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9/30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2009 - 지리산 아기곰 "저 건강해요" 두번째로 카메라에 잡혀 겨울잠위해 살찌우는중 올해 초 지리산에서 태어난 새끼 반달가슴곰(사진)이 건강한 모습으로 겨울나기 준비에 한창인 것으로 확인됐다. 국립공원관리공단 멸종위기종복원센터는 새끼 반달가슴곰이 어미 곰과 함께 건강하게 지내고 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고 30일 밝혔다. 지리산에서 유일한 이 새끼 곰은 현재 몸길이가 약 60㎝, 체중은 약 15㎏에 이를 것으로 추정됐다. 지난 7월 처음 관측된 뒤 체중이 배 가까이 늘었다. 이배근 멸종위기종복원센터 과장은 “곰은 12월 중순 겨울잠에 들어가기 전에 많이 먹어둬야 한다”며 “새끼 곰이 어미와 함께 먹이활동을 잘하고 있어 잘 적응하리라 본다”고 말했다. 곰은 가을철에 도토리 등 나무 열매를 주로 먹는다. 새끼 반달가슴곰은 2년 정도 어미와 함께 지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새끼 곰은 출생지 주변 5㎞ 반경 안에서 주로 활동한다.국립공원관리공단은 지리산 탐방객들에게 지정된 탐방로를 이용해 반달가슴곰 보호에 힘써 달라고 당부했다. 공단은 지리산의 반달가슴곰 멸종을 막고자 2004년부터 러시아와 북한에서 새끼 반달가슴곰 27마리를 들여왔고, 현재 15마리가 남아 있다. 이완 기자 /한겨레 2009-09-30 오후 09:06:41
2009 - '강강술래' 등 5건 세계무형유산 등재 강강술래, 남사당놀이, 영산재, 제주칠머리당영등굿, 처용무가 유네스코(유엔교육문화기구)의 세계무형유산이 됐다. 문화재청은 30일(현지시각)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서 열린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의 심사 결과 한국 무형문화재 5건이 세계무형유산 목록에 올랐다고 밝혔다. 한국은 이로써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2001년), 판소리(2003년), 강릉단오제(2005년)에 이어 모두 8건의 세계무형유산을 갖게 됐다. 문화재청 쪽은 “등재된 다섯 종목의 무형문화유산들은 인류 문화 다양성과 창의성, 정부의 보존지원 정책 등 유네스코의 등재 기준을 충족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며 “세계무형문화유산 분야에서 한국의 영향력이 더욱 증대될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무형문화유산의 정식 명칭은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2001년부터 유네스코가 격년마다 국가별 신청을 받아 지정해온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 프로그램이 모태다. 2006년 ‘무형문화유산 보호협약’ 이후 등재 요건을 완화해 인류 공동의 무형문화유산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려는 취지에 따라 운영되고 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한겨레 2009-09-30 오후 10:33:12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79701.html
- P. R. Popovitch, Y. P. Artyukhin and Soyuz 14
2009 - 소련의 우주비행사 파벨 포포비치(Popovich, Pavel) 사망 포포비치 [Popovich, Pavel Romanovich, 1930.10.5~2009.9.30] 구소련 우주비행사 포포비치 사망 러시아 우주 개척사에서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파벨 파포비치가 30일(현지시간) 사망했다고 이타르타스 통신 등이 보도했다. http://www.yonhapnews.co.kr/economy/2009/10/01/0303000000 AKR20091001000300080.HTML?template=2090
2008 - 10월 29일 `반도체의 날` 제정 ‘반도체의 날’이 논란 끝에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한 날인 10월 29일로 확정됐다. http://www.etnews.com/news/detail.html?id=200809300207
2006 - 부천에 펄벅기념관 개관 ‘펄벅 기념관’ 문열어 오늘 부천서 개관식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소설 ‘대지’의 작가 펄벅(1892~1973) 여사를 기리는 기념관이 오늘(30일) 경기도 부천에서 문을 연다. 부천시가 소사구 심곡본동에 작년 7월부터 31억원을 들여 지었다. 부천에서 10년 가량 6·25 고아와 혼혈 어린이를 돌본 그녀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http://www.chosun.com/national/news/200609/200609290498.html
펄벅기념관 [Pearl S. Buck Memorial Hall] 주소 :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심곡본동 566-9 번지 홈페이지 : http://www.pearlsbuckhall.or.kr/ 시설소개 펄벅기념관은 펄벅여사의 한국혼혈아동을 위한 고귀한 희생과 사랑이 깃든 곳으로 부천시가 2006년 9월 30일날 건립하였고 펄벅 인터네셔널 한국이 부천시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고 있다. 펄벅여사의 유품과 서적, 사진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이 밖에도 사회적 불평등과 편견을 없애기 위해 여생을 마쳤던 여사의 박애정신이 곳곳에 살아 숩쉬고 있다. /경기문화재단
2003 - [문학출판]'님의 침묵' 초판본 첫 공개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선생의 유일한 시집이자 대표작 '님의 침묵' 초판본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309300034
2002 - `황금 데스마스크` 이집트왕 얼굴 복원 미라 바탕… 런던서 공개 열여덟의 나이에 요절한 고대 이집트의 왕 투탕카멘의 얼굴이 3천3백여년 만에 복원됐다. [런던 AP=연합] /조인스뉴스 2002.10.01 18:47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1238864
2001 - 베트남의 군인, 대통령 응우옌반티에우(Nguyen Van Thieu) 사망 응우옌반티에우(구엔반티우) [Nguyen Van Thieu, 阮文紹, 1923.4.5~2001.9.30] 티우 전 베트남 대통령 사망 공산화 전 베트남 정부의 마지막 대통령 응웬 반 티우(Nguyen Van Thieu)가 2001년 9월 30일 밤 망명지인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78세로 사망했다. 베트남 남부의 닝투안성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티우 전 대통령은 2차대전 후 민족공산주의의 시초인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에서 활동하며 프랑스에 대항하다 전향, 베트남 군사령관이 됐다. 1963년 쿠데타를 일으켜 고 딘 디엠 정권을 전복하고 1967년 대통령이 됐으며 1971년 부정 선거라는 비난을 받으며 재선됐다. 1975년 공산 베트남이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했을 때 티우는 북쪽 영토 반을 포기했으며 평화협상을 위해 사임하라는 압력을 받다가 결국 월맹군이 수도 사이공을 함락하자 그 해 4월 21일 월남을 임시정부에 넘기고 대만과 런던을 거쳐 미국 보스턴으로 도망갔다. /조선
- 공중전화 카드 (메이저리그 정복자 박찬호!)
