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스러운 사람, 최고의 예술가, 그리고 저는 사진 찍혔던 사람들 중 가장 아름다운 사람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깨닫기 시작한 것처럼,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광대이기도 합니다.
오손 웰즈
버스터 키튼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배우중 하나이자 역대 최초, 최고의 코믹 액션스타
버스터 키튼은 찰리 채플린, 해럴드 로이드, 메리 픽포드, 릴리안 기시, 그레타 가르보와 함께 무성영화를 이끌던 전설이자 스턴트 액션의 대가이자 대부이며 또한 영화사에서 명감독, 명배우를 논할 때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가장 위대한 영화인 중 한 명입니다.
1920년대 무성영화의 전성기 시절 그 시절 배우들처럼 보드빌(Vaudeville) 출신인 부모 밑에서 세 살 때부터 무대에 섰고, 영화계에 입문해서는 각본도 쓰고, 배우도 하고, 영화감독까지 맡은 다재다능한 재능이었습니다.
그는 무모한 스턴트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주위에서 만류할 정도로 위험한 곡예 연기를 별다른 안전장치 없이 해냈는데 정밀검진 결과 목 부위의 골절이 발견되었고 수년 동안 별 통증을 못 느꼈다고 말해 주변 사람들을 놀랍게 했는데 곡예 수준에서 몸을 사물화하고 대상화함으로써 희극영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요컨대 물리적인 운동의 차원에서 몸 개그의 원형을 창조했습니다.
그의 코믹 연기 스타일은 침착하고 쿨한 태도와 끊임없는 상황 변화에 대한 순수한 반응에 중점을 두었으며 자신이 위대한 영화들을 만들었던 당시인 1920년대보다 오늘날 훨씬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영상 <Best of Buster Keaton's Stunts>
불세출 영화인의 탄생과 그의 가족
영화가 탄생한 해인 1895년 10월 4일 미국 캔사스주 피구아(Piqua)에서 태어난 버스터 키튼은 약장수들이 소비자를 끌어모으기 위해 벌이는 일명 '메디슨 쇼'의 공연자인 조셉 핼리 키튼과 미라 커틀러 키튼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조셉 프랭크 키튼(Joseph Frank Keaton)이며 키튼 가족과 함께 그의 이름을 지은 것은 버스터의 대부모들이자 탈출 예술가 해리 후디니와 그의 아내였는데 후디니는 생후 6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은 꼬마 버스터가 계단에서 거의 다치지 않은 채 미끄러져서 바닥에 도착하는 것을 보았고 "자네 아들 참 기막히게 하는군!"이라고 외쳤고 이후 ‘건강하고 씩씩한 사내아이’라는 뜻의 버스터(buster)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는 생후 9개월의 나이에 날개 위에서 기어오르며 무대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고 세살도 채 안 되었을 때, 이러한 관객들의 기쁨과 아버지의 기대를 받는 모습에서 버스터 키튼에게 쇼 비즈니스는 숙명적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키튼은 생후 18개월부터 가족들과 함께 보드빌 공연을 했는데 주변 사람들이 아동 학대로 부모를 신고할 정도로 어린 나이부터 위험한 슬랩스틱 연기를 천연덕스럽게 했고 4살이 될 무렵 그는 키튼 가족들에게 중요한 기회인 뉴욕의 전설적인 쇼맨 토니 패스터의 아버지와 함께 오디션을 봤는데 아버지는 고용되었지만, 버스터는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제외되었고 버스터는 방송에서 제외된 것에 울었다고 합니다.
그의 공식적인 프로 데뷔는 1900년 10월 17일 수요일, 델라웨어주 윌밍턴에 있는 독스테이더 극장이었고 41년 후, 키튼이 할리우드의 전설로 여겨졌을 때, 윌밍턴의 한 신문은 그 인상적인 데뷔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습니다.
"대머리 공포 가발, 턱수염, 커트어웨이 코트, 헐렁한 바지, 슬랩슈즈를 신은 그의 아버지 버스터의 모습을 보면, 나중에 오케스트라가 '안빌 합창단'을 연주할 때, 아버지는 키튼은 빗자루로 아이를 때렸다. 아이도 아버지와 어머니를 흉내내려고 애썼고 쓰러질 때마다 모든 소년다운 품위를 다 갖추고 옷을 털고 '떨어져서 정말 미안하다'고 매우 진지하게 사과했다. 옛날 윌밍턴인들 사이에서도 오늘날까지 들리는, 마을에 관한 개그 중의 하나가 되려 하고 있었다."
