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3주간 금요일
이사야 56,1-3ㄴ.6-8 요한 5,33-36
구약의 예언자들은 “야훼께서 말씀하셨다.”라고 말하며 주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는 이렇게 말한다.”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증거의 표현입니다.
이에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은 권위가 있구나.”라고 말하며 탄복합니다.
권위는 ‘존재’라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떤 존재든지 그 존재가 가지고 있는 권위는 다릅니다.
강아지한테서는 사람과 같은 능력이 나오지 않습니다.
또 사람한테서는 하느님과 같은 힘이 나오지 않습니다. 존재가 다르니까요.
존재가 다르니 권위도 다른 것이고 그 권위에서 나오는 증언의 내용과 힘도 다른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진리를 증언했지만 예수님은 증언된 진리를 직접 행하십니다.
그 일이 바로 예수님의 증언입니다. 그러니 그 증언은 가장 힘이 있고 실제적인 것이겠지요.
사제로 살다 보면 주위 사람들로부터 말만 잘한다는 비판을 듣기도 합니다.
말에 따르는 행동과 실천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당연하지요. 인간이니까….
하지만 그저 인간이니까 당연하다는 생각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이유가 없으니까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굳이 오시려 하는 것은 인간인 우리와 함께하시며 당신의 힘을 우리에게 주어서
우리가 그분의 은총에 힘입어 행동하고 실천하는 증인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분의 오심을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기다리고 받아들여 그분의 은총 속에 있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그분 은총에 힘입어 하느님께서 맡기신 일을 행동으로 옮겨야 하겠습니다.
전주교구, 이영춘 사도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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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3주간 금요일
이사야 56,1-3ㄴ.6-8 요한 5,33-36
제가 서품받을 때의 일들이 생각납니다.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세우고 남천성당 제대를 향해 걸어갈 때의 떨림과 성인호칭 기도를 드리며
주님 앞에 엎드려 “제 힘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함께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했던 일,
교구의 모든 신부님들께서 머리에 손은 얹어 안수해 주실 때
그 어떤 말보다도 “감사합니다”라는 말만을 입속에서 되뇌이던 생각이 납니다.
사제로서 산다는 것은 하느님을 전하는 일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이며,
그리스도께서 사제를 통해 일하시도록 도구로서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해 봅니다.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라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번 희망의 예언자 세례자 요한에 대해 말씀을 하십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이며, 구세주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선구자로서
세례자 요한은 이 세상에 빛을 내는 등불의 역할을 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등불을 보고 하느님 나라를 생각했고, 회개의 삶으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이제 그 회개의 삶으로의 변화의 시점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그 증언들은 무엇인가? 에 답을 구하는 것이 오늘 복음을 이해하는 열쇠를 가진다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가지신 증언의 내용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구원으로 이끄는 등불로서의 증언을 했던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증언으로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행하신 일들을 이야기 하십니다.
더불어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사실이 그 증언이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인간과 함께 동고동락하시며 행하셨던 일들이 무엇입니까?
지난 수요일 복음에서 우리가 들었던 말씀을 되새겨봅시다.
“눈 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예수님께 메시아이심을 물을 때 예수님께서 “보고 들은 대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보고 들은 것,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고 들은 것,
바로 예수님께서 사람을 살리시고, 죄를 용서하시며,
병자를 낫게 하시는 일들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증언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 그 누구도 댓가없이 할 수 없는 일,
그 누구도 자신을 그토록 낮추어 다른 이들에게 내어줄 수 없는 그 일을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바로 하느님이 예수님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하느님께서 다시금 당신의 백성을 당신 품안으로 불러 모으시기 위해 당신의 한없는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사랑의 일들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는 구세주, 메시아 이심을
증언한다고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교회는 오늘을 기점으로 전례적 변화를 가집니다.
12월 15일까지의 대림 시기 전반부에서는 임박한 종말론에 대한 언급을 지속적으로 하면서
회개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으며 오늘부터 성탄 전날 까지는 임박한 구세주의 탄생을 준비하는 내용이 그것입니다.
복음의 내용도, 성찬기도문도 이제는 구세주의 탄생이 우리에게 가까이 왔음을 전해줍니다.
우리에게 다가온 구세주의 탄생, 우리가 기다리는 구세주의 탄생은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오심”입니다.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를 불러주시고,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느껴보면서 우리의 행동과 우리의 말로서 구세주의 탄생을 증언할 수 있도록 합시다.
우리 자신들 한사람 한사람이 이 세상의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로서 살아가도록 합시다.
부산교구 강헌철 펠릭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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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3주간 금요일
이사야 56,1-3ㄴ.6-8 요한 5,33-36
오늘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당신이 진정한 메시아이심을 밝히십니다.
이를 위해 당신을 증언할 사람으로 세례자 요한을 들지요.
먼저 요한은 빛을 내는 등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등불이 어둠을 밝히는 역할을 하듯이 요한도 어둠을 밝혀 사람들을 회개하도록 이끌었지요.
또한, 등불은 뜨거운 열을 발산합니다. 요한도 뜨거운 열정으로 하늘 나라가 다가왔음을 선포하지 않았습니까?
아울러 등불은 자신을 태워 어둠을 밝히다가 마침내 꺼지고 맙니다. 요한 역시 그러했지요.
자신을 다 태운 등불처럼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을 증언하려고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 머물지 않으시고, 당신의 사명을 더 큰 증언으로 제시하십니다.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증언은 추상적인 메시지를 알리는 것이 아니라 경험한 것을, 그리하여 살아 있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듣고 이제 여러분에게 전하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하느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1요한 1,5).
그런데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오셨는데(요한 1,9 참조), 그 빛이 예수님이십니다.
빛이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행동보다 더 큰 증언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시려고 생명까지 바치셨습니다.
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