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험, 그 무서운 시련과 피로 속에서 죽고싶다는 제자를 위하여
‘푸른 과실이 햇빛을 마시고 제 속의 쓰고 신 물을 달고 향기로운 즙으로 만들 듯이’ 저도 이 가을에는 하루하루의 아픈 경험들을 양지바른 생각의 지붕에 널어, 소중한 겨울 양식으로 갈무리하려고 합니다.
- 신영복 선생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들어볼래? 이건 너희들을 위해 쓴 글이거든.
며칠 전 너희들이 잘 알고 있는 친구로부터 ‘자살하고 싶다’는 말을 들었어.
학원 차량이 지원되지 않는 새벽까지 수업을 했기 때문에 내가 각자 집에까지
데려다주었는데, 끝에 남았던 한 친구가 그렇게 말한 거야.
가족들과 학교로부터 받는 성적에 대한 압박, 그러나 성적은 안간힘을 써도
오르지 않고 그 때문에 자꾸 따라붙는 초조, 지독한 스트레스와 피곤 등이
그 이유였어. 그는 ‘제가 자살할 용기는 없으니 너무 걱정은 마세요.’라고
말하며 자기 집 앞에서 내렸어.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차마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었어. 그 충격적인 말 앞에서 잠시 멍해하며 바쁘게 머릿 속을
뒤졌지만 딱히 해줄 말이 생각나지 않았지. 우리에게 주어진, 채 10분도 안 되는
시간에 정색을 하면서 뻔한 말로 충고하는 것은 아무 효과도 없을 것 같아서
그 어떤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지.
그 친구와 헤어지고 혼자 운전해 돌아오면서, 그리고 집에 도착해서
다음 날 새벽까지 뒤척거리며 수많은 생각을 했어. 아니, 생각들이 내 속으로
물밀 듯 밀려왔다고 할까......그리고는........
아, 그랬구나. 그럴 수도 있겠다. 극심한 피로와 초조, 스트레스.
어쩌면 그건 그 친구에게만 따라붙는 생각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의 많은 제자들이 지금 그 친구처럼 괴로이 자살이란 단어를 만지작거릴지도.....
어쩌면 이 시대의 수험생 대개가 앓고 있을 피로와 초조와 스트레스에 대한 공감이
그 밤 내게 굉장한 미안감이 되어 다가왔어. 딴에는 문학을 통해서 막연한 희망이라도
전해주려고 애를 써왔지만, 날마다 그토록 구체적인 무게를 감당해나가는 제자들에겐
별 위안도 의지도 되지 못했겠구나 하는 자책이 들었지.
이 글은 그러한 내 자책과 미안감을 주머니 속에 담아 며칠을 주물럭거린 끝에
쓴 글이야. 힘 주고 싶어서. 살게 해주고 싶어서. 지친 내 제자들을 위로하고 싶어서.
내가 가진 생에 대한 긍정을 얼마간이라도 전해줘서 앞으로 1년 남짓 남은 이 힘겨운
걸음을 마지막까지 굳세게 디뎌주길 바라는 마음으로.....쓰는 글이야.
먼저 큰 목소리로 선언부터 하고싶어! 생, 살아있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이
축복이자 선물이라는 것을!
인터넷에 떠도는 유명한 문장처럼 오늘 너희들이 살아가는 하루는 어제의 사형수가
그토록 원했던 단 하루야. 혹시 모래시계 봤니? 꽤 오래된 드라마지. 거기에서
이제껏 너무도 강하고 꿋꿋하게 살아온 태수(최민수)가 사형장으로 끌려갈 때의
장면, 기억하니? 끌려가던 태수가 창백한 얼굴로 겨울 하늘을 쳐다보는 장면말이야.
수많은 새떼들이 날아가던 하늘과 앙상한 겨울 나무. 눈동자에 생의 마지막
풍경을 조금이라도 더 담아보려 안간힘을 쓰던 그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사형수가 애타게 더 보고 싶어하던 풍경이야. 우리는 날마다 마주치는 게.
