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0/02 노인의 날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1 - 타고르의 시를 닮은 그림들 중앙박물관 아시아실서 전시 우리 전통 초상화의 전시 잔치인 ‘초상화의 비밀’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의 상설전시관 3층 아시아실에서도 거장의 인물 그림들을 엿볼 수 있다. 명시 ‘동방의 등불’로 유명한 20세기 초 인도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1861~1941)의 첫 한국 전시다. 1913년 시집 <기탄잘리>로 아시아에서 처음 노벨문학상을 받은 그는 말년인 60대에 화가로도 이름을 떨쳤다. 탄생 150돌을 맞아 인도 국립근대미술관에서 기획한 이 순회전은 신과의 교감, 자연의 생명력에 심취했던 타고르의 이미지 세계를 보여준다. 상상의 동물, 인물상 등이 나온 이 전시의 압권은 종교적 감성 가득한 인물화들이다. 전문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타고르는 <기탄잘리>의 시상을 탁월한 선묘의 인물상들로 표출하고 있다. 11월27일까지. (02)2077-9000.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한겨레 20111002 20:43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498969.html
2011 - 북극 오존층에도 구멍 지난 겨울 추운날씨에 북극에서도 올해 오존층이 감소해, 남극처럼 오존 구멍이 형성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항공우주국(나사) 등 9개국 공동연구팀은 과학학술잡지 <네이처>에 기고한 논문을 통해, 이번 겨울 북극권 20㎞ 상공서 오존의 80%가 손실돼 남극에서처럼 ‘오존 구멍’이라고 불릴 수 있는 현상이 처음 나타났다고 밝혔다고 영국 <비비시>(BBC) 등이 2일 보도했다. 오존 구멍 형성은 오존을 파괴하는 염소화학물이 활발히 활동하는 추운 날씨가 이례적으로 계속된 점이 원인이라고 연구진은 밝혔다. 나사 제트추진연구실(JPL)의 미셸 산티는 “북극 성층권의 겨울은 매우 가변적이어서 일부 지역은 따뜻하고 일부 지역은 추운데, 지난 몇십년 동안 추운 지역의 겨울은 더욱 추워졌다”며 “이런 추세와 높은 가변성을 고려할 때 추운 겨울들이 예상되며, 염소 수치가 높을 경우 더 심각한 오존 손실이 예상된다”고 밝혔다. 오존을 파괴하는 화학물질은 냉장고와 소화기 등에 사용되는 프레온가스 같은 물질에서 생성된다. 국제사회는 지난 1987년 채택된 몬트리올 기후의정서 등을 통해 이 물질들의 사용을 제한해오고 있다. 오존층은 피부암 등을 유발하는 중파장 자외선(자외선B)을 막는 역할을 한다. 오존 구멍 형성 결과, 북부 유럽과 러시아의 일부 관측소에서는 기록적인 중파장 자외선 침투가 관측됐으나, 인체 건강에 어떤 위험을 가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연구팀은 그러나 극 소용돌이가 이동하다 소멸했기 때문에 해당 지역 주민의 건강에 미친 영향은 크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동안 북극은 남극과 비교할 때 겨울에 오존 구멍을 형성할 정도로 온도가 떨어지지 않았으나, 이번 겨울엔 이례적으로 긴 기간 찬공기가 형성돼, 광범위한 지역을 덮은 것으로 조사됐다. 산티 연구원은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4월까지 북극 지역은 지속적으로 추웠으며, 이는 북극에서 체계적인 기온측정 이후 처음있는 일”이라며 “자세한 원인은 몇년간의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정의길 선임기자 /한겨레 20111003 21:08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499124.html
- 1998 부산국제영화제 기념
[부산국제영화제]물꽃 축포 속 화려한 개막... 9일간 축제 제13회 부산영화제가 2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요트 경기장에서 화려하게 개막했다. 부산영화제 조직위원장인 허남식 부산시장의 개막 선언과 소포라노 신영옥의 축가가 이어지며 개막식 자리를 가득 메운 관객들을 들뜨게 했다. 부산=노컷뉴스 방송연예팀 한상미 기자 2008-10-02 22:32:15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949490
- 공중전화 카드
2008 - 탤런트 최진실(崔眞實) 사망 최진실 [崔眞實, 1968.12.24~2008.10.2] 최진실씨 숨진채 발견…“세상에 섭섭…아이 부탁한다” 인기 탤런트 최진실(40)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2일 전국이 충격에 휩싸였다. 청춘 스타에서 정상급 여배우를 거쳐 성숙한 ‘싱글맘’ 연기자로 변신을 거듭했던 최씨의 파란만장했던 삶 때문인지, 국민들은 세대를 뛰어넘어 절절한 안타까움을 토해냈다. 인터넷에선 그를 애도하는 글이 폭주했고, 시민들은 그를 죽음으로까지 몰고간 상황을 아쉬워하며 종일 최씨의 죽음을 화제삼아 대화를 나눴다. 화면 속 그를 보며 웃고 울었던 이들은, 그가 떠난 뒤에야 비로소 ‘타인의 시선을 항상 의식해야 했던’ 삶의 힘겨움을 느끼는 듯했다. 최씨는 2일 아침 6시15분께 서초구 잠원동 자택 욕실 샤워실에서 목을 매 숨진 채로 어머니 정아무개(60)씨에게 발견됐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이날 밤 최씨의 주검을 부검한 결과 “타살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1차 소견을 밝혔다. 경찰은 최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잠정 결론 짓고, 구체적인 동기와 경위 등을 수사하고 있다. 서울 서초경찰서는 “최씨가 2일 0시께 술에 취해 집에 들어와 어머니에게 ‘사채니 뭐니 나하고는 상관없는데, 나를 왜 이렇게 괴롭히는지 모르겠다. 세상 사람들에게 섭섭하다’고 말했고,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잠근 뒤 아침 6시께 목을 매 숨진 상태로 발견됐다”고 밝혔다. 경찰은 최씨가 이날 0시42분과 0시45분에 친하게 지내던 메이크업 담당 이아무개씨에게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아이들을 부(탁한다). 미안해’라는 내용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보낸 사실을 확인했다. 경찰은 “최씨가 유서를 남기진 않았지만, 최씨 침실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메모를 발견했다”며 “메모에는 ‘사채설’과 관련된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다”고 말했다. 최씨의 빈소는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 마련됐다. 노현웅 김성환 기자 goloke@hani.co.kr /한겨레 2008-10-02 오후 07:31:09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13698.html
