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 인사말 일부 생략) 신자들은 교황권고 ‘복음의 기쁨’과 같은 교회문헌에 대하여 연구하고 교리지식을 보강해야 하며 또한 주교나 신부에게 주저없이 접근하여 영적청원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평신도의 권리이며 동시에 의무입니다. 최근 신년에 주교관을 방문한 자리에서 이한택 주교님은 1962년부터 3년간 개최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평신도에게 매우 중요하고 새로운 가르침을 제시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공의회는 전통적인 교회의 이미지인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의 순으로 된 피라미드의 이미지를 역으로 뒤집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새로운 비전을 열었습니다.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평신도의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알리는 위대한 변화입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를 비롯하여 아직도 교회 내에서 성직자 위주의 교계 질서는 조금도 바뀐 것이 없습니다. 이는 평신도 들이 공의회 문헌을 접할 기회가 없었을 뿐 아니라 평신도들이 교회 문헌을 연구하고자 하는 열정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특히 평신도 문제가 중요하게 다루어졌고 이는 교회의 교의헌장 ‘인류의 빛’ 4장 ‘평신도’와 평신도 교령에 나타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논의된 평신도 항목은 ‘신앙과 일상을 통합하는 평신도 영성: 자캐오야 내려오너라’라는 책에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최근 사제들의 현실참여가 매우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가 현실문제에 있어 목소리를 내는 것을 무조건 배척할 수는 없습니다. 공의회 정신이나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 대하여 평신도들이 더욱 연구하고 터득하게 된다면 어떤 문제에 있어 교회가 자신의 입장을 개진하여야 하고 어떤 분야에서 교회가 한발 물러서는 것이 옳은가 하는 나름대로의 논리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컨대 산아제한이나 낙태와 같은 생명의 문제에 대해서 교회가 의견을 낼 수 있으나 가치중립적인 정부사업에 대하여 비전문가인 성직자가 개입하여 끝간데없이 반대하는 것은 비복음적이며 나라의 재정과 안보에 적지않은 부작용을 끼칩니다. 사제들의 현실참여 문제 2010년 3월 주교회의 춘계회의에서 ‘생명문제와 4대강 사업 관련 주교단 입장’이라는 선언문을 발표한 이후 2010년 5월 사제와 수도자 들이 4대강 사업 중단을 촉구하는 사제 수도자 5005인의 선언문을 발표하면서 시국미사를 올렸습니다. 천주교회는 이후 쌍용차 해고자 문제, 제주교구의 해군기지 반대를 위한 강정마을에서의 생명․평화미사, 밀양송전탑 건설반대, 대통령 퇴진 시국미사,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광화문에서의 사제, 수도자들의 시국미사 등 끊임없이 각종 현실문제에 개입하면서 목소리를 높여 왔습니다. 단지 이들이 목소리만 높인 것이 아니라, 공사현장에서 이어지는 물리적 저지 및 폭력, 시국미사에서 행해지는 막말과 저주 등이 평신도에게 알려지면서 교회는 극심한 혼란과 분열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일부 신자들은 심지어 ‘주교회의의 결정에 순명하지 않고, 4대강 사업에 찬성하는 신자에게는 성체를 주지 않겠다.’, ‘선거에서 새누리당을 찍은 신자들은 회개하고 보속하라.’는 등, 막가파로 치닫는 신부들의 언행에 환멸을 느끼고 교회를 떠나는 사례마저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제단의 분란과 망국적 활동 뒤에는 항시 일관되게 흐르는 몇 가지 논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도출된 교회의 현실참여 정신이며 또 하나는 사회교리의 가르침이 교회의 정치참여를 권장하고 있다는 논리입니다. 이들은 교회가 정치에 참여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가르침이며 사회교리에서 모든 조문이 사회와 정치에 관한 것이라고 강변합니다. 본 발표문은 교회의 현실참여에 대한 사제단의 주장과 현 실태를 사회교리적인 면, 그리고 사제단 주장 속에 내재된 해방신학의 논리에 대하여 검토해보고자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 지난 1세기 동안 가톨릭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62년에 개막되어 1965년에 폐막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일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가 급격히 변화된 현대사회와 대화하고 복음을 현대의 시각에서 재조명해보려는 새로운 시도였습니다. 공의회의 범위는 실로 방대합니다. 전쟁과 평화, 가정생활과 산아제한, 사회정의, 핵전쟁, 제3세계와 산업사회와의 관계, 국가발전과 국제관계, 미사 전례와 성사, 영성, 종교 간의 일치 및 대화, 심지어는 국제연합의 역할까지 우리 현대생활의 대부분 영역을 신앙의 빛으로 다루었습니다. 공의회에 모인 주교들은 전례헌장, 교회헌장, 계시헌장, 사목헌장의 4개헌장과 9개 교령, 3개 선언문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으로 하느님의 백성과 온 세상 사람들에게 제시하였습니다.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는 외관상으로도 뚜렷한 변화를 경험하였습니다. 각 나라 언어로 드리는 미사, 사회정의에 대한 새로운 믿음, 그리스도 기초공동체, 본당 사목위원회, 교구 성직자 회의 등 교회는 새로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 중 주목할 만한 조항을 예시하면 교회헌장 제2장 하느님의 백성과 제4장 평신도입니다. 