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229 11월30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1월 30일 토요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리스도의 향기, 안드레아>
원래 안드레아는 형 시몬과 함께 갈릴래아 호수를 배경으로 고기잡이를 하며 생계를 꾸려가던 전문직 어부였습니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여느 여부와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보통 어부들의 삶은 특별한 것이 없었습니다. 물때가 좋고 운이 좋아 고기가 많이 잡히면 그것을 팔아 한 며칠 신나게 놀기도 했겠지요. 안개라도 자욱이 끼여 조업이 불가능한 날은 삼삼오오 둘러앉아 술로 하루를 지냈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 마음에 들지 않는 정치지도자들 안주삼아 독주도 많이 마셨습니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내면은 영적생활을 향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의 피 안에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 모세와 다윗의 전통과 신앙이 힘차게 맴돌고 있었습니다. 그의 시선은 임박한 메시아의 도래에 초점이 맞춰져있었습니다.
안드레아는 자신의 신앙을 좀 더 성숙시켜나가려는 의지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영적생활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려는 의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런 안드레아 앞에 나타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입니다. 안드레아는 깊은 광야에서 자신의 내면을 열심히 갈고 닦던 세례자 요한의 모습에서 참 구도자로서의 모델을 찾았습니다. 안드레아는 세상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그릇된 권력 앞에 혈혈단신으로 당당히 맞서던 세례자 요한을 자신의 정신적 지주, 멘토로 삼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때가 지나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가 도래하자 세례자 요한은 안드레아를 예수님께로 안내합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본 세례자 요한은 지체 없이 안드레아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이는 이제 나의 때가 지나가고 예수님의 때가 도래했으니 저분을 따라가라는 표현이었습니다. 안드레아는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듣고 지체 없이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지도에 힘입어 영적인 눈이 이미 많이 트여있었던 안드레아는 즉시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확신합니다. 한 걸음에 자기 형 시몬을 찾아간 안드레아는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이름 안드레아의 의미는 ‘사내다움’ 혹은 ‘용기’입니다. 용기 있게 세례자 요한을 스승으로 모셨던 안드레아, 사내답게 예수님을 따라나선 안드레아는 형 시몬과는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단순하고, 과격하고, 급하고, 다혈질적이었던 형 시몬에 비해 안드레아는 성실하고 온건하며 신중한 성격의 인물이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안드레아는 그리스 북부 지방의 에피루스에서 선교하였습니다. 안드레아는 70년경 로마 황제 네로의 대대적인 박해 때 아카이아에서 체포되어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안드레아는 자신이 매달릴 십자가로 X자형 십자가를 선택했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어로 X는 그리스도의 첫 글자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안드레아에 관해 정말 놀라운 이야기가 한 가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안드레아는 십자가에 매달린 이후 꽤 오랫동안 죽지 않고 매달려있었습니다. 이틀간 매달려있었는데, 그 순간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겠습니까? 그러나 안드레아는 십자가 위에서도 복음 선포 활동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십자가 주변에 둘러서있는 군중들을 향해 설교를 계속했답니다.
이를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었던 적대자들은 안드레아를 십자가에서 끌어내렸는데, 그 순간 하늘에서 한 줄기 강한 빛이 안드레아를 오랫동안 감쌌답니다. 그 강렬한 빛 한 가운데 안드레아는 숨을 거두었다는군요.
임종하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사람 낚는 어부로 살고자 노력했던 안드레아, 그리스도의 향기였던 안드레아 사도의 삶과 신앙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 신앙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제자를 남긴다>
역사상 ‘대’(The Great)라는 수식어가 붙는 왕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세종대왕 정도 되어야 대왕이라 칭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대왕이란 수식어가 붙은 가장 유명한 왕 중의 하나는 ‘알렉산더 대왕’입니다. 로마제국을 일으킨 율리우스 카이사르조차도 알렉산더 동상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위대한 지도자의 이른 죽음을 슬퍼하고 그 업적을 기릴 정도였습니다.
알렉산더는 명문학교를 졸업하여 전투하는 법과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철저히 배운 인물입니다. 알렉산더의 가장 위대한 스승은 당대 최고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였습니다. 그는 “아버지는 나에게 생명을 주셨고, 스승님은 나에게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셨다.”라고 할 정도로 스승을 사랑했습니다.
알렉산더가 18세 되던 해에 많지 않은 기마대를 이끌고 자기보다 수적 우위에 있는 테베 동맹군들을 전멸시켰습니다. 이후 페르시아와 이집트까지 점령하고 인도를 향해 나아가는 중에 병을 얻어 젊은 나이에 죽게 되었습니다. 그의 신하들은 걱정에 싸이게 되었습니다. 세계를 정복하다시피 한 알렉산더가 죽게 되면 그 큰 제국은 누가 다스려야할까요?
알렉산더는 유언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가장 강한 자에게 나의 제국을 맡기노라.”
하지만 서로 자신이 가장 강한자라 주장했기 때문에 그의 제국은 12년 만에 20명 이상의 통치자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나갔습니다. 역사학자들은 그가 강력한 후계자를 키워 단일정부를 유지했다면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르는 그리스제국은 500년 이상 존속됐을 것이라고 평합니다.