2007 - 노무현 대통령 방북, 남북 정상회담 (2~4일) 다시 만난 남북정상 '한반도 평화' 손잡았다 “반갑습니다!”(김정일 국방위원장) “반갑습니다!”(노무현 대통령) 2007년 10월2일 낮 12시2분, 7년 만에 다시 손을 맞잡은 남북 두 정상의 인사말은 길지 않았다. 그렇지만 두 정상의 만남이 갖는 무게는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이번 만남은 남북 관계 진전을 이끄는 새로운 추동력이 되기에 충분하다. 남북은 지난 2000년 정상회담이 열어 놓은 화해·협력에서 평화와 번영으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 노무현 대통령은 청와대를 떠나기 전 발표한 대국민 인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2000년 정상회담이 남북 관계의 새 길을 열었다면, 이번 회담은 그 길에 가로놓여 있는 장애물을 치우고 지체되고 있는 발걸음을 재촉하는 회담이 될 것입니다.” 노 대통령이 인사말에서 밝힌 것처럼 “이번 정상회담은 좀더 차분하고 실용적인 회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두 정상의 만남은 첫 정상회담에 비해 절제된 모습이었다. 노 대통령 공식 환영행사가 열린 4·25 문화회관 광장에 오전 11시55분쯤 나와 기다린 김 위원장은 환영행사 내내 담담한 모습으로 일관했다. 앞서 노 대통령은 국가원수이자 군통수권자로는 처음으로 오전 9시5분 군사분계선(MDL)을 걸어서 넘는 역사적 순간을 연출했다. 노 대통령은 분계선을 넘기 전 대국민 메시지를 통해 “장벽은 무너질 것”이라며 “제가 다녀오면 또 더 많은 사람들이 다녀오게 될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이는 7년 전 순안공항에서 남북 두 정상이 보여준 뜨거운 악수와 함께 남북 통일 역사의 상징적인 한 장면으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군사분계선을 넘은 노 대통령은 평양∼개성간 고속도로를 달려 11시40분께 평양 시내 인민문화궁전 앞에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영접을 받았다. 두 사람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무개차에 나란히 타고, 평양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공식 환영행사가 열리는 4·25 문화회관 쪽으로 퍼레이드를 벌였다. 노 대통령은 저녁에는 목란관에서 김 상임위원장이 마련한 환영만찬에 참석했다. 이날 오후로 예정됐던 평양 시내 3대혁명전시관의 중공업관 참관은 3일로 연기됐다. 노 대통령은 방북 이틀째인 3일 김 위원장과 오전·오후 두 차례 공식 정상회담을 열 예정이다. 정상회담은 소수 배석자가 참석하는 단독회담 형식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회담에서 노 대통령은 김 위원장과 △남북 공동번영 △한반도 평화 △화해와 통일이란 큰 틀에서 주요 현안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눌 방침이다. 회담을 마무리한 뒤 ‘평화 선언’ 형태의 합의문을 채택할 것으로 전망된다. 평양공동취재단, 강태호 남북관계전문기자 kankan1@hani.co.kr /한겨레 2007-10-02 오후 07:13:27
1997 - 제1회 노인의 날 기념 제1회 노인의날 행사 개최 정부는 2일 제1회 노인의 날을 맞아 오전 10시 동대문운동장에서 노인 등 3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을 거행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1&aid=0004198081
[독자칼럼] 존엄을 생각해 보는 노인의 날/전희식 오늘은 노인의 날이다. 이곳저곳에서 노인의 날을 기념하는 행사를 열 것이다.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그의 장인이 노인회 회장으로 있을 때 ‘정의사회구현’이라는 문구를 넣어 만든 노인강령과 노인헌장이 읽혀지고 흥겨운 놀이마당이 푸짐한 음식과 함께 차려진 날이다. 치매가 있으신 여든여섯의 어머님과 함께 살면서 새로이 보게 되는 사실들이 많다. 우리 사회가 초고령사회로 가고 있다는 걱정 어린 경고 속에서 장사꾼들만 판을 치고 정작 노인들이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분위기와 제도는 멀어 보인다. 복지센터의 노인 돌보미가 골목에 들어서면서부터 고함을 지른다. “할매! 할매! 자요? 일나아!” 주무시던 어머니가 꿈과 현실의 틈새에 끼여 한참을 허우적거리신다. 오줌 쌌으니 빨아주겠다고 아랫도리를 와락 벗긴다. 면사무소 직원도 간호사도 의사도 반은 반말이다. 몸 불편하고 기력이 떨어진 노인들을 온전한 인간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노골적으로 애 취급한다. 전문가들은 온갖 병명을 만들어 붙인다. 무슨 무슨 노인성 병과 증상들이 모두 치료의 대상이고 격리 이유가 된다. 시설에 요양하러 온 정상적인 노인들마저 모두 환자복을 입혀서 환자로 만들어 놓고야 만다. 책방마다 차고 넘치는 것이 어린이책이지만 노인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책과 음반과 영화가 따로 있지 않다. 동화가 있으나 ‘노화’가 없고, 동시가 있으나 ‘노시’가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발견한다. 부모 모시기는 자식 키우기의 반의 반도 안 된다는 사실을 드러내 주는 증거들이다. 몸이나 정신이 수명을 다하여 제 기능을 하나씩 잃어가는 것은 노년기의 마땅한 현상이다. 의사들은 그런다. ‘이건 노화가 아니라 병이다’라고 강조한다. 정상적인 노화와 병을 꼭 구별하려고 한다. 무모한 짓이다. 그 누구도 공격하지 않는 노인들을 자꾸 병자로 만들 것이 아니라, 정말 치료가 필요한 사람은 사회악을 만드는 일부 ‘정상인’들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치매 걸린 부모의 반상식적인 언행들이 제 정신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식구들은 그제야 안도하고 감정을 눅인다. 대신 그때부터 더는 부모가 아니라 환자다. 부모의 말과 행동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모두가 헛소리고 웃음거리의 소재로 전락된다. 그동안 노인 관련 전문서적을 많이 봤지만 손을 꼭 잡아주고, 노인과 같은 방에서 자며 얼굴이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라는 글은 읽지 못했다. ‘헛소리’일망정 틀렸다고 하지 말고 끝까지 들어주고 추임새를 넣어주라는 말은 없다. 사랑과 정성은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고 오로지 약과 병원과 음식이 한결같은 처방들이다. 사랑은 죽은 세포도 되살리며 정성은 통증을 경감시킨다는 것이 내 체험의 결과들이지만 인정되지 않는다. 큰 행사나 공공기관에 갈 때 아이들을 데리고 갈 수 있도록 시설이 마련되고 전문인이 배치되지만 어디에도 불편한 부모 모시고 갈 수 있는 행사나 공공기관은 없다. 신경정신과 의사와 정신심리학 연구자들이 많지만 ‘트라우마’라는 유행어를 만들며 잠재의식과 꿈의 해석에 골몰하면서도 알츠하이머 증세의 노인들이 하는 이야기가 얼마나 심오한 무의식과 초차원적 세계를 반영하고 있는지 관심 갖는 것을 보지 못했다. 모두 건강과 젊음과 이성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노인 학대행위들이다. 오늘은 노인의 날이다. 노인의 존엄을 생각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한다. 정부의 노인정책도 노인의 존엄을 생각하는 데 집중해야 할 것이다. 전희식/농부·전국귀농운동본부 이사 /한겨레 2007-10-01 오후 06:41:03
