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목정 → 살티공소 → 산들바람(통도사앞) → 언양성당→ SS모텔
21.9Km 22.9Km 10.8Km 1.5Km
38. 살티공소 (김영제 묘와 김아가다 묘)
신유박해(1801년)와 기해박해(1839년)를 거치면서
간월, 죽림굴로 숨어들었던 시자들이 경상도 지역에 본격적으로 행해진
경신박해(1860년)와 병인박해(1866년)를 피해 더욱 안전한 곳을 찾다가
모여든 곳이 안살티(현재 청수골 주변)이다.
부산 교구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공소인 살티 공소에
그 묘가 모셔져 있는 병인박해 당시의 순교자 김영제 베드로(1827-1876년)는
일찍이 그 위세가 지방에 크게 떨치던 집안의 후손이었다.
그의 집안이 천주교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조부 김교희 프란치스코
(일명 재권, 1775-1834년)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부는 당시 서울을 왕래하면서 남인파에 속한 선비이자 초대 천주교회의 창설자인
권일신, 정약용 등 양반들과 접촉하면서 천주교 교리를 익히고 함께 영세함으로써
부산 지방 최초의 신자가 되었다.
그의 아들 김상은 야고보(1804-?) 역시
부친의 뜻을 따라 입교해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조부 김교희는 교난을 피해
인근 간월골(현재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로 피신했다.
여기서 김영제는 김상은과 경주 최씨(마리아)의 사이의 2남 2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1839년 기해박해와 1846년 병오박해가 전국을 휩쓸면서
쫓기던 신자들은 영남 지방에까지 밀려왔다.
이때 김상은 야고보는 지방 관리들의 횡포와 고발, 재산 탈취,
집안 어른들의 배교 강요를 견디다 못해 간월을 떠나 경상북도의 자인골,
청도의 정자동, 월성군 탑곡 등을 전전하며 피해 다니다 박해의 칼날이 무디어진
1850년 12월 다시 간월의 불당골로 돌아왔다.
간월로 돌아온 김영제는 부산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당시 경상도 지방을 담당한
다블뤼(Daveluy) 안토니오 신부 및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맞이해
공소를 설립하고 1858년에는 공소 건물을 짓기도 했다.
당시 간월골에는 경기·충청 ·전라도 등지에서 박해를 피해 온
많은 신자들이 모여 교우촌을 이루었다.
울산 장대에서 순교한 후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된 허인백 야고보, 김종륜 루카,
이양등 베드로 등도 이 지방에서 살다가 붙잡혔다.
1860년 경신박해로 김영제는 부친과 여동생 김 아가타를 비롯한
많은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경주부로 이송되었다.
하지만 이 박해는 조정과 무관하게 지방 관리들이 사사로이 일으킨 것으로
조정의 반대와 당사자들의 파면 등으로 9개월 만에 그치고
대부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김영제만은 중죄인으로 분류되어
대구 감영을 거쳐 한양으로 압송되었다가 풀려났다.
결국 경신박해의 여파로 인해 신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공소도 불태워져 없어졌다.
게다가 1866년 병인박해의 화가 전국에 미치고 무진박해가 경상도 지역을 휩쓴
1868년 7월 김영제는 또다시 체포되고 이때 간월, 대재 등지에 숨어 살던
많은 신자들이 잡혀가게 되어 간월 공소는 물론
1840년경 형성된 대재 공소도 함께 소멸되었다.
김영제가 잡히면서 집은 불태워지고 가산은 몰수됐으며
가족들은 또다시 흩어지고 말았다.
그는 경주부로 이송되어 그곳 감옥에서 허인백 등 울산의 순교자 세 사람을 만나
순교하기를 결의했으나 이들 세 사람만 울산으로 이송되어 순교했고
김영제는 중죄인으로 분류되어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대구에서 그는 전교 신부들의 행방을 묻는 관리들로부터
극심한 고문과 문초를 당했다.
이때 받은 고문으로 종지뼈가 으스러져 불구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끝까지 굳건하게 믿을 지켜 한양까지 이송되었다가 다행히도 1869년 봄,
마침 나라에 경사가 있어 특별히 사면되어 죽지 않고 9개월 만에 풀려났다.
고향으로 돌아온 김영제는 피신한 가족들을 수소문해 의령 남씨 등이 피신한
안살티에 정착한 후 여기서 다시 살티 공소를 설립해 회장직을 맡기도 했으며
박해가 뜸해지면서 논밭을 일굴 수 있는 평지를 찾아
현재의 살티로 옮겨 와 살게 되었다.
하지만 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이 전신으로 퍼지고 상처 부위에서는
항시 피고름이 흘러 한겨울에도 바지를 걷고 진물을 받아 내야 하는
고통 속에 살다가 그는 결국 1876년 1월 24일 숨을 거두었다.
이처럼 고문으로 인해 생긴 병이 악화되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을
교회에서는 ‘장하 순교’(杖下殉敎)라 일컫는다.
