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난 곳은 비학산 언저리 중농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 졸업후 면소재지에 하나밖에 없는 중학교에 시험을 쳐서 합격하여 맞춤교복을 입고 주위에 선망의 눈초리를 받으면서 학교에 다녔지만 초등학교 3학년때 돌아가신 아버님 대신에 한분밖에 안계신 형님 마져 군에 가버리고 농사 지을 사람이 없어 머슴을 데리고 농사 짓는 어엿한 가장 노릇을 하는 중학생 이였다 .
중학교 졸업후 가라는 고등학교도 안가고 형님이 제대하고 오신 바람에 공부는 하기싫고 초등학교 친구들이 돈많이 벌어서 좋은 옷에 구두를 신고 오는 모습에 어머님 한테 돈 2천원 얻어 가지고 흥아 타이어 공장에 취직하려 시험을 쳤지만 나이도 어리고 키도 작아서 떨어지고 합판공장에 다니다가 의식주를 해결 할길이 없고 중국집 배달부로 일하려니 소개비 800원이 없어서 중국집에서 대신 물어준 소개비는 중학교 졸업증명서 및 호적초본으로 신원증명을 대신할 수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짜장면 빼는 연습하느라 주방장 한테 많이 맞아가면서 3개월 만에 내손으로 짜장면을 뽑을수 있어서 열심히 배달도 하고 하여 주인의 신임을 받을수 있어서 내가 아는 집에 외상도 많이 주었다. 특히 서면 중앙중학교 앞에서 배달 했는데 겨울에는 내의가 없어서 초인종을 눌려 놓고 기다리면 추워서 빨리 나오기를 기다리는 그시간은 정말 길었다.
주위에 내 또래 들이 고등학교에 다니는 걸 보고 야간 고등학교라도 다닐려고 하다 보니 바쁜 중국집에선 시간을 낼수가 없어 친척이 경영하는 충무동에 있는 철공소에 취직을 했다.
철공소에는 하루일급이 800원으로 하숙비 5000원이라 한달 봉급이 하숙비 절반도 되지않아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장에 경비를 하면서 외항선 선박수리를 전문으로 하는 일이라 일본어를 많이 사용하여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2년정도 까지 얻어터지기도 많이 하였고 그래도 어깨너머로 배운 기술이 내도래의 공고실습생들의 비하면( 72년도 부산기계공고 성지공고 출신들이 실습)나의 실력은 이론기초가 되어 있지 않아서 이론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한번 느끼면서 군에가기전 4년의 가까운 선박수리 경력을 샇을 수가 있었다. 내 또래는 해양고 출신으로 외국으로 갔다오는 모습이 부러워 배를 타고 싶어 해군에 지원입대 하였다.
내가 타는 배는 해군에서 단 2대밖에 없는 고속정 이였는데 난 수병이라 3년동안 밥하고 빨래 하면서 군인생활을 이렇게 끝내야 한다는 생각에 특수부대(UDT)에 지원하면 그 생활을 면할수 있을것 같아서 해상특공대 보다 더 훈련이 심한 UDT에 지원하게 되었다.
4주차에는 1주일 동안 잠한숨 자지 않는 지옥주 라는 훈련을 받으면서 인간이 얼마나 극한상태에서 견딜수 있는지 육체와 정신의 힘이 얼마나 무한한지 알수 있었다. 그훈련 을 받은 내가 세상에서 어떤일이던 할수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육체가 따라주지 않은 특수 수중훈련중 물이 페로 들아가는 바람에 통합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되어 도중 하차하고 병장을 달고 한국함대 기함인 충북함 에서 일년 동안 900해리 바다를 누비면서 35개월 21일만에 전역하였다.