1994 - 제12회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개막 30억 아시아인의 화합과 평화를 기원하는 제12회 아시안게임이 1994년 10월 2일 히로시마(廣島) 빅아치 스타디움에서 개막됐다. 히로시마에서는 10월 16일까지 총34개 종목 3백37개의 금메달을 놓고 15일간의 열전을 펼쳤다. 이번 대회는 카자흐스탄 등 구소련 5개 공화국이 처음 출전, 북한을 제외한 42개 전 회원국이 참가하는 사상 최대규모로 치러졌다. 9일에는 일본 히로시마 광역공원 주경기장을 출발, 평화공원에 이르는 42.195㎞ 코스에서 벌어진 제12회 아시안게임 남자마라톤서 황영조 선수가 2시간11분13초로 1위로 골인,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대회 최종일 한국은 육상 남자 1천6백m 계주서 금메달을 추가, 금63 은53 동 63개로 중국(금1백37 은92 동60)에 이어 2위에 올랐으며 홈팀 일본은 한국과 금 4개차로 3위를 차지했다. /조선
1991 - 한국의 여자 쇼트트랙 선수 이은별 출생 이은별 [Lee Eun-Byul, 1991.10.2~ ] 이은별(1991년 10월 2일 ~ )은 대한민국의 여자 쇼트트랙 선수이다. 학력 * 연수여자고등학교 *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 주요참가대회 및 성적 /위키백과
1988 - 제24회 서울올림픽 폐막 1988년 9월 17일부터 16일간 서울에서 개최된 서울올림픽이 1988년 10월 2일 폐막식과 함께 막을 내렸다. 160개 IOC회원국에서 1만 3,303명의 선수단이 참가, 237개의 금메달을 놓고 각축을 벌인 결과 소련이 금메달 55개로 메달순위 1위를 차지했고, 동독이 37개로 2위, 미국이 36개로 3위를 차지했으며 개최국 한국은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로 4위를 기록했다.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이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권 국가들의 참가거부로, 1984년 LA올림픽이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참가거부로 반쪽짜리 올림픽이 됐던 데 반해 서울올림픽은 12년 만에 동서가 모두 참가한 지구촌의 대결장이었던만큼 세계신기록 33개, 올림픽신기록 225개가 쏟아져나오는 등 풍성한 기록을 남겼다. /조선
1986 - 라지브 간디 인도 총리 피격
1985 - 미국의 영화배우 록 허드슨(Hudson, Rock) 사망 허드슨 [Hudson, Rock, 1925.11.17~1985.10.2] 미국의 영화배우 록 허드슨, 에이즈로 사망
- Finland, 10 Markka (1986. Banknote)
1973 - 핀란드의 육상선수 파보 누르미(Nurmi, Paavo) 사망 누르미 [Nurmi, Paavo Johannes, 1897.6.13~1973.10.2] 핀란드의 육상선수. 1920년대 장거리 육상 종목을 석권했다. 3차례의 올림픽 대회(1920, 1924, 1928)에서 6개의 금메달을 땄으며 그가 기록한 1마일(1.6㎞) 경기의 세계기록 4분 10초 40은 8년 동안(1923~31) 깨지지 않았다. 1920년 이래로 올림픽의 영광을 차지했던 다른 수많은 핀란드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누르미도 1912년 올림픽에서 장거리 경기 3종목을 석권한 핀란드의 한네스 콜레마이넨에게 감명을 받았다. 누르미는 훈련 때나 경기 때나 자신의 보폭을 정확하게 조절할 수 있도록 스톱워치를 가지고 다녔다. 1920년 벨기에 앤트워프 올림픽 대회에서 1만m 달리기와 1만m 크로스컨트리에서 금메달을 땄으며 192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올림픽 대회에서 1만m 달리기에서 또 하나의 금메달을 추가했다. 1924년 파리 올림픽 대회에서 그의 기록은 대단했다. 굉장히 더웠던 7월 10일 1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1,500m와 5,000m에서 올림픽 신기록을 세웠다. 이틀 후 역시 숨막히는 더위 속에서 1920년에 우승한 1만m 크로스컨트리에서 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이 경기는 1924년 이후 올림픽 종목에서 제외되었다. 그 다음날 비공식 3,000m 릴레이에서 첫번째로 들어와 핀란드 팀이 승리했으나 메달은 없었다. 1923년 8월 23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1마일 신기록을 세울 때에 자신의 스톱워치를 들여다보며 뛰어 처음 3쿼터는 각각 정확히 63초에 달렸고, 마지막 쿼터는 61.4초에 달렸다. 그가 각 쿼터를 거의 같은 시간대로 달려 기록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선수들은 그 방법을 따르지는 않았다. 1928년 1시간 경기에서 1만 9,210m를 달려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규정 이외의 금품을 받았다 하여 1932년 올림픽 직전에 국제 아마추어 선수자격을 박탈당했다. /브리태니커
- 'No. 2 Nude Descending a Staircase. 1912' - 'Neuf Moules Malic'
뒤샹 [Duchamp, Marcel, 1887.7.28~1968.10.2] [오늘의 책<10월 2일>] 뒤샹과 친구들 진중권은 <미학 오디세이> 2권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샘>이 다른 변기들과 달리 예술작품인 까닭은 무엇인가? …뒤샹은 과연 무엇을 창조한 걸까? 그것은 바로 '코드(code)', 즉 하나의 변기를 예술작품으로 간주하는 사회적 관습이다." 뒤샹은 수천년 동안 지속됐던, '눈의 즐거움'에 봉사하는 미술이라는 관습을 부정하고, 과연 예술은 무엇이고 예술가는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 의문을 던졌던 것이다. 다시 진중권의 표현을 빌리면 뒤샹으로부터 "예술과 사물 사이에 만리장성은 없다." 또 다른 뒤샹의 유명한 작품은 뒤샹은 이런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반예술의 다다이스트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그는 평생 "예술만이 한 인간이 진정한 개인으로서 제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의 활동"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재미 미술평론가 김광우가 쓴 <뒤샹과 친구들>은 1915년 이후 주로 뉴욕에 거주했던 뒤샹의 활동과 브르통, 아폴리네르 등 수많은 예술인들과의 교유를 중심으로 20세기 미술사를 조망하고 있다. 하종오 기자 joha@hk.co.kr /한국일보 2007/10/01 18:19:25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710/h2007100118192784210.htm
1967 - 미국 더굿 마셜 첫 흑인 대법관 취임 [책갈피 속의 오늘]1967년 美 마셜 첫 흑인 대법관 취임 1967년 10월 2일 미국 워싱턴의 연방 대법원. 말쑥한 차림의 한 흑인이 성경책 위에 조용히 손을 올렸다. 흑인의 아내와 두 아들은 숨을 죽였다. 대법관들도 그의 입을 주시했다.
