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42:1-17절) 축복의 회복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때로 하나님이 나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시며, 나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으신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즉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싶은데, 언제나‘저 멀리 떨어져 계신 분’처럼, 도저히 가까이 할 수 없는 분처럼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내가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아니하고, 내가 아무리 부르짖어 기도해도 하나님은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분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고난당하기 전에는 그 이유를 절대로 알지 못합니다. 엄청난 고난을 당한 후에 우리가 정금(正金)같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결코 멀리 있는 분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에 계시며, 나에게 관심이 많으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실제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으로부터 결코 멀리 떨어져 있거나 무관심한 분이 아니십니다.
단지 정금이 되기 전에는 우리 속에 있는 이물질(異物質)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 느끼게 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의 연단을 받기 전이거나, 연단을 받는 중에 있을 때는 하나님이 멀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연단을 받고 난 후에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하나님이 너무나도 가까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가 나에게 너무나도 명확하게 이해된다는 점입니다. 그러고 나서 어마어마한 명예(名譽)의 회복과 물질적(物質的)축복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욥기는 딱 한 가지 주제, 즉 성도의 고난(苦難)이라는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무려 42개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대 드라마입니다. 아마 전 세계에서 고난(苦難)이라는 단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이렇게 엄청난 대화를 나누고, 토론한 문학작품이나 드라마는 욥기 외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성도의 고난이 얼마나 중요한 주제인가를 알게 됩니다. 우리 신앙의 핵심은 고난을 통해 연단을 받아 정금이 되는 이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약5:11절)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사람들에게 불신을 당하고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다면, 그만큼 성도의 고난에 대해 무지(無知)했거나 무관심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욥의 고난을 정죄했던 세 친구들을 책망하시면서 욥에게 저들을 위해 기도를 부탁하고 용서를 받게 하셨습니다. 그만큼 고난을 당하는 성도를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것이 무서운 죄가 됩니다. 욥기를 보면서 욥기의 핵심이 무엇일까? 그것은 욥이 생각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은 연단을 받음으로 정금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연단받기 전에는 그 속에 금의 성분이 들어 있는 잡석(雜石)입니다. 즉 금으로 치면, 원석(原石)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햇빛이 비칠 때는 번쩍번쩍하는 금 성분이 있지만, 여전히 돌의 성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보석(寶石)으로는 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연단을 받아 돌이 부서지고, 불에 녹아져 불순물이 제거되고, 또 기술자의 손에 가공되면, 순수한 금(金)이 됩니다. 이때 우리에게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일까? 하나님을 너무나도 가깝게 느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욥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42:3절)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 너무나도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진리(眞理) 자체가 금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복(福)을 부어 주십니다. 즉 축복의 황금기가 오게 됩니다. 하나님은 돈도 주시고, 명예도 주시고, 자식들의 복도 더하여 주십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가 확실히 고난을 받는 것이 고난을 받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복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벧전1:7절)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려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할 것이니라” 우리는 욥기가 해피 엔드로 끝나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리게 됩니다. 왜냐면 사람의 마음속에는 그 본성상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끝이 반드시 아름답다는 생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보면 비극도 있고, 희극도 있지만, 역시 비극으로 끝나는 것은 무엇인가 아쉽고, 안타까운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 이유는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마음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연단하시지만, 그 목적은 우리를 더욱 아름답게 하고, 더욱 축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즉 우리는 얼마든지 안심하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맡길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욥기의 끝입니다.
