 마음 속에 부어주셨습니다.
성령님께서는 로버츠에게 이 성령의 불길이 초원의 불이 번져나가는 것처럼 웨일즈를 중심으로 해서 영국으로, 유럽 전역으로, 아시아로, 아프리카로 퍼져나가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로버츠가 어느 수요일 날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 오늘 저에게 간증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간청했습니다. 아니 젊은 신학생이 목사님에게 와서 간증할 시간을 달라 그러니까 조금 당황도 하고 그러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수요예배 끝나고 혹시 자네 얘기를 듣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남아서 얘기를 듣게 하라고 광고를 했는데 17명이 남았습니다. 17명 앞에 그가 불을 토하며 설교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단순했습니다.
1) 당신은 생각나는 모든 죄를 하나님께 고백해야만 한다.
2) 당신은 생활 속에서 좋지 않은 습관은 모두 제거해야만 한다.
3) 당신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즉각 순종해야 한다.
4) 당신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대중에게 나아가야만 한다.
그날 밤부터 부흥의 역사가 시작되어 사람들이 몰려 들어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부흥의 불길이 온 웨일즈를 불태우고 온 영국을 뒤덮게 되었습니다. 한 달이 안 되어 3만 7천 명이나 되는 수많은 사람들이 강단 앞에 나와 그들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고 석 달 만에 1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웨일즈 전역에서 울면서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이 큰 부흥의 역사가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일어나 기도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어느 기록에 따르면 법정에서 재판장과 배심원들이 재판하다 말고 피고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드릴 때 피고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다고 하는 기록이 나옵니다. 술주정뱅이가 사라지고 범죄가 사라져서 판사들이 재판할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영국에서 약 200만 명이 회개하고 주님 앞에 돌아왔습니다. 이 부흥의 역사가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고 한국과 아프리카, 인도, 중국, 전 세계로 확산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에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이 그 영향을 받아서 한국에서도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놀랍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손이 짧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적은 믿음 때문에, 우리의 부정적인 생각 때문에, 원망과 불평 때문에 이러한 하나님의 축복을 막아놓고 있는 것입니다.
주여 다시금 우리의 성령의 불길이 타오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기도가 회복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의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강한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서 우리 삶 가운데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우리는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큰 믿음의 사람이 되어 주님과 손에 손잡고 믿음으로 전진, 전진해 나아갈 때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앞길에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함께 찬송가 401장을 부르면서 주님과 함께 믿음으로 동행하며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승리하는 주님의 귀한 일꾼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합시다
민 11:23-30 / 강성찬 목사
광야 생활에서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을 내가 배었나이까 내가 그들을 낳았나이까 어찌 주께서 내게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이르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민 11:11-15] 하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노인 중에 네가 알기로 백성의 장로와 지도자가 될 만한 자 칠십 명을 모아 내게 데리고 와 회막에 이르러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라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영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민 11:16-17]하신데로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영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영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하지 아니하였더라(민 11:25) 합니다
‘영’에 해당하는‘루아흐’에 정관사‘하’가 붙은 경우, 이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특별한 은사를 뜻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특별한 재능이나 기술 혹은 힘보다 더욱 인격적인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이같이 선택된 70인들에게 모세와 동일한 성령님을 임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특별한 재능을 주심과 함께 특별한 관계를 세우셨습니다. 또한 동일한 성령님이 임하게 하심으로 하나의 통일적인 다스림의 기본을 세우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이 임하셨을 때 그들은 즉각적으로 예언을 하기 시작했다고 증거합니다.
‘예언을 하다’(이트나베우)의 문자적 의미는‘계속해서 말하다, 많은 말로 탄원하다’이며, 성령님의 감동에 의해 신적인 황홀경에 몰입되어 말을 하는 상태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이‘70인 장로’에게 복종하게 하기 위한 성령님의 특별하신 감동으로 볼 수 있으며(삼상 10:6), 동시에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신적 권위와 위엄을 제공받았다는 외적인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들이 말한 예언은 미래사에 대한 예언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영의 감동과 영감 아래서 신비롭고 황홀한 심적 상태를 말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착하고 신실한 종들에게 성령을 받게 하십니다.
모세에게 임한 영이 백성의 장로 70인에게도 임하였습니다.
70인 장로들은 1년 전에 시내산 언약을 체결 한 후 모세와 아론과 함께 산 중턱에서 친교를 나누었던 사람들입니다
[출 24:9-11]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그들은 모세와 하나님 사이에 이루어진 시내산 언약의 현장에 있었고 언약의 축제에서 하나님을 보고 먹고 함께 마셨던 증인들입니다. 이 장로들을 모세의 동역자로 여호와의 권능과 지혜가 온유하며 신실한 종에게 전하여지게 합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성령이 한량없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받을 자를 구별하여 세우십니다.
"백성의 장로 70인을 모아 장막에 둘러 세우매"(민 11:24) 이들은 부름을 받아 따로 구별되었으며 이름이 기록되었습니다(민 11:26).
오순절날 구별된 백이십 명은 성령을 충만히 받았습니다.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들어 우리 자신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성령의 권능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형편에 따라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영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영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하지 아니하였더라(민 11:25)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는 정도는 우리의 믿음과 여호와를 위하여 얼마나 봉사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습니다. 여호와를 위하여 많은 일을 시도하십시오. 그리고 또한 여호와께로부터 많은 것을 받을 것을 기대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받은 자를 감추지 않습니다.
그 기명된 자 중 엘닷이라 하는 자와 메닷이라 하는 자 두 사람이 진영에 머물고 장막에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나 그들에게도 영이 임하였으므로 진영에서 예언한지라 한 소년이 달려와서 모세에게 전하여 이르되 엘닷과 메닷이 진중에서 예언하나이다 하매[민 11:26-27]
성령의 권능은 하늘로부터 내려옵니다. 그것은 결코 감추어지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감추어질 수 없으십니다. 성령에 의하여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실 때 그분을 감출 방법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날 때, 그것은 분명코 사람들의 놀라움과 흥분을 자아낼 것입니다. 성령은 영적인 무관심과 태만을 일깨워 주십니다. 우리가 성령을 부여받았을 때 우리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받은 자는 다른 이들이 성령 받음을 방해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택한 자 중 한 사람 곧 모세를 섬기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여 이르되 내 주 모세여 그들을 말리소서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민 11:28-29]
성령 충만을 받은 자는 그 어느 누구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하여 다른 이들이 권능을 부여받음을 기뻐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권능을 부여받아야 합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합니다.
성령 받은 자는 사명을 감당 합니다
“바람은 만물에 생명을 주고 그것이 커져 태풍이 되면 큰 나무도 넘어뜨린다. 보이지 않지만 거센 힘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입이다”(전춘부).
“우리는 물고기와 같다. 물고기는 언제나 물속에 있어야만 살 수 있다. 성령은 물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생명을 얻는다”(터툴리안).
“모든 존재하는 것은 성령하나님 안에 있고, 그분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또 이해되지 않는다(B. 스피노자).
“성령님은 우리 안에 임재해 계시고 우리를 소생시키시며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산 소망을 주시는 분이다(필립스부룩스).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일꾼의 제일 조건은 바로 성령 충만함을 입는 것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임한 신을 그들에게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신적인 위임을 의미합니다. 이제 70인 장로들은 모세와 동일하게 소명을 받아 백성들의 짐을 나누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 임하자 그들은 예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예언을 했다는 것은 그들에게 모세와 함께 그 백성들을 다스릴 수 있는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주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신적 위임이 매우 중요한데,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모습이 바로 성령 충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성령 충만을 사모해야 하며 성령으로 충만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일하는 사람들은 똑같은 하나님의 일꾼임을 말씀하십니다.