1964 - 제1회 방송의 날 (1978년부터 9월 3일로 변경) [강남준의 미디어 비평] '방송의 날' 출생의 비밀 어제는 방송의 날이었다. 방송의 날,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방송이 처음으로 나타난 날일까. 애석하게도 9월 3일은 우리나라에서 방송전파가 최초로 발사된 날이 아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국은 1926년 2월 16일 개국한 경성방송국이다. 이 방송국은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것이기에 우리 것이라고 보지 않아 2월 16일을 방송의 날로 기념하지 않는다. 경성방송국이 사용했던 JODK라는 콜 사인은 일본에게 할당된 전파 호출부호이다. 보통 이 콜 사인의 앞 두 글자가 특정 국가를 나타낸다. 따라서 JO가 일본 고유의 콜 사인이고 경성방송국 JODK는 알파벳 순서로 따져 일본에서 4번째 방송국인 셈이다. 전파는 특성상 국가 간 경계를 넘나들 수 있어 전파에 그 발신지가 어디인지를 알게 하는 국가 고유의 콜 사인을 국제전기통신연합(ITU)에서 할당한다. 따라서 모든 주권국가는 특정 콜 사인을 할당받고, 이것이 전파주권을 대표한다. 우리나라의 콜 사인은 HL이다. 해방 후 독립국가로서 당연히 전파주권도 찾아와야 하기에 고유의 콜 사인을 배정받았다. HLKA, 지금의 KBS1 라디오가 HL 콜 사인으로 Korea(K)에서 첫번째(A)로 방송한 한국 국적 방송이다. 해방은 1945년에 되었지만 전파주권은 2년 후인 1947년 찾아와 그 해 10월 2일 감격스러운 전파독립의 날을 맞이했다. 그렇다면 이 날이 방송의 날이어야 하는데 왜 9월 3일인가? 9월 3일은 이역만리 미국 애틀랜타에서 ITU가 당시 신생 독립국인 한국에게 HL이라는 호출부호를 할당하기로 결정한 날이다. 기록에 따르면 1964년 9월 최초로 제정된 방송의 날은 10월 2일이었다. 그런데 전파주권을 실질적으로 회복한 시점이 콜 사인을 배당받은 날이라는 이유로 1978년부터 지금의 9월 3일로 변경해 시행하고 있다. 이것은 공식 기록이고 방송계 항간에 떠도는 '설'에 의하면 당시에는 10월 1일 국군의 날이 공휴일인데 10월 2일이 방송의 날로 쉬는 날이 되면 10월 3일 개천절까지 놀게 되어, '아니 이것들이'라는 이유에서 바뀐 것이라고 한다. 정치권력에 휘둘리고, 경제권력에 끌려다니고, 뭐 뒤에 무슨 무슨 권력이란 말만 붙으면 방송을 좌지우지해 지금처럼 어지러운 '이 풍진 세상'을 만들었다. 방송인들은 그 동안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저항도 했고 한편으로 일정한 성과도 얻었다. 그런데 자신들의 생일이라고 경축해야 할 날을 아주 이상한 이유로 독재정권 시대에 바뀐 9월 3일 그대로 경축하고 있으니 문제다. 아마 자신들이 이렇게 기구한 팔자를 타고 났다는 것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해 우리나라 방송 드라마에서 그렇게 많은 출생의 비밀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나보다. 이제 국군의 날은 더 이상 공휴일이 아니고 세태도 많이 바뀌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는 못하지만 진정한 생일을 생일이라고 부를 수 있게 방송의 날을 다시 제정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때가 됐다. 강남준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한국일보 2009/09/04 02:31:32 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 opinion/200909/h2009090402313267820.htm&ver=v002
1958 - 기니, 프랑스로부터 독립 기니는 15세기에 포르투갈인(人)이 가장 먼저 해안에 도달하고, 그뒤 17세기에는 프랑스와 영국의 쟁탈대상이 되었다. 1725년 풀라니족(族)이 푸타잘롱 산지에 진출하여 해안지대의 유럽인 세력에 항거하였다. 해안지대는 1814년에 프랑스 세력권으로 인정되어 1849년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으나, 프랑스의 침략에 대한 무력저항은 말린케족의 지도자 사모리 투레 등에 의해 20세기 초반까지 지속되었다.
1950 - 만화 '피너츠(Peanuts)' 연재 시작 찰스 슐츠의 만화 '피너츠(Peanuts)'가 1950년 10월 2일부터 미국 7개 신문에서 연재를 시작했다. '스누피' '찰리 브라운' 등 피너츠에 등장한 많은 캐릭터들은 2000년 2월 12일 슐츠가 암투병 끝에 타계할 때까지 50여년에 걸쳐 세계 팬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 한국방송 50주년 기념, 1977
1947 - 한국 방송 호출부호 HL로 방송을 시작 1947년 9월 3일 : 한국의 호출부호 HL을 배정받음 우리나라의 방송기념일이기도 한 9월 3일은 1947년 국제무선통신회의에서 한국이 호출부호 HL을 배정받은 날이다. 우리 방송이 일본 호출부호 대신 독자적인 호출부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날은 1947년 10월 2일이었고, 이 때문에 방송의 날은 원래 10월 2일이었다. 그러나 1978년부터 9월 3일로 변경되었으며 한국 방송대상도 이날 시상되고 있다. /과학향기 출처 : KISTI의 과학향기 /한겨레 2008-09-01 오후 06:05:18 http://www.hani.co.kr/arti/science/kistiscience/307852.html
1944 - 바르샤바 봉기 종료 On October 2, 1944, the Warsaw Uprising ended. The Warsaw Uprising was a major WWII operation by the Polish resistance Home Army to liberate Warsaw from Nazi Germany. Source: http://en.wikipedia.org/wiki/Warsaw_Uprising 바르샤바 봉기[ ―― 蜂起, Warsaw Uprising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바르샤바에서 일어난 봉기(1944. 8~10). 폴란드인들은 전진하고 있던 소련군이 바르샤바 시를 점령하기 전에 독일군을 추방하고 바르샤바를 장악하려고 봉기를 일으켰지만 실패했다. 이때문에 런던에 있던 폴란드 망명정부가 아닌 친소 폴란드 행정부가 폴란드 통치권을 얻었다. 소련은 적군(赤軍)을 바르샤바에 접근시키면서(1944. 7. 29~30) 바르샤바 지하조직에 지원을 약속하고 독일군에 대항하는 봉기를 전개하도록 격려했다. 그러나 ' 국가군'으로 알려진 폴란드 지하조직은 소련이 이미 동부 폴란드를 직접 통치하고 있었고 나머지 소련 점령 폴란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폴란드 민족해방위원회를 만들도록 후원했기 때문에 소련의 태도를 의심했다. 그러나 적군이 바르샤바를 '해방'시키기 전에 바르샤바 통치권을 획득하려 한 국가군은 소련의 제안을 받아들여 봉기를 일으켰다. 타데우슈 코모로프스키 장군이 이끄는 5만 명의 바르샤바 군대는 8월 1일, 비교적 약한 독일군을 공격해 3일 만에 대부분의 도시를 장악했다. 그러나 독일은 증강군을 보내 그뒤 63일 동안 공중 및 야포 공격을 통해 폴란드군을 점차 수세로 몰아넣었다. 한편 봉기가 일어난 처음 며칠 동안 독일군의 반격으로 지체하고 있던 적군은 비스툴라 강을 건너 바르샤바 교외 프라가에 포진한 채 빈둥거리고 있었다. 또한 소련 정부는 포위된 폴란드에 물자를 공중으로 보급하기 위해 소련 공군기지를 이용하자는 연합군의 요청을 거절했다. 연합군의 지원을 받지 못한 국가군은 소규모로 흩어져 서로 연락이 두절되었고 물자가 떨어지자 10월 2일 항복해야만 했다. 보르와 그의 부하들은 포로가 되었으며 독일군은 바르샤바에 남아 있던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강제이송시킨 뒤 바르샤바를 파괴했다. 독일군이 바르샤바 봉기를 진압하도록 내버려둔 소련 당국은 런던에 있는 폴란드 망명정부를 지원하고 있던 주요 군사조직까지 독일군이 없애도록 내버려두었다. 그결과 소련군이 폴란드 전역을 장악하게 되어 폴란드에는 공산주의자가 이끄는 폴란드 임시정부가 세워지는 데(1945. 1. 1)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조직이 거의 없었다. /브리태니커
