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碩士學位 論文
石顚 朴漢永의 佛敎 敎育改革에 관한 硏究
指 導 敎 授 朴 先 榮
東國大學校 敎育大學院 宗敎敎育學科
宋 先 介 (德雲)
1 9 9 8
碩士學位 論文
石顚 朴漢永의 佛敎 敎育改革에 관한 硏究
指導敎授 朴 先 榮
이 論文을 碩士學位 論文으로 提出함
1998年 12月
宋先介의 敎育學 碩士學位 論文을 認準함
1998年 12月 日
위원
위원
東國大學校 敎育大學院
- 目 次 -
Ⅰ. 緖 言................................................................................1
1. 硏究目的.............................................................................. 1
2. 硏究方法과 範圍................................................................. 2
Ⅱ. 近代 佛敎改革의 時代的 背景..................................5
Ⅲ. 石顚 朴漢永의 生涯..................................................20
Ⅳ. 石顚 朴漢永의 思想.....................................................28
1. 禪·敎·律의 兼全..........................................................28
2. 詩·禪一如.........................................................................37
Ⅴ. 佛敎 敎育改革案과 그 實踐.......................................40
1. 石顚 朴漢永의 敎育觀....................................................40
2. 僧侶敎育의 傳統과 開化의 問題.................................47
(1) 石顚의 開化敎育에 대한 反省.......................................47
(2) 石顚의 傳統講院의 改革 ...............................................60
3. 大衆敎化의 理念과 그 方案.........................................75
(1) 大衆敎化의 理念...............................................................75
(2) 大衆媒體를 통한 敎化.....................................................81
Ⅵ. 結 語.................................................................................89
參考文獻..................................................................................93
SUMMARY
Ⅰ. 緖 言
1. 硏究目的
한국불교의 근대화는 '僧侶의 都城解禁'으로부터 잡는 것이 통례이다. 한국 불교 근대화의 과정 및 일제지배기의 불교를 연구함에 있어서 그 유형별로 보면 당시 불교계를 대표하는 萬海 韓龍雲, 震鐘 白龍城, 石顚 朴漢永 등, 인물에 대한 개별 연구가 많이 진행되어왔으며, 사건별로는 3·1萬歲事件과 관련 불교계의 활동이 조명되어 온 것과 佛敎維新·改革運動과 관련한 것, 국문학계의 이들의 작품세계를 통해 본 연구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1)
그러나 먼저 박한영은 앞의 두 인물과는 다른 점에 주목할 수 있다. 그는 불교 교단에 있어서 서산하 7세손인 선사이며 율사·화엄종주인 白坡亘璇의 법손으로 雪乳處明의 법을 이은 한국 불교계의 정통 인물이다. 따라서 그는 전통적인 敎·禪 兼修의 고승으로서 禪師이며 講伯이고 律師인 성격을 동시에 가지는 正統 法系라는 점에서 먼저 주목되어진다. 이러한 불교계의 대표적 인물이 구한말과 일제하 그리고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시련과 격동의 세월을 어떻게 보냈는가 하는 것은 마땅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또한 당시는 敎育救國·扶宗樹敎의 일념에 의해서 어느 때보다도 승려의 교육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시기였다. 이러한 때 우리는 석전을 가장 먼저 僧侶敎育·徒弟養成, 大衆敎化에 대하여 知·行一致로 헌신한 인물로 손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기존의 연구에 있어서는 이러한 점에 있어서 소홀하지 않았나 한다. 따라서 본 논고에서는 僧侶敎育과 大衆敎化의 측면에서 인물 석전 박한영에 초점을 맞추어 고찰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석전의 敎育思想과 그 實踐을 규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박한영이 이후 한국불교계에 끼친 영향은 어떠한 것이었나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석전 박한영의 저서《石顚文抄》·《石顚詩 》 및 그리고 《朝鮮佛敎月報》·《海東佛敎》등에 발표된 글을 토대로 그의 佛敎 敎育改革에 대한 思想과 實踐을 검토· 고찰해 보고자 한다.
2. 硏究方法과 範圍
위에서 말한 연구를 진행하기 위하여《石顚文抄》과《石顚詩抄》, 그리고 주로《朝鮮佛敎月報》·《海東佛敎》및《佛敎》등 불교잡지를 통하여 발표한 석전 박한영의 다수의 글을 통하여 그의 불교사상과 교육사상을 살피고, 그외 일제하 불교 교육계의 현황을 알 수 있는 많은 자료들을 참고하였다.
