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락 찾기라고 했는데, 말귀 알아듣기라고 해도 될까요?
다툼은 의외로 이 맥락이 제대로 잡히지 않기에 생기기도 합니다.
이는 ‘말하는 사람(話者)’이 문제일 때가 있고 ‘듣는 사람(聽者)’이 문제일 때도 있습니다.
몇 자락 깔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면 말의 맥락과 의도는 찾기가 어렵습니다.
쉽게 긍정해 주기도 그렇고 아니라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본래 의도를 감추고 두루뭉술하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고받는 말이 자꾸만 엇갈립니다.
이런 경우는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그러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이익이 이러하다고 남에게 표현하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그래서 상대의 이익, 단체의 이익, 국익, 정의를 위해 등등으로 포장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 말 중에도 머리를 굴려 자신의 몫을 계산 중입니다.
바리새인들을 주께서 왜 그토록 책망하셨는지 생각해 봅니다.
그 말 전에 먼저 우리가 바리새인을 비판하면서 한가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견해는, 바리새인은 자기가 지키지 않으면서 율법을 남들에게 강요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수의 바리새인은 최선을 다해서 율법을 지켰고, 그것을 심중에도 거스리지 않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금식을 1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하는 것으로도 족한데 한 주에 두 번 이상 하기도 했습니다.
십일조를 할 목록에 들어있지 않은 박하와 회향도 십일조로 드렸습니다.
이들이 율법을 행하는 태도는 나무랄 데를 찾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무엇이 주의 책망을 일으켰습니까?
문제는 율법과 규례를 지키며 자기를 포장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내 모습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감추고 치장하여 보이려 애씁니다.
오직 아버지의 긍휼을 기대하며 돌아온 아들의 모습이 아니라, 의기양양 개선장군의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는 이미 태초부터 있던 일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범죄 후에 무화과 잎으로 자기를 가렸습니다.
그런데 놀랍지 않습니까?
가렸으니 이제 하나님 앞에 나올 만도 한데 성서는 그들이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지 못했음을 알려줍니다.
바리새인의 문제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자기부정’이 아니라 자기를 스스로 ‘기특한 자’로 여기게 했다는 것입니다.
알량한 행위로 스스로 높인 것입니다.
“...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이들은 ‘이 정도인데 과연 내가 더 할 게 있을까?’하고 자랑합니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내가 이 법도 지켰고, 저 법도 지켰다고 자랑하는 부자 청년과 닮았습니다.
기억할 것은 무엇을 지켰다, 행했다는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행실은 오히려 권장됩니다.
선행을 해봤자 쓸모 없어 라고 하는 행위무용론은 성서의 본래적인 가르침은 아닙니다,
성서는 최선을 다해서 행하길 바랍니다.
다만 거기 매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자신의 자랑스러운 방패로 만들지 않고 오직 은총 중에 가능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맥락 얘기합시다.
그리스도는 사람 심중을 들여다보시는 분입니다.
그는 길거리 한복판에서 자신의 신심을 드러내는 바리새인의 깊은 곳을 알아채십니다.
그 행위와 말 안에 들어있는 맥락과 의도를 알아채신 것입니다.
마음을 들킨 사람들은 결국 주님을 배척합니다.
우리의 공부는 이것이기도 합니다.
성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 책의 저자는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것인가?
그리고
나는 진짜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