하느님의 백성 15항 ‘교회와 비가톨릭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일치를 위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노력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이는 비록 베드로의 후계자 아래에서 친교의 일치를 보존하지 못하는 사람들(로마 교황청의 수장권을 인정하지 않는 다른 교회들을 뜻함)과도 교회는 결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교회와 비그리스도인 16항은 지금까지의 교회의 전통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교회 밖에서도 구원이 있을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바티칸 공의회에서 가르친 평신도의 중요성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루어진 가장 큰 변화는 공의회가 평신도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평신도의 시대를 열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의회의 강조점은 의도적으로 성직자나 수도자에 의하여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오히려 묵살되어 왔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성요셉과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인류의 구원사업에 최초로 협조자로 참여하셨으며 마리아는 우리와 같은 피조물인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호칭된 복된 어머니였습니다. 이 분들은 성직자가 아니라 평신도이셨습니다. 성직자는 빵을 굽는 사람이고 평신도는 빵을 부풀게 하는 누룩입니다. 누룩이 없이는 빵이 완성될 수 없습니다. 평신도는 이 세상에서 사도직의 의무를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으며 평신도의 도움이 없이는 교회는 선교사명을 완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국 교회내의 일부 사제들이 평신도를 하느님의 구원사업의 협조자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현실참여에 대한 하나의 수단으로 평신도를 끌어 드리고 있습니다. 최근에 노후화된 핵발전소 연장운전금지를 촉구하기 위하여 각 성당에서 평신도들을 상대로 서명을 받고 있는 것이 그 예입니다. 공의회의 평신도와 관련된 핵심 메시지는 그리스도 신비체에 대한 새로운 비전입니다. 이는 새로운 비전이 아니라 모든 가톨릭 교리가 그런 것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이고 또한 성경의 계시입니다. 그러나 지난 역사를 통해 교회를 지배한 사고는 피라미드의 계급구조로서 그 거룩함을 평가하여 왔다는 점입니다. 즉 교황과 주교, 사제와 부제로 내려가는 성직자, 그리고 수도자 맨 아래에 평신도가 위치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러한 피라미드 형태의 모습을 뒤바꿔서 밑에 있는 평신도들을 맨 위로 올려놓았습니다. 이는 교황 비오 12세에 의하여 강조되었던 그리스도 신비체라는 사고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의 각 지체가 특별하고도 고유한 역할을 하고 있기에 어떤 부분도 다른 부분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표현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도 사제의 성사권은 고유한 직분이며 특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언급이 있습니다. 즉 사제가 주님의 몸과 피를 이루는 성사를 집전하는 것은 각 지체에게 맡겨진 고유한 직분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에는 이 ‘그리스도 신비체’의 비유가 20번 이상 사용되었습니다.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 주교, 교황은 한 공동체 안에서 각기 다른 역할로서의 신분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비체는 생물학적인 표현이지만 이를 사회적인 의미의 비유로 표현한다면 ‘하느님의 백성’이 됩니다. 공의회는 피라미드의 맨 위에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전체 공동체를 올려놓음으로써 피라미드의 모습을 뒤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아래로 내려가면서 수도자, 성직자, 주교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아래에 교황이 놓이게 됩니다. 590년에 교황에 취임한 성 그레고리오 교항은 최초로 교황의 직분에 대하여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교황을 ‘지배하는 특권’이 아니라 ‘봉사하는 특전’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사목헌장 (기쁨과 희망) 42항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인간 활동에 주고자 하는 도움’에서는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당신교회에 맡기신 고유한 사명은 정치, 경제, 사회의 질서에 있지 않다. 교회에 설정된 목적은 종교 질서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세속의 직무와 활동은 비록 배타적인 것은 아니지만, 평신도들의 고유 영역이다.” 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 잘 못된 생각들 그런데 어찌하여 평신도의 시대가 교회 내에서 그렇게 늦게 찾아왔는지 그리스도교 영성의 전개과정을 살펴봄으로써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직자와 수도자가 거룩함에 있어 평신도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인데,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직자는 독신으로 주님의 일에 투신하지만 독신생활이 저절로 축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평신도는 가정을 가짐으로써 가정 성화에 힘쓰고 자식을 위한 헌신적인 사랑에 전력을 기울입니다. 흔히 자식에 대한 무상의 사랑이 아가페적인 사랑, 하느님의 사랑에 가장 가깝다고 말합니다. 평신도는 세상을 성화시키는 사도직, 결혼생활에 요구되는 희생을 통하여 스스로를 정화시킬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잘 못된 생각은 평신도들이 투신하여 살아가는 이 세상은 타락하여 많은 유혹이 있으며 참된 그리스도 영성과 반대된다는 것입니다. 