2000 - 박찬호 데뷔 첫 완봉승. 18승으로 시즌 마감 박찬호(LA 다저스)가 데뷔 첫 완봉승으로 2000시즌 마지막 등판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박찬호는 2000년 9월 30일 샌디에이고 퀼컴 스타디움에서 열린 미프로야구 샌드에이고 파드리스와의 원정경기에서 9이닝 동안 내야안타 포함, 2안타 무실점으로 팀의 3대0 승리를 이끌었다. 시즌 18승(10패). 완봉승은 1994년 메이저리그 데뷔 이후 185경기 만이었다. 8회에 시즌 2호 홈런으로 승리를 자축한 박찬호는 삼진 13개를 추가, 시즌 217개로 메이저리그 3위(내셔널리그 2위)가 됐다. 방어율로 3.27로 끌어내렸다. 박찬호의 호투에 파드리스는 2루를 밟아 보지도 못하는 치욕을 당했다. 3회 볼넷 등 단 3명이 1루에 진출한 것이 전부였다. 투구수 조절도 잘해 9회 완투를 하고도 116개밖에 되지 않았다. /조선
2000 - .kr 도메인 50만개 돌파 2000년 9월 30일 .kr 도메인 등록건수가 50만개를 돌파했으며 IP 보유수는 아태지역에 배정된 주소 중에서 최대규모인 1381만 176개인 것으로 집계됐다. 한국인터넷정보센터는 .kr 도메인 등록건수가 2000년 7월말 49만 4074개에서 8월말 49만 3691개로 줄어들었다가 9월말에는 50만 1534개로 늘어났다고 발표했다. 이중 co.kr은 43만 8892개로 전월대비 7931개 늘어난 반면, 개인도메인인 .pe.kr은 8월부터 계속 감소해 3만 2084개로 나타났다. IP 보유수는 8월말 1158만 1952개였으나, 9월말 현재 1381만 176개로 크게 증가했다. 이는 아태지역에 배정된 주소규모 중에서 최대이며, 지난 10년동안 확보한 주소에 상응하는 규모로 전년대비 3배에 해당한다. 전용선 가입기관수는 8월말 6만 8365개 기관에서 6만 9794개 기관으로 증가했으며, xDSL 가입자수는 143만 9674명, 케이블TV를 통한 인터넷서비스 가입자수는 70만 3798명으로 전달에 비해 모두 증가했다. /조선
- Aerial view of Kremlin
한소 양국이 1990년 9월 30일 낮 12시 유엔본부에서 역사적인 한소 외무장관회담을 갖고 수교에 합의하는 공동 코뮈니케를 발표했다. 최호중 외무장관과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은 이날 유엔본부내 안보리 의장실에서 약 1시간 동안 진행된 회담에서 공동 코뮈니케 서명식을 가졌으며,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이같은 사실을 발표했다. 이로써 한국과 소련은 지난 1905년 대한제국과 제정 러시아간의 관계가 단절된 이후 85년 만에 다시 수교하게 됐으며, 이는 앞으로 한반도 및 동북아 질서 재편에 깊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기대됐다.
1990 - 오스트레일리아 소설가 화이트(White, Patric) 사망 화이트 [White, Patrick (Victor Martindale), 1912.5.28~1990.9.30] [오늘속으로<916>(9월30일)] 패트릭 화이트 1990년 9월30일 오스트레일리아 소설가 패트릭 화이트가 기다란 병고 끝에 시드니에서 작고했다. 향년 78세. 197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화이트의 죽음은 고인의 뜻에 따라 장례가 치러진 뒤에야 언론에 공개되었다. 실상 화이트는 작가 생활 내내 자신의 프라이버시가 언론에 침해 당하는 것을 경계하고 거부해왔다. 언론에 노출되는 것이 싫어서 자신의 노벨상 시상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화이트는 런던에서 태어나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를 오가며 성장기를 보냈다. 케임브리지대학 킹스칼리지에서 불문학과 독문학을 전공한 그는 제임스 조이스를 연상시키는 실험 소설들을 쓰며 20대를 보냈다. 패트릭 화이트라는 이름을 국제 문단에 널리 알린 것은 45세 때인 1957년에 발표한 장편 ‘보스’다. 1840년대를 배경으로 요한 보스라는 독일인의 오스트레일리아 내륙 탐험을 온갖 신비주의적 상징 속에 버무려낸 이 소설은 1848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사막에서 죽은 루드비히 라이햐르트라는 실존 독일인의 생애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소설 속에서 보스는 시드니에 사는 로라 트레블리언이라는 여성과 일종의 텔레파시를 나눈다. 화이트의 몇몇 소설과 희곡들은 시드니 교외의 사서패릴라라는 가공(架空)의 마을을 무대로 삼고 있다. 말하자면 화이트의 사서패릴라는 윌리엄 포크너가 자신의 ‘남부 소설들’의 무대로 창조해낸 바 있는 요크나파토파와 비슷한 역할을 했던 셈이다. 화이트는 이 사서패릴라를 무대로 주로 사회에서 따돌려진 아웃사이더들, 불우한 사람들의 삶과 느낌을 신화와 상징과 우화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야기들 속에 담아냈다. 만년의 화이트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인권이나 환경 보호, 동성애의 권리 같은 사회적 쟁점들에 관해서 직설적으로 발언했다. 화이트 자신이 동성애자이기도 했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한국일보 2003/09/29 18:13
1988 - 유엔 평화유지군 노벨상 수상
1987 - 국내 전화 1000만 회선 돌파 [오늘의 IT소사]1987년 국내전화 1000만 회선 돌파 1987년 오늘 우리나라 전화회선이 1000만 회선을 돌파했다. 이로써 우리나라도 명실상부한 1가구 1전화 시대를 실현하게 되었다. 전화시설 1000만 회선 돌파는 가입자·전화기·전송로·교환시설로 이어지는 음성통신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전화 적체를 완전히 해소할 수 있었다. 1980년 말까지도 시설은 284만 회선, 전화공급률은 전 가구의 35%에 불과했으나 그 후 전화 적체 해소를 목표로 매년 100만여 회선씩 증가시켜 전화회선수가 아시아 2위, 세계 10위권으로 올라섰다. 전자신문 2004-09-30 09:23 /네이버 뉴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5&oid=030&aid=0000083590
1985 - 프랑스의 연극, 영화 배우 시몬 시뇨레(Signoret, Simone) 사망 시뇨레 [Signoret, Simone, 1921.3.25~1985.9.30] 본명은 Simone Kaminker. 프랑스의 연극, 영화 배우. 본명은 Simone Kaminker. 따뜻하고 용감한 여성역을 훌륭하게 해낸 것으로 유명하다. 독일에서 프랑스 국적의 부모 밑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자랐다. 소르본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좌익 운동에 참가했으며, 여러 편의 연극에 출연한 뒤 영화 〈금투구 Casque d'or〉(1951)로 스타가 되었다. 〈꼭대기에 있는 방 Room at the Top〉(1958)으로 영국과 미국의 영화협회 및 칸 영화제에서 최우수 여배우로 상을 받았으며, 1965년에는 〈바보들이 탄 배 Ship of Fools〉로 다시 오스카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1951년 첫 남편인 영화감독 이브 알레그레와 이혼한 뒤 가수이며 배우인 이브 몽탕과 결혼했다. 그들 부부는 함께 로젠버그 처형과 베트남 전쟁, 알제리 전쟁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여 프랑스에서 격렬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1956년의 헝가리 사태로 그들은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으며, 그녀가 자신의 자서전 〈그리움은 옛날의 그리움이 아니다 La Nostalgie n'est plus ce qu'elle était〉(1976)에서 적고 있듯이 그들이 소련을 방문했을 때 소련의 지도자 니키타 흐루시초프에게 그들의 느낌을 숨김 없이 털어놓았다. 그녀는 몇 편의 텔레비전 연속극에도 출연하여 성공했으며, 1985년 출판한 2번째 소설 〈안녕, 볼로디아 Adieu, Volodia〉를 비롯한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를 출판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브리태니커
