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1-5절
וַֽיְהִ֥י כָל־הָאָ֖רֶץ שָׂפָ֣ה אֶחָ֑ת וּדְבָרִ֖ים אֲחָדִֽים׃
וַֽיְהִ֖י בְּנָסְעָ֣ם מִקֶּ֑דֶם וַֽיִּמְצְא֥וּ בִקְעָ֛ה בְּאֶ֥רֶץ שִׁנְעָ֖ר וַיֵּ֥שְׁבוּ שָֽׁם׃
וַיֹּאמְר֞וּ אִ֣ישׁ אֶל־רֵעֵ֗הוּ הָ֚בָה נִלְבְּנָ֣ה לְבֵנִ֔ים וְנִשְׂרְפָ֖ה לִשְׂרֵפָ֑ה וַתְּהִ֨י לָהֶ֤ם הַלְּבֵנָה֙ לְאָ֔בֶן וְהַ֣חֵמָ֔ר הָיָ֥ה לָהֶ֖ם לַחֹֽמֶר׃
וַיֹּאמְר֞וּ הָ֣בָה׀ נִבְנֶה־לָּ֣נוּ עִ֗יר וּמִגְדָּל֙ וְרֹאשֹׁ֣ו בַשָּׁמַ֔יִם וְנַֽעֲשֶׂה־לָּ֖נוּ שֵׁ֑ם פֶּן־נָפ֖וּץ עַל־פְּנֵ֥י כָל־הָאָֽרֶץ׃
וַיֵּ֣רֶד יְהוָ֔ה לִרְאֹ֥ת אֶת־הָעִ֖יר וְאֶת־הַמִּגְדָּ֑ל אֲשֶׁ֥ר בָּנ֖וּ בְּנֵ֥י הָאָדָֽם׃
와이히(가졌다) 콜(모든) 하아레츠(땅) 사파(언어) 에하트(하나) 우드바리(말) 아하딤(하나)
와이히(가졌다) 브나스암(옮기다) 미케뎀(동방으로) 와임처우(발견했다) 비카흐(평지) 베에레츠(땅에) 시날 와에셔부(거주하다) 샴(그곳에서)
와요머루(말했다) 이쉬(하나) 엘(에게) 레에후(다른) 하바(오다) 닐브나(우리가 ~하자) 르베님(벽돌) 웨니쉬르파(굽다) 리셔레파(~으로) 와트히(가졌다) 라헴 할르베나(벽돌) 르아벤(돌) 웨하헤마르(아스팔트) 하야(가졌다) 라헴 라호메르(역청)
와요메르(말했다) 하바흐(와다) 니브네(짓자) 라누(우리 자신이) 이르(성) 우믹달(탑) 바샤마임(하늘) 웨나아쉐(만들자) 라누(우리를 위하여) 쉠(이름) 펜(내다) 나푸스(흩어지다) 알(위에) 프네(얼굴) 콜(모든) 하아레츠(땅)
와예레드(내려오다) 야훼 리르오트(보다) 에트(격조사) 하이르(성) 웨이트(그리고) 함믹달(탑) 아세르(관계사) 나부(짓다) 브네(아들들) 하아담(사람)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개역개정)
언어(사파)는 종교적인 입술을 의미한다. 온 땅의 언어가 하나라는 말은 원래 하나의 신앙이라는 의미다. 언어가 분화하는 것은 하나의 종교가 흩어지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셈의 후예들이 하나님의 신앙을 유지해 왔는데, 욕단 이후로 신앙이 분열되었다는 의미이다.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그들은 욕단의 후예들이다. 욕단의 후손들이 동방으로 이주하다가 니므롯의 사람들을 만나 신앙적으로 변질되기 시작한 것이다. 욕단의 후예와 니므롯의 사람들이 합작으로 바벨탑을 쌓았다고 보아야 한다. 니므롯은 바벨론이라는 나라를 세웠으며, 욕단의 후예들과 니므롯의 사람들이 함께 한 언어가 되어서 바벨탑을 쌓은 것이다.
동방에 대해서 창세기 4장 16절에서『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동방은 지성소 개념으로 보면 반대 방향이다. 동방으로 간다는 말은 지성소에서 멀어진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이다. 놋은 방랑의 의미를 갖는다. 가인이 에녹성을 쌓는데, 에녹은 봉헌하다 낙성식을 하다 라는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께 봉헌한다고 하면서, 아들의 이름을 에녹이라고 불렀다. 말은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면서 아들을 위해 에녹성을 쌓은 것이다. 종교적인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욕단의 후예들도 가인과 같이 동방으로 가다가 시날 평지에 이르러 성을 쌓는 것이다.