이렇듯 순교자 김영제는 양반 가문으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신분이었으나
오직 천주를 따르겠다는 굳은 신앙 하나로
세상의 안위를 버리고 순교의 가시밭길을 걸어갔던 것이다.
현재 살티 공소에서 500여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김영제의 묘소는
1981년 11월 언양 성당 신자들이 정성을 모아 말끔하게 단장하고 기념비를 세웠다.
1994년 4월 2일 부산교회사연구소 주관으로
서북쪽으로 약 18m 지점인 현재의 위치로 유해를 이장하고,
울산 본당 신자들의 후원금을 모아 분묘를 재단장하고 순교비를 건립하는 동시에
십자가, 제대, 예수 성심상, 성모상, 성지 표지석 등을 세웠다.
그리고 2008년 3월 4일 간월에 있던 여동생 김 아가타의 묘도
김영제 묘 옆으로 이장하여 그해 9월 29일 축복식을 가졌다.
나란히 자리한 남매 묘소 우측에 있는 가족묘 상단에는
부친 김상은과 모친 최 마리아의 묘도 있다.
살티공소에서 500여미터 떨어진 김영제와 김 아가다 묘를 찾지 못해 30분을 헤맸다.
살티공소와 묘소의 화살표는 있는데 살티공소 화살표는 계속 있지만
묘소의 화살표는 도중에 없어진 것이다.
다른 순례객 2팀도 있었지만 우리처럼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주민에게 겨우 물어서 자동차길로 나가 겨우 묘소를 찾았다.
묘소에서 살티공소로 표시된 화살표를 보고 걸으니 살티공소가 나왔다.
그래서 자세히 살펴보니 집 담벼락에 화살표를 표시했던 안내판이
떨어져나간 흔적이 보였다.
그 표지판이 없어서 결국은 묘소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계속되는 길찾기의 시행착오를 겪는 오늘이다.
산들바람(점심)
아내가 오래 전부터 즐겨시청하던 유튜브 채널 산들바람 주방장을 만나고
직접 음식을 먹고 싶어 1시에 예약을 했지만,
일요일 단풍나들이 인파를 예상하지 못해 도로에서 시간을 까먹어
예약시간을 계속 미루었다.(1시 → 2시 →3시)
늦어도 3시까지는 와야한다는 업소측의 요구(3시부터 종업원 휴식)에도
부응하지 못해 사정을 해서 겨우 3시 30분 경에 업소에 도착했다.
통도사를 100미터 남겨두고는 아예 차가 움직이지를 않아
아내는 차에서 내려 뛰다시피 업소에 간 것이다.
허기도 지고 차에서 받은 스트레스로 식욕도 나지 않았다.
막걸리를 한 잔 하고 나니 조금 안정이 되어 민어조기 정식을 시켰다.
밥을 먹고나서 오늘 일정 중 죽림굴을 내일로 미루고
아내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했던 주방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도 함께 찍었다.
39. 언양성당
부산교구 유일한 석조고딕성당
언양 성당은 교구 내 가장 오래된 성당이며 인근 울산 장대를 비롯하여
순교 선열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순교자 후손들의 본거지다.
전국적 성소의 온상지로 70여 명의 성직자와 수도자,
20여 명의 동정녀를 배출시켰으며 교구 내 가장 많은 공소를 둔 본당이다.
언양 성당은 1888년 조선대목구 시절에 이미 본당 설립 위원회를 결성하였으나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본당 설립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절영도에 부산의 첫 본당이 설립되었다.
그러다가 1927년 당시 대구대목구 소속으로 있으면서 보드뱅
(Beaudevin, 丁道平, 1897~1976, 에밀) 신부를 본당 신부로 하여
현 부산교구에서 두 번째로 본당이 설립되었다.
구전에 의하면, 언양 지역의 첫 신앙 공동체는
이 지역 출신 오한우(1760~1801, 베드로)가 1790년에 영세한 뒤
1801년 신유박해 때 충청도 지역에서 관헌에게 체포되어
피안 살수형(백지사)으로 치명하였으며, 오한우와 같이 영세한
그의 육촌 매제인 김교희(일명 재권?, 1775~1834, 프란치스코)가 박해를 피해
내간월 불당골(현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로 숨어들어 교우촌을 형성하였고,
그리하여 언양 지역에는 이미 1800년대 초에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문헌 자료에 의하면 언양 지방에 처음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아마 1801년 이 지역으로 유배를 온
강이문으로부터 전교를 받은 것으로 추측되는
오치문(1804~1861, 오한우의 손자)에 의해서 인 듯하다.
이후 박해 시대인 1850년 경 부터는 번창한 신자촌으로 성장하였다.
언양 지역의 교우촌들은 병인박해 때 심한 타격을 입었다.
문헌상으로 나타나는 이 지역 최초의 순교자는
김사집(1845~1867, 필립보 또는 베드로)으로,
그는 1866년 11월 진영 포졸에게 체포되어 이듬해 5월(음)에 순교하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 23세였다. 이어 언양 대재[竹嶺] 교우촌에 살던
허인백(許仁伯, 1822~1868, 야고보), 김종륜(金宗倫, 1819~1868, 루카),
이양등(李陽登, ?~1868, 베드로) 등 3명이
1868년 9월 14일(양)에 체포되어 울산 장대에서 순교하였다.
