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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바이처
부창부수(夫唱婦隨). 둘 다 의과대학을 나왔지만 전공과 다른 분야에서 제2의 인생을 펼치고 있어서다. 안철수는 서울의대에서 생리학을 공부하다 우연히 컴퓨터 바이러스를 발견하고 세계 최초로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한 인물이다. 이후 20년간 벤처사업가로, 공학 석사와 경영학 석사로 변신을 거듭하다 최근 서울대에 둥지를 틀었다. 책벌레에 말수 적고, 패션에 무심한 성향도 서로 같다. 김 교수는 "밋밋하기 짝이 없는 부부"라며 웃었다.
―나이 마흔에 의사를 관두고 유학을 갔다. 그것도 법학으로.
"결단 과정은 길었다. 막연히 40대엔 새로운 일 해야지, 하는 소망이 있었다. 레지던트 하면서 논문도 열심히 써서 81학번인데도 동료들 중 제일 먼저 부교수가 됐지만 이후로는 일상이 비슷해지더라. 새로운 공부를 시작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슈바이처가 오르간 연주자, 신학자로 원했던 공부 다한 뒤 남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결심한 나이가 마흔이었다는 전기가 생각났다."
―그걸 실천에 옮기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중1이었던 딸은 굉장히 싫어했다. 왜 자기가 엄마 때문에 친구들 다 버리고 학교를 떠나야 하냐며. 남편은 아이디어 자체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필요하다. 자신을 넓혀가는 일이다'고 하더라. 그래도 당장 자기가 불편해지는 일 많으니까 열광하진 않았다.(웃음)"
―경제적으로 뒷받침되니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남편이 회사를 경영할 때라 풍요롭진 않았다. 돈이 많다고 공부를 계속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왜 법학이었나.
"의사의 삶은 대중을 상대하는 것이고 여러 가지 법적인 문제, 윤리적인 딜레마가 뒤따른다. 그런데 의대 다닐 때 그런 공부를 전혀 한 적이 없다. 국사 하나 빼고는 내내 의학 과목만 들었다. 의료 분쟁, 법적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으니 사회에 나가 어떤 문제에 닥쳐도 그걸 판단할 기본적 도구가 없다."
―구체적인 계기가 있다고 들었다.
"그 무렵 의약분업이 있었다. 그때 내가 성균관의대 삼성병원 교수였는데 분업에 반대하는 서명을 하라고 하더라. 운동장 같은 데 나가 앉아 있기도 했다. 사실 난 의약분업에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병리의사이니 정확한 진단만 내리지 약을 처방하는 건 아니니까. 뭣보다 판단이 잘 서질 않았다. 의사들이 환자를 버리고 이렇게 단체행동을 해도 되는 건가 싶고. 자연스럽게 사회적으로 의사라는 직업에 대해, 윤리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딸을 데리고 갔다.
"아이 데려다 주고 대학에 가면 첫 강의 시간에 겨우 도착했다. 아이 픽업하러 가야 하니까 또 수업 끝나자마자 학교를 나서야 하고. 도서관에서 밤샘하며 공부해도 모자란데 말이지. 그래서 아이를 데리고 동네 도서관에 다녔다. 살다시피 했다."
―외국어로 새로운 분야를 공부한다는 것이 꽤나 스트레스였을 것 같다.
"1학년을 무사히 보낼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루하루 최대한 공부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래야 공포감이 사라졌다. 영어로 말하기가 힘들어서 1학년 땐 늘 가슴을 졸였다. 교수가 언제 발표를 시킬지 모르니. 그래서 2학년 때부터는 작전을 바꿔 먼저 손을 들어 발표했다. 한번은 내 발표에 교수가 이의를 제기하더라. 수업 후 교수를 붙들고 늘어졌다. 내 견해를 어떻게든 관철시켜보려고. 그랬더니 교수가 '걱정마, A학점이니까' 하더라.(웃음)"
―미국에서도 공부벌레란 별명을 얻었겠다.
"그렇지 않다. 미국 로스쿨 학생들 정말 열심히 공부한다. 어마어마한 등록금을 대출받아서 공부해야 하니 마음가짐이 절박하다. 로스쿨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야 좋은 로펌에 취업하고, 그 월급으로 빚을 갚을 수 있으니까. "
◆공부의 神
―혹자는 당신을 두고 '공부의 신(神)'이라고 한다. 공부 잘하는 비법 좀 알려달라.
"딸한테 '공부는 숨을 쉬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숨은 한꺼번에 쉬거나 멈추는 게 아닌 것처럼 공부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공부의 길로 들어섰다면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길고 오래 공부하는 것에 습관을 들였던 것 같다. 아파도 해야 하는 게 공부였다."