제일 먼저 Ⅱ장에서는 근대 佛敎 敎育改革의 時代的 背景을 일제의 종교·교육정책과 조선 교육계의 상황과 연관지어 살펴보았다. 당시는 근대화 의 욕구 및 敎育救國의 비장한 기치 아래 많은 애국지사들이 조선인의 개화와 교육에 대하여 많은 관심과 열성을 쏟았던 때이다. 불교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개화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를 위한 노력을 꾸준히 전개하였으며, 1920년대 후기부터는 초기 개화교육에 대한 반성과 함께 여러 교육실험을 실시하던 때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아래서 박한영은 어떠한 時代認識을 가지고 있었나를 살펴보았다.
Ⅲ장에서는 박한영의 생애에 대하여 시기적으로 1期, 2期, 3期로 구분하여 살피고 그의 저술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1기는 출생에서부터 법을 이은 전북 龜岩寺를 중심으로 지방의 주변 사찰에서 講說三藏으로 법을 폈던 시기이며, 2기는 乙巳條約 등 나라가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을 맞이하니 경성으로 올라와 한국불교의 주체성 확립과 불교유신의 뜻을 펴고 '臨濟宗運動'에 참여한 시기이다. 3기는 가장 긴 시기로 본격적으로 승려교육과 대중교화에 투신하면서부터 입적하기 전까지의 기간이다.
또한 박한영은 저술로서《石顚文抄》·《石顚詩抄》를 남기고 있으며,《朝鮮佛敎月報》·《海東佛敎》및《佛敎》등 불교잡지에 그의 사상, 불교 교육개혁의 실천을 볼 수 있는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Ⅳ장에서는 석전 박한영의 사상을 살펴서 그의 敎育思想의 理念이 기본적으로 어디에 토대를 두고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그는 禪·敎·律의 一致를 몸소 실천하고 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불교의 戒·定·慧 三學의 勤修라고 하겠다. 즉, 석전은 持戒嚴正을 주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선사상에 있어서도 정통선사의 유감없는 면목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백파의 맥을 잇는 선사임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선 풍토를 비판하고 있어서 주목하게 된다. 敎에 있어서도 그는 근본적으로 華嚴思想에 입각하여 교학을 펼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석전은 22章으로 되어 있는《石林隨筆》과 7백여수의《石顚詩 》를 남기고 있는데 이러한 것은 그의 禪·詩一如의 삶을 간명하게 보이는 것이라 하겠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지금의 시기를 佛敎復活의 시대로 보고 과거불교를 거울 삼아 미래불교를 조견하여 각자 장부적 지행을 원만히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여 知·行 合一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원효, 지눌 이래 한국불교에서 줄기차게 추구되어왔던 '眞·俗不二', '自·他不二'의 사상을 그대로 실천해 나간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사상적 바탕 위에서 그가 어떻게 불교 교육개혁을 실천해 나갔는가를 승려 교육개혁과 대중교화의 두 방향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Ⅴ장 석전의 불교 교육개혁의 실천에서는 먼저 석전 박한영의 敎育觀을 살펴보았다. 원칙적으로 그는 원효 이래 지눌로 이어지는 被敎育者에 대한 靈覺性을 인정하고 그 가능성의 개발에 역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석전은 그러한 교육관을 바탕으로 교계 지도자들에게 따끔한 경책을 아끼지 않았으며 승려교육 개혁과 대중포교에 대해 무한한 애정과 희망의 의지를 가지고 이에 대처해 나갔던 것이다.
석전은 승려교육에 무려 30∼35여년간, 그의 삶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기간을 진력하였다. 그는 新·舊의 兼全을 주장하여 교단의 중요한 敎育事業 현장의 중심에 항상 서 있었는데, 개화교육과 전통교육이라는 두 축 사이에서 많은 실험과 갈등을 지낸 시기에 어떠한 사상과 실천을 보였는지 대해서 살펴보고자 하였다. 그런데 특히 傳統僧侶의 敎育에 헌신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宗敎家로서의 깊은 철학에 따른 것이라 하겠다.
또한 석전 박한영은 大衆敎化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보였다. 대중교화에 있어서도 文書布敎를 중시하고 布敎者의 資質 등을 강조하며 '布敎 4大 綱要'를 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것들의 검토를 통하여 석전이 대중교화에 관한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갔는지 살펴보고자 하였다.
Ⅵ장에서는 박한영의 불교 교육개혁에 대한 사상과 실천을 검토한 것을 토대로 정리하여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인가를 궁구하였다.