이 기사는 계속해서 이 극장의 주인인 윌리엄 독스테이더가 "아이의 능력과 인기에 너무 감명을 받아, 부모가 공연뿐만 아니라 저녁 공연에도 출연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그의 서비스에 10달러를 더 지불하겠다고 제안했다"고 말합니다.
키튼은 당시 공연하는 다른 배우들의 모든 연기들을 관찰하며 모든 것을 흡수했고 이는 당시의 미국 극장이 관객들에게 제공하는 것들을 흡수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였습니다. 키튼은 17년 동안 대부분 자신보다 어른인 친구를 사귀었는데, 그 동안 그는, 조, 미라, 그리고 동생 해리("징글스")와 누이 루이스와 함께 보드빌 서킷을 여행하며, 미국 최고의 연예인들과 어울렸고 길에서 버스터는 아버지의 하우스 파트너일 뿐만 아니라 노래, 춤, 피아노와 우쿨렐레, 저글링, 마술, 개그, 패러디 등을 배웠는데 그의 영화에서 버스터 키튼은 종종 어린 시절의 연극을 언급하거나 어렸을 때 배운 다양한 기술을 활용함으로써 이러한 어린 시절의 연극적 기억을 환기하곤 했습니다.
키튼을 무대에 계속 서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그의 부모님은 야만적인 무대 행위에서 아동 학대를 당하는 아들에 대해 변호해 달라는 요청을 끊임없이 받았는데 키튼은 "우리는 격주로 체포되곤 했다. 한 번은 그들이 나를 뉴욕 시장, 그의 개인 사무실, 도시의 의사들과 함께 데려갔는데, 그들은 나에게 부러진 뼈와 타박상을 검사하기 위해 옷을 벗겼다.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자 시장은 나에게 일을 허락했다. 그 다음해, 그 일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나를 알바니로, 주지사에게 보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적어도 어린 시절에는 버스터를 학대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아버지 조 키튼은 아들의 성공을 자랑스러워했으며 키튼의 가족은 버스터를 위한 작지만 완전한 기능을 갖춘 자동차와 온 가족을 위해 미시간주 무스케곤의 쾌적한 공동체에 있는 여름 별장을 살 수 있을 만큼 부유해졌습니다.
버스터가 인정받는 보드빌 스타로 자리매김했던 1917년부터 버스터의 아버지는 점차 위험하고 폭력적인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가고 있었는데 가족들은 조 키튼의 음주로 인해 버스터 키튼이 스스로 생계를 꾸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인정했으며 결국, 그와 그의 어머니가 충분히 재산을 갖춘 1917년 1월에 키튼은 가족 쇼에 출연하는 것을 그만두었고 알코올 중독인 그의 아버지는 캘리포니아에 일시적으로 발이 묶이게 되었습니다.
영화인으로서의 시작 그리고 그의 영원한 멘토이자 벗 로스코 아버클
키튼은 네 살 때부터 그의 부모와 함께 무대에서 연기를 했는데, 그들은 ‘세 명의 키튼(The Three Keatons)’이라고 불렸고 그들의 터프한 신체적인 개그는 그 지역에서 꽤나 유명했는데 보드빌에서 몇 년을 보내다가 아버지의 알코올 의존도가 높아지는 바람에 해체를 하고, 키튼 홀로 쇼 비즈니스(show business)계로 뛰어들었고 이때 그의 나이 21세였습니다.
키튼은 새 일자리를 알아보던 중 1917년 당대 유명 코미디언 로스코 '패티' 아버클(1887~1933)의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함으로써 영화계에 데뷔하는데 로스코 아버클은 키스톤 영화사에서 자신의 사촌 동생이자 롱 다리를 이용한 다리 찢기로 유명한 코미디언인 알 세인트 존(1892~1963)과 콤비로 활동하면서 미국 내에서 높은 인기를 얻었고, 찰리 채플린의 코미디 영화 스승이기도 했던 인물입니다.
이 무렵의 아버클은 20세기 폭스사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인 조셉 스켕크(Joseph M. Schenck)와 계약을 체결하면서 코미디언 최초로 자신의 개인 스튜디오를 설립한 상태였는데 우연히 키튼의 슬랩스틱 연기에 반했고 키튼은 아버클과의 첫 미팅 때 아버클에게 영화 카메라 한 대를 빌려 달라고 부탁, 밤을 새워가면서 카메라의 작동 원리와 자신이 카메라에 찍히면 어떻게 보일지 등을 연구했다고 합니다.