하나님은 욥기를 너무나도 아름답게 끝나게 하셔서 중간에 욥기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이 장만 읽어도 성도들의 고난의 끝은 참으로 아름답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욥을 정금같이 만드신 후에 그의 모든 복을 회복시켜 주셨고 오히려 넘치게 채워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후에는 다시 고난 없이 언제나 행복하게만하셨습니다. Ⅰ.고난이 가져온 축복 욥은 갑작스런 환란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었습니다. 즉 욥은 갑작스런 환란으로 그 소중했던 열 명의 자식들을 잃어버렸습니다. 또 욥은 갑작스런 환란으로 모든 가축과 재산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즉 욥은 명예를 일어버렸고, 신용을 잃어버렸으며, 사회적인 지위를 잃어버렸습니다. 욥은 건강까지 잃어버려 맨 땅에 앉아 기왓장으로 자기 몸의 가려운 데를 긁고 있었습니다. 요즘 사람들 같으면, 욥처럼 되었을 때, 아마 미치든지, 자살하든지,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미치지도 않았고, 자살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이 환란 가운데 붙잡은 것이 하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 엄청난 재난 가운데 과연 붙잡은 것이 무엇일까? 곧 하나님입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지만, 하나님을 더욱 확실하게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에게는 엄청난 축복이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그 엄청난 환란 가운데서 그가 미치지 않도록 지켜 주셨고, 절망해서 자살하지 않도록 지켜 주셨고, 오히려 매일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눈물을 흘릴 수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욥은 고난을 받기 전에도 정말 훌륭한 신앙과 인격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신앙이 돌 성분이 더 많은 금 원석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엄청난 환란 가운데 마치 눈에서 홍수라도 난 것처럼, 울게 하셔서 그 안에 있는 거짓과 위선과 교만을 모두 짜 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자기가 정금이 된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단지 그에게 변한 것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더 우선적으로 와야 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두 가지는 분명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너무나도 가깝게 느껴지게 된 것입니다. 고난을 받기 전에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신 분이셨습니다. 마치 다른 사람의 하나님 같았고, 나의 하나님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하고 난후에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나를 알고 계시고,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진리(眞理)가 너무나 구체적으로 이해된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진리를 갖고 입으로 떠벌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캐내어 내 것으로 삼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욥은 이것을 가장 먼저 고백하고 있습니다. 욥은 먼저 하나님이 너무나 가까워진 것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1-2절)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욥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듣고 난 후에 처음으로 고백하는 것이‘하나님은 못 하실 일이 전혀 없으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모든 것을 뜻대로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욥은 그 전에 아무리 하나님이라 하시더라도 자신의 뜻과 맞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욥이 친구들과 토론(討論)하는 말을 들으면서 그가 하는 말이 다 옳고, 성경적이지만, 두 가지를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욥이 너무나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가 당한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엄청나게 큰 것이지만, 자신의 불행에 대해 너무 슬퍼하고 너무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는 사실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도 잘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모르겠다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 문제를 내어 놓겠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욥이 엄청난 고난을 받으면서 두 가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가 너무나 자신의 불행에 의미를 많이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 중에서 막상 그런 처지에 당해 보면, 그렇지 않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너무 심할 정도로 자신의 문제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이 점이 그가 마지막으로 깎여져야 할 부분이었던 것입니다. 대자연을 이야기한 엘리후의 말을 들어 보면, 자연 속에서는 오직 생존 하나만 가지고도 너무나 엄청난 일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수십만 종(種)의 생물은 모두 오직 한 가지 생존 하나만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모두 생존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행복까지 추구해야 겠다는 것입니다. 또 행복을 빼앗겼을 때, 마치 하나님이 돌아가신 것 같이 비통해 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입니다.
타조는 알을 낳아도 돌아보지 않는데, 부모는 아이들의 학교 성적 하나하나에 울고 비통해 하는 것입니다. 즉 욥은 자신의 행복을 잃어버린데서 너무나도 비참해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자기 행복을 다 찾은 짐승은 결국 하마이고, 악어라는 것을 보여 주심으로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는 욕심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욥은 자기가 얼마든지 덜 행복해질 수 있고, 하나님은 얼마든지 자신을 뜻대로 사용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곧 다음절의 고백입니다. 5절)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우리는 이 말을 들으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즉 도대체 하나님에 대하여 귀로 듣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또 눈으로 보는 것이 무엇일까? 하나님에 대하여 귀로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하여 직접 알지는 못하고, 간접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들어서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눈으로 본다는 것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마주 보면서 서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하나님은 멀리 계신 것 같고, 나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고난을 당하고 나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가까이 계신지, 마치 바로 앞에서 눈으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욥기를 보면서 느끼는 두 번째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욥에 대해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늘에서 많은 천사들 앞에서 회의하면서 욥을 칭찬하셨습니다. 막상 고난을 당했을 때, 욥은 하나님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시면서도 자신은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아직도 멀리 계신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 안에 있는 많은 불순물들이 하나님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도록 가로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정금 같은 신앙이 되기 전에는 하나님을 가까이 느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이 나에게 관심을 갖는 것 같지 않습니다. 