Ⅱ. 近代 佛敎敎育改革의 時代的 背景
石顚 朴漢永(1870∼1948)은 舊韓末에 태어나 日帝支配下 그리고 解放을 맞이하는 우리 역사상에 있어서 가장 큰 격동과 시련의 세월을 보낸 인물이다. 이러한 시대를 맞이하여 애국 선각자들이 敎育救國의 이념 아래 교육활동에 전념하였던 것처럼, 불교계도 불교개혁운동과 함께 佛敎維新을 전개하게 되는데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불교와 관련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열강들에 의해 약육강식의 식민수탈이 자행되던 근세의 격동기 속에서 1876년 조선은 韓·日修好條約을 맺게되고 급기야는 1905년 乙巳保護條約을 통해 통감정치를, 1910년에는 韓日合邦을 하게되자 우리 민족은 치욕적인 日帝植民地時代를 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식민주의의 본질과 관련하여 생각할 때 제국주의는 식민지를 영유하고 식민지에 대해 정치적 예속, 경제적 작취, 문화적 정신적 전통 및 생활양식의 파괴 등을 일삼아 왔다. 일본도 이 점에서는 예외일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의 식민지정책을 추진하는데 필요불가결의 수단이 되었던 것은 '敎育'이었다. 일본 식민지주의 교육의 기본정책은 제국주의의 확대 팽창에 따라 확대 심화되어갔는데 그 기본적 특질은 한마디로 <同化·皇民化·日本人化>정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동화교육의 구체적 실천 내용은, ①日本語 敎育의 强制, ②日本의 歷史·文化·生活樣式 등의 注入, ③近代的 生産技術, 특히 초보적인 農業技術의 傳授 등이었다.2)
일본의 식민지화에 대한 위기의식이 높았던 1890년대 조선에서는 자주독립과 민족계몽을 지향하여 무수한 私立學校가 세워졌다. 즉, 민족주의자들에 의하여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으로서 사립학교 설립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조선인의 정치의식과 자주독립의 염원을 배양하고 고양하는 民族敎育의 실천이었다.
일제는 한국인에 의하여 설립된 사립학교를, '교육의 本旨를 그릇 깨닫고 정치와 교육을 혼돈하며 문명의 풍조에 뒤떨어져 事理를 변하는 하는 似而非 敎育家에 의해 경영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이른바 비문명적 교육이라는 미명 아래 민족교육을 탄압하였으나 한국인들은 자주독립을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교육운동에 헌신했다. 大韓自强會는 그 취지문에서도 '교육이 흥성하지 못하면 民智가 未開할 것이요. 산업이 不殖하면 國富가 증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면서 민지와 국력의 양성 방법은 교육·식산의 발달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 때 張志淵, 徐載弼, 楊基澤, 周時經, 朴殷植, 申采浩 등 수 많은 애국 계몽사상가들은 정치·경제·문화·교육 등 각 분야의 결함을 비판하는 한편, '內修外學'이라는 그들의 교육사상을《獨立新聞》·《皇城新聞》·《大韓每日新報》·《大韓自强會月報》·《大韓協會會報》등을 통하여 주장했다. 또한 지방별로 학회와 교육단체를 조직하여 民衆啓蒙과 反日思想을 고취하였다. 1908년경의 각급 사립학교는 실로 5,000여 개교에 달하였고 그것은 반일 애국사상 배양의 온상이 되었다.
이에 일제는 '學校取締에 관한 規定(1905)·私立學校令(1908) 등 일련의 법령을 발포하여 反日思想의 온상으로 지목한 사립학교를 철저히 탄압하려 하였다. 반면 외세의 힘을 업고 있는 기독교 계통의 학교에 대해서는 종교교육을 보장한다는 온건책을 썼다. 이러한 탄압과 회유의 양면정책은 결과적으로 일본의 지배를 저해하는 한민족의 힘을 분열시키는 정책이었다.
일제는 제일 먼저 교육침략을 추진하고 식민지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朝鮮敎育令〉(1911년 8월)과〈私立學校規則〉을 내세웠다. 당시 한국인이 세운 사립학교는 언제나 독립사상의 형성과 그 운동전개의 중요한 거점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탄압하고 이른바 '帝國臣民의 敎育'을 강력히 추진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朝鮮敎育令에 의한 한국인의 교육은〈敎育勅語〉에 입각해서 충량한 국민을 육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니 非韓國人化, 日本人化 교육을 지향한 帝國臣民化의 교육으로 사립학교는 감축되고 말았다. 또한 보통학교와 고등보통학교에서는 農業을 중시하고 여자의 경우 裁縫과 手藝 등을 매주 10시간 배정하면서 韓國歷史와 韓國地理는 가르치지 않았다..
