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6·25事變 한국전쟁사 앱으로보기 [6·25 특집] 장진호 혈전장의 한국 전투경찰Ⅲ -18- 작성자야생초|작성시간20.10.15|조회수6 목록댓글 0글자크기 작게가글자크기 크게가 지난 편에서 태플릿 중령의 자서전에서 화랑소대가 기관총으로 사살한 중공군의 숫자가 200명이 넘는다고 했고 나의 글들에서 이 믿기 힘든 200명 사살의 태플릿 중령의 증언이 상당히 신뢰할만하다는 근거들을 밝혔었다. 1950년 10월 15일, 북한 신의주에서 환영을 받는 중공군. 중국 외상 주은래는 인천 상륙 성공 후 국군만 38선을 넘어오면 상관하지 않겠지만 미군이 38선 넘어 북진하면 참전하겠다고 선언했는데, 미군은 이 경고를 무시해버렸다. [이때 외교적 대화로 중국에 손을 썼으면 참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중국은 한국 통일 후 미군이 아직 안정되지 않은 만주를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는 불안감으로 신경과민 상태였다. 미국은 실제 소련과 맞대결을 할 가능성이 있는 만주 침공같은 것은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이제 화랑소대 기관총들이 집중 사격을 했던 유담리의 그 전투를 따라가 본다. 그날 기관총 사격의 상황을 알아보기 전에 200명이 사살당한 부대 전투력의 파괴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본다. 참전 원로의 말씀을 참고하거나 전쟁사에서 수집해 본 전투 기록들에 의하면 200명이 사살되었다면 부상자는 동수 내지, 최대 두 배까지 발생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200명 전사에 동수 내지 1.5배가 부상을 입었다면 전투력 상실의 병력이 4-500명에 달한다는 말인데 이렇다면 보병 1개 대대가 전투력을 완전히 잃고 더이상 공격 부대로서 기능을 할 수가 없다. 태플릿 중령이 그의 자서전에서 화랑소대의 기관총 사격이 '적 공격의 예봉을 꺾었다.'고 회고한 것은 그저 수사적으로 한 말이 아니라 화랑소대에게 강타당한 중공군과 전황을 정확하게 묘사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태플릿 3대대의 정면으로 달려오던 중공군 주력은 화랑소대가 기습적으로 가한 무수한 기관총탄 세례를 받고 공세가 대폭 약화되었고 후퇴했다. 왜 이런 기관총 사격의 파괴적인 결과가 나왔을까? 현장 중심으로 더 디테일한 설명을 해본다. 이날 유담리를 노리던 중공군은 기관총의 가장 '이상적인 표적'인 '밀집종대'로, '이상적인 시야'를 확보하고 있던 화랑소대 전방에 출현했고 결과로 떼죽음을 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것은 수십 마리의 쥐가 들어가 있는 쥐구멍 앞에서 막대기 하나 들고 지키면 힘들이지 않고 남김없이 잡아버릴 수 있는 상황을 상상하면 이해가 쉽다. 나는 앞 편에서 중공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으로 적에게 쇄도하는 중공군 임표의 '단병접전'의 전술 교리에 충실한 공격을 했다고 말했었다. 사람의 숫자를 전투력으로 하여 희생을 각오하고 적에게 육박하라는 교리는 여러 부작용을 낳았다. 부작용 중의 하나를 들어본다. 중공군은 전투장, 즉 공격 목표가 보이는 곳, 다시 말하면 공격선까지 4열 종대로 행군해서 접근하는 이상한 전투 행태를 보여왔다. 