알렉산더가 33세의 나이로 사망했기 때문에 후계자를 물색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이유 때문에 그의 제국은 단시간에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대왕이라고 하더라도 그 업적을 이어줄 후계자까지 정해놓지 못한다면 대왕으로서 완벽하지는 못한 것입니다. [참조: ‘세계사를 바꾼 49가지 실수; 후계자를 남기지 않은 리더의 몰락’, 빌 포셋, 생각정거장]
예수님은 30세에 복음전파를 시작하셨고 역시 33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돌아가실 때 이미 당신의 교회가 굳건히 세워져 있었습니다. 아무리 박해가 심해도 교회는 전 세계를 정복하였고 지금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은 항상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이 차지합니다. 예수님은 왕 중의 왕으로서 당신 왕국을 세우시기 위해 가장 먼저 당신의 후계자들부터 선택하시고 교육하시고 그들을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 둘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듣고 따라온 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그 두 제자들의 형제들을 부르십니다. 여기에 오늘 축일을 맞는 안드레아의 형 베드로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오는 사람들의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당신 제자들을 구성하셨습니다. 이미 그들은 가족과 일로 하나로 묶여있고 어부들이었기 때문에 큰 노력 없이도 단합이 잘 되고 가르치는 대로 받아들이는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세 사도들을 사랑하셨는데 요한과 그의 형 야고보와 안드레아의 형 베드로였습니다. 오늘 뽑으신 어부 네 명이 사도들의 주축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의 사촌들인 야고보와 유다까지도 제자로 뽑으셨고 심지어 세리까지도 뽑으셨습니다. 로마에 저항하며 싸우던 열혈당원 시몬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쩌면 좀 저속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가능하다면 ‘닥치는 대로’ 당신의 제자들을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러다 가리옷 유다도 끼이게 되었습니다. 그렇더라도 3년이란 세월동안 2000년을 세상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종교로 당신 믿음을 이어갈 교회를 세우셨으니 참으로 유일한 대왕다우신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합니다. 역사에 이름이 기억되는 위대한 인물들은 책을 쓰지 않았습니다. 붓다도 책을 쓰지 않았고 공자도 쓰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은 제자를 키웠습니다. 사람의 이름은 사람을 통해 남겨지는 것입니다. 조상들의 위폐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후손들이 있으니 조상의 이름이 기억되는 것입니다. 교회 또한 자신의 일을 이어갈 제자들을 통해 영원히 지속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로 삼는 이들 안에 머무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안드레아는 “남성적인” 이란 뜻으로 친절하고 항상 준비되어 있고 열려진 마음을 가진, 열심한 사람으로 나타난다. 벳사이다의 요나의 아들이며(마태 16,17), 베드로의 동생이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고, 거기에서 사도 요한을 알았으며 그와 함께 처음으로 예수를 따랐고,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하였다.(요한 1,35-42)
사도단에서 안드레아 사도의 역할을 그리 많지 않으나 매우 의미 있는 일들이었다. 굶주린 군중 앞에 안드레아는 예수께 어린 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드린 일이 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그 아이가 내어놓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부르게 하신 기적을 행하셨다.
전승에 의하면 안드레아 사도가 자신의 사도직을 그리스와 소아시아에서 폈다고 전하고 있다. 이 전승에 의하면 사도는 소위 “성 안드레아의 십자가”라는 X형으로 된 십자가 위에서 Patrasso에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바오로 6세 교황은 성 베드로 성당에 보관되어 있던 안드레아 사도의 유해를 동방 교회에 되돌려 주었고, 후에 Patrasso로 옮겼다.
안드레아 사도는 사도들 중에 첫째 “선교사”였다. 처음 부름 받을 때 함께 있던 사도 요한이 그것을 증언하고 있다. 예수님을 만나고 즉시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에게 증언하고 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그리고 그를 예수께 데려 갔다.(요한 1,41)
우리의 성체성사도 “우리는 주님을 만났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지향으로 미사에서 출발하지 않고, 다른 형제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여 그들이 우리와 함께 아버지의 식탁에 모이도록 서두르지 않는다면 소용없는 것으로 남게 될 것이다.
복음: 마태 4,18-22 : 즉시 그물을 버리고 그분을 따랐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계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마자 곧바로 그물을 버렸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즉각적인 순종을 바라신다. 그러면 이 가난한 두 어부가 버렸으면 무엇을 얼마나 많이 버렸겠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사람의 재산보다도 그 마음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사람은 많은 것을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와 안드레아가 탐내는 마음과 무엇을 소유하려는 마음을 버렸을 때, 그들은 많은 것을 버린 것이다. 자기가 소유한 것과 그것을 가지려는 마음 자체를 버리는 사람은 많은 것을 버린 사람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따른 그 가난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아 마음대로 탐낼 수 있었던, 그들보다 잘 사는 사람들이 가진 것만큼 많이 버렸다. '그 버림을 얼마나 큰마음으로 이루었느냐'이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19절) 이 말씀을 따라 어부들은 하늘의 아버지를 얻기 위해 세상의 아버지를 떠났다. 그리고 세속적인 낚시에서 거룩한 낚시로 바뀌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물고기를 낚듯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깊은 오류의 바다에서 사람들을 낚도록 부르셨다. 그리고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세상,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며 누구에게도 안전하지 않은 세상에서 그들이 하느님 말씀의 그물로 사람을 잡도록 사도로 삼으셨다.
사도들은 즉시 그물을 버림으로써 세상의 것을 소유한 채로는 누구나 거룩한 것에 도달할 수 없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이렇게 살면서 결국은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하고 자신 있게 말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른 사람들의 복음선포는 은총 체험을 통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사도들의 믿음과 순종을 보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들은 한창 일하던 중이었지만, 미루거나 꾸물거리지 않았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라갔을 때 그랬던 것처럼(1열왕 19,20-21 참조), 그들은 ‘집에 가서 식구들하고 이야기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20.22절) 하느님의 뜻 앞에는 한 치도 망설임을 허용하지 않으시는 모습이다.
오늘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고 계시다. 이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응답을 드리며 살고 있는지, 듣기는 하면서도 실천을 올바로 하면서 그분을 따르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우리도 지금 이 순간에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우리의 생각과 고정관념을 모두 버리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자꾸 뒤를 돌아다보는 생활을 하지나 않는지 살펴보고 주님 앞에 나의 자세를 올바로 가져야 할 것이다.