한국인의 반일교육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經學院·外國語學校·師範學校 등의 폐쇄에서도 나타났다. 경학원은 1911년 9월 전통적인 교육기관이었던 成均館을 폐쇄하고 설치한 것인데 전래의 교육기능을 잃게 되고, 단지 사회교화의 기능만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인데 그 기능마저도 잃게된 것이다.다. 또 종래부터 있어왔던 외국어학교를 폐지, 한국인이 세계로 향할 수 있는 안목과 진출을 막았다. 1911년에는 朝鮮敎育令에 따라 1895년 대한제국 명의로 설립됐던 漢城師範學校도 폐지되었다. 식민지교육을 한층 강화시키기 위하여 교원을 일본인으로 대치시키려는 저의에 따른 것이었다.
이후 1915년 3월에는〈改定私立學校規則〉을 제정하여 모든 사립학교의 설립·경영은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야했으며, 보통학교·실업학교·전문교육 등을 실시하는 사립학교의 교육과정은 관공립학교의 경우와 같이 하여야 하고, 교과서도 총독부 편찬의 것, 또는 총독부 허가의 것만을 사용토록 했다. 또한 宗敎敎育의 禁止, 敎員의 資格에 대해서는 일본어 통달 등의 통제가 더욱 심해졌다.
식민지적 교육체제 확립에 있어 최대의 장애물인 私學을 '즉시 강제하면 필경 事理를 그르칠 것'으로 판단, 점진주의를 취하면서, 우선 반일적 경향이 농후한 民族主義 私學에 대해 먼저 탄압을 가한 다음, 기독교주의 학교에 대해서도 일차적으로 온건한 현상유지, 이차적으로는 억압 탄압의 과정을 거쳐 종국에는 전 사립학교 말살론을 대담하게 전개하였던 것이다.
또한 1915년에 시행된 布敎規則과 '祝祭日 當日 私立學校 擧式禮拜에 관한 內務部長의 通牒'을 발표하여 강제적인 神社參拜에 대해 '我帝國 一般의 禮式에 따라 일정해야 하며 宗敎上의 禮拜와는 다르다'.3)는 주장을 펴니 기독교주의학교를 전면적으로 폐쇄 또는 무기력화시키려는 교활한 의도였다. 이에 대해 기독교의 반발은 대단했다. 1915년 재조선선교회연합회의는 '改定敎育令에 관한 決議文'을 발표하고, 개정사립학교규칙의 재개정을 요구, 관철되지 않자 자진 폐쇄파인 長老敎派는 학교 문을 스스로 닫고, 타협파인 監理敎系는 각각 교명을 고치고 새 규칙에 따르게 되었다.
이러한 私學과 朝鮮總督府간에 파생된 대립·반발·저항·모순·상극의 제요소는〈개정사립학교규칙〉을 정점으로 극에 달하여, 그 결과 3·1운동에 민족주의 사학과 종교계 사학이 적극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교육계 학생들의 3·1운동 참여는 운동계획 과정에서부터 진행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인 것이었다. 특히 불교계는 만해 한용운이 주동이 되어 청년학승들을 통하여 己未萬歲事件을 전국 유수의 사찰을 거점으로 전국적으로 확대시키는데 주력하였다.4)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이후 일제는 제3차〈조선교육령〉을 발포하여 일제 교육 침략의 본격화를 꾀하게 되는데, 일제는 통치방식을 무단적인것에서 이른바 기만적인 문화적인 것으로 위장 후퇴하고, 한반도를 대륙침공의 兵站基地로 보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전시체계를 강제하였다. 이 때 일제는 은근히 自治賦與의 여론을 환기시켜 민족운동의 분열을 획책하고 자치운동 세력을 점차적으로 매수하여 친일파로 만들어갔다. 이 기간 그들의 교육정책은 한국인의 격화된 반일감정을 무마하려는 유화책에 불과할 뿐, 그 기저에 깔린 同化主義와 교육적 차별은 여전한 것이었다. 오히려 기만적인 회유정책은「一視同仁」·「內鮮共學」·「內鮮一體」·「日鮮融和」·「內地延長主義」 등의 기묘한 논리를 내세워 同化主義 敎育을 더욱 본격화해 갔다. 그리하여 1922년 내선공학의 정신에 준하여 동일한 제도하에 시설의 완비를 기한다는 구실 아래 조선교육령을 개정, 다시 동화교육에 박차를 가했다.
