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현궁은 고종의 아버지인 이하응(李昰應)의 저택이자 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1863년 12월 고종이 왕위에 오른 후부터 부근의 고개이름[운현(雲峴)]
또는 관현(觀峴)을 따 운현궁(雲峴宮)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1864년 조대비(趙大妃)의 명으로 그 영역이 대폭 확장되었고, 사랑채인 노안당(老安堂)과 안채인
노락당(老樂堂)이 그 영역 안에 새로 세워졌으며 고종의 가래식 이후 이로당(二老堂)이 건립되었다.
당시 운현궁은 담장 둘레가 수리(數里)나 되고 4개의 대문이 웅장하여 마치 궁궐처럼 엄숙하였다고 한다.
1977년 사적 제257호로 지정된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의 정치활동의 근거지로서 서원 철폐,경복궁 중건,
세제 개혁,법전 편찬 등 조선말기 개혁정치의 산실이다.
현재는 궁의 일부가 덕성여자대학원으로 사용되고 있고 개인에게 불하되어 그 규모가
축소되어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원군이 즐겨 사용하던 아재당은 헐려 나가고
사랑채인 노안당과 노락당, 이로당 등이 남아 있다.
이 궁은 조선말기의 대표적 건물이며 정원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노안당(老安堂)
운현궁의 사랑채로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 구성되어 있는 전형적인 우리나라 한식 기와집으로
처마끝에 각목을 길게 대어 차양(遮陽)을 단 수법은 그 시대적 특징이다.
노안당은 흥선대원군이 일상에 거처한 곳으로 고종 즉위 후 주요 개혁정책이 논의 되었던 역사적 장소이다.
'노안당'이란 현판은 공자가 '노자(老者)를 안지(安之)'하며 라고 한 논의 글에서 인용한 것으로 대원군이 노년을
현안하게 살게 되어 흡족하다는 뜻과 노인들을 편안하게 모셔야 된다는 치국(治國)의 이념을 갖고 있다.
↑두루마기를 입은 대원군의 아들
흥선대원군의 장남인 재면의 복식
↑학창의를 입은 흥선 대원군
노락당(老樂堂)
운현궁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건물로 정면 10칸,측면 3칸, 규모이다. 고종 3년(1866) 삼간택이 끝난 후
명성황후가 왕비 수업을 받던곳이자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가 행해진 곳이기도 하다.
노락당은 초익공 양식의 사대부가 건축미를 느낄 수 있으며, 아름다운 창살문양(불발기창호)이 그대로 남아 있다.
지붕의 용마루를 받치고 있는 종도리에는 용문양이 그려져 있어 건물의 권위와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치마저고리를 입은 부대부인
부대부인 여흥 민씨는 흥선대원군의 부인이며 고종의 생모이다.
이로당(二老堂)
노락당이 고종의 가례장소로 사용된 후 흥선대원군 일가에서 노락당을 안채로 더 이상 사용하기 어려워지게 되자
안채 용도로 새로 건립한 건물이다.
주로 여성들이 거주하며 살림하던 공간이기 때문에 남자들이 쉽게 드나들지 못하도록 'ㅁ'자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정면 7칸, 측면 7칸 규모이다.
운현궁의 꽃담
조각 하나,하나를 찍어서 붙인 기법의 꽃담
담장이 높지 않은것이 특색이다.
운현궁에서 보이는 지붕끝이 너무 이뻐서
덕성여대를 들러 건물 정면을 구경하면서
인사동의 고기와 생선이 없는 웰빙음식으로 점심 식사
뷔페식으로 1인당 10,000원
별로 먹은건 없는거 같은데 포만감은 대단했음
인사동에서 광화문으로 가는 골목에 스님들의 옷을 파는 가게 앞의 동자승 마네킹이 넘 귀여워서 한컷
전철 3호선 안국역 4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운현궁이 있음
운현궁 관람요금 700원
운현궁을 다녀온 친구가 어찌나 자랑을 하던지
궁금한건 못 참는 성질이라 자랑 하던 그친구한테 가이드를 부탁해서 다녀온 운현궁
고즈넉한 분위기가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게 너무 좋았음
친구들도 시간나면 한번 들러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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