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여성시대 정오의 생선가게
창밖을 나서지 못하는 음악과 동거하다 보면 문득
당신이 입술에 와 앉는다
몸속을 휘젓고 떠나간 음과 귓속을 맴도는 음 사이 고산병을 앓는 밤
음악은 당신을 발명한다
어느 교인들이 불태운 관을 강물에 띄워 보내는 장례를 치르듯
어떤 심장박동을 빌리지 않고는 날려 보내지 못하는 말이 있다.
이루어진 소원은 더는 소원이 아닌 것처럼
곁에 없는 사람만을 우리는 영원히 사랑할 수 있듯이
한 이름을 흥얼거리다 보면 다 지나가는 이 새벽
당신의 이름을 길게 발음하면 세상의 모든 음악이 된다
기도를 사랑하는 사람은 기도가 닿지 않기를 바라고
우리는 음악을 울린다.
<음악은 당신을 듣다가 우는 일이 잦았다> - 이현호
그래봤자 결국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오늘부터 나는 반성하지 않을 테다. 오늘부터 나는 반성을 반성하지 않을 테다. 그러나 너의 수첩은 얇아질 대로 얇아진 채로 스프링만 튀어오를 태세. 나는 그래요. 쓰지 않고는 반성할 수 없어요. 반성은 우물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너의 습관. 너는 입을 다문다. 너는 지친다. 지칠 만도 하다.
우리의 잘못은 서로의 이름을 대문자로 착각한 것일 뿐. 네가 울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면 나는 둘중의 하나를 선택하겠다고 결심한다. 네가 없어지거나 내가 없어지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그러나 너는 등을 보인 채 창문 위에 뜻 모를 글자만 쓴다. 당연히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가느다란 입김이라도 새어나오는 겨울이라면 의도한 대로 너는 네 존재의 고독을 타인에게 들킬 수도 있었을 텐데.
대체 언제부터 겨울이란 말이냐. 겨울이 오긴 오는 것이냐. 분통을 터뜨리는 척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리고 중얼거린다. 너는 등을 보인 채 여전히 어깨를 들썩인다. 창문 위의 글자는 씌어지는 동시에 지워진다. 안녕 잘 가요. 안녕 잘 가요. 나도 그래요. 우리의 안녕은 이토록 다르거든요. 너는 들썩인다 들썩인다. 어깨를 들썩인다.
헤어질 때 더 다정한 쪽이 덜 사랑한 사람이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나는 더 다정한 척을, 척을, 척을 했다. 더 다정한 척을 세 번도 넘게 했다. 안녕 잘 가요. 안녕 잘 가요. 그 이상은 말할 수 없는 말들일 뿐. 그래봤자 결국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 이제니
불빛을 좀 낮춰주세요
내가 아프니 그들이 친절해졌는데요
그러지 말아요
아픔을 가져가지 말아요
만나는 사람들 저마다
상처받았다 받았다 하니
상처가 사탕인가 해요
태생들은 불편이었을까요
불편을 들이며 그만한 친구도 없다 생각했는데
이제 그거
별일 아니라는 듯
별이라 불러보려 했는데
그 별 다치게 한다면 멀게 한다면
일찍 늙어버린 사람
마치 그러기를 바란 사람처럼
별과 별 사이를 어떻게 가늠할 수 있다고 그랬을까요
손톱에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한 생각을 물어뜯도록
괜찮아요 절룩이며
여기 남을게요
불편이 당신을 보이지 않는 곳까지 이끌 수 있다면
별을 헤듯
그래요 여기 남아서 말이죠
<불편으로> - 이규리
네 심장에 얼음이 열렸을 때 나는
온몸에 불을 지르고 네게로 들어갔지
살육과 구원이 쩡쩡 얼어붙은 강에서
한 방울의 영원이라도 녹이고 싶었지
신에게는 신의 무한이 있고
인간에게는 사랑이라는 찰나가 있고
나만 녹았지
이제 나는 스스로 없는 자
<사랑이라는 신을 계속 믿을 수 있게> - 이병철
불빛이 누구를 위해 타고 있다는 설은 철없는 음유시인들의 장난이다. 불빛은 그저 자기가 타고 있을 뿐이다. 불빛이 내 것이었던 적이 있는가. 내가 불빛이었던 적이 있는가.
