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본질로서 신령과 진정의 예배
요4장24절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
pneuma o qeoV kai touV proskunountaV auton
퓨뉴마 호 데오스 카이 투스 프로스쿠눈타스 아우톤
[is]spirit God and worshipping the[ones]
영이시니 하나님은 예배하는자는
en pneumati kai alhqeia dei proskunein
엔 퓨뉴마티 카이 알레데이아 데이 프로스쿠네인
in spirit and truth it behoves to worship.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예배에 관하여 예수께서 친히 언급하신 유일한 구절이다. 사마리아 수가성의 한 우물가에서 물길러 온 여인과 나눈 대화중에 참된 예배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신 말씀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이 구절을 예배시작 문구로 사용하면서 낭독하고 있다. 그 의도는 예배에 임하는 마음을 차분히 가다듬게하고 경건하고 간절한 마음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 구절이 그런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개념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흔히 '신령적 존재'란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산신령과 같은 존재란 개념이다.그러나 사실, 이 '영'이란 단어의 뜻은 히브리어로는???<루아흐>, 헬라어로는 pneuma프뉴마>라는 말로서, 문자적으로는 '바람' 또는 '숨(호흡)'으로 해석되며 그 깊은 의미는 생명, 또는 생명력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말은 하나님이 무슨 산신령과 같은 어떤 초현실적, 신령적인 존재란 뜻이 아니라 하나님은 모든 생명자체와 생명력의 원천이시요 생기의 근원이시라는 의미인 것이다. 참고로 그런 의미에서 창 2:7절의 "하나님이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말씀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이 '영', 즉 거룩한 생기, 생명력을 받은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생기, 생명력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영적 존재라고 말한다. 또는 인간은 영으로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영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는 거룩한 성품과 의를 부여받은 존재로서 또 그러한 삶을 살도록 지음받은 존재임을 가리키는 의미이다. 그것을 가리켜 '영적인 존재'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신령으로'란 '하나님의 생명으로' 란 말이다. 이것은 어떤 거룩한 마음의 자세나 경건한 태도를 말함이 아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그런 식의 어떤 자세나 태도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성령안에서'en pneumati(엔 퓨뉴마티) 즉 '하나님의 본성인 영-생명(Spirit)을 받은 사람으로서', 또는 '그 받은 바 거룩한 생명의 본성으로'란 뜻으로란 의미다.
예수가 사마리아여인에게 '생수'를 주겠다고 하시는 그 생수가 바로 영이다.
phgh udatoV allomenou eiV zwhn aiwnion
페게 휘하토스 알로메누 에이스 조헨 아이니온
a fountain of water springing to life eternal
생수란 '새롭고 생명력 있는 마음' 의미이다. 그러므로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곧 생명력으로 예배한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란 '.........진리를 따라서' 란 뜻이다.
이것 역시 결코 '진지한 마음으로' 라는 식의 예배의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본을 따라 하나님의 참뜻을 깨닫고 그것을 따라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배할지니라".......... 아마도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보통 교회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의식적인 예배를 말함이 아니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한번도 그런 의식적인 예배를 경건하게 드리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예배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며, 그런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참된 예배라는 뜻이다.
다시말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란 말은 예배를 거룩하고 경건하게 그리고 의식적으로 드리라는 것이 아니라 교회안에서나 밖에서나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을 부여받은 존재로서 거룩하고 진실된 마음과 정신으로, 참된 진리의 가르침을 따라서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곧 진정한 예배라는 뜻이다.
과연 오늘의 교회는 예배때 단지 마음을 경건하게 추스리고 진지하게 예배드리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그런식으로 예배를 이해하고 있기때문에 교회의 모든 형식을 예배를 어떻게하면 좀더 감동적이고 은혜롭게 드릴 것인가에 집중하고 있다. 그것을 위해서 최고의 음향기기, 영상기기들, 최고의 성가대 등, 예배의 분위기를 최고조로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쏟아붇고 있다.