일부 사제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물질 자체를 악으로 생각하며 세상은 본질적으로 물질이 지배하여 우리의 영적성장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사제는 세상과 소통하면서 세상 일에 개입하여서는 더 더욱 안되는 것입니다. 세상사를 악으로 판단하는 사제들이 자신들의 영성함양은 등한시하면서 길거리에 나서서 시국미사라는 명목으로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논리의 2중성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이들 사제들은 자신들의 행동은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약자인 사람들을 위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들의 행동이 신학적이 아니라 사회, 정치적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하며,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가에 대하여는 논증을 회피하는 비겁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 번째 잘못된 생각은 수도자나 성직자는 항시 좋은 영적 지도자를 만날 가능성이 높은 데 반하여 평신도는 영성지도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제한된 부분에서만 진실입니다. 평신도는 사랑이신 하느님이 우리를 거룩함으로 부르시면서 우리에게 부르심을 깨닫는 방법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만일 이를 믿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선하심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사실 수도자나 성직자 역시 좋은 영성지도자를 늘 접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을 이에 대입시켜 본다면 많은 수도자와 사제들이 주교의 잘못된 인도로 길거리의 시국미사에 내몰리고 있는 현실도 있습니다. 2014 .6. 8.자 가톨릭 신문은 ‘한국교회에서 가장 긴급하게 쇄신이 요구되는 것은 ‘성직자의 권위주의와 성직중심주의’로 나타났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의 구현은 아직 머나먼 일이 되고 있습니다. 바티칸 공의회의 다른 가르침 - 교회의 예언자적 직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제기된 또 하나의 선언은 교회가 예언자 적인 직분에 보다 더 충실해 질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는 2차 세계대전에서 수백만의 유대인이 인류 역사상 유례없이 잔학한 방법으로 집단으로 죽어간 데 대하여 부끄럽게도 가톨릭교회가 침묵하였다는 반성에서 출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20세기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 한사람인 칼 라너 신부는 미증유의 대학살과 같은, 인간의 존엄성이 집단적으로 유린된 상황에서 교회가 예언자 적 직분을 위하여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구약의 예언서 18권을 읽어보면 대체로 왕국의 멸망과 유배 시기, 등 유다 민족의 고난의 시기에 예언자들이 나타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모스 예언자나 호세아 예언자는 북이스라엘에 대한 주님의 심판을 예고하였고, 이사야, 예레미아, 미카, 스바니야, 하바쿡 같은 예언자들은 우상숭배에 빠진 유다에 대하여 왕국의 멸망을 경고하였습니다. 또한 즈카르야 예언자는 유다 민족에게 ‘서로 자애를 베풀며 과부와 고아, 이방인과 가난한 이를 억누르지 마라’고 경고했습니다. 프랑스에서 존경받는 사제인 피에르 신부는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와 싸우기 위하여 레지스탕스에 참여하였습니다. 왜 그는 사제로서 현실참여의 극단을 택했을까요? 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에서 나치에 협력한 비시 정권은 파리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을 원래 24,000명 정도 아우슈비츠에 보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위험을 무릅쓴 파리 시민 들이 유대인들을 숨겨주어 13000명 정도가 잡혀갔으며 그중 살아 돌아온 사람은 25명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라운드 업이라는 영화를 보면 몽마르트 언덕에서 천진난만하게 뛰어놀던 유대의 어린이들이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서 가스실로 보내지고 시체는 불에 탔습니다. 제주 교구장 강우일 주교는 통합진보당 해산판결 시에 이를 유대인의 집단처형을 가능하게 한 히틀러의 비상조치법에 비유한 바 있습니다. 대한민국 사회는 고문과 처형이 일반화된 남미의 군사독재 사회가 아니며, 70년 전 나치에 의한 인종 학살이 일어나던 때도 아닙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주교나 사제가 정부의 공권력을 무시하고 평화 시 행하는 정부의 정책에 사사건건 간섭하고 사회적 약자를 들먹이면서 교회의 예언자적 직분을 거론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일부 진보적 가톨릭 인터넷 언론에서 1980년 엘살바도르 군사정권에 의하여 암살된 오스카 로메로 주교의 일화를 자주 거론하는 것을 봅니다. 이들은 은연 중에 지금 한국의 정치상황이 남미의 독재상황과 비슷하다는 암시를 평신도에게 주고자 합니다. 그러나 한국은 영국의 언론 Economist 지에 의하면 전 세계 167개 국가 중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군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북한은 단연 최하위인 167위입니다. 그러나 정의구현사제단의 신부 중에 북한의 인권에 대하여 입 한번 벙긋한 신부를 본 적이 없습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18대 대선을 관권에 의한 총체적인 부정선거라고 규정하고 전국을 돌며 대통령 퇴진을 외치는 시국미사를 행하면서 시민들의 멸시와 비웃음을 자초하였습니다. 