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천리(甘川里) 일대의 감내들을 관류하는 감천변(甘川邊)은 비옥한 농경지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로부터 게가 많이 잡혔다고 한다. 이 게를 잡기 위해 서로 좋은 목을 차지하려다 보니 자연히 다툼이 일어나고 이웃끼리의 반목이 생기는 등 인심이 거칠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폐단을 우려한 마을 사람들이 게줄당기기를 하여 이긴 쪽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도록 한 것이 놀이의 동기라 한다. 그러나 이는 본디 나무꾼들이 지게꼬리 끝을 잡아 맨 것 두 개를 맞걸어서 두 사람이 목에 걸고 마치 게가 기어가는 것처럼 서로 반대 방향으로 기어가며 놀던 놀이에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게가 많이 잡히지 않으면서부터 놀이가 한동안 중단되었다가 정월 대보름과 칠월 백중 등 농한기 보(湺)나 농로를 고치기 위한 마을 공동작업을 하면서 부활되었다. 1920년대 이후 사실상 중단되었던 것을 1973년 5월 17일 밀양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제6회 경남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연함으로써 비로소 널리 알려졌다. 1982년 제23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연하여 문화공보부장관상을 수상함으로써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경상남도 시도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재 밀양민속문화보존협회에서 전승하고 있다.
게줄다리기의 줄은 여느 줄다리기와는 달리 동그란 게[蟹]의 형태로 만든다. 반지처럼 둥근 줄 주위에 게의 발처럼 곁줄(젖줄)이 달려 있다. 곁줄을 목에 걸고 땅에 엎드려 기면서 일정한 시간 동안 줄을 끌어당겨서 끌어오는 쪽이 이긴다. 우리나라에서 전승되어 온 줄다리기는 일반적으로 외줄 혹은 쌍줄을 수십 명이 마주 서서 당기는 데 비해 감내게줄당기기는 소수의 인원으로 게줄을 목에 걸고 엎드려 당긴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게줄당기기의 게줄 수는 놀이꾼의 숫자에 따라 달라진다. 어린이들은 두 사람이 겨루는 소형 줄에서부터 세 사람씩 한 조가 되는 6인용 줄로 당기기도 하였으나 대개는 다섯 사람씩 나누어 겨루는 10인용 줄이나 열 사람씩 나누어 겨루는 20인용 줄을 당긴다. 게줄당기기는 같은 수의 놀이꾼이 두 패로 나뉘어 힘을 겨루는데, 각자 곁줄 속에 머리를 넣어 목덜미에 줄을 걸고 몸을 낮게 한 다음 어깨와 허리에 힘을 주고 손과 발로 땅을 짚고 앞으로 당긴다. 놀이의 절차는 앞놀이, 본놀이, 뒷놀이 등으로 나뉜다. 앞놀이는 박씨할매당산제로 시작하여 터밟기, 젓줄디리기, 농발이놀이, 판굿, 터빼앗기, 게줄어루기 순으로 진행되고, 이어서 본놀이인 게줄당기기가 시작된다. 게줄당기기는 심판격인 ‘줄도감’이 징을 치면 줄을 당기기 시작하여 100까지 셀 동안(약 3분 정도) 당긴다. 승부는 중앙에서 줄을 많이 끌어 간 쪽이 이긴다. 게줄당기기가 끝나면 한바탕 어울려 춤을 추고 노는 뒷놀이로 마감한다.
원래는 게를 많이 잡기 위한 경쟁에서 시작되었으나 차츰 마을 사람들의 협동과 대동·화합을 위해 놀게 되었다. 아울러 당산제에 이어 놀이하는 것으로 보아 단순한 놀이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는 농경의례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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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포구락무
지정번호: 경남 무형문화재 제 12호
지정일: 1998년 12월 23일
소재지: 경남 진주시 판문동 산 171-1
경상남도 진주 지방의 교방에서 추어지던 일종의 놀이춤. 채구(용알·공)를 구문의 풍류안(風流眼)에 던져 넣은 놀이를 음악과 무용으로 형상화한 궁중가무의 하나이다.