다시말해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이든 그리심 산이든 이제는 그런 의식적 예배를 드리는 시대는 지나갔으니, 모든 일상의 삶 속에서 진실하고 바른 실천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야 말로 참된 예배라고 가르치셨던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는 또다시 성전화되어진 건물안에서의 예배를 거룩하고 경건하게 드려야하는 것으로 이 구절을 오용하고 있다.
그런 오해 때문에 성전 안 의식예배가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어버리고, 진정으로 추구해야할 교회밖 삶의 참된 예배는 사라져버리고만 것이다.바른 삶이어야 되는데도 마음만 경건하게 집중해서 예배드리면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신다는 왜곡된 가르침 때문에, 교회오늘의 교회는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있는것이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 "신령으로 예배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위의 21절에 벌써 말한 "아버지께 예배함"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이떤 지방, 어떤 민족이 독점적으로 소유할 신(神)이 아니시다. 어디서든지 누구든지, 성령으로 거듭 난 자이면 그를 아버지로 섬길 수 있다.
거듭 난 자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성령으로 거듭 남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벧전 1:23). 사람의 거듭 난 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성경 말씀을 듣기 좋아하며, 읽기 좋아하며, 순종하기 좋아함이다. 이렇게 그가 성령에 의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그가 영적인 자녀로서 영적인 아버지에게 예배하게 되는데, 그것이 신령한 예배이다.
"진정으로 예배함" 에 있어서 "진정"이란 것은, 예수님이 22절에 말씀하신 내용의 성취 형태이다. 이스라엘의 "아는 것"(22절 하반), 곧, 구약적 계시가 신약 시대에 성취된 형태이다. 이것이 유대인에게서 난 구원 사건(예수 그리스도)이다. 이에 근거한 예배가 "진정"으로(진리로)예배함이다. 그것은, 실상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서 메시야가 나시리라는 약속의 성취를 내포한 구원사적(救援史的) 진리에 순종하고 드리는 예배이다.
참된 예배는, 결코 사람들의 추측이나 깨달음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啓示)에 근거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참"이란 말은 "진리"를 의미하는데,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메시야 약속)이 성취된 사실, 곧, 그리스도를 말함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었다(고후 1:20).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는, 신앙적 예배가 될 수 밖에 없다. 신앙적 예배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히 11:6에 말하기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 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 지니라"고 하였다.
신령과 진정을 담은 교회 바른이해로서.....
일반적으로 ‘교회’라는 말이 건물 또는 조직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만, 그러나 신약성경은 그러한 의미로 사용되기 보다는 예수를 믿는 성도들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행 8:3)” 여기에서 교회를 잔멸한다는 것은 믿는 성도들을 핍박한다는 의미이지 교회 건물을 때려 부순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 “그들의 집에 있는 교회… (롬 16:15)” 라는 표현에서도 교회는 성도를 가리키지, 교회 건물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교회’라는 용어가 지역교회에 대해 사용될 때는 ‘지역의 위치’를 따서 ‘빌립보교회’라든지 ‘갈라디아교회들’ '엡에소교회'등으로 불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이런 ‘지역교회들’의 명칭이다.
초기 교회시대부터 3세기 동안의 크리스천들의 보통 모임들은 언제나 개인 가정집에서 행해졌다. 그들은 구원받은 성도들이나 모임 그자체가 교회라고 믿었다. 그들은 결코 모이는 장소나 건물자체를 교회로 여기지 않았으며 ‘거룩한 장소’의 개념은 전혀 갖지 않았다. 그들은 구약시대의 성전 개념과 신약시대의 교회개념에 대한 차이점을 확실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주후 313년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로 인한 기독교의 공인과 함께 콘스탄틴의 명에 따라 로마제국의 각처에서 예배를 위한 교회 건물을 짓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콘스탄틴은 먼저 로마 교회 건물을 건축했고, 이 후 예루살렘과 베들레헴과 콘스탄티노플에도 여러개의 건물들을 세웠다.
