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아니라고는 말하지 말아요 (상)

[신드롬]

"교내에서 흡연은 정학인데."

목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제리가 푸른색 양철 바스켓을 들고 서 있었다. 학생회장답게 옷차림이 번듯했다. 초여름에 진입하고 있어 날씨가 제법 더웠는데도 꿋꿋이 무거운 교복 자켓을 걸치고 있었다. 제리는 죽어가는 잎풀을 살리기 위해 여기까지 물을 길어온 사람치고는 다소 투박한 태도로 화단에 바스켓을 거꾸로 쏟아냈다. 얼마 가지 않아 내용물을 소진한 제리가 내 앞에 습기 가득한 바스켓을 불쑥 내밀었다.

"꺼."

"....."

나는 제리의 얼굴을 잠깐 올려다봤다. 엄숙한 눈초리가 미동도 없었다. 곧 순순히 담배를 던져 넣었다. 제리가 봐줄 것 같지 않아서였다. 아직 주둥이가 긴 내 담배가 제리의 바스켓 안에서 껌껌하게 타오르는 소리를 내며 죽어간다. 정학이라는 단어를 운운하며 교칙을 명료화하는 제리의 음성엔 저항성이 없었다. 그것은 그가 학생회장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래전 이 하이스쿨이 담뱃재로 인한 전소의 추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교생이 학습했기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도박을 해도 되고, 난잡한 섹스를 벌여도 되고, 심심하면 나오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흡연만큼은 엄벌에 처하겠다던 교장 사무엘의 말은 거의 세뇌와 가까웠다. 제리는 볼일이 끝났다는 듯 그대로 등을 보였다. 드넓은 어깨를 감춘 교복 자켓은 언제나 그렇듯 선이 잘 접혀 있었다.

교실로 돌아오니 조엘이 곰곰한 얼굴로 턱을 괴고,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조엘이 판을 '관리'할 때 나오는 표정임을 알았다. 네 개의 직사각형으로 분할된 핸드폰 화면에선 각기 다른 게임이 진행 중이었다. 어느 게임은 파칭코, 어느 게임은 그래프, 어느 게임은 마작, 어느 게임은 단순한 룰렛이었다. 조엘의 말에 따르면 그래프는 주식의 형태를 일부 답습한 게임이었다. 현금을 치환한 사이버 머니로 게임 내 종목에 투자해서 일주일 뒤 장이 마감할 때까지 플레이어들끼리 거래를 반복해 돈을 불리면 된다고 했다. 룰렛은 레버 아이콘을 클릭해 위닝 넘버를 터트리거나 박스에 섞여 들어간 공의 홀짝을 맞히면 이기는 게임이었다. 정말 일차원적으로 주사위를 던져 가장 높은 숫자를 표지한 플레이어가 이기는 팩도 들어 있었다. 나머지는 조엘의 친절하고 완곡한 설명에도 룰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가 거기서 완벽하게 분간하는 건 그저 조엘의 역할 정도였다. 플레이어들이 돈을 따지 못하도록 수시로 판을 조작하는 관리자. 어딘가에서는 그저 18살 짜리가 마스터 소리를 듣고 다닌다는 것도. 이 하이스쿨에서도 많은 학생이 조엘의 게임 속 플레이어였다. 나는 조엘이 하루에 얼마나 많은 허구의 자본을 박멸하고 또 잉태하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때 뒷자리에서 크리스와 엘라가 곧 열릴 크리스마스 파티에 대해 논의하는 게 느껴졌다. 안내방송 멘트를 퇴고하는 중인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교내 방송부의 메인 아나운서였다. 나는 조엘의 단단한 팔에 머리를 기대며 한국어로 이야기했다.

"곧 크리스마스래."

조엘도 한국어로 대답했다.

"그러게."

"왜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작 한 사람의 생일을 축하하는 데 하루를 허비할까?"

"음, 글쎄. 재밌어서?"

나는 너무나도 익숙한 이 지역의 크리스마스 파티를 복기한다. 다 같이 거리로 뛰쳐나와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먹고 취하고 질주하고 무언가를 만지고 흡입하고 탕진하고. 그렇게 망나니처럼 노는 게 도대체 뭐가 재밌다는 건지 싶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나 역시 그 망나니 반열 중 하나였으므로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조엘도 그것을 눈치챈 듯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갖고 싶은 거 있어?"

"한국에 가보고 싶어."

나는 홀린 듯이 조금 엉뚱한 답을 내놓았다. 거기서 태어난 적 없는 나의 고향. 나의 누락된 출처. 한국? 금세 돌아온 조엘의 음성은 의외라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조엘도 그곳을 생각한 적 있어?"