모세에게 임한 하나님의 신이 장로들에게도 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로써 이스라엘의 70인 장로들은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인정되어 백성들을 위하여 일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모세의 지도력에 혹시라도 손상이 갈까봐 여호수아는 모세에게 장로들의 예언을 말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29절)고 여호수아를 질책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임한 모든 자들을 차별 없이 지도자로 인정하였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받은 영을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이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기에 여호수아가 모세를 생각하는 마음에 그들의 예언을 말리라고 하였을 때, 여호수아를 질책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 지도자로 섬기게 된 모든 장로들은 모세와 함께 일해야 하는 동등한 하나님의 일꾼들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일하는 성도들에게는 계급이나 지위가 따로 있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각각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과 직분을 다하는 하나님의 동등한 일꾼들입니다. 그러므로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일꾼된 성도들은 서로를 인정하며 피차 복종함으로 서로를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한 분 하나님을 믿고 한 성령을 받은 성도들이 온전히 성령의 지배를 받는 다면 다툼이나 파벌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고전 1: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받은 자에게는 분명한 증거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자 70인의 장로들은 예언을 하기 시작했다고 증거합니다. 이로써 그들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우심을 받은 자임을 인정받게 됩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받은 이들에게는 증거가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예언을 하거나 방언을 하거나 혹은 지혜롭게 말씀을 전하는 등의 은사는 결국 성령의 임재의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이 땅에 남겨진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한 오순절 사건(행 2장)은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있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자 그들은 각기 다른 나라 말로 방언을 하기 시작하였고, 배움이 많지 않던 갈릴리 어부 출신의 베드로가 지혜롭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합니다.
3천명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성령 충만을 받은 자들에게는 하늘의 증거가 나타나게 됩니다.
분명한 사실은 성령을 받은 자들은 반드시 성령을 받은 증거를 갖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는 무엇인가요?
그것이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신비한 은사는 아니라 할지라도,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야 합니다.
“사랑과 희락과 자비와 화평과 오래 참음과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인격적인 성숙이 우리에게 있j야 합니다. 만일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우리는 성령을 받은 자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성령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지 않으면 온전한 승리의 삶을 살 수 가 없습니다.
오직 성령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붙잡고 강하게 하시고 도와주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능력 있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오순절은 유월절 주간의 안식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에 지키는 유대인의 3대 절기(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의 하나이며(레 23:15-16),‘칠칠절’(출34:22; 신16:10), ‘맥추절’(출 23:16) 혹은 ‘초실절’(출 34:22)이라고도 합니다.
유월절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예표하는 것이라면 오순절은 신약시대 교회의 시작이라는 영적 의미를 지닙니다.
행2:2-4절에는 성령님의 강림하심이 징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람’,‘불’(마3:11-12),‘방언’등입니다. 이제까지 유대 전통에서 이러한 징표들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나타내는 표시였습니다(출 3:2-5, 13:21, 24:17, 40:38). 특별히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로 성령님의 임재가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것
은 ‘바람’(프노에)의 어원을 살펴보았을 때 ‘영’(프뉴마)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으며, 신약(요3:8)과 구약(왕상19:11; 시104:4)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3절)란 말은 약속된 주의 성령님이 ‘각 사람’ 위에 임했다는 사실로, 요엘 선지자의 예언(욜2:28-32)과 예수님의 약속이 구체적으로 성취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구약에서 특수한 목적을 위해서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한정되었던 성령님의 임재(민 11:26-29; 삼상 10:6-
12)가 이제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무리 가운데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우리도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 비해 열등하지 않다. 그는 성부 성자와 동일하시며 함께 영원하시다”(어거스틴).“성령은 참되시고 변함이 없으시며 성부 하나님 및 성자 하나님과 더불어 한 하나님이시다”(루터).
“성령은 우리의 변호자이시다. 그 분은 우리를 돕고 가르치고 중재하기 위해 보내지셨다”(스위팅).
“성령은 당신의 친구다. 성령은 당신을 위해 함께 거하며 가르치며 훈계하고 축복한다”(바우웬).
“세상에서 365일 동안 있는 것보다 성령 안에서 24시간 있는 것이 더 낫다”(R.A. 토레이).
“나에게 하나님의 영이 떠나가면 나는 고기 한 덩어리에 불과하다” (빌리 그레이엄).
“당신의 생애에 능력이 없는 것은 도우시는 성령께 전적으로 맡기지 않았기 때문이다”(D.L. 무디).
“짐 때문에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도우시는 성령님 없이 혼자 지기 때문이다”(레바딘).
“성령님의 섭리에 의해 우리들에게 배당된 재능이 무엇이든지 간에 바로 그것이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임무와 명예가 된다”(T. 에드워즈).
“성령님은 성도의 일상 생활 전반을 지도하신다”(에번즈).
“세상은 성부, 성자, 성령께서 완성하신 경이로운 작품이다”(세일즈).
이러한 말들은 우리가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야 하고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북 아프리카의 엘 알라맹(El Alamein)이라는 곳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엘 알라맹을 지키고 있던 영국군의 병력과 독일군의 병력은 서로가 최선을 다하는 막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양 진영이 모두 다 사막에서의 전투를 수행하는 중에 식수가 고갈되어 괴로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영국군은 전통적인 자신들의 방식대로 물을 발견하고서는 전지까지 파이프를 연결하고 그곳에 바닷물을 채워 넣었습니다. 파이프의 이상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아까운 식수를 허비하기 보다는 이렇게 하여 바닷물로 시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정찰을 나섰던 독일 병사들에 의해 이 파이프 라인이 발견되어졌고, 이 사실은 즉시 독일 진영에 알려져 전 병력이 달콤한 물을 기대하며 곡괭이로 파이프 중간을 끊어 내었습니다. 펑펑 쏟아지는 물을 본 순간 앞뒤 가릴 것 없이 장. 사병 모두 물을 들이켰다. 얼마나 급하고 정신이 없었던지 이들은 얼마 안 있어서 통증이 오기까지는 그것이 소금물인 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처음의 갈증보다 더 심한 고통에 못이겨 마침내 항복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엘 알라맹에 있던 영국 군대는 적의 중대 병력 전원이 고통스런 숨을 내쉬며 손을 머리 위로 똑바로 들고서 어정어정 걸어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투항한 독일군이 제일 먼저 한 행동은 영국군이 가진 물을 얻어 활활 타오르는 목구멍 속으로 들이키는 일이었다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육적으로, 영적으로 갈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물이나 들이키다간 영육으로 멸망하고 맙니다. 오직 주님이 주시는 성령의 생수만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생명수가 됩니다.
[요 7:37-39]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아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70인 장로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허락하시어 그들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려면 성령을 받아야 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신 성령님, 오늘 우리들에게도 충만하게 임하사 우리를 주장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며, 충만한 은총 속에 영광 돌리며 사명 감당합시다.
시기를 극복한 사람들
민 11:24-30 / 김홍도 목사
시기(jealousy)는 남을 크게 해치고 자신에게 큰 손상을 입히는 심리상태입니다. 콜튼(Charles Colton)씨는 “남이 불행해질 때 진심으로 동정하는 사람이 한 사람쯤 있다면 남이 성공할 때 시기하는 사람은 천 명쯤 된다”라고 했습니다. 또 “남이 성공할 때 시기하지 않고 존경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라고 한 사람도 있습니다. 시기심을 극복하지 않으면 큰 축복을 받을 수 없고 하나님께 큰 그릇으로 쓰임 받을 수도 없습니다.