이에 우리측은 항일 동맹휴학 등을 펼쳐 대응하였으니, 한국인 교육은 한국인 본위로!, 보통교육을 의무교육으로!, 보통학교 교수용어를 韓國語로!, 보통학교 교장을 韓國人으로!, 중등 이상 학생의 집회를 자유로!, 대학은 조선인 중심으로! 등을 주장하였으니 1921년부터 1928년 사이 445건에 달하는 항일학생운동5)은 침략교육에 대한 반발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20년 이래 同盟 休學事件은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었다. 이와같은 맹휴사건은 6·10만세사건 전인 1925년 한해만 하더라도 48건이었으며,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은 드디어 민족학생운동의 총궐기인 6·10만세사건과 광주학생사건으로까지 확대되었던 것이다. 또한 민족계몽학생운동을 펼쳐 학생들은 스스로 단체를 만들어 단결하고자 하였다. 1919년 2·8 독립선언의 주역인 학생들을 기반으로하여 설립된 學友會를 시초로하여 螢雪會·北星會·學友會·貫一俱樂部 등을 결성하였다. 불교계는 維新會, 卍黨, 朝鮮靑年同盟 등을 결성하였다.
3·1운동 이후에는 민족적 각성에 따라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민족단체가 설립되었다. 조선교육회·조선노동공제회·조선청년연합회·기독교청년연합·조선청년총동맹·전조선청년당대회 등 130여개에 이르렀다.이 가운데 교육과 관련하여 특기할만한 것은 朝鮮敎育會가 주동이 되어 추진한 '朝鮮民立大學' 설립운동이다. 1920년 6월 23일 재단법인 조선교육회설립발기회를 개최하고 조속한 시일 내에 朝鮮 民立 綜合大學을 설립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것은 한국인의 학문적 갈증에 대한 민족적 요구의 반영함과 동시에 민족 지도자 양성에 그 중점을 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일제는 1924년 京城帝國大學를 건립하여 무마하고자 하였다.
일제는 1938년 第3次〈朝鮮敎育令〉을 개정하였는데, 대륙침략 및 태평양전쟁 등을 일으키며 교육 침략을 격화하였다. 일제는 군국주의적 전쟁수행을 위해 철저한 한국인의 일본인화, 식민지수탈, 전시체제의 확립 등 식민지 정책의 격화해 나갔는데 이에따라「皇國臣民化」라는 이름의 일본인적 노예화, 더 나아가서는 日本語 常用, 일상생활의 日本化, 創氏改名까지 자행하여 이 지구상에서 한국 민족을 말살하려는 비인간적 民族否定의 폭거를 자행하였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일제는 5대정책, 즉 國體明徵·鮮滿一如·農工竝進·敎學振作·庶務刷新 등을 제창하였다. 그리고 1938년 9월, 조선총독부는 조선통치의 근본은 一視同仁의 聖旨에 따라 완전한 황국신민화를 꾀하니,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을 통하여 國體明徵·內鮮一體·忍苦鍛鍊의 3대 교육방침을 철저히 하여 완전한 황국신민의 육성을 기했다. 학교교육에 있어서는 특히 日本語의 교육과 天皇制 사상의 주입이 그 중핵이었으니 皇民化敎育의 군사체제화를 추진했던 것이다. 한편, 민족교육을 파시스트적 수단으로 탄압하여 폐교 또는 교명 개칭 등을 시키고 한국인 학생을 징용·학병·징병 등의 명목으로 전쟁에 동원시켰다.
