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9일 일요일 부산민청 서부산지부(준)에서는
[청년통일기행] 부제 "한국전쟁기 부산경남지역 민간인 학살지를
가다"를 전체 12명의 청년들과 부경유족회 양귀순부회장님과 허운영사무국장님(부산연합자통위원장)이
함께 하여 성공리에 진행되었습니다.
먼저 간
곳은 사하구 구평동 구평초등학교 뒷산 삼박골짜기로 알려진 곳에 갔습니다.
수풀이 많이 자라 모기가 극성이었습니다. 간단한 제사를 지내고 구평초등학교로
내려와 자세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여기 구평학살지는 당시 부산형무소
제소자들을 끌고와 구덩이를 파고 나무와 나무사이에 끈을 묶고 그 끈에다가
사람의 목을 메달아 총살한 장소였습니다.
총살을 당한 사람들은
"내가 죄가 있다면 통장한테 속아서 지장을 찍은 것밖에 없다.
차라리 내 손가락을 짤라라!" 이렇게 외치거나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고,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인근에 있는 학살지로 알려져 있는 대티고개와 대청공원
주변 야산이 있는데 이곳은 정확한 학살장소를 몰라 발굴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다음으로
간곳은 김해 진영 나밭고개라는 곳과 신어산 골짜기 주동광산과 숯굴이었다. 나밭고개는
보도연맹원들을 집합시켜 놓고 일시에 학살한 곳이었는데 10여년이 지나
4.19혁명이 일어나고 전국적으로 피학살 유족회가 발족하여 유족회에
의해 발굴이 된 곳이었다. 발굴 당시 학살이 된지 10여년이 지났지만
차거운 물이 흐르는 곳이 되어서 인해 살점이 섞지 않고 흘러내리는
끔찍한 상태였다고 한다. 이곳과 인근 김해지역 학살지에서 발굴한 유골을
진영 국도변에 합동묘를 만들고 묘비를 세웠다. 묘비에는 이승만 정권의
만행을 온 천하에 폭로하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우리는 다시 신어산
골짜기로 갔다. 대동면 주동마을을 통해서 골짜기로 들어갔다. 골짜기로
들어가는 도로는 비포장이었고 트럭한대가 겨우 들어갈 수 있는 폭이었다.
이 도로는 일제시대 때부터 있던 주동광산에서 채취한 광물을 실어나르기
위해 만들어진 도로였다. 그러다가 폐광이 되고 전쟁 당시에는 부산형무고
제소자들을 군용 트럭에 실어나르는 길이 된 것이다.
주동광산은
입구가 8부능선쯤에 있다고 하는데 유골을 현재 없다고 한다. 80년대에
어느 사업가가 광산을 재개발하려고 유골을 어디론가 치워 버렸다고
한다. 광산은 얼마못가 망하고 사업가는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 버려
유골을 찾을 수가 없다고한다.
거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신어사라는
절이 나오는데 신어사에서 걸어 10여분 정도 올라가면 일제시대때 숯을
굽던 숯가마 자리가 나온다. 지금도 당시에 구워졌던 숯들이 여기저기에
널여 있었다. 작년 이곳 학살지가 밝혀지고 바로 발굴을 하였는데 흙밑이
습기가 많은 진흙이라 유골의 부패가 심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한다. 학살지가 두곳이나 있는 이곳 주동마을 대부분의 주민들은
이곳 학살지를 잘알고 있었다고 한다. 주동광산이 재개발되기 전까지만
해도 비만 오면 숯굴과 주동광산에서 학살된 유골들이 계곡으로 떠내려왔고
어린애들은 사람의 정갱이 뼈를 가지고 칼싸움 놀이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지금 남아있는 유골은 숯굴에서 흘러내려온 유골의
일부가 신어사에 봉안되어 있는 정도라고 한다.
우리는 신어사 그늘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함께 간 부경유족회 부회장님이신 양귀순
할머니의 남편을 잃고 홀로 자식을 키우면서 살아오신 말씀을 들었다.
민족의 비극의 온몸으로 당하시고 살아오신 할머니의 말씀을 들으면서
모두들 눈을 글썽였다.
