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통감
성종의 명에 따라 서거정 등이 신라 초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편찬한 사서로 총 56권 28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의 편찬 사업은 1458년 세조에 의해 시작되어 1476년 성종 대에 와서 비로소 고대사 부분이 완성되었다. 이 고대사 부분은 '삼국사절요'라는 이름으로 따로 간행되었으며, 이 후 1484년에 고려사를 완성해 '동국통감' 으로 합본되었다. 하지만 이 책은 현재 남아 있지 않고 1485년에 성종과 사림 세력이 중심이 되어 개찬한 '동국통감'만 남아 있다. 이 책의 편찬 사업에 대한 세조의 원래 의도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권근의 '동국사략'으로 대표되는 고대 사 관련 사서에 탈락된 것이 많아 보완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삼국사절요'는 세조 때 이미 골격이 형성된 고대사 부분을 다시 손질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삼국사절요'는 원래 신숙주가 거의 완성했으나 그가 미처 완성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노사신을 주축으로 서거정, 이파, 김계창, 최숙정 등이 완성시킨 것이다. 그 명칭으로 보아 '고려사절요'와 연결시키려 했던 것 으로 짐작되며, 이 속에는 '삼국사기'에서 누락된 많은 설화와 전설을 '삼국유사', '수이전', '동국이상국집' 등에서 채록하고 '동국사략'의 사론을 수록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세조가 중점을 두었던 상고사류들을 참고자료에서 제외시킨 상태에서 만들어졌다. 따라서 '삼 국사절요'는 세조 때 골격이 잡힌 것이지만 세조가 의도하던 역사책과는 성격이 다른 책이라는 점을 알 수 있 다.
그러나 이 책은 이전의 사서들이 신라 중심의 서술을 하고 있는 것에 비해 삼국을 대등한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 편 '동국통감'은 편년체로 되어 있으며, 단군조선에서 삼한까지를 외기, 삼국의 건국으로부터 신라 문무 왕 9년(669년)까지를 삼국기, 669년에서 고려 태조 18년(935년)까지를 신라기, 그 이후부터 1392년까지를 고려기로 편찬하고 있다. 삼국 이전을 외기로 처리한 것은 자료가 부족해 체계적인 왕조사를 서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신라기 를 독립시킨 것은 신라통일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삼국이 대등하다는 균적론을 내세워 어 느 한 나라를 정통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은 권근의 '동국사략'에서 신라를 정통으로 내세운 것과는 대비되는 점이다.
또한 왕의 연대 표기도 '동국사략'에서는 유년칭원법을 쓰고 있지만 여기에선 즉위년칭원법을 쓰고 있다. 그러나 '동국통감'의 사론이 지나치게 성리학적 관점에 치우쳐 있다는 것은 한계로 지적된다. 중국에 사대한 행적이 있으면 칭송되는 반면에 대항했거나 사대를 소흘히 한 행정이 있으면 철저하게 비판하는가 하면 불교, 도교, 민간신앙 등을 이단으로 배척하는 사론이 심해졌다. 또한 기자조선과 그 후계자인 마한, 신라 등의 역 사적 위치를 높이고, 반면에 단군조선, 고구려, 백제, 발해, 고려의 위치를 상대적으로 낮게 설정하고 있다. 이러한 지나친 유교적, 사대적 역사관은 낭만적이고 신화적인 역사관을 받아들여 조선사를 재구성하려 했던 세조의 의도를 매몰시키고 말았다. 이에 반해 신숙주 주도 하에 만든 '삼국사절요'에는 낭만적, 신화적 서술 체가 남아 있어 그나마 세조의 민족주의적 관점의 일면을 발견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1484년 서거정이 주도 하여 찬진된 '동국통감'은 편자들이 훈신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지나친 명분론에 입각한 사서는 아니었을 것으 로 판단된다.
하지만 성종과 사림 세력에 의해 개찬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1485년판 '동국통감'은 엄격 한 유교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준엄한 포폄을 가진 것이 특징이다. 이는 세조 및 그를 보좌하던 훈신들을 공격하는 의미로 해석되며, 조선 초기에 추진되었던 부국강벽책을 간 접적으로 비판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비판은 상대적으로 사림 세력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역 할을 했을 것이며, 그것은 곧 훈신의 압력을 벗어나 왕권을 강화하려는 성종의 왕권 신장에도 이용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동국통감'의 기초는 훈신들이 확립한 것이므로 비록 여기에 명분론 중심의 사론이 가해졌다 해도 이 책은 훈신과 사림, 그리고 성종의 합작품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그 때까지 조정 세력의 대립적인 양상 으로 역사관이 하나로 모아지지 못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동국통감'은 조선 초기의 역사 서술의 완성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동문선
1478년 성종의 명으로 편찬된 우리 나라 역대의 시문선집으로 총 130권으로 되어 있는 방대한 문학 총서이다. 이 책은 목록만 해도 3권이나 되며 합본은 45책으로 되어 있다. '동문선' 편찬 작업에는 서거정이 중심이 되어 노사신, 강희맹, 양성지 등을 포함해 총 23명이 참여하였다. '동문선'은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 외에도 신용개 등에 의해 편찬된 것과 송상기 등에 의해 편찬된 것이 있 는데, 이 세 가지중 서거정의 것을 '정편 동문선', 신용개의 것을 '속동문선', 송상기의 것을 '신찬 동문선'이라고 구별하여 부르기도 한다. 이 책에는 신라의 김인문, 설총, 최치원 등을 비롯, 고려를 거쳐 당 대까지 약 500명에 달하는 작가들의 작 품 4,302편이 수록되어 있다. 서거정은 취사선택의 기준을 '사리가 순정하고 치교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우리의 시 문이 삼국시대에서 시작되어 고려를 거쳐 자신이 살고 있는 당대에 이르러 극에 달했다고 쓰고 있으며, 역대 에 빛나는 시문이 중국의 것과는 확연히 다른 특질을 가진 우리의 것임을 강조하고 이를 집대성하여 후세에 전할 필요성이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동문선'에는 오언율시, 칠언율시, 오언절구 등 총 55종의 문체를 사용하고 있어 중국 '문선'의 39종보다도 많으며, 뒤의 '속동문선'의 37종보다도 많다. 그 가운데 단 1편의 작품만으로 된 단락도 있는 것으로 봐서 당 시의 여건이 허락하는 한 많은 작품을 수록하려 했음을 읽을 수 있다. 작가의 경우에도 최치원 등의 신라 인물에서부터 이색, 권근 등 이 책의 편찬 시점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시 기의 인물들까지 차례로 싣고 있다. 이들 이외에 승려 29명과 저자를 밝히지 않은 작품을 포함해서 도합 500 명에 육박하는 작가들의 작품이 실려 있다. 그 중에 1편만 실린 작가가 220여 명에 이른다.