적보다 압도적인 병력을 투입하는 상황에서 죽음의 전투에 대병력을 몰아넣기에 어려움이 있었고 통제를 위해서 이와 같은 행군 대형의 무리한 방법이 나온 것 같다. 적의 사격이 시작되고 총탄이 날아오면 행군하던 부대는 종대 대열을 풀고 산개하여 공격 모드로 들어가는 것이 상식이고 또 중공군들은 대부분 그렇게 했었다. 그러나 중공군은 종대 행렬에 공격을 받아도 도저히 이해가 힘든 기형적인 행태를 보이기도 한다. 총탄을 맞으며 병사들이 쓰러지는데도 사격의 밀도만 강하지 않다면 행군의 대오를 풀지 않고 그대로 밀고 오는 것이다. 1950년 7월 15일 미국 샌디에이고 항을 떠나 부산으로 향하는 수송선에 승선하는 미 해병 기관총 사수들. 이 기관총이 화랑소대가 쏘던 LMG A-4형이다. 이들 해병은 3주 후부터 격렬한 전투에 휘말렸다. 그 사례가 유담리를 공격했던 중공군 79사와 89사가 미 해병들의 거센 반격으로 된통 코피를 쏟고 물러나기 시작했던 두어 시간 뒤인 1950년 11월 28일 새벽에 나타났다. 우담리 10여 km 남쪽 미 해병 사단 사령부가 있는 하갈우리에서 유담리로 넘어오는 덕동고개에 윌리엄 바버 대위가 지휘하는 7연대 Fox 중대가 고개 옆 고지를 점령하고 경계하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에서 이미 풍부한 실전 경험을 쌓은 그가 배치한 병력 중에 고지 아래 덕동고개를 통과하는 도로 전방에 배치한 기관총 반도 있었다. 새벽 네 시쯤이었다. 미 해병들은 오밤중에 나타난 흰 동계 위장색의 군복을 입은 중공군들을 흰옷을 잘 입는 한국인 민간들로 잠시 오인하기도 하였다. 마틴 러스가 썼던 책 Break Out에 묘사한 이 대목을 그대로 소개하겠다. "산 밑자락에서 경계를 서던 기관총 사수 잭 패이지 일병은 도로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기관총의 장탄을 한 뒤 노리쇠를 잡아당기고 점점 더 커지는 그 발자국 소리를 듣던 그는 100미터 위쪽의 도로가 굽어진 곳 근처에서 길게 뻗은 4열 행군 종대가 지고 있는 달빛을 받으며 다가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민간인일 수가 없는 질서정연한 행군 대형이었다. 따발총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민간인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은 해소되었다. 패이지 일병은 기관총 방아쇠를 당겼다. 첫 사격에 중공군은 사방으로 콩 튀듯 흩어졌다. 일부는 도로 옆 2m 높이의 제방을 이용해 기관총 사격을 피할 수 있었으나 도로 위 산으로 도주하려던 중공군들은 산기슭에 위치했던 피터슨 소대의 진지에서 쏟아지는 수류탄 공격과 기관총 사격을 피할 수가 없었다." 치열했던 덕동고개 전투. 중공군은 200명의 해병을 섬멸하겠다고 1,500명의 병력을 투입했지만 닷새 후 무수한 시체만 남기고 패퇴되었다. 삽화 오른쪽에 중상을 입고도 전투를 지휘한 중대장 윌리엄 바버 대위가 그려져 있다. 푸른색의 예광탄은 중공군이 쏘는 기관총탄이고 붉은색의 기관총탄은 미군 LMG A-4 기관총의 총탄들로서 화랑부대의 기관총 발사 장면도 저것과 같았을 것이다. 중공군의 행군 접근은 국군의 압록강 진격과 김일성 승용차 노획 전공의 영웅 이대용 장군의 회고록에서도 알 수가 있다. 이대용 장군은 압록강을 점령하기도 했으나 1950년 10월 말 중공군이 모부대인 7연대의 후방을 차단했기에 철수하다가 연대와 함께 초산군 풍장면에서 중공군 사단 병력의 공격에 붕괴의 대피해를 입었다. 필사적으로 탈출해나온 이대용 대위는 대부분 신병들을 새로 부대를 재편성한 한 달후 11월 29일 평양 북방 미륵 고개라는 곳에서 남진하는 중공군에 대비하여 방어선을 쳤다. 