바다와 파도만 보는 해상생활이 지겨워 마도로스의 꿈을 포기하고 전역후 인천제철 공채출신으로 입사를 하여 2일만에 주경 야독하는 포항제철공고 기계과 산업체 특별학급에에 입학할수 있는 행운을 잡아 열심히 공부하여 2학년 때는 1등을 할수 있어 80년 대학에 가기 위해 회사도 그만 두고 전기용접기능사 2급자격증은 74년 시험을 치고 7번이나 떨어지고(필기 :그때는 용접 문제는 60문제중 10문제밖에 나오지 않음)겨우 3학년 올라와서 자격증을 취득하고 보니 대학예비고사 2개월밖에 남지 않아 인문과목이 기초가 돠어 있지않고 중학교 졸업후 10년의 공백을 메꾸기엔 역부족이고 그러나 2개월 공부 예비고사를 145점을 맞아서(80년에서 102점의 카트라인:전국에 3만명이 떨어지고,79년 경기공전 특별전형 커트라인 은146점)이라 부산공전에 충분하게 합격할 것이라 생각하고(동일계와 자격증 소지자 학교성적 30%이내만 지원자 50% 특별채용) 원서를 내고 특별전형 야간부 69명중 20~30%가 나보다 점수가 작어서 다른 학교에 원서를 쓰지 않아 국립이라 마감일자 연장하여 170여명이나 접수하여 떨어지고 말았다.
“145점은 나에게는 경이적인 점수 일지 모르지만 대학을 간다는 것은 너무 무리한 도전 이였다”
1980년년 회사를 그만두어 81년 고등학교 졸업후 부산 대한 조선공사에 좋은 조건으로 입사를 하였지만 81년 동일계와 산업체폐지로 대학을 갈수가 없어 예비군 훈련받으려 고향으로 오니 마침 포항제철에서 모집을 하기에 공채출신으로 공무부 공작정비공장 입사하여 일하면서 공부하고저 다시 방통통신대학 경제 학과에 다녔지만 전공도 틀리고 책을 제대로 구할수도 없고 신혼이라 경제적 여유가 없어 중도에 포기를 하고 용접반장님을 잘 만나 용접자료나 자주관리 제안등 기술자료 만들기 위해 현장에서 용접을 하다가 사무실에 올라가서 작업표준서 및 제안 용접설계 등을 하다보니 현장에서 용접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모든 문제점을 해결해 나가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1984년 포스코 직원중 아무도 가지않은 포항시청에서 포항 직업 훈련원 모집 광고를 보고 84년 포항시청 지원(100만원)한 현 폴리텍대학 공업배관공과 야간 향상과정(기능사보과정) 입학을 하여 7년코스인(공업배관3년,용접기사 2급 (전문대과정)은 84년 처음 생김 경남북 합해 필기38명 합격자 중 실기 경남북 합쳐서 4명합격)용접기능사1 급은 꿈에도 그리던 자격증을 포스코에서 일본 철강단기대학입학조건을 9개월만에 취득(실제론 3개월정도)하기위해 코피를 흘리면서 연습하고 평소에 용접공부를 열심히 한 결과였다.
용접기사2급은 5과목(재료역학,일반기계공학,용접야금,용접구조설계,용접일반 및 안전관리)는 84년 신설된 자격이고 용접기능사 1급 세계기능올림픽 금메달 3개(가스용접,전기용접,특수용접)를 소지하고도 실기만 면제 해주는 꿈의 자격증(68년 중앙직업훈련원 2년코스 및 한독직업훈련원 3년코스)을 용접기사2급은 과목도 모르고 합격하였고 기능사 1급은 60문제 중 내기억으로는 50개가 넘어을 것이다.
국내최초로 동시에 합격하여 그순간 만큼 내가 꿈에도 잊지 못하는 자격증을 스스로 독학하여 합격하였으니(일본철강단기대학에 들어가는 조건:제강,압연,제선,산업기계정비,용접 기능사 1급을 취득하고 회사 경력 5년 일본어 C급 조건만 갖추어 지면 일본 철강대학에 갈수 가 있었다) 해당자가 없어서 1만 5천명중 1명만이 가서 일본에 가서 1등을 한 친구(포항공고 6회 이름름은 기억나지 않지만)가 해왔다.(현 포스코 연수원 근무하던 박OO교수가 일본철강단기대학졸업) 84년 내가 1급자격증 바로 취득하였기에 78년부터 응시한 7년이나 떨어진 박 ㅇㅇ 교수는 85년 내가 취득후 직접 연수원가서 손을 잡아주어서 85년 합격을 바로 하였다 .