1981 - 서울 올림픽 유치 “쎄울 코리아!” 1981년 9월30일 사마란치 IOC 위원장의 목소리가 독일 바덴바덴의 IOC 총회장에 울려퍼졌다. 서울이 52표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27표를 얻은 일본의 나고야를 물리치고 제24회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된 순간, 유치단은 만세를 불렀고 전세계 체육인들은 이 극적인 반전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로써 한국은 개발도상국가로서 최초의 올림픽 개최국이 됐고 아시아에서는 2번째, 세계에서는 16번째 올림픽 개최국의 영예를 안았다. 1979년 9월에 결정됐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타계로 무산될 뻔한 올림픽 유치 움직임이 다시 살아난 것은 2년 뒤였다. 개최지 결정을 정확히 1개월 앞두고 전두환 대통령이 최종적으로 올림픽 유치를 지시한 것이다. 설사 이 지시가 5공 군사정권의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깔린 것이라해도 우리 민족에게는 축복의 시작이었다. 9월20일 유치단이 바덴바덴에 도착했을 때 현지 분위기는 이미 나고야로 기울어 있었다. 북한의 방해도 성가셨지만 1년전 모스크바 올림픽이 서방국가들의 불참으로 반신불수가 된 상태에서 한반도의 남북분단은 최대약점이었다. 그러나 승리의 여신은 이미 한반도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다만 마지막 날까지 그걸 몰랐을 뿐이었다. /조선
1980 - 스위스의 테니스 선수 마르티나 힝기스(Hingis, Martina) 출생 힝기스 [Hingis, Martina, 1980.9.30~ ] 마르티나 힝기스(Martina Hingis, 1980년 9월 30일 ~ )는 전 세계 랭킹 1위였던 스위스의 은퇴한 여자 프로 테니스 선수이다. 현역 시절 총 209주간 세계 랭킹 1위를 기록했다. 그랜드 슬램 단식에서 호주 오픈 3회, 윔블던 1회, US 오픈 1회의 우승 경력이 있으며 그랜드 슬램 복식에서는 9번, 혼합 복식에서는 1번 우승했다. 힝기스는 2002년 인대 부상으로 투어 활동을 중단할 때까지 수많은 최연소 기록을 세웠다. 수술 후 오랜 공백을 깨고 2006년에 WTA 투어에 복귀하여 세계 랭킹 6위까지 올랐다가 2007년 11월 1일 부상으로 다시 은퇴를 선언하였다. 그러던 중 2007년 윔블던에서 코카인 양성반응을 보였고, 본인은 코카인의 사용을 극구 부인했지만 결국 2008년 1월 3일부로 2년간의 선수자격 정지의 징계를 받았다. 이 일이 있은 후 힝기스는 징계 기간이 끝나더라도 프로에 복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위키백과
- Salvador Allende, President of Chile
1972 - 로베르토 클레멘테 통산 3천 안타 수립 [역사 속의 인물] 스포츠 스타의 귀감, 로베르토 클레멘테 워커 그는 처음에 나쁜 공에도 마구 배트를 휘두르는, 형편없는 타자였다. 그러나 무거운 배트를 들면서 선구안을 개선, 메이저리그 6년 차인 1960년에 처음 3할대 타율을 기록했다. 푸에르토리코 출신으로 미국 프로야구 최초의 라틴계 선수였던 그는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에서 18년 동안 불멸의 발자취를 남긴 로베르토 클레멘테 워커였다. 그는 38세이던 1972년 오늘, 자신의 마지막 안타를 통산 3천 안타로 수놓았다. 그의 수비는 더 놀라웠다. 우익수였던 그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강한 어깨의 소유자로 평가받는다. 그의 외야 송구에 대해 ‘뉴욕에서 공을 던져 필라델피아에 있는 주자를 잡아낼 수 있는 능력’이라는 찬사가 뒤따랐다. 140m 거리에서 노바운드로 공을 던져 충격을 안기기도 했다. 그의 앞에서 주자들이 뛰기를 포기했지만, 그는 안타로 ‘당연한 진루’를 하던 주자까지 아웃시켰다. 올스타와 골든 글러브 수상자로 각각 12차례 선정됐다, 그는 나눔과 봉사에 헌신적이어서 더 존경받았다. 3천 안타 기록 수립 3개월 후 대지진이 일어난 니카라과에 구호품을 싣고 가다 비행기 추락사고로 숨졌다. 이후 그를 기리는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이 제정됐다. 2005년에 투수 존 스몰츠는 이 상을 받으면서 “사이영상 수상, 월드시리즈 우승 때보다 값진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고 말했다. 김지석 편집부국장 /매일신문 2014.09.30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 48946&yy=2014#axzz3ErvRCfXn
1968 - 보잉 747기 첫 선 [어제의 오늘]1968년 보잉 747기 첫 선 ㆍ20세기 항공기의 대명사 ‘점보기’ '점보기'라는 애칭으로 유명한 보잉 747기는 20세기 항공기의 대명사다. 미국 보잉사는 1960년대까지 민항기의 주류를 이루던 707을 대체할 초대형 항공기로 747을 디자인했다. 하지만 설계될 때만 해도 보잉사에는 초대형 항공기 조립공장이 없어, 막대한 빚을 내 워싱턴주 에버릿에 새 공장을 지었다. 사운(社運)이 걸린 일이어서 윌리엄 앨런 당시 보잉 회장이 공장 설립을 일일이 현장에서 지휘했다고 한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9291800225
1966 - 아프리카 보츠와나 공화국 독립
- 공중전화 카드
1965 - 판문점 구 자유의 집 완공 자유의 집 팔각정을 중심으로 좌우에 배치된 2층건물은 연건평 86평으로 그동안 판문점 내 우리측 대표적 건물로 판문점 방문자가 견학을 해왔다. 1965년 9월 30일 준공 당시 한국의 국산품 전시장 및 한국의 눈부신 발전상을 소개하는 사진 전시장으로 쓰였던 자유의 집은 국군 공병대가 조립식 콘크리트 자재로 지은 판문점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그러나 30년의 세월로 노후되어 1996년 11월 13일 증개축하여 1998년 7월 9일 남북대결의 역사를 상징해 왔던 자유의 집이 새로 태어났다. 신축된 자유의 집은 통일의 뜻을 실어 북으로 날리는 마음을 표현한 방패연 모양의 지붕을 비롯하여 건물 양면의 곡선도 통일의 소망을 담아 두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http://www.dmzgallery.com/dmzgallery/sub_layout1.php?mid=1&r=view&uid=18 - 수카르노와 수하르토
신생독립국가들의 반식민, 반제국주의운동을 대표하는 수카르노 대통령의 인도네시아에서 1965년 9월 30일과 10월 1일 밤사이에 혁명-반혁명-반반혁명의 연쇄혁명이 일어났다. 첫 혁명은 수카르노 대통령의 반미, 친중국경향에 반발하는 민족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육군의 '장성평의회'가 지도한 것이었다. 이것을 30일 예방혁명으로 분쇄한 수카르노 경호대장 운통 중령은 그들이 미국 중앙정보부(CIA)의 배후조종을 받고 있었다고 폭로했다. 운통 중령은 예방혁명에 성공하자 즉시 45명으로 구성된 혁명위원회를 조직하고 급진적으로 공산당과 제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혁명위의 구성은 반공 민족주의적 세력의 중추였던 나수티온 국방상이하의 육군지도자들을 거의 완전히 제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1일 저녁 7시 나수티온 국방상과 수하르토 육군준장이 이끄는 육군부대는 다시 행동을 일으켜 약 한시간의 충돌 끝에 다시 정권을 장악했다. 이와같은 사태는 수카르노 정권의 군부, 종교세력, 공산당이 내정에 있어 격심한 대립을 이루고 있었을 뿐 아니라 군부안에서도 대체로 혁명적인 공군, 보수적인 육군, 중립적 해군의 격심한 반목과 집권투쟁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조선
