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커뮤니티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전 이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제 행복을 찾아 떠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
직장인이라면 한번쯤 이 사진을 본 적 있을거다. 애니메이션 ‘이누야사’ 속 한 장면을 일명 ‘퇴사짤’로 활용한 것인데, 퇴사할 때 어울리는 대사와 진심으로 기쁘고 행복한 듯한 목소리, 그리고 조금씩 멀어지는 화면전환이 특징이다.
해외 사이트에서 돌고 있는 안티워크 밈. /레딧
최근 이런 밈(Meme·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사진이나 영상)이 단순히 농담을 넘어 노동시장을 흔드는 새로운 현상이 되고 있다. 일명 ‘안티워크’(Antiwork·반노동) 운동이다. 자신의 삶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MZ세대는 한 회사를 오래 다니기보다 자아실현, 워라밸 등 자신이 원하는 가치를 찾아 이직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안티워크 운동은 미국과 중국에서 두드러진다. 미국에선 퇴직자가 사상 최대치를 기록하면서 ‘대퇴사시대’(The Great Resignation)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한국도 최근 몇 년 사이 조기 은퇴를 꿈꾸는 ‘파이어족’(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경제적 자립을 통해 빠른 시기에 은퇴하려는 사람)이 등장하는 등 안티워크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어쩌다 이들은 직장을 떠나게 됐을까.
◇미국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번진 ‘안티워크’ 운동
안티워크는 미국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 ‘레딧’의 하위 커뮤니티다. 레딧은 ‘월스트리트벳츠’(WallstreetBets)라는 커뮤니티로 국내에서 유명하다. 2021년 초 공매도 세력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게임스탑과 AMC 등 밈 주식(meme stock)을 사 모으자는 운동을 펼쳤다. 암호화폐 투자 열풍을 이끌기도 했다. 그만큼 레딧의 이용자가 많고, 영향력이 크다는 뜻이다.
2022년엔 안티워크가 월스트리트베츠를 잇고 있다. 레딧 회원 수는 2022년 1월26일 기준 170만4923명이다. 2020년 10월 회원 수 18만명에서 10배 가까이 늘었다. 레딧에 안티워크 커뮤니티가 만들어진 것은 2013년이지만 최근 들어 회원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직장을 그만둔 사람이 늘면서다.
커뮤니티 회원들은 스스로를 ‘게으름뱅이’(idler)라고 부른다. 일을 하지 않아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곳에서 가장 환영받는 사람은 사표를 던진 노동자다. 커뮤니티 운영자인 도린 포드(30)는 팟캐스트에서 지난 10년간 일했던 소매점을 그만뒀다고 밝혔다. 이후 반려견 산책 아르바이트 외엔 특별한 직업을 갖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대부분의 노동은 무의미했다”며 “(직장 생활은) 모욕적이고 굴욕적인 데다 착취가 심했다”고 했다.
레딧 안티워크에 올라온 게시글. /레딧
안티워크에 올라오는 글은 상당 수가 고발성 콘텐츠다. 불합리한 직장 문화에 대한 밈이나 일을 관둔 사연도 자주 올라온다. 한 회원은 회사 출입구에 두 개의 공고문이 붙은 사진을 공유했다. 회사측에서 붙인 것으로 보이는 공고문에는 “인력 부족으로 임시 휴업 중이다. 정상 운영을 하기 위해 재작업 절차를 밟고 있다”는 문구가 쓰여있다. 반면 직원들이 쓴 것으로 보이는 공고문에는 “업소 대표들은 직원들을 개처럼 다루면서 우리를 도운 적이 없다”며 “지난 몇 달간 형편없는 사업은 게으르고 부주의한 대표들의 결과였다”는 글이 적혀 있다.
다른 게시글에는 “동료가 코로나19에 감염돼 7일간 의무 격리해야 하는데 상사가 이를 어기고 일하라고 강요한다”는 글도 올라와 있다. 대부분 노동 착취를 호소하는 내용이다. 이에 회원들은 상사를 고소하고 직장을 떠나라고 권유했다. 직장을 그만둔 이들은 퇴직을 인증하기도 한다.
