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모임은 당초 롯데월드 인근의 석촌호수 벚꽃을 보며 호수 산책로를 돌아보기로 하였지만 이상기온에 의해 벚꽃이 이미 만개시기가 지나 일정 변동 등을 고려했지만 갑자기 일정을 변동하기가 힘들어 벚꽃 대신 만개된 철쭉을 보는 것으로 하여 모임을 갖었다.
다행히 오늘 날씨가 화창하여 모임을 갖는데 지장은 없었으며 점심장소로 10명의 참석자들이 시간내에 도착하여 오랫만에 그동안 모임을 갖었던 장소를 떠나 참치로 메뉴를 하여 점심을 갖었다.
회장의 인사와 김윤석 왕회장의 유머로 시작된 자유분방한 토론은 김용석 동기의 『박헌영과 결혼한 경성 최고의 미녀 '주세죽'의 삶과 제주 4.3사태 및 여수 반란과 대구.영천 사태』등 다양한 이야기와 최근 동기생들이 겪고있는 고엽제와 연관된 질병에 대한 건강관리 등 이야기가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
점심 식사 후, 선약이 되어있는 일부 회원을 제외하고 6명의 동기들은 롯데호텔 부근에 있는 석촌호수의 철쭉을 보기위해 도보로 이동하며 중간에 있는 우리의 치욕의 역사로 남아있는 '삼전도비'를 돌아보기도 했다.
석촌호수에는 많은 사람들이 2563m의 산책로를 따라 걷고들 있었으며 우리들도 같은 일행이 되어 약 40분 정도의 산책을 하며 주위의 철쭉을 감상하였다. 산책 후 호수를 바라보는 찻짐에 들려 차와 다과를 들며 환담을 한 후 오후 3시가 지나 다음달에 만날 것(5월 17일)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참치 정식으로 점심을!
석초호수 부근의 삼전도 비
활짝 핀 철쭉을 배경으로
석촌호수를 바라보며
찻집에 앉아
《 참고 》
삼전도비
점식 후 철쭉이 피어있는 석촌호수로 이동하며 부근에 있는 석촌호수의 동호 서호를 가르는 송파대로 북편에 있는 '대청황제공덕비'의 비각을 찾아갔다.
이 비는 1636년 12월 청 태종이 대병을 이끌고 침공하였을 때, 남한산성에서의 항전을 뒤로하고 백성의 안위를 위해 인조가 삼전도에 나아가 항복한 사실을 보여주는 우리 민족 치욕의 유적이다. |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난 후,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던 인조가 결국 1637년 청나라의 군대가 머물고 있는 한강의 삼전도 나루터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게 되었다. 항복 의식으로 인조는 청나라 태종 앞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조아리기를 반복하는 ‘삼배구고두’를 했다.
청나라 태종은 항복 의식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공덕을 새긴 삼전도비라는 비석을 세우도록 조선에 강요하였다. 삼전도비의 정식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이지만 문화재 지정 당시의 지명을 따서 삼전도비라고 지어졌다. 비석에는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한 이유, 조선이 항복한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
부끄러운 역사를 지닌 유적이지만 비석의 앞면에는 몽골 글자, 오른쪽에는 만주 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비문이 쓰여 있어 만주어 및 몽골어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석촌호수
현재의 석촌호수 북쪽 잠실벌은 서호의 남쪽에 나룻터가 한강이었으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토사가 쌓여 인공 섬이 생기면서 광진교 밑에서부터 잠실야구장까지 지금의 석촌호수를 지나는 송파강과 신천강을 이루는 샛강이 생기게 되었다.
1969년 한강 본류의 하상 정비 개발에 착수하면서 이 강을 매립하였으나 일부는 남겨 놓았고 1980년대 초 이 호수를 정비하면서 공원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송파나루공원'은 송파대로가 개통하면서 동서로 같은 모양의 동호, 서호로 나누어져 있으며 호수와 공원으로 조성된 이상적인 형태의 공원으로 둘레가 2563m로서 조깅 코스 및 산책로가 설치되어 있어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석촌호수의 면적은 217,850㎡이고 담수량은 737톤으로 수심은 4~5m이며 수원은 한강물로 1971년에 조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