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 Oblige)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높은 신분에 요구되는 정신적 의무’또는‘상류층에 요구되는 도덕적 의무’라고 나온다.
6.25 전쟁 때 아이젠하워 대통령,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의 아들이 참전을 하여 싸웠으며 워커 장군의 부자는 공히 참전하다 안타깝게 둘 다 전사를 하였다.
(광진구에 있는 ‘워커힐(Walker Hill)’은 ‘군화의 언덕’이라는 뜻이 아니고, ‘워커 장군의 언덕’이라는 뜻이다. 1961년 사단법인 워커힐로 설립되었으며 당시 한국에 적당한 휴양지가 없어 일본으로 떠나는 주한미군을 타깃으로 워커힐호텔을 세웠으며, 워커힐이라는 이름은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해리슨 월턴 워커(Harris Walton Walker) 전 미8군 사령관을 기념한 것이다.)
밴플리트 8군사령관의 아들 밴플리트 2세는 공군 B-26 조종사로서 해외 그리스에서 근무하다 귀국을 하자 마자 아버지가 참전 중인 한국으로 날아왔다.
한국으로 출발하기 전 자기 어머니께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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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어머니께
이 편지는 군인의 아내에게 바치는 편지입니다. 눈물이 이편지를 적시지 않았으면 합니다만 저는 전투중에 B-26 폭격기를 조종할 것입니다. 저는 조종사이므로 기수엔 폭격수, 옆에는 항법사, 후미에는 기관총 사수와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야간비행을 할 것입니다. 아버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살 권리를 향유할 수 있도록 싸우고 있으며, 드디어 저의 미력한 힘이나마 보탤 시기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저를 위하여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 미국이 위급한 상황에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소집된 저의 승무원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그들 중에는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를 둔 사람도 있고, 아직 가정을 이루어 본 적도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저의 의무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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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플리트 장군의 외아들인 그는 1952년 4월 4일 북한으로 철도 보급을 공격하는 작전에 출격을 하였다가 대공포를 맞고 실종되었다고 하며 미군이 수색을 위하여 출동을 하였으나 어려움을 겪자 장군은 더큰 희생을 막고자 수색중지 명령을 내리고 시신을 발견하지 못한 채 전사자로 처리 되었다고 한다.
그해 부활절에 밴플리트 장군은 한국전선에서 실종된 군인가족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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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모든 부모님들이 저와같은 심정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아들들은 나라에 대한 의무와 봉사를 다하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벗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내놓은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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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적인 중국 국가 주석 모택동(毛澤東)은 적을 가까이 둘 수 없다고 ‘항미원조’를 명분으로 북한을 도와 참전을 했다.
차남이 정신이상자로 외아들이나 마찬가지인 장남 모안영(毛岸英)이 참전을 하게 되자 측근들이 참전을 만류하였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한다.
“내 아들이 가지 않는다면 아마 인민들은 아무도 거기에 가려고 하지 않을 거야!”
결국 전쟁 초기 참전을 했던 모안영은 미군의 폭격에 의하여 사망을 하였다.
모택동은 늘 이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측근들에게 종종 얘기를 하였다 한다.
우리를 도우러 어딘지 알지도 못하는 머나먼 낯선 땅으로 달려온 미군, 유엔군은 물론 적군인 중공군 중에도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는데 왜 직접 당사국인 우리나라에는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를 찾을 수 없는 것인가? 많이 있는데 내가 못 들은 것인가?
혹시라도 높은 지위에 있는 정치가든 군인이든 자신의 권한을 이용하여 자신의 아들들은 가장 안전한 후방에서 근무하게 빼 돌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도대체 우리나라에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있기나 한 것인가?
만약에 우리나라 명사 고관들 중 전쟁 기간동안 군대에 갈만한 아들이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그런 것이라면 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죽일 놈이고....!
최전선에서 전투 중 죽어가는 병사들이 배경이 없어 죽는다고‘빽’하며 죽었다는 우스갯소리가 하나도 우습지 않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의 관리들은 백성들로 부터 고혈을 짜내는데 혈안이 되어있는 사람이 많았지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여 다산 정약용처럼 백성을 진정으로 위하는 관리는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같이 근무하던 미군들의 답답하리만치 요령없고 바보같은 우직함, 직급이 높은 사람일 수록 보여지는 고지식해 보이는 도덕성은 저절로 존경심이 생겨난다.
실제로 전쟁이 난다면 군인은 군인이니까 내 한목숨 던져서라도 내가 지킬 곳은 지킬 것이라는 신뢰가 가는데 우리 군에서는 덜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나서부터 총알이 날아오는 전선에 서면 감히 맞서지 못하고 숨어 버릴 것 같은 마음 때문인가?
우리에겐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태생적으로 생기질 않는 민족인 것인지?
19. 끝 맺으며
현재도 한국과 미국은 동맹관계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불평등한 동맹관계인 것도 또한 분명하다.