아무리 믿어도 남의 하나님을 믿어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고난을 당해 모든 불순물들이 빠지게 되면, 그때 너무나 하나님을 가까이 느낄 수 있고, 하나님이 다른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신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제임스 패커는‘하나님을 아는 것’과‘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이 각각 다르다고 했습니다. 즉‘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다른 사람에게 들어서 아는 것이지, 서로가 인격적으로 아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영화배우나 가수를 팬으로서 아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그 배우를 알지만, 그 배우는 나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하나님을 아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인격적으로 아는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난이 가져온 결과는 무엇입니까? 욥은‘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그 전에 욥은 자기만이 특별하며, 무엇인가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것 같은 자기도취(自己陶醉)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난을 받고 나니까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소중하며, 심지어 동물 하나하나도 다 하나님 앞에서 의미가 있는 존재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는 대개 자신에 대해 나르시즘 적 환상에 빠져 있을 때가 많습니다. 즉 나만 특별하고, 나만 모든 사람의 주목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연단을 받고 나면, 모든 사람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엄청난 발견이요, 사실 모든 사람을 친구로 삼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됩니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도취의 한계를 깨지 못해, 사실 비현실적인 자신의 틀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이 갖고 있는 우월감이나 자기도취의 벽을 깨뜨릴 때, 정말 겸손하면서도 아름다운 인격의 소유자가 됩니다. 이것이 욥이 마지막으로 연단되어야 할 부분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다듬어져야만 남의 생각이 나와 다르다고 해서 함부로 공격하거나 함부로 판단하지 않게 됩니다. 또한 비로소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시각을 갖게 되면, 온통 보물 천지입니다. 즉 우리는 주위에 모두 가치 있는 보물들이 널려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욥은 하나님이 결코 멀리 계시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더러운 불순물들이 빠져 나가면서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이전에는 귀로 듣기만 하고, 간접적으로 알던 하나님이 너무나도 분명하게 보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곧 고난의 결과로 얻은 최고의 유익입니다. 즉 하나님만 붙잡게 된 것입니다. 욥이 고난을 통해 또 얻게 된 것은 하나님의 진리(眞理)를 너무나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3-4절)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욥과 세 친구들은 욥의 고난이라는 주제를 두고 엄청난 말들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런데, 욥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다 알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욥과 세 친구들이 지금까지 그렇게 실컷 말한 것은 도대체 무슨 말일까? 물론 하나님이 하라고 하셔서 말한 것들이지만, 자신들도 거의 그 말의 뜻을 잘 모르고 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연극 대사를 받아 외워서 말하기는 했지만, 자신들은 그 뜻을 잘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욥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들을 말한 당사자들이 잘 모르고 했다면, 그 수많은 철학책이나 문학책에 나오는 말들은 어떤 말들일까? 그것도 자기들이 다 모르고 지껄인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욥이 깨닫게 된 것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도 모르고 아무리 지껄여 대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자기도 모르는 말을 하면, 그 말이 굉장히 어려워지게 되고, 듣는 사람들은 더 알아듣기 어려워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욥이 깨닫게 된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은 자기가 캐내어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금이 많이 들어 있는 금광이 있을 때, 이론적으로 많은 설명을 하는 것보다는 실제로 금을 캐내어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욥은 이제부터 하나님께 묻고 하나씩 하나씩 깨달아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묻고, 또 하나님이 대답하시는 것들을 자기의 것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통과한 후에 남는 것은 성경을 너무나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이것입니다. 그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구름을 잡는 이야기처럼 모호했는데, 고난을 당하고 보니까 한 말씀 한 말씀이 너무나도 자신에게 생생하고 살아 있는 말씀으로 와 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진리를 캐내어 자기 것으로 삼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 속에서 보물을 하나씩 캐내어 부자가 되려고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즉 공부로 보물을 캐내려는 사람도 있고, 돈으로 보물을 캐내려는 사람도 있고, 사업으로 보물을 캐내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보물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모두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냥 믿으면 되는 것이지, 굳이 다를 것이 뭐가 있겠느냐?’ 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제나 진리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겉에서만 빙빙 돌고 있는 것입니다. 실컷 이 세상에서 보물을 찾았다고는 하지만, 실제 금이 아니라, 금도금을 한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손해를 보고, 완전히 인생 밑바닥에서 성경을 파고 들어갈 때, 그 안에서 노다지를 건지게 됩니다. 그 진리가 심령의 부흥을 일으키고, 그 진리가 기도 응답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욥은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이렇게 회개합니다. 6절)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이 무엇 때문에 회개합니까? 우선 자기만 특별하게 생각해 자기도취에 빠져 있었던 것을 회개합니다. 즉 자기는 하나님 앞에 죄가 없다고 주장했는데, 알고 보니까 너무나도 불순물이 많이 끼어 있었던 것을 회개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회개는 사실 감사의 회개입니다. 욥은 자기 환상을 깨뜨림으로 진정한 자신을 찾았고, 또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잃어버림으로 진정한 하나님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진리를 자기 것으로 캐내어 어마어마하게 부요한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 모두‘금광(金鑛)’을 하나씩 가진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금광입니까? 그것은 곧 진리의 금광입니다. Ⅱ.