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차 순례여행을 마친 후 2차 여행을 계획했다.
성탄준비와 12월 중순부터 하게 될 마늘 작업 이전에 끝내야 하기에
1주일 후 출발하려고 했지만, 여행의 후유증인지
머리가 아프고 열이 많아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니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아 어쩔 수 없이 1주일 더 쉴 수밖에 없었다.
자가 격리가 끝나고 바로 다음 날 출발했다.
대림시기 첫 날이라는 상징도 있고 다녀오면
바로 대림 3주 자선주일이 되어 제대꽃꽂이를 손봐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충청권인 대전교구, 청주교구를 거쳐
강원도 원주교구와 춘천교구 일부, 그리고 몇 군데 남아있는
안동교구를 순례할 계획이다.
1차 때보다 낮 시간도 많이 짧아졌고, 날씨도 추운 겨울이라
눈이라도 내리면 여행에 지장이 생길 우려가 되었지만
모든 것은 주님께 맡기고 출발했다.
이미 1차 여행에서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기에
이번에는 그런 부분을 보완하여 계획을 수립했고
한 번 경험한 일이라 한결 편안한 마음이었다.
2022.11.27(일)
오늘 묵을 숙소를 창성장으로 정하고 며칠 전 예약을 했다.
그리고 몇 곳을 빼고는 제천 ES리조트 2박 포함하여 숙소 예약을 마쳤다.
한 번 경험이 있기에 일정을 잘 맞출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모레부터 비 예보가 있고, 비가 그친 후에는 기온이 급강한다고 하여
순례여행 걱정을 하면서 배에 올라 떠나온 제주를 바라보았다.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지난 번에는 목포성지를 돌아보고 나니 저녁 7시 반이 넘어서
저녁을 먹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바로 숙소로 향했기에 도중에
숙소 근처에 있는 모아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창성장(숙소)
5호 온돌 70,000원
이번에도 창성장을 숙소로 정했다.
여객터미널에서 가깝고 주위에 민어골목등 음식점도 마음에 든다.
우리가 이번에 잔 방도 온돌방으로 색동이불이 놓여 있어서
보기만 해도 옛 추억과 함께 따뜻함이 느껴졌다.
다음 날 첫 순례지인 산막골까지 2시간 운전해야 하기에
6시에 출발할 계획으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목포 → 산막골.작은재 → 지석리 → 서짓골
180Km 19Km 24Km
1. 산막골. 작은재
베일 속에 가려져 있던 박해시대 충청남도 서천 지역 신앙 선조들의
삶의 터전이자 성스러운 피를 흘렸던 성지,
순교자들의 유해가 묻힌 무덤 터가 2010년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 같은 사실은 호남교회사연구소 서종태 박사(전주대학교 교수)가 발간한
“박해기 서천지역 천주교회사에 대한 연구” 자료집을 통해 밝혀졌다.
자료집에 따르면 서천 지역 신앙 선조들의 삶의 터전들 가운데 천방산(千房山, 324m) 산막골
(현 충청남도 서천군 판교면 금덕리)은 신앙 선조들이 1839년 기해박해 이후 군란을 피해
인적 없는 산간벽지에 숨어 신앙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던 곳이자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년) 주교와 페롱(Feron, 權, 1827-1903년) 신부의
사목 중심지로 밝혀졌다.
또한 이곳은 순교자들이 심한 형벌을 받고 피를 흘렸던 점으로 보아
성지로서의 의미도 갖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페롱 신부는 1858년 9월 24일과 25일, 1859년 9월 27일 등 총 6통의 편지를 산막골에서 작성했다.
이 산막골 교우촌에 대해 그 동안 경북 상주시 모동면 신흥 1리에 있는 산막골로 이해해 왔으나
페롱 신부의 집 주인이자 복사로 활동했던 황기원, 황천일 등이 거주했던 곳이
서천 산막동이었던 점 등으로 보아 페롱 신부가 사목 중심지로 삼아
여러 차례 서한을 작성한 곳은 서천 산막골(현 서천군 판교면 금덕리)이 확실하며
신앙 선조들이 공동체를 이뤄 산 곳임이 밝혀진 것이다.
또한 이곳은 황석두(黃錫斗, 1813-1866년) 루카 성인 일가가
충청북도 연풍에서 이주해 와 1866년 병인박해가 있기 전 10여 년 동안 머물면서
참회와 보속의 삶을 살았던 뜻 깊은 교회사적지이기도 하다.
특히 서천군 문산면 수암리 산 78번지의 천방산 기슭은 수암리의 독뫼 공소 터와
판교면 금덕리의 작은재 공소 터를 이어주는 고갯마루로
이름 없이 살다간 숱한 신앙 선조들의 줄무덤이 있던 자리였다.