첫 격돌의 교전이 있었으나 중공군의 행군 대열은 작은 부대 따위야 깔아뭉개겠다는 듯이 4열 종대로 검은 구름처럼 몰려왔다. 그 대열에 고개 바로 아래에 설치한 아군의 수냉식 기관총에서 불을 뿜었다. 중공군 선두는 "아이쿠! 아이쿠!" 하고 쓰러졌으나 대열은 그대로 대와 오를 유지한 채로 다가오자 신병들인 기관총반이 기겁을 하고 모두 도망가고 말았다. 이 신편 중대의 방어선은 와해되고 이대용 중대장은 옆숲에 숨어서 세 시간에 걸쳐 대오를 유지하며 통과하는 중공군 대부대들의 행렬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대대장 시절[1952년] 이대용 장군 중공군의 행군 대열 전투장 진입은 1950년 12월 15일 함흥 북방에서도 있었다. 이때는 장진호에서 탈출해 나온 미 해병대가 흥남항을 거의 떠나고 미 육군 3사단이 후위를 맡아 만신창이가 되고도 함흥평야까지 추격해온 중공군을 가로막는 지연전을 펼치며 철수하고 있었다. 함흥 북방 70km 지점 흑수리에 미 3사단 7연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전방에 전개한 미 보병들에 중공군들이 거센 야간 공격을 해왔다. 이 보병 부대에 육군 제3 대공포 대대 C중대가 배속된 상황이었다. 중대는 반궤도 장갑차에 장치된 50구경 4문 묶음의 콰드 건[우리는 승전포라 불렀으나 당시에는 에키에키포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운용부대였다. 한국전에 참전한 콰드 건 하프 트랙 콰드 건의 사수는 존 레베죠 병장이었다. 그는 앞의 미 3사단 보병들에게 산개해서 달려드는 중공군 보병들보다 더 이상적인 목표를 찾았다. 저 후방 2km 지점에 중공군 연대 병력이 4열 종대로 몰려오고 있었다. 좀 멀었으나 50구경 중화기에는 적당한 거리였다. 중공군들은 콰드 건이 조준하는 줄도 모르고 어깨걸어 총을 하고 걸어왔다. 전혀 전투를 의식하지 않은 태세였다. 레베조 병장은 콰드 건의 전동 방아쇠를 눌렀다. 4문의 50구경 기관총이 맹렬한 화력을 토하기 시작했다. 이 구경 50실탄은 몸체에 한방만 맞아도 두 동강이가 나고 팔다리는 그대로 절단되는 무서운 살상력이 있었다. 이 끔찍한 파괴력의 총탄이 대열을 마구 강타하고 쓰러지는 병사들이 많아도 중공군은 한참을 강시처럼 걸어왔다. 수백 명의 중공들이 쓰러진 뒤에야 중공군 대열을 산개하고 은폐를 했으나 콰드 건은 이들을 강타했다. 이 함흥 북방 흑수리에서 전방에서 공격하던 중공군들의 2km 후방에서 행진해오다가 콰드 건에 강타당한 후속 중공군의 엽기적인 행군 형태의 전투 상황이 바로 1950년 11월 27/28일 유담리의 화랑소대 앞에서 꼭 같이 재현되었다. 단병접전 전술로 태플릿 중령의 대대에 육박하던 중공군 전위부대 후방에 중공군의 주력인 연대 병력이 4열 종대나 비슷한 대열로 화랑소대의 화망 안으로 행진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태플릿 중령은 그의 자서전 Dark Horse Six -대대 무선 콜사인 ‘검은 말 여섯’- 에서 그의 대대는[해병 5연대 3대대는]는 전방에 내보낸 I[Item]중대의 전초가 바이패스 당했고 I중대의 1개 소대가 중공군 대군에 밀려난 직후 중공군의 대군이 달려서 공격해오다가 화랑소대의 기관총 화망에 걸려들었다고 썼다. 왼쪽 둥근 원안이 중공군 89사 공격과 미 해병 5연대 2대대 배치선이고, 오른쪽 네모 안에 5연대 태플릿 대대의 3대대 방어선이 있다. 중공군 89사의 전위대가 먼저 밀어낸 태플릿 대대의 아이템[I]소대의 위치는 추정할 수밖에 없는 위치를 원래 점선 원안에 푸른 선의 네모로 표시해봤다. 