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짓골 성지 → 삽티 성지 → 도앙골 성지 → 황새바위 순교성지 → 수리치골 성지
27Km 7.8Km 63.6Km 28.4Km
4. 삽티성지
부여 삽티는 갈매못에서 순교한 황석두 루카 성인이 안장된 곳이다.
병인박해(1866) 때인 1866년 3월 30일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섯 명의 성인,
즉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주교,
오메트르(Aumaitre, 吳, 1837~1866, 베드로) 신부와 위앵(Huin, 閔, 1836~1866, 마르티노) 신부,
황석두(黃錫斗, 1813~1866, 루카) 회장과 장주기(張周基, 일명 樂韶, 1803~1866, 요셉) 회장은
그 머리들을 사흘 동안 장깃대에 매달았다가
그 몸과 함께 아무렇게나 모래밭에 군인들이 묻었다.
이에 다섯 성인 가운데 황석두 성인의 시신은
그 조카이자 양자인 황천일(요한)이 주선하여 황기원(안드레아) 등의 가족들이
황석두 성인의 시신을 거두어 현 홍산면 상천 2리에서 내산면 금지 2리로 넘어가는
지방도의 고개인 "삽티"에 유해를 안장하였다.
황석두 성인의 유해를 안장한 곳으로 추정되는 홍산 삽티의 "즘터"에서는
1964년에 산림개간 작업을 하던 사람들에 의해서
박해시기의 성물(聖物)이 담긴 옹기가 발견 되었다.
당시 산림작업에 참가하여 현장에서 그 발견을 목도한 박종선(안드레아)은
현재 금지2리(산정말)에서 살아온 신자로서 그 사실을 증언한다.
그 "즘터"는 금지2리에서 삽티를 남쪽으로 넘어 홍산면 상천2리에 닿기 전
오른쪽 계곡 너머 경사지에 위치한다.
그 경사지는 상천리에서 도앙골(내산면 금지1리)로 넘어가는 오솔길의
성화당 고개 아래 계곡과도 만나는데, 그 현장은 현재 개인사업자가 절개 평토하고
여러 동(棟)의 공장을 건축하였다.
그 경사지였던 "즘터"는 아마도 황석두 성인의 안장지였고
성물이 담긴 옹기도 황 성인과 연관이 있었을 것으로
차기진 박사는 추정하고 있다.
그 "즘터"의 윗자락은 모 문중의 재실과 묘원이 10여 년 전에 조성 되어 있고,
그 옆 경사지 일부를 천주교회 측에서 2013년 초에 매입하여 성역화를 계획하고 있다.
도앙골의 신자들은 아마도 삽티의 그 "즘터"로 넘어 다니며(성황당 고개를 넘어)
홍산 지역의 다른 곳 신자들과 연통하고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금지1리의 주민들도 도보로 홍산 읍내 방향에 일보러 다니던 과거사를 회상하고 있다.
그리고 성물 옹기를 발견한 곳을 "즘터"라 일컫는 것으로 추정하건대,
"삽티 교우촌"의 잔류 신자들이 대를 이어 살던 옹기 제작지로 추정할 수도 있다.
삽티 계곡은 황석두 루카 성인의 조카이자 양아들인 황기원(안드레아)과
황천일(요한)이 주도하여 교우들이 모여 살던 교우촌이었다.
그곳에 황석두 루카 성인은 산막골에서부터 가끔 찾아와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격려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후 이 황씨 조카들도 잡혀가 서울에서 순교하게 되어
황석두 루카 성인의 유해를 안장해드린 사람들마저 순교하여
그 후 정확한 위치를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전주교구 정읍 신성리 공소에서 살던 황 마르타는
1922년 4월 6일 정식 증언자로서 치명자들에 대한 증언을 하였는데
그는 황석두 성인의 종손녀(從孫女)로서, 그의 백부인 황 예로니모가
직접 갈매못에서 치명 장면을 목격하고 와서 들려준 얘기를 증언하였다.
시복재판에서 증언하기를 갈매못 모래밭에 가매장된 황석두의 시신을
황석두의 조카이자 양아들인 황천일 요한이 4월 그믐에서 5월 초승 사이에 수습하여
홍산 삽티에 이장했는데(《병인박해 순교자 시복재판기록(1차)》6권 1095쪽과 1111쪽),
"4월 16일에 나의 백부가 가서 시체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홍산(鴻山) 삽티에 묻었습니다.
지금은 자손이 없기 때문에 가더라도 찾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1964년에 그곳 일대를 개간 작업하던 외교인들이 항아리와
그 속에 들어 있는 십자가 및 성모상을 발굴하였다.
그 발굴 유물은 지금 서울 절두산 성지 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다.
그 유물이 발굴 된 그곳은 아마도 황석두 성인의 유해 안장 사연과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추정지는 신천 강씨(信川康氏) 종산의 재실 뒷편이다.
대전교구 하부내포 성지 전담 윤종관 신부는 최근 황석두 성인의 추정 안장지 일대
8만 2500㎡(약 2만 5000평)를 매입해 훗날의 성지 조성에 대비하고 있다.