―공부가 제일 쉽다거나 즐거웠던 건가.
"그런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공부라는 게 마지막에 기쁨을 주지, 그 과정은 얼마나 지루한가. 나 또한 책을 들면 바로 몰입한다거나 공부를 즐거워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었나.
"아버지가 자영업을 하셨다. 기억나는 건,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사오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다. 두 살 위 오빠랑 백과사전 넘기면서 봤던 사진, 그림들이 지금도 기억난다. 무슨 사전이 이렇게 멋있나 싶더라.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도 즐겨 읽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상록수, 백치…. 도스토옙스키를 특히 좋아했다."
―어머니는 어떤 분이었나.
"애들 키우는 것은 화초 키우는 것과 같아서 계속 관찰해야 한다는 게 엄마의 지론이었다. 4형제가 말 안 듣고 공부 안 하는 경우 많았지만 참고 기다려주셨다."
―예체능 과목, 혹은 놀고 즐기는 일엔 관심이 없으신가.
"동경만 했다. 특히 등반하고 마라톤 하는 사람들. 히말라야에 올라가고 싶은데 공기가 희박하다고 하니 나는 도저히 가볼 수 없는 세계다. 이사를 많이 다녀서 그런가 여행하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한다. 결혼하고 나서 2~3년 만에 한 번씩 이사를 다녔다."
―왜 의사가 됐나.
"머리가 굉장히 좋았다면 천문학을 했을텐데 내겐 수학적 천재성이 없었다. 몸만 건강했으면 우주비행사를 지망했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처음 달나라에 갔을 때라 우주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의사는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엄마도, 이모도 직업을 가진 적이 없어 나는 반드시 전문직 여성이 되고 싶었다."
―병리학을 전공했다.
"환자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내리는 게 병리의사의 역할이다. 진단이 틀리면 그걸 바탕으로 한 치료는 다 엉망이 된다. 내 진단을 토대로 임상의사가 치료를 하니 그들이 병리의사의 클라이언트인 셈이다. 진단이 한 번도 틀리지 않는 것만으로는 존경받지 못한다. 이를테면 내가 당뇨라고 진단했는데, 임상의사는 환자 혈당을 재보니 당뇨가 아니었다고 반발한다. 그런데 1주일 뒤 환자의 혈당을 다시 재보니 당뇨 초기 증세가 나타난다. 그래야 임상의사가 병리의사를 존경하게 된다. 판단 내리기 애매했던 슬라이드는 집에 와서도 생각날 만큼 사람을 초조하게 한다. 그만큼 책임이 큰일이었지만 즐겁고 보람 있었다."
―의학계는 남성적 문화가 강하고, 위계질서도 강하다. 여성으로 어떻게 견뎌냈나.
"우리 때 서울의대 여학생 비율이 10%였다. 여자 화장실이 한 건물에 한 개밖에 없었다. 결혼, 출산으로 여학생들이 전문의가 되지 못하고 중도탈락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출산휴가가 법적으로 60일이었는데 여성 전공의들은 4주, 그러니까 28일 만에 나와 근무했다. 남자 전공의들, 교수들에게 민폐를 끼치면 안 되니까. 남자와 비슷한 실력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잘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각오로 일했다. 여자라서 안된다는 말 듣기 싫더라."
◆밋밋한 철수씨
―서울대 재학시절 가톨릭 학생회 진료봉사서클에서 안철수를 만났다.
"진료 서클에서 1년 선배인 남편이 고혈압에 대해 특강을 하더라.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작전이었던 것 같은데, 내 공부를 많이 도와줬다. 도움될 만한 책을 추천해주고, 다 읽었다고 하면 질문을 막 던졌다. 전에는 기숙사에서 공부하던 사람이 언제부턴가 도서관,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더라. 정말 옛날 얘기다."
―결혼 직후 안철수가 V3 백신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부산서 (시)부모님이 올라오셨는데 백신 프로그램 짜야 한다고 해서 모두 식당에도 못 가고 하염없이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군의관으로 군대 갈 때 송별회 같은 것도 못했다. 군대 가는 날 아침까지 백신 프로그램 업데이트하더니 허둥지둥 지하철 타고 서울역으로 달려가더라. 기차 태워 보내고 혼자 돌아오는데 무지 섭섭했다. 한번 몰두하기 시작하면 다른 생각을 못하는 사람이다. 멀티태스킹이 되지 않으니 내가 손해보는 일이 많았다.(웃음) 그래도 괜찮다."
―뭐가 괜찮은가. 당장 배우자의 몸이 힘들어지는데.
"내가 덜 바쁘니까. 나에게도 큰 희생은 아니었다.(웃음) 가족이란 서로의 성취를 위해 한발씩 양보하고 타협해야 한다."