지금 창문 밖에 있지. 하늘과 사람들과 나무와 시끌벅적한 소리들. 풍경이
문제가 아니라 그는 살고 싶었던 거야. 죽음의 문턱에서 삶의 일회성, 그
소중함과 그 속에 담긴 풍경의 아름다움을 절절하게 깨달은 거야.......
삶이란 ‘있음’이야. 사형수는 지금 이 세상에 없고 우리는 있고, 그게 삶이지.
우리도 태어나기 전에, 아주 오랫동안 ‘없음’이었지. 그리고 언젠가는 반드시
죽게될 거야. 죽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거란 뜻이지.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값지고 소중한 거야.
우리가 어떻게 지금 여기에 서있을 수 있었을까에 관해 생각해봐.
생물 시간에 배운 적 있지? 수많은 ‘있음’의 가능성들이 난자를 향해서
달렸어. 수를 셀 수도 없는 그 가능성들은 다 ‘있음’이 되기를 원했고
그래서 속도 경쟁을 해야 했지. 존재하기 위해서. 있음이 되기 위해서.
결국 그 수백만의 가능성 중에서 단 하나만이 태어난 거구, 그게 바로
너희들이야. 나야. 우리들은 다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99.9%였고
0.1%도 안되는 그 가능성 속에서 ‘있음’이 되었어. 없음에서 없음으로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생명일 뻔했던 우리가. 우리의 ‘있음’은 그렇게
아슬아슬한 통로를 거쳐 가능했던 거야.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겪는
모든 것은 바로 그 ‘있음’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누리는 거야. 나를
제외하고 함몰되었던 그 수많은 생명의 가능성들이 겪어보길 원했던 거지.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존재하고 싶었으니까. 생명이 되려는 강렬한
본능으로.
그렇다면 고통과 슬픔도 선물이고 혜택인 거야. 지금 너희들을 꼬집어봐.
아프지? 그게 바로 ‘있음’의 증거야. 존재하지 않았다면 아프거나 슬플 일도
없었겠지. 시체도 마찬가지야. 더 이상 기쁘지도 아프지도 않아.
아프지 않다고 시체를 부러워할래? 아우슈비츠의 생체실험장에서 팔 다리가
잘리고 독가스를 마시면서도 사람들은 오직 살기를 원했어. 당연하지!
어떠한 고통과 슬픔도 ‘없음’에 비한다면 훨씬 가치로운 거야.
이번 여름에도 얼마나 무더웠어? 아마 머지 않아 이 가을이 갈 거구, 여름
더위에 버금가는 추위가 닥치겠지. 그 더움과 추움, 슬픔과 고통, 그게 바로
생명 현상인 거야. 바로 그게 수많은 생명의 가능성들이 단 한 번이라도 겪고
싶었던 ‘있음’의 증거인 거야. 우리는 언제 우리의 존재감을 느끼지? 우리의
감각이 생생하게 살아있을 때야. 식물 인간은 꼬집어도 아프지 않아. 그렇다고
식물인간의 무감각을 부러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우리의 실존(實存)은
우리의 감각이 생생하게 작동할수록 분명해지는 거야.
다시 말해, 슬플 때와 울 때, 기뻐 소리칠 때, 아플 때, 더울 때, 추울 때, 졸릴 때,
사랑에 빠져 심장을 가누기가 벅찰 때, 그 사랑을 잃어버려 고통과 고독에
몸부림칠 때, 바로 그때, 우리가 가장 실감나게 존재하는 거야.
그것들은 내가 ‘있음’으로 해서 지금 내게 주어진 감각들인 것이고 그러니
곧 축복인 거야.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았으면 좋겠니? 꼬집어도 아프지 않길
바라니? 지금 너희들 속에 차오르는 스트레스, 쫓김, 숨가픔, 그 모든 것들이 힘들어?
그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질 바라니? 정말 그래? 다들 시체가 되고
식물인간이길 바라는 거니? 아니잖아. 그건 정말 아니잖아.