주권국가로서 전시작전권 마저 미군에 있다는 것을 비롯하여 SOFA 협정 등 군사적인 면이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적으로 종속되어있다시피하여 미국은 우리나라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런 면 때문에 미국을 싫어한다는 사람도 많다.
1950년 7월 하순 6.25전쟁 발발 초기에 패주하던 미군에 의하여 저질러진 약 300명의 노근리 피난민 학살 사건은 가슴 아픈 일이다. 내 생각에는 전쟁초기에 계속되는 후퇴로 너무 당황하여 상황을 잘못 판단한 미군 지휘부에 의하여 일어난 사건이라고 생각된다. 또 몇해 전에는 의정부에서 여학생 2명이 미군의 탱크에 깔려 죽은 사건이 일어나서 나라가 요동친 일도 있었다.
혹자는 미군은 한국에 원조를 해 주고 주둔을 함으로 인하여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모든 것을 미국에 의존하도록 하면서 실질적인 경제적 이익도 챙기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깊이 있는 연구를 한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반미주의자들의 말대로 미국은 양의 탈을 쓴 늑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군들(유엔군들도 대부분 그렇지만)이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지구상 어디에 붙어있는지 나라 이름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참전을 했으며 무려 3~5만명의 미군이 전사나 실종을 했다는 것에 대하여는 어쨌든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미주의도 그 때 미군의 희생과 전후의 원조로 살아남아 현재가 있으므로 가능한 것이다.
전국적으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은 전쟁에서 더 이상 죽지않고 살아남은 것이 우리의 힘만으로 가능했던 것인가?
인간의 목숨은 그때나 지금이나 남의 나라 사람이나 우리나라 사람이나 다같이 소중한 것이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죽임을 당한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 같은 것은 나중에라도 진실을 밝혀 실질적 발포 책임자를 찾아내고 그에 대하여 처벌은 언제라도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그사람이 이미 고인이 되었더라도 유죄라는 것을 꼭 밝힐 필요가 있다.)
월남전에서의 우리 한국군의 잘못도 있다면 밝혀서 앞으로 비슷한 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불평등 협정인 SOFA 협정의 개정도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소한 사건에서는 과잉대응은 자제하는 것이 좋겠다. 우리 국민의 목숨만 소중하고 미국 국민 몇만명의 6.25 참전 전사자의 목숨과 수십만명의 부상자들은 아무 가치도 없고 그 가족들은 슬픔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아직도 살아있는 전사자들의 가족도 많고 참전 용사도 많다.
그들을 섭섭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약 미군이 철수를 해 버리면 우리는 북한 보다 더 뒤에 있는 중국으로부터 엄청난 압력과 간섭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고대사(특히 고구려, 발해)를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하여 왜곡하는 이유는 나중에 너희는 원래 중국의 일부인 나라의 후손이니 우리가 관리한다고 나설 것이 분명하다.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종전 후 중국이 미국과 달리 북한에 남지 않고 바로 빠져 나간 것은 미국보고 너희도 빨리 나가라는 무언의 압력으로 본다. 미군만 빠져 나가면 중국은 구태여 북한에 진주하지 않고서도 북한과 우리를 정치, 경제를 모두 종속시켜 미국보다 몇 백배 더한 터무니 없는 요구를 해 올 것이 뻔하다.
나는 중국에 의한 세계 질서가 미국에 의한 세계 질서보다 매우 더 위험하고 우리나라에 피해가 더 클것으로 본다.
반면 또 하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미국의 일본에 대한 태도이다. 지정학적으로 볼 때 분명히 한국이 더 중요한 위치에 있음에도 미국은 한국을 우선시 하지 않는다. 2차대전에 맞서 싸워 서로에게 큰 피해를 입혔건만 미국은 늘 우리보다 일본을 우선하는 정책을 펴왔다.
이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며, 현재 미국 대통령의 천방지축 적인 발언 행태를 보면 그간의 미국 대통령들이 속내를 숨기며 우리에게 우호적인 체 해 왔던 것을 트럼프 대통령이 솔직히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다.
우리가 서로 믿고 소통할 나라가 어디에도 없는 것인가?
우리는 과거 투표를 할 때 뽑아주고 싶은 지도자가 없어 투표장에 가기가 기분좋지 않은 적이 여러번 있었다. 그렇다고 투표를 안하는 것은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 훌륭한 지도자가 없다고 생각하면 덜 나쁜 지도자라도 뽑아야 된다.
국제관계에서의 선택도 마찬가지, 덜 나쁜 국가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내가 겪은 32개월의 KATUSA 생활이 카투사의 일반적인 생활은 아니다. 우리 사회의 직업이 다양한 것처럼 한국군이든 카투사든 군대에서도 보직이 무척 다양하다. 훈련소에서는 다같은 훈련을 받지만 자대 배치가 되면 보직에 따라 모두 다른 일을 하기 때문에 군대에서 남이 하는 일을 모두 알수 없다.