1927 - 스웨덴의 물리화학자 아레니우스(Arrhenius, Svante) 사망 아레니우스 [Arrhenius, Svante August, 1859.2.19~1927.10.2] 스웨덴의 물리화학자. 웁살라 근처의 비크 출생. 1876년 웁살라대학에 입학, 물리학을 전공하는 한편, 화학과 수학을 배워 1881년에 졸업하였다. E.에들룬드의 실험실에서 전해질희석수용액의 전기전도도에 관하여 연구, 1884년 과학아카데미에 논문으로 발표하여 이온화설의 기초를 이루었다. 이 논문으로 1884년 웁살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크게 인정받지는 못하였다. W.오스트발트의 추천으로 웁살라대학 강사가 되었으나, 곧 사임, 과학아카데미의 해외연구생으로 5년간 여러 나라에 유학하였다. 1891년 독일의 기센대학에 물리화학강좌가 신설되어 아레니우스를 조교수로 초청하기에 이르러서야 스톡홀름대학에서 물리학강사의 지위를 얻어 스웨덴에 머물기로 하였다. 1896년 이온화설의 업적으로 독일의 전기화학학회 명예회원으로 추천되었고, 이듬해 스톡홀름대학 학장에 임명, 1901년에는 스웨덴 과학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1902년 영국의 왕립학회로부터 데이비상을 받고, 1903년에는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1905년 스웨덴 정부는 노벨물리화학연구소를 설립, 아레니우스를 소장에 임명하였다. 1927년까지 그 지위에 있으면서 여러 방면에 걸친 연구를 하였다. 주요 업적은 이온화설, 화학반응속도 및 면역화학의 이론, 우주물리학에서는 오로라의 기원에 관한 가설, 지학에서는 화산 활동의 원인에 대한 가설 등이 있다. 또한 많은 저서가 있는데, 《사적으로 본 우주관의 변천》 등이 유명하다. /naver
1907 - 볼리비아의 대통령 파스 에스텐소로(Paz Estenssoro, Victor) 출생 파스 에스텐소로 [Paz Estenssoro, Victor, 1907.10.2~2001.6.7] 볼리비아의 정치가. 볼리비아의 좌파 정당인 민족혁명운동(Movimiento Nacionalista Revolucionario/MNR)의 발기인이며 당수로서 3차례 볼리비아 대통령(1952~56, 1960~64, 1985~89)을 역임했다. 처음에는 라파스에 있는 산안드레스대학교에서 경제학교수로 재직하다가 1937~39년 헤르만 부츠 대통령의 경제고문을 지냈다. 1939년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고, 1941년에는 동료들과 함께 MNR을 창당했다. 1952년 MNR이 권력을 장악하자 볼리비아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의 행정부는 인디언에게 투표권을 인정했고, 볼리비아의 3대 주석 회사를 몰수했으며,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중앙고원의 경작지를 인디언에게 이전시켰다. 1950~60년 영국 대사를 지내다가 1960년의 선거에서 다시 MNR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여 압승을 거두었다. 자신의 2번째 대통령 재임기간중에 그는 미국 정부와 범아메리카개발은행, 서독의 기업들과 협정을 체결했는데, 특히 서독 기업은 볼리비아의 주석산업을 재육성하기로 합의했다. 1964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파스 에스텐소로는 유권자의 70%를 득표했다. 그러나 1964년 11월초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여 그의 정부는 무너지고 그는 페루로 망명했다. 이후 리마에 있는 대학교에서 경제학교수로 재직했으나, 1971년 8월 볼리비아로 돌아와 우파인 우고 반세르 수아레스 대통령 정부에서 고문으로 활동했다. 그는 1979년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했다. 1985년 대통령 선거에 MNR 후보로 출마한 파스 에스텐소로는 반세르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후보자 중 아무도 과반수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대통령 선출권은 의회로 이양되었다. 1985년 8월 5일 의회는 파스 에스텐소로를 대통령으로 선출했고, 다음날 그의 취임식이 거행되었다. 3번째 재임기간 동안 그는 경제 내핍 정책을 제도화하여 볼리비아의 경제를 위협하던 극도의 물가상승을 감소시켰다. /브리태니커
1904 - 인도의 정치가, 총리 샤스트리(Shastri, Lal Bahadur) 출생 샤스트리 [Shastri, Lal Bahadur, 1904.10.2~1966.1.11] 인도의 정치가, 총리. 1964~66년 자와할랄 네루를 뒤이어 총리를 지냈다. 1921년 식민정부에 반대하여 마하트마 간디의 비협조운동에 가담한 이유로 1921년 잠시 투옥되었다. 풀려난 뒤 민족대학의 하나였던 카시 비디아피타에서 수학하고, 샤스트리('성전에 정통하다'는 뜻)가 되어 졸업했다. 그뒤 간디의 추종자로 다시 정계로 복귀하여 7차례에 걸쳐 투옥되면서도 연합주(지금의 우타르프라데시 주)의 국민회의당 조직을 이끌었다. 1937년과 1946년 샤스트리는 연합주 의회에 진출했으며, 인도 독립 후에는 우타르프라데시 주의 내무장관·운송장관으로 경력을 쌓은 후 1952년 연방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고, 연방 철도·운송장관으로 활동했다. 1961년 내무장관에 취임한 뒤에는 능숙한 중재자로서 명성을 떨쳤으며 3년 뒤 자와할랄 네루의 와병중에 무임소장관에 임명되었다가 네루가 죽은 뒤 1964년 6월 총리가 되었다. 샤스트리는 경제문제에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1965년 잠무와 캬슈미르의 귀속을 둘러싸고 파키스탄과 적대관계로 치달았을 때 단호한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인기를 얻었다. 파키스탄의 아유브 칸 대통령과 소련령 중앙 아시아에서의 부전조약에 서명한 뒤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네루의 딸 안디라 간디가 샤스트리를 이어 총리가 되었다. /브리태니커
1890 - 미국의 희극 배우, 영화 배우 그루초 막스(Marx, Groucho) 출생 막스 [Marx, Julius Henry "Groucho", 1890.10.2~1977.8.19] 그루초 막스 줄리어스 헨리 "그루초" 막스(Julius Henry "Groucho" Marx, 1890년 10월 2일 - 1977년 8월 19일)는 미국의 희극 배우이자 영화 배우이다. 그의 형제들과 막스 브라더스라는 이름으로 15편의 영화를 찍으며 유명해 졌으며, 후에는 혼자서 TV 쇼 등을 진행하며 인기를 끌었다. 그는 1977년 8월 19일, 로스앤젤레스에서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위키백과
1883 - 오스트리아/미국의 토목공학자 테르자기(Terzaghi, Karl von) 출생 테르자기 [Terzaghi, Karl (Anton) von, 1883.10.2~1963.10.23] 미국의 토목공학자. 토목공학의 한 분야이며 응력(應力)과 유수(流水)의 작용하에 있는 토양의 특성을 연구하는 학문인 토질역학(土質力學)의 기초를 세웠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그라츠공과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다. 1904년 졸업하여 7년간 기술자로 일했고, 그라츠공과대학에서 토목공학박사학위를 받았다(1911). 그는 미국 방문 후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오스트리아 공군에서 근무했고, 1916년 이스탄불에 있는 임피리얼공과대학에서 일하게 되었다. 또한 종전 후 이스탄불 불에 있는 미국 대학인 로버트 칼리지에서 일했다. 과거에도 이미 기초·토압(土壓)·경사안정도에 대한 많은 연구가 행해진 상태이지만, 그는 그 연구결과를 체계화시키고 연구를 통해 통합된 개념을 만들었다. 그의 연구성과는 그의 가장 유명한 책인 〈토질역학개론 Erdbaunmechanik〉(1925)에 나타나 있다. 1925년 미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에 있는 매사추세츠공과대학에서 학부교수단의 일원으로 자신의 이론을 승인받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했다. 또한 여러 건축계획의 고문기사로도 일했다. 1929년 빈공과대학의 새로 생긴 토양역학교수직을 맡게 되었다. 1938년 미국으로 되돌아와 1946년부터 1956년 은퇴할 때까지 하버드대학교의 토목공학교수직에 있었다. 1959년까지 이집트에 있는 아스완 댐 건설계획의 고문위원회 위원장직을 비롯해 고문기사로서의 그의 여러 업적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다. /브리태니커