太平洋戰爭(1941년 12월)의 확대는 한국에서의 동화교육을 군사목적에 합치시키는 방향으로 집약되어갔다. 따라서 전체주의 국가의 이념과 군국주의 체제하에 총력전 체계화 교육이 강조된 '軍國日本'의 정책이 그대로 한국에서도 적용하여 1943년 10월 第4次〈朝鮮敎育令〉을 발포했다. 이 때〈朝鮮에 있어서 敎育에 관한 戰時非常措處方案〉(1943년 10월 13일)을 만들어 학교의 전면개폐, 교명 변경, 그리고 사립학교의 공립학교로의 전환, 한국인 교원의 축출과 일본인 지휘권의 장악, 재단법인 조직의 강요, 사립학교 설립의 불허, 한국어 사용의 금지 등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상황 아래 불교계의 교육활동은 어떠하였는가. 조선의 불교교육은 각 사찰을 중심으로 한 禪·敎 兼全의 교육이었다. 따라서 각 사찰에서 승려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기관으로 불교경전을 가르치던 講院(堂)·禪院·律院·念佛院 등이 있었는데, 대사찰에는 제원을 갖춘 叢林이 있었다. 총림은 일종의 종합 교육기관으로 방장·동당·서당 수좌가 있었다. 강원은 불교가 전래된 이후 경전을 통해 불교의 진리를 체득케 하던 교육기관이며 선원은 선이 전래된 이후 좌선을 통해 불교의 진리를 체득케 하던 교육기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강원의 교육단계는 4단계로 운영되었는데, 沙彌科는 강원의 기초교육과정으로 律身의 법도를 가르치고, 四集科는 2년 과정으로 看經의 기초를 가르쳤고, 四敎科는 4년과 2년 6개월 과정으로 제경을 연구하였으며, 大敎科는 3년과 3년 6개월의 과정으로 華嚴經과 禪門拈頌을 연구하였다. 이로써 볼 때 강원의 수업 연한은 10년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사찰의 특성과 목적에 따라 조정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강원의 교과목은 조선조 이래 '捨敎入禪'이라는 근본 취지 아래 일정하게 정해져 내려온 것이었다.6)
선원은 강원을 수료하고 비구계를 수지한 20세 이상의 자가 입학하여 수도하는 平生敎育 機關이었다. 선원의 교육은 坐禪을 통하여 스스로 불교의 진리를 터득토록 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바로잡고 自證三昧의 경지를 몸소 체득케 하고 '見性成佛'에 이르도록 하여 중생을 구제토록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선원은 夏·冬期로 구분하였으나 下安居를 정통으로 인정하여 법납의 수를 정하는 기준을 삼았다.7) 선원의 교육 내용은 1일 8시간 이상 자선·자수·자력·자식의 원칙 아래 좌선, 대·소승율, 선리연구에 중점을 두었다. 선원은 '定院中常規十條'라는 기록8)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일정한 규칙을 정하여 파계·사행·란습 등 폐습은 일절 금지시켰던 것 같다.
이와같이 양원에서 소정의 교육과정(수행과정)을 수료하면 법계가 수여되었는데 선종의 법계는 大選 - 中德 - 禪師 - 大禪師로 승진되었으며, 교종의 법계는 大選 - 中德 - 大德 - 大敎師로 승진되었다. 그런데 선·교종의 최고법계인 대선사와 대교사에 이르려면 강원을 수료하고 선원에 입문하여 하법납 20세 이상되어야 하므로 최소 30여년의 수도생활을 거쳐야만 하였다. 그리고 사찰의 주지도 강원을 수료하고 선원에 입문하여 하법납 10세 이상된 자에게만 자격을 인정하였다.9) 그러므로 불교교육의 전통은 강원과 선원이라는 수행교육기관에서 경전과 좌선을 통하여 불법을 몸소 터득함으로써 불교가 사회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10)
그러나 西勢東漸으로 인하여 근대문물이 물밀 듯이 들어오게 되자, 불교계에도 이러한 흐름에 대처해 나갈 수밖에 없게 되니, 이 때 劉大致와 李東仁 등이 활약하였다.11) 이러한 가운데 1876년 개항 이후 불교계 역시 많은 변화를 겪게 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먼저 일본불교의 진출을 들 수 있다. 즉, 일본 불교는 1877년 부산에 本願寺系 別院을 세운 이래 1910년 합병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일본 각 종파의 별원과 포교소 및 출장소가 무려 68여개소에 달하고 있었다.12) 뿐만아니라 '僧侶의 入城解禁'이 일본인 사노(佐野)의 건의에 의해서 실현되니, 일제불교의 한국진출이 급격히 늘어남과 동시 한국 승려들 가운데에는 친일 내지 일본불교에 동화되는 경향이 현저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본 불교의 진출에 자극된 조선의 불교 지도자들은 종래의 고립적이던 자세를 지양하고 포교활동을 강화하여 대중불교로서의 위상을 찾기 위해 불교통일안을 마련하는 등 自覺運動을 구체화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일본 불교에 자극되어 불교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된 국가에서는 1899년(光武, 3)에 元興寺를 세워 한국불교의 총종무원으로 삼고 각도에 一寺를 首寺로 정하여 각도의 사찰을 관리하도록 하는 한편, 종무소원장에 都摠攝, 중앙에 내산섭리, 각도에 攝理라는 승직을 두어 승무를 총괄하도록 하였으며,13) 1902년(光武, 6년) 궁내부에 寺社管理署를 설치하고 7월〈寺社管理施行總則〉36조를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중앙의 元興寺를 대법산, 각도의 首寺를 중법산이라하여 전국의 사찰을 관리토록 하였다.