다음으로
간 곳은 양산 석산리 사배골짜기로 불리는 곳이었다. 이곳은 함께 간
양귀순 할머니의 남편이 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끌려가 총살을 당한
곳이라고 하여 우리는 숙연케하였다. 학살 장소인 사배골짜기는 4.19
혁명 직후 유족회에 의해 발굴된 곳이었는데, 그때 이후 지금까지 한번도
간적이 없어 양귀순 할머니는 정확한 위치를 찾지를 못하시었다.
마침
주변에 밭일을 하시던 아저씨한테 물어보니 바로 학살 장소를 가르쳐
주셨고 그곳말고 정확한 위치를 몰라 4.19혁명 직후에도 발굴을 못한
"남락골짜기"까지 가르쳐주셨다. 아저씨가 가르쳐주신 곳을
가니 할머니는 세월이 흘러 너무 많이 변해 이곳인 것 같기는 한데 정확하게는
모르겠다고 하여 다시 인근 주민에게 물어보았다. 조금 더 올라가면
축사가 나오는데 거기가 총살한 장소라고 주민은 알려주었다. 기행을
통해 알게된 것인데 그곳 주민들은 학살의 내용과 상황 장소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총살 장소였던 축사를 보고 내려오는데 양귀순 할머니는
오열을 하기 시작하였다. 할아버지 생각이 많이 나신 것 같았다.
우리는
양귀순할머니의 한맺힌 울음을 뒤로하고 마음속 분노를 담아 다음 장소인
동래지역 학살지 중의 한곳인 지금의 동래컨트리클럽으로 향했다. 학살지가
골프장 안이라 골프장안으로 들어가는데 왠 오토바이가 달려왔다. 골프장
관리인이라했다. 우리는 학살지 기행을 온사람들이니 잠시 있다가 나가겠다고
얘기하고 학살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설명은 들리지
않고 분노만 일었다.
50여년전 무고하게 학살된 원혼들이 떠도는
곳에서 지금은 그곳이 골프장으로 변해 돈있고 할 일없는 놈들이 무덤위에서
골프를 즐기고 있는 모습에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역사의
현장이 이렇게 허무하게 훼손되어 있을 줄이야.
다음으로
간곳은 거제리 화지산이었다. 동해남부선 철길을 지나 유림아파트 공사장
뒤로 화지산으로 오르면 초읍 방향으로 넘어가는 곳에 평평한 잔디 밭이
나온다. 이곳은 4.19혁명 직후 피학살 유족회에 의해 동래지역에서 발굴된
(정확히는 동래컨트리클럽, 오륜대, 석대도로 변 밭, 반송) 유골을 합동묘를
만들어 놓은 곳이었다. 발굴 당시에는 누가누군지 알 수가 없어 정강이뼈
한쌍을 1명으로 계산해 800여구 유골을 모아 동래지역과 서면 일대가
내려다 보이는 이곳에다가 합동묘를 만들었다. 그리고 고 김정한선생의
친필로 5미터 높이의 위령비도 세웠다. 그런데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보도연맹 관련 피학살자들의 유골을 발굴한 것은 북한을
이롭게 한 행위로 규정하고 국가보안법으로 유족회 대표를 구속하고
강제 해산시켜 버렸다. 그리고 각지에 만들어진 합동묘 모두를 파헤쳐
유골은 화장하여 산천에 날려 버리고, 위령비는 자갈로 만들어 동해남부선
철길에 깔아 버리는 폭거를 저질렀다고 한다.
억울하게 죽어간 선열들의
한을 풀어주지는 못할망정 무덤을 파헤치고 유골을 화장하여 흔적을
없애 버린 것은 그들은 또다시 학살을 한 것이다. 피학살자 가족들은
연좌제에 걸려 모두 빨갱이 가족이 되어 지금까지 감시와 통제의 고통에서
살아간다고 한다.
여기서
간단히 제사를 지내고 우리는 기행총화를 하였다. 모두들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 이렇게 많은 학살지가 있는 줄 몰랐다. 그런데 경산코발트
광산은 유골들이 잘보존되어 있었는데 우리지역에는 훼손이 너무 심한
것을 보니 앞으로 우리 청년들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함을 느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지역 학살지에 대한 선전과 발굴활동 그리고 진상조사
활동을 열심히 해야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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