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판저수지로 간다
/기다림
해가 기울기 시작할 즘 나는 길을 나선다 하루를 철길처럼 달려온 해의 얼굴이 조금씩 지쳐갈 때 붉은 신호등도 무시한 채 지나온 길의 어떤 간판도 보지 못한 채 오직 동판저수지로 간다 지난봄 우연히 스쳤던 그 여인들의 뒷모습도 봄 쑥 캐던 그 여인들도 모두 동판저수지로 간다 초피나무 잎사귀의 알싸한 내음이 후각을 후벼 팔 때 늙어 빠진 아카시 나무의 어깻죽지가 숭숭 구멍이 뚫린 채 빈 하늘에 걸려 있는 날도 나는 동판저수지로 간다 논바닥의 까마귀 떼가 슬피 운다 바람도 한 가닥 연실을 당기는 소리를 낸다 이런 날 동판저수지를 찾는 것은 하얀 여백을 채울 수 있을까 저수지의 엷은 물가에 조심스레 발을 건 물풀의 허벅지처럼 어슬한 옷차림의 여인을 스칠 수 있기를 바람 때문일 수 도 있다 겨우내 죽지 않고 살아있다면 저 푸성귀 가슴에도 봄은 피겠지 우연히 극히 우연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동판저수지를 찾는 여인이 만약에 있다면 흠칫 스치는 감각으로 알아볼 수 있다면 해지는 논바닥에 구슬피 우는 비둘기처럼 속울음 울지 않겠지 동판저수지 둑길은 오늘도 물과 땅을 갈라놓는다 동판저수지 둑길은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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