본문에 보면 모세는 시기를 극복한 위대한 지도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를 돕는 70인 장로들이 모세가 받은 성령을 다 받고 예언도 했는데 그 중에도 엘닷과 메닷이란 사람은 회중에 나오지도 않고 장막 안에 있다가 성신을 받고 예언을 했습니다. 이 때에 장차 모세의 후계자가 될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이르기를 “…내 주 모세여 금하소서”(민11:28) 하고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후계자가 될 여호수아의 마음속에 다른 사람이 혹 그 자리를 넘보지 않을까 시기하는 마음이 생겼던 모양입니다. 이때 모세는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민11:29)고 대답했습니다. 모세는 시기심을 극복한 위대한 지도자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1. 남을 해치는 시기
① 시기심 때문에 최초로 살인한 사람은 가인입니다
자기의 불신 때문에 제사에 실패한 잘못은 깨닫지 못하고 제사가 열납된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농기구로 쳐 죽였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살인 사건이 바로 시기 때문이었습니다.
② 다윗을 죽이려한 사울왕
사울왕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되자 무적의 장수 골리앗이 나타났습니다. 아무도 나가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을 때 소년 다윗이 의분에 불타서 나가 골리앗을 물리쳤을 때 여인들이 춤을 추며 다윗을 칭송하기를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18:7) 하는 말을 듣고 사울은 심히 불쾌해 하며 시기심이 불타올라 “이러다간 다윗이 내 왕위까지 빼앗겠구나” 하면서 구국공신이며 자기 사위인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다 결국 다윗을 찌르려던 그 창에 자기 가슴을 찔러 자살하였습니다. 사무엘상 19장 10절에 “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라고 한 말씀을 보면 시기심을 극복하지 못하면 마귀에 사로잡혀 불행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③ 모세를 시기하다 문둥병에 걸린 미리암 모세의 삼남매 중 첫째가 미리암이고 둘째가 아론이고 막내가 모세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어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 좌지우지하는 것을 보고 은근히 시기하고 미워하던 차에 모세가 어쩌다 구스 여자를 아내로 맞았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에디오피아 사람이라고 되어 있는데 어쨌든 아프리카 흑인 여자를 얻었을 때 이 때가 기회다 하고 아론과 합세하여 비방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민12:2)라고 했고 그 다음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민12:2)고 하셨고 8절에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하시고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주모자 되는 미리암을 쳐 문둥병에 걸리게 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간곡히 기도하여 일주일 후에 고쳐 주셨지만 자기 동생으로만 알고 영적 지도자인 모세를 비방하다가 문둥병에 걸렸던 것입니다. 시기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④ 예수를 죽인 바리새인들의 시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직접적인 원인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18절에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고 했습니다. 시기의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시기는 살인하고 거짓말하는 마귀가 주는 마음입니다. 요사이 장경동 목사님이 인기가 올라가는 것을 보고 시기하여 비평하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어쨌든 기독교를 비방하던 도올 김용옥 씨를 치우고 일반 공영 방송에 나와 웃기면서도 전도를 하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 분은 하루 일곱 시간씩 기도하라고 가르친다고 합니다. “나보다 기도를 더 많이 해서 그런 축복을 받는구나”라고 생각하고, 부럽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명성교회가 장로교 최대의 교회가 된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김삼환 목사님이 얼마나 고생하고 연단 받았는지 말도 못합니다. 그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도 따라가지 못합니다. 시기하면 안 됩니다. 작은 교회 목회자들이 큰 교회를 헐뜯고 비평하는 일을 많이 하는데 이것은 복 받지 못할 일입니다.
남을 비판하고 비방할 때 “과연 내가 순수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냐, 시기심에서 하는 것이냐”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시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축복도 못 받고 귀한 그릇이 될 수도 없습니다.
2. 자기를 해치는 시기
시기는 남을 비방하고 부당하게 비판하여 큰 해를 끼칠 뿐 아니라 자신도 큰 손해를 입는 무서운 죄악입니다. 동생을 시기하여 농기구로 쳐 죽인 가인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유리방황하는 신세가 되었고 사울왕은 시기심을 극복하지 못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다가 악신에 시달리며 미쳐 날뛰다가 결국 다윗을 죽이려던 창에 자기 가슴을 박고 자살했습니다. 미리암은 동생이라고 얕잡아보고 지도자 모세를 함부로 비방하다가 문둥병까지 걸렸고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행진이 일주일이나 지연되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싸우고 다투며 분란이 일어나는 것은 그 근원을 보면 시기심 때문인 경우가 많은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시기심이 교회를 파괴하는 마귀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가 늙어서 플로렌스(Florence)에 있는 큰 홀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 스케치를 부탁 받았는데, 젊은 화가 미켈란젤로(Michelangelo)도 역시 스케치를 부탁받았습니다.
그 때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어떤 사람이 두 사람의 스케치를 보다가 말하기를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이젠 늙었구만” 하고 말하는 것을 듣고 마음에 상처를 받고 자기 명예가 실추되었다고 느끼며 남은 생애를 우울증에 시달리며 보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심할 것은 남을 칭찬하는 말을 들을 때 시기심이 들거나 자신이 상처받지 않도록 조심해야 되며 또 남에게 시기심을 유발시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됩니다. 시기심을 극복하지 못하면 남을 악평하거나 중상모략 하여 큰 해를 입히게 되고 자신도 마귀에게 사로잡히게 되고 큰 손해를 보게 됩니다. 결코 성령충만 하거나 은혜충만한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잠언 14장 30절에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시기심을 극복하지 못하면 마음에 화평이 없고 불안하게 되고 뼈가 썩는 것 같은 큰 고통과 손해를 입습니다. 욥기 5장 2절에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시기를 극복 못하면 어리석은 자가 되고 큰 손상을 입습니다.
3. 시기의 동기
시기는 교만하기 때문에 생기는 심리입니다. 남에게 존경과 칭찬을 많이 듣는 사람이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이 칭찬 듣고 존경받는 것을 보면 불안해 하고 시기하게 됩니다. 아예 자기는 부족하기 한량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를 낮추기 때문에 시기할 기회가 적습니다. 시기는 교만의 사촌입니다.
사울왕은 이스라엘의 초대왕으로서 인물이 출중하게 잘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키가 어깨 위는 더 큰 사람이고 인물이 준수한 사람인데다 왕이 되고 나니까 교만해져서 누구의 말도 안 듣고 하나님의 말씀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 교만을 깨뜨리시려고 무적의 장수 골리앗이 나타났는데 속수무책이었을 때 소년 다윗이 나타나 골리앗을 쓰러Em렸습니다. 그 때에 여인들이 춤을 추며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18:7) 하는 말을 듣고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왕위를 빼앗길까봐 두려움이 생겨서 자기 사위요, 구국공신인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녔고 악신에게 시달렸습니다. 교만해져서 시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비극의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전에 리비아 사막에 한 성인이 은둔생활을 했습니다. 세상 것을 초월한 성자였습니다. 마귀가 예쁜 여자로 나타나 유혹을 해도 흔들리지 않았고 물질이나 명예로 시험해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 한 마귀가 그런 시시한 방법 집어치우라고 하며 다른 방법으로 접근했습니다. 그 성인에게 가까이 가서 귀에다 대고 “혹시 이 소식 들었습니까? 당신의 동생이 알렉산드리아에서 감독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고 속삭였더니 그 평온하던 얼굴이 금방 잔뜩 찌푸려지더니 험악한 얼굴이 되더랍니다.
성공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가난하다가 부자 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직위와 직분이 높아질 때 교만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만 마귀, 시기의 마귀가 들어와 마음을 사로잡게 됩니다.
