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도한 북간도 역사기행의 흐름을 주시하며 1부 - 열린 미래와 공생 공존을 향하여
요즈음 역사기행의 봇물이 터지고 있다.
푸르른 산천도 유람하며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장소를 방문하여 배우고 익히는 모습이 아름답다. 역사기행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역사 지식과 의미를 새롭게 일깨워줄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미래와 인류를 위하는 열린 공생과 개방적 평화 가치를 깨닫게 해줄 것이다.
나 자신이 역사기행을 통하여 역사를 보는 지평이 민족에서 인류, 국가에서 지구촌으로 열리는 체험을 하였으므로 삼국을 접하게 되는 북간도 여행을 많은 사람들에게 권한다. 그러나 지금은 도도한 역사기행의 흐름이 우리를 역사의 무덤에 빠트려 현재 시점에서 과거의 의식으로 돌아가도록 부추기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고 불편하다.
역사기행을 통해서 역사의 의미를 추구하고 과거 역사와 현재 우리의 역사 그리고 미래의 역사를 공생과 공존, 생명 친화적으로 이끌어 가는 의식과 가치 형성이 기행의 주목적이라면 우리는 특별한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북간도와 서간도의 역사 기행은 시간적으로 1860년대에서 1945년까지의 기행이다. 물론 고구려 유적답사를 제외하고서는 말이다. 또한 공식적으로 우리의 영토가 아닌 청나라의 영토에 조선인들이 기근과 조선 양반들의 학대를 피해 달아나서 살았기 때문에 이 지역에 관한 한국의 정사(正史) 기록이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비록 우리가 만든 우리의 교과서가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해방 이후 임정의 자료들과 독립신문을 비롯한 많은 자료들을 검토하여 편성한 역사 기록이다. 특별히 우리의 기록은 사회주의 이념을 배격하며 민족주의자 계열의 독립운동을 중심으로 역사를 정리 편성하였기에 우리의 역사 기록이 중국 측의 기록과 북측과 일본 측의 기록과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중국은 우리가 역사기행을 하는 동북삼성에 대하여 우리 보다 훨씬 더 많은 기록을 가지고 있다. 물론 중국 측의 기록은 청나라의 기록, 민국의 기록, 위만주국의 기록으로 나뉘어 있다. 또한 1920년 대 초반 이후에는 중국 공산당의 기록도 있을 것이다.
북한 또한 나름대로 역사 기록이 있을 것이다. 아직 접하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그들의 기록은 공산주의 여러 계보에서도 만주파를 그 중심에 놓았을 것이다. 만주 유격대 출신인 김일성, 최용건, 김책, 강건과 김일이 역사의 중심인물로 주인공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일본은 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 일찍부터 만주를 연구하였고 후에는 조선독립운동을 탄압하며 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심지어는 1921년 경신대학살에 대한 기록도 많은 분량을 남겼다. 후에는 일본의 조선총독부를 대신하여 위만주국이 그 땅의 역사를 기록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 시대에 한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네 나라의 기록이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 청나라는 청의 관점에서 민국은 민국의 관점에서 만주국은 만주국의 시각으로 중국 공산당은 그들의 시각으로 일본은 일본의 입장에서 조선의 민족주의자들은 그들의 관점으로 조선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입장에서 북한은 그들의 자리에서 그 땅에서 일어난 역사를 기록하였으므로 사건의 일지도 다르고 규모도 다르고 평가도 다르다. 뿐만 아니라 저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이 다룰 수 있으므로 어느 기록에는 나오고 어느 기록에는 빠질 수도 있다.
수차례의 동북삼성 역사기행을 통하여 그리고 연변에서 출판된 책을 찾아 읽으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나의 생각과 지식의 폭이 달라졌고 드디어 나름대로 역사인식을 하게 되었다.
그 덕분에 가장 먼저 폐기처분을 한 것은 조선인들이 을사조약 이후로 조선 독립운동을 위해 북간도와 서간도로 갔다는 독립운동을 위한 망명 이주설 이었다. 조선인들의 이주는 실제로 독립운동을 위한 이주가 아니었다. 그들은 1860년대 조선의 대기근과 양반들의 가렴주구와 학대를 피해 살길을 찾아 끊임없이 기회를 틈타 헬 조선에서 도망친 것이었다.
조선 서변계 관리사인 서상무의 통계에 의하면 1897년에 서간도에 해당하는 통화, 환인, 흥경 등 지구에 이주해온 조선이주민은 이미 8,722세대 3만 7천 여 명이었으며 1903년에 역시 서간도에 해당하는 장백, 임강, 집안, 통화, 환인, 관정, 안동 등지에는 32개 조선족부락이 형성되어 그 인구수가 1만 6,357세대에 5만 5,593명에 달하였다.