이와같이 개화기 불교는 대법산인 원흥사를 중심으로 사원조직을 강화시키고 사원의 교육제도를 개편하는 등 불교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미조약을 체결한 이후 일본은 통감부를 설치하고 한국 불교를 통제하기 시작하니 모처럼의 이러한 시도는 중도에 그치게 되고 府令 제45호 4항의 규정을 만들어 조선 불교를 규제하기 시작하였으며, 1906년 11월〈管理請願〉을 발표, 한국사원의 관리위촉에 응하고자 하는 자는 통감부의 허가를 받으니 소위 관리청원이 쇄도하였다.14) 이것은 조선불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선불교의 현실을 자각·반성하고 있던 奉元寺의 李寶譚·華溪寺의 洪月超 등은 불교계의 개혁을 위하여 佛敎硏究會를 조직하여 근대식 불교계 학교를 설립·운영할 것을 결의하였다. 1906년(光武, 10) 2월 李寶譚과 각사 대표 9인 등은 신지식을 흡수하려던 교육의 일반적 목표라 할 수 있는 《大學》의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之於至善'이라고 한 경전의 정신과 그 뜻을 계승하여 개명, 진보케 한다는 의미에서 '明進'으로 하고 인가를 신청하니15) 불교계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명진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다.16) 이것은 재래의 구식교육 제도로는 도저히 근대사회를 지도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할 수 없다는 각성에 따른 결과였다. 불교연구회가 각도 중법산 사찰에 보낸 '發文諸道首寺通文'에서는 한국불교가 침체된 원인을 승려들이 세계의 학문에 통달하지 못했고 사물을 등한시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서적·풍습·산술·어학 등 신학문을 연구하여 쇄신하면 '自强之實'과 '自由之權'의 길이 열릴 것이라고 강조하니 명진학교 설립운동이 신학문을 수용하기 위해 추진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명진학교의 교과과정을 보면 매일 시간 외에 참선과 근행을 수련하도록 하였으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불교과목보다도 新學問의 基礎科目 등 普通學에 더 많은 시간을 배정함으로써 불교계의 개화교육 의지를 잘 반영해 주고 있다. 즉, 명진학교의 설립은 불교계가 사원중심의 불교계 교육을 근대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表, 1)
명진학교의 직제(8조)는 찬성장·찬성원·기인·교장·요감·서기 등 각 1인과 담임강사와 강사 약간명으로 구성하였는데 불교연구회의 회장이던 洪月超는 찬성장에, 2대 회장이던 李寶譚은 초대 교장에 추대하였으며, 강사로는 陳震應(불교학)이 초청되었으며 그 외 신해영(법제·경제학), 이명칠(산·이·측량·어학), 박동진(종교·불교·철학·포교법), 김보륜(불교학·체조), 이민설(역사·지리·철학)이 과목을 맡았으며, 장지연·윤치호·윤효정 등 사회 저명인사를 초빙하여 특강을 하기도 하였다.17) 명진학교 학생들은 훗 날 한국이 근대사회로 발전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던 것이다.18) 한편, 불교연구회가 명진학교를 설립하고 각 사찰에 보낸 통문은 지방학교 설립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였다.(表, 2)
특히 萬海 韓龍雲은 명진학교(補助科, 1회)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물에 대한 견문을 넓히고 돌아와 모교에 재직하면서 1908년 명진학교부설 明進測量講習所長으로 기용되었다. 그는 1913년 5월《朝鮮佛敎維新論》을 펴내 조선불교의 유신을 촉구하고〈論僧侶之敎育〉에서 승려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普通學과 師範敎育, 外國留學의 필요성 및 '一寺一校'를 역설하였다. 뿐만아니라《佛敎大典》,《精選講議採根談》,《十玄談註解》등 많은 저술을 통해 불교교육자로서, 독립운동가로서 불교계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후 1910년(隆熙, 4) 圓宗 宗務院에서는 佛敎師範學校를 설립하였고 1912년(明治, 45)에는 能仁學校와 佛敎高等學校(교장 박한영)을 설립하였고 1913년(大正, 2)에는 壺洞學校와 能仁學會를, 1915년에는 30本山 住持聯合의 경영으로 佛敎中央學林을 설립하였고 1922년(大正, 12)에는 敎務院 경영으로 東光學校를 설립하였고, 1921년에는 總務院 경영으로 佛敎學院을 설립하였고 1923년年에는 재단법인 교무원 경영으로 普成高等普通學校를 天道敎로부터 인수하였고 1928년(昭和, 3)에는 佛敎專修學校와 佛敎硏究院과 大慈幼稚園을 경영하였고 1930년에는 佛敎專修學校를 中央佛敎專門學校로 승격하여 四月 八日에 認可를 얻었다.19)(表, 3)