하지만 1994년 산림도로 개설과 함께 줄무덤 터는 콘크리트에 묻히고 말았으며,
당시 공사현장에서 숱한 유골과 함께 발굴된 십자가와 묵주 등 성물도 연고자가 없어
인근에 다시 묻혔으나 그 위치를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자료집에 의하면 조선조 말 박해시기에 충청남도 서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서천 지역은
일찍부터 천주교가 널리 전파되었고, 처형된 신자가 57명이나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산막골 교우촌은 서천 일대의 사목 중심지로서 주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돌보는 이가 없어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에 밝혀진 것이 거의 없었다.
대전교구 서천 본당 주임으로 정성용(鄭成溶) 요한 신부가 부임하면서 베일 속에 가려져 있던
박해시대 서천 지역 신앙 선조들의 숭고한 터전들이 하나씩 밝혀지게 되었다.
서천 본당은 2010년 11월 13일 천방산 고갯마루에서 교구장 유흥식 주교 주례로
‘산막골 작은재 줄무덤 터 현양미사’를 봉헌하고, 수암리의 독뫼 공소 터에 세워진 성모동산과
공소 터에서 작은재를 오르는 산길에 세워진 십자가의 길 14처에 대한 축복식도 가졌다.
서천 본당은 독뫼 공소와 작은재 공소 터에 기념비를 세워
순례객들의 교우촌 순례길을 돕고 있으며, 작은재 줄무덤 터에도 기념비를 세워
천주교 백색 순교자들을 현양하고 있다.
2017년 현재 산막골에서 작은재로 이어지는 옛길 3.5Km를 복원하는 중이다.
멀리 서해가 보이는 이 길은 옛 공소 신자들이 애환을 함께하며 넘나들던 곳이다.
작은재
이곳 천방산 ‘작은재’ 는 조선후기 천주교 박해가 있을 때에
이름 없이 살다간 숱한 신앙 선조들의 줄무덤이 있던 자리였다.
이곳에는 약 30여 기의 작은 무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서천 지역 신앙 선조들의 삶의 터전들 가운데 특히
서천군 문산면 수암리 산 78번지의 천방산 기슭은 수암리의 독뫼 공소 터와
판교면 금덕리의 작은재 공소 터를 이어주는 고갯마루였다.
작은재 줄무덤이 있는 이곳은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시기에
독뫼 공소(문산) 신자들과 작은재 공소(판교) 신자들이 통발을 하던 장소이고,
박해를 피해 신앙을 지키다가 선종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묻힌 장소이다.
이곳에 있던 약 30여기의 무덤들은 1994년 천방산 임도 포장이 있을 때에
줄무덤 터는 콘크리트에 묻히고 말았다.
아쉽게도 1992년부터 1994년까지 11.5Km를 서천군 문산면 신농리에서
서천군 시초면 초현리까지 천방산 임도를 콘크리트로 포장 중에 파묘가 되었고
파묘시 당시 공사현장에서 숱한 유골과 함께 십자가와 묵주 등 성물들이 출토되었으나
연고가 없어 어딘가에 재매장 되었다고 한다.
서천 본당은 독뫼 공소와 작은재 공소 터와 작은재 줄무덤 터에
기념비를 세워 천주교 백색 순교자들을 현양하고 있다.
2010년 11월 13일 천방산 고갯마루에서 교구장 유흥식 주교 주례로
‘산막골 작은재 줄무덤 터 현양미사’를 봉헌하고,
수암리의 독뫼 공소 터에 세워진 성모동산과 공소 터에서
작은재를 오르는 산길에 세워진 십자가의 길 14처에 대한 축복식도 가졌다.
2. 지석리
충청도 임천(林川)의 괴인돌이라는 마을.
오늘날의 행정 구역 명칭으로 충청남도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는 두 명의 성인,
곧 손선지(베드로, 1820-1866년)와 정문호(바르톨로메오, 1801-1866년)가
탄생하는 영광을 얻었다.
1백 년 박해사에서 가장 혹독했던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성인 한재권과 함께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 치명한 두 성인의 유해는 천호 성지에 묻혀 있다.
이들 두 성인은 팔이 부러지고 살이 터져 나가는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평온을 잃지 않았고
형장에서도 오히려 축복의 순간을 맞는 기쁨에 용약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어려서 입교한 손선지는 열심한 신앙으로
이미 16세 때 샤스탕 신부로부터 회장으로 임명되어
순교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다.
병인박해 때 그는 전주 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골에 살며
자신의 집을 공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 해 12월 대성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잡혀
전주 감영에서의 신문 중 회장임이 탄로 났다.
그로 인해 손선지는 공소를 거쳐 간 서양 신부와 교회 서적의 출처를 알려는
관헌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나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았다.
더욱이 그는 옥중에서도 회장의 직무를 다해
갇혀 있는 교우들을 위로하고 권면했다.
12월 13일 그는 대성동, 성지동 등지에서 체포된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 유해는 전주 서천교를 넘어 용마루재와 유상리(柳上里) 뒷산에 묻혔다가
그 아들에 의해 이곳에 옮겨졌다.