1965년! 구멍난 역사를 찾아라 “장성들을 납치하라” 1965년 9월30일 해거름, 자카르타에는 숨가쁜 음모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수카르노 대통령을 추종하는 일단의 군인들이 쿠데타를 모의한 이른바 ‘장성위원회’ 소속 7명의 장군들을 납치하는 작전에 돌입했다. 대통령궁 경호단장 운퉁 중령이 주도하는 쿠데타 분쇄작전은 자카르타 사령부의 라티에프 대령과 공군특수부대의 수요노 소령 그리고 칼리만탄 지역사령관 수파르조 준장이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고 중부 자바에서 온 454대대와 530대대가 주력부대로 동원되었다. 운퉁 중령은 다음날 동트기 전에 작전을 끝내고 수카르노 대통령을 라디오 앞에 세워 국민들에게 ‘정당성’을 납득시킬 계획을 세웠다. 하림 공군기지에 작전지휘부를 차린 운퉁 중령은 자신의 그림자인 아리에프 중위와 무키잔 소위를 납치조로 내세워 10월1일 새벽 4시 육군총사령관 야니 대장의 공관을 첫 번째 목표로 출동시켰다. ‘대통령의 긴급호출령’을 내세운 납치조와 승강이를 하던 야니 총사령관은 현장에서 피살되었다. 두 번째 수프랍토 장군과, 대통령의 호출에 익숙했던 세 번째 파르만 정보사령관은 순순히 납치조를 따라 나섰고 네 번째 소에토조 장군은 포승에 묶여 끌려나갔다. 다섯 번째 판자이탄 장군과 여섯 번째 하르조노 장군은 저항하다 현장에서 살해당했다. 마지막 일 곱번째 반식민지 독립투쟁의 영웅이었던 국방장관 나수티온은 이웃 이라크 대사관저로 뛰어내려 목숨을 건진 유일한 장군이 되었다. 납치된 3명의 장군들은 하림 공군기지에서 치명적인 가해를 당한 뒤 살해되었다. 이들 6구의 시체는 하림 공군기지 내 폐우물에 버려졌다. 운퉁 중령의 보고를 받은 수카르노는 일본인 아내의 침실을 나와 하림 공군기지로 향했고 그곳에는 절친한 친구인 공군소장 다니와 인도네시아공산당 서기장 아이딧이 소극적인 방관자로 함께 자리했다. 같은 날 새벽 5시30분, 전략예비사령관 수하르토 소장은 잠자리를 나와 사령부로 향했다. 아침8시 수하르토 소장은 나수티온 국방장관의 은신처를 확인하고 그를 전략예비사령부로 데려왔다. 이날 수하르토 소장은 자신의 손바닥 안에 있는 나수티온 국방장관을 제외하고는 인도네시아에서 최고참 군인이 되었고 동시에 정부를 장악할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을 지닌 유일한 장군으로 떠올랐다. 수하르토 소장은 수카르노 대통령이 하림 공군기지를 나와 중립적인 지역으로 옮겨갈 것을 권유했다. 이날 밤 수카르노 대통령이 보골로 도망친 뒤, 수하르토의 군대는 즉각 하림 공군기지를 공격했다. 친수카르노 쿠데타파의 주력인 530대대는 전략예비사령부로 철수했고 424부대는 특전사 차크라브라와(뒤에 코파쑤스로 개편)의 공격을 받자 순순히 투항함으로써 수하르토 소장은 제압작전을 무혈로 마무리했다. 그뒤 친수카르노 쿠데타 관련자들은 전원 체포되어 군사법정에서 최고형을 받았고 수하르토 소장은 모든 분야의 실권을 장악하는 실질적인 지배자로 등장했다. 자카르타= 글·사진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한겨레21 2000년 04월 20일 제304호
1964 - 이탈리아의 영화배우 모니카 벨루치(Bellucci, Monica) 출생 벨루치 [Bellucci, Monica Anna Maria, 1964.9.30~ ] 모니카 벨루치 모니카 안나 마리아 벨루치(Monica Anna Maria Bellucci, 1964년 9월 30일~ )는 이탈리아의 영화배우이자 패션모델이다. 생애 모니카 벨루치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의 시타 디 카스텔로에서 태어났다. 모친 마리아 구스티넬리는 화가였으며 아버지 루이기 벨루치는 트럭 운송회사를 운영했다. 벨루치는 문과고등학교(Liceo Classico)에 재학중이던 16살에 모델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법률가를 지망하여 페루자 대학교의 등록금을 벌기 위해 모델일을 시작하였지만 점차 법학 공부와는 멀어지게 되었다. 그녀는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영어에 모두 능통하며, 스페인어도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에서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연기하면서 이런 언어들과 함께 아람어 까지도 구사하였다. 벨루치는 1990년에 패션 사진가 클라우디오 카를로스 바쏘와 한 차례 결혼했었다. 현재 그녀는 동료 연기자 뱅상 카셀과 결혼한 상태이며, 두 사람은 여러 편의 영화에 함께 출연했고 데바(Deva, 2004-10-12 출생)라는 딸을 하나 두었다. 2004년에는 딸을 임신한 상태에서 정자기증을 반대하는 이탈리아 법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배니티 페어지 이탈리아판에 누드 화보로 출연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제작에 참여했던 배우부터 스탭, 감독들의 제작현장에서 생각하는 종교에 대한 생각을 개별 인터뷰 형식으로 실은 다큐멘터리 영화 위대한 질문(2004)에서, 그녀는 "나는 모든 종교를 존중하며 관심이 많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불가지론자이다. 무언가 내가 믿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대양에서의 조수를 일으키고 자연과 존재의 모든 것을 통합하는 신비로운 에너지이다."라고 말했다. 경력 /위키백과
1963- 이준 열사 유해 네덜란드서 56년 만에 환국
-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장관회의 기념, 2008
1961 -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출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정식 발족 재정금융상의 안정유지 및 고도의 경제성장-고용증대-생활향상, 회원국과 비회원국 간의 건전한 경제발전 지원, 세제통상의 다각적-무차별적 확대 등을 협약의 목적으로 삼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1961년 9월30일 정식 발족했다. 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경제협력개발기구)의 약자인 OECD는 선진국이 국제경제 전반에 관해 협의하기 위한 기관으로 그 목적은 고수준의 경제성장을 유지하며 개발도상국의 경제발전을 원조하고 세계무역의 확대에 공헌한다는 것 등이었다. 2차대전후 유럽의 부흥경제협력을 추진해온 유럽경제협력기구(OEEC)를 개편해 개발도상국 원조문제 등 새로 발생한 경제정세변화에 적응시키기위해 1960년 12월에 OECD 조약이 서명되어 이날 발족됐다. 하부기관으로 각종 위원회가 있는데 그중 OECD의 3대 목적에 대응한 경제정책위원회, 개발원조위원회, 무역위원회의 3개 주요위원회가 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6년 12월 12일 OECD에 가입, 29번째 정회원국이 됐다. /조선
1959 - 흐루시초프 중국 방문
1955 - 미국의 영화배우 제임스 딘(Dean, James) 사망 딘 [Dean, James, 1931.2.8~1955.9.30] 첫 영화 ‘에덴의 동쪽’(1955)으로 화려하게 꽃을 피웠으나 1년도 채 피지 못하고 갑작스레 팬들의 곁을 떠나야 했던 제임스 딘. 1955년 9월30일, 그가 죽었다. 애차(愛車) 포르셰 스파이더를 몰고 캘리포니아 교외 도로를 과속으로 질주하다 사고를 당한 것이다. 존 웨인으로 대표되는 강인한 남성상과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엄격한 아버지상에 첫 반기를 든 그의 등장에 허무와 저항과 냉소에 빠진 젊은이들은 환호하고 열광했다. 그가 영화에서 선보인 모습들은-때로는 유약한 모습으로 모성본능을 자극하고 또 때로는 우수어린 눈빛으로 기성사회를 응시하는 아웃사이더 역-사실 그의 실제생활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9세때 겪었던 어머니의 죽음과 숙모집을 전전해야 했던 유년기의 기억이 그를 자꾸 외진 곳으로 몰아간데다 그역시 세상살이에 익숙하지 않았다. /조선
[책갈피 속의 오늘]1955년 제임스 딘 교통사고 사망 49년 전 오늘 제임스 딘이 죽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근교 466번과 41번 고속도로가 교차하는 섈레임에서 은빛 포르셰를 시속 75마일로 몰다 마주오던 차와 충돌했다. 그의 나이 스물넷이었다. http://news.donga.com/3//20040929/8111464/1