이 춤의 내력은 고종때 진주부사를 지낸 정현석(鄭顯奭)의 교방가요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궁중문화가 지역화된 춤이다. 궁중가무가 지방교방으로 내려오면서 의상·도구·절차 등에서 변화한 것으로 점차 민속적 요소가 가미되면서 진주 지역의 특색 있는 놀이로 전승되고 있다.
이 춤의 구성과 내용은 중앙에 포구문을 중심으로 축의 편싸움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여러 가지 장단에 따른 갖가지 모양의 춤을 즉 두편이 갈라서 추어지는데 좌·우 순서로 한쌍씩 차례로 마주서서 주악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다가 오른손에 갖고 있는 채구를 던져서 풍류 안에다 넣으면 지화자를 부르고 명중시킨 사람이 나아가 앉으면 봉화(奉花)가 삼지화(三枝花)를 머리에 꽂아준다.
만약 넣지 못하면 봉필(奉筆)은 벌로 얼굴에다 먹점을 그린다. 차례대로 공을 던져 승부를 결정하고 나면 전원이 포구문을 돌면서 지화자를 부르고 자리로 되돌아간다. 창자(唱者)가 나와 선비가를 부르면 무용수들은 춤을 추며 후렴을 받는다. 전원이 수장창(收場唱)을 부르며 퇴장한다.
장단은 주로 염불도드리, 타령에 의해 진행되고 악사는 7명(박 1, 대금 1, 피리 2, 해금 1, 북 1, 장고 1)과 창자 2명으로 구성된다. 이 춤의 예능보유자인 정금순(鄭今順), 후보 김행자(金幸子)의 봉필 박설자(朴雪子)의 창(唱)제씨가 중심이 되어 회원 60여 명과 함께 전승되어오고 있다. 1991년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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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 오광대놀이
지정번호: 경남 중요 무형문화재 제 73호
지정일: 1980년 11월 17일
소재지: 경남 경남전역
경상남도 사천시 축동면 가산리에서 정월 대보름에 행하던 탈놀이. 1980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73호로 지정되었다. 현지 주민들은 오광대·오광대놀이·오광대놀음·오광대탈놀음·오광대탈놀이라는 다양한 명칭을 사용하였는데, 현재는 오광대로 통일된 경향이다.
{가산오광대(駕山五廣大)의 역사와 특징} 가산오광대는 1957년경까지 전승되어 오다가 일시 중단된 것을 1970년대에 들어와 다시 놀기 시작하여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가산오광대보존회가 전승을 담당하고 있다. 대표적인 연희자(기능보유자) 중에서 조제신(할미)·김오복(양반)·한윤영(말뚝이·탈 제작)·한재준(옹생원)·한종기(원양반·황제장군)는 작고하였고, 한우성(영노·문둥이)·한우은(말뚝이·할미)은 현재 활동하고 있다.
가산오광대는 남강의 지류로 오광대 극본이 들어있는 궤가 떠내려 왔다는 전설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진주오광대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산에 청주 한씨가 정착한 지 11대가 되고, 조선 말엽까지 조창(漕倉)이 있던 곳으로 7개 군의 조곡(租穀)을 징수하여 제물포(지금의 인천)로 운송하던 항구였으니 가산오광대가 형성되고 발전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여건은 일찍이 갖추어진 셈이다.
가산의 뒷산은 당산으로 당집이 있었고, 동네로 들어가는 어귀에는 두 군데 돌장승이 세워져 있다. 각각 남녀가 두 쌍(4개)을 이루고 있는데, 남상(男像)은 수염이 달리고 탕건을 썼으며, 여상은 쌍상투머리를 하고 있다. 가산마을의 수호신은 당산할머니와 장승이다.