―남편이 의사를 그만둘 때 크게 아쉬워했다고 들었다.
"남편이 남들 다 가는 임상의사의 길을 버리고 생리학을 선택할 때 '이 사람은 노벨상도 받을 수 있겠구나' 하는 확신이 있었다. 그 분야에서도 남편은 V3 같은 획기적인 업적을 이룰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컴퓨터 관련 일을 한다니까 안타깝더라. 크게 반대는 못했다. 그렇게 결심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안철수연구소'의 시작은 매우 작았다. 아내의 의사 월급으로 재정을 메웠다던데.
"신혼집에 사무실을 차렸다. 남편과 직원 1명이 4인용 식탁에서 시작한 셈이다. 내 월급 타서 직원 월급 줬다.(웃음) 직원이 7명 되니까 사무실 임대해 나가더라. 고생스러웠다는 기억은 없다. 그 정도야 다 하고 사는 거 아닐까."
―안철수연구소가 성장일로에 있던 90년대 초반 남편이 급성간염으로 쓰러졌다.
두 번째는 3개월간 입원했을 만큼 심각한 상태였다더라.
"남편이 미국에서 유학하며 서울의 안철수연구소도 꾸려가야 했던 상황이라 미국 서울을 한 달에 한 번씩 오갔다. 아플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쓰러졌을 땐 상태가 너무 나빠져서 신약 임상시험에 가담해야 하나, 하는 논의까지 나왔다. 명색이 의사지만 나도 겁나더라. 다행히 바닥을 치고 조금씩 좋아졌다. 생로병사를 겪다 보면 사람이 겸손해지는 것 같다."
◆나는 '파쇼엄마'
―안철수는 국무총리 후보에 오르내릴 만큼 인지도가 높고,
젊은이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한다. 질투심을 느껴본 적 없나.
"처음부터 남편이 나보다 우수했기 때문에 그런 거 없다.(웃음)"
―정치권의 안철수 영입 경쟁이 치열하다. 남편의 정치 진출을 어떻게 생각하나.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내가 아는 남편의 성향이 그렇고, 지금 대학원장으로 해결하고 키워가야 할 업무만으로도 너무나 바쁜 사람이다."
―정치권의 러브콜을 두고 서로 의논 안 하시나?
"나도 신문 보고 아는 경우가 많다. 워낙 바빠서 만나기도 힘들다. 남편이 어디 가 있는지 모르면 인터넷을 검색한다.(웃음)"
―딸이 미국 아이비 리그에 속한 대학에 다닌다고 들었다.
"화학과 수학 석사 과정에 있다. 남편과 국화빵으로 생겼고 성격도 비슷하다. 전자제품 만지는 거 좋아하고 게임도 둘이 같이 하고. 부자간인지, 부녀간인지 모를 만큼 성격도 남자 같다."
―딸과 의견충돌이 있을 땐 어떻게 하나.
"대부분 내 고집을 관철시켰던 것 같다. 파쇼엄마!(웃음) 딸을 너무 엄격하게 대한 것 같아 미안하다. 갈수록 딸이 중요한 존재가 되어간다. 딸과 말이 통해야 하니, 수학 못하는 내가 요즘 수학책을 들여다보고 있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전쟁하듯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가는 여성들이 많다.
"밤새 공부하다가 12층짜리 서울대 병원 건물을 올려다보면서 나도 저기 가서 의사 가운 입고 일할 수 있을까, 했던 시절이 있었다. 쉽고 즐거웠던 기억보다 춥고 배고팠던 기억이 더 오래 남는다. 아이를 낳으면 분명 고생스럽고 힘들지만 굉장히 값진 경험,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인가.
"법학 공부하고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융합을 강조하는 시대이긴 하지만 실제로 나 같은 사람을 한국 사회가 받아들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 학제간 융합이 필요하다면서도 법대에서는 법학 연구에 올인할 사람을 찾고, 의대에서는 의학에 올인할 사람을 찾으니까. 카이스트로 가기까지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쓸모없는 사람 될까 봐…. 남편이 위로가 많이 됐다. 남들이 안 하던 일, 남들이 알아주지 않은 일 했지만 그걸 완성하는 모습을 봤기 때문에 자신감을 얻었다."
―끝까지 남편 자랑이시다. 의학, 법학을 둘 다 공부한 당신은 '사랑'을 어떻게 정의할지 궁금하다.