1951 - 오스트레일리아의 생리학자 배리 마셜(Marshall, Barry) 출생 마셜 [Marshall, Barry James, 1951.9.30~] 배리 J. 마셜(Barry J. Marshall, 1951년 9월 30일 ~ )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생리학자이다. 그는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가 위염 등 위장 질환의 원인임을 증명하여 종전의 위궤양은 스트레스, 자극적인 음식, 위산 과다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는 단순한 통설을 뒤집은 것으로 유명하다. 1974년 서오스트레일리아 대학에서 의학과 약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1년 왕립 퍼스 병원에서 위염에 관심있는 병리학자 로빈 워런을 만나 같이 위염에 관한 세균을 찾는 연구를 했다. 이듬해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세균이 위염과 위암에 영향을 주는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당시 학계의 다른 학자들은 위산 속에서 세균이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가설을 웃음거리로 여기고 인정하지 않았다. 1984년 마셜은 프리맨틀 병원에서 자신의 가설이 코흐의 공리에 맞는다는 것을 밝혔다. 그는 스스로 배양한 균이 든 시험관을 통째로 마신 뒤 위궤양이 일어난 것과, 그 위궤양이 항생제로 치료된다는 것을 보인 것이다. 과학자 배리 마셜과 로빈 워런은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하였다. /위키백과
1949 - 이승만, 외신기자회견에서 북진통일 발언 (북한의 남침을 초래한 요인의 하나)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49년 9월 30일 외신 기자 회견에서 이승만은 "우리는 북한의 실지(失地)를 회복할 수 있으며 북한의 우리 동포들은 우리들이 소탕할 것을 희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1950년 6월 24일 육군본부 정보국이 북한의 대규모 병력이 38선에 집결했다는 보고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군 수뇌부는 바로 그 날 비상경계를 해제하였다. 그 날은 주말이라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이 외출했다. 그 날 저녁 육군본부 장교 클럽 낙성 파티에는 전방부대 사단장들까지 초청되었었다. (한국전쟁) /위키백과
1949 - 중국 공산당, 주석에 마오쩌둥[毛澤東] 수상에 저우언라이[周恩來] 선출 중국공산당은 동북·화북·화동의 농촌지대를 장악하고 난 뒤인 1948년 국민정부가 지배하는 도시지역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그해 가을에는 동북지방의 진저우[錦州]·선양·창춘[長春]의 세 도시를 장악했다. 이때 산둥·장쑤에서는 회해전역(淮海戰役)이라는 내전 최대의 전쟁이 벌어져 쌍방 모두 50만 이상의 대군이 참여하는 접전을 벌였다. 중국공산당은 회해전역에서 승리했으며, 1949년 1월 톈진·베이징도 점령했다. 1949년 3월 중국공산당은 제7회 전국대표대회(7전대회) 2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2중전회)를 허베이 스자좡[石家莊]에서 열고 활동의 중심을 농촌에서 도시로 옮기며, 경제정책의 목표를 공업화에 둘 것을 결정했다. 곧이어 중앙위원과 당 기관을 베이징으로 옮겼다. 4월에 공산군은 난하이[南海]·상하이·우한에 입성하고, 그위 서남·화동·화남 지역으로 각각 진격했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100만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했다. (중국의 현대화) /브리태니커
1948 - 한글전용법, 국회통과 [역사속의 오늘] 한글전용법, 국회통과 1948년 9월 30일, 국회에서 ‘한글전용법’이 통과됐다. 이에 앞서 조선어학회가 같은 해 7월 ‘한글 전용법 제정 건의문’을 국회 문교후생위원회에 제출했다. 국회 문교후생위는 토의를 거쳐 ‘대한민국의 공문서는 한글로 쓴다’는 짧은 한글전용법안을 만들었다. 1446년(세종 28) ‘훈민정음’이란 이름으로 우리 나라의 글자로 반포된 지 500여년 만에 국가 최고의 공용문서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하지만, 본회의 논의 과정에서 이 법안에는 ‘다만, 얼마 동안 필요한 때에는 한자를 병용할 수 있다’는 단서조항이 붙는다. 이후 그해 10월 9일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제정 1948.10.9 법률 제6호]은 제정됐다. '국민의 한자 실력을 형편없이 떨어뜨렸다'거나 '왜 공문서에 불필요한 한자를 많이 섞어 쓰느냐'는 논란이 이 한글전용법 제정으로 시작됐다. 또 조선어학회의 후신인 한글 학회와 같은 한글 전용론자들은 ' 다만 '뒤 단서 조항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쟁은 2005년 1월에 제정한 '국어기본법'이 제정되면서 해결된다. 일부 법조항이 '국어기본법'에 흡수되고 '한글전용법'은 56년 만에 폐지됐기 때문이다. 정보관리부 이재근 /매일신문 2008년 09월 30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4650&yy=2008
1938 -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 뮌헨협정 체결 [책갈피 속의 오늘]1938년 뮌헨협정 서명 1938년 9월 30일 오전 2시,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4국 수뇌는 뮌헨에 모여 한 장의 협정문에 서명했다. 10월 10일까지 체코슬로바키아 내 독일인 다수 거주지역인 수데텐 지역을 독일이 점령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이었다. 주민들이 열광적으로 환호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분노는 더 커졌다. 히틀러는 이 승리를 너무 비싼 값을 치르고 얻은 것처럼 여겼다.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809300131
1929 - 세계 최초 텔레비전 방송 시작(영국 BBC) 닙코프의 전기 망원경을 상업화한 사람은 영국의 사업가 존 로지 베어드(1888-1946)였다. 비누, 젤리, 사탕 등의 사업에 손을 댔다가 실패한 그는 네온등이 발명되자 이를 이용한 텔레비전이 큰 돈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1925년 그는 아버지와 친구로부터 2백50파운드를 꿔 다락방에서 닙코프의 원판을 단 기계식 텔레비전 시스템을 제작했다. 연장을 넣어두던 낡은 상자로 모터의 받침대를 만들고, 빈 과자상자로 네온등을 넣는 케이스를 만들었다. 주사용 원판은 마분지를 잘라서 만들었고, 못쓰는 자전거에서 떼어낸 렌즈도 도움이 됐다. 이렇게 해서 흉물스럽게 태어난 텔레비전은 30개의 주사선을 가지고 1초에 10번씩 번쩍였다. 베어드는 이를 ‘텔레바이저’(televisor)라고 불렀다. http://news.dongascience.com/HTML/News/2007/08/07/20070807200000000013 /200708072000000000130108000000.html
