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장 죽성리
내가 주중 머무는 거제도는 왕조시대 도성과 먼 변방이었고 해안엔 왜구가 들락거려 생활하기 어려운 데였다. 절해고도 귀양살이보다 낮은 급 유배지이기도 했다. 고려 말 무신정권 시절 의종이 유폐되어 죽은 섬이다. 조선 중기 예송 논쟁의 중심인물 송시열도 거제로 유배 왔다. 이웃 남해섬 노도로 유배 와 그곳서 생을 마친 서포 김만중은 국문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남겼다.
봄방학을 맞아 근교 산자락을 누비고 있다. 어제는 조선 초 계유정난 때 절의를 지키고자 낙향한 조려가 은둔한 군북 백이산 기슭 채미정을 다녀왔다. 이월 셋째 토요일도 역사 속 한 인물이 유배 왔던 곳을 찾아 길을 나섰다. 조선시대 3대 가인의 한 사람인 고산 윤선도의 젊은 날 유배지가 떠올랐다. 관직에 높이 올라봤고 벽촌으로 쫓겨 가기도 해 열탕과 냉탕을 오간 인물이다.
고산은 보길도 부용동 원림에서 말년을 보냈다지만 부침이 큰 생애였다. 성균관 유생시절 동래 기장으로 유배와 7년을 보냈다. 처음엔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 갔다가 옮겨온 데가 기장 죽성 해안이다. 제주도 추자도 흑산도와 같은 섬이 아닌 유배지로는 한양과 거리가 가장 먼 곳 가운데 하나다. 그에 버금할 만한 데가 함경도 회령이나 종성이 있고 전라도 땅끝 강진이 있기는 하다.
내가 운전을 하지 않기에 대중교통으로 기장을 찾았다. 하루 한 차례 동해남부 철로로 가는 무궁화호가 있지만 다른 교통편을 이용했다. 미명의 새벽 창원실내수영장 앞으로 나가 진해 용원으로 가는 757 직행버스를 탔다. 안민터널을 지나 웅천을 거쳐 용원에 닿으니 그즈음 날이 밝았다. 경제자유구역청으로 나가 부산 앞바다를 연결한 해상 교량으로 다니는 1011번 버스를 탔다.
을숙도대교를 건너 송도였고 남항대교를 건너니 영도였다. 북항을 가로 지른 북항대교를 건너 남천동에서 광안대교로 오르니 해운대 초고층 아파트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송정해수욕장을 지나 기장 청강리 공영차고지 종점에서 내렸다. 거기서 기장 읍내로 가는 교통편은 시내버스를 타지 않고 무작정 걸었다. 군청을 지나 신천마을 앞에서 봉대산 남산 봉수대로 가는 등산로로 들었다.
봉대산 정상에서 해안으로 뻗친 봉우리가 기장 남산봉수대였다. 봉수대 터는 유구가 없고 바위더미였다. 바다를 조망하기 좋고 뭍의 산세는 병풍처럼 두르고 있었다. 동쪽으로 죽성 포구와 고리원자력발전소가 보였다. 서쪽으로는 대변항과 힐튼호텔이 시야에 들어왔다. 봉대산 정상으로 가질 않고 죽성마을로 내려섰다. 찻길 건너 일광해수욕장까지는 신앙촌이라 개방이 되지 않았다.
죽성 해안 들머리는 초등학교가 있었다. 학교 뒤 산언덕 왜성이 눈에 거슬렀다. 임진왜란 때 왜구가 울산 서생에서 순천까지 장기 주둔을 노리고 쌓은 40여 개 성 가운데 하나였다. 월전마을로 넘는 언덕에는 어촌답게 풍어를 기원하는 당집과 함께 삼백 년 되는 해송 여섯 그루가 한 둥치처럼 수형이 아름다웠다. 죽성리 해송을 둘러보고 해안가로 내려가 포구 곁 황학대로 올라갔다.
고산이 기장으로 유배와 머물던 황학대였다. 고산은 기장 죽성마을에서 7년을 보내면서 황학루에 올라 서성였을 것이다. 양자강 하류 신선이 황학을 타고 하늘로 올랐다는 황학루에 견주어 황학대라 붙였다. 한양으로부터 해배 전갈이 내려온다면 학처럼 훨훨 날아갈 기분이었을 테다. 고산은 안타깝게도 유배에서 풀린 이후도 중년과 노년에 다시 영덕과 북청으로 귀양살이를 갔다.
죽성 포구에서 해안을 돌아가니 드라마 촬영 세트장이었던 성당이 나왔다. 주말을 맞아 나들이 나온 관광객들이 더러 보였다. 파도가 밀려오는 해안에는 해녀들이 물질을 하고 있었다. 월전 포구에 이르니 그 해녀들이 딴 어패류를 팔았다. 해안선 따라 대변항에 이르니 노점에선 미역과 멸치를 비롯한 건어물을 팔았다. 싱싱한 물미역을 사 배낭에 채워 해운대로 나가는 버스를 탔다. 20.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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