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신 기자 협회에 등록되어 있어서, 가끔 문화 행사에 참석할 기회가 있습니다. 카네기 홀에서 ‘세종 솔리스트(Sejong Soloists)’ 공연이 있었습니다. 슈베르트, 멘델스존의 곡이 연주되었습니다. 제게 인상적이었던 곡은 ‘여민락(與民樂)’이었습니다. 작곡가인 이신우의 작품이었습니다. 여민락의 의미는 ‘백성과 함께 즐기자.’라고 합니다. 세종 대왕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훈민정음’을 창제하였고, 백성과 함께 즐기는 마음으로 ‘여민락’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여민락’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던 마노아의 아내가 아이를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삼손’이며 태양의 힘을 가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이는 그 힘으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절망과 좌절 중인 여인에게 희망을 주었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느낄 수 있습니다.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천사 가브리엘이 즈카리야의 꿈에 나타났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아이를 가질 수 없던 아내 엘리사벳이 아이를 가질 거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요한’이며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많은 사람을 하느님께로 인도할 거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새로운 길을 준비할 거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자라서 회개의 세례를 주었고, 주님보다 앞서서 길을 준비하였습니다.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저의 세례명은 ‘가브리엘’입니다. 성탄 무렵에 많이 등장하는 이름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 천사라는 뜻입니다. 저는 저의 세례명을 참 좋아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왕이면 좋은 뜻을 전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때로 날개 잃은 천사가 되어서 방황하기도 하지만 저의 세례명처럼 주님의 뜻을 전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미주 가톨릭평화신문에서의 일은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저의 세례명에 맞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자신이 이룬 일로 정해지는 이름도 있습니다. ‘독재자’라는 이름도 있습니다. 자신의 욕심과 욕망에 따라서 사람들의 자유와 권리를 빼앗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독재자의 폭력에 의해서 희생되기도 했습니다. ‘선구자’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새로운 길을 개척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이름입니다. 밤을 새워 새로운 길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류는 그런 사람들이 밝힌 길을 따라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며 살았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목적은 세상의 명예와 세상의 성공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에 도달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길은 바로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초는 자신을 태울 때,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듯이,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우리를 태워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봉헌해야 합니다. 이 또한 ‘여민락’의 삶입니다.
부자가 될 것을 원하고 무언가를 원하면 꼭 이루어질 것임을 믿기만 한다면 꼭 부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대부분의 성공을 위한 책들이 주장하는 내용입니다.물론 이 내용은 성경 말씀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믿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8,13; 9,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막연하게 원하기만 하고 믿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믿기 위해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믿음을 방해하는 요인이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백만장자 시크릿’의 저자 하브 에커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자가 되고 싶으십니까?”라고 물으면 모두가 “당연히 되고 싶죠.”라고 대답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부자가 되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적어보라고 하면 또한 엄청나게 많은 내용을 적는다고 합니다. 그것 때문에 가난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그들이 적는 것들을 예로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부자는 탐욕스럽잖아요.” “돈이 전부는 아니죠.” “벌었다가 다 잃게 되면 그 충격을 어떻게 감당하죠?” “내가 돈을 많이 갖게 되면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고 내가 가진 돈 때문에 나를 좋아하게 될 거예요.” “고소득자로 등록되면 나라에 엄청난 세금을 내야해요.” “편하게 살아도 되는데 뼈 빠지게 일해야 하잖아요.” “그렇게 고생해서 돈을 벌었는데 건강이 나빠지면 어떻게 하죠?” “내가 부자가 된다고 하면 사람들이 비웃을 거예요.” “여기저기 도와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달려들어 귀찮을 거예요.” “강도들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내 자녀가 유괴범들에게 납치될 수도 있어요.” “책임질 게 너무 많아져요. 그 돈을 다 어떻게 관리하겠습니까? 어휴, 골치 아파.” 그 외에도 줄줄이 이어진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로만 바란다고 하면서 정작 자신 안에서는 그 믿음을 방해하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끄집어내어 그 바람이 믿음으로 이어지지 못하게 만들며 삽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에 가고는 싶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갈 수 없는 수많은 생각들을 생산하며 삽니다.
부정적인 생각들이 나오는 이유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자기 자신과의 대화인데 자기 자신은 항상 생존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생존을 넘어선 고생은 하지 않으려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과 대화하면 생존의 기본적인 욕구를 채우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이게 만듭니다. 더 큰 무언가를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에이, 몰라!”라며 생각이 주는 메시지를 끊어야합니다. 벙어리가 되어야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가 될 즈카르야 사제가 등장합니다. 천사가 그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라고 말하듯 즈카르야는 무언가 끊임없이 원하며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을 원했을까요? 자녀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이어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라고 말해줍니다. 이제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즈카르야의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우리와 같이 늙은 나이에 아이를 가질 수 있겠어?’란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천사에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희망하는 것을 믿음까지 끌어올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에 천사는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라고 합니다.
벙어리가 되는 것은 은총입니다. 그리고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제발 자아와 대화 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아와의 대화가 생각입니다. 생각을 많이 하면 부정적인 사람이 되고 우울증에 걸립니다. 왜 어린이들은 우울증이 없을까요? 부모를 확실히 믿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믿으니 부모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굳이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생각을 안 하니 삶이 즐거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의 자녀에 대한 지배는 사춘기 전까지만 가능합니다. 그 이후로는 자녀들이 생각이 다시 많아지고 그것은 부모가 감당하지 못합니다. 사춘기를 기쁘게 보내는 아이는 없습니다. 어른이 되어도 새로운 부모를 만나지 못하면 그 사춘기는 지속됩니다. 그것이 우울증입니다. 새로운 부모인 하느님을 믿어 그분의 소명을 아무 생각 없이 따르게 될 때까지는 누구도 그 우울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라고 말해줍니다. 이 기쁨은 벙어리가 되어 하느님의 말씀을 믿게 되었을 때에만 오는 상급입니다. 벙어리가 되어야 부정적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원하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 질 것임을 믿게 됩니다.
자기 자신에게 벙어리가 되는 길은 하느님께 수다쟁이가 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면 하느님과 대화하게 되는데 그러면 자아와의 대화가 끊깁니다. 이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울함에서 벗어나 기쁨으로 나아갑니다.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자아와 굳이 오랜 시간 대화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맙시다. 벙어리가 되어야만 말씀이 믿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