5. 도앙골 성지
홍산(鴻山) 도앙골은 옛 교우촌이 있었던 유서 깊은 순교 사적지로
이존창(루도비코)의 전교활동에 의해 교우촌을 이룬 곳이며,
1850년 최양업 도마 신부가 첫 사목보고서 를 썼던 곳이다.
1866년 병인박해 때는 김사범, 김 루카, 김 바오로, 오 요한, 오 시몬 등 다섯 분이
공주감영으로 잡혀가 순교한 교우촌이다.
현재 이곳에는 최양업 신부의 시성을 바라는 기념비가 마련되어 있으며,
기도의 집인 “우애의 집”이 있다.
현재의 행정 명칭으로 ‘충남 부여군 내산면 금지리’의 깊은 계곡을
‘도앙골’이라고 오래전부터 일컬어왔다.
‘금지리(金池里)’라는 동리 명칭은 그 계곡이 흘러내린 월명산 정상부(上端部) 아래에
금지사(金池寺)라는 고찰이 소재한데서 연유한다.
금지사 본전(本堂)의 뒤편 바위 밑에서 솟는 샘물은 특이한 약수로 알려져 있는데,
그 샘으로부터 흘러내리는 계곡물가의 좌우로는
산복사(일명 개복숭아)나무가 많이 자란다.
봄철에는 그 계곡 따라 붉은 복사꽃이 굽이쳐 피고 산골 가득 그 향기가
채워진다하여 ‘도원곡(桃園谷 혹 桃花谷)’이라 일컫던 산골 이름을
‘도왕골’ 또는 ‘도앙골’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
홍산(鴻山)이라는 고을 명칭이 한국 천주교회 초기사 및 박해시대와
그 후대의 문헌들 가운데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 초기사에 관련하여 ‘홍산’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내포(內浦)의 사도라 일컬어지는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 1752-1801)의 이름과 더불어 나타나고 있다.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는 이존창이 신해박해(1791) 때 체포되어
충청 감영(공주)에서 풀려나온 후
고향 여사울을 떠나 피신한 곳이 홍산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러한 이존창의 전교활동에 의하여 신앙의 터전이 된
‘홍산 지방’의 신자들이 교우촌을 이룬 곳으로 도앙골이 지목되고 있다.
도앙골에서 잡혀간 순교자들과 출신 신자들과 관련하여
그 교우촌 형성의 정황으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도앙골 출신 순교자들을 다수 찾아낼 수 있고,
갈매못에서 병인년에 순교한 분들의 유해를 거두어 모신 사람들 가운데
‘홍산 도앙골’의 신자가 아주 적극적이었으며,
황석두(루카) 성인의 유해를 우선 모신 장소가 도앙골 고개 넘어
‘삽티’라는 곳인 걸 보면 이 도앙골은 일찍이 교우촌을 이룬 곳임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이 도앙골은 우리의 두 번째 방인 사제인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가 귀국하여
첫 번째의 편지를 쓰신 곳이기도 하다.
최양업 신부가 천신만고 끝에 귀국하여 서울에 도착한 것은 1850년 1월(혹 1849년말)이다.
최 신부는 당시 중병을 앓고 있던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만난 다음
곧바로 전라도를 시작으로 공소 순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6개월간 5개도를 두루 돌았는데, 그해 가을에 자기 은사인
르그레즈와(P.L.Legregeois)신부에게 그간의 활동보고를 올리는 편지를 썼다.
그의 ‘귀국 후 첫 번째 서한’인 이 편지는 1850년 10월 1일자로 작성되었으며,
그 발신지를 ‘도앙골’이라 명기하고 있다.
최양업 신부님께서 귀국하여 선종하기까지 12년 동안의 사목활동 중에
그분의 은사인 르그레즈와 신부와 리부아 신부에게 보낸 편지 중에
도앙골에서 쓴 첫 편지가 가장 긴 문건이다.
그 편지에서 자신의 순방활동 중 발각될지도 모를
위험한 상황을 늘 직면하고 있다고 피력하고 있다.
어떤 마을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이장에게 달려가서 수상한 사람이
(혹 서양 사람이) 잠입했다고 알리는 바람에
이장이 마을 사람들을 소집하여 잡아 죽이자고 의논을 하는 중에
밤을 지새워 기도했다는 이야기도 쓰고 있다.
‘도앙골’에서는 지난 2011년 12월 22일
충남 부여군 내산면 금지리 249 현지에서 전임 대전교구장 경갑룡 주교 주례로
‘탁덕 최양업 시성 기원비’ 제막식을 열었다.
해미성지 주임 백성수 신부의 글씨로 ‘鐸德 崔良業 諡聖祈願碑
(탁덕 최양업 시성기원비)’ 라고 한자로 새겨진 기원비는 높이 약 7.5m
(비석 머리 포함)로 비신(碑身, 비석 몸체), 비석 머리, 비석 받침 등을
모두 가공하지 않은 자연석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6. 황새바위 성지
공주 들머리 언덕에 위치한 이곳은 바위 위에 소나무가 밑으로 늘어져 있고
황새가 서식했다 해서 '황새바위'로 불린다.