4. 시기를 극복하면 큰 인물이 되고 큰 복을 받습니다
사무엘하 3장 1절에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가니라” 하는 말씀을 읽을 때 사울왕에 대해서 측은한 생각이 들면서 비참함을 느끼게 됩니다.
마음이 겸손하고 너그러운 다윗은 점점 강성해지고 마음이 좁고 교만하여 시기심으로 꽉 차서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던 사울왕은 점점 쇠약해지다가 결국 자기 창에 자기가 엎드려 자살하고 훌륭한 아들 요나단도 죽고 말았습니다. 교만과 시기를 극복하지 못하여 결국 비참한 운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순간순간 기도하면서 시기를 극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참해지고 치사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유명한 주경가 F. B. 마이어 목사의 은혜로운 간증담이 있습니다. 가까운 친구인 G. 캠벨 목사가 미국에서 사역할 때는 매일 기도해 주는 일은 쉬운 일이었는데 캠벨 목사가 영국으로 돌아와 자기 교회 가까이서 목회한다고 하니까 불안과 시기심이 일어나기 시작하더랍니다. 그러나 마이어 목사는 그 마음을 눌러버리고 자기 교회에서 크게 환영식을 해드리고 그날 밤에는 캠벨 목사님 교회에 가서 그 분의 설교를 듣기로 하고 갔더니 유명한 C. H. 스펄젼(Spurgeon) 목사님도 오셨더랍니다. 결국 마이어 목사님도 훌륭한 목회자로 또 주경가로 성공적인 목회를 하였다고 합니다. 얼마나 훌륭합니까?
서양에 있는 한 유명한 대학에서 한 동양 사람이 늘 일등을 했고 브라운(Brown)이란 사람은 그 나라 사람인데 늘 2등만 해서 친구들이 아쉽게 여겼습니다. 그러다가 그 동양 학생이 맹장염에 걸려 수술하느라고 여러 날 결석을 하게 되자 브라운의 친구들은 은근히 좋아하며 이번 학기에는 일 등을 하리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학기말 시험을 보자 동양 학생이 또 일 등을 하더랍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니까 그 동양 학생이 고백하기를 병원에 있을 때 브라운 학생이 라이벌이며 적수인 자신을 매일 찾아와서 강의 들은 것을 보여주고 설명해 주어서 여전히 일 등을 했다고 하면서 “나는 공부벌레가 되어서 성적으로 일 등은 했지만 인격적으로 브라운을 따라갈 수 없으며 훌륭한 인격자인 그를 존경한다”라고 하더랍니다. 시기심을 극복한 브라운 학생이 얼마나 훌륭합니까? 교만과 시기심이 들 때 속으로 간절히 기도하며 이를 극복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축복하실 것입니다.
영적인 시기심을 버리라
민수기 11장 26-29절 / 이한규 목사
<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 >
모력의 조력자로 선택된 70명의 장로가 장막에 나아간 상태에서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표징이 나타날 때 엘닷이라 하는 자와 메닷이라 하는 자 두 사람이 진영에 머물고 장막에 나아가지 않았는데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임함으로 자기 진영에서 예언했다(26절). 그들이 어떤 사정으로 성막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진영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도 성령이 임한 것이다. 그것은 성령 충만의 은혜를 입기 위한 특정하고 신령한 장소가 따로 없다는 암시다.
특정 장소에 모이는 것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은혜롭지 못한 모임은 피하고 때로는 선한 영향력의 확산을 위해 흩어질 줄 알라. 진리가 특정 장소에만 머물게 하지 말라. 특별히 거룩한 장소는 없다. 교회도 특정 장소만이 아니라 두 세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다. 피치 못할 때는 혼자라도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면 그 예배도 하나님이 받으신다. 코로나 상황과 같은 특별한 상황에서는 집에서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이 그 예배를 받으신다.
미국의 한 여행자가 주일에 호텔에서 나가 교통경찰에게 교회를 소개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소개받은 교회로 가는데 몇 개의 교회가 더 있었다. 예배 후 호텔로 돌아올 때 교통경찰에게 가까운 교회도 많은데 굳이 그 교회를 소개했는지 묻자 그가 대답했다. “어느 교회가 좋은 교회인지 제가 가 보지는 못했지만 이곳에서 교통정리를 해보니까 그 교회에서 나오는 교인들의 표정이 가장 행복하고 기뻐 보였습니다.”
성령 충만이 이뤄지는 특별한 장소가 따로 없다. 내가 믿음 가운데 기뻐하며 사는 곳이 성령 충만이 이뤄지는 장소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서 밤중에 찬송했을 때 고통스러운 그 장소가 성령 충만한 장소가 되었다. 장소보다 마음이 중요하다. 좋은 장소에서 지내지 못하는 사람이 좋은 장소에서 지내는 사람보다 더 기쁘게 살 수 있다. 그렇게 살 때 영혼을 이끄는 강력한 힘과 감화력이 나온다.
< 영적인 시기심을 버리라 >
그때 한 소년이 달려와서 모세에게 말했다. “엘닷과 메닷이 진중에서 예언합니다(27절).” 그 소년은 방언적인 성격의 예언을 성막에서 하지 않고 개인 진영에서 했던 사실에 놀라 모세에게 그 사실을 전했다. 그 소년의 말을 듣고 택한 자 중 한 사람 곧 모세를 섬기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했다. “내 주 모세여 그들을 말리소서(28절).”
택한 자 중 한 사람이란 표현은 모세의 수종을 들던 사람이 다수였다는 암시다. 그중 여호수아가 가장 신임을 받았다. 여호수아는 엘닷과 메닷이 모세도 없이 스스로 개인 거처에서 성령 체험을 한 것으로 인해 엘닷과 메닷을 말리라고 했다. 왜 말렸는가? 모세 없이 성령 체험을 함으로 모세의 권위가 훼손되거나 침해될 것을 염려한 충성심이 주 원인이었지만 공적 의식을 따르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 체험을 한 것에 대한 시기심도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때 모세가 말했다.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수아가 직접 엘닷과 메닷에 대한 시기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모세의 감정에 이입된 시기심을 가졌다는 뜻이다. 어떻게 보면 그의 이기심은 리더에 대한 충성심으로 인한 시기심이었다. 또한 리더가 절대 권위를 가져야 자신에게도 일부 권위가 주어질 것이란 욕심이 반영된 시기심이었을 수도 있다. 아무리 의도가 선해도 시기심을 가지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가 성별된 존재로서 성령 충만하게 되길 원하신다. 그러므로 영성 자랑을 삼가고 성령의 은사를 독점하려고 하지 말라. 남이 나보다 앞선 것에 대해 시기심과 질투심을 버리고 정당하게 앞섰다면 그의 성취를 존중해 주라. 자랑이나 시기심은 거룩한 공동체를 깨뜨리는 핵심 요소다. 시기심을 가지면 신앙 인격의 뿌리가 흔들리고 기도의 영성이 깨지지만 시기심을 극복하면 고귀한 신앙 인격을 선물로 얻고 기도에 능력과 응답이 나타나게 된다.
은혜의 바람을 구하라
민수기 11장 31-35절 / 이한규 목사
< 은혜의 바람을 구하라 >
부모나 어른의 잘못된 언행은 아이에게 큰 상처를 남긴다. 연약한 영혼은 남의 비난과 칭찬에 매우 민감해서 타인 감수성이 없는 사람이 무심코 한 부정적인 말이 부정적인 자아상을 형성할 수 있다. 그런 부정적인 자아상을 하나님의 은혜로 잘 극복하라. 과거의 실패와 수치에 집착하지 말고 잘못된 생각들이 내 마음 주위에 배회하지 않게 하라.