양반의 집안에서 태어나 원을 지낸 적도 있는 정문호 성인은
임천(林川)에서 천주교를 알게 되자 곧 입교했다.
그는 교우들뿐만 아니라 외교인들에게조차 깊은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그 뒤 박해를 피해 교향을 버리고 여러 지방을 유랑하다가
병인박해 때에는 전주 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골에 살았다.
그 해 12월 초 사람을 보내 전주 감영의 동태를 살피기도 했는데
그 소식을 미처 듣지도 못하고 12월 5일
대성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붙잡혀 순교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정문호는 옥중에서도 항상 기도로 순교를 예비했고
형장에 끌려가면서도 "오늘은 우리가 천국으로 과거 보러 가는 길"이라며
자신의 순교를 기쁨으로 맞았다.
이들 두 성인은 1968년 10월 6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백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 반열에 올랐다.
부여 지석리에는 아직도 손선지 성인의 종씨들이 살고 있는데,
가난한 생활 가운데서도 손선지 성인의 시성비라도 세워 달라고
홍산 성당에 밭을 기증했다.
그래서 사적지를 관리하고 있는 홍산 성당은
두 성인의 생가터를 정확히 확인할 수 없자 동네 땅 일부를 매입해
현 위치에 두 성인의 출생 기념비와 50여명 정도가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야외제대와 기념비 안내문을 세웠다.
3. 서짓골 성지
충남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의 멍덕봉(명덕산) 기슭에 위치한 "서짓골"은
옛적에 박해를 피하여 천주교 신자들이 다수 은거했던 곳이며,
병인대박해 때인 1866년 3월 30일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한
다섯 성인 가운데 성 황석두 루카 회장을 제외한 네 성인의 유해가
1882년까지 16년 동안 안장되었던 곳이다.
순교한 다섯 명의 성인 중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주교는
1845년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다가 1857년 보좌 주교로 성성되었으며,
제4대 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1814~1866, 시몬) 주교가 순교하면서
1866년 3월 7일 교구장이 되었으나 4일 만인 11일에 충청도 내포 지방에서 체포되었다.
이때 그의 복사로 활동하던 황석두(黃錫斗, 1813~1866, 루카)가 함께 체포되었고,
이어 인근에 피신해 있던 오메트르(Aumaitre, 吳, 1837~1866, 베드로) 신부와
위앵(Huin, 閔, 1836~1866, 마르티노) 신부가
더 이상 신자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려는 생각에서 자수하였다.
이들은 모두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3월 23일(음 2월 7일)에 군문효수형을 선고 받았는데,
이때 충청도 제천에서 체포되어 온 장주기(張周基, 일명 樂韶, 1803~1866, 요셉)도
이튿날 같은 형을 선고받았다.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섯 성인 중 황석두 루카 성인의 유해는 곧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 졌고,
나머지 네 유해는 3일 뒤 형장의 모래사장에 묻혔다가
6월 초 신자들에 의해 홍산 남포의 서짓골로 이장되었다.
네 성인의 유해는 장주기 성인의 아들 장노첨의 간청으로
"서짓골" 이화만(바오로)과 그의 아들 이치문(힐라리오) 및
"도앙골" 김순장(요한 금구)의 주도로 그해 4월 8일(양력 5월 21일) 이후
갈매못에서 10리 가량 떨어진 곳에 1차 암장하였다.
그러나 그 암장묘를 산짐승들이 해칠 우려 때문에 안전지대로 모시기로 하여,
"도앙골"에 사는 김순장 요한 금구를 만나 의논이 되어 그로부터 경비를 충당 받고,
멀리 공주 국실(현 공주시 반포면 국곡리)에 사는 신 회장과
이치문 가족들의 추렴을 보태서 오천에서 삯배를 빌려
보령→남포→부사만→완장내 포구(현 웅천 하수종말처리장)까지의 해로와
웅천천을 거쳐 이동한 다음에 육로를 통하여 남포 서짓골까지 유해를 운송하여
서짓골 담배밭 한가운데에 광중 4개를 파고 봉분은 하나로 하여 안장하였다.
유해 운송과 안장을 담당하였던 "서짓골" 신자들 가운데 몇 사람은
후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순교하였고,
나머지 신자들은 차차 다른 곳으로 피신하여 "서짓골"을 떠나게 되었다.
이 성인들의 유해는 그로부터 16년 후 파묘되어
1882년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용산 신학교와 명동대성당에 머물다가
지금은 절두산 성지에 모셔져 있다.
그러나 이 4위의 순교성인들 유해가 육탈(肉脫)되어 그 뼈들만 옮겨가고
그분들의 살이 흙에 섞여 남은 진토는 아직도
이 서짓골 외교인들의 묘지들 사이에 묻혀 있다.
첫댓글 "오늘은 우리가 천국으로 과거 보러 가는 길" ㅎㅎ
감사합니다.
건강찾으시어 다행입니다..순교자들의 삶은 모두 눈물을 흘리게합니다.훌륭한 기록솜씨에 그저 감사드릴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