이 4,302편의 시문 가운데 시는 약 1천편 정도이고 나머지는 모두 문장이다. 문장을 종류별로 구분하면 조칙, 축문, 첩 등 의례성이 강한 문장이 1,130여 편인데 특히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인 표전 한 분야만 460여 편에 이른다. 문장의 선택 방향에서 알 수 있듯이 '동문선'은 지배층의 봉건적 상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고 통치층의 권위를 드러내고자 하는 전형적인 관료적 문화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도량문, 재사, 청사 등 도교와 불교 관계의 의례문을 195편이나 싣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당시 지배층 의 이념이 철저한 유교주의에 입각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작품의 선정 기준에 내용은 포함 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는데, 최충헌 부자를 미화하고 찬양하는 시문이 많이 실려 있기도 하고, 또 승려의 비 명이나 탑명, 불교의 교리를 설파한 원효의 불서 서문이 승려의 시 82편과 함께 실려 있는 것도 특징이다. '동문선'은 철저히 지배층의 시문만을 망라하고 있다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삼국시대 이래 조선 초까지의 문 학 자료를 나름대로 책 한 권에 집대성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지고 있다. 동시에 우리의 문학 전통을 중국의 그것과 병행하여 독자적인 것으로 인식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특히 신라, 고려시대의 기록과 도교, 불교 관계자료는 중요한 문화물로 인식되고 있다. |
악학궤범
조선시대의 의궤와 악보를 정리하여 성현 등이 편찬한 악서이다. 총 9권 3책으로 되어 있으며 내용이 치밀하고 정확하여 조선 초기의 음악 전반을 자세히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책이다. '악학궤범'은 1493년 성종의 명에 의해 예조판서 성현, 장악원제조 유자광, 악원주 신말평, 전악 박곤, 김복근 등이 편찬하였는데, 당시 장악원에 있던 의궤와 악보가 너무 오래되어 헐었을 뿐만 아니라 요행히 남은 것은 모 두 잘못되어 있어 새로운 악규집을 편찬한다는 취지에서 작업이 이루어졌다. 수록 내용을 살펴보면 1권에서는 음조를 60가지로 나눈 60조도의 세부적인 사항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궁, 상, 각, 치, 우의 오성의 높이를 한정짓는 오성도설이나 연향에 쓰이는 당악의 28조를 악서에서 인용하여 5음 12율 로 설명한 오음율려 28조도설 등이 독특한 일면으로 평가되고 있다. 2권은 아악진설도설과 속악진설도설을 설명 한 것으로 당시 사용되던 제악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설명하고 있으며, 3권은 당악과 속악을 설명하고 있고, 4권 에서는 성조 대의 당악을 일괄시킨 당악정재도의를 설명하고 있다. 5권은 주로 향악을 다루고 있어 속악에서 중 요한 의미가 있는 '처용가', '동동', '정읍' 등을 수록하고 있다. 6권에는 아부악기도설을, 7권에는 당부악기도 설을 싣고 있는데 악기의 전체 모양을 그림으로 볼 수 있어 당시 악기를 재현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8 권의 당악정재의물도설은 당악정재에 쓰이는 복장을 그림으로 그려놓고 그 부분 부분의 치수까지 기록하고 있어 당악에 사용되는 의상 복원을 가능케 하고 있으며, 향악정재악기도설은 당시에 사용하던 악기에 대한 그림, 악 기에 쓰인 재료, 치수 등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악기를 복원할 수 있도록 해준다.
마지막 9권의 관 복도설은 악공들의 관복을 복원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 9권의 악집에서 특히 5권에 실린 훈민정음으로 된 '동동'과 '정읍' 등은 '악장가사'에도 없고 오로지 '악학 궤범'에서만 볼 수 있는 귀중한 국문학적인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처럼 '악학궤범'은 당시의 음악에 필요한 사항들을 빠짐없이 총 망라한 것이며 특히 아악, 당악, 향악 등에 차별을 두지 않고 잘 서술하고 있어 조선시대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료로 인식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악기와 악제가 모두 불에 타서 없어졌으나 요행히 '악학궤범'을 되찾은 덕분으로 모든 악기와 악제를 복원했던 역사적 사실이 바로 이 책의 중요성을 대변하고 있다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