나의 무의식에 새겨진 상처의 흔적을 지우려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바람이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준비된 것 이상의 은혜를 원한다. 때로는 그런 기적적인 은혜가 주어진다. 비전 성취나 성공도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 사람이 아무리 일의 성취를 원해도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일을 성취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바람이 불면 상상을 초월한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가 나타날 수 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메추라기를 주실 때 바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서 넘치게 주셨다(31절). 당시 아프리카에서 앗수르 지역으로 이동하는 메추라기 철새 떼 중 힘이 부친 철새 일부가 팔레스타인 지역에 떨어지기도 했지만 본문의 경우처럼 메추라기가 비처럼 내리는 현상은 초자연적인 현상이었다.
당시 메추라기는 하룻길 되는 진영 사방으로 두 규빗 쯤 내렸다. 두 규빗은 약 90센티다. 메추라기 떼가 수십 킬로미터에 이르는 진영 사방에 90센티가 쌓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되기 힘들지만 2백만 명이 오랫동안 먹을 수 있는 엄청난 메추라기 떼가 내린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바람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라. 하나님이 은혜의 바람을 불어 주시거나 은혜의 문을 열어 주시면 생각을 초월한 놀라운 역사가 펼쳐질 수 있다.
< 원망과 탐욕을 버리라 >
백성이 일어나 그날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열 호멜이었는데 그들이 자기들을 위해 진영 사면에 펴 두었다(32절). 호멜(homer)은 구약 시대의 고체 측량 단위로서 한 호멜은 약 220리터다. 적게 모은 자도 열 호멜, 약 2200리터의 엄청난 메추라기를 모았다는 말은 그들이 탐욕적으로 정신없이 메추라기를 모았다는 암시다. 그때 하나님이 넘치게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셨다면 그들은 원망한 것을 회개하고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했지만 자기들의 욕심을 채우려고 정신없이 메추라기를 모은 것이다.
또한 그들은 메추라기를 말려서 오래 보관하려고 진영 사면에 펴 두었다. 그렇게 욕심을 부리는 모습을 하나님은 추하게 보셨을 것이다. 그래서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 대해 진노해서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다(33절). 심히 큰 재앙이 어떤 재앙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마 먹는 상황과 관련된 재앙이었기에 식중독일 가능성이 크다. 그 장면은 원망과 탐욕 가운데 형성된 풍요와 번영은 결코 복이 아님을 잘 교훈한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입이 돌아간 흉한 꼴로 도사를 찾아 말했다. “도사님! 지난주 산에 갔다가 행운초를 찾았는데 그 풀을 먹으면 귀인이 된다고 해서 먹다가 너무 많이 먹어 턱이 돌아갔습니다.” 도사가 말했다. “탐심이 문제네. 지금부터 참회하면 원래대로 될 것이네.” 그리고 그 행운초를 압수했다. 도사 말대로 하자 정말로 그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는 신나서 도사를 칭송하려고 다시 도사를 찾았는데 그때 도사 턱이 크게 돌아가 있었다.
마음속의 탐욕을 성령의 능력으로 잘 물리치라. 언젠가 세상을 떠날 때 돈을 좋은 일에 쓰지 못하고 그저 많이 남기고 떠난다면 그때까지 편하게는 살았을지 몰라도 평안하게는 살지 못했을 것이다. 잘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쓰는 것은 더 중요하다. 돈이 많아도 잘 쓸 줄을 모르면 가난한 존재다. 부를 자랑하지 말고 부를 은밀히 잘 쓰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라. 적게 가졌더라도 크게 만족하며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진짜 부자다.
하나님의 창고는 보화로 가득하다
민 11:31 / 이근수 목사
우물 안 개구리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그마한 우물에서 태어난 작은 개구리가 대대로 우물 안에 살면서 마음껏 헤엄치고 놀았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삶은 없을 거야. 내게 부족한 것은 하나도 없어.” 그러던 어느 날 개구리가 고개를 들어보니 우물 위에서 한줄기 눈부신 빛이 들어왔습니다. 개구리는 문득 우물밖에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저 위는 뭐가 있을까? 개구리는 벽을 타고 조심조심 기어 올라갔습니다. 마침내 꼭대기에 이르러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이럴 수가!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큰 연못이었습니다. 연못은 자신이 사는 우물 보다 수 백 배 더 컸습니다. 연못으로 달려가 멋지게 다이빙을 하여 가로 질러 헤엄을 쳐 보았습니다. 연못이 얼마나 크던지 여러 번을 쉬어서 간신이 건넜습니다. 연못 둑으로 기어 올라가 보고 개구리는 더 놀랐습니다. 아니 이건 뭐야! 연못 너머에는 엄청나게 큰 호수가 있었습니다. 자기가 살던 우물 보다 수 만 배 더 컸습니다. 개구리는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어린 개구리는 큰 호수로 멋지게 다이빙을 했습니다. 끝이 안보였습니다. 개구리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그동안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얼마나 좁은 곳에서 살며 좁은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자신이 한심하기 까지 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는 개구리뿐이 아닙니다.
애굽의 노예로 살던 때가 좋았다고 하며 모세를 원망하는 이스라엘이 우물 안 개구리 이고, 홍은동 홍제동 서대문에서만 옥닥 옥닥 하는 우리도 우물 안 개구리 입니다. 우리는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그리고 멀리 넓게 높이 보아야 합니다.
만나만 준다고 불평하는 이스라엘[6]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 때는 공짜로 생선, 오이, 멜론, 부추, 양파, 마늘들을 먹었는데 광야에서는 만나만 먹어서 정력이 쇠약해 졌다[6]고 하나님께 불평을 하고 이제는 고기 좀 먹게 해달라고 떼를 썼습니다.[4]
만나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기적의 양식입니다.
시74:24 만나를 ‘하늘 양식’이라 했고 시105:40 에는 ‘하늘의 떡’이라고 했습니다. 만나의 모양은 깟씨와 진주 같고, 맷돌에 갈기도 하고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아 먹기도 하며 올리브기름에 튀겨 과자를 만들어 먹었습니다.[7,8] 밤에 이슬이 내릴 때에 만나도 내렸는데[9] 만나는 생명의 양식이요 성도가 받을 영원한 축복의 상징입니다. 만나의 축복을 받는 성도님을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만나만 먹어서 기운이 없다고 불평하는 이스라엘[10]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만 먹어서 힘이 없고 기운이 없다고 각기 자기의 장막 문에서 울며 원망하는 말을 모세가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괘씸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셨고 모세는 기분이 나빴습니다. [10]
이스라엘은 걸핏하면 원망을 하였습니다. 원망 병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원망과 불평은 자기의 신앙과 인격에 손상을 주고 듣는 이를 불쾌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시시한 일로 경망되게 원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분이 상한 모세의 푸념[12-15]
모세도 툭하면 원망하고 불평을 일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기가 너무 힘이 들어서 하나님께 푸념을 하였습니다. [12-15] “하나님, 제가 이 백성을 낳았습니까? 어찌 이 백성을 젖먹이 기르듯 하라십니까? 이렇게 힘든 백성들을 제가 어떻게 약속의 땅으로 데리고 가겠습니까? 백성들이 고기가 먹고 싶다고 아우성인데 제가 어디서 고기를 얻어 먹이겠습니까? 이 백성을 혼자서는 인도할 수 없습니다. 저를 즉시 죽게 해서 이런 꼴을 보지 않게 해 주시는 것이 제게 은혜 베푸시는 것입니다. 어서 죽게 해 주세요.“ 모세도 너무 힘이 들어서 하나님께 눈물로 푸념을 하였습니다.