군대다운 진정한 군대는 보병이다. ‘인디언 헤드’패치에 빛나는 2보병사단에 카투사의 절반 정도가 근무하는 것으로 안다. 나는 그들의 생활을 구경조차 한 적 없고 짐작조차 못한다. 나는 통신부대에 근무하면서 또한 통신에 관한 일은 전혀 해 보지 않아서 정작 군대생활 같은 군대생활은 해보지 못하고 자대헌병 2개월을 빼고는 모두 사무 보직의 일만했다.
자대 배치를 받을 때에는 2보병사단에 떨어질까봐 우려를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2보병 사단에 가서 보병 보직을 받아 근무를 했었더라면 몸은 조금 더 고달팠을지 모르나 영어를 더 많이 배웠을 것 같고 좀더 역동적인 추억이 많은 군대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 같다.
몸 편한 군대생활을 했지만 처음 몇개월 동안은 안경을 다섯번이나 깨 먹었다. 얻어맞다가, 운동을 하다가, 일을 하다가, 싸움을 말리다가 등등 뭐 꼭 유리를 깨먹었다기보다 안경테를 부러뜨린 경우가 많다.
얼마전 통일전망대에 갔다가 한국 육군의 구형막사와 신형막사의 모형 전시해 놓은 것을 보았다. 구형막사는 내가 훈련소에서 사용하던 막사와 거의 비슷해서 반가웠다. 신형막사는 옛날 내가 생활하던 미군부대 Barracks보다도 훨씬 더 좋아 보였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사오십년이 흘렀으니 강산이 변해도 네댓번 변했을 것이니 미군부대 또한 엄청난 변화가 있으리라.
이글은 어디까지나 나의 역사로서 기록한 것이지 자랑을 하거나 ‘미군부대는 이런 곳이야!’하고 알려주려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 시대를 반영하는 자잘한 얘기를 최대한 삽입하려고 노력했다.
재미있는 부분만 뽑아 정리하여 올릴까 하다가 그것도 번거롭고 시간이 많이 걸려 전량을 올려 보았다. 읽기에 지루하셨더라도 양해를 바란다!
<끝>
# 상병을 달고 - 저 뒤에 김포공항의 비행기 두대
# 1973년 6월 19일 - 이달의 모범사병 표창장
# 304통신대대 본부중대의 1973년 한국근무 기념앨범 - GI는 돈을 주고 사고, 카투사는 Section Chief일 싸진 앤더슨이 사줌
# 대대본부 건물과 아래 당시의 서울 시청앞 광장 사진
# 대대장 탐슨 중령
# 좌측 중대장 오딘 대위, 우측 중대 인사계 물러헤이 주임상사
# 카투사 피크닉의 한 장면 - 빙고게임 중 - 나의 사수였던 김상병이 번호를 뽑아 부르고 나머지는 빙고판에 마킹하고 있음.
# Supply Room 소속 인원 - 앞 섹션췹 앤더슨 하사, 흑인 그림슬리 일병, 나머지 카투사 김병장, 유이병, 원일병, 나. GI 두명은 외근 중.
# Mess Sergeant 켄튼 중사 - 이 앨범 만들고 얼마 되지 않아 내가 이 사무실로 근무처를 옮겨 이자리에서 근무를 15개월 정도 함.
# 앨범 맨 뒤의 개별 사진 - 내 사진 밑에 해프닝을 벌렸던 별명 'YOGI BEAR'가 선명히 찍혀 있다. 참 사진이 이쁘지 않다. 내가 기분이 별로 였던 시절이라 그런지.....
# 304대대 예하 각 중대 선임하사단 - 김포공항 잔디공원 탑 밑에서
첫댓글 503 이상. 조회수를 기록한 명작입니다.
즐겁게 잘 읽었습니다.
다음 작품을 기대해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저작권은 달빛선생님 소유입니다.
감사! 따지님이 안 읽는 것 같아 안 쓰려다 썼씁니다! -.-+;;
이제 바닥 났어요!!!
달빛 형님!!장편 의 실화를 맛깔 스럽고 생동감있게 집필하여 주심에 감사드림니다
아주 현실감을 을 느끼면서 즐 독 하였습니다...
스마트님께는 명예 카투사 수료증이라도 드려야 할 텐데 직인이 없넹? ㅎㅎ
제 핸폰 전화번호에 스마트님 것이 없습니다. 이 밑에 답글이나 공개가 곤란하시면 ybcamp@daum.net 로 보내주시길!
대단히수고많으셨습니다.저또한군입대해있는듯한느낌적인 느낌^^
지금까지 여군과는 전혀 접촉을 못해봤는데 잘하면 할 뻔도 한 느낌.... ^^
@달빛/김영배 그것이..밥을많이먹어서 쫓겨났을겁니다^^ㅠ
군대가 좋은 게 그런 이유로 내 쫓지는 않습니다. 육군 정량에 나만 더 주진 않으므로 내가 못 견뎌 탈영을 할 수는 있어도..... ㅎㅎ 요즘은 자율배식이라네요! 사실인지는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