미국의 하바드 대학과 호주의 시드니 대학은 2013년 73개 선거의 공정성을 평가한 결과 한국의 18대 대통령 선거의 공정성이 일본의 중의원 선거나 미국의 대선보다 앞선다고 평가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현세적 목적에서 세상을 구원하신 것이 아니다 바티칸 공의회 문헌 사목헌장은 3항에서 교회는 결코 현세적 야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오로지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을 계속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진리를 증언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으며, 심판하시기 보다는 구원하시고, 섬김을 받으시기보다는 섬기러 오셨다고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3항)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회교리와 사제단의 과도한 현실참여 정의구현사제단의 신부들은 사회교리의 전체 가르침이 종교의 정치참여를 권유하고 있으며 이를 위하여 끊임없이 종교와 정치의 합일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육화, 강생구속이 바로 현실의 불의를 없애기 위한 것이며 기득권에 젖은 일부 평신도들이 사제의 정치참여를 반 교리적이라고 매도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나자렛 예수, 역사적 예수가 세상의 불의를 없애려 오셨다고 주장하지만 예수님이 왜 로마의 압제에 직접 대항하지 않으셨는지에 대하여는 어떤 논거도 대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회교리의 실제 내용은 사제단의 주장과 오히려 반대되며 이들의 실제 주장은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을 추종하고 있습니다. 레오 13세 교황의 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 우선 독자들의 이해를 보다 충실히 하기 위하여 교황의 사목교서인 회칙(回勅) 및 “새로운 사태”에 대한 설명을 부가하고자 합니다. 회칙이라 함은 직역하면 ‘돌려보는 칙령’이라는 뜻으로 전 세계 교회에 대하여 발표하는 교황의 공식적 사목교서입니다. 회칙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오늘의 사회, 윤리적 문제에 적용시키기 위한 것이며 내용이 교리적이고 사회적이며 권위를 가지고 있지만 그 자체가 무오류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가르침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수정을 요구함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신자는 그 교리 및 도덕적 내용에 동의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성서는 목축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구약과 농경시대를 중심으로 하는 신약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산업사회라는 새로운 사회발전에 대하여 교황청은 성서에 버금가는 해석과 교의(敎義)를 발표할 필요성을 느꼈으며 이리하여 발표된 것이 1891년 발표된 전술한 회칙 ‘새로운 사태’입니다. 이하에서 회칙 ‘새로운 사태’의 주요 내용을 요약 • 소개합니다. 사회적 불평등을 없애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인간 조건에 비추어볼 때에 세상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제거하기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서 노력을 기울이지만, 사물의 본성을 거스르는 온갖 시도는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가장 뛰어난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사회주의자들의 해결책 • • • • 생산과 상업이 소수에 의해 독점 장악되어 극소수의 탐욕스런 부자들이 가난하고도 무수한 노동자 대중들에게 노예의 처지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멍에를 뒤집어씌우고 있다. 이러한 악의 치유를 위하여, 사회주의자들은 부자들에 대한 가난한 이들의 질투를 불러일으키면서 사유 재산을 없애야 하며 그 대신 모든 이를 위한 공동 재산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유 재산을 공유화하고 또 모든 재화를 국민에게 공평하게 분배할 때에 사회악을 근본적으로 치유할 수 있다고 그들은 믿는다. 사유 재산 사회주의자들이 제시한 해결책은 명백하게 정의에 어긋난다. 왜냐하면 사유 재산권은 인간의 타고난 권리이기 때문이다. 사유 재산권은 인간과 짐승을 구분짓는 인간의 기본권이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은 2007년 11월, 그의 두번째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Spe Salvi :In Hope we were saved)를 발표하였습니다. 베네딕토 교황님께서는 그리스도는 정치적 해방을 위한 투쟁에 몸담으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만남, 우리의 삶과 세상을 안에서부터 변화시킨 희망과 만나게 해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피나는 투쟁에서 실패한 스파르타쿠스처럼 사회개혁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파르타쿠스가 아니셨습니다. 또한 바라빠나 바르 코크바처럼 정치적 해방을 위한 투쟁에 몸 담으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만남, 삶과 세상을 안에서부터 변화시킨 희망과 만나도록 해주셨습니다. 인간은 욕구를 좇아 움직인다. 신학자이며 경제학자이기도 한 마이클 노박(Michael Novak, 1933 ~ )은 자본주의는 죄인을 위한 제도이며 사회주의는 성인(聖人)을 위한 제도라고 색다른 정의를 내린 바 있습니다. 성인은 극히 소수이며 인간은 사실 상 죄를 지니고 태어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가 인류애로 충만하여 자신의 욕구를 억제하고 이타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그 전제부터가 잘 못 되어있습니다. 