박 ㅇㅇ교수는 기능장은 나보다 5년이나 빠른 바로 93년도 바로 합격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다보니 포스코 입사후 3년만에 12평의 작은 나의 연립주택도 장만하고 집값도 200만원 정도 올라가서 85년 년봉 절반을 방위성금과 폴리텍에 장학금을 기부하기도 하였다.
철강단기대학에 가는길은 뒤로하고 용접학원(박태준 회장이 전 사원 용접교육을 하라는 지시를 보고)을 하기 위해 정든 직장을 퇴직했다.
퇴직후 이틀만 쓰고 준다고 빌려준 포스코 퇴직금도 받지못하고 학원 인가도 내지 못하고 전세준 집값도 용접기 사느라 모두 사용하고 보니 30만원 짜리 삭월세 세방 살이로 전락 했다. 학원허가도 나지 않았지만 포항에서 국내최초로 특수용접(84년 자격신설) 과정 필기를 3주만에 수강료를 받지 않고 38명 전원을 합격시키고 실기는 10명이 응시해서 9명이나 합격시켰다. 용접기사격(84년 자격신설)는 2명 용접기능사 1급은 13명이나 합격자 중 현재 명장도 나오고 현 포스코 연수원 교수도 합격시켰다. 옆지기 는(여자로써 최초)시험 문제를 출제 하다 보니 특수용접 필기 시험에 합격하여 6세된 딸을데리고 실기 시험을 치려 갔는데 한 교수님은 집사람을 가르쳐주고 한 교수님은 딸을를 봐주고 실명을 밝히진 못하지만 모두 고마운 분들이다.
비록시험에는 떨어 졌지만....
그때 현 해양과학고 6명은 특수용접시험에 모두 합격하고 1명은 현대자동차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어서 어릴때 기초가 되어 있는 친구는 언제 어디 가서도 성공할수 있지 않을까?
85년 12월 포항시외버스 터미널에서 포항기계용접기술학원을 오픈하여 17세 부터 68세까지
공조냉동,기계,화학, 용접을 가르치게 되었다.
냉동분야는 합격을 시키지 못해서 내가 고압가스기계1급을 필기에 합격하고 68세인 신태인씨는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아서영어 A,B,C,D 인쇄체 소문자 대문자 부터 가르쳐서 필기에 합격시켰고 실습실이 없어서 철공소을 빌려서 용접기 2대로 40명을 가르치기 위해 매일 새벽까지 가르치고 그때 오천 군무원도 합격시켰고 그때 자격증 취득으로 특채로 현재 포항시청 계장으로 승진하여 대통령 상 까지 받고 그아들은 2009년도에 가르쳐서 포스코에 입사까지 시켰다.
다시 이계장은 2013년 부터 공부하여 용접산업기사 까지 취득하고 기능장필기 까지 합격하였으나 바쁜공무와 용접한지 30여년이 되어 연습을 하여도 실력이 향상되지 않지만 언제 또 다시 도전하리라 봅니다.
1985년 수고(현 해양과학고 3학년 6명)학생들을 가르쳐는데 6명중 5명이 합격하여 지난 부처님 오신날 절에서그중 한 학생을 만났다......
1985년 12월10일 용접학원허가를 청와대 민원실에 올린결과 6개월후 학원인가 났지만 나의 수중에는 한푼도 없어 동업을 하게 되었지만 학원 경영(동업)이 여의치 않아 건설 일용공으로 근무하다가 1989년 다시 금속 회사에 취직을 하였다. 보험회사 다니던 옆지기도 그만 두게하고 동방금속기계정비 반장으로 입사를 하여 창설회사라 8개월 만에 진급도 하고 미국연수도 다녀왔다. 미국연수(철강협회 주관 포스코 계열사 30명)시 포스코 입사동기를 만나 정말 세상은 좁고 할 일은 많다라는 김우중대우사장의 말을 실감 할수 있었다.