1891년 청나라 조정은 조선이주민들을 중심으로 간황사(개척지 관리 사무소)를 설치하였다. 북간도에 해당하는 훈춘에 6개 사, 동오도구에 5개 사, 흑정자에 6개 사, 남강에 6개 사를 세우고 이미 개간한 땅을 조사, 등록하였으며 이주민들을 다 간황사에 소속시켰다. 1891년부터 1894년 사이에는 청나라는 북간도에 해당하는 화룡욕(현재 화룡현 지역) 구역에 있는 조선이주민들을 4개 보, 39개 사, 124개 갑, 415개 패(마을 단위)로 편성하고 조선귀화인을 향약으로 임명하여 직접 관리를 시켰다. 갑에는 조선족 5,990세대, 한족 264세대가 있었다.
1907년에 이르러 북간도에 해당하는 연변일대 조선족집거마을은 529개에 달하였으며 조선족 인구는 1만 5,356세대 7만 2,076명으로 연변 총인구의 76%를 차지하였다. 1909년 연변 일대의 조선족은 3만 4,133세대 18만 4,867명으로 늘어났다.
강준만 교수의 ⌜한국근대사 산책⌟에 의하면 1864년에서 1873년까지 이조판서에 임용된 사람은 48명으로 재임기간은 평균 76일이고 공조판서에는 82명이 임용되어 재임 기간은 52일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양반 관료들은 관직에 오르는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알았으며 돈을 주고 산 권력이기 때문에 다시 그 돈을 만들기 위해 백성들을 착취해서 부를 축적하였다.
실제로 조선 백성들은 이런 조정의 부패와 양반들의 횡포와 무거운 세금을 피해 특별히 평안도와 북관의 조선 백성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넜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그들은 생명을 무릅쓰고 생존을 위해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 청나라에 잠입한 정치 난민이 된 것이다.
이런 기록들을 접하면서 국사 시간에 배운 독립을 위한 양반 지사들의 망명이 허구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조선의 멸망 또한 일제의 침략 이전 자체 내 붕괴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두 번째로 갖게 된 새로운 인식은 독립운동의 주체에 관한 것이다. 역사기행을 몇 차례 하기 전 까지 만해도 독립운동의 주체가 망명애국지사, 양반관료들, 위인들, 투사들, 영웅들임에 이견이 없었다. 한 번도 가난하고 초라한 망국 백성이 독립운동의 주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본적이 없다. 항상 백성은 관료와 양반들의 지배와 가르침의 대상일 따름이었다. 그러므로 우리 역사가 봉오동전투나 청산리전투를 지휘한 대장들과 임시정부의 요인들과 거사를 일으킨 열혈애국투사들과 각종 무장단체를 만든 독립운동가로 찬양하고 숭배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들의 애국애족의 독립운동을 위한 노고와 공로는 자자손손 대대로 기려야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역사기행을 하는 과정에서 나의 생각이 뒤집히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추앙하는 독립운동가들이 1860년대에 헬 조선에서 도망 나온 천민들이 개척한 농지에서 나온 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받았고 그들의 자녀들을 데려다 독립군으로 훈련시켜서 독립투쟁을 벌였다. 이는 뒤집어 말하면 조선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은 천민들과 소작농의 희생과 헌신이 아니었으면 북간도와 서간도의 독립운동은 불가능하였다는 말이다.
독립운동을 하려고 망명 이주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의 대부분은 양반이고 관료였으며 지주들이거나 그들의 자녀였다. 그들은 조선 멸망에 대한 직접적, 간접적으로 책임이 있는 자들이다. 그런 그들이 자신들의 잘못된 기득권 의식, 계급 차별과 당파의식, 양반의 자존감, 상업과 공업에 대한 무지와 편견을 고스란히 가지고 망명지에 나왔다. 그러기에 조선의 독립운동은 출신지역에 따라, 종교에 따라, 사상과 이념에 따라, 방법론과 개인들의 위신과 탐욕에 따라 끝없이 분열 할 수밖에 없었다.
가산을 처분해서 현재 시가로 몇 백억을 가지고 망명을 나온 양반이나 지식인조차도 상업에 투자하거나 공장을 지어 자립으로 독립운동을 하려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원대한 꿈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산골짜기로 숨어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학교 몇 칸을 지어 민족의식을 강화하여 군사훈련을 하는 것으로 독립운동을 하려고 하였다.
양반관료가 세운 학교로 겨우 1년 정도 유지한 학교가 민족운동, 애국교육의 모범으로 일컬어지는 것이 조선인들과 오늘 한국인들의 양반숭배의 허위의식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한 번도 일본군과 직접 싸워보지도 않고 1920년에 해체된 학교와 독립운동단체가 최고의 무장저항운동 단체로 추앙을 받는 것은 실리보다 명분을 앞세우는 조선 양반의 의식이 아닌가?