좀 더 우리의 삶의 자세를 하느님 안에 이어가게 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기심, 교만 그리고 집착을 피하면서 주님의 부르심에 언제나 응답을 드리며 실천할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약한 신앙을 굳게 해주시도록 기도하자.
=====================
《매일미사》오늘의 묵상
[부산교구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신학사무처장) 염철호 요한 신부님]
안드레아는 베드로의 동생으로, 어부였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형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 복음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전합니다. 안드레아는 본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는데,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듣고 요한 사도와 함께 예수님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고 나서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전한 인물이 안드레아입니다(요한 1,40 참조).
이렇게 본다면 안드레아는 맨 먼저 예수님에 관한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고 전한 인물들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에게 전해 들은 예수님에 관한 기쁜 소식을 직접 확인한 뒤 다른 이에게 전한 첫 사도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오늘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을 맞아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물론, 듣는다고 하여 모두에게 믿음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점은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들었던 많은 이들 가운데 정말 소수의 사람만이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였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또 믿음을 얻게 되었다고 하여 누구나 죽을 때까지 그 믿음을 충성스럽게 지켜 내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하던 안드레아 성인도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서는 그분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성인은 모든 부족함을 털어 내고 끝내는 예수님을 증언하는 삶으로 나아갑니다.
이렇게 보니 어떤 이가 믿는지 믿지 않는지는 그 인생의 마지막 날을 보아야 비로소 알 수 있나 봅니다. 성인은 오늘날 그리스 땅 펠레폰네소스반도 북서쪽에 있는 파트라스에서 엑스자형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다고 전합니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한국 본원)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사람 낚는 어부>
옛날 그리스도교 초기에는 그리스도교를 물고기로 표시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제자들이 어부였기 때문에 물고기로 표시하였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자이시다.”
희랍어로 첫 글자를 모으면 물고기란 뜻이기에 서로 그리스도 신자라는 암호 같은 표시였습니다. 그러나 물고기를 잡기 위하여 사용한 기술은 사람을 낚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시몬,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은 모두 어부였습니다.
하느님은 어떤 일을 하시기 전에 필요한 사람을 선택합니다. 교회 안에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은 어떤 전문직을 가진 사람을 선택하십니다.
갈릴레아 호수에 성지 순례 가면 베드로의 배라는 것을 타게 되는데 베드로 사도 같은 모양을 한 어부가 고기를 잡는 모양을 내면서 옛 어부들의 모습을 재연합니다.
사람 낚는 어부로 불러주신 주님을 찬미하며 감사합니다. 어부가 물고기의 성질을 파악하지 못하면 밤새도록 바다 안에 있어도 고기를 잡지 못하고, 물때를 알지 못하면 고기가 어디로 모이는지 모르고, 어떤 먹이를 좋아하는지 모르면 고기가 낚이지 않습니다.
어부가 고기를 낚는 것같이 사람을 낚으려면 상대를 깊이 파악하고 그물을 고기가 있는 곳에 놓아야 합니다. 낚싯대 매고 바다에 가도 고기를 낚을 수 없듯이 동분서주하면서 분주히 돌아다녀도, 선교의 사명을 지니고 있어도 방법과 지혜가 없으면 성과를 거둘 수 없습니다.
고기 잡는 법을 책으로 배워도 실지로 고기잡이를 체험하지 않고는 물고기를 잡을 수 없듯이 신학 철학을 배워도 그 장소 그 시간을 분별하지 못하고 자세를 낮추지 않으면 헛방 치게 됩니다.
오늘 사도들이 목숨을 내놓고 주님을 따라 사신 것같이 목숨을 내놓으면서 모든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 하도록 기도합니다.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안드레아는 공관복음에 따르면, “사람 낚는 어부”(마르 1,17; 마태 4,19)가 되리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형인 베드로와 함께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특히 <마르코복음>에서는 열병으로 누워 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는 장면에서 등장하며(마르 1,29-30), 예수님께서 성전파괴를 예언하셨을 때에는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느냐며 궁금해 하기도 합니다.(마르 13,3-4)
<요한복음>에서는 그가 상당히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는데, 그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께서 부르신 첫 번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요한 1,35-40)
그리고 형인 시몬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소개하고, 그를 예수님께로 인도한 첫 번째 선교사가 되었습니다.(요한 1,40-42)
또한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실 때에는 한 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를 가지고 있다는 정보를 드렸으며(요한 6,8-9),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는, 예수님을 만나 뵈러 온 그리스인들을 예수님께 소개하기도 합니다.(요한 12,20-22)
한편, 초기의 동방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안드레아 사도는 <요한복음> 1장 40절에 근거하여 “맨 처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의 ‘프로포클레토스’라고 불렸습니다.
그는 흑해 주변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였으며, 그리스의 아카이아 지역인 ‘파트라이’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집니다. 특히 그는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드레아의 성화나 성상에는 X자 형의 십자가와 함께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국기에 새겨진 X자는 그 나라의 수호성인인 안드레아를 상징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성인의 유해는 베드로 대성전에 모셔져 오다가,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서 그리스 정교와의 화해의 표시로 그의 순교지인 ‘파트라이’에 모셔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8)
그렇다면, 고기를 낚는 어부와 사람을 낚는 어부는 어떻게 다를까?
<첫째>로는 고기를 낚는 어부는 산고기를 죽이기 위해 잡아들이지만, 사람을 낚는 신령한 어부는 죄로 죽은 영혼들을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 잡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고기를 낚는 어부는 고기를 골라서 낚아 올리지만, 사람을 낚는 신령한 어부는 고기가 좋든 나쁘던, 곧 전교대상이 선하든 악하든 간에 낚아 올린다는 사실입니다.
<셋째>로는 고기를 낚는 어부는 자신의 그물을 치지만, 사람을 낚는 신령한 어부는 성령의 그물을 친다는 것입니다.
