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턴트맨입니다.
위험한 연기를 할때 주인공대신 대역을 해주는 게 제 직업입니다.
이를테면 절벽에서 강으로 추락하는 승용차안에는 잘생긴 주인공
대신 제가 앉아있습니다.
주인공이 멋진 공중회전 돌려차기로 상대방을 쓰러뜨릴때
공중에서 도는건 저입니다.
마무리를 짓고 거만하게 쓰러진 상대방을 내려다보면서 흡족한
미소를 짓는것은 주인공의 몫입니다.
피아노줄 하나에 의지해서 공중을 날기도 하고
달려오는 승용차에 부딪치기도 합니다.
부딪히기 전에 미리 액션을 취해서 충격을 흡수하기도 하지만
팔과 다리에 보호대를 착용하기도 하지만
팔다리가 부러지는건 흔한 일입니다.
오늘은 덕수궁에서 영화를 찍습니다.
난 거기서 자객 역할을 맡았습니다.
복면을 쓰고 임금을 시해하려는 역할이지요,
물론 아시겠지만 주인공은 따로있고 전 역시 대역입니다.
두시까지 나오라는 연락을 받고 영화를 찍으러 나왔습니다.
마침 이근처에서 약속을 잡아놓았던 지라 저는
조금 일찍 나왔습니다. 아 조금이 아니군요, 두시까지 모이라는데
전 열두시반에 여기 도착했습니다.
약속이펑크나서 전 미리 점심을먹고 덕수궁 입구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자판기 커피를 빼서 마시는 중입니다.
그때 저쪽에서 허름한 옷을 입은 중늙은이 한명이 나옵니다.
"담배한대 빌립시다."
대뜸 내게 다가온 중늙은이가 말합니다.
담배를 내밀자,
"이왕이면 불까지 빌립시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라이터를 붙여 드렸습니다.
담배불을 붙이려고 내민 노인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노인의 품속에서 무언가 툭 하고 떨어집니다.
그것은 아주 잘 장식된 단도였습니다.
"멋지군요."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습니다.
정말 멋집니다.
한뼘 정도의 단도는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고 표면에는 용 두마리가
서로 얽혀서 여의주를 마주 물고 있습니다.
노인이 단도를 단도집에서 쑥 빼자 스르릉 소리가 나는듯 하더니
반짝하고 날카로운 검빛이 내눈을 어지럽힙니다.
날이 새파랗게 선 정말 금방이라도 손을 베일듯 합니다.
"아니 왜 이런 걸 가지고 다니죠?"
내가 묻자,
"시간이 되시면 제가 설명해 드리죠"
노인이 이러는 겁니다.
그리고 노인의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조선조 명종 무렵, 우리의 조상이신 이길수 어르신께서 청석골을
지날때였습니다. 이건 비사입니다. 정사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입죠, 이길수 어르신께서는 정도술을 익히셔서 달인의 경지에 이르신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청석골을 지나다가 그만 임꺽정의 도적떼
를 만났습니다. "길을 비켜라, 난 강서고을에 사는 이길수니라"
도적들이 웃었습니다. "가진거 다 내놓고 가거라 살려줄테니."
우리의 선조이신 이길수 어른께서는 대결자세를 취했습니다.
그래서 대결이 시작되었지요, 열일곱명의 도적들을 맨손으로 쓰러뜨리자
기별을 받고 청석골의 두령인 임꺽정이 나왔답니다.
"대단한 놈이로구나,"
임꺽정이 나서면서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무기를 골라라, 네 실력을 한번보자"
그러나 우리의 선조이신 이길수 어르신께서는 무기를 잡지 않았습니다.
"네가 맨손이라면 천하의 임꺽정도 맨손으로 상대하마"
그리고 피터지는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임꺽정하면 다들 아시겠지만
대단한 완력의 소유자이며 싸움 솜씨또한 탁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선조이신 이길수 어르신역시 대단합니다.
먼지만 폴폴 날리면서 서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그렇게 대단한 결투를 본적이 없다고
나중에 청석골 두령들이랑 졸개들이 입을 모아 말했답니다.
점심때가 조금 지나서 시작된 싸움은 해가 질때까지 승부가 나지 않았
습니다. 해가 꼴닥 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무승부가 되었습니다.
임꺽정이 대단히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습니다.