"아, 어렵다. 글쎄, 파트너십 아닐까. 미국 판례에 파트너십에 대한 정의가 있다. 파트너와 파트너의 관계는 최상의 믿음, 신뢰의 관계다. 심지어 파트너십이 해제된 다음에도 지속되는 것이 파트너 관계다. 파트너는 두 개 이상의 개체이지만 실제로는 한몸으로 여겨져서, 한 명이 빚을 지면 공동으로 책임지고, 수익을 내면 공동으로 누린다. 부부도 그와 같지 않을까. "
주간조선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입력 : 2011.08.06 15:41 / 수정 : 2011.08.07 10:59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국민일보빌딩 6층의 안철수연구소는 좀 어수선했다. 잠시 후 만난 박근우 커뮤니케이션팀장은 “10월에 판교로 이사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사무실 벽 한쪽에는 판교 신사옥 건물 이미지가 붙어 있었다. 번듯한 사옥이었고, 판교의 요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안철수연구소는 안철수 안철수연구소 이사회 의장이 1995년에 설립한 국내 최대의 소프트웨어 기업이다.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V3로 유명하다. 안 교수는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다. 박 팀장은 “안철수 박사님에 대한 강연 요청이 1년에 3000건 정도 들어온다”고 말했다. 안 교수의 인기가 높은 줄은 짐작했으나, 그렇게 많은 사람이 그를 원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안 교수는 검은색 양복을 단정하게 입고 방에 들어왔다. 동안(童顔)이었고, 피부는 우윳빛에 깨끗했다. 1962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쉰인데, 그리 보이지 않았다. 나이가 무색할 만큼 머리칼도 검었다. 그는 부끄럼을 타는 성격으로 보였다. 하지만 안 교수의 부드러운 말투 속에는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한 분노가 묻어났다. 안 교수는 “공정사회와 상생은 대통령이 꺼낸 화두인데 화두만 꺼내고 후속조치가 없으면 분노가 더 커진다”고 했고, “우리 사회 20·30대에겐 상생이 안 되는 데 대한 분노의 에너지가 많이 쌓여 있다”고 했다. 그는 “사회구조를 바꾸는 최선책은 결정권자들에게 달려 있는데 그게 안 되면 대중이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내년에 선거 참여율이 굉장히 높아질 것 같다. 20·30대 투표율이 50%까지 가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때로 격정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등 안 교수의 말에선 굉장히 강한 분노가 느껴졌다. 기자가 ‘분노가 느껴진다’고 했더니, 안 교수는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원래 말을 그렇게 한다’는 식으로 표현했다.
안 교수는 또 “기득권이 과보호되고, 권력층이 부패하고, 상하 격차가 심하게 벌어지고, 계층 간 이동가능성이 완전히 닫히는 그 순간 나라가 망한다. 지금도 예외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안 교수는 정부의 역할에 대해 “시장이 불공정한데 정부가 감시자 역할을 못하고 있다. 불공정거래가 일어나고 있는데도 뒷짐지고 있다. 지금은 무법천지다. 약탈 행위가 일어나는 무법천지를 정부가 방조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 연예인 수준으로 지명도가 올라갔다. 얼굴이 알려져서 영화도 맘 놓고 보러 가지 못한다고 얘기했던데.
“사는 게 참 불편하다. 적성에 안 맞는다. (안철수연구소) 사장 끝나고 교수로 돌아갔을 때 예전같이 언론에 날 일도 없어 맘 편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그때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불편하다.”
- 직함만 20개를 갖고 있다. 이 시대가 안 교수를 필요로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지금까지 잘해왔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앞으로 더 많은 일을 할 거라는 기대 때문인 것 같다. 주식으로 따지면 주가가 앞으로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선(先)반영된 거라고 할까. 그런데 지금보다 더 뭘 어떻게 하라고 하는지.(웃음)”
- 의사, 소프트웨어회사 경영자를 거쳐 지금은 교수다. 경력 중 어떤 부분이 우리 사회에서 안 교수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고 보나.
“성과물보다 과정에 대한 평가라고 본다. 우선 개인적으로 한번도 도중에 그만둔 적이 없다. 의사도 박사 학위를 받고 의대 교수까지 했고, 컴퓨터 프로그래머로서도 굉장히 난이도가 높은 백신을 세계 최초로 개발한 몇 사람 중 하나이고, 경영자로서도 안철수연구소가 우리나라 소프트웨어회사로는 가장 크다. 교수는 진행형이다. 과정 중에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살았다. 다른 선택을 할 때도 단순한 욕심이나 돈을 위해서가 아니었다는 진심이 전달되었다고 본다.”
- 주간조선이 지난 5월 16~22일자에서 안 교수를 커버 인물로 했다. 기사 제목이 ‘왜 안철수인가’였다.
왜 이 시대는 안철수를 필요로 하고, 젊은이들은 왜 안철수에 열광하는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특히 젊은이들이 가장 본받고 싶은 멘토로 꼽는데, 이유가 뭘까.