박해가 끝난 뒤 교우촌이 재건되면서 1882년 대구(현 계산동) 본당의 주임으로
경상도 지역을 담당하게 된 로베르(Robert, 金保祿, 1853~1922, 바오로) 신부가
1883년에 살티 공소를 설립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언양읍 공소도 설립되었다.
1904년에는 순정 공소가 설립되었으며, 이 세 공소의 신자 수는 153명에 달하였다.
이 지역 신자들의 노력에 힘입어 1927년 5월 25일 언양 본당이 설립되고
초대 주임으로 보드뱅(Beaudevin, 丁道平, 1897~?, 에밀) 신부가 부임하였다.
1936년 10월 25일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하고
드망즈 주교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전국적 성소의 온상지로 70여 명의 성직자와 수도자,
20여 명의 동정녀를 배출시켰다.
그리하여 대주교 1명, 주교 1명, 수도회 관구장 2명이 배출 되었고,
또한 교구 내 가장 많은 16개 공소를 둔 본당으로
순교 선열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중심지가 되었다.
오늘 5일차 여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어제 천사 루시아 자매를 만나 숙소를 해결하여 130,000원 짜리 호텔을 취소하고
2일 예정이던 대구 성지를 하루에 끝낼 수 있었다.
전주에서 하루를 벌고, 대구에서 하루를 벌어 이틀의 여유가 생겼다.
이제부터는 중간에 관광도 할 요량으로 오늘은 20여년 만에 석굴암을 가기로 했다.
경주관아와 옥터를 순례한 후 석굴암으로 향했는데 이것이 첫번째 실수였다.
일요일 관광객이 너무 많아 불국사 입구부터 석굴암 올라가는 길이
흡사 주차장같아서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30여분 지체하다 포기하고 중앙선을 침범하며 U턴하여 내려왔다.
경주관아에서 출발한 것보다 1시간을 길에서 까먹은 것이다.
아내는 요리 유튜브 채널에서 본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자고 했다.
시간상으로 1시경에 도착할 것 같아 예약을 했다.
그런데 진목정을 거쳐 살티공소를 가는 도중 석남사를 거치는 길에서
또 암초를 만났다. 단풍으로 유명한 석남사를 1Km를 앞두고 차들이
거의 움직이지를 않아 그곳을 지나는데 1시간이 지체되었다.
그 이후에도 길 양옆으로 차를 주차시켜 놓아 길이 온통 주차장이었다.
아내는 예약시간인 오후 1시를 전화로 계속 변경했다.
통도사 앞에 있는 산들바람은 오후 3시면 휴식시간이라
손님을 받을 수 없다고 하며 3시까지는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런데 2시에서 3시로 변경하면서 제주도에서 왔는데 배려해 달라며
통사정을 하였는데 또 통도사를 500미터 앞두고는 아예 차가 움직이지 않았다.
3시가 넘자 아내는 통도사 100미터를 앞두고 내려서 걸어갔고
나는 역주행을 하면서 겨우 식당앞에 차를 주차했다.
교통경찰의 통제가 되지않아 통도사 앞 도로는 5방향에서 오는 차들이
뒤엉켜 흡사 실타래가 엉킨듯 풀수 없는 상황이었다.
제주에서 한적한 길을 운전하다가 오늘 겪는 도로상황은
서로 교통지옥을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 역시 그 무리의 한 인간이 되고 만 순간이었다.
겨우 3시 반에 도착해 배가 고프다 못해 허기진 몸으로
주방장(유튜브 채널 운영자)이자 실제 간판스타인
김숙희 주방장(아내 이름과 같음)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차려내 온 점심겸 저녁을 먹었다.
종업원들이 쉬는 시간이라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그토록 좋아하는 주방장을 불러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기념사진을 찍고 판매하는 몇 가지(된장,젓갈 )를 구입했다.
죽림굴은 내일로 순례를 미루고 숙소가 있는 언양성당을 둘러보고
숙소로 향했다. 너무나 피곤한 하루였지만 언양에 온 이상
언양불고기는 맛 보아야 할 것같아 음식점으로 가서
안주삼아 술 한 잔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숙소 SS모텔(60,000원)
첫댓글 피곤하실텐데...푹욱 쉬세요.감사를 드립니다^^
행복한 동행,성지순례,참 두분 행복해보여요.
아,참 두분 미소가 닮았어요
늘 건강하세요
두 분 함께 하시니 보기에도 참 좋습니다.
저도 옆지기에게 살짝 보여주곤 한답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산티아고 까미노는 혼자걷는 것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 좋아 보였는데
부부가 함께 하는 것도 좋은 점이 있네요.
운전도 나누어 할 수 있고, 사진도 찍어주고 길 안내도 도와주는 등
특히 점심에도 술 한잔 할 수 있어서 더욱 좋습니다.
그래서 오전 운전은 내가 하고 오후는 아내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