키튼은 같은 날 아버클의 첫 영화 <푸줏간 소년 (The Butcher Boy, 1917)>에 출연했는데, 리테이크 없이 촬영된 장면들이 주목할 만한 영화 데뷔작이었고 이후 아버클과 키튼은 '재치있는 뚱보와 어벙한 홀쭉이' 기믹으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단 세 편의 영화를 만든 후, 그는 아버클의 조감독이 되었고, 곧 아버클의 전체 메인 스태프가 되었고 키튼의 기여는 거의 즉각적으로 눈에 띄는데, 그의 섬세하고 세련된 유머는 아버클 스타일의 더 넓은 슬랩스틱에서 두드러집니다.
이후 <러프 하우스 (The Rough House, 1917)>를 비롯해서
<결혼첫날밤 (His Wedding Night)>과
<허튼소리 (Moonshine)), 그리고
<차고 (The Garage, 1920)>에 이르기까지
1920년 아버클과 조셉 스켕크의 지원하에 키튼은 <바보>라는 정극 영화에 출연하며 단독 주연으로 데뷔하게 되고 채플린이 퍼스트 네셔널에서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로 이적하면서 퍼스트 내셔널의 개인 스튜디오를 버스터 키튼에게 넘겨주었고 이 시기에 그는 3년 동안 19편에 달하는 많은 단편들을 만드는 동안, 스스로 감독 및 주연을 맡은 단편 <일주일>을 시작으로 감독, 각본, 주연을 도맡아하며 감각적인 카메라워크, 시대가 무색한 편집이 돋보이는 수많은 걸작들을 탄생시키는데
에드워드 클라인(Edward F. Cline) 감독과 함께 <일주일>(One Week, 1920)을 비롯해서
<이웃>(Neighbors, 1920),
<유령 들린 집>(The Haunted House, 1921),
<불운>(Hard Luck, 1921),
<보트>(The Boat, 1921),
<경찰>(Cops, 1922),
그리고 <내 아내의 인간관계>(My Wife's Relations, 1922) 등은 초기 무성코미디 영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걸작들입니다.
그의 멘토로 여겨졌던 아버클과의 친밀한 우정은 1922년 아버클의 경력을 무너뜨리는 비극적인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1933년 아버클의 갑작스러운 죽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키튼은 어린 시절부터 연기 스턴트에 필요한 힘과 기술을 체득했고 정서적 반향이나 도덕적 감화보다는 영화라는 기계장치의 특성을 드러내어 그것으로부터 웃음과 페이소스를 만들어내는 데 몰두했으며 카메라 워크와 스토리 구성을 연구하며 자신의 영화 세계를 구축했고 배우 및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축적하게 됩니다.
이렇듯, 스턴트 때문에 갖가지 부상들에 시달렸지만 키튼은 '위대한 무표정 The Great Stone Face'라는 별명까지 생길 정도로 그다지 내색을 하지 않았고 실제로 영화 속 키튼도 항상 무표정이며 정말 절대로 웃거나 울지 않습니다.
깜짝 놀랄 만한 일이 생기면 잠깐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올려보고는 그만. 위에서 말했던 아버클 시기 단편들에선 과장된 연기를 주로 선보였지만, 어린 시절 선보였던 보드빌 쇼에서 배운 "내가 무표정이면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이 웃는다" 라는 일종의 공식을 떠올려 단독 주연으로 데뷔할 때부터 무표정을 콘셉트으로 삼았다고 하며 그의 무표정 속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들이 많아 채플린만의 감성적이고 다채로운 얼굴 표정과 주로 비교됩니다.
‘광풍에 쓸려 다니는 사람’, ‘넘어지는 주택’, 방’해만 되는 아내의 도움’ 등은 그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특징이며 그의 독특한 표현 기법은 오늘 날 웨스 앤더슨, 성룡, 빌 머레이의 영화에서 오마주되기도 했습니다.
버스터 키튼의 영화 기법을 현대에 조명한 영상 <The Art of the Gag>
무성 영화 시대의 두 거장 버스터 키튼 VS 찰리 채플린
버스터 키튼은 찰리 채플린(Charles Chaplin)과 쌍벽(雙璧)을 이루면서 무성영화 시대를 이끌었던 영화사의 거인(巨人)이며 육체의 움직임 속에서 희극적 재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영화화하는데 성공을 한 최초의 감독입니다.