1928 - 루마니아 태생 미국의 소설가, 인권운동가 위젤(Wiesel, Elie) 출생 위젤 [Wiesel, Elie, 1929.9.30~ ] 미국 유대계 작가 겸 인권운동가. 루마니아 시게트 출생. 15세 때인 1944년 나치의 유대인 학살계획에 의해 아우슈비츠 및 부헨발트 수용소에 끌려가, 이곳에서 부모와 두 누나를 잃었으나 그는 연합군의 진격 때까지 살아남았다. 1945년 프랑스에 정착하여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공부하였고, 1948년 《라 르슈》지(紙) 기자가 되었으며, 1956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1959년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등의 참상을 그린 자전적 첫 작품 《그날 밤》을 발표, 이 소설은 1백만부 이상이 팔리고 영화 ·텔레비전으로 제작되는 등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이어, 《다섯 개의 성서 초상》 《한 세대 뒤》 《침묵의 유대인》 등의 작품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 이래 계속되어온 유대인 박해를 고발하였고, 《제5의 아들》로 1984년 프랑스 문학대상을 받았다. 작품활동을 꾸준히 계속한 그는 뉴욕의 시티칼리지, 보스턴대학교 등의 교수직을 맡고부터 폭넓은 사회활동을 전개, 캄보디아·나이지리아·에티오피아 등지의 기아와 박해의 현장을 찾아가 구호활동을 벌였다. 핵전쟁 방지운동에도 정열을 바쳐온 그에게, 1985년 미국의회는 “20세기가 맞았던 도덕의 타락상을 생생히 전한 증인이며, 이러한 도덕의 타락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줄기차게 인류를 일깨워온 스승이자 작가”임을 인정하여 대통령 명의의 메달을 수여하도록 결의, 레이건 대통령으로부터 ‘작가·교사·기자’라는 3단어가 새겨진 금메달을 받았다. 또, 1986년에는 인종차별 철폐와 인권신장을 위해 노력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는 노벨 평화상의 상금 30만 달러 전액을 인류를 위한 재단 설립에 투여했다. /네이버
1927 - 베이브 루스, 60 홈런 기록 베이브 루스 [Ruth, Babe, 1895~1948] 188㎝가 넘는 키에 몸무게가 98㎏을 넘는 왼손잡이 타자인 루스는 1919~21년까지 3년 연속 메이저 리그 최다 홈런 기록을 세웠고, 1927년에는 다시 60개의 홈런을 침으로써 최다 홈런 기록을 수립했다. 1919년에는 29개의 홈런으로 한 시즌 최다 홈런을 기록했는데, 그때까지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은 내셔널 리그에 소속된 시카고 커브스 팀의 네드 윌리엄슨이 1884년에 세운 27개였다. 루스는 12년 동안 아메리칸 리그에서 홈런 부문 1위를 지켰다. 4개의 독립 시즌에서는 50개 이상의 홈런을 쳤으며, 11시즌에서는 각 시즌 40개 이상의 홈런을 쳤다. 메이저 리그에서 22시즌을 뛰는 동안 통산 714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이 기록은 1974년에 행크 아론이 715번째 홈런을 칠 때까지 깨지지 않았다. 이밖에 루스는 메이저 리그 통산 2,056개의 포볼과 장타율 6할 9푼의 기록을 세웠다. 월드 시리즈에 10차례 출전하여 41경기를 치르는 동안 3할 2푼 6리의 타율과 15개의 홈런, 장타율 7할 4푼 4리의 기록을 세웠다. 한편 1928년 월드시리즈에서는 네 경기에 출전하여 6할 2푼 5리의 놀라운 타율을 기록했다. /브리태니커
1925 - 서울역사 준공 서울역-역사 * 1900년 7월 8일: 남대문정거장(南大門停車場)으로 영업개시 * 1923년 1월 1일: 경성역(京城驛)으로 개칭 * 1925년 9월 30일: 구 역사 준공 * 1947년 9월 25일: 서울역으로 역명 변경 * 1957년: 서부역사 준공 * 1988년 9월 12일: 선상역사 준공 * 2003년 11월 28일: 민자역사 준공, 소재지 이전 (중구 한강대로 405 (봉래동2가 122-21) → 용산구 한강대로 405 (동자동 43-205)) * 2004년 4월 1일: 한국고속철도 운행 개시 * 2006년 5월 1일: 소화물 취급 중지 * 2009년 7월 1일: 수도권 전철 경의선 개통 구 서울역사 옛 서울역사의 설립 주체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였다. 남만주철도주식회사는 이 역이 일본 - 조선 - 만주를 잇는 국제적인 수준의 역사가 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일본 도쿄 - 시모노세키 사이는 일본 국철, 시모노세키 - 부산 사이는 부관연락선, 부산~신경(新京) 혹은 북경(北京) 사이는 직통 열차로 연결되며, 이 열차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로 연결되어 모스크바와 베를린까지 연결시키는 구상을 가졌다. 이러한 세계적인 교통망에서 경성역은 한반도의 현관이며, 식민지 경영의 관문이라는 역할이 부여되었다. 설계자는 도쿄 대학 교수이던 쓰카모토 야스시(塚本靖)였다. 그는 다쓰노 긴고(辰野金吾)의 제자였는데, 그는 도쿄역사를 설계한 바 있었다. 역사의 신축 추진은 조선총독부 철도국 공무과 건축계에서 담당하였다. 경성역은 1922년 6월 착공되어 1925년 9월 30일에 준공되었다. 원래는 1923년에 준공 예정이었으나, 일본 간토 대지진으로 공사 기간이 연장되고, 공사비도 일부 감액되었다. 건축 규모는 대지 면적 70,083평에 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6,631㎡의 초대형 건축물이었으며, 동양 제1역은 도쿄 역, 동양 제2역은 경성역”으로 불릴 정도의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 건물 1층은 대합실, 2층은 귀빈실과 식당, 그리고 지하는 역무실로 사용되었다. 승강장은 지하에서 연결되었다. 1층 대합실 중앙에는 큰 홀이 있고, 그 상부 지붕에는 비잔틴 풍의 돔을 올렸다. 그 돔의 측면 반원형 아치 창으로부터 중앙홀 내부로 자연 광선을 끌어들여 밝은 홀 공간을 조성하였다. 철근 콘크리트조에 벽돌조로 마감했으며, 1층은 거친돌 마감식으로 처리하고, 상부 모서리와 개구부에는 돌을 사용하였다. 지붕은 철골조에 천연 슬레이트 마감이며, 일부 동판 이음을 하였다. 이 건물은 거대한 규모, 풍부한 장식과 정교한 상세로, 조선총독부 청사와 함께 일본 제국이 조선을 착취하기 위해 건립한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한편 역사 그릴은 문화 예술인들이 모여 작품을 논하고, 많은 작품을 창작한 장소로도 유명하였다. 역사는 1950년 한국 전쟁으로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으며, 수리 과정에서 중앙홀 천창(天窓)이 훼손되었다. 1958년 1월 기존 역사 남측에 새마을호 대합실이 증축되었다. 1988년 선상역사가 건설되어 많은 역무 기능이 옮겨갔고, 2003년 남측에 신역사가 준공되어 옛 서울역사는 더 이상 역사의 용도로 사용하지 않게 되었고, 철도문화재단의 관할 하에 시네마테크를 비롯한 문화시설로 용도변경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사적 284호로 지정된 서울역 건물이 한국철도공사 소유인 것은 부당하다는 지적이 있었고, 원형 보존을 내세운 문화재청에서 한국철도공사에 소유권 이전을 요구하여 2006년에 문화재청으로 소유권이 이전되었고, 2007년 7월에는 문화관광부에 의해 이른바 '복합문화공간'으로의 전환이 발표되었다. 2011년까지 문화시설로의 전환을 완료할 예정이다. /위키백과
1911 - 영국의 조각가, 우표-코인 디자이너 마친(Machin, Arnold) 출생 마친 [Machin, Arnold, 1911.9.30~1999.3.9] Arnold Machin Arnold Machin O.B.E, R.A.(30 September 1911 – 9 March 1999) was a British artist, sculptor, coin and stamp designer. Machin was born in Stoke-on-Trent in 1911. He started work at the age of 14 as an apprentice china painter at the Minton Pottery. During the Depression he learnt to sculpt at Stoke-on-Trent's Art School, which was opposite the Minton factory. In 1934 he moved to Derby, where he met his wife Patricia. After imprisonment in the Second World War as a conscientious objector, he returned to modelling and sculpture, and created many notable ceramics which are now prized collectors' items. In 1946 he was elected an associate member of the Royal Academy, was appointed a Master of Sculpture from 1959 to 1966 and became the longest-serving member of the Academy. He was elected an Academician in 1956 and a Fellow of the Royal Society of British