인간은 자유로우며 욕구를 좇아서 움직이는 존재이지 평등을 추구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중립지대를 부정하는 사회교리 옹호자들 지난해 10월 서울대학교의 박우희 교수님이 ‘사회교리 왜곡하는 정의구현사제단’이라는 글을 조선일보에 발표하신 적이 있습니다. 당시 박우희 교수는 정부 사업은 흑백논리로, 선악의 2분법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사제들이나 수도자들은 한 발 물러서서 조용히 묵상의 시간을 가지며 영성함양에 힘써야 한다는 말씀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반정부 선동에 혈안이 되어 그동안 궤변을 일삼아오던 ‘지금 여기’의 한상봉 기자라는 자가 발끈하고 나섰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흥분하는 이유는 이들에게 중립이라는 말은 곧 그들 반정부 세력의 약화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본능적으로 투쟁에서 벗어나서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신들 세력의 소멸을 뜻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분란의 불씨를 살리려고 진력합니다. 세월호 사태가 잦아들고 사람들이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이들은 세월호 진상규명을 내세우며 광화문에서 단식 농성을 하는 등 세월호의 불씨를 살리기 위하여 진력하였습니다. 이들에게 ‘고통 앞에 중립이 없다’는 교황님의 말씀은 천군만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수사권과 기소권을 유가족에게 주어야 한다는 정평위 명의의 공문을 전국의 성당에 보내어 신자들을 상대로 서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겨례 신문에 광고를 내면서 전국에서 13만명의 신자들이 서명하였다고 서명지 사진을 싣고 이를 정부를 압박하는 도구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서명한 신자 중에는 세월호 유가족을 돕자는 취지라는 말에 속아서 서명한 신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철저한 2분법에 의하여 계급을 가르는 사제단의 억지 금년 1월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는 노후 핵발전소 연장운전 금지를 위하여 신자들의 서명을 요청하는 공문을 각 성당에 보내면서 ‘핵과 사회교리원리’라는 주교회의 문헌에 의거하여 핵 발전소에 대한 반대입장을 밝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문헌을 읽어보면 자본, 정치권력이 결합한 계급과 사회적 약자로 계급을 구분하고 ‘핵발전소가 사회적 약자를 소외시키며 자연과 시민을 철저하게 착취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사회교리의 어떠한 가르침에도 이처럼 가난한 사람과 정치권력을 2분법으로 가르는 항목은 없습니다. ‘핵과 사회교리원리’ 131항 : 핵무기와 핵발전이 현대 과학기술과 자본, 정치권력이 결합하여 생산한 새로운 형태의 재화라면, 그 또한 개인과 민족을 성장시키기 위한 유용한 도구여야 하며, 어느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고 착취하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개인과 민족을 보호하고 성장시키기 위한 유용한 도구라고 주장하더라도, 소외와 착취를 수반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핵무기와 핵 에너지는 재화의 보편목적과 공동사용권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핵무기는 자연과 시민을 철저하게 소외시키고 착취한다. 132항 : 더구나 “재화의 보편목적이 ‘사회적 약자를 위한 우선적 선택’을 요구한다는 교회의 특별한 가르침”을 되새기면 핵발전과 핵무기는 사회적 약자를 양산할 수 밖에 없기에 교회의 가르침과 대립한다. 이들 정의구현사제단은 사회교리가 아니라 실제로는 해방신학의 논리에 종속되어 노동자, 농민을 입에 붙이고 삽니다. 2013. 11. 22. 군산 수송동 성당에서 박창신 신부는 다음과 같이 민중, 노동자, 농민을 들먹이며 계급투쟁적인 그의 해방신학 관을 드러내었습니다. 이 땅에는 정의고 없고 법도 없고 폭력적인 불통의 힘만이 있습니다. 잘못된 권력과 부당한 재물, 외세와 독점자본이 민중, 노동자, 농민의 생존을 위협하고 억압과 착취가 난무하는 어지러운 세상으로 만들어 갑니다. 해방신학이란 무엇인가? 해방신학은 그리스도교를 하나의 해방을 위한 실천논리로 설명하고, 이 실천논리의 지침이 해방신학이라는 것입니다. 해방신학의 견지에서 모든 현실은 정치적인 것이기 때문에, 신앙 역시 정치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사회교리의 모든 가르침이 정치와 관련된다는 사제단의 주장은 실상 그들이 해방신학의 추종자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실천적이지 않은 신학 즉 본질적으로 정치적이지 않은 신학은 이상주의적일 뿐으로 실천성을 결하는 것이며, 달리 말하면 압제자의 권력유지를 위한 도구밖에 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이 주장하는 사회교리의 논리는 사회교리의 가르침이 아니라 전적으로 해방신학이 주장하는 논리와 거의 합치됩니다. 그리고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이 북한을 비판하지 않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들은 인간의 시기심과 적개심을 이용하여 국가변란을 획책하고 있으므로 인민들에게 혁명투쟁을 선동함에 있어 그 전철을 갔던 북한의 지도자들을 비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은 공산혁명 뒤에 자신들이 어떤 운명에 처해질지는 꿈에도 알지 못하며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쓸모있는 바보’로 인식되어 일시 이용하고 폐기될 것임이 분명합니다. 해방신학은 그리스도교 사회주의라고 일컬어지듯이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그리스도교의 신학이론입니다. 이들은 다음의 경우처럼 결국 개인이 땅을 가지는 사유재산을 부정합니다. 최근 매일미사에서 오늘의 묵상을 집필하고 있는 박기호 신부의 1월 30일자 묵상 글에서도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땅에 국경도 소유의 금도 긋지 않으셨다. 주인을 인정하지 않으신다. 그런데 땅에 주인이 있다는 사실은 이상한 일이다. 대체 누가 그런 생각을 하였고 땅문서를 만들었을까? 