“교수란 직업의 영향도 있다. 교수가 되어 20대 초반 젊은이들과 얘기를 많이 하다 보니 이들에 대해 많이 알게 됐다. 다른 교수들과는 달리 정년보장을 받고 카이스트에 갔다. 늦은 나이에 연구한다고 하지 말고, 지금까지 해왔던 사회공헌 활동을 계속 열심히 해달라, 카이스트의 이름을 알려달라는 주문이었다. 이에 맞춰 저 역시 사회공헌 활동을 많이 했다. 학생들에 대한 관심이 많아 교수가 됐고, 이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다 보니 가르치는 학생 말고도 많은 학생이 면담 신청을 해왔다. 거의 절반쯤은 내게 찾아와서 말하다가 운다. 얼마나 믿고 이야기할 사람이 없으면 그렇겠나 싶었다. 저도 20대에 했던 고민들이다.
그러다가 기회가 될 때마다 학생들을 상대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제가 강연 요청을 1년에 3000건 정도 받는다. 매일 열 건씩 받는 셈이다. 1년에 80회 정도 외부 강연을 한다. 맡은 일도 있고 해서 한계가 그 정도다. 강연장에는 청중 수가 제일 적을 때가 1500명 정도, 많으면 3000명이 넘어간다.”
- 최근 인상적이었던 강연을 꼽는다면
“대전 충남대 강연에 3000명이 왔다. 학생들이 와서 앉다가 자리가 차니 계단에 앉게 되고, 계단도 차니 그 다음에는 강연장 강단 위로 올라와서 앉았다. 제가 사진이 있다.”(안 교수는 휴대폰(아이폰 3G 모델)을 꺼내 저장된 사진을 보여줬다. 안 교수와, 같이 대담하는 ‘시골의사’ 박경철씨가 의자에 앉아 있고, 강단 위의 바닥에 학생들이 빼곡히 앉아 있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 놀랍다. 이렇게 많이 학생들이 몰리다니.
“광고를 하지 않고 인터넷으로 미리 접수를 받는다. 광고를 안 해도 이렇게 많이 온다는 건 무엇을 뜻하는가? 청년들이 얼마나 많은 열망을 가지고 있고, 또 이들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이집트에 민주화운동이 진행된 이유가 결국은 청년실업 때문이라고 하더라. 어떤 사회든지 청년실업률이 25%가 넘어가면 체제가 전복된단다. 우리나라가 명목상으로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청년실업률이 낮은 편에 속한다. 하지만 청년고용률로 넘어가면 문제가 다르다. 지난번에 한 통계를 보니 우리나라 청년고용률이 OECD 국가 중에서 꼴지였다. 심각하다. 이게 더 심해지면 체제 전환도 된다. 왜 이런 것에 관심을 안 두는지 모르겠다. 제 강의에 이렇게 많이 찾아오는 것이 그 관심의 반영인 것 같다.”
- 언제부터 ‘청춘콘서트’를 해왔나.
“3년 됐다.”
- 어제(7월 25일) 춘천대 강연에서는 어떤 말을 했나.
“박경철 원장과 대담을 하며 전국을 다닌다. 둘이서만 얘기하면 식상하고, 재미없으니까 항상 게스트를 한 명 초청한다. 나름대로 전문성 있는 사람을 부른다. 어제는 주철환 PD가 왔다. 그분이 꿈에 대해서 말했다. 재밌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라’ 이런 얘기였다. 사회문제 전문가가 오면 사회문제를 얘기한다. 어제는 게스트 때문에 상대적으로 개인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다.”
- 젊은층의 고민이 무엇인가.
“도대체 뭘 하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뭐가 적성에 맞는지 모르겠다, 앞으로 사회에서 주어지는 트랙별로 가는 게 썩 내키지 않는데 다른 대안이 없다는 거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적성과는 상관없이 그냥 능력이 돼서 고시 공부해서 공무원 되고 의사 되고 한다. 그 자체도 자신에게 불행한 선택이다. 카이스트는 서울대와 같이 그나마 형편이 나은 상태인데도 그 학생들이 울기까지 했다. 그러니 다른 학생들은 오죽 하겠나? 건강한 사회가 되려면 공부 잘하는 학생, 능력 있는 학생들이 도전정신을 가지고 모험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능력 있는 학생들은 설사 실패한다 하더라도 세컨드 찬스(second chance·제2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 그들보다 차순위에 있는 학생들이 안정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맞다. 근데 한국은 제일 스펙 좋고 공부 잘하는 순서대로 가장 안정적인 쪽으로 간다. 그러면 사실 나머지는 어디 갈 데가 없다. 이게 전체적으로 불행하게 만드는 구조인 것 같다.”
- 능력 있는 사람들이 안정적인 곳에 가려는 건 당연하지 않나.