곧 자신의 방식으로 그물을 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가라는 데로 가며, 그물을 던지라는 쪽으로 던지며, 그분이 명령하는 방식으로 그물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우선적인 것은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8)고 하신 예수님께 자신을 내맡기고, 먼저 “사람 낚는 어부”로 양성 받아야 할 일입니다.
곧 안드레아 사도가 예수님께서 머무르는 곳에서 밤을 묵어가며 양성 받았듯이, 우리도 먼저 그분과 함께 머물며 그분 안에서 양성을 받는 그분의 제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한 사람 다섯 사람 수만 사람>
마태오 4,18-22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한 사람 다섯 사람 수만 사람>
한 사람이 걷습니다 걸으면서 봅니다 보면서 만납니다 만나면서 품습니다 품으면서 함께 걷습니다
두 사람이 일합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먹고 살기 위해서 해야만 할 때로는 고역이요 때로는 보람인 일을 합니다
걷던 한 사람이 일하던 두 사람을 봅니다 스치는 눈빛이 아니라 온 마음으로 꿰뚫듯이 두 사람을 두 사람의 노동을 두 사람의 삶의 흔적을 두 사람이 가야할 길을 봅니다
일하던 두 사람이 걷던 한 사람에게 보여 집니다 살아있는 한 원하든 그렇지 않든 받아들여야만 할 보여짐입니다
걷던 한 사람이 일하던 두 사람을 부릅니다 보여짐을 의식할 힘마저 없는 보여줄 것이 없는 두 사람을 함께 걷자고 함께 사람을 보자고 함께 사람을 살리자고 부릅니다
일하던 두 사람이 걷던 한 사람을 따라 걷습니다 보여줄 것이 없는 자신들을 보아준 이가 고마워서 걷습니다 보아준 이와 함께 사람들을 보고파 걷습니다 불러준 이와 함께 사람들을 부르고파 걷습니다 살려준 이와 함께 사람들을 살리고파 걷습니다
세 사람이 걷습니다 처음부터 걷던 한 사람이 따라나선 두 사람을 보았듯이 새로 만난 일하던 두 사람을 봅니다 따라나선 두 사람은 처음부터 걷던 한 사람처럼 새로 만난 사람을 보지 못합니다 아직은 걸음도 봄도 낯설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걷던 한 사람이 먼저 본 두 사람을 부르듯이 새로 만난 두 사람을 부릅니다
새로 만난 두 사람이 먼저 따라나선 두 사람처럼 처음부터 걷던 한 사람을 따릅니다
다섯 사람이 걷습니다 따라나선 네 사람이 걸으면서 처음부터 걷던 한 사람을 닮아갑니다 그리하여 더디지만 서서히 하나가 되어갑니다
다섯 사람 뒤에 열 사람 백 사람 수천수만 사람이 걷습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을 온전히 보는 날을 향해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을 따뜻하게 품는 날을 향해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는 날을 향해
한 사람이 시작한 걸음 위에 세 사람이 함께 내딛는 걸음 위에 다섯 사람이 하나 된 걸음 위에
열 사람 백 사람 수천수만 사람의 걸음이 곱게 곱게 포개지고 포개집니다
=====================
[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만났습니다…>
“예수와 함께 한 저녁 식사”라는 책을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으로부터 초청장을 받고 레스토랑에 마주 앉게 된 한 사람이 질문합니다. 도저히 예수님임을 확신할 수 없기에, “당신이 예수님이라면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포도주를 물로 바꿀 수 있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쉽게 대답을 하십니다. “물론이지요.” 그리고는 예수님은 웨이터를 불렀습니다. “이리와 보세요. 이 사람이 포도주 대신 물을 원합니다, 바꾸어주시겠어요?”
우리는 때로 쓸데없는 것에서 기적을 원하고, 표징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기적과 표징은 아무리 보여줘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보았던 사람들, 예수님의 기적을 경험했던 사람들도 결국은 십자가 아래서 다 도망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변하지 않는 사랑, 주님을 향한 고백, 감사의 내용은 기적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보지 않고서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호수에 어망을 던지고 있는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내가 사람을 낚다니” “도대체 우리가 사람을 낚다니 이것이 무슨 말인가?” 그리고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또 질문을 던져봅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찌 보면, 어부였던 베드로와 안드레아, 즉 그들은 사람이든, 물고기이든 낚아 올리는 데는 자신만만했던 모양입니다.
특히, 안드레아 사도 축일을 맞이하면서, 저는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알맞은 소명(부르심)을 주셨음을 묵상합니다. 요한복음 1장 35절 이하를 보면, 안드레아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성무 일도 아침기도 시편 기도 후렴2를 보면 “안드레아는 꽃다운 향기와 같아 주님이 사랑하셨다.”라고 노래합니다. 그 이유가 성무일도 독서기도 제2 독서를 보면, 안드레아는 예수님과 함께 머물며 많은 것을 배운 후 이 보화를 자신 안에 감추지 않고 급히 자기 형제에게로 달려가 자기가 배운 것을 그와 함께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안드레아는 더욱이 자기가 모든 것을 자세히 설명할 능력이 없는 것을 인정하고는, 기쁘고 성급한 마음으로 잠시의 지체함도 없이, 자기 형 시몬을 빛의 근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제 고운님들 여러분 자신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 자기 잘 맞게 주신 하느님이 주신 소명이고 부르심이심을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고운님들이 지금 하는 일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습니다.” 왜냐하면, 고운님들이 하는 모든 일이 하느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예수님의 말씀에는 화를 복으로 바꾸시는 능력이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어부에게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 앉은뱅이와 중풍 병자에게는 “일어나라”, 나병 환자에게는 “깨끗하게 되어라.”, 죽은 이들에게는 “무덤에서 나오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저희에게 “살아있음에 감사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고운님들이 오늘 영적일기를 받고 내일 또다시 영적일기를 받아보는 시간까지 적어도 5번 이상 성질(꼬락서니) 부릴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애냐 하면, 그 성질을 참는 것이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보지 않고 믿는 행복으로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간호하는 이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가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얻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 일기를 마무리하면서…. 고운님들은 “살아있음에 감사하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일을 최선을 다하여 어렵고 힘든 순간들이 변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은총 가득한 복된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
+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331)
♧♧ 시편 64편 5절… "무죄한 이를 숨어서 쏘려 합니다. 느닷없이 그를 쏘고서는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 무죄한 이... 이는 다윗이 자신을 지칭한 말로서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그 율법을 근거하여 그대로 행하며 정결한 삶을 살려고 노력했음을 하느님께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을 해치려 드는 원수들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그러하다는 것이지, 결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행위의 완전함을 주장하는 말은 아닙니다.