국가라는 합법적 폭력이었을 것이다. 철저한 편가르기 - 이른바 부자 정권의 타도에 나선 사제단 해방신학의 논리는 이 사회를 부자, 기득권층, 지배층을 한 쪽으로 하고, 가난한 사람들, 기득권 없는 사람들, 피지배층을 다른 한 쪽으로 대립시켜 놓고, 가난한 사람들의 가난과 비참은 가진 사람들, 기득권층, 지배층의 착취에서 온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가진 사람들의 경제행동은 구조적인 사회악의 틀 속에서 돌아가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억울하게 고생하면서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계층이라는 논리를 전개합니다. 이들은 지배층이 가난한 사람들을 묶어 놓고 계속 착취하니까 그냥 놓아두어서는 안 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혁명으로 이 사회를 뒤집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그래서 틈만 나면 나라를 뒤집어엎기 위하여 눈에 불을 켭니다. 2012년 대선 당시 국정원 직원이 댓글 100편 가량 인터넷에서 단 것을 가지고 이들 정의구현사제단은 전국을 돌면서 대통령 퇴진 시국미사를 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강생구속을 완성하신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구원의 보편성을 부정합니다. 이들에게 보편적이라는 말은 금기어입니다. 강우일 주교가 2012년 성탄절에 교구 신자에게 보낸 메시지에는 ‘똑똑하고 더 많이 아는 사람과 가방끈이 짧은 사람, 더 빨리 달리는 사람과 천천히 밖에 못 달리는 사람, 더 능력있는 사람과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두 그룹으로 구분 대립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무상으로 주셨는데 이들은 마치 주인처럼 월권을 행사하고 형제의 것을 탈취하고 독점하며 왔습니다.’고 하면서 가진 자들이 형제의 것을 빼앗고 착취한다고 강변하였습니다. 강우일 주교는 언제나 이처럼 사람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인간의 시기심을 부추기면서 끊임없이 반정부 선동으로 신자들을 이끌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 때에는 2천년 전 헤로데가 베들레헴 인근에서 두 살 미만의 유아들을 살해한 폭정에 비유하였고 통진당 해산 판결 때에는 히틀러의 유대인 집단 처형을 가능하게 한 비상조치법에 이를 비유하는 망발을 일삼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예언자 적인 직분을 수행하고 있다고 강변합니다. 본질적으로 계급투쟁의 기반위에 세워진 해방신학 송기인 신부는 2005년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평화만을 강조함으로써 남미의 독재국가에서 폭력투쟁에 나서야 할 민중의 의지를 약화시켰다고 비난하였습니다. 또한 함세웅 신부는 분도출판사에서 발간된 ‘해방신학의 올바른 이해’라는 책에서 제3세계에 전해진 그리스도교가 식민지의 민중에 대한 억압을 외면한 채 용서와 사랑을 이야기함으로써 식민지배 계급에 대한 원주민의 민족주의적 저항이나 자주의식을 약화시켰다고 비난하였습니다. 해방신학은 본질적으로 계급투쟁을 선동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사회의 구조악을 없애지 않는 한 영원히 가난하며 부자는 대대손손 기득권을 누리면서 부자라는 종속이론을 주장합니다. 현 시점에서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이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은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악 때문이라고 선동하는 것과 100퍼센트 일치되는 주장입니다. 세계 제2차대전이 끝나고 처참한 전쟁의 고통과 엄청난 비극으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상이 퍼진 적이 있습니다. 일부 성직자들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현세에서 신의 섭리는 작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래서 인간이 하느님의 역할을 대신해야 한다고 하면서 투쟁에 뛰어들었습니다. 이러한 신학은 사신신학(死神神學), 즉 죽은 신의 신학이라는 뜻의 단어로 불리어졌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현세의 부조리를 타파해야 한다는 해방신학의 교리야 말로 이러한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단의 연장입니다. 해방신학은 매우 당파적입니다 저명한 해방신학자는 ‘계급투쟁은 현실이며 이곳에서 중립이란 한마디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야 하며 사회교리는 철저히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에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교회가 이런 해석에 반대한다면, 교회는 부자와 지배자의 편에 서고 가난한 사람과 고통 받는 사람, 즉 예수님에게 반대하는 편에 서 있음을 입증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레위기 19,15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정의와 공정은 가난한 이라고 무조건 두둔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너희는 재판할 때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된다. 너희는 가난한 이라고 두둔해서도 안되고, 세력있는 이라고 우대해서도 안된다. 너희는 동족을 정의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 2014. 12. 17. 헌법재판소에서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이 났을 때 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인다면 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릴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정의구현사제단의 과거 행동을 잊고 자신의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매우 뻔뻔스러운 언행입니다. 2010. 