음력 12월 15일 무렵 마을회의를 열어 집집마다 추렴을 하고 찬조금을 받아 동제 비용을 마련하고 제관을 선임하는데, 제관 1명, 축관 1명, 보조원 2명(1명은 여자) 등 총 4명을 뽑는다. 이들을 선출할 때에는 생기(生氣)·복덕(福德)을 가려 깨끗한 사람으로 뽑았다. 부정이 없는 사람이란 초상을 당하지 않은 사람, 출산이 없는 사람, 짐승을 안 죽인 사람 등을 가리킨다. 동제 기간 중에는 금기를 엄격하게 지켜 출산일이 가까운 임산부는 다른 마을로 피접을 갔다. 제관과 축관은 섣달 그믐날부터 목욕재계하고 새 옷을 갈아입고서 금줄 치고 황토를 뿌린 당집 안에서 근신하며, 보조원이 제물과 제사 용품을 구입하고 음식을 장만한다. 음식을 만들 때는 입을 수건으로 동여매어서 침이 튀는 것을 막았으며, 제물을 만드는 도중에 소변을 보면 손을 씻고 대변을 보면 목욕을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정도로 금기를 철저하게 지켰다. 희생제물은 수퇘지이며, 술 대신 식혜(감주)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당산신이 여신이기 때문이다.
정월 초하룻날 밤에 제물을 진설하고 제관이 술잔을 바치면 축관이 축문을 읽고, 마을의 무사태평과 농사의 풍요다산을 기원하며 소지를 올린다. 돼지 뼈를 비롯한 제물을 백지에 싼 ‘지신밥’을 당산나무 앞뒤에 파묻고 음복하고 철상한다.
이러한 천룡제(天龍祭)를 마치면 제관은 장승고사와 우물고사를 지내고, 풍물패도 당산, 장승, 우물의 순서로 매구(지신밟기)를 치고, 이후에는 집돌이를 하며 매구를 쳐서 축귀초복(逐鬼招福)한다. 희생으로 바쳐진 돼지의 고기는 균등하게 배분하여 흰 한지에 싸서 집집마다 나누어 먹었다.
오광대는 대보름날 아홉시 경에 시작하여 자정까지 놀았는데, 탈을 궤짝에서 꺼낼 때는 양반 역이 고사를 지내며, 초저녁에 조창오광대의 깃발을 앞세우고 말뚝이, 양반, 무당, 풍물패의 순으로 마을을 한 바퀴 돈다. 가산오광대는 정월 대보름놀이로 마을에서 놀고, 2월 초순 들어 한가한 시기에는 이웃 지방(구해창, 제미창, 사남면, 초전리, 용해면, 선진리, 사천읍, 곤양면, 한덕, 곤면, 완사 등지)을 돌며 한 달씩이나 순회 공연을 하였다. 3·1운동 이후에는 그 수입으로 사학을 세워 운영하였으며, 또 농청(農廳)의 기금으로도 삼았다고 한다. 오광대는 꽹과리를 주로 하고 장구와 북을 곁들인 타악기의 반주음악에 맞추어 덧뵈기춤을 추며 재담을 하는데, 이러한 공연 형태는 영남 일대의 오광대와 들놀음의 공통된 특징이다.
{가산오광대(駕山五廣大) 여섯마당} 가산오광대는 오방신장마당, 영노마당, 문둥이마당, 양반마당, 중마당, 영감·할미마당 등 여섯 마당으로 구성된다.
첫째 마당 오방신장마당은 중앙황제장군·동방청제장군·서방백제장군·남방적제장군·북방흑제장군이 등장하여 춤을 춘다. 이 오방신장마당은 탈놀이를 시작함에 놀이판을 정화하는 벽사의식무인데, 가산오광대에서는 오방신장이 서울에서 유람하러 내려온 양반으로 설정되어 제의적인 탈놀이에서 오락적인 탈놀이로 변모하는 중간 단계를 보인다.
