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학을 5학년 2학기 말에 자퇴하고 도쿄로 건너가 영수학관(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는 입시 학원)에 건성으로 다니는 체하고 있었다. 어느 날 영수학관이 있는 간다의 대학가를 어슬렁거리다가 거기 즐비한 헌책방 한 군데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냥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런데 들어서자 나는 압도되고 말았다. 헌 책들이 뿜어대는 퀴퀴한 냄새와 내 어깨까지 닿는 가로로 세워놓은 책(무슨 사전이 아니었던가 한다)들은 처음 보는 충격이었다. 나는 주눅이 들어 오래 있지를 못하고 어서 거기를 벗어나야 하겠다고 마음이 자꾸 불안해졌다. 그냥 나오기가 뭐해서 한쪽 귀퉁이에 꽂힌 얄팍한 책 한 권을 얼른 뽑아서는 셈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하숙집에 가서 펴보니 라이너 마리아 릴케라고 하는 아름다운 울림을 가진 이름의 시인의 시집이었다. 일본어 번역판이다. 해설을 보니 그는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의 독일어로 시를 쓴 시인이라고 하고 있었다. 편다고 편 페이지에 실린 짧은 시를 읽고 나는 한동안 멍해졌다. 시라는 것이 정말 있긴 있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시를 읽고 그처럼 감동한 일은 일찍 없었다. 나는 얼마 뒤에 그 시를 우리 말로 옮겨보았다.
그리움은 어떻게 너에게로 왔던가.
햇살이 빛나듯이
혹은 꽃눈보라처럼 왔던가.
기도처럼 왔던가.
말하렴!
그리움이 커다랗게 날개를 접고
내 꽃피어 있는 영혼에 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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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높다고 한다. 높다는 말은 낮다는 말의 상대 개념이다. 하늘이 높다고 할 때 하늘은 어딘가에 실재하고 있어야 하고 어딘가에 닿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하늘은 그저 허허로운 공간이요. 글자 그대로 비어 있는 거대한 무(無)요 무애(無涯)일 따름이다. 누가 지금까지 가봤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고 그 높이를 재봤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하늘은 환상이요 심리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하늘이 높다고 할 때 주어와 술어가 모두 뻔한 거짓말을 하고 있다. 바다가 푸르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바다란 도대체 무엇일까? 육지와 육지 사이의 낮게 꺼진 공간을 말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런 공간이 푸르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 바다란 그런 것이 아니고 그런 공간에 괸 소금기를 머금은 물을 말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확실히 바다는 푸르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푸르다고 하지만 그 푸른 빛은 때로 미묘한 음영을 드러낸다. 내가 어릴 때 본 한려수도의 발단인 한산도 앞바다는 물 빛이 서너층으로 선명하게 갈라져 있었다. 육지에 가까운 곳은 아련한 연듯빛이고 멀리 나갈수록 쪽빛이 됐다가 수평선 가까이가 되면 거무스름한 자줏빛이 된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광선의 조화일 뿐 물은 단지 물일 뿐이다. 바닷물이라고 해서 빛깔이 따로 있지 않다. 바닷물을 그릇에 담아보면 그것 역시 무색 투명한 액체임이 드러난다. 이처럼 바닷물에 빛깔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우리의 시야가 갑자기 환해지지 않는다.
하늘은 사실로는 없지만 하늘은 엄연히 있다. 바다 또한 푸르게 괸 넓디 넓은 수면으로 우리 앞에 있다. 있다는 것은 때로 이처럼 환상적일 수 있다.
비 갠 저녁의 서쪽 하늘에 피어나는 놀을 보라. 어찌 그것이 단지 물리 현상이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비 갠 저녁의 서쪽 하늘에 피어나는 놀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그것은 하나의 심리 현상으로 둔갑했다는 것이 된다. 꽃도 그렇다. 식물학자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꽃은 우리가 말하는 꽃은 아니다. 시인 말라르메가 말한 것처럼 꽃!이라고 우리가 부르면 우리 눈앞에서 피어나는 그 꽃이 꽃이다. 꽃은 하나의 말이다. 시니피앙이 만들어내는 환상이다. 그러나 그런 환상이 사라지고 식물학자가 현미경으로 보는 꽃만이 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꽃과 함께 하늘도 바다도 다 잃고 말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