12. 정진석 추기경은 당시 논란이 되고 있는 4대강 문제에 대하여 ‘4대강 문제는 신앙의 문제가 아니므로 신자들은 각자의 양심에 따라 찬성, 반대할 수 있다’고 지극히 상식적이고 온당한 말씀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정의구현사제단의 신부들이 반발하면서 추기경의 용퇴를 주장하는 패륜적인 행동을 저질렀습니다. 당시 정추기경은 찬성하라, 반대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각자가 양심에 따라 찬성 또는 반대할 수 있다고 하였지만 자신에게 반대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는 좌파 특유의 불관용이 발동하여 사제단이 반발한 것입니다. 해방신학은 폭력혁명과 독재로 이어진다 해방신학에 대하여 동조적 입장을 취했던 바오로 6세 교황님은 1967년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의 태동에 많은 영향을 미친 회칙 ‘민족들의 발전’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혁명 31항에서 ‘혁명과 폭동은 새로운 부정과 불균형을 초래하여 인간을 파멸에로 이끈다’고 규정하여 폭력과 혁명을 명백히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후 브라질 주교를 중심으로 모인 제3세계 주교회의는 혁명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선언문을 채택합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해방신학은 사회를 2분법으로 나누고 지배층에 의한 억압과 착취는 구조적인 악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과 약자를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구조적인 악이 뿌리내리고 있는 사회를 뒤집어엎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혁명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혁명은 유혈과 독재를 뜻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공산주의 혁명을 한 나라치고 독재자에 의한 대량 학살이 이루어지지 않은 나라는 없습니다. 가까운 예로 베트남 역시 월남이 공산화되고 600만에서 800만에 달하는 월남 국민이 개조캠프에서, 감옥에서, 보트피플로 공해 상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법과 원칙은 무시되고 사유재산을 몰수하여 국가의 재산으로 하는 데 어떤 시민들이 이에 찬성하여 자신의 재산을 고분고분하게 내어 놓겠습니까?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 당시 레닌과 스탈린, 중국의 모택동, 캄보디아의 폴 포트, 북한의 김일성, 이들의 폭정 아래서 적게는 수백만 많게는 수천만명의 인민이 목숨을 잃는 대규모 학살이 일어났음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해방신학자들의 교묘한 언어 해방신학을 믿는 신부들은 성경구절을 교묘히 취사선택하여 신자들을 현혹합니다. 2013. 11. 22. 군산 수송동 성당에서 반국가적인 강론을 하였던 박창신 신부는 마리아의 마니피캇을 강론 중에 인용하였습니다. (마태오 복음 1, 51-53) 그분께서는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자를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습니다. 미천한 이를 끌어올리셨습니다. 굶주리는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시의 기득권층은 사제나 율법학자 들이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국가보안법으로 박신부를 수사하고자 하였을 때 하느님을 국가보안법으로 수사하는 것이라고 망발을 내뱉었던 박 창신 신부야 말로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이며, 자신이 사제로서 굶주리는 이들이 아니므로 빈손으로 내침을 받는 존재라는 것부터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사도행전 4장의 구절도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이 많이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 가운데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자유 시장경제를 누리는 국가에도 이러한 공동체는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두레마을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유재산이 국가에 의하여 처음부터 부정당한 경우가 아니며, 제한된 사람의 공동체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소유를 내어 놓고 공동생활을 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그 공동체는 참으로 아름다운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나라가 모든 국민들의 사유재산을 말살하고 공동노동, 공동분배하는 공산주의와는 경우가 다릅니다. 정의구현사제단이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현실문제를 도외시하고 개인의 성화만 목적으로 하는 종교는 하느님이 현세에 강생하신 의미를 도외시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개인의 내면에 대한 성찰없이, 인간의 양심이 하느님의 뜻에 따르도록 굳건해지지 않는다면 혁명이 성공하더라도 세상은 다시 혼란스러워지고 착취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으로 바뀌어 그들이 억압에서 해방된다 하더라도 인간의 성화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또 다른 형태의 착취와 억압이 진행되리라는 것은 과거 공산주의 혁명에서 익히 보았던 것입니다. 북한, 중국, 소비에트 연방 모두에서 공산당, 노동당의 관료가 새로운 지배계급이 되어 부정과 부패, 착취를 일삼았습니다. 부와 가난에 대하여 위선적인 해방신학의 추종자들 해방신학의 추종자들은 기업가들이 창의와 열정으로 부를 이루어 풍요롭게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를 물신주의의 악령이라고 폄하하며 인간의 풍요로움에 대하여 질투심을 느끼는 부류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어린이들이 사흘에 피죽 한그릇 먹지 못하고 영양실조로 고통받는 북한체제를 오히려 분배가 정의로운 체제라고 옹호합니다. 