가끔씩 누군가 나 대신 죽지 않을 것이라는 걸. 나 대신 지하도를 건너지도 않고, 대학 병원 복도를 서성이지도 않고, 잡지를 뒤적이지도 않을 것이라는 걸. 그 사실이 겨울날 새벽보다도 시원한 순간이 있다. 직립 이후 중력과 싸워 온 나에게 남겨진 고독이라는 거. 그게 정말 다행인 순간이 있다.
살을 섞었다는 말처럼 어리숙한 거짓말은 없다. 그건 섞이지 않는다.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 다시 밖으로 나갈 자다.
세찬 빗줄기가 무엇 하나 비켜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남겨 놓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그 비가 나에게 말 한마디 건넨 적이 있었던가. 나를 용서한 적이 있었던가.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세상엔 늘 나만 있어서 이토록 아찔하다.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 - 허연
나 만지며 너 생각하면
아무래도 몸은 몸이 아닌 거 같아서
기억의 주형 속으로 부어넣은 것들 세워놓으면
새벽의 공원
비를 맞고 온몸이 어두워지는 청동의 사람
금속으로 만든 주름, 백 년을 늙지 않는
어쩌면 너무 분명한
아, 그러니까 어쩌면
멀리서 빛나는 창문이 있었다
그림자가 춤을 추며 불빛을 흔들 때
내게도 움직이는 음악을 따라
어설프게 흉내하는 사람의 동작이 있었다
나를 잘라 팔면 돼
울지 마
서러운 들개의 굶주린 동공
하늘인 줄 알고 유리창에 부리를 처박는 새
취객의 지갑을 훔치려다 목을 조른
한밤의 달빛
도시를 집어먹는 강물과
물에서 구하지 못한 아이들
책임질 수 없는 일들이 목격자를 만들 때
목격하는 내가 목격될까봐 영혼을 숨겨버린 그때
탕진한 것이 무엇입니까
벌에 벌을 더하고 더하다가
지은 죄보다 많은 삶을 살 것만 같은데
그래서, 여기 서서
형상으로 만든 침묵을 살았는데
발치에 꽃을 두고 사라지는 누군가
그 뒷면을 오래 보면
길고 어두운 모양이 눈동자로 옮겨 붙는다
이제 마음도 구체적으로 사라질 차례
팔을 떼어 녹였다
귀와 코를 잘라주었다
왼발은 왼발 없는 자에게 건네고
피부를 빵으로 바꾸어 먹였다
울지 마, 라는 말을
몸을 잘라 해야 하는 사람
너를 생각하면
나를 만질 때마다
아무래도 살았다는 게 살 수가 없어서
<어쩌면 너무 분명한> - 최현우
오늘 밤, 세찬 빗줄기를 뚫고 건너온, 물방울 속에 뭉쳐 있는 당신의 전언을 펼쳐 읽습니다.
안타깝게도 법과 규칙의 말들은 죄의 무릎과 무릎 사이에 놓인 순수함을 보지 못하는군요.
세계의 단단한 철판 위에 이성의 흔적을 새기는 사람들. 물의 말을 모르는 사람들.
그들은 죄악의 틈새에서 잠들고 자라나는 어린 영혼을 보고는, 아이, 불결해, 눈살을 찌푸리기만 하네요.
하지만 물방울로 이루어진 당신의 말은 그 영혼을 투명하게 비춰주는군요.
물방울로 오로지 물방울로 싸우는 당신. 물방울의 정의를 행사하는 당신. 판결과 집행이 아니라 고투와 행복을 증언하는 당신.