* 쏘려 합니다... 다윗을 대적하는 무리가 공개적으로 다윗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게 그리고 민첩하게 다윗을 공격함을 말합니다. 물론 이는 물리적인 공격이 아니라 거짓과 중상모략에 의한 타격을 가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이는 다윗을 해치려하기 위해 모의하며 묘책을 찾고, 또 그 일을 실행함에 있어서도 양심의 가책이나 하느님 앞에서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이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 시편 64편 6절…. "그들은 악한 일을 단단히 꾸며 내어 덫을 놓자 모의하고서는 누가 자기들을 보랴고 말해 댑니다."
* 악한 일... 구체적으로 압살롬의 일당들이 다윗의 왕위를 폐하고 다윗의 생명을 취하려고 모의한 모든 악한 계획들을 가리킵니다.
* 덫을 놓자 모의하고서는... 사냥꾼이 그물이나 올가미를 놓아 짐승을 사로잡으려고 하듯, 다윗을 해치려는 틈을 찾으려고 함께 머리를 맞대며 모의를 도모하는 등의 다윗의 대적들의 간악함을 나타내 줍니다.
* 누가 자기들을 보랴고 말해 댑니다... 이 구절은...5절의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와 대구를 이루어 악인의 악한 행위가 궁극적으로 자신의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임을 증명해 주는 말씀입니다. 악인은 악을 행하고도 제 마음 속으로 말합니다. “‘하느님은 잊고 있다.’ ‘얼굴을 감추어 영영 보지 않는다.’(시편 10편11절)” 또한 보소서, 그들은 입으로 거품을 내뿜고 입술에는 칼을 물고서 말합니다. “대관절 누가 듣는단 말이냐?(시편 59편 8절)” 하며 교만해 합니다. 그러나 세상 창조 전부터 이제까지 앞으로도 항상 계시는 하느님은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으로 모두 살펴보고 계실 뿐 아니라 장차 적당하고 알맞은 때가 되면 각 사람의 행위대로 선과 악 사이에서 엄정하게 보응 하실 것입니다.(시편 55편. 20절. 참조)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7~80년대의 대학가를 이야기하는 소설책을 읽었습니다. 제가 학교 다니던 시대(저는 8~90년대입니다)보다 훨씬 더 옛날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읽으면서 제가 다닐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문득 요즘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과 저 때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매우 다를까요? 아닌 것 같습니다.
똑같이 사랑하고, 똑같이 먹어대고, 똑같이 놀고 있습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최첨단 IT가 함께 하고 있다는 것뿐, 근본적인 것은 거의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친한 고등학교 동창 딸이 제게 묻습니다.
“삼촌, 아빠 고등학교 때 열심히 공부했어요?”
아이의 생각이 궁금해서 “네 생각은 어떠했을 것 같아?”라고 물었습니다. 아이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빠 머리는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러나 공부는 열심히 했을 것 같아요. 지금 이렇게 고지식한 것을 보면…….”
제가 알고 있는 이 친구는 공부를 너무나 싫어했습니다. 대신 노는 것을 좋아했고 우정과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공부하지 않는 딸이 걱정이라고 말합니다.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녀들이 늘 걱정되는 것도 변함없이 이어져 왔고, 자신은 그러지 못하면서 자녀에게 강요하는 것도 똑같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지금 시대와 상관없는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도 똑같이 울려 퍼지는 힘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르심은 과거의 일회적인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그대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을 맞이하는 오늘, 복음에서는 시몬과 안드레아를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계를 책임졌던 배와 가족을 뒤로하고 주님을 곧바로 따르지요.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십니다. 세상의 것들을 염려하면서 꽉 움켜잡고서는 주님을 제대로 따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했던 사도들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지금을 사는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었는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
{만족한다는 것}
오랜만에 만난 어떤 자매님께 “어떻게 지내세요?”라고 물으니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네. 다 좋아요.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이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최고의 삶, 완벽한 삶을 살고 있다는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현재의 삶에 만족한다는 것으로 ‘행복하다’는 또 다른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최고의 삶, 완벽한 삶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쩌면 그런 삶 자체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생각해 보면 만족하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여기에 무엇인가 더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만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행복은 그렇게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을 어떻게 만족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이를 충족시키면 그만입니다.
남과의 비교? 이것은 남의 삶을 따라서 사는 것이고, 그래서 나의 만족을 충족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는 것, 더 많이 가지려는 마음을 멈추는 것 등이 소소한 것에서도 충분히 행복을 발견하게 해 줄 것입니다. 행복하십시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북미주 사제 협의회 이사회에 다녀왔습니다. 북미주에는 120여 개의 한인 공동체가 있고, 150여 명의 사제가 함께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구에서 온 사제, 수도원에서 온 사제, 미국 교구에서 서품받은 사제가 함께 연대하고 있습니다. 목적은 북미주에 이민 온 교포들과 자녀들의 신앙에 도움을 주기 위함입니다. 사제들을 위한 피정, 연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선교지로 온 사제, 수도자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북미주 교우들을 위한 매일미사 책을 발간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평화신문은 복음을 전하고, 공동체의 소식을 나누기에 매년 참석하고 있습니다.