70인 지도자를 뽑으라고 하시는 하나님[16-17]
하나님은 모세에게 장로와 유사를 70명 뽑아 같이 동역하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일을 할만한 사람을 뽑아 회막 문 앞에 같이 서 있으면 내가 그들에게도 성령으로 기름을 붓고 네가 질 짐을 나누어지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갈라디아 6:2에도 짐을 서로 져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했습니다.
짐을 나누어지라고 지금도 하나님의 교회에는 장로 안수 집사 권사 서리집사 교사 성가대원 구역장 권찰 그리고 여러 봉사자들을 세웁니다.
그런데 문제는 짐을 제대로 지지 않는데 있습니다.
짐을 제대로 지는 책임 있는 직분자와 봉사자들이 되어서 교회를 부흥 성장시키기를 바랍니다.
이 목사의 기도 / 저도 지난 주 기도원에서 이 말씀을 묵상하며 교회 직분자들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홍성 교회 모든 직분자들이 목회에 도움이 되고 힘이 되게 해 주옵소서. 믿음 있고 재력이 있고 헌신적이고 겸손한 사람을 더 많이 세워 주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교회 건축을 위한 헌신자 100명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100명이 1억씩 헌금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외에 2억 3억 5억 10억 20억을 드릴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을 받은 헌신자를 일으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 4300평을 150억에 짓는데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하나님의 교회를 건축하는데 드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동역자를 일으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새 성전에 담을 소프트웨어를 준비할 동역자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믿고 내려왔습니다. 아멘
하나님은 기대만큼 복을 주십니다.
좋은 일을 기대하면 좋은 일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네 믿음대로 되리라[마 9:29]고 하셨습니다. 이는 네가 기대한 만큼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대 수준을 높여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히 11:1] 믿음이란 높은 기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습관을 가지세요. 믿음과 큰 기대를 가지고 사업을 하세요. 그러면 크게 됩니다.
종신형을 받은 죄수 같이 자신을 감옥에 가두고 절망하지 마세요. 희망을 가지세요. 하나님을 믿고 더 좋은 미래를 기대하세요. 그러면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고기가 싫을 때 까지 먹여 주신 하나님[19-20]
만나만 먹어서 힘이 없다. 그 좋은 애굽을 왜 나왔던고, 라며 불평하는 이스라엘을 들으시고 하나님은 고기를 먹여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한 달간 코에서 누린내가 나도록 먹여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불가능을 말하는 모세[21-22]
모세는 이스라엘이 장정만 60만 명인데 하나님이 어떻게 온 백성에게 한 달 간 고기를 먹게 해 주시냐고 걱정하며 불가능함을 말했습니다. 양떼 소 떼를 잡고, 바다의 고기를 다 잡아도 이스라엘을 능히 먹이지 못한다고 모세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능 하시다[23]
여호와의 손이 짧아 졌느냐? 여호와의 능력이 모자라서 이스라엘에게 고기를 못 먹이겠느냐? 아니다. 나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먹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메추라기를 내려주심[31-35]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고기를 먹여주시는 장면입니다. '메추라기'철새 떼들은<출 16:13> 봄에 떼를 지어 중앙 아프라카에서부터 북상(北上)하여 앗시리아 쪽으로 이동합니다.
하나님은 동남풍으로 새 떼들을 이스라엘 진위로 몰아서 소나기처럼 떨어뜨리셨습니다.
백성들이 일어나 하루 종일, 밤새도록, 이튿날도 온종토록 메추라기를 거두었습니다. 적게 모은 자도 10호멜을 거두어 자기의 진 사면에 펼쳐 두었습니다.
메추라기가 진사면 32km 둘레에 떨어졌습니다.
1규빗 = 팔꿈치에서 중지까지의 길이
45cm x 2 =90cm 두께로 메추라기가 쌓였습니다.
1 호멜 = 고체양의 단위, 230리터
230리터 x 10 = 2300 리터 [230말]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탐욕 자는 죽음[33-34]
이스라엘 중에 너무나 탐욕을 낸 자들에게 하나님이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심한 피부병이 내렸습니다.[33] 그래서 탐욕을 낸 사람들이 죽어 거기에 장사 지냈습니다.[34]
그래서 그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라 했습니다.
THE GRAVES OF CRAVING = 욕심쟁이들의 무덤 이라 했습니다.
모세의 좁은 생각
160 만 명이 한 달간 먹을 고기를 주시겠다고 할 때 모세는 현실적으로 불가능 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잘 모르는 사람의 생각입니다. 이것은 오늘 하나님의 능력을 잘 모르는 우리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안된다는 부정적인 말을 합니다. 이런 생각을 고치시기 바랍니다.
토드의 생각
컴퓨터 소프트웨어에 능력이 있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이 분야 벤쳐기업을 창업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금도 없고 급하게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미고 아이까지 태어나 생활이 빠듯해 지자 그의 비전은 사라지고 월급은 많지 않지만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때 토드의 실력과 벤쳐 기업을 창업하려는 것을 아는 친구가 유수한 IT 대기업의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기회가 생겼으니 함께 창업하자고 했습니다. 그때 토드는 “난 안될 것 같아. 그쪽 분야에 손 뗀지 오래되었어.” 친구가 자기 귀를 의심했습니다. ”토드, 제정신이야? 이것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 줄 알아?“ ”아니야, 나는 현재에 만족해. 이대로 사는 게 나을 것 같아.” 토드는 친구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친구는 혼자서 IT 벤처기업을 창업했습니다. 친구는 크게 성공해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었습니다. 토드는 후에 친구의 제안을 거절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현재에 안주한 나머지 인생의 중요한 기회를 놓치는 사람들이 토드 뿐 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세계를 보여 주시는데도 포기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외면하고 축복을 거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음을 열고 하나님이 하시는 대로 따라가면 될 것을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설마 그렇게 좋은 일이 나 같은 자에게 일어나겠어? 돈 버는 일을 왜 그가 나에게 주겠어! 아니야” 하면서 토드처럼 머리를 가로 젓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작은 믿음으로 적은 기대를 가진 사람은 작은 복 밖에 받지 못합니다. 이것이 나의 작은 머리로 하나님의 능력을 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발 이러지 마세요. 하나님의 팔은 짧지 않습니다. 나의 짧은 가방 끈으로 하나님의 길고 튼튼한 가방 끈을 재지 마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하늘 창고에 가득 선물을 쌓아놓고 계심을 믿으세요.
우물 안의 작은 개구리가 되지 마세요
작은 머리로 하나님의 능력을 잰 모세 같이 하지 마세요
나의 낮은 수준과 비좁은 생각의 틀을 깨세요.
조금 더 큰 꿈을 꾸세요. 한 발짝만 앞으로 나가세요.
개구리 같이 우물 밖을 보세요.
연못을 보고 호수를 보고 강을 보고 바다를 믿음의 눈으로 보세요.
하나님의 능력과 복을 거절하지 마세요
불신과 의심을 버리세요. 우리가 더 큰 복을 받아 더 잘 되고 하나님의 사랑과 영향력을 나타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현재에 만족하지 마세요. 현실에 머물지 마세요.
나는 아버지 할아버지 보다 더 크게 잘 된다고 믿고 당당하게 나아가세요. 이것은 교만 아니라 믿음입니다.