Sculptors. From 1951 he was a tutor at the Royal College of Art, where he entered the culture that was to bring him his most celebrated commissions. Stamp and coin designs In 1964 Machin was chosen to design a new effigy of the Queen for the decimal coinage, which was to be introduced from 1968; this effigy was used for all British coins until 1984 (it was still on coins of New Zealand and Australia in 1985 and it remained on Canada's coinage until 1989.) In 1966 the Queen approved Machin's similar design for an effigy of her to be used on what come to be known as the "Machin series" of British definitive postage stamps. Machin produced a bas-relief in clay, which when combined with a different coloured background, is reminiscent of the overlaid decoration of potteries such as Wedgwood. The design was first used on the 4d value which was issued in June 1967, and has been used on all British definitive stamps (except more recent regional issues) ever since. It is thought that this design is the most reproduced work of art in history with, to date, approximately 320 billion copies produced. In 2007 the Machin-designed stamp was still in use at its 40th anniversary and to mark the occasion, the Post Office issued a commemorative stamp featuring a photograph of Arnold Machin. It was also available for sale in a miniature sheet which incorporated another stamp with a reproduction of a Machin series stamp as well as two actual £1 Machins in different colours. Family Machin and his wife Patricia had a son, Francis (1949-2007) who was an artist too and an architect. After Francis died, the possessions of Arnold Machin in his house in rural Staffordshire were sold in auction on September and October 2008 by Cuttlestones. The possessions included the fourth of the final plasters known made to create the Machin stamp series, the three others are kept in the Royal Mail archives. http://en.wikipedia.org/wiki/Arnold_Machin
1908 - 소련의 바이올린 연주자 다비드 오이스트라흐(Oistrakh, David) 출생 오이스트라흐 [Oistrakh, David Fyodorovich, 1908.9.30~1974.10.24] 1908 - 소련의 바이올린 연주자 오이스트라흐 출생 [오늘<1225>(9월30일)] 오이스트라흐 중세 이래 폴란드 영토였던 우크라이나는 17세기 후반 러시아 영토가 되었고, 그래서 오이스트라흐는 제정러시아 신민으로 태어났다.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차르가 물러난 뒤 10대 초의 오이스트라흐는 얼마간 우크라이나사회주의소비에트공화국 인민으로 살았고, 1922년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소련)이 창설되면서 우크라이나가 소련의 한 공화국이 됨에 따라 그는 소련 사람이 되었다. 오이스트라흐는 소련 사람으로 죽었다. 그러나 오이스트라흐가 죽고 16년 뒤 그의 조국 소련이 해체되면서 그는 다시 우크라이나 사람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때까지 주로 소련에서 활동하던 오이스트라흐는 1945년 이후 활발한 해외 연주여행을 통해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독주로도 세계 각지의 클래식 팬들을 사로잡았지만, 역시 바이얼리니스트인 아들 이고르 오이스트라흐(1931년생)와의 이중주로도 이름을 떨쳤고, 특히 러시아 출신 두 동료와의 피아노 3중주로 성가를 올렸다. 그 두 동료는 모스크바 오페라극장 관현악단의 수석 첼리스트였던 스비야토슬라프 니콜라예비치 크누셰비츠키(1908~1963)와, 바르샤바의 쇼팽 국제콩쿠르에서 1등으로 입상한 바 있는 피아니스트 레프 니콜라예비치 오보린(1907~1974)이다. 오이스트라흐는 오데사음악연극원 출신이었고 크누셰프스키와 오보린은 모스크바음악원 출신이었지만, 이 세 사람은 그들의 음악적 생애 내내 같은 ‘소련 사람’이었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한국일보 2004/09/29 17:26 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 life/200409/h2004092917244225340.htm&ver=v002
1897 - 프랑스의 가톨릭 수녀 테레사(Thérèse de Lisieux, Sainte) 선종 테레사 [Thérèse de Lisieux, Sainte, 1873.1.2~1897.9.30] 가톨릭 성녀. 본명은 마리 프랑수아 테레즈이며 노르망디의 알랑송에서 출생하였다. 'Therese de Lisieux'는 '리지외의 테레사'란 뜻의 프랑스어이다. 1888년 리지외의 가르멜회(會)에 들어가, 2년 후 서원(誓願)을 하고 1893년 이후 수녀원장 보조수녀로 있었는데, 결핵으로 2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 짧은 수도생활 중 그녀는 신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복종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 신앙은 밝고 소박하여 가난한 이웃에 대하여는 더없는 애정을 쏟았으며, 순결하고 경건한 생활은 많은 사람들의 애경(愛敬)을 한몸에 받았다. 1925년 '아기예수와 성안(聖顔)의 성 테레사'라는 이름으로 시성(諡聖)되었으며 선교사업의 수호성인이다. 자서전 《영혼의 이야기 Histoire d'une âme》(1898)가 있다. /네이버
1891 - 러시아의 탐험가, 과학자 오토 시미트(Shmidt, Otto) 출생 시미트(슈미트) [Shmidt, Otto Yulyevich, 1891.9.30~1956.9.7] 역사속의 오늘-탐험가·과학자 오토 슈미트 출생 1948년 발표된 ‘운석성인론’은 태양이 우주공간을 돌다가 운석과 먼지를 흡수해 태양계 내 행성들을 탄생시켰다고 본다. 태양계가 고온의 가스가 운동하면서 발생했다는 기존의 ‘고온기원설’을 뒤집는 것으로 당시 학계에 충격을 주었다. 운석성인론을 주장한 것은 소련의 탐험가이자 자연과학자인 오토 슈미트다. 1891년 9월 30일 러시아의 모길료프 출신인 슈미트는 수학교수이자 탐험가·과학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슈미트는 소련의 북극지방 개척에 공로를 세워 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북극지방 개척 중에 몇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많은 인원을 승선시킬 수 있는 배를 찾다가 극지방 탐험에서 필수인 쇄빙 기능을 갖추지 않은 배를 고집한 것이다. 1933년 7월에는 북부 유럽 각지에서 탐사 프로젝트를 홍보하느라 여름철 탐사 기회를 놓쳐버리기도 했다. 이런 까닭으로 11월 배가 유빙에 충돌해 이듬해 2월 침몰했다. 곤란한 상황이었지만 탈출작전과 더불어 탐험기지 건설을 게을리하지 않고, 대원들간 모범적인 활동을 이끌어내 구사회생하며 영웅이야기의 주인공이 됐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매일신문 2006년 09월 29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3443&yy=2006