- 태극기 사용 100주년 기념우표, 1982 박영효 제작 「최초의 태극기」그림 찾았다 1882년 제작된 최초의 태극기 모양을 게재한 일본 일간지 「시사신보(時事新報·1936년 폐간)」가 처음으로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http://news.donga.com/fbin/output?sfrm=2&f=total&&n=199708140132
1871 - 미국의 정치가 헐(Hull, Cordell) 출생 헐 [Hull, Cordell, 1871.10.2~1955.7.23] 미국의 정치가. 1933~44년에 국무장관을 역임했다. 낮은 관세 책정을 골자로 하는 그의 상호무역 프로그램은 20세기의 팽창된 세계무역구조의 형성을 가능하게 했다. 1945년 국제연합(UN)을 조직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받았다. 테네시 출신의 젊은 변호사로서 일찍이 민주당에 가입했다. 1907~21, 1923~31년의 22년 동안 하원의원을 지냈고 1931~33년에는 상원의원을 지냈다. 뉴딜 정책이 시작될 무렵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국무장관으로 임명된 그는 19세기 이래 미국의 해외무역에 장애로 작용해온 높은 관세장벽을 해소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처음에는 대통령의 지지를 얻어냈고 1933년 12월에는 미주 몬테비데오 회의에서 열광적인 지원을 얻어냈다. 이어 그는 의회에서 1934년 3월 상호무역협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에 의해 최혜국에 대한 관세삭감방식이 고착되었고, 이것은 이후 1948년에 조인된 '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GATT)의 전주곡이 되었다. 1930년대에 그는 이른바 선린외교정책을 통해 미국과 라틴아메리카의 관계를 대폭 개선했다. 몬테비데오 회의에서 그가 보여준 겸손함과 외국에 대한 내정불간섭주의는 라틴아메리카 국가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으로 라틴아메리카에 각인되어 있던 미국에 대한 불신을 없애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1936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개최된 범아메리카 회의에 참석했고, 1940년 아바나에서 개최된 외무장관 특별회담에도 참석했다. 그의 뛰어난 여론조성 능력 덕택에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아메리카 국가들을 통일된 단일전선으로 묶을 수 있었다. 동아시아 정책에서 그는 1934년에 일본이 제안한 '일본의 먼로주의'를 거부했는데, 일본의 먼로주의란 일본에게 중국에서의 자유재량권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34년말 일본이 1936년에 만료되는 해군군축조약을 갱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통보하자 헐은 태평양에서의 미국 이해보존 정책과 계속적인 중국과의 우호관계 유지 및 군비추진 정책을 발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헐과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이 중립정책을 고수하는 것이 오히려 추축국들의 공격을 고무시키고 있다고 생각하고 연합국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1941년 가을에 진행된 일본과의 결정적인 교섭에서 헐은 중국의 권리를 강하게 주장했으며, 일본에게 중국 본토 점령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이 전쟁에 참전한 후 그와 국무부 동료들은 국제적인 전후 평화유지 기구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1943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외무장관 회의에서 헐은 약화된 건강과 노령에도 불구하고 전시의 협력체제가 전후에도 평화와 안전을 추구하는 세계기구 속에서 계속되어야 한다는 서약을 4개국 외무장관으로부터 받아냈다. 이러한 업적 때문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헐을 'UN의 아버지'라고 칭했으며, 그에게 노벨 평화상이 주어졌다. 1944년에 실시된 대통령선거 후 사임했으며, 저서로는 〈회고록 Memoirs of Cordell Hull〉(1950)이 있다. /브리태니커
- India, 20 Rupees (Banknote)
1869 - 인도의 민족지도자 마하트마 간디(Gandhi, Mahatma) 출생 간디 [Gandhi, Mohandas Karamchand, 1869.10.2~1948.1.30] 인도건국의 아버지로 1922년 인도의 문호 타고르가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라고 칭송한 시를 받은 후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라고 불리게 되었다. 1869년 10월 2일 포르반다르에서 출생한 간디는 1887년 영국으로 유학가 법률을 배운 후 1891년 귀국해 변호사로 개업했다. 1893년 남아공으로 건너가 차별받는 인도인을 위한 계속된 투쟁으로 간디는 일약 세계의 간디로 유명해졌다. 1915년 귀국한 간디는 인도국민회의파를 지도하며 납세거부, 취업거부, 상품불매 등을 통한 비폭력저항운동을 실시했다. 1924년부터는 국민회의파의 의장으로 있으면서 인도인이 자력에 의한 농촌구제에 나설 것을 역설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니기도 했으며 1930년에는 소금세 신설반대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수차례의 투옥생활을 하기도 한 간디는 1948년 1월 힌두교와 이슬람교간의 분란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던중 반이슬람 극우파의 한 청년의 흉탄에 쓰러졌다. /조선
1852 - 영국의 화학자 윌리엄 램지(Ramsay, William) 출생 램지 [Ramsay, William, 1852.10.2~1916.7.23] 영국의 화학자. 글래스고에서 출생하였다. 글래스고 및 독일의 튀빙겐대학교에서 교육을 마친 후 1874년 글래스고대학교의 강사가 되었다. 초기에는 유기화학(피리딘 합성 등)을 연구하였으나, 1876년경부터 물리화학으로 방향을 돌렸다. 1887년 런던대학교 화학 교수가 되고, 여기에서 2대 업적인 최초의 비활성기체의 발견과 원소변환의 연구를 하였다. 1894년 J.S.레일리가 공기 중의 질소가스의 밀도와 암모니아 분해에서 얻어진 질소가스의 밀도 차이를 지적한 연구를 발표하였는데, 램지는 이 사실을 토대로 공중질소에 마그네슘을 작용시켜 비활성인 잔류기체(殘留氣體)를 추출하고 이것을 아르곤이라 명명하였다. 1895년 미국의 지질학자 힐데브란트 등이 우라늄석(石)을 산(酸)으로 처리하여 미지의 가스(질소로 오인)를 얻었다는 사실을 안 램지는, 그 가스에서 질소를 제거하고 얻은 잔류가스에서 스펙트럼분석을 통해 아르곤 외에 헬륨을 발견하였다. 이 아르곤과 헬륨의 발견에 의해 주기율표에는 제0족이 추가되었다. 그는 제0족에 미지원소가 또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M.W.트래버스와 함께 스펙트럼분석을 계속하여 1898년 아르곤 속에서 네온·크립톤·크세논을 발견하고, 1900년 어려운 실험 끝에 단리(單離)에 성공하였다. 최후의 제0족 라돈의 연구는 소디와 함께 1903년 이후에 실시되었으며, 1904년에는 이 방사성 원소가 붕괴될 때 헬륨이 방출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업적으로 그 해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naver