영화평론가 김시무에 따르면, "키튼의 영화가 채플린의 그것과 다른 점은 그가 몸(신체)의 역동적인 운동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라고 한다. 예컨대 키튼은 일련의 영화들에서 마치 기계처럼 움직이면서 어떠한 장애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심의 거리와 들판을 전속력으로 질주한다. 그는 <셜록 주니어>(Sherlock Jr., 1924), <일곱 번의 기회>(Seven chance, 1925), 그리고 <카메라맨>(The Camera man, 1928) 등과 같은 영화들에서 항상 전속력으로 질주한다. 특히 <카메라맨>에서 키튼이 연인의 전화를 애타게 기다리다 전화벨이 울리면 옥상에서 아래층으로 매우 빠른 속도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반복적 운동은 그 단적인 예입니다.
앤드루 새리스(Andrew Sarris)는 『미국영화: 감독과 연출』(The American Cinema: Directors and Directions 1929-1968)에서 “키튼을 탁월한 감독이자 시각형식의 발명가(inventor of visual forms)”라고 전제하고, “채플린이 본질적으로 연극적인 영화(theatrical cinema)를 만들었다면, 키튼은 그에 대비되는 순수영화(pure cinema)를 만들었다”고 평가하면서 두 거장을 비교합니다.
모 영화 평론가는 찰리 채플린과 버스터 키튼의 대조적 이미지에 대해 이런 분석을 내렸습니다. "채플린은 사랑스런 방랑자(the tramp)이지만, 사회에 대해 냉소적이다. 대부분의 채플린 영화들은 그가 사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다시 방랑을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반면, 키튼는 무표정한 얼굴(stone face)이지만, 사회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결국 사회에 편입되는 것으로 끝난다." 실제로 키튼도 이렇게 언급한 적이 있다. "채플린의 방랑자는 귀여웠지만 범죄를 저지를 기회가 온다면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달라요. 언제나 정직했죠."
채플린처럼 키튼은 연극 가족들을 뒀고, 가족들의 보드빌 무대 위에서 도제기간을 거쳤는데 키튼이 채플린과 다른 점이 있다면 어린 시절과 가족의 삶이 덜 고통스럽고 더 평화로웠고, 채플린의 영화를 후에 어둡게 이끈 젊은 날의 암흑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며 키튼의 영화들은 더 유쾌하고 활동적이고 낙관적이며, 넉살좋은 곡예와 트릭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채플린과 다르게 키튼의 스타성과 재기발랄함은 동시녹음이 실시된 할리우드의 유성시대에선 살아남지 못했는데 키튼은 육체적 코미디와 마이크 둘 다의 요구에 맞추는 것에 실패했고, 사생활마저 불우했습니다.
1929년과 1933년 사이 MGM은 키튼에게 따분한 상황 코미디들의 시리즈를 맡겼고 그 다음 20여년 동안 키튼은 채플린의 <라임라이트 Limelight>(1952)에서 주요 역할로 컴백할 때까지 싸구려 두릴짜리 유성 코미디와 광고 출연으로 살아갔습니다.
키튼의 재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지던 60년대 말부터 80년대 후반까지는 영화계에서 채플린보다 키튼을 더 높이 사는 분위기도 조성되었고 현재에도 채플린보다 키튼의 영화를 더 높게 평가하는 평론가들도 많습니다.
영국의 사이트 앤 사운드 선정 역대 최고의 영화에서 매 10년 마다 선정하는 세계 10대 영화 리스트에서 꾸준히 한 자리를 차지하던 <시티 라이트>는 72년과 82년도에 제외되었는데, 바로 키튼의 <제너럴> 때문이었는데 2007년 AFI 선정 100대 영화에서도 <제너럴>이 18위를 기록했고 그의 영화 중 6편이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또는 미적으로 유의미하다"고 판단되어 미국 국립 영화 등록부에 영구 보존 영화로 선정되었습니다.
1999년 미국 AFI가 선정한 클래식 할리우드의 가장 위대한 배우 21위, 1996년에는 미국 최대의 대중문화 잡지 중 하나인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에서 선정한 가장 위대한 영화 감독 7위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이세상 모든 액션 배우들의 기초와 뼈대가 된 전성기
키튼의 동반자였던 아버클은 1921년, 자신이 주최한 파티에서 단역 여배우 버지니아 라페가 사망하는 사건에서 그녀의 지인이자 전과자였던 밤비나 델몬트라는 여성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아버클이 여배우를 죽였다' 라고 거짓 진술을 했고 아버클은 알코올 의존증에 걸려서 쓸쓸하게 최후를 맞았습니다.
아버클 사후, 델몬트가 거짓 진술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미국 사법부는 공식적으로 아버클에게 사죄하였고 악녀임이 드러난 델몬트는 몰락하여 알코올 중독으로 비참하게 죽게 되는데 키튼은 1922년 단편 <경찰>을 통해서 미국의 사법부를 풍자했을 정도로 아버클을 마지막까지 변호한 영화계 인물이었습니다.