욥의 영적 권세 우리는 욥과 그의 친구들이 욥의 고난을 가지고 논쟁한 것을 보면, 굳이 누가 이겼다든지, 졌다든지, 할 수 없을 정도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토론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단지 시간이 지나갈수록 욥의 주장이 더욱 강해지고, 더욱 분명해지면서 친구들의 입은 다물어지게 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욥의 세 친구들의 주장이 욥같이 정당하지 못하다고 판정하셨습니다. 7-8절)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 중, 대표에 해당되는 엘리바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나에게 대하여 한 말이 내 종 욥처럼 옳지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욥의 친구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한말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잘 알 수 없습니다. 욥의 친구들은‘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죄인은 심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욥은‘하나님이 우리를 연단하신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욥이 하나님에 대하여 무례할 정도로 가깝게 말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욥의 친구들에게 잘못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들이 욥을 정죄했기 때문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하나님을‘의롭다’고 하고,‘악한 자들을 심판하신다’고 말한 것이 틀린 것이 아니라,‘욥을 죄인 취급한 것’이 하나님을 잘못알고 말한 것에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세 친구들에게 수송아지 일곱과 숫양 일곱을 제물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수송아지 일곱과 숫양 일곱’은 상당히 큰 죄에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즉 성도의 고난 받는 것을 정죄하고, 그들에 대하여 판단하고,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큰 죄에 해당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성도들을 하나님 자신과 일치(一致)시키십니다. 그래서 고통당한 성도들에게 따뜻한 말을 한 마디라도 하고, 따뜻한 음식이라도 대접한 것은 곧 하나님께 해드리는 것이 됩니다. 정 반대로 말씀대로 살려고 함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자를 업신여기고, 말로 못되게 대하는 것은 수송아지 일곱으로 회개해야 할 큰 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엘리바스와 그의 친구들에게‘진노하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욥에게 제사장의 지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즉 욥이 세 친구를 위해 제사 드리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자에게 기도가 이루어지게 하고, 부흥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결국 이런 사람들이 부흥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종들이 되는 것입니다. 9절)이에 데마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만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우리가 생각하기에 욥의 친구들은 세상 적으로 지위도 있고, 건강도 있고, 유명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나님은 욥을 기도하는 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욥의 기도를 통해 그들의 복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과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것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 적으로는 금으로 도금된 사람이 성공한 사람인 것 같지만, 하나님은 진짜 금으로 변한 사람을 사용하셔서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고난을 통해 정금이 된 사람들은 자신의 사명이 기도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평소에 자기에게 못된 말을 하던 사람들을 기도로 다 용서해 주어야 하고, 특히 하나님의 축복과 부흥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그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다른 사람들을 축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Ⅲ.하나님의 축복의 회복 하나님은 욥을 연단하셔서 정금 같은 신앙이 되게 하신 후에 복이란 복은 모두 부어 주셨습니다. 욥은 망하기 전보다 오히려 감당 할 수 없을 정도로 넘치는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해피 엔드 라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아무리 문학적으로 뛰어난 작품이라 해도 비극적 결말보다는 해피 엔드 가 깨끗하고 상쾌하고 기분이 좋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는 해피 엔드에 대한 본능적 믿음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왜 욥의 복을 회복시켜 주셨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이미 욥은 눈에 보이지 않은 어마어마한 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물질적인 복까지 회복시켜 주실까?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너무나도 미련해서 눈에 보이는 것이 없으면, 잘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적 축복을 다 받고 물질적인 복까지 받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아 정말 내가 복을 받기는 받았구나!’하고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들 중에는 실컷 식사 대접을 받고서도 밥을 먹지 않으면, 식사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요리를 먹은 후에 밥이 나오면 다시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선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금 원석은 가치가 없습니다. 금 원석이 가치 있게 사용되려면, 깨뜨려야 하고, 녹여야 하고, 기술자가 가공을 해야 합니다. 만약 금원석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서 정금이 되었으면, 그때는 반지나 목걸이를 만들어 귀하게 사용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성도들을 연단하셔서 정금 같은 신앙이 되게 하셨으면, 이제는 복을 주시고, 귀하게 쓰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마5:15절)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연단되는 것은 세상에 비취게 하고, 귀하게 쓰이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처음부터 복(福)을 주지 않으시는 것은 우리가 연단되지 않은 상태에서 복을 받으면, 반드시 교만해져서 세상으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에 빼앗기지 않으려고 복을 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단을 받은 자는 교만한 것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죄짓는 것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그러기에 이 부분이 준비된 사람은 아무리 복을 부어 주어도 하나님은 걱정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에게 안심하고 복을 주십니다. 우리가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은 아직 믿음이 덜 준비되어서 그렇습니다. 특히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곧 이렇게 믿음이 연단을 받은 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말씀과 성령으로 사랑의 표시를 하기도 하시지만, 때로 눈에 보이는 물건으로 사랑하실 때도 많습니다. 이것이 곧 사랑을 피부로 느끼게 하시는‘스킨십’입니다. 예를 들어서 남녀가 사랑할 때, 말로도 사랑을 표현하지만, 꽃이라든지 아니면, 다른 선물을 가지고 사랑을 표현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는 사랑이 더욱 풍성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사랑을 눈에 보이는 물질로 표현하심으로써 더욱 풍성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욥에게 친구들을 위해 축복 기도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욥이 친구들을 위해 축복하니까 친구들도 복을 받았지만, 욥은 더욱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즉 남들에게 축복한 것의 갑절로 자기에게 돌아온 것입니다.