모임 중에 즐거웠던 건 사제들과의 대화도 있었지만, 사제들의 강론을 듣는 것도 큰 즐거움입니다. 한 신부님이 강론 중에 ‘빅뱅’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우주의 시작에만 빅뱅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부족한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로 성사를 집전하는 사제가 되는 것이 ‘빅뱅’이라고 하였습니다.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제게도 빅뱅이 많았습니다. 신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멀리 미국까지 와서 신문을 제작하는 것도 빅뱅입니다. 거주자 등록증도 나오고, 운전 면허증도 나오고, 이렇게 사제모임에 올 수 있는 것도 빅뱅입니다. 감사하면서 지내면 하루하루가, 순간순간이 빅뱅입니다. 원망하면서 지내면, 짜증내면서 지내면 하루하루가, 순간순간이 어둠입니다.
‘성실함’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매일 일만 하는 것이 성실함이 아니라고 합니다. 놀 때는 신나게 놀고, 일할 때는 신나게 일하는 것이 성실함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루 쉬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실한 사람을 좋아하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속성이 성실함이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만물이 조화롭게 움직이는 것도 하느님의 성실함에서 옵니다. 꽃이 피고, 바람이 불고, 해가 뜨는 것도 성실함에서 옵니다. 자연이 성실하듯이, 우리도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은 교회의 전례력으로 한해를 마감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내일부터는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합니다. 교회의 전례력은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는 대림 시기를 지내고 있으며, 대림 시기는 예수님의 탄생 4주 전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오늘은 예수님의 탄생 4주 전입니다. 2019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올 한해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감사드리며, 주님 앞에, 이웃들에게 부족한 점이 있다면, 잘못한 것이 있다면 겸손하게 뉘우치면서 주님의 자비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길을 충실하게 따라간다는 것은 ‘겸손, 희생, 봉사, 나눔’의 삶이기 때문에 때로 고단하고, 힘들기 마련입니다. 못자리에서 옮겨져서 논에 심어진 벼는 알찬 열매를 맺기 위해서 뜨거운 태양도, 거센 바람도, 사나운 비도 온몸으로 받아야 합니다. 사제는 세상에 나와서 홀로서야 하기에 많은 유혹을 겪게 됩니다. 규칙이 보호해 주는 것도 아니고, 학교의 울타리가 지켜 주는 것도 아니고, 동료들과 함께 지내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뭇가지에 앉은 새는 가지가 부러질까 염려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신의 날개를 믿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라는 날개가 있다면, 매일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의 날개가 있다면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 또한, 날개가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오늘은 서울대교구 교구장이신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님의 축일입니다. 추기경님께서 영육 간에 건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닮의 여정> -버림, 떠남, 따름-
오늘은 성 안드레아 사도 순교축일이자 11월 위령성월 마지막 끝날이고, 오늘 아침미사로 우리 수도공동체의 연피정도 끝나는 날입니다. 참으로 넉넉하고 자유로웠던 피정기간이었습니다. 끝은 시작입니다. 내일 부터는 12월 첫날이자 전례력으로 새해 첫주일인 대림 제1주일입니다.
참으로 감사했던 11월 위령성월이었습니다. 예닮의 여정에 더욱 충실해야 겠다는 다짐을 새로이 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의 배치도 적절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성소와 신원을 새롭게 확인하게 됩니다. 갈릴레아 전도를 시작하시면서 우선 네 어부를 제자로 삼으시는 주님이십니다.
“나를 따라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어부로 삼겠다.”
네 어부들,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 형제들뿐 아니라 오늘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이십니다. 한 번으로 끝나는 부르심이 아니라 죽는 그날까지 매일 새롭게 당신을 따르라 부르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 당신의 제자이자 사람낚는 사랑의 사도로 부르십니다.
바로 오늘 네 어부들중 하나였던 안드레아 사도 순교 축일을 지내는 우리들입니다. 성인은 오늘날 그리스땅 펠레포네소스반도 북서쪽에 있는 파트라스에서 엑스(X)자형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했다 합니다. 사도는 스콧트랜드의 수호성인으로 스콧트랜드의 국기 전면의 X(엑스)자도 이에 근거합니다.
네 어부들은 물론 우리의 부르심의 성소는 분명히 은총입니다. 우리가 먼저 따라 나선 것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이 선행했다는 것입니다. 왜 사도를, 우리를 불렀는지 주님만이 아시는 성소의 신비요, 이는 우리가 평생 묻고 깨달아야 하는 화두입니다.
“우리는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라는 유다인 랍비 여호수아 헤쉘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부르심으로 인해 우리 모두 신원의식 뚜렷한 주님의 제자와 사도로, 또 하느님의 자녀답게, 존재감 뚜렷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네 어부들이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면,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네 어부들은 평생 갈릴레아 호수에서 ‘출구없는’ 무미건조하고 무의미한, 허무한 반복의 삶을 살다가 인생 마쳤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만약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면 어디선가 십중팔구 존재감 없는 무의미한 삶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소에 ‘만약’은 부질없는 질문입니다. 우리의 성소는 우연이 아닌 하느님 섭리의 은총이요 필연입니다. 주님 은총의 부르심으로 인해 복음의 제자들처럼 주님은 우리의 운명이자 사랑이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 예수님을 따라 나선 제자들입니다. 버림-떠남-따름이 하나로 연쇠고리로 이어져 있음을 봅니다. 한번이 아니라 매일, 평생,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떠나, 탈출하여 주님을 따르는 예닮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중심이자 의미임을 뜻합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운명적 공동체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평생 주님을 따르면서 주님과 일치가 깊어지면서 주님과 나에 대한 앎도 깊어져 비로소 무지로부터 해방된 자유인이 될 것입니다. 이런 부르심에 응답한 믿는 이들에게 성소의 기쁨을 깨닫게하는 바오로 사도입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믿고 따르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우리 모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새삼 예수님을 따르는 예닮의 여정은 구원의 여정, 탈출의 여정, 자유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막연한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따르며 말씀공부와 실행이 믿음의 필수 요소임을 깨닫습니다.