달리 '항쇄바위' 또는 '황쇄바위'라고도 한다.
이곳의 바위가 마치 죄수들의 목에 씌우는 칼인
'항쇄'의 모양과 흡사하게 생겼을 뿐만 아니라
칼을 쓴 죄인들이 이 언덕 바위 앞으로 끌려 나와 처형당했기에
'항쇄바위'라 했다는 설이 있다.
또 '황쇄'에서 '쇄'가 옛말로서 '새'와 같다고 풀이해
'황쇄 바위'라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1955년에 발행된 공주 천주교회 연혁에 보면
분명히 '황새바위'라고 명시하고 있어
지금은 '황새바위'로 통일해 부르고 있다.
◆ 황새바위 성지 약사
공주 황새바위는 한국 천주교 역사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증언지 중 하나로 그 의미가 크다.
공주에는 일찍부터 충청남북도를 관할하는 관찰사와
지금의 시에 해당하는 감영이 있었다.
이곳 공주 감영에서는 각 지방에서 잡혀
숱한 심문과 무서운 고문을 당하고도 배교하기를 거절하였을 때에는
감사의 명에 의해 황새바위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는데,
충청도 각 지방뿐 아니라 타 지역으로부터 끌려와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교우들도 많았다.
충남의 홍주, 예산, 해미, 덕산, 신창, 홍산, 연산, 청양, 공주, 이인, 탄천과
충북의 청주, 진천, 연풍, 옥천, 전라도 전주, 광주, 경기도 죽산, 포천,
그리고 한양의 교우들이 공주에 와서 순교 하였다.
이곳 황새바위에서 천주학 죄인들을 공개 처형할 때에는 맞은편 산 위에서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마치 병풍을 친 모양으로 둘러서서 구경을 하였다고 한다.
처단한 죄인들의 머리는 나무위에 오랫동안 매달아 놓아
사람들에게 천주학을 경계하게 하였으며,
그들의 시체는 강도, 절도범들의 시체와 섞여
어느 것이 순교자의 것인지 구별하기조차 어려웠다.
황새바위 앞을 흐르는 제민천은
지금처럼 둑이 쌓여 있기 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넓었는데,
홍수로 범람할 때에는 순교자들의 피로 빨갛게 물들어
금강으로 흘렀다고 한다.
순교자들은 참수, 교수, 돌로 맞아 죽음, 옥사, 아사, 매질 등으로 죽어 갔는데,
교회사가 달레(Dallet, Claude Charles)는 공주 감영에서 있었던 교수형에 대해
"옥의 벽에는 위에서부터 한 자 높이 되는 곳에 구멍이 뚫려 있다.
매듭으로 된 밧줄 고리를 죄수 목에 씌우고 밧줄 끝을 벽의 구멍으로 내려보낸다.
그리고 옥 안에서 신호를 하면 밖에서 사형 집행인이 밧줄을 힘껏 잡아당긴다.
희생자가 죽으면 시체를 밖으로 끌어내어
장례도 지내지 않고 밭에 내버려둔다."고 묘사하고 있다.
때로는 구멍이 있는 형구돌이 사용되었는데
구멍에 줄을 넣고 죄수의 목에 얽어맨 다음
형구돌의 반대편에서 줄을 잡아 당겨 죽였다.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공주에서도 병인박해 당시에 가장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고,
조정의 박해령이 멎은 뒤에도 지방에서는
아직 그 여파가 남아서 피 흘림이 계속되었다.
이렇게 공주는 순교 역사의 시초부터 기록상 마지막으로 순교자를 낸 1879년까지
100여년 동안 줄곧 피를 흘리며 신앙을 고백했던 참으로 거룩한 땅이다.
달레는 "공주 옥에서 순교한 이들의 이름과 숫자를 다 알 수 없었다."고 말한다.
공주 감영록이 세상에 공개되기 전까지는 우리 순교자들의 이름을 알 수 없었다.
공주에서의 순교자들은 당시 '사학의 괴수'로 알려져 있던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과
10여명의 회장들을 비롯해 연령, 성별, 신분에 관계없이 무수히 많다.
전 공주 교도소 부근 황새바위순교성지 가까운 곳에서
죄수들이 작업하던 중 우연히 발견하여 가져온 십자가이다.
서봉세 갈베르토 신부가 1984년 기증하였다.
황새바위에서 순교한 신자들이 가지고 있던 십자가로 추정한다.
십자가 하단에 해골이 부착되어 있다.
해골의 의미는 '메멘토 모리'로 죽음을 상징한다.
첫댓글 우와..정말 가보고 싶은 곳이에요..성지 순례란 눈물이 함께 할것같아요.
건축가 "김원"기억하겠습니다 ^^
정말 딱 아는 만큼 보이네요.
모르고 스쳐간 부분도 재조명 해주시고~♡
다녀온 곳이라 더욱 반갑게, 신나게 읽어내려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