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남준아트센터. 지하철 분당선 기흥역에서 내려 버스 두 정유장정도 거리에 있음.
백남준아트센터의 건립은 백남준과 경기도 사이에 2001년부터 논의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라는 주제로 건립이 추진되었고, 2003년 430여 명이 참여한 국제 공모전에서 대상을 차지한 젊은 독일 건축가 크리스텐 셰멜과 독일 KSMS 셰멜 스탄코빅 건축사무소의 마리나 스탄코빅과 공동으로 디자인했다.
백남준아트센터 건물은 여러 겹으로 만들어진 거울이 특징적이다. 총 5,600㎡의 부지에 지상 3층, 지하 2층 건물이 들어서 있다. 주요 시설로는 전시실, 비디오 보관실, 다목적 공간 등이 있다. 여러 전시시설을 통해 백남준의 작품 세계를 중심으로 한 상설전과 동시대 예술의 논쟁적 이슈를 중심으로 한 정기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백남준의 작품 분석과 다양한 해석을 제공하는 워크숍, 세미나, 대담 등과 출판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백남준로 10에 있다.
# TV 정원.
백남준은 데뷔 초기에서부터 지금까지 텔레비전의 대중 지배에 대한 역기능을 놓고 예술적 해석을 함으로써 비디오 예술의 시조가 되었다.
1950년대에 존 케이지라는 세계적인 현대음악 작곡가가 있었다.
백남준은 그를 스승이라 불렀으며 그는
“당장 죽게 된다면 백남준의 재담을 못듣는 것이 가장 아쉽다”
라고 말할 정도로 백남준과는 절친한 사이였다.
1959년 독일의 쾰른에서 백남준은 “존 케이지에게 경의를” 이라는
퍼포먼스를 발표하면서 피아노 2대를 부수고 일약 대 스타가 되었다.
"물고기 하늘을 날다"
백남준 1932. 서울 출생
대부호의 3남 2녀 중 막내로,
어려서 피아노를 배워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백남준의 가장 큰 출세작은 1984년 1월 1일, 미국과 프랑스의 공중파를 통해 방영된
생방송 작품,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다.
이 방송은 미국, 프랑스 뿐만 아니라 전세게 곳곳에 방영됐는데,
조지 오웰의 [1984] 소설을 풍자한 이 작품은 1984년에도 아직도 지구인들이 건강히
지내고 있을 뿐 아니라 TV를 통해서도 그 어떤 지배나 독재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어린 시절 독일 유학 시절
6·25사변이 터지자 그의 집안은 모두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는데,
상경대에 진학하라는 부친을 속여가며 동경대 미대에 진학했다.
그는 도쿄대학에서 총명한 학생으로 정평이 나 있었으며 주로 음악과
철학 서적을 읽었다.
일본 도쿄대학을 졸업할 즈음,백남준은 당시 현대 음악의 메카로
알려져 있던 독일로 유학하여 58년에는존 케이지와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그의 예술 인생은 큰 전환을 이룩하게 되었다.
"완전 피아노"
존 케이지는 서양 음악의 고정 관념에대하여 반기를 든 가장 적극적인
전위 음악가이며,백남준이 서양의 전통악기인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때려부수면서 행위 음악을 전개시키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62년 백남준은 자신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을 만나게 된다.
독일 뒤셀도르프의 어느 공연장에서 바이올린을 부수는 퍼포먼스를 하였는데,
그 곳에서 플럭서스 그룹을 창시한 요셉 보이즈을 만난다.
이들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가까워진 것은요셉 보이즈가 백남준의 첫 전시에
느닷없이 개입하고 난 뒤부터였다.백남준과 요셉 보이즈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 퍼포먼스를 함께 하였으며 특히 요셉 보이즈 신화의 대부분에
백남준이 함께했다.
그 후 뉴욕으로 건너 간 백남준은 전위 음악가이자 플럭서스 예술가인 샬로트 무어만과
'괴짜들'을 공연한다.