아, 우리의 '있음‘, 생은 매우 귀한 거구 귀여운 거야. 우주의 광대한 허공에서
반짝이는 별이 희귀해서 가치로운 것처럼 우리의 생도 그런 거야. 없을 뻔한
그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 반짝이는 단 하나의 빛으로 이 땅에 태어나 지금 살고
있지.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면 다른 모든 것들은 사실 소꿉 장난과 같은 거야.
무한한 ‘없음’과 잠깐 동안의 ‘있음’, 언젠가 반드시 찾아올 ‘죽음’을 고려하면
성적표라는 게 뭐겠어? 소꿉장난보다 더 무의미한 거구, 별 거 아닌 거지.
근데 그런 것 때문에 죽는다구? 죽고싶다구? 그건 아닌 거야. 우리의 생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또 어떻게 끝날지를 생각하면 그 속에 있는 세부사항들이란
어떻게 되도 상관없는, 자질구레한 거야.
성적과 죽음은 사실 비교할 수조차 없는 거야. 이건 범주와 차원이 달라.
소꿉장난에서 밥 지을 모래가 부족하다고 죽을래? 모래가 없으면 대신 흙을
퍼담으면 되는 거구, 성적이란 바로 그런 차원에 불과한 거야. 부모님과 학교가,
매스컴과 사회가 너희들의 시각을 성적에 밀착시켜 마치 그것이 전부고 그게
좀 어그러지거나 뜻대로 안 되면 죽고싶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건 전혀 아닌 거야.
삶, 그리고 죽음에 관해 좀더 깊이 생각해봐. 너희들의 ‘있음’, 그 가치에 대해
생각하고 가끔은 그 보다도 훨씬 더 큰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도 느껴봐.
일주일에 한 번쯤은 옥상에 올라가 별을 바라 봐. 지금껏 그래본 적이 없어서
재미없어도 꾹 참고 딱 10분만 밤하늘의 별을 바라봐. 그 광대한 공간, 영원한
시간. 느낄 수 있을 때까지. 삶이, 삶 속에 닮긴 모든 것들이 하나의 소꿉장난에
불과하다는 걸, 별을 보면서 생각해봐. 그 별빛이 어떤 거리를 달려와 지금
저기에서 반짝거리고 있는지. 매우 가까운 것도 별빛은 수만광년을 달려온 거야.
우리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그 전부터 아득한 허공을 빛의 속도로
가로질러 오늘밤 비로소 지금 저기에 닿아 내게 보이는 거지. 그 별이 출발할
땐 지금 세상에 있는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어. 누구의 아버지들도, 할아버지도
존재하지 않았지. 마찬가지로 지금 이 순간 그 별에서 출발하는 별빛은 우리의
아들, 그 아들의 아들도 보지 못하지. 그런 거리와 그런 공간을 온 몸으로
느껴봐. 별하늘 아래서 10분만 그것을 온 몸에 고스란이 느끼며 서 있어봐.
그리고 비로소 생각하는 거야. 지금 우리가 살아가며 애면글면 바둥거리는 것들이
도대체 얼마큼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 우리는 소꿉장난을 하고 있었던 거야.
종이쪼가리로 성적표를 만들고 빨간벽돌을 빻아 고춧가루로 삼고, 옆집
여자 아이를 색시 삼아 여보라 부르며........
여름에 한번쯤은 바다도 갔겠지. 앞으로 바다에 가면 그저 그 속에 몸을
담그기만 할 게 아니라 끝없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 앞에 한참
쪼그리고 앉아서 수평선쪽을 바라봐. 30분 이상, 반드시 혼자서.
그냥 가만히 그렇게 앉아 있어봐. 그러면 자연스레 여러 생각들이 파도와
함께 밀려들 거야. 아주 먼 시간들이. 100년, 200년 전에도 이 파도는
바로 이런 모습으로 밀려가고 밀려왔겠지. 그리고 100년 후에도.
100년 전 이 파도 앞에 내가 없었듯이 100년 후의 파도 앞에도 나는 없겠지.
나뿐 아니라 여기에 있는 이 수많은 인파들이 100후면 다 사라지겠지.
