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천산
전북 순창과 전남 담양군의 도계를 이루는 강천산은 비록 산은 낮아도 깊은 계곡과 맑은 계곡 물, 그리고 기암절벽이 병풍을 치듯 늘어선 모습으로 "호남의 소금강"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단풍나무가 유난히 많은 강천산은 매년 11월 초순께 절정을 이룬다. 특히 강천산만의 자랑인 아기단풍이 곱게 물들 때 더욱 장관이다. 등산로가 가파르거나 험하지 않다.
등산로 초입부터 병풍바위를 비롯, 용바위 비룡폭포 금강문 등 명소들이 즐비하고 금성산성도 옛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오밀 조밀한 산세에 감탄하게 된다. 이러한 관광자원에 힘입어 1981년 1월 우리나라 최초의 군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강천사와 삼인대 사이를 지나 홍화정 옆길로 들어서면 50m높이에 걸린 구름다리(현수교)가 아찔하게 보인다.
강천산은 최근에 벚꽃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대개 4월초 피기 시작해 10일께 만개한다. 자연생 「산벚꽃」으로 꽃이 잘고 빛깔이 희고 맑다.
벚나무는 강천산 입구 강천호 주변을 에워싸고 있으며 등산로 어디에서든 볼 수 있다. 강천계곡 6㎞구간을 지나 정상에 이르면 전망대가 있다. 이곳에서 산 아래 흰빛 벚꽃물결을 감상할 수 있다.
천산에는 신라 진성여왕 때 도선국사가 창건한 고찰 강천사가 있다. 강천사는 신라시대 도선국사가 창건한 고찰. 한때는 1,000여명의 승려가 있던 큰 절이었다고 한다. 절 뒤로 치솟은 암벽과 강천산 암봉이 어울려 한 폭의 그림처럼 멋지다.
금성산성
담양 금성산성은 산성산 위에 축조된 포곡식 산성으로 산성산은 최고 해발 603m의 높이로 깎아지른 바위 벼랑이 이어진 산이며, 주변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게다가 부근에는 이보다 높은 산이 없을 뿐만 아니라 산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널찍한 분지 형태로 되어 있어 이 곳에 성을 쌓아 두면 나는 새가 아닌 이상 바깥에서는 결코 성안을 볼 수 없는 지형으로 된 천혜 요새지이다. 또한 성 안에는 샘이 풍부하여 충분한 식량만 쌓아 놓는다면 매우 오랜 시간동안 성을 지키며 적군을 붙잡아 둘 수 있는 훌륭한 조건까지 갖추었다.
과거 조선은 지역을 지키기 위해 평지에는 읍성, 배후 산에는 산성을 동시에 축조했으며, 평시에는 읍성에서 관리와 백성들이 생활을 하다가 적이 쳐들어오면 산성으로 옮겨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단단히 지키는 방식을 사용했다. 그러나 담양에는 읍성이 없었기 때문에 이 금성산성은 평시 읍성의 역할도 상당부분 맡았으리라 짐작된다. 현재 금성산성에는 관아와 민가터가 많이 남아있어 옛날 이곳에 많은 병사들이 주둔하여 주변을 경계했다.
금성산성의 최초 축조 시기는 길게는 삼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도 하지만 실제 역사 기록에 처음 나타난 것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기록이다. 고려 우왕 6년(1380년) 에 왜구에 대비하며 개축했는데 '금성(金城)'이라 했다 한다. 그런 것을 보면 실제로는 그보다 더 오래 되었다는 이야기이인 것도 같다. 비록 성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이보다 이전인 고려 고종 43년(1256년)에는 몽고의 차라대군이 담양에 주둔했다는 기록도 있다.
'금성산성'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한 것은 조선초 태종 임금님 때로 1410년 전라, 경상도의 12개 산성이 수축된 기록에 나온다고 하며,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도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추월산에 석벽이 사방을 둘러 둘레가 9,018척, 13천(샘)이 있고, 연동사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이 가까워 오자 조선은 국가방위를 강화하기 위해 입보농성의 최적지인 산성의 보수를 서두르게 된다. 이 때 담양 금성산성 역시 대대적인 개보수 공사를 했으며 계속적인 보강이 이루어져 이때부터 금성산성은 장성 입암산성, 무주 적상산성과 함께 호남의 3대 산성으로 불리게 된다.
금성산성은 그 훌륭한 지정학적 위치만큼이나 역사적으로 전화를 겪어 왔다.
고려 시대에는 몽고군에 맞서는 항몽의 전적지로, 임진왜란 당시에는 의병의 거점으로 노령을 넘어 호남으로 진출하려는 왜군과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특히 정유재란 때의 전투는 피로 피를 씻는 치열한 격전으로, 전투가 끝난 후 외남문인 보국문 오른편 깊은 골짜기로 전사자를 치우고 보니 시신이 무려 2,000여 구에 달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 골짜기의 이름을 '이천골(二千骨)'이라 부른다고 한다.
개화기에도 녹두장군 전봉준의 동학군이 이 곳을 거점으로 삼아 진압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전봉준이 잡혀 죽임을 당한 이후 이곳 금성산성도 결국 관군에게 점령되어 성 내의 전각과 모든 시설들이 불에 타버리는 참화를 겪게 된다.
금성산성은 돌로 쌓여진 석성이며,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의 2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금성산성의 전체길이는 7,345m로 외성이 6,486m, 내성이 859m이며, 연면적은1,197,478㎡(362,237평), 내성의 면적은 54,474㎡(16,478평)이다.성의 전체 크기를 판가름하는 외성은 연대봉과 철마봉, 시루봉 등의 바위로 된 산봉우리를 따라 길게 이어져 있는데, 대부분의 구간이 아찔한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지형을 잘 이용하여 방어력을 한껏 높이는 한국의 산성답게 가끔씩 바위 벼랑을 그대로 자연성벽으로 이용한 곳들도 있다.
바위 능선이 매우 험준한 곳이 많아 지정된 문이 아닌 곳으로는 통행이 어려우며, 심지어 병사 한명 없이도 능히 지켜지는 구간이 전체 외성의 약 30%에 이른다고 하니 방어요새로서 금성산성의 가치는 이루 말할 필요가 없을 듯 하다.
특히 현대에 산 아래 담양댐이 건설되며 서쪽 성벽의 바위벼랑 아래로는 인공 호수의 깊고 푸른 물결마저 넘실거리게 되어서, 풍경의 아스라함을 한껏 더한다.
1991년 사적 제353호로 지정되어 관리되어 지금의 모습은 최근에 복원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