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들여다보기 [30]
1948년 4월 3일 시작되었던 제주 4·3 사건은 한국전쟁(1950. 6. 25~1953. 7. 27) 후에도 이어져 1954년 9월 21일에 끝난 잔인한 학살과 만행이었고, 이 중심에는 북쪽에서 내려온 기독교인들로 이루어진 서북청년단과 미군정의 비호를 받았던 우익세력이 있었습니다. 4·3 사건이 진행 중이었던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약 한달 만에 부산지역과 목포지역, 그리고 제주도만 남기고 거의 모든 지역을 북한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전쟁 약 1년 전인 1948년 4월에 창설된 병력 1,000명도 되지 못한 규모의 해병대가 1950년 전쟁 발발 직후에 제주도에서 3,000명(3기, 4기)의 입대로 상륙작전 부대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는데 대부분 제주도 청년들과 학생들(여중생과 여고생 포함)로 이루어졌고, 인천상륙작전과 도솔산 전투 등에 투입되어 혁혁한 전승을 거두는 활약을 했습니다. 한국교회의 중심축을 구성했던 우파 지도자들이 제주를 유린하고 있었을 때 6·25 전쟁이 시작되었고, 좌파로 몰린 제주도의 선량한 젊은 청년들과 학생들, 심지어 여학생들까지 해병대에 자원입대하여 참전했던 것입니다. 이승만 정부는 통일보다는 전쟁을 원했고, 북쪽의 김일성 역시 남쪽을 공산화하기 위해 남침을 함으로써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한국교회는 중도적이고 민족주의적인 김구, 여운형, 김규식과 같은 기독교 지도자들보다는 극우적이고 친미주의자인 이승만을 지지했고, 이승만 정권 하에서 군인과 경찰은 좌파척결을 구실로 내세워 제주도를 비롯한 여수와 순천, 경산, 거창, 산천, 함양, 함평, 문경, 대구, 강화, 순창, 남원 등 전국적으로 수많은 지역에서 엄청난 수의 자국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이러한 잔인한 학살에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극우 기독교인들이 동원되거나 앞장선 일은 용서받을 수 없는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과거입니다.
<주목할 점>
우리나라는 해방과 함께 미국과 소련의 영향으로 우파와 좌파로 분열되었으며, 민족을 하나로 모으고 독립운동 정신을 이어받아서 다른 나라에 의존하지 않고 자주독립을 이루었어야 하는데, 민족주의자들의 영향력은 점점 줄어들고, 외세를 등에 업은 친미주의자들과 친소주의자들의 힘이 커지면서 나라와 민족은 결국 분열의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희생과 비극이 일어났고, 기독교는 대부분 우파, 이승만, 미국 쪽으로 기울면서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고, 우파가 아닌 사람들은 모두 좌파에 몰리거나 의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양한 생각과 사상은 용인되기 어려웠고, 이승만은 권력을 견고히 하기 위해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는 일에 앞장섰으며, 이승만 정권 아래서 수많은 양민이 학살당하는 일이 지속적으로 벌어진 것입니다. 이런 시기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제주도에서는 좌파로 몰려 억울하게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계속 이어졌기에, 젊은 청년들(여기에는 학교 교사들도 있었고, 여중생 2학년도 포함되어 있었음)이 좌파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제주도에서 해병대에 입대하게 되었는데, 해병 3기 1,500명과 4기 1,500명, 모두 3,000명의 젊은이들이 지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최초 여군이 제주도에서 나왔으며, 당시 17세였던 중학교 2학년 문인순이 1950년 8월 고향 여성 126명과 함께 해병에 입대해서 경남 진해에서 40일간 혹독한 훈련을 받고 해군본부 등에서 군생활을 하다가 상병으로 전역했습니다. 제주도에서는 기독교인들로 구성된 서북청년단과 군과 경찰이 좌익을 척결한다는 명목으로 죽인 수는 3만 명이 넘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단순히 300명 정도의 무장 좌익세력인 남로당원들을 제거한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주도 청년들과 학생들은 인민군과 싸우기 위해 해병으로 대거 지원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