개교한 지 1년 만에 자금난으로 후원자와 실무자가 갈등하던 끝에 문을 닫은 군관학교가 엄청난 학교로 자리매김이 되는 것이 내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제 독립운동도 명분보다 저항과 투쟁의 결과로, 독립운동에 대한 기여도로 평가해야 되지 않는가? 망국의 적을 타도하고 무너뜨린 역사적 실적으로 평가를 해야 하지 않는가?
독립운동의 주체 문제는 역사의 주체 문제와 함께 오랫동안 나를 괴롭혀온 주제였다. 그 주제를 머리와 가슴에 담고 고심하며 씨름을 한 끝에 결국 독립운동의 주체가 고향과 조국에서 떠밀려 생명을 걸고 강을 건너 부평초처럼 떠나온 민초들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들은 한 번도 국가로부터 혜택과 보호를 받은 적이 없는 상놈과 천민들이었다. 역사의 기록은 양반관료들과 명문가의 사람들과 영웅과 거인들을 독립운동의 기록으로 남겼지만 나는 이름도 빛도 없는 민초들, 독립운동을 위해 아낌없이 시간과 돈과 자녀들을 바친 조선이주민들을 가슴에 새긴다. 그들을 독립운동의 주체로 인식하는 때가 오면 한국은 민족을 뛰어넘는 열린 국가로 생명 친화적인 국가로 자리 매김을 할 것이다.
세 번째 생각은 중국에 남은 자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중국 조선족에 대한 편견으로 그들을 우리의 핏줄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 이었다
일본 왕이 항복을 선언하자마자 독립운동가들은 자기들의 연고를 따라 북으로 남으로 돌아갔다. 비행기로, 배편으로, 기차로, 버스로, 걸어서 끼리끼리 삼삼오오 짝을 지어 해방된 고향으로, 나라로 돌아갔다. 당시 2천만 명의 조선 인구 중에 10%인 200만 명이 중국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중의 절반만이 고향으로 조국으로 돌아갔다.
1930년대 후반, 40년대 초까지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어준 만주 조선이주민들, 바닥에서 땅벌레처럼 살았던 90만 명의 사람들은 돌아가지 못하고 힘없이 주저앉았다. 어떤 책에 보니 사상과 이념을 따라서 공산주의 중국에 대한 환상을 품고 남은 자는 10%도 안된다고 하였다. 나머지 90만 여명은 돌아갈 돈이 한 푼도 없어서, 병 들어서, 여기저기로 흩어진 가족을 기다리기 위하여, 돌아가도 먹고 살 궁리가 없어서, 기타 이유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아서 원하지 않은 조선족이 된 것이라고 하였다.
돌아가고 싶은데, 모두들 돌아가는데 돌아가지 못하고 남아 있는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가난한 인생이 얼마나 한에 사무쳤을까? 떠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얼마나 울었을까? 떠나는 사람들을 얼마나 부러워하였을까? 고향산천과 부모형제를 얼마나 그리워하였을까? 남은 자들이 떠나지 못하는 신세를 한탄하며 몇 날 며칠을 하염없이 울었다는 어느 기록에 가슴이 시렸다.
누가 무어라고 말해도 북간도와 서간도의 이주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의 큰 원동력이었다. 그들의 인적, 물적, 정신적 자원에 의지해서 독립운동을 벌인 지도자들은 최선을 다하여 그들의 귀국을 지원하여야 했다. 그러나 조국으로 돌아온 그들은 자신들이 한 때는 동포요, 동지라고 불렀던 그들을 헌신짝처럼 빨리도 잊었다. 감탄고토(甘呑苦吐)를 한 것이다. 필요할 때는 동포요, 동지였지만 나라가 해방을 맞이하게 된 그들에게 이주조선인들은 더 이상 쓸모가 없었다. 그러기에 남은 자들은 버림받은 기억으로 이중의 고통을 겪어야 하였다.
지금 우리는 우리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정치인들이 버린 조선족의 후손을 노동력으로 받아들여 그들의 역 이주를 가속화시켰지만 그들을 동반자로 인정하지 않으면 결코 신뢰하지 않는다. 우리는 칠십 여 년 전에 갈라진 그들의 보이스 피싱과 범죄와 사기에 혀를 내두르며 그들을 의심하며 백안시한다.
우리 독립운동의 역사가 자랑하며 자부심을 가지는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대전자전투, 동경성전투 등 모든 전투가 그 땅의 인적, 물적 자원으로 일어났으며 우리가 자랑하는 윤동주 시인 또한 그 쪽 출신임에도 우리는 그들이 역사의 무대에 출현하게 된 배경도 그들이 독립운동사에 기여한 공로도 모르고 우리가 조금 잘 산다는 이유로 우월감을 가지고 동족으로 존중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조선족 형제와 자매들에게 상처를 주는 한국인을 대신하여 그들에게 머리를 조아려 사과한다. 우리 교만과 무례를 용서해주시라고.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역사의 희생제물이 된 그대들이 있기에 우리가 있다고 말한다.
2부로 계속
2024년 5월 31일 금요일 해시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