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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茶 공부 스크랩 이규보는 茶는 道이며 禪이다.
명전 추천 0 조회 153 08.11.25 07:27 댓글 7
게시글 본문내용

 

고려의 문인들은 무아(無我)의 경지에서 손수 차를 끓이었고,나아가 차를 마시어 禪을 수행하고 道에 이르렀다.

 

또 차는 삿됨이 없어서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修身하게 하며, 진리를 추구(修眞)하는 매개체이기도 했다.

 

다인 이규보는 차의 맛은 도의 맛이라고 노래 했다.

 

 밤이 깊어 물시계가 딩동하는 소리날때

 그대에게 삼어에 대해서 묻노니 차이를 말해주오

 오랜 세월 공부에 정진했으나 스스로 구하긴 어려웠는데

 그대를 잠시 뵙고 나니 모든 것이 공(空)이로세

 한자의 쌍조부는 실컷들었고

 장자의 이충설을 몹시 좋아하였네

 타오르는 불에 끓인 향차는 참으로 도의 맛이고

 흰 구름과 밝은 달은 곧 가품이라네

 생공의 법설은 말 기운이 날카롭고

 열자가 바람을 타고 다닌 것은 육신이 해탈됨일세

 (그대를) 우연히 만나 초탈하여 기쁨 얻으니

 당시의 방공에 부끄럽지 않구려

 

 정성들여 끓인 차를 마시니 도의 경개가 열렸음을 뜻한다.또한 이규보는 차 한 잔을 마시면 선에 몰입하게 된다고 했다.

그가 방연보(내시)로부터 귀한 차를 선물받고 쓴 시의 마지막 부분은 아래와 같다.

 

 어느 날 그윽한 암자 찾아가

 두어 권 진리서를 펼치고 깊은 뜻 나누리

 몸은 ?었으나 손수 샘물 길을 수 있으니

 한 사발의 차는 바로 참선의 시작이 되리

 

 이규보 자신이 직접 샘물을 길어서 차를 끓여 홀로 마시면 바로 참선하게 됨을 뜻한다.

禪이라 함은 정신을 가다듬고 고요히 마음을 가라앉혀

진리를 생각하며 자신을 잊어버리는 무아의 경지에 도달하여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수행의 과정인데,이규보는 차를 끓여 마심으로써 바로 이러한 경지에 들어선 것이다.

 

 이규보는 다시 50여편을 남겼다.

1168(의종 22)~1241(고종 28).
고려의 문인.
이규보 /이규보의 글씨, 〈명가필보〉에서
본관은 황려(黃驪). 자는 춘경(春卿), 초명은 인저(仁低),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지헌(止軒)·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 9세 때 이미 신동으로 알려졌으며 14세 때 성명재(誠明齋)의 하과(夏課)에서 시를 지어 기재(奇才)라 불렸다. 소년시절 술을 좋아하며 자유분방하게 지냈는데, 과거지문(科擧之文)을 하찮게 여기고 강좌칠현(姜左七賢)의 시회에 드나들었다. 이로 인해 16, 18, 20세 3번에 걸쳐 사마시(司馬試)에서 낙방했다. 23세 때 진사에 급제했으나 이런 생활을 계속함으로써 출세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개성 천마산에 들어가 백운거사를 자처하고 시를 지으며 장자(莊子)사상에 심취했다. 26세 때 개성에 돌아와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 당시 문란한 정치와 혼란한 사회를 보고 크게 각성하여 〈동명왕편 東明王篇〉·〈개원천보영사시 開元天寶詠史詩〉 등을 지었다. 그뒤 최충헌 정권에 시문으로 접근하여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고 32세부터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1207년 권보직한림(權補直翰林)으로 발탁되었고 천우위녹사참군사(千牛衛錄事參軍事)·우정언지제고(右正言知制誥)를 거쳐 1219년 우사간(右司諫)이 되었다. 이때 부하의 무고로 좌사간으로 좌천되었다가 지방관의 죄를 묵인했다 하여 면직되었으나 최이(崔怡)의 도움으로 계양도호부부사병마검할(桂陽都護府副使兵馬黔轄)에 부임했다. 1220년 예부낭중기거주지제고(禮部郎中起居注知制誥)에 올랐고 국자좨주한림시강학사(國子祭酒翰林侍講學士)를 거쳐 1230년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를 지냈다. 이때 팔관회 행사에 잘못을 저지른 사건으로 한때 위도(渭島)에 유배되었다. 1232년 판비서성사 보문각학사경성부우첨사지제고(判秘書省事寶文閣學士慶成府右詹事知制誥)로 복직되었고, 1237년 수태보문하시랑평장사(守太保門下侍郞平章事) 등을 지냈다.

당시 계관시인과도 같은 존재로 문학적 영예와 관료로서의 명예를 함께 누렸다. 권력에 아부한 지조 없는 문인이라는 비판이 있으나 대 몽골 항쟁에 강한 영도력이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정권에 협조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는 우리 민족에 대해 커다란 자부심을 갖고 외적의 침입에 대해 단호한 항거정신을 가졌다. 국란의 와중에 고통을 겪는 농민들의 삶에도 주목, 여러 편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그의 문학은 자유분방하고 웅장한 것이 특징인데, 당시 이인로 계열의 문인들이 형식미에 치중한 것에 반해 기골(氣骨)·의격(意格)을 강조하고 신기(新奇)와 창의(創意)를 높이 샀다. 자기 삶의 경험에 입각해서 현실을 인식하고 시대적·민족적인 문제의식과 만나야 바람직한 문학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백운소설 白雲小說〉·〈국선생전 麴先生傳〉 등의 저서와 다수의 시문을 남겼다.

 

이규보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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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중기의 이규보는 차는 禪이자 道라고 노래한다.

이런 귀한 차를 우리는 잡것으로 만들어 놓았는지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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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8.11.25 07:51

    첫댓글 타오르는 불에끓인 향차는 참으로 도의맛이고,......잛보았습니다, 그동안 명전님 여여하셨는지요 _()()()_

  • 작성자 08.11.25 09:01

    차 마시고 싶으면 차 마시고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밥먹고 글쓰고 싶으면 글쓰고 如如합니다.

  • 08.11.25 20:16

    ....한사발의 차는 바로 참선의 시작이 되리....명전님 고맙습니다 _()()()_

  • 08.11.26 06:15

    차 한 잔에도 이토록 깊은 의미를 두시는 선조들의 마음이 서릿발보다 더 정신차리게 합니다,. 고맙습니다_()()()_

  • 작성자 08.11.26 19:35

    고려시대 다인들은 주체의식이 매우 강해서 중국 다도구보다 고려 독자적으로 다도구를 개발하여 사용한 것 같아서 공부를 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고려인 들의 창의성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 08.12.02 12:47

    _()()()_

  • 08.12.06 17:20

    차는 도,선이라~~~이쯤되면 차맛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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