한편, 키튼의 경력은 계속 치솟아 1920년부터 1928년까지 버스터 키튼은 19편의 단편 영화와 12개의 장편 영화를 만들었으며, 찰리 채플린, 해럴드 로이드와 함께 코미디 스타로 대인기를 누렸는데, 채플린이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적극적이었고, 로이드가 당시 절정에 다다른 영화라는 매체를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했다면 키튼은 자신의 뛰어난 스턴트 능력으로 코믹한 액션 연기 연출에 방점을 찍 모두 이전의 영화들과 차별화되는 전무후무하게 독특한 스타일로 만들어지는 등 당시 키튼은 재능 있는 작가, 감독, 기술자, 연기자였던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무성 영화계의 선구자였습니다.
<우리의 환대(歡待) (Our Hospitality, 1923>, <셜록 주니어 (Sherlock Jr. 1924>, <제너럴 (The General, 1926)>, <카메라맨 (The Cameraman, 1928)>, <항해자>, <스팀보트 빌 주니어>
가 연달아 만들어진 1923년부터 1928년까지는 키튼의 전성기라 할 시기로, 이 시기에 키튼은 단편에서부터 보여준 대담한 스턴트 묘기와 영화적 기교들을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키며 무성영화 시기의 가장 위대한 작품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그의 모든 영화들은 저작재산권 보호기간이 만료되어 유튜브에서 감상 할 수 있으며 한글 자막 버전으로 그가 감독한 장편 11개, 단편 19개가 올라와있습니다.
그는 자신은 결코 웃지 않으면서 가장 많은 이들에게 웃음을 안겨주었고, 냉담해 보이는 영화 구조 속에서 유쾌하고 낙천적인 삶을 그려내고 있으며 예술적인 걸작을 만들기보다는 매순간 박장대소할 수 있는 오락으로서의 코미디 영화를 만드는 데 골몰했습니다.
그의 영화가 지니고 있는 영화적인 정교함, 배우의 몸만으로 펼쳐보이는 불가능에 가까운 스턴트 묘기, 거의 최면적이라 할 만한 시각적 리듬에 기인했으며 그의 작품들은 현재 찰리 채플린의 작품과 함께 무성 코미디 영화의 최고의 걸작들로 평가됩니다.
키튼의 무성 영화는 <카메라 맨>과 같은 친밀하고 개인적인 영화에서부터 <우리의 환대>와 같은 서사시, <플레이 하우스>와 <셜록 주니어> 같은 터무니없고 초현실적인 영화까지 다양하며 어떤 영화들은 놀라운 특수효과에 의존하고, 어떤 영화들은 키튼의 놀라운 신체적 곡예에 의존하고, 어떤 영화들은 현대 세계에서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에 대한 키튼의 독특한 시각에 의존한다. '광풍에 쓸려 다니는 사람’, ‘넘어지는 주택’, '방해만 되는 아내의 도움’ 등은 키튼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특징입니다.
비평가들은 심지어 키튼의 최악의 영화들 조차도 그 당시 영화인들이 만든 거의 모든 최고의 영화들보다 기술적으로 우수하다는데 동의했는데 그는 씁쓸한 위트와 풍자에 능숙했고, 숨막히는 곡예 능력, 블랙 코미디와 판타지 둘 다에 선천적이고 섬세한 손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환대(歡待) (Our Hospitality, 1923)>라는 장편 극영화로 절정에 달하는 인기를 누렸는데 이 영화는 맥케이 가문(The McKay)과 캔필드 가문(The Canfield)간의 오랜 원한(怨恨) 관계를 다루고 있고 맥케이가 험산(險山)과 협곡으로 도주를 하면서 펼쳐지는 필사의 추격전을 매우 스펙터클하게 보여줍니다.
특히 맥케이가 폭포 바로 직전에서 급류에 떠내려 오는 아가씨를 서커스 공중제비를 하듯이 구해내는 장면은 압권이 아닐 수 없으며 대단히 코믹하게 설정된 기차여행 장면은 훗날 키튼의 걸작인 <제너럴>에서 보다 세련되고 체계화된 모습으로 다듬어집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셜록 주니어 (Sherlock Jr., 1924)>에서는 그의 놀라운 스타일과 창의력이 크게 드러나는데 이 영화에서 그는 자신이 꿈 속에서 범죄를 해결하는 실제의 더블을 연기하는 능력을 보여주었고 특히, 기차 위에서의 스턴트 장면은 전설의 명장면으로 남았습니다.