10절)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놀라운 것은 곧 이것입니다. 욥이 친구들을 위해 기도했는데, 복은 욥에게 돌아온 것입니다. 곧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습니다. 나는 남이 복을 받도록 수고했는데, 그들이 복을 받으니까 그 부스러기만 해도 열두 광주리가 남게 되었습니다. 좌우간 욥이 고난을 통해 다른 사람의 가치를 발견한 것 자체가 엄청난 복이었습니다. 우리의 복은 오병이어의 기적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남을 복되게 하니까 그 복이 나에게 갑절 이상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형제와 친척들과의 관계가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11절)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에 알던 이들이 다 와서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케쉬타(금) 하나씩과 금 고리 하나씩을 주었더라” 사람이 망하게 되면, 형제와 친척들의 관계가 굉장히 나빠지게 됩니다. 때로는 실망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동안 신앙에 눌려서 꼼짝 못하다가 마음 놓고 욕을 퍼붓는 자들도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서로 원수같이 지나게 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시일이 지나면서 고난당한 성도들이 겸손하게 되고, 자기도취를 버리면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 굉장히 매력적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고난 중에도 웃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결코 우리 믿는 자들이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조금씩 관계가 회복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자들의 겸손이 얼마나 다른 사람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물질의 복을 부어 주셨습니다. 또한 자식의 복과 건강의 복을 더하여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욥에게 많은 가축과 재산이 생기게 되었는데, 이것이 망하기 전의 꼭 배였습니다. 망하기 전에도 부자였고, 하나님은 연단을 받은 후에는 갑절의 부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욥이 망하기 전에 양이 칠천이었는데, 일만 사천이 되었습니다. 또 망하기 전에 낙타가 삼천이었는데, 망한 후에 육천이 되었습니다. 또 망하기 전에 소가 오백 겨리였는데 망한 후에 천 겨리, 즉 이천 마리가 되었습니다. 또 망하기 전에 아들 일곱, 딸 셋이었는데, 그 후에 하나님이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더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딸 셋의 인물이 그렇게 미인(美人)일 수가 없었습니다. 첫째 딸은 이름이‘여미마’인데, 비둘기라는 뜻입니다. 둘째 딸은‘긋시아’라고 했는데, 향나무라는 뜻입니다. 셋째 딸의 이름이 좀 복잡한데,‘게렌합북’입니다. 이는 화장품이라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요즘으로 치면 아모레나 태평양이나 샤넬같은 이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왜 성경은 이 딸들이 예뻤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을까? 아마 사람들은 하나님이 딸을 주시면, 신앙만 좋고, 인물은 안 좋은 사람을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예쁜 것을 아시고, 키 큰 것이 좋다는 것은 다 아십니다. 우리가 보기에 좋은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도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억지로 안 좋은 것을 주시면서 믿음으로 감당하라고 하지 않고, 가장 좋아할 것을 주시면서 믿음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또 건강의 복을 주셔서 그 후에 산 기간만 140 년을 살았습니다. 즉 욥은 연단을 받을 때, 금방 죽을 것 같았는데, 그 후로 140년을 살았던 것입니다. 욥이 큰 연단을 받고 난 후는 더 이상 연단이 없었습니다. 욥이 죽을 때까지 복만 받았습니다. 그가 연단을 받고난 후에 계속 축복의 황금기만 찾아 왔던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정금으로 변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복까지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 욥처럼 죽을 때까지 건강하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찬송가 487장 *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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