둘째 마당 영노마당은 영노가 오방신장을 차례로 잡아먹고 마지막으로 황제장군을 잡아먹는 과정에서 재담을 주고받아 영노가 양반을 잡아먹는 다른 지역 놀이마당의 선행 형태를 보인다. 이것도 제의극에서 예술극으로 이행하는 중간 단계에 해당한다.
셋째 마당 문둥이마당은 절름발이·입찌그랭이·곰배팔·언챙이·코빠진놈의 겹병신 다섯 문둥이가 병신춤을 추다가 장타령을 부른 다음 투전을 할 때 반신불수인 어딩이가 개평을 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하므로 앙심을 품고 순사를 불러다 문둥이들을 붙잡아 가게 만든다. 이러한 내용은 진주오광대하고도 비슷하고, 노름꾼들이 문둥이가 아닐 뿐만 아니라 포졸이 어딩이를 포박해 가는 김해의 가락오광대와는 대조적이다. 도박에 대한 인식이 지방마다 차이를 드러내며, 어딩이도 가산오광대에서는 민중적인 인물이지만, 김해오광대에서는 반사회적 인물로 형상화되기도 한다.
넷째 마당 양반마당에서는 양반과 말뚝이가 대결하며, 그 양상은 다른 탈놀이들과 대동소이하다.
다섯째 마당 중마당은 중이 양반의 첩을 약탈해갔다가 되돌려 주고 응징당하는 내용으로 양반과 중의 대결을 통하여 유교와 불교의 갈등을 표현한 점에서 독특하다.
여섯째 마당 영감·할미마당은 영감이 가출하였다가 첩을 데리고 귀가하고, 할미와 갈등을 일으켜 조상단지를 깬 까닭에 동티가 나서 죽는 점이 특이하다. 일반적으로 영감과 할미 사이의 갈등의 결과 할미가 죽음으로써 영감을 비판하는데, 가산오광대와 김해오광대에서는 영감의 죽음으로 종결하여 할미의 생산력을 부각시킨다. 가산과 김해의 이러한 특징은 당산신이 여신인 당산할머니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가부장제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는 탈놀이이지만 오광대가 기본적으로 마을굿의 맥락에서 연희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인 것이다.
탈놀이가 모두 끝나면 탈꾼들과 신명이 난 관객이 어울려 한바탕 춤을 추고 끝맺는데, 수영들놀음과 동래들놀음이 집단난무(集團亂舞)인 덧뵈기춤놀이를 먼저 하고 탈놀이를 하는 사실과 대조적이다.
특히 가산오광대는 영감이 죽고 나서 경남탈놀이로는 유일하게 오구굿을 하는데, 양쪽에서 무당이 베를 마주잡고 다른 무당이 신광주리를 잡고서 오락가락하며 무가를 부르는 장면이 황해도 진오귀굿의 시왕가르기(다리굿)나 전라도 씻김굿의 길닦음과 유사하다.
가산오광대의 탈은 오방신장을 비롯하여 작은 양반·중·상좌·소무·할미·마당쇠·옹생원·무당·어딩이 등 과반수의 탈이 두꺼운 마분지로 만든 홑종이탈이고, 양반과 말뚝이탈은 바가지탈이며, 영노는 대소쿠리에 종이를 발라 만든다.
가산오광대는 천룡제와 매구굿의 연장선상에서 연희된 대보름놀이로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신년의례의 일환이다. 엄숙하고 경건한 제의적 분위기에서 즐겁고 난장(亂場)을 터서 신명풀이를 하는 축제적 분위기로 바꾸어 나가는 정점에 위치한다. 그렇지만 제의적 성격은 오방신장마당에 잔영을 남기고 나머지 탈놀이마당들은 세속적인 오락극으로 전환된 면이 있다. 물론 그 안에는 제의적 모티프가 함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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