안티워크 회원들은 사표제출에 그치지 않고, 집단행동에도 나선다. 노동자의 ‘쉴 권리’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다. 회원들은 식품업체 켈로그가 파업 중인 공장 노동자를 대신할 인력 채용에 나서자 수천 건의 가짜 지원서를 내며 이를 막았다. 또 아마존과 크로거를 향한 불매운동을 펼쳤다.
안티워크 운동이 시작되면서 미국에선 ‘퇴사 열풍’이 불고 있다. 2021년 11월 기준 퇴직자는 453만7000명이었다. 2000년 12월 통계를 작성한 이후 최대치다. 전문가들은 직장을 관두는 사람들이 늘어난 이유로 코로나19 팬데믹을 꼽았다. 영국 경제 일간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팬데믹 기간 동안 재택근무에 적응된 근로자들이 사무실 복귀를 거부하면서 이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여기에 일을 해봤자 잘 살 수 있거나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이 사라진 것도 퇴사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블룸버그 자료를 보면 1988년 당시 40대 초반의 평균 자산은 11만3000달러(약 1억3500만원)였다. 하지만 2019년 같은 나이대 평균 자산은 9만1000달러(약 1억898만원)로 20%가량 줄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보다 지금의 행복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된 것이다.
도린 포드는 “모든 사람들이 코로나19, 과로, 모기지, 임대료 지급 등으로 한계에 부딪혔다”며 “안티워크 열풍은 젊은 근로자들이 (일보다) 자신에게 더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했다. 안티워크 무직자들은 일을 그만두고 단기 아르바이트만 하는 등 가능한 적게 일하고 있다. 일부는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룸메이트를 구하는 글을 올린다. 하지만 이들은 퇴사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도린 포드는 “나 역시도 보스턴의 한 달 임대료를 겨우 낼 만큼 빠듯하지만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고 했다.
◇중국은 ‘탕핑 운동’
노동 거부 현상이 미국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다. 중국에서는 ‘탕핑’(躺平·똑바로 드러눕기) 운동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이들은 직장에서의 경력을 포기하자고 주장한다. 단순하고 편하게 살자는 취지다. 중국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주택을 비롯한 자산가격이 폭등해서 회사를 다닌다고 경제적인 풍요를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중국의 탕핑 운동 밈. /온라인 커뮤니티
중국판 네이버 지식인 격인 지호논단(知乎論壇)은 탕핑 운동을 “집 사지 말고, 차 사지 말고, 결혼하지 말고, 아이 낳지 않고, 소비하지 앟는다. 최저 생존 기준만 유지한다. 타인의 돈벌이를 위한 기계나 착취당하는 노예가 되기를 거부한다”고 정의했다. 한국의 N포 세대와 유사한 중국식 N포 세대인 셈이다. 이에 중국 정부는 ‘탕핑’을 금지어로 지정하는 등 단속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중국 커뮤니티에서는 여전히 드러누운 동물 등의 밈이 퍼져 나가고 있다.
이밖에 다른 국가에서도 안티워크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영국에서는 2020년 3분기 40만명에 달하는 근로자가 퇴사했다. 또 호주의 한 매체는 “코로나19 동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에 따라 살기를 선택했고, 다른 직장을 찾을 기회가 많아졌다”며 “호주에도 대규모 퇴직 사태가 발생할 것”이라고 했다. 국내의 경우 조기 은퇴를 꿈꾸는 ‘파이어족’이 늘어나면서 ‘파이어족 카페’ 커뮤니티가 등장했다.
◇안티워크 계속되면 경제적 손실 가져와
기업들은 인력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미국 식품기업인 타이슨푸드와 물류회사 페덱스 등은 급여를 올려도 사람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이에 골드만삭스는 안티워크 운동이 지속되면 경제 전반에 큰 손실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2030년 미국에만 1조달러의 손실이 발생할 것이란 분석이다.
반면 근로자들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더 나은 직업을 위해 자기계발에 들어간 사람도 있고, 안티워크를 추구하는 이들도 돈이 떨어지면 다시 일터에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금융 전문가 엘리슨 슈레거는 블룸버그에 기고한 칼럼에서 “무직자들은 돈이 떨어지거나 지루함을 느낄 것이기 떄문에 결국 직장으로 복귀할 것”이라고 했다.
글 jobsN 박혜원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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