이 때부터 웅장한 교회 건물이 거룩한 장소를 여겨지고 신성시되면서 구약의 성전 개념이 채택되고, 신이 특별한 방법으로 특별한 장소에 임재한다는 구약의 유대교와 이교도 사상이 흡수되었다. 이러한 그릇된 사상이 가톨릭과 개신교에 이어 오늘날의 현대교회시대까지 존속되어 왔던 것이다.
한편, 종교개혁자들 중에는 교회가 건물이나 조직이 아닌 믿는 성도들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고 있는이도 있었다. 14세기의 존 위클리프는 “교회란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자들의 회중”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윌리엄 틴데일(1495~1536)도 헬라어인 에클레시아를 ‘교회’로 번역하는 것을 거부하고 ‘회중’으로 번역했다.
그러나 흠정역(KJV) 번역자들은 ‘회중이나 모임’으로 번역하지 않고 ‘교회’로 번역해 버렸다. 왜냐하면 영국의 제임스 왕이 ‘교회(church)라는 용어를 회중(congregation)으로 번역하지 말 것을 번역자들에게 지시했기 때문이다. 그는 영국의 왕이며 영국국교회의 수장으로서 청교도들을 박해했는데, 당시 청교도들이 회중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그러한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그리고 16세기 종교개혁자들, 마르틴 루터, 쯔빙글리와 칼빈 등도 교회가 건물이나 조직이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일반 대중은 천년 이상 지속되어 온 교회의 전통과 관습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 종교개혁자들의 ‘교회에 대한 올바른 정의’를 이해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개혁자들 역시 교회 건물에 대해서는 올바른 개념이 부족했고, 개혁 당시에는 ‘오직 설교’를 중시하여 교회 건물에 있어서는 단지 건물 중앙에 설교를 위한 강단을 설치하는 것 외에는 기존의 가톨릭 교회 건물들의 전통을 그대로 물려받았던 것이다.
그 후 종교개혁 이래 수 백년 동안 개신교는 유럽과 북미 그리고 아시아로 전파되면서 각 나라마다 교회 건물의 건축 양식이 제각각 특색이 있지만, 어쨌든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교회 건물이 예배를 위해 필수적인 요소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릇된 사고의 결과로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 교단들은 “교회는 예배를 위해 특별히 따로 마련된 건물과장소”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하여 교회 건물의 장소는 물론이고 겉치장과 내부치장에 막대한 돈을 투자하고 있다. 교회건물 짓는데 제1,2 금융권 은행 빚 10조원, 한달 이자만도 600억원.아프리카 전체 인구 6억8천만명의 절반인 3억4천만명이 한달간 먹을양식을 생명없는 흙속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교회 건물 짓는데 있어서 더 크게 더 화려하게 하는 것을 "하나님 뜻" 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단지 자신의 욕망을 채위기 위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전체 부동산이 80조원, 연간 헌금 총액이 4조8천억원이나 되는 세계 최고의 메머드급 수준이다.
그러나 큰 것과 화려한 것을 추구했던 건물은 다 무너졌다. 솔로몬은 18만명을 동원해서 성전과 지성소를 모두 금으로 장식한 최고의 성전을 지었지만 얼마안가 바벨론 느브사라단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고 말았다.
A.D.63년경 알비누스(Albinus)총독이 80년동안 지었다는 헤롯성전도 돌위에 돌하나 남지 아니하고 무너져 버린 것을 우리는 성경과 역사를 통해서 잘 알수가 있다. 과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유럽의 교회의 건물들도 이제 어렴풋한 흔적으로만 남아 있다.