“미국의 실리콘밸리 같으면 일단은 도전한다. 월급 받을 생각 안 하고 일에 몰두한다. 열심히 해서 남 주는 일보다는, 자신의 일을 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기본적 욕구이다. 한국인처럼 세계에서 가장 독립심이 강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런 쪽으로 선택을 할 수 있는데 사회 모순이 더 큰 힘으로 억눌러서 꼼짝 못하게 만들어 놓은 게 현재의 모습이다. 젊은 사람들은 여기에 깔려 있다. 그것도 가장 아래에.”
- 사회적 모순이란 어떤 것을 말하나.
“예를 들면 일자리인데, 사람들이 절망한다. 대기업 일자리가 지금까지 200만개를 넘은 적이 없다. 작년엔 더 줄었다. 내용을 보면 더 처참하다. 작년에 늘어난 대기업의 일자리 대부분이 신입 직원이 아닌 경력직이다. 중소기업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길러놓은 직원들을 대기업이 연봉 천만원 더 주고 데리고 온 거다. 나라 전체로 보면 고용 창출을 한 것이 아니라 제로섬 게임을 했다. 공무원은 조금 늘어 100만명을 넘었다고 한다. 두 개를 합하면 300만명이다. 예를 들어 5000만명 중에서 2500만명의 일자리가 필요하다고 하면, 대기업과 공무원을 제외하고 2200만개가 필요하다.
이건 다 중소기업이 해야 한다. 그런데 중소기업들은 대기업들이 불공정거래 관행으로 이익을 못 내게 하니까 고용을 더 확대할 여력이 없다. 기존의 직원들도 월급을 못 준다. 마지막 남은 탈출구가 창업인데, 새싹들을 짓밟는 우리나라 대기업 때문에 이것도 안된다. 대기업이 빨아들이는 것이 무섭다. 청년들 입장에서 보면 결국은 대기업이 만드는 일자리 200만개 중에 새로 나오는 것 일부와, 고시 공부를 통한 공무원 자리, 그것밖에 없다.”
- 젊은이들에게 강연할 때 사회구조가 잘못되어 있으니 방법을 찾아 고쳐 보자고 한다고 들었다. 뭘 얘기하나.
“사회구조를 바꾸는 가장 최선책은 기존의 결정권자들이 바꾸는 것이다. 그게 제일 좋다. 사회적 무리도 없고, 비용도 제일 적게 든다. 그게 안 되면 차선책이다. 차선책은 대중이 문제가 있다는 인식을 하고, 공감대를 형성해서 문제 해결을 시작하자는 것이다. 결국 그 방법으로 가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이 대목에서 기자는 놀랐다. 안 교수가 대중적인 혁명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가 해서다. 그래서 바로 물었다.
- 대중적인 문제 해결책은 무엇이 있나.
“대중이 움직여서 하는 방법 중에 제일 비용이 적게 드는 건 선거다. 내년에 선거 참여율이 굉장히 높아질 것이다. 20·30대 투표 참여율이 50%까지 가지 않을까 싶다. 지금 20·30대가 전체 인구 중 비중이 가장 크다. 그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내면 달라진다.”
- 왜 젊은이들이 내년 선거에서 투표를 많이 할 거라고 생각하나.
“자기들을 무관심하게 내버려둬서 고통을 당한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많이 퍼져 있는 것 같다. 물론 제가 접한 것은 전 국민의 조그만 샘플에 지나지 않지만 최소한 제가 접한 사람들은 다 그렇다. 전국 강의를 하면서 들어보면 그전에 별 생각이 없었던 사람들도 조금씩 바뀌고 있는 듯하다.”
-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얘긴가.
“일자리도 고쳐야 할 부분 중 하나이다. 사실은 어떻게 하면 이 양극화를, 해소는 꿈 같은 이야기고, 최소한 심화되는 것만이라도 멈추게 할 수 있는지, 공정한 사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공정은 대통령이 꺼내신 화두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상생도 대통령이 꺼낸 화두다. 사실은 상생이 가장 중요한 화두다. 근데 화두만 꺼내고 후속조치가 없으면 분노가 더 커진다. 차라리 안 꺼내는 게 낫다.”
- 우리 사회에 상생이 안 되는 것에 대한 분노의 에너지가 많이 쌓여 있나.
“물론이다. 20·30대가 가장 심하다.”
- 이대로 가면 세대 간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50대와 20대가 일자리를 둘러싼 세대 간 갈등을 벌일 수 있다는 게 그중 하나다.
국민연금을 둘러싼 갈등도 한 예다.
“그게 만약 벌어진다면 대리전이다. 주범들은 다 뒤에 숨어 있는데.”
- 사용하는 단어가 격하다.
“구어체이기보다 글 쓰듯이 말하는 습관이 있어서 그렇다.”