이렇게 추정하는 것은 공격하는 중공군 89사 입장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해병들을 관측하고 은폐 사격이 가능한 네모 안의 산기슭 낮은 능선이기 때문이다. Item 소대 전초가 바이패스 당했다는 것은 도로에 배치했던 전초를 피해서 중공군이 산기슭을 이용해서 침투했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은 추정이다. 이 말은 태플릿 대대를 공격해온 부대가 앞에 전위 부대가 있었고 그 뒤를 간격을 두고 주력이 따라오고 있었다는 말로 해석을 할 수가 있다. 화랑소대는 간단없이 터지는 조명탄의 불빛 아래 중공군 전위부대 뒤를 멀리서 후속하는 주력을 보았을 것이다. 중공군 전위 부대가 I[Item]소대를 분쇄하고 태플릿 중령의 3대대의 정면까지 진격해 올 때까지 화랑소대는 침묵을 지키고 이들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태플릿 대대를 공격했던 전위 부대에 조급하게 기관총 사격을 시작했다면 종대로 후방에서 몰려오던 진짜 위협적인 주력을 섬멸할 수도 없었고 중공군 주력의 맹렬한 대응 사격을 화랑소대가 위험을 겪을 수도 있었다. 영하 20도의 강추위에 땅이 얼어붙어 호를 팔 수가 없었던 화랑소대는 중공군이 가하는 여러 정의 기관총 집중 반격 사격에 큰 피해를 입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소대장 길원갑 경위나 기관총반의 노련함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화랑소대는 대군인 중공군의 주력이 접근해올 때까지 소부대인 전위부대의 공격에는 숨죽인 듯이 엎드려 있었던 것이다. 뒤에서 후속하던 중공군 89사 소속의 주력은 산에 막혀서 태플릿 대대에서 보이지가 않았었고 오로지 능선 위에 화랑소대만 관측이 가능했었다. 네모 표시 중 오른쪽의 작은 네모가 중공군 전위부대이고[추정] 오른쪽에서 후속한 중공군 주력의 접근지역. 도로를 계속 따라왔는지 아래 작은 시내의 얼음판으로 왔는지는 불상이다. 어느 길로 왔건 종대로 온 것은 분명하다. 이렇게 큰 표적으로 접근한 중공군의 종대 행군 방식은 뜻밖에도 숨죽이고 있던 화랑소대에게 기관총 사격의 최선의 표적을 제공했다. '밀집종대'의 행렬의 표적을 말한다. 즉 긴 종대는 표적을 밀집시켜 주어서 화력의 집중이 가능하게 된다. 더구나 화랑소대가 50-100m 추정 산능선에서 내려다보는 시야에 종대 행렬의 먼 뒤까지 들어왔다. 군시절 교범에 종대를 사격하는 기관총 사격방법을 수사라고 소개한 것을 봤었다.[일본 군사용어에서 왔거나 번역의 오류인지 모른다. 횡사의 상대어인 종사가 어울릴 듯하다.] 이날 태플릿 대대 앞에 몰려온 중공군은 최소 연대 병력은 되리라고 앞에서 말했었다. 이들은 유담리에서 나가는 출구를 지키는 로이스 중령의 2대대를 옆 산 사면으로 밀어올려버리고 전진한 병력과 고지와 고지 중간으로 침투한 중공군 89사 병력들이다. 이때가 27일이 지난 28일의 새벽 두 시쯤이었다. 로이스 중령의 2대대 지역에서 정면으로 돌파하고 들어온 병력과[아래 원] 고지 사이 계곡으로 침투한 병력[위쪽 원]이 합쳐진 부대가 행군해왔다. 네모 안은 화랑소대의 기관총 진지가 있는 능선 앞의 적의 주력을 섬멸한 직후 후방 계곡으로 침투한 중공군 79사 병력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모두 유담리의 해병 5/7연대 합동사령부를 섬멸할 결전의 부대로서 사실 이들은 진전되지 않은 공격에 조바심이 났을 듯하다. 공격해보고 안되면 빨리 10여 km 떨어진 근거지로 돌아가야 했고 두어 시간 걸리는 철수 도중에 날이 밝으면 미 해병대의 항공 공격을 각오해야 했는데 여하간에 빨리 결판을 내야 했다. 