아마 100년이나 200년쯤 전에도 어떤 소년이나 소녀, 혹은 청년이 이 바다에
나처럼 쪼그리고 앉아 나름대로 고민을 하기도 했을 거야. 물론 그는 지금
죽었을 테고. 아마 100년 후에도 누군가 나처럼 이렇게 쪼그리고 앉아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겠지......그때 나는 여기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파도는 변함없이 밀려가고 밀려 오고 그러한 시간성이 말을 걸어오곤 하지.
내 말이 사실인가 그래봐, 바다 앞에 홀로 30분 이상 앉아 있어봐.
밤하늘을 보든, 바다의 노도(怒濤)를 보든, 큰 나무와 마주서든, 대자연
앞에 홀로 서서 오래 생각해보게 되면 영~원한 시간과 광대한 공간성이
느껴져. 바로 그렇게 넓고 깊어진 시각으로 지금 내가 어디에 서서 무엇을
하며 사는지 쳐다보는 거야. 짧지만 아름답게 ‘있다’ 머지않어 여기에서
떠나게 될 나, 그 내가 오늘 하루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지를.
개미의 분주한 움직임처럼 이 공간 저 공간으로 끝없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어떤 것을 중요하다 중요하지 않다 갈라서 학교와 학원과
집 사이로 헉헉거리는 모습, 그게 우리야. 깨닫게 되지. 모든 것이
소꿉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을. 똑같은 시간에 모든 학생들이 지각하지 않으려
교문을 향해 뛰어가는 풍경도, 밤이 되어 바로 그 교문에서 같은 교복을 입고
다시 한꺼번에 물밀 듯 쏟아져 나오는 모습도, 성적, 학원, 논술, 수능, 이 모든
것들 때문에 한숨 쉬고 허우적거리고 쩔쩔매는 것들이 다 장난 같다는 것을.
영원한 시간성과 죽음 앞에선 어떤 것도 특별히 중요하지 않아.
모든 것은 사람들이 좁은 공간에 몰려 살면서 자기들끼리 인위적으로 중요한
것인냥 지어내고 강조해서 주입시킨 것들일 뿐이야.
그 어떤 사람도 일도 사물도 특별히 더 중요한 것이 아니야. 생 속에 담긴 그 무엇도
생, 존재(있음) 자체보다 중요한 게 아니야. 다 생의 포대에 담긴 소꿉장난의 재료일
뿐인 거지. ‘소꿉장난’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은 지금의 생활을 바라보는, 너희들의
시선과 생각이 너무 무거워보이기 때문이야. 뭐가 그리 심각해? 뭐가
그리 무섭게 너희들을 쫓는 거야? 무엇 때문에 세상 고뇌를 다 짊어진 것인냥
무겁게 여기고 힘들어하는 거야? 이제 좀......가벼워질 필요가 있어.
니체가 말한 것처럼 낙타는 사자가 되고 사자는 독수리가 되고 독수리는 춤추는
광대가 될 필요가 있어. 모든 것을 다 자기 등에 짊어지고 걷는 낙타에서 빨리
사자가 되어야 해. 더 가벼워져야 한다구. 우주와 대자연의 시간성을 빌어서
제발 지금의 생을 소꿉장난처럼 가볍게 놀이하듯 바라보란 말이야. 그게 생의
소꿉장난을 즐길 수 있는 비결이고, 그 즐김으로 인해 수험의 시간도 더 충실하게
걸을 수 있는 거야. ‘파스칼’이란 이름 들어봤지? 그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라고 말한 사람. 그는 우주의 광대함에 대해 매우 자주 깊이 생각해 본 철학자야.
그의 ‘팡세’라는 책은 바로 그 우주의 관찰로부터 얻은 깊은 성찰을 담고 있어.
그 속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어.
나는 내 일생의 짧은 기간이 그 앞과 뒤에 연결된 영원 속에 매몰되며, 내가 차지하고 있는 이 조그마한 공간이, 나를 알지도 못하고 나 역시 알지 못하는 무한한 공간 속에 침몰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나는 내가 여기(지구)에 있고 저기(우주)에 있지 않다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과 놀라움을 느낀다.