당신은 말하죠. 인간은 세상의 모든 단어를 발명했어요. 사랑을 제외하고요.
사랑은 인간이 신에게서 빌려온 유일한 단어예요. 그러니 사랑 때문에, 우리는 할 수 없는 것을 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쓸 수 없는 것을 쓰는 것이죠.
나는 말하죠. 오늘 밤, 당신은 나와 너무 닮아 낯설군요.
당신은 말하죠. 아니, 당신은 너무 낯설어 나를 닮았어요.
그런가요, 그래요, 그럼, 잘 자요, 당신, 내 사랑.
<눈앞에 없는 사람> - 심보선 (자서)
당신이 희박해서
숨을 못 쉬겠어요
그렇게도 맛있게 마셔
버렸으니 없지
없는 게 당연하지
가신 님 남기고 간 물
하트 모양 아이스 큐브에 부어
슬픔의 냉동실에 넣어두어요
지천으로 이별을 얼려서
와드득와드득 씹어 먹어요
<당신이 희박해서> - 성기완
촛불을 켜들고, 나는 이제서야 내가 만든 음악을 듣는다
그녀는 지금 밥 딜런 공장에서 만든 노래를 듣고
그는 밤새도록 알베르 카뮈 공장에서 만든 책을 읽는다
맥주는 맥주 공장에서 만든 것이다, 휴일에 만든 맥주에는 불량품이 많다
그 많던 벚꽃잎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저 나뭇잎 공장에서는 왜 백만 년 전부터 고독의 음악만 만들고 있나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 사랑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나는 대답한다, 백년 동안 고독해지세요
누군가 나에게 다시 묻는다, 고독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백년 동안, 사랑을 하세요
그러나 지금은 버찌들도 다 떨어지고 벚나무 공장도 문을 닫을 시간, 노을이 지는 그대의 아름다운 공장으로 가서 밤새도록 고요히 촛불을 밝히는 시간
<버찌는 벚나무 공장에서 만든다> - 박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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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시 상냥하게 알려조요...
첫댓글 너무좋다....고마워
아 진짜 좋다…
너무 좋아
잘 읽었어 책 사고 싶어진다
허연 시 너무 좋다 고마워
너무 좋아 미쳤다
ㅠㅠ 새벽에 눈물 한방울
새벽에 읽기 너무 좋다 좋은글 고마워ㅠㅠㅠㅠ
첫 시부터 너무 좋다...
여샤 더 가져와줘 진짜 좋은 시, 글들만 모아서 글 쪄줫네ㅠㅠㅠㅠ
글 너무 잘 보고 가! 고마워 여시
삭제된 댓글 입니다.
본명조야! 😉
ㅠㅠ좋다
너무 고마워 다른 날 다른 마음일 때 또 한번 찬찬히 읽어보고 싶다
와..
나 이거 보고 시집 샀잖아... 좋은 글 소개해 줘서 고마워!!
ㅜㅜ 나 맨 마지막에서 네번째 이미지 받을 수 있을까
고마워..🫶🏻
😘
헐대박
아 너무 좋다
눈물나ㅠ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9.08 03:00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9.08 08:04
사랑이라는 찰나,,,
너무 좋당.. 🥹🥹
따뜻하면서도 차갑고.. 좋다
오 시집관심많아졌는데 읽어볼게...!!!
너무 좋다 ㅠㅠㅠ... 가을이랑 정말 찰떡이다..
대박 너무좋다 ㅠㅠ 글써줘서 고마워 덕분에 좋은시 알게됐어!
너무 좋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9.08 10:46
너무 좋다..여샤 고마워
너무 좋다 이별을 얼려서 씹어먹는다니
아 너무 좋다..
좋다정말
너무 좋다 여샤 고마워
너무 좋은 시들 많다ㅠㅠㅠㅠ
너무 좋아 ..ㅠ
시 잘 봤어... 너무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