이들은 가난한 사람, 사회적 약자를 우선적으로 돌보아야 한다는 그럴싸한 말을 구두선처럼 되 뇌이지만 실제 가난한 사람들의 분노와 적개심을 부추겨 혁명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마음을 감추고 있습니다. 꽃동네에 대한 정의구현사제단의 끝없는 음해와 모략, 교황님의 꽃동네 방문 반대 등을 보면 이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다는 것은 위선이며 철저한 거짓임이 드러납니다. 이는 레닌이 말한 그대로입니다. 레닌은 혁명을 위해서는 거짓과 속임수, 상대를 이용하고 버리기 등을 거리낌 없이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해방신학은 교회가 인정하지 않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79년 1월의 멕시코 방문 때에 “예수님을 정치가, 혁명가, 나사렛의 전복운동자로 보는 이 해방신학의 개념은 교회의 가르침과 맞지 않는다.” 고 발표함으로써, 라틴아메리카 가톨릭교계내의 해방신학에 대한 공식지지에 끝장을 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라칭거 추기경(현 교황 베네딕트 16세)에게 해방신학을 체계적으로 논박하는 책임을 맡겼습니다. 라칭거 추기경이 책임을 맡은 교리성성을 통하여 교황청은 1984년 및 1986년 두 차례에 걸쳐 해방신학의 마르크스주의 경향을 지적하면서 오류로 결정하였습니다. 그 예로서, 레오나르도 보프신부는 성무집행이 정지되고 다른 해방신학의 주창자들은 침묵하게 되었습니다. 1983년 3월 라칭거 추기경은 구티에레즈가 성서를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현세적 메시아니즘을 지지한다고 논박하는 등의 “10가지 논점”을 작성하였습니다. 이 문서는 해방신학의 개념이 필연적으로 교회내의 유사한 계급투쟁을 찬동하게 되며, 논리적으로 교계제도의 배척으로 이어 진다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1980년대 1990년대에 걸쳐, 라칭거 추기경은 해방신학의 단죄를 계속하여, 일부 사제들의 강의를 금지하고, 스리랑카의 티사 발라수리야의 경우는 파문까지 받도록 하였습니다. 라칭거 추기경의 영향으로 신학교에서는 해방신학 강의가 금지되었습니다. 마치는 말 정의구현사제단이나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의 주교나 신부들이 행하는 강연을 유심히 들어보면 성경말씀을 인용하면서 사회 정의, 자유, 사랑, 진리, 가난한 사람,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 등 가치적으로 뛰어난 용어들을 대단히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는 좌파들의 용어혼란 전술을 터득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년 12월에 헌재에 의하여 해산판결을 받은 통진당은 용어혼란 전술을 가장 교활하고 효과적으로 구사한 정치세력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수구세력과 민주 대 반민주, 민족 대 반민족, 통일 대 반통일로 구분되는 정치 세력이라고 자임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대한민국을 전복시키기 위한 계획을 비밀회합 등을 가지면서 진척시켜왔습니다. 이러한 대한민국을 뿌리부터 흔드는 반역세력이 입법부의 심장에까지 침투하여 나라를 흔들었습니다. 정의구현사제단,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유신회귀, 공포정치 등을 외치며 자신들이 주님의 십자가 상의 구원사업을 기억하고 그분의 사랑을 오늘 이 자리에서 재현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길거리 미사를 합리화합니다. 이들은 생명의 현장인 아기의 출생은 피가 흐르는 난리 상태이며, 예수님의 인류구원의 현장은 머리에 쓴 가시관에서 피가 흐르는 처참한 장소였는데 그기에서 성전미사처럼 품위와 위엄을 찾을 수 있겠는가, 신자들에게 반문합니다. 또한 선동적인 미사에 하느님의 사랑을 접목시킨다고 하면서 신자들을 현혹시키기도 합니다. 평신도들이 교리를 알지 못하면 이들의 주장에 교리적으로 어떠한 반론도 제기할 수 없습니다. 미사의 효과는 미사의 형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미사참례자의 지향, 진정성에 의해 좌우되는 것입니다. 미사의 사효성(事效性)은 모든 신부나 사제가 드리는 미사의 효과는 동일함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신부가 드리는 미사는 교황님이 드리는 미사와 효력이 동일합니다. 여기에 한 가지 추가해서 알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미사의 인효성(人效性)은 미사를 드리는 분의 영성과 지향, 진실됨에 의하여 그 효과에 영향이 미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신자들이 강정마을 길거리 미사를 반대하는 이유는 미사의 형식이 초라해서가 아니라 미사의 목적이 반 성서적이고 순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강우일 주교는 7년간 갖은 선동을 하면서 해군기지 건설을 방해한 것도 부족하여 공사현장을 막고 차량진입을 방해하면서까지 강정마을 생명•평화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미사 현장에서 배부하는 ‘구럼비 이야기’라는 유인물은 해군기지가 미군기지라는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를 담고 있습니다. 이한택 주교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일부 신자들이 단순히 반정부, 종북이라는 말로서만 사제들을 비난해서는 안됩니다. 교리적으로 왜 길거리 미사가 타당하지 않은가, 그분들과 논쟁해서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이나 사회교리에 해당하는 교황님의 회칙도 시간되면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그들이 진정으로 신자들을 어려워하고 조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1891년에 선포된 레오 13세 교황님의 위대한 통찰력이 담긴 ‘새로운 사태’를 한번만 읽어보셔도 새로운 지평이 눈앞에 떠오르게 될 것입니다. (김원율 안드레아 교리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