- 우리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핵심이 무엇인가.
“우리의 현재 시스템은 기득권 과보호 시스템이라 별 노력을 안 해도 갖고 있는 파워로, 시장지배력으로, 일등을 유지할 수 있다. 별로 노력 안 하고 이익 많이 내고 그러다가 결국 실력이 뒤처져서 외국과의 경쟁에서 못 이겨 어렵게 되고, 국민 세금으로 그걸 유지해주고, 이런 악순환의 사이클에 들어 있다. 그걸 바꿔야 한다는 이야기다.
로마가 망할 때도 그러더라. 기득권이 과보호되고, 권력층이 부패하고, 상하 격차가 심하게 벌어지고, 계층 간 이동가능성이 완전히 닫힐 때, 그때가 나라가 망하는 순간이다. 지금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겠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역사는 반복된다. 역사가 계속 되풀이되는 이유는 ‘나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교만 때문이다. 나는 옛날 사람에 비해 훨씬 많이 알고 능력도 뛰어나고 그래서 나한텐 저런 일이 안 생긴다고 생각하는 교만이 역사를 반복하게 한다. 지금도 예외가 아니다.”
- 대기업 과보호에 대해 구체적으로 얘기해 달라.
“시장이 불공정한데 정부가 감시자 역할을 못하고 있다. 불공정거래가 일어나고 있는데도 뒷짐지고 있다. 여러 가지 규제가 풀어지는 것은 좋다. 저는 기본적으로 자유시장주의자이다. 축구 경기를 할 때 규칙이 너무 많으면 선수들이 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보고 있는 관중들도 재미가 없으니 규칙을 간단하게 한다. 이것은 좋다.
근데 규칙을 간단하게 하는 것이랑 심판을 철수시킨다는 것은 다르다. 규칙을 간단하게 해놓고 심판이 아무도 없으면 거기서 반칙을 한들 누가 막을 수 있겠나. 약탈 같은 불법 행위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볼 만한 게임이 안 된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면 금산(金産)분리도 완화하고 출자총액제한도 풀리고 있다. 거기에 따라서 일어날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한 감시기능을 동시에 강화해야 한다. 근데 감시기능은 오히려 약화하거나 그대로 두고, 규정도 없으니 지금은 뭐 무법천지다. 약탈 행위가 일어나는 무법천지를 정부가 방조한 거다.”
- 강남좌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이념 논쟁은 굉장히 싫어하는 편이다. 외국사람한테 물어봤는데 이념 논쟁을 지금까지 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고 했다.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같을 순 없으니까, 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니까 그렇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현실이 더 절박한데, 제가 이과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념 논쟁을 할 때가 아니고 미래에 대해서 얘기를 해야 하는데 이념 논쟁에만 휩싸여 있다. 편을 나누는 분위기에 약간 분노를 느낀다. 이념 논쟁이 누구에게 도움이 될지 생각해본다.”
- 주간조선의 젊은 독자들에게 한 말씀해 달라.
“불평이란, 우리의 인생을 가장 좀먹는 존재인 것 같다. 아무한테도 도움이 안 되고 자기에게 해가 된다. 불평이란 그냥 앉아서 누구 탓만 하는 거다. 문제해결을 남한테 던져주고, 자기 인생의 주인이 자기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 불평이다. 비록 열악한 환경이 자신에게 주어졌더라도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산다면 결국 자신에게 보탬이 된다. 자기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서 그 상황을 탈출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직장을 못 구했다고 불평을 하기보다는 직접 창업에 뛰어들든지 다른 쪽으로 노력을 하든지, 어떤 식으로든 노력을 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젊은이들 대상 강의에서 강조하는 내용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 정치권에서 안 교수를 탐내지 않나.
“10년 전부터 그래 왔다. 제가 (서울) 수서에 살 때다. 30대 후반 때인데, 국회의장 지냈던 분이 찾아와서 국회의원 제안을 했다. 총선 때마다, 지금 벌써 세 번 이상 제안을 받았다. 서울시장 후보, 장관 후보, 위원장, 청와대 수석까지 종류별로 다 받았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은 나이가 그쪽 비슷하게 접근해 가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 뜻이 맞는 대통령이 삼고초려하면 생각해 보겠다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던데.
“삼고초려가 아니고, 십고초려였다. 그 말을 했던 이유가 자존심 센 사람들이 두 번 이상 부르는 경우도 별로 없었고, 더구나 열 번은 아무도 안 부를 거다,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하는 차원에서 말한 것이다.”