국내에서도 장로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성결교회· 순복음교회 등이 세계 최대의 교회 건물을 보유하고 있는데 여기에 들어간 비용만 합쳐도 수조원이 넘는다. 세계 10대 교회 중 5개가 한국교회로 대한민국은 이제 대형교회의 천국이 되었다. 서울 강남의 모교회도 교회 건물을 새로 짓는데 2,100억이나 되는 엄청난 비용이 든다고 하니, 가히 한국도 교회 건물의 규모면에 있어서는 세계 으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는 진리는 교회 건축이 성경에 나오지 않으며, 하나님은 그러한 것을 원치도 않으시며, 또 하나님은 인간의 손으로 지은 건물에 계시지 않는다고 하신다(행7:48). 즉 이 땅에는 예배 장소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도들은 예배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적합한 곳에서 영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히 9:11). 우리의 영적인 예배 장소는 이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늘의 성소’인 것이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일반적으로 일컫는 ‘교회’라는 말은 건물을 의미한다. 그래서 과거 종교개혁자들은 헬라어인 에클레시아를 교회로 번역하지 않고 ‘회중이나 모임(assembly)’으로 번역했던 것이다. 오늘날 성경학자들 중에 많은 이들이 교회보다는 ‘회중이나 모임’이 더 나은 번역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신약성경에 105번 이상이나 나오는 ‘교회’라는 단어를 당시에 ‘회중이나 모임’으로 번역했다면 오늘날 이 지상에서 수많은 화려한 대형교회 건물이나 교파의 수도 지금과는 양상이 한층 달라졌을 것이다.
오늘날 아주 소수이긴 하지만, 교회는 건물이 아닌 “영적으로 거듭난 성도들의 무리”임을 깨닫고 실천하는 크리스천들이 많이 있습을 알수있다. 이들은 교회가 건물이 아님을 알고 ‘모임 장소’를 신성시 하거나 중요시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했는데, 여기에서 내 양이란 주님의 양이지 베드로의 소유가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목회자들은 양들을 자신의 소유로 생각하는 자들이 많다.
그래서 자신의 소유로 더 많은 양들을 소유하고자 백명이 생기면 천명을 욕심내고, 천명이 되면 만명을, 만명이 되면 수십만명까지 과욕을 부리게 된다. 그리하여 초대형교회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불가불 대형건물을 짓기 위해 건축헌금을 강요하게 되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교회는 결코 ‘건물’이 아니다. 그리고 집회 장소는 예배를 드리는 성별된 거룩한 성전이 아니기 때문에 건물에다가 겉치장과 내부치장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예를 들어 십자가 장식물, 휘장, 성화, 성상, 색유리, 촛불 등을 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거룩한 성전이나 건물이 아님을 나타내 보여주어야 하며 이러한 실행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 13:17).”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이전에 몰랐던 사실에 대해 나중에 올바로 알고 난 후 실행에 옮기는 것은 복된 일이라 생각된다.
STRONGS NT 4151: πνε?μα
πνε?μα, πνε?ματο?, τ? (πν?ω), Greek writings from Aeschylus and Herodotus down; Hebrew ?????, Latinspiritus; i. e.:
1. a movement of air (gentle) blast;
a. of the wind: ?ν?μων πνε?ματα, Herodotus 7, 16, 1; Pausanias, 5, 25; hence, the wind itself, John 3:8; plural Hebrews 1:7 (1 Kings 18:45; 1 Kings 19:11; Job 1:19; Psalm 103:4 (), etc.; often in Greek writings).
b. breath of the nostrils or mouth, often in Greek writings from Aeschylus down: πνε?μα το? στ?ματο?, 2 Thessalonians 2:8 (Psalm 32:6 (), cf. Isaiah 11:4); πνε?μα ζω??, the breath of life, Revelation 11:11 (Genesis 6:17, cf. πνο? ζω??, ). (πνε?μα and πνο? seem to have been in the main coincident terms; but πνο? became the more poetic. Both retain a suggestion of their evident etymology. Even in classical Greek πνε?μα became as frequent and as wide in its application as ?νεμο?. (Schmidt, chapter 55, 7; Trench, § lxxii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