"별로. 그렇지만 한국에 가면 섯다 판을 벌여보고 싶긴 해."
"섯다가 뭔데?"
"도박 게임 중의 하난데 나도 그런 게 존재하는지 얼마 전에 알았어. 엄청 흥미로웠어."

조엘이 한손으로 내 손을 잡아 뒤집었다. 판판하게 드러난 손바닥 위를 자신의 굵직한 엄지로 쓸어내렸다. 마디에는 내 이름이 타각되어 있었다.

"이만한 패에 새도 그려져 있고 돼지도 그려져 있고 이상한 그림들이 많이 있더라."

"너한테 딱이네. 넌 재밌는 걸 좋아하니까."

의자가 늘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크리스와 엘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톤이 다른 두 음성이 하나의 낱말을 발음하는 기척이 후두부에서 점점 멀어져간다. 나는 갑자기 끼치는 한기에 맨 팔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그 기운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반갑기도 했다. 올해는 반드시 한국에서 겨울의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고 싶다. 도톰한 겨울 외투에 몸을 은신하고 운이 좋으면 눈이 내려오는 전경에 내 입과 거기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맡기고, 코 끝을 에이는 낯선 추위를 느끼며 그러한 기분으로 축복하는 어느 신의 탄신일. 남반구의 뜨거운 크리스마스란 이제 지겨웠다.

이 학교에서 동양인은 조엘과 나, 그리고 제리 말고도 몇 명이 더 있었지만 우리 셋의 유명세는 월등했다. 갖가지 이유로 열리는 파티마다 남학생 인기 순위를 뽑을 때면 전교생을 포함해 늘 조엘과 제리가 최상위권을 달렸다. 수많은 여학생 그리고 가끔 소수의 남학생들까지 자신의 신체에 제리 또는 조엘의 이름이 새겨져 있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했다. 나는 바로 그런 점에서 유명하다고 볼 수 있었다. 이 학교에서 누구도 갖지 못한 조엘의 이름을 지녔고 조엘의 몸에도 역시 내 이름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이름과 함께 탄생한다는 것. 이 생득적인 명징은 억지로 흔적을 불어 넣는 타투나 흉터와는 의미하는 바가 달랐다. 이것은 유일하게 감각 가능한 운명이자 유전자가 암기하는 현상이었다. 그래서 조엘은 세상에서 자신의 엄지가 제일 소중하다고, 어느날 내게 자백했다. 고작 10cm도 안 되는 그 한 줄기에 사랑의 자유가 감금되어 있는 건데도. 나는 조엘의 그 말이 진심으로 기뻤지만 가끔은 굳이 나여야만 했음이 아니라, 자신의 몸에 이름이 새겨지는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었다는 뜻처럼 느끼고는 했다.
스포츠 센터 벽 너머에서 제리의 힘 있는 울림이 들려왔다. 마이크를 타고, 선서. 크고 가늘한 손을 들고 학생회장 제리는 전교생 앞에 무언가를 맹세한다. 조엘은 내 허벅지를 베고 누워 시체보다 더 조용히 호흡했다. 도박을 생각하고 있나? 과묵한 낯의 본면이 궁금하다. 우리가 차지한 체육용 매트로 오전의 빛살이 침입했다. 나는 허리를 숙이고 내 이름이 조전된 조엘의 엄지에 입 맞췄다. 조엘이 천천히 눈꺼풀을 개복했다. 나는 그 까무잡잡한 눈동자에 대고 묵시처럼 선서, 맹세했다. 조엘. 만약에 내가 너라면, 내가 그런 엄지를 가졌다면, 그리고 원하지 않는 계시가 나를 박제한다면. 나는 차라리 엄지를 자를 거야.



 

크리스마스 파티를 앞두고 교내는 몹시 번잡했다. 제리는 십여 개 반을 전부 돌아다니며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뻘짓'을 벌이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아냈다. 사무엘의 지시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학생들이 벌일 수 있는 소동의 범주는 생각보다 다채로웠다. 나체로 행군하기, 운동장에서 취식, 옥상 출입문 무단 개방, 그리고 마리화나.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학생들은 오히려 그 각서야말로 제대로 된 뻘짓이라 생각했다. 이딴 걸 누가 지키겠냐면서 사무엘의 고지식함에 코웃음을 쳤다. 그러한 행위에 아무 생각도 없는 학생은 무던한 조엘뿐이었다. 조엘은 자신이 이미 서명을 했다 이르면서, 제리가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도박 판 벌이지 말라는 당부를 했다고 덧붙였다. 작년 조엘은 자신이 몸담은 문학 동아리에서 은밀하게 바카라 판을 개시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내 이름 옆에 붙게 되었을 공백을 고스란히 상상했다. 제리가 사인을 받으러 우리 클래스에 방문했을 때 나는 화장실에서 오래도록 손을 씻고 있었다.