여기까지는 지금까지 내가 말하고 권한 것처럼 광대하고 영원한 우주의 넓이와
시간성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 그리고 삶의 유한성과 왜소함에 대해 고백한 거야.
그러나 중요한 건 그 다음이야. 자, 계속 들어봐.
그러나 우주의 영원한 시간성과 광대한 공간성이 인간을 죽인다고 해도 인간은 우주보다도 고귀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과 우주가 자기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지만 우주는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에겐 인식과 사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성은 그의 사고에 있다. 우리는 사고에 의해서 스스로를 우주보다 우위에 둘 수 있다.
좀 어렵니? 그러나 간단하게 정리하면 우주가 그 광활함과 영원함으로 인간을
기죽게 하고 한 점의 시간 속에 사라지게 하더라도, 한 인간은 그 우주보다
훨씬 고귀하고 위대하다는 거야. 왜냐하면 인간은 그 영원하고 광대한 시간에
관해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니까. 인식과 사색으로 그 모든 넓이와
영원을 수용할 수 있는 ‘있음’이므로. 아무리 영원하고 아무리 광대해도
살아있지 않은 우주가 ‘살아있고 생각할 수 있는’ 인간보다 하찮다는 것이지.
그렇기 때문에 우주에 대한 사색을 통해 모든 것들의 소꿉장난 같음과
사소함을 깊이 깨달으면 그 인식으로 스스로를, 살아있음을 기쁨과 놀람으로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거야. 새털처럼 가볍게 삶의 자질구레한 걱정과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그 자유로운 인식으로 다시 오늘 내가
걷고 있는 현실을 의미롭게 쳐다볼 수 있지! 파스칼은 그것에 대해 깨닫고
기쁨에 몸서리를 친 거야. 존재, 곧 우리가 여기에 살아있다는 것은 그토록
위대하고 놀라운 거야.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공부를 잘 해서도 아니고
오래 살아서도 아니고 첫째는 ‘살아있기’ 때문이고 다음으론 그 ‘살아있음’에
대한 인식과 사색, 그로 인한 놀람과 감탄을 표현하고 있는, 우주의 유일무이한
존재이기 때문인 거야. ‘있음’이란 이렇게 소중하고 아름다운 거야. ‘있음’의
이러한 깊은 의미에 생각이 닿으면 우리는 우주보다 값진 자로 승격되고
삶 속의 모든 것을 다 의미있는 것, 황홀한 것으로 수용할 수 있어.
이제 좀 알겠니? 지금 너희들의 살아있음이 얼마나 벅찬 특권이고 행운이고
선물인가를. 존재하는 것이야말로 은총이고 혜택인 거야. ’존재‘가 혜택이고
은총임을 깨달으면 그 존재의 포대에 담긴 모든 세부사항들이 다 긍정되지.
우리의 살아있음은 겪음의 기회가 주어진 거야.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에 겪는 모든 것도 다 혜택이고 선물이야. 비록 그것이 고통이고 땀이고
자존심 상함이고 우리를 휘청거리게 할 만큼 아픈 것일지라도 애초에 그것을
겪고 느끼지조차 못할 ’없음‘에 비해 훨씬 좋은 거지. 다 소중해. 모든 경험이
다. 하나도 빠짐없이 다. 그것을 깨달으면 가벼워질 수 있고 그 가벼움으로
모든 것을 훨씬 더 깊이 긍정할 수가 있어. 대학에 들어가는 것도 좋겠지만
그 대학에 떨어지는 경험도 마찬가지로 가치로운 거야. 좌절감이 찾아오겠지.
그 좌절감 역시 살아있음의 절절한 신호야. 그것을 인식하기만 하면 열심히
공부하는 것과 재밌게 노는 것이 똑같이 중요해지지. 잘 뛰는 것 못지 않게
넘어져서 땅을 딛고 일어서는 것도 값진 거지. 그 모든 것은 살아있음으로
내 생에 담을 수 있는 나의 무늬인 거야.