인터뷰를 끝내고 안 교수의 사진을 찍기 위해 방에서 나왔다. 박 홍보팀장은 넓은 사무공간 한쪽 구석의 테이블을 가리키며, 안 박사님이 가끔 오시면 사용하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그냥 툭 터져 있는 공간 한쪽일 뿐, 회사 창업자이자 대주주, 이사회 의장의 공간이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안 교수는 판교로 사무실을 옮겨간다고 하며, “거기는 아예 사장 방도 없다. 여기는 사장 방은 있는데, 거기 가면 아무도 방을 못 가진다”고 말했다. 안 교수가 사장 방을 없애라고 했다고 한다. 그 이유를 묻자 “수평적인 커뮤니케이션에 장애가 된다. 사장이라고 해서 높은 사람이 아니며, 여건만 다른 사람인데 뭐 따로 있을 필요가 있겠나”라고 말했다.
양승식 기자 yangsshik@chosun.com 입력 : 2011.07.30 20:30 / 수정 : 2011.07.30 22:06
“안철수씨와 박경철씨를 영입한다고? 웃기는 얘기.”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이 최근 정치권에서 오르내리는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과 박경철 대한의사협회 대변인의 정계 영입설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30일 정 의원은 자신의 트위터에 “정치권에서 안철수, 박경철씨를 영입한다는 얘기가 종종 나오는데 정말 웃기는 얘기인 것 같다”며 “우리 사회에서 존경과 신뢰를 받는 인물이 지극히 드문 마당에 그나마 있는 존재는 아껴야 한다”고 적었다. 이어 “그들마저 흙탕물에 끌어들인다는 게 도무지(납득이 가지 않는다)”라며 “물론 그들로 코웃음 칠 것”이라고 덧붙였다.
앞서 지난 29일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서울 정동 이화여고에서 열린 한 모임에서 “내년 총선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인 부산, 경남, 울산 지역에서 야당이 절반 정도의 의석을 확보하는 데 역할을 다하겠다”며 “(야권의 부산 공략에) 안철수 교수와 조국 교수가 같이 뛰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오전 MBC 방송에서는 안 원장과 박 대변인의 삶을 조명한 교양 프로그램이 방송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이 방송에서 청년실업난 해결방안 등을 모색하며, 경남 산청의 지리산 고등학교를 직접 방문해 청소년과 만나 고민을 나눴다. 이 방송은 교양 프로그램으로는 유례없는 시청률을 기록했고, “두 사람의 깨끗한 이미지와 인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양승식 기자 yangsshik@chosun.com 입력 : 2011.06.01 14:42 / 수정 : 2011.06.01 16:05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서울대로 자리를 옮긴 안철수(49) 교수가 1일 “대학 행정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해관계자 간의 소통이다”라고 밝혔다.
안 교수는 이날 서울대 국제협력본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학교 행정은 기업경영과는 달리 자원을 어떻게 배분하고 그 과정에서 관계자를 어떻게 이해시킬지의 문제가 핵심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소통의 핵심은 신뢰이며 신뢰가 없으면 아무리 소통해도 소용없다”며 “신뢰가 생기려면 무작정 믿어달라고 하면 안 되고 자신이 손해 본다는 생각으로 선의를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서울대는 이날 안 교수를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로 정식 임용하고 임명장을 수여하기로 했지만, 법인화를 반대하는 학생들이 행정관을 점거해 임명장을 전달하지 못했다.
안 교수는 서울대 법인화에 대해 “아직 법인화의 장단점을 알지 못해 얘기하기 어렵다. 다만 법인화된 KAIST를 전적으로 실패 사례라고 볼 수는 없는 만큼 선례를 참고해 반영하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대로 자리를 옮긴 이유에 대해서는 “KAIST에서는 한 해에 학생 100명을 가르치는 일이 전부였다. 사회에 더 많은 책임을 지고 더 많은 사람을 가르쳐야 한다는 고민을 하던 차에 서울대가 교수직을 제안해 와 수락했다”고 밝혔다.
안 교수는 “사회 격차가 심하게 벌어지고 사회지도층이 부패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사실을 역사 교훈에서 알 수 있다”며 “한국은 지난 10년간 사회격차가 너무 심하게 벌어졌는데 이는 기득권에도 좋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안 교수는 “이런 문제의식을 공유하고자 강연활동을 많이 하고 있으며 기업보다는 강연료 없는 곳을 주로 찾고 있다”면서 “컴퓨터 백신 개발할 때부터 무료백신 보급사업을 하는 등 평생 과제를 사회격차 해소라고 여긴다”고 말했다.
개인 휴대전화를 가지지 않았다는 그는 “3년 전 귀국해서 휴대전화를 만들었는데 무엇인가 부탁하는 전화가 5분마다 왔다. 그중 상당수는 강연 부탁인데 말로 직접 거절하는 일이 어려워 휴대전화를 안 쓰고 대신 이메일을 받게 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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