유태인인 샬롯 무어만은 헌신적이고도 열정적인 도움으로 백남준에게 매우 큰 정신적인
동반자가 되어주었다
동시 변조" 뉴욕 "구겐하임" 전시
백남준은 데뷔 초기에서부터 지금까지 텔레비전의 대중 지배에 대한 역기능을 예술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비디오 예술의 선구자가 된 것이다.
그가 개발한 비디오 기술들 중 특히 자석을 이용하여 텔레비전의 이미지를 뒤틀리게 하면서 예술적으로 바꾸었던 시도는 후배 비디오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일본인 전위 예술가 쿠보타 시게코와 결혼하여 서로가 예술의 동반자로서의
삶을 영위하며,소위 재벌 집안에 태어나 세계적인 예술가의 반열에 올라섰지만,
백남준은 미술가의 길을 택한 뒤 단 한번도 풍족한 삶을 누리지 못했다.
오히려 미술 활동과 생계를 위해 가족들에게 돈을 꾸어야 했으며, 돈을 빌리기가
어려워 전시회를 열지 못할 위기를 겪기도 했다 한다.
항상 허름한 노숙자 옷차림을 하고 다니는 바람에 약속 장소에서 쫓겨나거나 길에서 적선을 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
플럭서스 작가들 작품이 오늘날 수천 수 억원을 호가하는데 반해,
백남준은 "작품은 그냥 작품으로써 끝날 뿐 거기에 금전적인 가치가 붙는 것을
용납치 않는다" 는 그의 예술 철학때문인지도 모른다.
"백악관"에서의 퍼포먼스 보티첼리의 비너스를 닮은 몸에 힐러리 상원의원
(기천달러밖에 안들었다며, 원래는 마돈나로 하려
했는데 조수가 힐러리로 하자 해서 바꿨다 함)의
얼굴이 달린 거대한 풍선이 설치돼 있다.
조만간 이를 맨해튼 상공에 띄울 예정이라 한다.
이들은 관념적 예술 형식을 버리고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예술의 이름으로
시도하였으며 신체적인 밀착 공연을 벌인 것은 물론 심지어 외설적 공연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어 재판까지 받는 등 스캔들도 일으켰다.
당시 뉴욕 예술계는 예술과 외설 시비에 대한 차별성 및 예술적 표현 자유의
확보를 위하여 이 들의 재판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그 결과 외설과 예술의 표현 자유는 다르다는 최종 판결을 발표하게 되었으며
이들은 영웅이 되었다
그는 참여와 소통을 전제로 하지 않는 예술적 실천은 예술의 독재, 또는 독백
예술로 간주하였 으므로 관객이 다양한 방법으로 작품에 관계하고 함께 즐길
수 있는 차원으로 발전시켰다.
예술 작품에서 심각한 사상이나 철학을 배제하고, 오직 예술가 자신의 재미와
변덕, 즉흥성에 의해 작품을 창조하며, 서양 전통 사상이나 예술에 철저하게
저항한 인물로, 오직 자기 중심적인 아이디어에서 작품을 생산한다.
======백남준선생의 예술작품 세계 이해를 돕기 위하여 퍼온글=====
첫댓글 백남준의 예술의세계를 감상 잘 했습니다
풍산 수고가 많았습니다
백남준의 내력과 그의 작품들 잘 봤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작품들...
우선은 누군가 보라고 만들어진 것...
해석도 느낌도 보는 사람 각각 중심적으로...
좋은 문화 산책 잘 했습니다...
예술작품의 상거래를 용납치 않았던 위대한 예술가...
오늘날 예술작품을 치부의 수단으로 여기는 세태가 정말 부끄럽군요
유병언의 엉터리 사진이 수억원에 팔린 것도 다 이런 세태를 반영한다고 해야겠지요
청백예술인 백남준에 대한 평가는 훗날 두고 두고 빛을 발할 겁니다.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