예닮의 여정, 구원의 여정, 탈출의 여정, 자유의 여정중에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의 일치요 더불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주님의 신망애, 진선미의 제자요 사도들이 될 것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바로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한 우리들의 삶자체가 아름다운 복음 선포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항구히 충실히 주님을 따르는 제자요 사도로 살게 하십니다. 끝으로 제 행복기도, 일명 예닮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 은총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삶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생명, 저의 사랑,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이제 당신을 닮아 온유와 겸손, 인내의 사람이 되는 것이 제 소망이오니 간절히 청하는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 당신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따름으로 얻게 되리라>
축일을 맞이한 분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사도의 삶을 잘 살 수 있는 은총을 입으시길 기원합니다.
제자들은 처음부터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른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기꺼이 따름으로써 큰 믿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온전히 따르려니까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야 했고 마침내 버림으로써 주님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실 익숙해진 자리를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안주하지 않고 도전할 때 새로운 것을 얻게 됩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은 단지 마음과 행동의 변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주님을 따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정녕 나는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리라.”(이사 43,18)
도전할 때 새 일을 만날 수 있고 또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시몬 베드로와 형제지간입니다. 특별히 요한과 길을 걷다가 예수님을 만난 일이 있는데 그는 곧장 집으로 달려가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1,41) 하며 형에게 말하고, 예수님께 자신의 형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에게도 소개하였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요한6,8-9)를 가진 아이를 예수님께 데려간 사람도 안드레아 입니다.
그는 혼자만 메시아를 따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소개하는 열성을 보였습니다. 그는 보고 들은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의 생활에 참여함으로써 삶의 쇄신과 회개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안드레아는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따랐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삶의 자리에서 우리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며 “따라 오너라” 하십니다. 따르고 안 따르고는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따르는 사람에게는 새 삶이 열려있습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 그물이나 배, 아니면 가족? 일지라도 단호하게 버리고 주님 안에 머물면 그 모든 것이 주님의 것으로 넘치도록 채워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의 나라를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따라야겠습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일상 안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끊임없이 대립합니다. 그러나 그 선택에 따라서 주님의 제자가 되기도 하고 세상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버릴 것은 확실히 버릴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청합니다.
그리고 안드레아가 형에게 자기가 만난 주님을 알렸듯이 주님의 체험을 전해야 합니다.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무엇보다도 행실로써 전해야 합니다. 주님을 따름으로서 믿음을 견고케 할 수 있듯이 믿음이 약한 이들이 우리를 보고 믿음을 새롭게 할 수 있다면 주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큰 나무는 잘 부러지지 않고 큰 강물은 소리를 내지 않으며 깊은 샘물은 마르지 않는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답니다. 예수님이 크신 분 이셨듯이 우리 모두가 큰 사람 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은 교회 전례력으로 2019년 다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마침 성 안드레아 사도의 축일로 한 해를 마무리하게 되었네요. 파견과 선포로 이어지는 교회의 사명을 다시 한번 기억하며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합시다.
오늘 복음의 부르심 기사는 참 담백합니다. 군더더기가 전혀 없이 간결한 언어로 이어집니다. 부르시는 분이나 부르심 받는 이들의 심리 묘사도 부연 설명도 없이 착착 진행됩니다. 너무 간결해 건조해 보이지만 덕분에 모호함 없이 명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시다가"(마태 4,18)
그러고 보니 예수님은 혼자셨네요. 오늘은 특히 호숫가를 지나시는 예수님이 "홀로"이셨음이 눈에, 그리고 가슴에 들어왔습니다. 그분은 세례를 받고 성령에 이끌려 들어간 광야에서 목숨을 건 단식 여정을 거치신 뒤 갈릴래아에서 전도를 시작하셨지요. 그렇게 얼마간 그분은 혼자셨을 겁니다.
성 삼위 하느님과 일치 안에 계시는 그분께는 홀로이심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비록 인성을 입으셨으나 홀로 충만하고 완전하신 분이니까요. 하지만 그 충만한 사랑을 나누고, 다가올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널리 선포하기 위해서 함께할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바로 오늘이 그 역사적 순간이지요.
"그들은 어부였다."(마태 4,18)
예수님께서 어망을 던지고 있는 두 사람을 보십니다. 어부들입니다. 다른 이들, 좀 더 학식 있는 세도가의 전도 유망한 젊은이를 원하셨다면 성전이나 회당 근처에 가셨겠지요.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은 현장에서 땀흘려 노동하며 일상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특별할 것 없이 일상 안에 움직이는 우리를 "보시고"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9)
예수님은 상대방의 일상성을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인정하고 존중하십니다. 어부들에게 '힘들게 그러고 살지 말고 다른 일을 하자'고 꾀시는 게 아니라, 어부로서의 자질과 경험을 살려 진짜 어부로 함께하자고 손을 내미신 겁니다.
언젠가 낚시를 좋아하는 지인에게 "낚시는 운에 달렸는지 기술에 달렸는지" 물은 적이 있습니다. 내심, '물고기가 와야 미끼를 무는 거니까 순전히 운에 달린 게 아닐까' 선입견을 가지고 물은 건데 의외의 답이 돌아왔습니다. 운도 필요하지만 결국은 기술이라고요. 다가감, 집중력, 인내, 아주 미세한 움직임도 알아차리는 섬세함과 민감함, 최적의 순간을 포착해 낚아챔, 밀고 당김, 힘 조절...