이 영화에서 키튼은 스크린 속으로 뛰어들어 좌충우돌하는 장면같이 당시로서는 무척이나 기상천외(奇想天外)하고 파격적인 편집과 특수효과를 사용해서 이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장면들을 연출했는데, 평단과 관객들로부터 엇갈린 반응을 받았습니다.
이후 키튼은 그의 작품들 가운데 최고 걸작(傑作)이라는 평가를 받는 <제너럴 (The General, 1926)>을 세상에 내놓게 되는데, 이 영화는 남북전쟁(南北戰爭)을 배경으로 ‘제너럴’이라는 이름의 기차를 운전하는 기관사 조니 그레이(Johnnie Gray)가 온갖 위험을 감수하고 적진으로 잠입하여 연인을 구하고 기차를 탈환하는데 성공을 한다는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과 전통적인 코미디 요소을 선보였고. 이 영화를 찍으면서 오리건의 매켄지 강(Mackenzie River)에서 낡은 기관차를 폭파시키는 등 스펙터클에 만전을 기했습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광대하게 펼쳐진 추적 장면은 코믹한 내러티브, 추적의 리듬, 키튼의 육체적 곡예, 그리고 그의 기계적 장치에 대한 선호로 어우러졌고,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코믹 서사시가 됐습니다.
하지만 그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실패했고, 평단의 반응도 시큰둥했는데 오늘날 이 영화가 정교한 내러티브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걸작으로 인정받는 것을 보면 무척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후 키튼은 <전문학교 (College, 1927)>와
<스팀보트 빌 주니어 (Steamboat Bill, Jr., 1928)>를 제작하고 연출하면서 그야말로 전성기를 구가했는데 주인공이 교도소에 갇힌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던 중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치고 엄청난 바람에 건물들이 맥없이 붕괴되는 상황에서 주인공이 온갖 풍파를 헤치고 아버지와 더불어 애인까지 구한다는 내용으로 자신의 영화에서 내러티브의 전개나 구성보다는 정확한 수학적인 계산에 기초한 육체의 미장센에 더 치중해 <스팀보트 빌 주니어>에서 그 절정을 보여줍니다.
한 장면에서 키튼의 뒤에 있던 목조건물 외벽이 무너지면서 그를 덮치는데, 다행스럽게도 키튼은 출입문 틈새에 서 있었던 관계로 목숨을 부지하게 되는데 만약 이 장면에서 한 치의 오차라도 있었다면 키튼이 다칠 수도 있었던 매우 위험한 연출이었습니다.
방황의 시작 그리고 재도약
이처럼 전성기를 구가하던 키튼은 1927년 개봉한 <제너럴>이 철도 덕후였던 그의 취향을 살려서 제1 차 세계대전에서 실제로 운용된 증기 기관차를 박살내고 500명의 엑스트라를 기용하는 등 75만 달러라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제작비로 제작된 영화였지만 흥행은 제작비의 1/5인 15만 달러에 불과했고 이로 인해 제너럴의 실패 이후 키튼은 내리막길을 가게 됩니다.
1928년 대형 영화사 MGM과 고용계약을 맺게 되어 영화제작에 대해 간섭을 받게 되자, 키튼의 창조적 재능은 시들기 시작했고 이어서 유성영화 시대의 도래와 함께 개인적으로 이혼과 재혼을 반복하면서 그는 심각한 알코올 중독에 빠지게 되고 한동안 할리우드에서 사라져 방탕한 셀레브리티로 지내게 됩니다.
그는 1940년에 23살 어린 부인과 재혼하면서 극적으로 재기에 성공했고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던 술을 끊고, 위험한 스턴트 대신 TV의 코미디 배우로 전향해 영화에 단역이나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하고, 광고에도 꾸준히 얼굴을 내밀었고, 자신의 이름을 내건 TV쇼 <The Buster Keaton Show>를 방송하기도 했습니다.
암흑기에서 벗어나 다시 보게 된 빛
1930년대 초반은 키튼에게 있어 최악의 시기였는데 당시 키튼의 배우자였던 나탈리 탈마지(Natalie Talmage)는 키튼의 불륜 행각을 거론하며 이혼을 선언하였고 이 이혼이 최종적으로 확정되기도 전에 키튼은 두 번째 아내와 결혼했으며 그리고 몇 달 후인 1933년 또다시 비슷한 스캔들에 휘말리자 MGM은 지속적인 스캔들로 인한 신뢰 하락 문제와 이전부터 계속되던 키튼의 저항을 이유로 키튼과 계약을 해지하게 됩니다.