시날 평지는 수메르 문명의 발상지이다. 셈의 후예인 욕단이 동방으로 가다가 최고의 문명지인 시날 땅에 도착하여, 그들을 위한 성을 쌓는 것이다. 바벨론은 니므롯의 나라이며 종교인데, 욕단의 후예들이 그들과 하나가 되는 장면이다.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이름은 셈이다. 셈에 마임이 붙으면 샤마임(하늘)이 된다. 하늘의 아들들이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아들들인 셈의 후예들이 거짓 언어인 거짓 종교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어가 분열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기독교인들 중에는 인본주의, 율법주의로 변질된 종교작인 언어를 쏟아내고 있다. 바벨탑은 다름 아닌 이들이 쌓는 언어요 종교인 것이다. 요한계시록 18장에서 바벨론으로부터 나오라고 말을 한다. 바벨론은 음녀인 것이다. 음녀는 타락한 성전을 의미한다. 바벨탑 사건은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셈의 후예에게 말하는 것이며, 오늘날 교회 안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인간들이 스스로 세우는 이름 대신, 하나님은 셈의 후예들에게 이름을 세우시는 것이다.
그들이 시날평지에 이르고 그 곳에서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다. 그들이 바벨탑을 쌓았던 목적은『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라는 것이다. 흩어짐을 면한다는 것은 그들이 서로 종교 언어가 하나가 됨을 의미한다.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강조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문명의 발달로 보인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제단에 대한 이야기로 말을 할 수 있다. 출애굽기 20장 25절에서『네가 내게 돌로 제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신명기 27장 6절에서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돌에 대해서 야곱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창세기 28장 16-19절에서,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신다. 그리고 야곱의 신앙을 돌로 표현했다. 돌과 기름은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에벤은 돌을 의미한다. 돌은 베드로전서 2장 4-5절에서『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돌과 벽돌은 자연적인 것인가 아니면 인위적인 것인가의 차이다. 자연은 하나님이 일하는 것을 상징한다. 인위적인 것은 사람이 일하는 것이고, 사람들이 스스로 종교 행위를 하고 있다.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원래 돌로 성을 쌓지만 더 견고히 하기 위해 벽돌을 만들고, 흙대신에 역청을 사용하여 돌보다 더 단단하게 재료를 개발한 것이다. 성경은 돌을 그리스도로 표현하는데, 이 반석이신 그리스도가 아닌, 사람이 만든 벽돌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으로 만든 벽돌로 성을 쌓은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대체할 탑을 세운 것이다. 자기의 의(이름)를 세우는 것이다. 자기의 의는 도무지 부숴지지 않는 단단한 돌과 같이 굳은 것이다. 이러한 자기의 의를 부인하는 것은 마치 십자가를 통과하는 것과 같은 어려움이 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로서만 가능한 일인 것이다.
역청(헤마르)은 모세의 갈대상자와 노아의 방주에서 사용된 바가 있다. 이는 구원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역청은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성(피라미드)을 쌓는 장면에서 등장한다. 참 역청과 거짓 역청이 있다. 참 역청은 그리스도, 거짓 역청은 사탄의 성전을 상징한다. 참 역청으로 성전을 쌓으면, 참 성전이 되지만, 거짓 역청으로 성전을 쌓으면 거짓 성전이 된다. 성도의 심령 속에는 참 성전(지성소)이 있으며, 거짓 신자의 심령 속에는 사탄을 숭배하는 성전(바벨탑)이 있다. 바벨탑의 제일 꼭대기에는 우상 신전이 있었다.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자기 이름을 내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이름이 참 이름이다. 창세기 12장 2절에서『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대하게 한다(가달:자라게 하다)는 동사는 피엘(능동 강조형)형이다. 아브람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주셨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름은 받는 당사자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뜻이 땅으로 내려오는 것이 성경의 기본인데, 바벨탑은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려는 모양이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자의 표현인 것이다.
요한복음 1장 51절에서『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인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은 첫사람 아담과 함께 이 땅에 내려와서 이땅에서 마지막 사람 아담과 함께 올라가는 모습이다. 바벨탑을 짓는 자들은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서 내려온 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다. 결국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자들인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라는 것을 깨닫는 자만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다. 회개없는 믿음은 자기를 위한 바벨탑만 쌓을 뿐이다.
그들은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 바벨탑을 지었다. 흩어짐은 결국 인간의 죽음이다.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통해서 인간의 죽음을 면해보려는 것이다. 죽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수 없다. 세례가 바로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라는 의미다. 죽지 않는 자는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다.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리르오트 לִרְאֹ֥ת: 기본형은 라) 내려오셨더라(와예레드ַיֵּ֣רֶד: 기본형 야라드)』창세기 1장에서 창조하시고 보시기에(라) 좋았더라 라고 말씀하신다. 본다는 것은 판단하는 것이다. 내려오신다(야라드)는 말에서 요한복음에서 성령이 임하시면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말해줄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서도 요한복음과 같은 개념을 가지고 있다. 성도의 심령 속에서 이루어지는 성전에 하나님이 호 로고스로 임재하시면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할 것이다. 자기의 의를 이루려고 하는 자는 이를 통해서 깨닫고 돌이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