1851 - 프랑스의 장군 페르디낭 포슈(Foch, Ferdinand) 출생 포슈 [Foch, Ferdinand, 1851.10.2~1929.3.20] 프랑스의 군인. 파리 이공과대학을 졸업하고 육군에 투신, 육군대학 교수 ·학장을 지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제9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마른의 회전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 프랑스 북부군사령관 ·참모총장 등을 역임한 후, 대전 말기인 1918년 봄에는 신설된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독일군의 대공세를 막았고, 연합군 최후의 반격을 지휘하였다. 그 해 11월 11일 파리 북방 콩피에뉴의 숲에서 독일과의 휴전조약이 체결될 때 원수로서 연합군을 대표하여 서명하였다. 이듬해 파리 강화회의에서는 프랑스의 안전보장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라인강(江) 좌안의 독일 영토를 프랑스에 귀속시킬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이에 반대하는 미국과 영국의 수뇌들과의 협조가 필요함을 인식하고 그것을 중시한 클레망소 총리가 양보하였기 때문에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만년에는 프랑스 육군의 영광을 구현하는 장군이었고, 아카데미프랑세즈의 회원이기도 하였다. /naver
1847 - 독일군 원수,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Hindenburg, Paul von) 출생 힌덴부르크 [Hindenburg, Paul von, 1847.10.2~1934.8.2] [오늘속으로<918>(10월2일)] 힌덴부르크 1847년 10월2일 독일의 군인 겸 정치인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폴란드 포즈난에서 태어났다. 1934년 몰(沒). 힌덴부르크는 프랑스의 필리프 페탱, 샤를 드골과 함께 20세기 유럽의 대표적인 군인 정치인이었고, 군인 정치인답게 완고한 우익이었다. 19세기 독일 제국 창건의 주축이었던 융커(프로이센의 귀족) 출신인 그는 자기 계급 사람들이 흔히 그랬듯 제국의 장교로입신했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한국일보 2003/10/01 17:19
1836 - 찰스 다윈, 비글호 항해를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옴 [키워드로 다윈 읽기]비글호 다윈의 운명 바꾼 배… 진화론 ‘제1 조역’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5&oid=020&aid=0002031152
1608 - 망원경 특허 출원 [이 주일의 역사] 망원경 특허 출원 △망원경 특허 출원(1608.10.2) 정광용 기자 kyjeong@ /부산일보 2008. 09.29. 10:29 http://www.busanilbo.com/news2000/html/2008/0929/040020080929.1030102925.html
리페르셰이 [Lippershey, Hans, 1570~1619.9.] Hans Lippershey (1570 – September 1619), also known as Johann Lippershey or Lipperhey, was a German-Dutch spectacle-maker. He is commonly associated with the invention of the telescope, although it is unclear if he was the first to build one. Biography http://en.wikipedia.org/wiki/Hans_Lippershey
1538 - 이탈리아의 추기경, 대주교 보로메오(Borromeo, San Carlo) 출생 보로메오 [Borromeo, San Carlo, 1538.10.2~1584.11.3] (영)Saint Charles Borromeo. 1610년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축일은 11월 4일. 추기경·대주교. 이탈리아의 반종교개혁을 이끈 주요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1559년 파비아대학교에서 시민법 및 교회법 박사학위를 받고, 다음해 삼촌인 교황 피우스 4세에게 밀라노의 추기경 및 대주교 임명을 받았다. 그가 교황청에서 한 일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자문회의를 이끈 일로, 이 직위를 잘 수행해 교황 피우스 밑에서 국무장관이 되었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제3차 소집(1562~63) 때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 교황의 전폭적인 신임을 얻었다. 공의회가 끝난 뒤에는 이 공의회가 결정한 법령들을 실행하는 일을 맡았으며, 1566년에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리문답을 작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이 시기에 스위스 프로테스탄트들의 개종을 적극 지원했다. 그의 삼촌이 죽었을 때 교황 선거단의 일원이 되어 피우스 5세를 교황으로 선출했다(1566). 그후 밀라노에 거주했는데, 그곳에는 심각한 행정 문제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널리 흩어져 있는 1,000개가 넘는 지역교회들을 정규적으로 방문했는데, 이 교회들은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와 베네치아·제노바·노바라의 관할권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는 밀라노와 이탈리아의 인베리고 및 첼라노에 신학교와 대학을 세움으로써 성직자 교육을 육성했다. 평신도 학생들을 위한 대학들도 세우고 이를 예수회에 위탁했다. 1584년에는 마지막으로 스위스 아스코나에 대학을 열었다. 그는 정치적 소요와 그밖의 소요들로 시달렸다. 밀라노의 원로원, 총독 리스 데 레케센스 이 주니가, 산타마리아델라스칼라 성당의 참사회원들과 휴밀리아티('겸손한 자들') 수도회와 갈등관계에 있었으나, 자신이 세운 성 암브로시우스의 노동수사회를 포함한 여러 수도회의 지지를 받았다. 1569년 휴밀리아티회의 일원인 지롤라모 도나토 파리나 사제가 보로메오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한 일이 생겼다. 보로메오는 관대한 처분을 호소했으나, 파리나와 공모자들은 고문을 당한 뒤 처형되었다. 1576~78년 전염병이 돌 때 그가 보여준 영웅적인 행동으로 많은 존경을 받았다. /브리태니커
1535 - 프랑스 탐험가 자크 카르티에가 세인트로렌스 강을 거슬러올라가 지금의 몬트리올에 도착하다 자크 카르티에(1491년 ~ 1557년9월 1일)은 프랑스의 항법사·탐험가였다. 항해 1534년4월, 137일간의 첫 번째 항해에서 세인트로렌스 만·세인트로렌스 강변을 발견했고, 그 다음 해인 1535년, 두 번째 항해에서 캐나다라고 이름지었다. 1541년에는 마지막 항해를 했다. /위키백과