필리스의 믿음과 꿈
16세에 임신을 하여 고등학교 다닐 수 없었다. 그녀의 꿈은 산산 조각이 났다. 그녀는 사회복지 시설에 들어가 아이를 낳고 가난과 절망감에 쌓여 나날을 살았다. 그러나 그녀는 하류인생을 거부했다. 그녀는 복지 시설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나는 하나님이 주신 복을 온전히 누리고 살 거야.”그녀는 하나님의 복을 기대하고 “ 나는 할 수 있다” 고 다짐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녀는 어느 학교 식당에서 식권 받는 일을 하였다. 최소 임금이었지만 감사했다. 그러나 그녀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는 꿈을 꾸었다. 일을 하면서 야간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하여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그녀는 더 큰 꿈을 꾸었다. 4년간 공부하여 영예로운 대학 졸업장을 얻었다. 하지만 필리스의 꿈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내친 김에 그녀는 공부를 계속해 마침내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녀는 더 이상 혜택을 받아야 하는 딱한 인생이 아니었다. 그녀는 마침내 교사가 되고 교장 선생님이 되었다. 그녀는 학생들에게 꿈을 주었다.
결 론
지금도 하나님의 창고는 보화로 가득합니다. 이 보화를 달라고 하세요. 기도하고 기대하세요. 네 믿음대로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세요. 작은 만족에서 벗어나세요. 과거의 영광을 능가하고 초월하세요. 큰 꿈을 꾸고 큰 비젼을 품으세요. 하나님이 위대한 일을 행하실수 있게끔 큰 그릇을 준비하세요. 그래서 하나님의 크신 복을 받는 저와 온 성도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탐욕의 무덤
민 11:31-34 / 박덕기 목사
새 해 들어 벌써 한 달의 마지막 주일이 되었습니다. 한 달 동안 승리하셨는지요? 혹시나 옛 생활로 되돌아가지는 않았는지 자신을 점검해보고, 이 아침에 다시 한번 각오를 굳게 하시며, 결심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롯의 아내로 하여금 뒤를 돌아보게 하고, 소금 기둥이 되어 파멸되게 하고 만 것은 그녀의 탐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로 하여금 옛 생활로 되돌아가게 하고, 우리의 신앙을 병들게 하며, 결국 우리를 타락과 파멸로 이끌어 가는 ‘탐심’에 관해서 경계를 삼으며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가나안 복지를 향하여 행군하던 중 광야에서 되어진 일입니다. 민 11:4을 보면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었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하면서 탐심으로 투정을 부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 하여서 가나안 복지를 향하여 전진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죄악 된 세상에서 구원받아 하늘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는 성도의 모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옛 사람과 옛 생활은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불신하고 거역하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이 패역한 일의 선봉장 노릇을 한 사람들이 누군가 하면,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상당수의 다른 잡족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들이 먼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그만 탐욕을 품게 된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의 세속적인 사람들과 섞여 살면서 그들과 함께 어울릴 때, 우리는 필연코 세상의 것들에 대하여 탐욕을 품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 혹은 불경건한 자들과 함께 어울리는 일을 매우 삼가 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입니다. 옛말에 近墨者黑이라고 했습니다.
탐욕을 품게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쾌락을 생각할 때 우리는 탐욕에 빠지지 됩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의 일, 성령의 일들은 더 이상 예전처럼 귀한 것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워하며 되돌아가고 싶어 하는 애굽의 생활이란 게 도대체 어떠한 것이었습니까? 인격도 자유도 없이 짐승처럼 혹사당하기만 했던 노예 생활이 아니었습니까? 만일 우리 대한민국 국민이 다시 일본제국주의 밑에서 압박당하던 그 처참한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어 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더구나 이스라엘을 압제하던 바로 임금은 오늘날 인간을 보이지 않는 사슬로 결박하여 노예로 삼은 마귀의 모형 같은 인물입니다. 그런데 생선과 수박 부추와 마늘 따위를 그리워하며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서 노예생활 하는 것을 더 좋게 여기다니, 이 얼마나 육욕적이고 감각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무가치한 인생들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날마다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라는 신비한 양식이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만나 외에는 아무것도 없도다.” 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식물에 대하여 오히려 불평불만을 토로했습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의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바로 생명의 양식이었건만, 그들의 생명을 구해낸 양식이 이제는 경멸을 받는 것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의 생명의 양식입니다. 시 119:50에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고 했고, 벧전 1:23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했습니다. 만일 우리들에게 나를 거듭나게 하고, 곤란 중에 나를 살리신 하나님의 말씀이 이제 와서 재미없고 싫증나는 것으로 느껴진다면, 이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요, 영혼에 염려할만한 병이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병들 때 맨 처음 나타나는 자각 증상 가운데 하나가 식욕부진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영혼에 병이 들게 되면, 만나를 싫어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싫증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식사 때마다 이렇게 기도할 필요가 있는 줄 압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게 일용할 양식과 식욕을 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말씀 식욕을 함께 허락해 주셔서 제 영혼도 건강하게 하옵소서!’
비록 하늘의 신비한 양식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만나는 일상적인 식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날마다 대하는 일상적인 식물인 만나 대신에, 별미에 대한 탐욕을 품었습니다. 성도가 자기 교회의 목사를 통해서 일상적으로 공급되는 만나에는 관심이 없고, 별미에만 관심이 많으면 이 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별미가 맛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복어 요리가 그렇듯이 별미를 잘못 먹으면 치명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탐욕으로 인하여 애굽에서의 구원도,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게 된 이적도, 기적의 식물 만나에도 만족할 줄 모르고, 고기를 달라고 앙탈을 부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청원을 들어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본문 31절에 “바람이 여호와에게로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 곁 이편저편 곧 진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 쯤에 내리게 한지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치고 있는 전역에 90cm 두께로 메추라기가 쌓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틀 동안이나 정신없이 거둬들인 메추라기를 맛있게 먹으려는 찰나,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탐욕스런 자들에게는 결코 복을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은 탐욕이 저주가 될 때까지 그들의 탐욕을 충족 받고자 합니다. 돈이나 쾌락을 탐하는 자들은 그 돈이나 쾌락으로 인하여 멸망하는 지경에 이를 때까지, 그것을 줄기차게 추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탐욕스런 요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오히려 그들을 파멸로 이끄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문제에 대하여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더라도, 그것은 오히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은총일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하고,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서 비록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만 볼 수 없음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탐욕으로 말미암은 풍요는 오히려 큰 재앙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께서 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심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고, 마침내 그들을 장사지낼 커다란 무덤이 생기게 되었으니 그곳이 바로 ‘기브롯 핫다아와’ 곧 ‘탐욕의 무덤’ 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탐욕은 반드시 스스로의 무덤을 파게하고야 맙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기 때문입니다. 탐욕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성경을 통해서 좀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와-사탄의 유혹을 받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볼 때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고 했습니다. 결국 탐심의 발동으로 하나님께서 금하신 금단의 열매를 따먹게 되고, 그리하여 전 인류에게 사망과 고통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롯-숙부 아브라함에게 양보할 줄 모른 탐심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은 상관치 아니하고 그 땅의 풍요함만을 택한 탐심으로 인하여 그의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고 가정은 풍비박산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간-외투 한 벌, 금덩이 하나에 대한 탐심 때문에 이스라엘로 하여금 전투에서 패하게 하고, 그와 온 가족은 돌로 쳐 죽임을 당한 후 그의 시체는 불태워지고 그래서 아골 골짜기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게하시-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는 그의 탐심 때문에 문둥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윗-한 여인에 대한 탐심 때문에 충신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살인죄와 간음죄를 한꺼번에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다윗을 책망하실 때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너로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하여 네게 기름을 붓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그런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오늘 하나님의 백성들인 저와 여러분은 아내 한 사람으로 만족하여야 하고, 남편 한 사람으로 만족하여야 합니다.