나는 이 살아있음이 너무나 행복해. 지금 너희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순간이 문득 얼마나 의미롭게 다가오는지. 너희들이 내가 읽어줄 이 글을
한 마디 한 마디 눈 반짝이며 들어줄 것을 생각하고, 그래서 얼마간 힘을 낼
이유로 삼아줄 것을 생각하며 너무도 벅찬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어.
어쩌면 내 말을 잘 안 들을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해도 나는 그 수업을 나와서
생각할 거야. 그것도 괜찮았다고. 행복과 마찬가지로 어떤 헤매임과 실패도
내 있음의 자루에 담긴 경험이고 그로 인해 나는 더 고민하고 모색할 테구.....다음엔
그와 비슷한 상황에서 더 낫게 마주칠 수 있겠지. 모든 것이 이런 거야.
생이 선물이고 혜택이라는 분명한 인식과 철학을 얻으면 더 강해지고
멋있어지는 거야. 그 인식, 그것을 나는 연금술이라고 부르고 싶어. 우리 다
연금술사가 되자.
연금술사가 쇠와 구리와 잡스런 금속들을 넣어 반짝이는 황금을 추출해내듯이
우리도 우리에게 닥치는 기쁨과 행복뿐 아니라 슬픔, 고통, 스트레스, 졸림,
더위와 추위, 억압....그런 것까지 다 수용해서 성숙한 인식으로 여과해 훨씬
더 고귀한 ‘자기 긍정’ ‘낙관’ ‘희망과 패기’를 만들어내는 거야.
반짝이는 황금보다 더 소중한 것들을! 어때? 연금술사!
한 번 도전해볼만하지 않니? 내가 내 자아를 만들고 이끄는 긍정적 주체가
된다는 것, 그래서 점차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만큼
흥미진진한 일은 없어. 그 최고의 목표 지점에 ‘연금술사’라는 단어를
놓고 싶어. 상징적인 의미로 말이야. 내게 주어지는 어떠한 부정적
재료를 가지고도 반짝이는 긍정, 곧, 희망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아, 삶은
얼마나 패기있고 아름다울까? ............................
게다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재료라는 것이
그렇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야. 극단의 부정까지 각오하면 오히려 연금술을
시작하기도 전에 ‘긍정적인 것’들이 더 많이 다가오는 법이지.
그런데 그깟 성적 때문에 죽는다면 그 얼마나 어리석고 아까운 거야?
지금 겪는 스트레스와 피로 때문에 앞으로 오래오래 살아가면서 마주칠
수많은 기쁨, 참 사랑, 핏줄이 터질 것 같은 순간들을 다 잃어버리다니,
말도 안 돼. 아직 너희들은 몰라. 너희들의 미래에 얼마나 값지고 황홀한
것들이 숨겨져 있는지. 물론 슬픔도 겪겠지만 그에 못지 않은 행복의 보물들이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어. 나 역시 슬픔을 많이 겪었지만 요즘 너희들 앞에
서서 늘 환하게 웃잖아. 내가 행복해보이지 않니? 객관적인 조건으로
따지자면야 내가 남들보더 그렇게도 행복할 이유가 뭐겠니? 애 둘 가진 홀애비잖가.
너희들과 늦은 밤에 수업하고 집에 가 봤자 누가 기다려주는 것도 아니고.
쓸쓸해보이는 삶일 수 있지.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내가 행복하다는 거야.
나 스스로 걷잡을 수 없는 행복을 느낀다는데 누가 뭐라겠어? 행복하다는데!
어제도 행복하고 너희들 앞에서 서서도 행복하고 또 앞으로도 오래오래
행복할 거야. 살아있는 날들 내내 행복할 거야. 살아있잖아! 수많은 느낌을
날것 그대로 고스란이 느끼며! 기쁨과 여유, 그리고 슬픔과 고독도 쓰며!
나는 연금술사야. 많은 불행과 고통이 내게 다가와 기쁨과 희망으로 승화돼.
큰 슬픔과 고통들일수록 내가 연금술을 배울 수 있도록 잘 훈련시켜주었어.