몬트리올의 발전 과정 1535년 10월 Jacques Cartier의 방문을 통해 섬 위의 Saint-Laurent 지방의 이로쿼이족(Iroquois)의 호켈라가 마을이 발견되었다. 이 마을은 « Mons realis » (라틴어로 왕의 산, Mont royal)이란 이름을 받았다. 20세기에 고고학자들은 현대로부터 3000~4000년 전의 인간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물을 발견했다. 그러나 (약 70년 뒤, 프랑스 탐험가) Samuel de Champlain이 퀘벡 도시를 세운 시기인 1608년 7월 3일에는 Hochelaga 마을의 흔적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고 (이는 부족간 전쟁, 유럽 전염병 그리고 이주 같은 이유로 추측된다.) 그들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1615년 Samuel de Champlain이 누벨 프랑스(Nouvelle-France, New France)의 인디언들에게 카톨릭교를 전파하는 비전을 갖고 Saint-Laurent 강 위에 새로운 도시를 세우는 생각을 했다. (몬트리올) /위키백과
1534년 프랑수아 1세는 금과 향료 및 아시아로 가는 항로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걸고 북쪽 땅에 탐험대를 보내기로 결정한 뒤, 카르티에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 세인트로렌스 만). 카르티에는 1534년 4월 20일 2척의 배와 61명의 선원을 거느리고 생말로를 떠났다. 그는 세인트로렌스 만 앤티코스티 섬까지 탐험한 뒤, 가스페 반도에서 인디언 2명을 사로잡아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의 보고를 받고 더욱 호기심이 생긴 프랑수아 1세는 이듬해 3척의 배와 110명의 선원과 함께 카르티에를 다시 탐험에 내보냈다. 카르티에는 프랑스에서 함께 데려온 인디언 2명의 안내를 받아 세인트로렌스 강을 따라 퀘벡까지 거슬러 올라갔고, 이로쿼이족의 마을 근처에 기지를 세웠다. 9월에 그는 소규모 탐험대를 이끌고 급류 때문에 항해가 금지되어 있는 몬트리올 섬까지 전진했다. 그곳에 사는 이로쿼이족은 그를 환영했지만, 그는 불과 몇 시간 머무르다 기지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인디언의 말을 듣고, 오타와·세인트로렌스 강을 따라 서쪽으로 좀더 나아가면 금·은·구리·향료가 풍부한 땅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겨울의 매서운 날씨는 그들에게는 혹독한 것이었다. 부하들 가운데 25명이 괴혈병으로 죽고, 설상가상으로 탐험대는 이로쿼이족의 미움을 샀다. 그리하여 5월에 얼어붙었던 강물이 녹자, 그들은 이로쿼이족의 몇몇 추장을 사로잡아 프랑스로 떠났다. 그후 카르티에는 내륙 깊숙한 곳에는 풍부한 재화가 있으며, 길이가 약 3,200㎞에 이르는 커다란 강이 아시아로 통하는 것 같다는 것밖에 보고할 수 없었다. /브리태니커
1452 - 영국의 왕 리처드 3세(Richard III) 출생 리처드 3세 [Richard III, 1452.10.2~1485.8.22] 영국 요크 왕조의 마지막 왕(재위 1483~1485).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이며 글로스터공(公)으로, 형이 죽은 후 어린 조카 에드워드 5세의 섭정이 되었다. 정적을 처형하고 어린 왕과 왕의 아우를 런던탑에 유폐시켜 왕위를 찬탈하였다. 그러나 전왕(前王) 형제를 런던탑 내에서 살해하였다는 소문이 퍼져(사실 여부는 불명) 신망을 잃었다. 이 기회를 포착한 랭커스터파의 리치먼드백작 헨리가 1485년 망명지인 프랑스로부터 영국에 상륙하자 유력한 귀족들이 다수 백작을 도왔으며, 왕은 보즈워스에서 백작과 싸우다 패배하여 전사하였다. 이것으로 장미전쟁은 끝나고, 백작은 헨리 7세로서 튜더왕조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튜더 왕조시기 작가들은 리처드 3세를 몸이 불구이고 의심이 많은 음흉한 야심가라고 자주 묘사해왔다. 하지만 실제로 그가 불구였다는 객관적인 역사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리처드 3세를 폐위시키고 튜더 왕조를 세운 헨리 7세의 정당성을 높이기 위해 가공된 부정적인 이미지였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naver
1434 -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 제작 앙부일구(仰釜日晷)는 조선시대에 제작된 2개의 해시계로, 1434년(세종 16) 처음으로 만들어져, 혜정교(惠政橋)와 종묘 남가(南街)에 각각 석대를 쌓아 그 위에 설치하여 한국 최초의 공중시계 역할을 하다가 임진왜란 때 유실되어 없어지고, 2∼3세기 후에 만들어진 2개의 앙부일구가 남아 1985년 보물로 제845호로 지정되었다. 궁중유물전시관에 소장되어 있다
- Battle of Hattin, 800th Anniv. (1987.6.25 발행)
- Sultan Saladin and Battle of Hattin, 1187 (1970.4.17 발행)
- Syria, 25 Pounds (Banknote)
- Syria, 200 Pounds (Banknote)
1187 - 살라딘(Saladin), 기독교인들에게 빼앗긴 예루살렘 함락 [오늘의 경제소사/10월2일] 1187년 예루살렘 & 살라딘 1187년 10월2일,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졌다. 이슬람군 2만여명이 공격을 시작한 지 12일 만이다. 승패는 이미 결정 난 상태였다. 예루살렘 왕국의 병력이라야 수천명. 전력의 핵심인 기사는 달랑 14명에 불과했다. 3개월 전 치러진 하틴 전투에서 병력 2만명과 기사 2,000여명을 상실하는 완패를 당한 후 베이루트와 시돈ㆍ나사렛ㆍ티론 등 십자군의 근거지를 차례차례 정복 당한 뒤끝이었기 때문이다. 항복 직후 예루살렘의 2만여 주민은 공포에 휩싸였다. 자신들이 한 짓이 있었던 탓이다. 이슬람군도 이를 갈았다. 그럴 만했다.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1099년 6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 당한 4만여 무슬림과 유대인의 피가 무릎까지 고였던 원한이 뼛속에 맺혔기에. 기독교인은 얼마나 학살됐을까. 누구도 보복 당하지 않았다. 술탄 살라딘(Saladin)의 자비 덕분이다. 이집트와 시리아ㆍ팔레스타인과 예멘 땅까지 차지한 정복 군주 살라딘은 보복 대신 관용을 택해 포로들을 풀어줬다. 몸값을 받았다지만 고향까지 갈 수 있는 물과 식량까지 챙겨 기독교인들을 놓아준 살라딘에게 돌아온 것은 3차 십자군. 예루살렘 재함락에 격분한 교황과 유럽인들은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를 중심으로 편성된 새로운 군대를 내보냈다. 살라딘은 3차 십자군을 맞아 싸우면서도 리처드가 부상 당했을 때 의료진을 보내 신뢰를 쌓아 기독교인의 성지순례를 허용하는 조건으로 휴전조약을 맺었다. 1187년 예루살렘의 평화와 공존으로부터 820년이 지난 오늘날, 살라딘이 베풀었던 자비와 평화는 찾을 수 없다. 피의 보복만 되풀이될 뿐이다. 국제유가에서 세계 평화까지 중동의 종교ㆍ민족 갈등에 위협 받고 있다. 인류의 미래가 살라딘식의 상호존중과 공존에 달렸다. 권홍우 편집위원 /서울경제 2007/10/01 18:07 http://economy.hankooki.com/lpage/opinion/200710/e2007100118074863820.htm
BC 322 -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사망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 BC 384~BC 322] 역사속 오늘-아리스토텔레스 사망 ‘유레카!(찾았다!)’의 주인공인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기원전 322년 칼커스에서 위장병으로 사망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8&aid=0000009864
---------------------------------------------------------------- -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