기계정비를 담당하면서 수천건의 설비를 개선하고 생산주임으로 보직 이전하여 생산성을 두배로 하여 5천만 불 수출탑 을 받는데 기여 하기도 하였으며 80억 적자에서 흑자나는 시점에 대학을 또다시 도전하고 싶어서 93년 인천기능대학 기능장 과정에 입학하여그 해 바로 기능장 1차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경력이 모자라 2차 시험을 칠수가 없었다. 소련이 망하니까? 니켈 크롬 값이 떨어져서 회사는 많이 어려워졌지만 조금씩 나아져서 기능대학에서 갔다가 복직 하니 자리가 없어지고 자회사(부도일보직전)로 인사발령이 나 있기에 일년간 버티다가 교대근무하기가 싫어서 또 회사를 자의반 타의반 그만두게 되었다.
95년 9월 내가 그토록 다니고 싶어하던 대한민국 최고의 주택지역에 설계 ,감독, 감리 정산업무를 넥타이 메고 근무하는 불루 칼라 였다. 밤를 세워 270만평의 유틸리티 설계,감독,감리를 하면서 또다른 기회를 보던중 5년여년 만에 각고끝에 1998년 꿈에 그리던 기능장(74년시험을 친후 가장 보람이 있었슴))을 첫 시험응시(74년)후 24년만에 취득하였다.(98 년말 노동부 장관 직인 찍힌 기능장:3116 번째 합격증을 받음)
포항공대 철강 대학원을 갈려고 하다가 지원 자격이 되지 않아 2000년 한동대 국제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에 입학하여 수료후 배운 것을 실천하고자 2001년 국가기술 자격증 취득을 위한 사이버교육기관인 시선기술교육원을 포항대학 창업보육 센타 에서설립하였지만 교육에는 관심이 없고 어떻게 하면 융자를 내어서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은 사람들을 제대로 보지 못한 내탓으로 30년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일하면서 내가 모르면 더 배우고 아는 것을 조금더 가르치기 위해 2002년 국내 최초 위덕대학 야간과정으로 철강분야(용접. 배관.기계정비,기계가공,압연 제강,제선등)16직종기능장 과정을 개설 하여 강의를 시작 하여2001년에는 30명 정도 응시 하더니 2002년에는 500명 가까운 응시인원이 늘었다.
포항지역 최종합격자도 33회 17명 34회는 1차 시험 합격자가 169명이나 되었다 (기능대학 기능장 과정(국비 1억원정도) 90년에는 합격율 30%) 난 30시간 강의로 기적에 가까운 일을 그중에 내가 가르 친 수강생을 합격(50%)시켰다.
그때 합격한 경주에 우유회사에 직원2명은 그회사에서 아주 대우를 잘 받으며 삶의 귀감이 되어 그회사 기능장이 10명이나 나와 얼마전에 우리학교에 감독으로 나온 분이 그 회사 소속이라
그때 내가 가르친 학생들의 소식을 들을 수가 있었다.
세상은 나의 교실이다 그때 만난 사람은 나의 선생이다 라는 말을 뼈저리게 느낄수가 있었다.
2005년 한국기술교육대학교에 훈련교사 자격을 취득하기 서울로 주말만 공부하는 6개월 과정의 교육을 받으려 금요일마다 야간버스에 몸을 싣고 새벽에 내리면 갈 데가 없어서 찜질방에도 가고 정류소 지하철이 올때 까지 기다리는 새벽시간은 길기만 하였다.6개월 과정의공부로 8개과목의 시험을 평균60점 맞아야 하는데 난 노사 협의하느라 지각을 하여 전과목 모두 2점 -라 62점 이상 맞아야 면허를 주는데 떨어지면 얼마나 챙피할까 싶어서 반장한테 연락해 달라고 하고 아직 몇점인지 물어보지도 못했다.
교육받던중 정비팀반장으로 근무하다가 지역낭방 운전정비반장으로 발령이 나서 교육중 새벽1시에 비상대비 보일러 시운전 하려새벽에 회사에 온적이 있었다.
반장이 수료식에 오라고 해서 산업설비 2급 취득하고 철공소 근무후 35년이 지나고 나서야 난 남을 가르칠 수 있는 교사면허를 낼 수가 있었다.