또 하나의 비밀. 내 생에서 가장 크고 깊은 행복은 우리 윤슬이 윤서의
아빠가 되는 순간부터 시작되었어. 너희들 중 아무도 아빠가 되어본 적이
없잖아. 아, 그게 얼마나 벅찬 일인지, 그걸 설명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내
행복을 얼마간 전염시킬 수 있다면 아무도 죽고 싶단 말은 안 할 텐데.
내가 아빠니까 이렇게 말하지만 엄마가 되는 건 더 하지 않을까?
첫딸 윤슬이를 처음 만나는 순간, 나는 이제껏 내가 숱하게 넘어지고 아프고
힘겹게 견뎌온 세월이 바로 이 친구 ‘윤슬’이를 만나기 위한 것이었구나,
하고 확신 속에서 소리쳤어! 지금도 그것을 느껴. 절대 권태기가 없는
사랑, 이게 자식사랑이더라구. 내가 국어선생이 된 것도 매력적이고 황홀한
것이라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내 생애 가장 큰 기적과 신비는 내가 아빠가
되었다는 사실이었어. 나르시즘과 포즈에 가득 찬 내가 이토록 순수하게
온전하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줄이야!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말의 온전한 의미를 깨닫게 하는 이 사랑, 아, 그것을 아빠가
되면서 느꼈어.
주말 저녁이면 윤슬이 윤서와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면서 아주 천천히 목욕을
시켜. 머리에 물을 뿌리고 샴프를 칠해서 문지르고 다시 잘 행귄 뒤 이번엔
린스를 바르고 잘 행구고...그렇게 머리를 감겨서는 이번엔 수건으로 윤슬이의
긴 머리칼을 말려준 뒤, 물이 흐르지 않을쯤 해서 옷을 입혀 방 안으로 데리고
와서 드라이를 하면서 빗으로 머리를 빗겨줘. 윤서랑은 넓은 물통에 함께
들어가서 물 튀기는 장난을 자주 하지. 나는 일부러 이렇게 목욕시키고 머리
감기고 말리는 일을 최대한 천천히 하려고 해. 도란도란 소곤소곤 지금껏
못했던 대화들도 많이 하고. 시간이 천천이 갔으면 좋으리 만큼 행복한 시간,
그 느낌으로 생각해. 아내가 떠난 슬픔 뒤에 이렇게 엄마가 된 아빠로서
새로이 겪게 된 행복에 대해서.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아빠들이 잘 하지
않는 일을 하면서 그것을 그 만큼의 ‘누림’이라고 생각해. 요는 내가 매우
행복하게 강하게 잘 살고 있다는 거야.
내가 누리는 행복 때문에 더 마음이 아팠다. 그 친구가 성적이 주는 압박 때문에
죽고 싶다 말했을 때. 바로 내 속에 있는 이런 것들을 다 전해주고 싶었는데,
우글거리며 내 속에 몰려드는 생각관 달리 시간이 짧았던 거야. 지금 별것도 아닌
소꿉장난적인 몇가지 걸림돌 때문에 앞으로 10년 후, 20년 후 너희들 생애 속에
찾아올 그 참행복, 참사랑의 순간들을 놓쳐버리는 안타까움을 잘 전해주고 싶었거든.
TV 프로그램 중 ‘야심만만’이라고 있지? 어저께 밤 늦게 퇴근해서 재방송해주는
걸 우연히 봤는데 ‘효도’에 관해서 하더라구. 그 프로 끝에 출연자들이 각자
부모님께 한 마디씩 감사의 말을 전하는데 그 중 ‘김제동’의 말이 가슴에 푹
꼽히더라구. 내 마음이기도 하구 말이야. 뭐라 그랬는지 아니? 본 사람 있어?
“태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내 제자들인 너희가 진심으로 그 마음, 그 인식을 갖기를 바래. 그게
바로 연금술사의 인식이야. 명심해. ‘있음’을 깊게 안고 긍정해버리면 모든
것들을 다 황금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첫댓글 허걱, 장문의 글내용 읽다가 중간에.......나머지는 다음에 기회되면 다시 읽어 볼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