안 그래도 지속적으로 술에 손을 대고 있던 키튼은 결국, 알코올 의존증 증세를 보이게 되고 술자리에서 키튼은 주사로 즉흥적으로 위험한 코미디 곡예를 부렸고 다음날 술이 깬 후 자신의 행동에 큰 충격을 받아 본격적으로 술을 끊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합니다.
키튼은 새로 마련한 작은 집에 혼자 틀어박혀 며칠 동안 악몽 같은 시간을 보냈는데 며칠을 딱딱한 의자에 앉아, 손의 떨림을 멈추기 위해 흰손톱으로 그것을 움켜쥐고, 피가 날 때까지 혀를 깨물고, 끔찍한 환각을 통해 살아가며, 그 혼란스러움을 혼자서 극복하려고 애썼습니다.
키튼이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이러한 파괴의 심연에서 자신을 되살렸으며 자신의 놀라운 결심과 함께, 가족과 주치의의 도움으로 그는 자신의 독특한 규율과 결단력을 사생활에 적용하면서 음주를 통제하게 되었고 예전의 끔찍한 시간 동안 그랬던 것처럼 키튼은 두번 다시 음주로 그의 삶의 패턴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1940년 키튼은 평생의 반려자가 된 댄서 엘라노어 노리스와 결혼합니다.
버스터 키튼은 1940년에 세번째 부인인 엘리노어 노리스와 결혼한 후, 다시 생활에 안정을 찾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1949년부터 다시 꾸준히 여러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기 시작했고 1951년부터 TV방송 시대가 시작되자 버스터 키튼은 자신이 아직 완전히 몰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대중들에게 알리기 위해 TV에 적극적으로 출연하기 시작합니다.
키튼의 슬랩스틱은 당시 복고 열풍이 불고 있던 대중들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키튼은 다시 주목 받았고 1952년, 찰리 채플린의 자전적 영화 <라임라이트>에서 키튼은 채플린의 보조 피아노 연주자 역할을 맡았으며 이후, 키튼은 그가 출연했던 영화들을 연이어 재개봉시키고 광고도 숱하게 출연하여 안정적인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였고
1957년에는 키튼의 전기 영화가 나오는가 하면, 1960년 아카데미(Academy Awards)에서 코미디 영화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상(Honorary Award)을 수상했고, 같은 해 명예의 전당(Walk of Fame)에 이름을 올림으로써 명예도 완전히 회복하였습니다.
1962년 파리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회고전을 열었고 1965년에는 베니스 영화제에 초대되어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으며 스티븐 손드하임 원작의 뮤지컬을 영화화한 리처드 레스터(Richard Lester) 감독의 《로마에서 일어난 기묘한 사건(A Funny Thing Happened on the Way to the Forum, 1966)》인데, 이 역시 호평 일색이었고 이 작품을 끝으로 배우로서 마지막 출연을 하게 됩니다.
30년 만에 다시 찾아온 영광에 마침내 한을 풀었던 것일까?
70세의 나이인 1965년 토론토에서 촬영한 캐나다 건설안전협회 광고영상은 그의 마지막 연기가 되었으며
이듬해인 1966년 2월 1일 LA에서, 영화사에 길이 남을 이 위대한 배우는 폐암으로 눈을 감습니다.
여담
어린 시절의 꿈이 엔지니어였을 정도로 기계에 늘 관심이 많았다.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도 영화 내용엔 별 관심이 없었고 영화 카메라의 구조, 필름, 영사기 등 장치들의 원리, 편집 방식 등 극히 기계적이고 기술적인 면에 호기심과 흥미를 느껴서 영화에 매료됐다고 합니다.
그의 지인들은 그가 만약 연예인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필히 엔지니어나 발명가가 되었을 거라고 합니다.
야구하는 걸 좋아했고 키튼은 영화 촬영 중간에 스탭들과 야구를 하곤 했는데 1930년대에 매년 열리는 시나이산 병원의 할리우드 자선 야구 경기를 위해, 그는 항상 코미디언들의 팀을 이끌었다. 키튼은 종종 야구장에서 그의 작가들과 함께 코미디 사업을 발전시켰습니다. 워낙 야구광이라 이런 전설도 있다. 그가 배우들을 고용할 때 사용했던 지원서에 대한 질문 중 두 가지는 "당신은 좋은 배우입니까?"와 "당신은 훌륭한 야구 선수입니까?"였으며 어느 쪽이든 "예"라고 대답한 사람은 키튼과 함께 일했습니다.