1879 - 노르웨이의 소설가 팔크베르게(Falkberget, Johan Petter) 출생 팔크베르게 [Falkberget, Johan Petter, 1879.9.30~1967.4.5] 노르웨이의 소설가. 본명은 Johan Petter Lillebakken. 노르웨이 중동부 산악지방 주민의 삶을 그린 향토작가이다.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독학했으며, 8~27세에 구리광산에서 일하면서 습작을 했다. 산악지방의 농부들과 광부, 철도노동자들을 그린 그의 소설은 그들의 어려운 삶과 변두리문화, 더 안락하고 부유한 계곡지대 주민들에 대한 적의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들은 과거를 무대로 하고 있다. 〈4번째 야경 Den fjerde nattevakt〉(1923)은 1807~25년 뢰로스에서의 삶을 다루고 있으며, 18세기를 무대로 한 〈크리스티아누스 섹스투스 Christianus Sextus〉(3부작, 1927~35)는 크리스티아누스 섹스투스라는 한 광부의 일대기를 극화한 것이다. 1940년 독일 점령하의 노르웨이를 탈출해 걸어서 스웨덴까지 갔는데, 그때 가지고 나온 원고가 후에 2번째 3부작이 된 〈밤의 빵 Nattens brød〉(1940~59)이다. 1960년 성 올라브 십자가상을 받았다. /브리태니커
1870 - 프랑스의 물리화학자 페랭(Perrin, Jean) 출생 페랭 [Perrin, Jean Baptiste, 1870.9.30~1942.4.17] 장 바티스트 페랭(Jean Baptiste Perrin, 1870년 9월 30일 ~ 1942년 4월 17일)은 프랑스의 물리학자·화학자이다. 릴에서 출생하여, 고등 사범 학교를 졸업하였다. 파리 대학 교수와 동교 생물 이학 연구소장을 지냈다. 그는 콜로이드 용액의 연구로, 분자가 실제로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물 분자의 측정에 성공하였다. 또한 화학 반응 속도의 복사 이론을 제안하였고, 광화학 방면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26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저서에 《원자》, 《물리 화학 개론》 등이 있다. /위키백과
1861 - 미국의 껌 제조업자 리글리(Wrigley Jr., William) 출생 리글리 [Wrigley Jr., William, 1861.9.30~1932.1.26] 미국의 제조업자. 그의 회사는 세계에서 가장 큰 껌 생산업체이자 판매업체가 되었다. 13세때 아버지 회사의 비누외판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1891년 시카고에서 비누판매대리점을 개설하여 비누 1상자당 베이킹파우더 1봉지를 제공하는 경품판매를 실시했다. 1892년에는 부수적 상품으로 베이킹 파우더를 팔면서 경품으로 껌을 주었다. 껌이 베이킹파우더보다 더 인기가 있는 것을 깨닫고 비누와 베이킹파우더 판매를 그만두고 껌 판매에 전념했다. 또한 거래상들에게 주문의 규모에 따라 시계, 커피 분쇄기, 낚시도구 같은 경품을 주었다. 그는 자신이 1893년 선보인 스피아민트껌의 판매량을 늘리기 위해 광고를 했다. 1908년까지 리글리스 스피아민트껌의 판매액은 연간 100만 달러가 넘었다. 1911년 그는 껌을 만들었던 제노 제조회사를 인수해서 윌리엄리글리주니어사(Wm. Wrigley Jr. Company)를 설립했으며, 이 회사는 미국 최대의 광고주가 되었다. 1925년 리글리는 이 회사의 사장직을 아들 필립에게 넘겨주고 회장이 되었는데, 그때까지 리글리사는 미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에 공장을 갖고 있었다. 그는 캘리포니아 남부해안에서 조금 떨어진 샌타캐틀리나 섬을 개발하였다. 리글리가(家)가 소유하고 있는 내셔널 리그 구단인 시카고 커브스는 제2차 세계대전 때를 제외하고 1921~51년까지 춘계훈련을 샌타캐틀리나 섬에서 실시했다. 리글리사의 본사인 리글리 빌딩은 시카고의 유명한 건축물이 되었다. /브리태니커
1852 - 아일랜드 출생의 영국 작곡가, 지휘자 찰스 스탠퍼드(Stanford, Charles) 출생 스탠퍼드 [Stanford, Charles Villiers, 1852.9.30~1924.3.29] 아일앤드 출생의 영국 작곡가 겸 지휘자이자 교육자.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더블린의 트리티니대학과 케임브리지에 있는 퀸스칼리지에서 공부했으며, 1874∼1877년에는 라이프치히에서 카를 라이네케(Carl Reinecke)에게, 그리고 베를린에서 프리드리히 킬(Friedrich Kiel)에게 배웠다.
1791 - 오페라 마술 피리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초연되다 마술피리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모차르트의 오페라. 2막. 가창(歌唱)과 대사를 포함한 이른바 징슈필에 속한다. 슈카네더의 대본에 의하여 1791년 3월부터 작곡, 9월 30일 완성하고 빈에서 초연하였다. 큰 구렁이에게 쫓긴 왕자 타미노는 밤의 여왕의 시녀 세 사람에게 구출되어 여왕의 딸 파미나의 아름다운 화상(畵像)을 보고 나쁜 수도자 자라스트로에게서 그녀를 구해 내려고 결심한다. 이 오페라는 서곡을 비롯하여 뛰어난 아리아 등이 많으며, 모차르트는 이 작품에서 독일 전통 오페라로서의 징슈필을 하나의 장르로 완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페라 세리아와 오페라 부파의 요소도 도입, 종합적인 작품을 완성하고, 이 작품 초연 2개월 후에 죽었다. 한국에서는 1973년 6월 연세대학 오페라단(정희석 지휘)에 의해 초연되었다. /네이버
1765 - 멕시코의 성직자, 독립운동가 모렐로스(Morelos, Jose Maria) 출생 모렐로스 [Morelos, Jose Maria, 1765.9.30~1815.12.22] 멕시코의 성직자, 독립운동가. 1765년 9월 30일 바야돌리드(지금의 모렐리아)에서 출생하였다. 에스파냐에 대항하여 멕시코독립투쟁을 벌인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여러 해 동안 산양지기로 일하였다. 25세 때 산니콜라스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고 33세 때 사제로 서품되었다.
1732 - 스위스 출생의 프랑스 은행가, 정치가 자크 네케르(Necker, Jacques) 출생 네케르 [Necker, Jacques, 1732.9.30~1804.4.9] 스위스 제네바 출생의 프랑스의 은행가, 정치가. 스위스 제네바 출생. 부친은 국제법 대학교수였으며 신교도였다. 15세 때 파리로 가서 부친의 친구인 베르네의 은행에 취직, 1762년 튀르송네게르은행을 창설, 수년 후에 부호가 되어 프랑스의 동인도회사 이사로 취임하였다. 1764년 로잔의 목사딸로서 파리 사교계의 스타인 쉬잔 퀴르쇼와 결혼, 정계에 투신하여, 1776년 루이 16세의 재무장관으로 발탁되고, 이듬해 재무총감의 요직에 취임하였다. 미국독립전쟁을 돕기 위하여 영국군과 싸운 프랑스의 군비를 염출하고자 공채(公債)정책을 채용하였다. 1781년 프랑스에서 최초의 재정보고서를 간행, 재정수지의 전모를 국민에게 알리고 경고를 하였으나, 이 일로 궁정의 비난을 받게 되어 사임하였다. 1788년 재차 재무총감에 취임, 왕정 재정의 궁핍을 타개하기 위하여 삼부회(三部會)의 소집을 결심, 프랑스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1789년 7월 11일 총감직에서 물러났으나 5일 후 복직하여 교회재산의 국유화, 아시니아 지폐 발행으로 국가재정의 파국을 막을 수 있었지만, 혁명 후 사태에 순응할 수 없어 1790년 사임하였다. 정계에서 은퇴한 후 스위스로 건너가 죽을 때까지 은둔하였다. 유명한 문학가인 스탈부인은 그의 딸이다. /네이버 -----------------------------------------------------------------------
-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