그런 실정에 전위 부대가 태플릿 대대의 외곽을 뚫었다고 하니 부대를 전개하기 위해 빨리 이동하기 시작했을 때 화랑부대의 기관총 세례가 가해졌다는 것이다. 화랑소대가 불을 뿜은 LMG A-4. 총기의 천재 발명가 존 모세스 브라우닝이 발명한 총기 중 최고 우수작으로 뽑을 만한 걸작품이다. 30초내에 분해결합이 가능할 정도로 구조가 단순했고 고장이 거의 없었다. 태플릿 중령의 짧은 증언에 의하면 사격을 하기 전이나 사격을 받으면서도 이들 중공군은 뛰고 있다는 것은 이렇게 해석이 되고 있다. 시간에 쫓기고 있었고 죽음쯤 각오하고 돌격하겠다는 중공군식 만용이 발휘되었거나 빨리 기관총 사격의 낙탄지대를 통과해서 돌격에 가담하겠다는 잘못된 계산이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기관총 반장으로 춘천전투에서부터 80여 회의 전투를 경험했었고 압록강까지 진격했었던 신영진 중사에게 만약 적이 종대로 접근하고 있을 때는 사격을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았다. 왼쪽 원안의 신영진 중사- 북진할 때 원산에서 촬영. 생존 참전원로 중에 제일 많이 LMG 사격을 해본 경험자일듯하다. 그분은 명쾌하게 대답한다. 우선 대열을 둘로 나누어서 각 기관총에 사격 구역을 할당하고 앞부분과 뒷부분을 사격할 텐데 사격 솜씨가 좋은 사수에게 사거리가 먼 뒷부분을 할당할 것이라고 한다. 기관총은 양각대보다 총이 단단히 고정된 삼각대 기관총이 훨씬 명중률이 높다. 삼각대 거치 기관총은 사수가 큰 나사들인 가로 전륜기와 세로 전륜기를 돌리며 총구를 상하좌우로 돌려 조준하고 사격한다. 사수는 선두나 후미부터 조준해서 지그재그로 바느질하듯 사격을 가했을 것이라는데 종대이기 때문에 조준선을 그대로 유지하고 가로 전륜기와 세로 전륜기를 조금씩만 움직이며 사격하는 이것은 전 중공군 주력의 부대원들을 조준 사격을 했다는 이야기다. 횡대 포복의 부대는 의외로 전륜기들을 조작하기가 바빠서 조준선을 유지하기가 힘이 든다. 이 사격은 오로지 화랑소대의 시야가 가능한 곳에서 이루어졌기에 전적으로 화랑소대의 전적인 전과가 되었다는 것이다. 태플릿 중령의 신분이나 성품 그리고 미국의 전과확인 시스템, 여기에 중공군의 단병접전 전술과 행군접근의 행태나 사수에게 절대 유리한 지형 등의 여러 요소를 두고 보아도 한국전쟁 기관총 사격 최대의 전공일 수가 있는 200명 사살의 기록은 신뢰할 만한 것이라고 확신할 수가 있다. [출처] [6·25 특집] 장진호 혈전장의 한국 전투경찰Ⅲ -18-|작성자 동고동락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0 댓글쓰기 답글쓰기 댓글 리스트 6·25事變 한국전쟁사 다른글 이전 현재페이지 1234 다음 [6·25 특집] 장진호 혈전장의 한국 전투경찰Ⅲ -18- [6·25 특집] 장진호 혈전장의 한국 전투경찰Ⅲ -17- 나는 대한민국 군인이다] 109회 6·25 기억록-특명! 화천댐을 사수하라!(본편) [국방TV 6·25전쟁 65주년 특별기획①] 1950년 혹한의 겨울! 장진호에서 흥남까지 북한은 어떻게 전쟁을 준비했나 [6·25 특집] 장진호 혈전장의 한국 전투경찰Ⅲ -16- [6·25 특집] 장진호 혈전장의 한국 전투경찰Ⅲ -15- [6·25 특집] 장진호 혈전장의 한국 전투경찰Ⅲ -14- [6·25 특집] 장진호 혈전장의 한국 전투경찰Ⅲ -13- [6·25 특집] 장진호 혈전장의 한국 전투경찰Ⅲ -12- 맨위로 로그아웃 전체보기 PC화면 카페앱 © Kakao Corp. 카페 검색 답글 제목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