골초였습니다. 평생 담배를 많이 피운 그는 한 달간 기침과 싸움 끝에 1966년 1월 첫째 주 동안 폐암 진단을 받았지만, 의사들이 이 소식이 건강에 해로울 것을 우려해 키튼은 자신이 아프거나 암에 걸렸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키튼은 자신이 심각한 기관지염으로부터 회복되고 있다고 생각했고 건강이 나빠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활동적이고 거의 죽을 때까지 걸어다녔는데 키튼은 아내와 카드놀이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집에서 잠든 채로 조용히 사망했습니다.
작가주의 비평가 앤드류 새리스(Andrew Sarris)는 1968년 감독들의 등급을 매겼는데 버스터 키튼은 최고 등급인 만신전에 넣었습니다.
1992년 10월 4일 국제 버스터 키튼 협회는 키튼의 생일에 설립되었는데 키튼의 삶과 일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더 많이 끌기 위해 헌신하는 이 협회에는 배우, 프로듀서, 작가, 예술가, 그래픽 노블 작가, 음악가, 디자이너 등 텔레비전과 영화계의 많은 개인들과 단순히 버스터 키튼의 마법을 동경하는 팬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994년 4월 27일 발행된 무성 영화의 스타를 기념하는 미국 기념 우표 10장 중 그의 얼굴이 그려졌다. 캐리커쳐리스트 알 허쉬펠트가 디자인한 이 우표 세트는 또한 루돌프 발렌티노, 클라라 보우, 찰리 채플린, 론 채플린, 존 길버트, 자스 피츠, 해롤드 로이드, 테다 바라, 키스톤 홉스를 그려 그들을 기렸습니다.
2018년 로스앤젤레스 시는 6월 16일을 버스터 키튼의 날로 명명했습니다.
글을 마치며...
버스터 키튼이 남긴 무성영화 시대의 유산은 현재도 많은 영화 제작자와 배우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으며 무거운 카메라와 제한된 기술을 가지고도, 그는 창의적인 스토리텔링과 스턴트를 통해 영화계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버스터 키튼은 단순한 웃음을 유발하는 코미디언이 아니며 그의 작품에는 코미디와 함께 사회적, 정서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는 시대적인 상황과 사회적 문제를 유머와 순수한 연기로 풀어냈는데 이는 그의 작품이 단순한 유희로만 보이지 않고,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의 연기 방식과 스턴트는 현대의 액션 영화와 코미디 영화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그의 스턴트는 당시에도 놀라웠지만, 현대의 기술과 장비를 이용하면서 더욱 강렬하고 화려한 액션 시퀀스로 재해석되고 있으며 이는 그의 창의성과 대단한 연기력이 어느 정도로 뛰어났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또한 그의 영화는 재미뿐만 아니라 예술적 가치도 높게 평가받고 있으며 그의 카메라 앵글과 편집 기술은 당시에는 물론이고 현대에도 많은 영화 제작자들에게 영감을 주며 그의 작품에는 깊은 사색과 비판적 시각이 담겨 있어서, 오늘날에도 그의 영화를 감상하면서 여러 가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종합하면, 버스터 키튼은 단순한 코미디언 이상의 의미를 지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인중 한 명이며 그의 작품은 예술적이며, 사회적 메시지를 담아 현대 영화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에 그의 영화를 감상하고 연구하는 것은 단순한 즐거움을 넘어서서 영화의 역사와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평범한 코미디언은 재미있는 것을 한다. 훌륭한 코미디언은 평범한 것을 재미있게 한다."
첫댓글 대단하다
대단하다는 형용사보다 더 한 표현도 아깝지 않은 영화인입니다.
와.. cg도 없던 시절이면 부상 엄청났겠는데요 ㅎㄷㄷ
유리몸은 아니더라구요. 액션 영화의 선구자입니다.
스턴트 장면만 기억 나는 분이였는데.....
님의 설명을 읽으니 더 대단하신분 같내요!!!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저도 이정도인줄 몰랐는데 정말 위대한 영화인이시더라구요.
환생해서 축구 선수로 뛰고 있네요
ㅡ외질ㅡ
ㅎㅎㅎ
좋은 글 잘 봤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캬 너무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아침부터 기분좋은 댓글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소룡과 성룡 탐크루즈도 좋아했고 영감을 많이 받았다고 하죠 진정한 천재
맞습니다. 이세상 모든 스턴트 액션의 원조이신 분입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다시볼것
이걸 다 읽다뉘
좋은글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