"그대를 여기 청석골에 두고 싶소."
"도적의 떼로 살란 말이냐?"
"내 평생 그대처럼 대단한 사내를 본적이 없소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대가 비록 지금 역도의 무리의 괴수라 하나
진정한 사내라 할수 있구나, 기개가 대단하고 옹졸하지 않으니
내 양반친구들보다 훨씬 사내답구나, 우리 신분을 떠나 서로 친구의
연을 맺음이 어떠냐"
"좋다 친구라 하자"
임꺽정과 우리의 선조이신 이길수 어르신은 서로를 부둥켜안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루저녁을 지내면서 밤새도록 술을 마셨답니다.
그리고 그 이튿날 이길수 어르신께서 다시 길을 떠나려 할때
임꺽정 대두령이 이 비룡도를 선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후 임꺽정이 관군에 소탕되어 그가 죽었을 때
우리의 선조이신 이길수 어르신은 사흘간 식사도 안하시고 통곡을
하시면서 이 비룡도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셨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마친 노인의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했습니다.
나는 잠시동안 이야기의 여운에 빠져있었습니다.
신분을 초월한 우정, 그리고 임꺽정이 죽었을 때 흘린 사나이의 눈물,
그리고 임꺽정이 선물한 비룡도,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소중한 가보를 왜 들고 나오신거죠?"
"하하하"
노인이 크게 웃었습니다.
"내일 저녁 역사스페셜이 방영될겁니다. 거기에 이 비룡도에 얽힌
전설이 소개됩니다. 나는 이길수 어르신의 직계후손으로 티브이에
출연하게 되어서 여기 덕수궁에서 촬영을 한겁니다.
내일 저녁 여덟시에 꼭 역사스페셜을 보십시오"
"네 꼭 보겠습니다."
노인은 비룡도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고는 품속에 넣었습니다.
"이제서야 비룡도의 전설이 세간에 알려지게 되어서 전 기쁩니다.
이제 역사속에 묻힌 이길수 어르신도 재평가 받으실 겁니다.
그분은 경상감사를 지내시고 말년에는 가평에 내려가서
무술을 후세에 전하는데 주력하신 분이십니다."
"아 예"
노인이 천천히 일어나서 걸어갑니다.
"안녕히 가세요"
노인은 나를 향해 싱긋이 웃어주고는 천천히 걸어 갔습니다.
나는 노인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때 까지 앉아서 이야기의
여운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시계를 보니 어느새 두시가 다 되어갑니다.
나는 부랴 부랴 촬영현장으로 왔습니다.
분장을 마치고 복면을 쓰고 피아노줄을 맸습니다. 크레인에 매달려
훌쩍 담을 뛰어넘어 궁궐을 지키는 병사들과 대결하는 씬입니다.
"어이 소품팀 그 단도 가져와"
단도를 임금에게 던지고 그 단도는 벽에 꽃혀서 부르르 떠는
그런 씬입니다.
"안 보이는데요?"
"소품좀 제대로 챙기라 했잖아"
뚱뚱한 감독이 화난 목소리로 외칩니다.
우리는 소품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소품팀이 여기저기 뒤지는 사이 나는 아까 그노인이 가지고 있던
그런 단도를 발견했습니다.
"이거 아니에요?"
소품팀장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습니다.
"그거 부러져서요, 어제 새로 하나 만들었거든요"
내가 조심스럽게 비룡도를 들어올리자 과연 부러져 있었습니다.
"안되겠다. 우선 강력접착제로 그걸 붙혀서 사용하자,"
소품팀장이 강력본드로 그걸 붙히는 사이 소품팀의 한명이
중얼거렸습니다.
"아까 어떤 노인네 한명이 얼쩡거려서 쫓아 버렸는데
그 노인네가 훔쳐간거 아니야?"
"관리 잘해야지, 민간인 여기 얼씬도 못하게 해야지,"
억지로 촬영을 마치고 돌아갔습니다. 이튿날 역사스페셜에서는
일본에서의 백제의 흔적을 찾는 그런 것이 방영되고 있었습니다.
카페 게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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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ː* 촬영후기*
비룡도의 비밀. (심심해서 단편소설하나 올립니다.)
행인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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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7.05 20:46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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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심심해서 장난삼아 쓴글입니다. 못썻다고 나무라지 마시고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
잘 읽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