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레자연학교가 시작된 후에 거친 학생들, 마음대로 살아 온 학생들의 규율을 어떻게 세워 갈 것인가에 대하여 교사들의 고민이 깊었습니다. 전교생이 기숙사에서 지나기에 남자 기숙사와 여자 기숙사 사이에 잘못 오고가는 일이 일어날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기숙사에 2층은 여학생들의 숙소이고 3층은 남학생들의 숙소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남녀 기숙사에서 오고가는 일이 빈번하기에 저녁 9시 이후에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자는 방안을 세워 광고하고는 9시 이후는 3층의 남학생들이 2층 여학생 방에 드나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교사가 복도에서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기숙사 전체가 조용하여지고 질서가 잡히기에 학생들이 잘 따르는구나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학생들 중에 침대 홑이불로 밧줄을 만들어 창문에 달고는 2층으로 내려가는 것을 모르고 선생님은 복도에서 앉아 졸고 있었습니다. 그런 정도였던 학생들이 선생님들이 형님처럼, 부모처럼, 함께 운동하고, 함께 식사하고, 열성을 다하여 가르치니 질서가 잡혀 나갔습니다. 3년 후 첫 졸업식이 있는 날 졸업식장이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한 학생이 〈우리가 선생님들을 왜 그렇게나 괴롭혔을까〉 〈부모님 속을 왜 그렇게 썩혔을까〉를 후회하며 흐느껴 울기 시작하니 학생들 모두가 울음바다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니 선생님들도 울고, 졸업식에 참여한 부모님들도 울고, 설교하러 단상에 올라간 나도 울었습니다. 그런 졸업식을 치르고서 나는 힘들여 학교를 세운 보람을 느꼈습니다. 내 생애에서 최고로 잘한 일이란 긍지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학교가 시작되고 2년 쯤 지난 어느 날 대구에서 고등학교 2학년에서 퇴학당한 학생이 찾아왔습니다. 대구에서 두레마을을 잘 아는 어느 교수님의 추천서를 지니고 왔습니다. 사정을 들으니 퇴학당할 만도 했습니다. 선생님을 머리로 들이받아 이빨 4개를 부러뜨린 일로 퇴학당하였던 것입니다. 나는 기가 죽은 자세로 내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있는 그가 측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저 그를 위로하는 말로 대화를 시작하였습니다.
〈너 참 고생 많았다. 선생님께 맞기가 쉽지 때리기가 쉽겠냐. 모르긴 하지만 선생님이 너 자존심을 무지하게 짓밟아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들이박은 거지? 그러니라고 얼마나 힘들었겠냐!〉
하고 위로하는 말을 하였더니 생각 외로 그가 눈물을 훔치며 답하였습니다.
〈목사님, 그렇게 말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그간에 정말로 힘들었습니다.〉 그의 눈물을 보고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이 학생은 장래성이 있겠구나. 두레학교에 적합한 학생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두천 두레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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