2003년 회사에서는 노사협의회 위원을 뽑는 선거에 118대 51표로 당선되어 노사협력을 국내최초 건물관리 회사로는 최초로 노사문화 우수기업에 선정되어 동남아시아 3개국(싱가포르,말레지아,인도네시아)중국연수(상해공항에서 금속공장에 다니던 중졸의 후배가 중국에서 교수가 되어 있는 친구를 만나) 불수강 공장 연수도 다녔왔다.
2003년 연수중 중국의 철강회사의 성장은 한꺼번에 용광로 6기를 건설하고 있기에 다녀온뒤 부터는(현재) 7억톤의 철강생산국에서 세계7위 7천만톤의 우리나라와 비교했을때 세계최고의 기능과 기술이 우수하지만 중국에 경쟁에서 이길려 면 새로운 기술과 기능을 익히는데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것이다.
2006년부터 직장에 다니면서 해양과학고와 폴리텍 대학 야간에 강의하고 2008년에는 또다시 도전을 하기위해 포항대학 평생교육원에 학사과정을 신청하여 교육을 받던 중 양산대학에서 기계분야 수석감리사 교육을 이수하고 교육중 최우수 발표상과 폴리텍대학 기능장시험감독을 병행하면서 모르면 배우고 알면 가르치고 하루 24시간 중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인생을 결정된다고 생각되기에 과거를 되돌아 보면서 미래를 개척하여야 할 것이다.
첫댓글 맞춤법도 맞지 않고 문맥도 맞지 않아서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시는지 잘 모르겠네요...그냥 개인의 이력을 나열하신건지.... 글을 쓰신 의도는 무엇인지.... 교수시라면서 한글은 다 떼신건지....
아이구 죄송합니다.
혹시나 이글을 보고 나처럼 고생하지 않고
정규코스 나와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열심을 다 하신 교수님께 감사 드립니다~~
우리 학우들도 더욱 열심히 해서 교수님의 뒤를 따르 겠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열심을 다 하신 그 열정을 존경합니다~~^^*
좋은 글 감사~~
그냥 써본 글인데 칭찬해주니 감사 드립니다.
잘 읽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신 모습이 보기가 좋아요..
회원님 너무나 고생이 많았습니다.
틀린 문장 다시한번 정리(퇴고?)해서, UP LOAD를 부탁드립니다.
감사 합니다. 다시 UP LOAD하여 습니다.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 현재는 많이 행복합니다
인간승리네요...
그렇게 보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솔찍하게 지나온 인생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읽으면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인생을 먼저 사신 분으로써 지나온 시간을 보여주신 것 감사합니다./
문맥도 맞지 않고 앞뒤가 안 맞는 부분에서는 세로 수정을 해가고
있습니다. 조언을 주시어 감사 합니다.
@금동 문맥에 신경 쓰지마세요. 저 역시 신경쓰지 안습니다. 써준 것만 해도 감사드립니다.
용접기술에서 읽어 본 것중에서 제일 감동입니다.
교수님께서 걸어오신 과거가 전여 부끄럽지 않고 자랑스런 길이라고 생각되어 존경스럽습니다...
앞으로 경험을 후학 양성에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현재 23명중 현대제철 1명 동국제강 1명 거제도 삼성조선 3명이 신체검사와 면접후 입사일자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료 필요하시면 메일 보내 주세요
다시 읽어 보아도 감격 입니다.
감사 합니다.
사소한 것에 신경쓰지 마시고 /시간을 내어서 글을 올려 주신 것 감사합니다.
용접기술에서 처음으로 보람있는 글을 읽었습니다.
언제인가 자기소개서 써 놓은 것 인데
보람있게 읽어 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저도 언젠가는 이처럼 훌륭한 글을 쓸날이 올까요. . . .
그럼요 어떤 준비를 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결정되리라고 봅니다
지금 또 읽으면서 감동하고 있습니다. 여러번 읽어도 감동 입니다. 건강하세요.
후배들 위한 좋은 글 감사 드립니다.
감사 합니다 용기 를 주시어 다시 한번 엣 기억을 되살려
또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