아합-한 나라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하찮은 나물 밭에 대한 탐심 때문에 의로운 나봇을 죽이고 그의 가문은 비참하게 파멸하고 말았습니다.
가룟 유다-돈에 대한 탐심 때문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후,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오는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딤전 6:10에 경고하기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고 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돈과 명예에 대한 탐심 때문에 부부가 공모하여 하나님의 성령을 속이려고 했다가 두 사람이 한 날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더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인간의 범죄 역사는 바로 인간의 탐심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그 많은 전쟁이 모두 탐심 때문에 일어났고 또 앞으로 일어나기도 할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인이 주일 성수를 못합니까? 한 가지 이유는 물질에 대한 탐심 때문이고, 다른 또 한 가지는 산으로 들로 놀러 다니고자 하는 향락에 대한 탐심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기를 “일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고 경고합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주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까? 술 맛에 대한 탐심 때문입니다. 술 맛에 대한 탐심 때문에 건강을 해치고, 가정의 행복이 파괴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품위를 지키지 못합니다. 쾌락에 대한 탐심 때문에 부부간의 깨끗한 정절을 지키지 못하고 부정을 저지릅니다.
왜 성도들이 십일조 생활을 하지 못합니까? 두 말할 것도 없이 물질에 대한 탐심 때문입니다. 요즈음 T. V에 자주 나오는 장경동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자기 교회에서 침례를 주기 전에 우리처럼 아마 세례 문답이란 것을 한 모양인데, 한 번은 별로 믿음이 없어 보이는 신자에게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분명하게 자신은 구원을 받았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속으로 조금 놀라면서 ‘만일 하나님께서 오늘이라도 부르시면 천국에 간다는 확신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역시 자신만만하게 ‘그렇다’고 대답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속으로 내가 사람을 잘못 판단했는가 보다 생각하면서 한 번 더 묻기를 ‘만일 공산당이 가슴에 총구를 겨누면서 예수를 안 믿겠다고 하면 살려 주고, 믿겠다고 하면 죽이겠다고 할 때에도 끝까지 예수를 믿겠느냐?’고 물었더니 역시 확신에 가득 찬 어조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그 신자가 믿음이 정말 대단한 사람이로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마지막으로 ‘그러면 십일조도 바칩니까?’하고 물었더니 고개를 저으며 아직 드리지 못한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전에 그 신자가 한 신앙 고백이란 것이 모두 믿을 수 없더라는 것이지요. 왜 그렇습니까? 만일 어떤 사람의 집에 강도가 들어와서 권총을 들이대며 돈을 내놓으라고 한다면, 정상적인 사람일 경우 ‘돈은 다 가져가도 좋으니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세요’라고 할 것 아니냐는 것이지요. 어느 누가 ‘돈은 절대로 내놓을 수 없으니 차라리 날 죽여!’라고 할 사람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실제로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돈을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지독한 수전노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떠한 경우에도 끝까지 주님을 시인하면서 죽을 수도 있다는 신자들이 십일조도 제대로 바치지 못한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된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씨 뿌리는 비유’ 중에서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스펄죤 목사님은 말하기를 ‘수천 명의 사람들이 회심하는 것을 보았으나 탐심쟁이가 회심하는 것은 본 일이 없다.’ 고 했습니다. 웨슬레는 말하기를 ‘한 인간에 있어서 마지막 회심해야 할 부분은 그의 돈지갑이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허쉘 포드 목사님은 그의 십계명 강해에서 탐심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아홉 가지 계명들을 범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고 했습니다. 탐심 때문에 다른 우상 곧 황금 신을 섬기고, 탐심 때문에 아나니와 삽비라처럼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게 되며, 탐심 때문에 주의 날을 범하고, 탐심 때문에 부모를 홀대하며, 탐심 때문에 살인을 하고, 탐심 때문에 간음을 하고 매매춘을 하며, 탐심 때문에 도적질하고, 탐심 때문에 거짓증거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2002년에는 1년 내내 무슨 게이트 무슨 게이트 하면서 한 해를 보내더니, 지난해에는 대통령 측근들의 비리로 인해서 신임을 묻겠다 어쩐다, 또는 차떼기 불법 대선 자금이다 뭐다 해서 많은 국회의원들이 구속되었고, 이제 설 연휴가 지나면 또 여러 정치인들이 추가로 구속될 전망입니다. 이렇게 탐심 때문에 하루아침에 명예와 권력을 잃어버린 어리석은 사람들을 우리는 수도 없이 목격해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정치인들이나 경제인들만 욕할 것이 아니라 우리들도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평생을 소매치기생활을 하다가 생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내고 출옥을 하게 되었는데, 그만 병들어 죽게 되자 목사님이 불쌍히 여겨서 그 소매치기에게 간절히 전도를 한 후 안수기도를 하고 난 다음에 눈을 떠보니까 목사님의 손목시계가 없어졌더래요. 보니까 숨이 넘어간 소매치기가 그 손에 목사님의 손목시계를 가지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숨이 넘어 가면서도 그는 목사님의 손목시계를 소매치기 했던 것입니다. 탐심이란 이렇게도 무서운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백만장자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의 말은 진리입니다. ‘세상에 돈이라는 우상보다 사람을 더 타락시키는 우상은 없다.’ 돈에 탐심을 갖기 시작하면 어떤 사람이라도 타락하고, 어떤 권력이라도 부패하며, 어떤 나라라도 망하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는 신자들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십시오. 내가 하루하루 사는 것이 내 힘으로 사는 것인지, 돈의 힘으로 사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인지 살펴보십시오. 모세혈관 하나만 터져도 모든 것이 끝장 날수 밖에 없는 나 자신이 오늘도 이렇게 살아있는 은혜가 어디에서 왔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겉으로 보기엔 굉장히 믿음이 좋은 것 같지만 정작 돈 문제를 놓고 행동하는 것을 보면 믿음이 없는 자가 많음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아무리 목사, 장로, 집사라 할지라도 '돈, 돈'하는 사람, 탐심이 많은 사람치고 올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이라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쌓아놓은 것을 하나도 가지고 가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 믿는 사람이 돈 벌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 수 있으면 부지런히 많이 버십시오. 하나님 앞에 부요한 자가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쓸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벌어도 됩니다. 그것은 탐욕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와 자식만을 위하여 욕심을 부리면 그것은 무서운 탐욕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도 '기브롯 핫다와', 곧 탐욕의 무덤에 묻히기 전에 먼저 정신 차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 건축과 같은 귀한 일에 외면할 정도로 탐심 많은 성도가 우리 중에 한 사람도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팔순의 한 노인이 자신이 가진 50억 원대에 이르는 5만평의 땅을 사회에 기증할 뜻을 비쳤습니다. 이유는 단지 하나, ‘죽으면 작은 관에 묻히는 것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한 때 탐심의 사람이었던 록펠러는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인생을 산 사람이 되었습니다. 땅에 쌓는 인생인 아니라 하늘에 쌓는 인생으로 변했습니다. 그는 백만 평이 넘는 12개 대학을 건립하였습니다. 그가 세운 대학 중에 시카고 대학은 지금까지 노벨상 수상자를 52명이나 배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일평생 4928개의 교회를 지어 하나님께 봉헌했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 시편 기자처럼 이렇게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치 말게 하소서!”
우리 송정 중앙 교회 성도들이 금년 한 해 동안 탐욕의 무덤을 파는 성도가 한 사람도 없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터진 웅덩이를 파는 성도가 한 사람도 없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만사를 믿음으로 경영해서 여러분의 모든 수고가 하나도 헛되지 않고 축복의 열매로 결실하여, 하나님의 선한 사업에 부요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