어부의 일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협력하는 모든 일과 노동에는 나름대로의 영성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걸 발견하면 일상이 새롭고 경이로운 영성의 장이 되고, 간과하고 무시하면 지루하고 피곤한 소모적 일터일 뿐이겠지요.
"그물, 배, 아버지"(마태 4,20.22)
부르심을 받은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곧바로" 버린 목록입니다. "그물"은 생계 유지의 직접적 도구이고, "배"는 그보다 좀 더 규모 있고 다방면으로 활용할 수 있는 운송 수단도 되는데 둘 다 세상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자기를 성장시키는데 필요한 자산들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혈연으로 묶인 일차적 가족관계입니다.
이 모두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은 세상 원리와 혈연에 집착하는 삶을 초월하겠다는 결단입니다. 지상 원리에 자신을 묶기보다 천상 원리에 속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고요. 당시 한창 노동 중이던 그들이 그 순간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으로서의 정체성과 역사 인식을 소홀히 하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일 겁니다. 해방자 메시아의 출현과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열망하고 꿈꾸면서 일상에 충실히 몸담고 있던 중이었을 겁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교회의 본질인 선교 사명의 원리를 들려줍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
먼저 말씀이 계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로부터 파견되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하느님의 뜻을 말씀과 행동으로 전하십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는 듣는 이의 귀뿐만 아니라 마음도 울립니다. 가르침과 기적뿐 아니라, 그분의 수난과 죽음까지도 선포의 일환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
이 선포를 들은 이는 믿게 됩니다. 말씀이신 성자와 그분이 이루신 하느님 나라를 믿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로서 친히 희생되신 구원자 메시아이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가 받아들인 말씀이 목 끝까지 차올라 이를 선포하러 달려나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온 존재로 들은 말씀이 그의 심장에서 타오르기 때문에 그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로마 10,10)
그의 믿음과 고백이 울려퍼지면, 들은 누군가의 귀와 마음에서 또 다른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가 충실히 채워오던 일상의 자리에서 그 선포를 껴안고 믿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그 믿음을 고백하러 또 달려나갈 것입니다. 이렇듯 구원의 고리는 파견과 선포와 믿음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일상을 채워가는 가운데 믿고 듣고 파견되고 고백합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세례와 함께 성령의 인장을 받은 우리는 존재 전체로 그렇게 살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의 정체성과 실존을 무시하지 않고 함께 끌어안으셨기에, 우리는 온 존재로 주님께 받아들여졌고, 그래서 우리의 선포는 온 존재로 이루어집니다.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고 그 말은 땅끝까지 번져 나가네."(화답송)
그러니 말주변이 없다고 숫기가 없다고 움츠러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입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눈빛, 미소, 손짓, 말투, 움직임, 관심, 기도, 눈물과 한숨에서도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을 맞아 주님의 충실한 제자이고 사도인 여러분을 축하합니다. 지난 한 해 수고 많으셨습니다.
=====================
[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매순간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종요한 선택을 함
이기적인 것처럼 느껴지는 선택안과 자신을 피곤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선택안 사이에 고민하는 사람들은 어떤 쪽으로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한다.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기억해 둘 것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매순간 인생을 바꿀 수도 있는 중요한 선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선택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내 영혼의 리필」에서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베드로와 시몬 그리고 동생 안드레아가 어부라는 직업을 버리고 따라 나섰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요즘은 예수님의 말씀이 젊은이들에게 힘이 없는듯 합니다.
워낙 세상이 감각적인 것에 열려있고, 안정된 직업을 가진 사람은 누리고 싶어 주님을 따르지 않고, 취준생은 그들만의 이유로 주님을 따르는 생각에까지 미치지 못합니다
듣고 들은바를 행하면 다 채워주시는 주님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들은 것을 실천하는 내가 될 때 가능합니다.
"들음을 행하면 비로소 알게 됩니다."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태 4, 20)
날마다 예수님을 따르는 순간순간이 우리의 삶입니다.
시작이 반이듯 예수님을 따르는 첫걸음이 중요합니다.
따른다는 것은 깨어난다는 것입니다.
따름을 통해 삶의 새로운 모습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따른다는 것은 내려놓는다는 것입니다.
내려놓아야 제대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버린다는 것은 낮은 곳으로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낮아지기에 끝까지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버리지 않고서는 복음이라는 엄청난 기쁨을 다시 얻을 수 없습니다.
엄청난 선물은 버리고 따르는 변화를 통해 주어집니다.
버려야 할 곳도 따라야 할 대상도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 복음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우리를 이끄시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습니다.
곧바로와 날마다의 결단과 응답속에서 우리의 오늘은 어제와 사뭇 다른 오늘의 시간이 됩니다.
"나를 따라오너라."(마태 4, 19)
###############
(2)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어제는 고기를 낚았지만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인 따름을 통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됩니다.
사람을 낚는다는 것은 하느님 자녀인 본래의 우리 모습으로 돌아가도록 믿음으로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너무 많은 것을 쫓기에 부르심의 가치도 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쫓는 사람은 결코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자기최면에 빠져 사는 우리들을 깨우기 위해 우리들을 친히 부르십니다.
부르심은 아름다운 삶을 일깨워 주는 엄청난 은총의 사건입니다. 부르심은 우리의 따름을 통해 구체화되며 삶의 방식 또한 바뀌는 결단의 여정입니다. 모호한 결단이 아니라 내부를 바꾸는 분명한 결단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평생을 걸쳐 그분만을 믿고 따른다는 것입니다. 따름의 시간과 믿음의 시간은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은 처음과 끝을 한결같게 합니다.
부르심이 믿음의 시작이라면 따름은 믿음 없이는 따를 수 없는 우리의 모든 순간들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견디고 모든 시간을 나누게 하는 부르심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진심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르심을 통해 우리를 깨우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