지리학 수업이 끝나고 지난번 담배를 피웠던 그곳에서 제리와 조우했다. 제리는 예의 그 심드렁한 눈빛으로 나를 발견하자마자 아, 하더니 품에서 카다로그를 꺼냈다. 다른 손에는 그때와 같은 양철 바스켓을 들고 있었다.

"너 사인 안 했지. 여기다 사인해."

"펜이 없는데."

잠시 멈칫하던 제리가 이내 아무렇지 않게 바스켓을 기울였다. 물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순간 무지개가 만들어질 만큼 기막힌 추락사였다.

"그럼 이따 우리 동아리로 찾아와."

나는 축축히 젖어든 화단을 응시했다.

"왜 그렇게 무심하게 물을 줘?"

"내가 무심하다고?"

제리가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제리의 동아리는 영화부. 이미 바쁜 학생회에 소속되어 있어 할 일이 영화 보고 감상문 적는 것밖에 없는 유유한 동아리의 일원이 됐다. 나는 아무도 없는 영화부실에 제리와 마주 보고 앉아 그가 내미는 카다로그에 서명했다. 공백이었던 칸을 바쁘게 채우면서 눈으로는 상단에 휘갈겨 있는 제리의 본명을 좇았다.

제리는 그 시선을 따라가다 말고 물음표 없이 질문했다.

"크리스마스 파티 때 학년 전체가 게임을 해야 하거든. 뭐가 좋을 것 같은지 말해봐."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는데?"

"네 남자친구가 게임에 미친놈이니까."

"그러니까 더욱 조엘한테 물어봐야지."

"학교에서 노름 패나 뒤집을 순 없잖아."

볼펜을 반납하자 제리가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빠르게 굴렸다. 허공에 판서라도 하는 것마냥 꽤나 직선적인 곡선이 그려졌다. 나는 묵묵했다. 그러나 아예 입을 닫지는 않았다. 문득 스쳐가는 낱말이 있었다.

"너 섯다 알아?"

"섯다? 한국어야?"

"응, 재밌대."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제리의 눈썹이 미묘하게 꿈질였다. 고개를 끄덕거리자 제리가 마치 낙서처럼 '섯다'를 메모했다. 이후로 나는 레이스, 랜덤 박스, 빅휠, 메이드 등 조엘에게 주워 들은 무명한 도박 게임의 이름을 줄줄이 읊었다. 당연히 뭐 하는 게임인지 그게 즐거운지도 몰랐다. 전교생이 할 만한 건전한 게임이 생각나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지만 딱히 제리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부재였기에 가능한 농담이었다. 그걸 제리는 집중한 얼굴로 빠짐없이 받아적었다. 어느새 초면의 어휘들로 빼곡해진 메모를 들여다보던 제리가 제안했다. 그건 방금 전 내게 게임 종류를 캐물었을 때보다 더 의외인 발언이었다.

"내 이름 대고 우리 동아리 가입해. 나 좀 도와."

"왜 그래야 해?"

"동아리에 말이 통하는 애가 없어."

그 말이 사실이긴 한 건지 제리의 표정은 점잖았다. 나는 제리가 목차의 배순에 매료된 틈을 타, 이 머나먼 타국에서 제리의 삶을 유리하게 만들어준 요소들을 살핀다. 성벽처럼 튀어나온 눈썹뼈, 눈동자, 반들하지만 귀밑이 각진 턱선, 콧대의 점. 암묵이 이어지자 제리가 답을 종용하듯 동공을 띄웠다. 어쩌면 하단에 드리운 자위마저 깨끗한 흰 빛이다.

"내가 네 동아리에 들면 나한테 이득이 뭔데?"

"뭐?"

"조엘이 함부로 배팅하는 거 아니래."

제리가 헛웃음을 친다. 활등을 도습하는 입매 아래 뾰족한 송곳니가 드러났다. 나는 거기가 가장 귀엽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제리가 성대를 진동했다.

"너 왜 이렇게 까졌니."

"......"

그건 아주 부드럽고 포만한 음성이었다.

무수한 대안 끝에 한 가지를 고르고 제리가 미소 지었다.

"담배 걸린 거 까줄게."

제리 (Lee JaeHyun)

조엘 (Lee JuYeon)

q.이게 뭔가요?
a.네임버스입니다

[산타독기]

하악

[디어클라우드]

헐 분위기 대박이다 존잼이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