한편, 이러한 교육개혁에 대하여 당시 불교계의 지도자인 석전의 歷史認識은 어떠하였을까. 종교인이 갖는 의식 중에 가장 선결되어야 하는 것은 역사의식이다. 석전 박한영은 '三國時代는 胚胎時代요, 新羅·高麗 중간의 壯盛時代요 朝鮮時代는 老虧時代이니 지금은 復活時代'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석전은 불교가 노휴한 원인을 정치적 압박과 유교의 침해 등의 外因이라고 하지만 보다 더 불교 자체 내의 부패가 內因이 된 것으로 보았다. 한영은 역사적 사실의 성찰·진단, 역사발전의 모색을 통하여 미래불교를 창조하는 원동력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리고 석전 박한영의 역사적 진단은 불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성격을 관견하였다. 사대적·모방성 지향의 의식은 우리 민족의 창조적 발전과정을 약화시켰다고 하였다. 즉, 靑丘民族전체가 자기 문헌을 무시하고 중국 것을 숭배하는 까닭으로 불교계도 그러한 풍기에 전염되어 불교교학 발전에 큰 오점을 남겼다고 하였다. 그는 조선 불교계의 문제를 외적인 원인보다는 내적인 것에 있다고 보는 입장으로서 불교가 노후한 것은 불교계에 교육이 부족하여 교육의 불완전 때문이라 하며 그 해결책을 교육에서 찾았다.20) 따라서 그가 선사임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부름에 부응하고자 분연히 떨치고 교육자로써 나세게 되니 불교고등학교, 중앙고등강원, 불교연구원 등이 이러한 시대적 소명에 따른 것이라 하겠다.
明進學校 敎育課程(表, 1)
第1學年(11科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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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2學年(11科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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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1學期 |
第2學期 |
第1學期 |
第2學期 |
법계관문, 三部經, 法網經, 宗敎學, 宗敎史 算術 本國歷史·地理 博物·生物大要 珠算 農業初步 日語 體育 |
天台四敎儀 楞伽經 四分律 布敎法 算術 本國歷史·地理 博物·生物大要 測量 圖書手工 日語 體育 |
華嚴經 拈頌·說話 涅槃經 法制大要·哲學史 算術 外國歷史·地理 物理·化學大要 測量 日語 體育 |
華嚴經 傳燈錄 宗鏡錄 法制大要·哲學史 算術 外國歷史·地理 物理·化學大要 經濟大要 日語 體育 |
時間外 參禪同行 |
參禪外 參禪同行 |
參禪外 參禪同行 |
參禪外 參禪同行 |
地方 佛敎界 學校 一覽表(1906∼1910)(表, 2)
年度 |
學校名 |
設立寺刹名 |
資 料 |
1906 |
明化學校 鳳鳴學校 明新學校 明立學校 釋王學校 明正學校 昇仙學校 大興學校 |
龍珠寺 乾鳳寺 通度寺 海印寺 釋王寺 梵魚寺 仙巖寺 大興寺 |
大韓每日新報 381號 乾鳳寺誌, 大韓 285號 朝鮮佛敎月報 4號 大韓每日新報 371號 大韓每日新報 402號 韓國佛敎最近百年史2冊5 敎育 朝鮮諸宗敎 朝鮮諸宗敎 |
1907 |
鳳翅學校 慶興學校 |
威鳳寺 大乘寺外 5寺 |
大韓每日新報 448號 大韓每日新報 414號 |
1909 |
新明學校 普明學校 江明學校 |
華嚴寺外 3寺 松廣寺 大源寺 |
韓國佛敎最近百年史2冊5 敎育 松廣寺誌 朝鮮佛敎月報 4號 |
1910 |
普明學校 金龍學校 華山講塾 海明學校 |
雙溪寺 金龍寺 華藏寺 海印寺 |
佛敎 53號 韓國佛敎最近百年史2冊5 敎育 大韓每日新報 1299號 朝鮮佛敎月報 15號 |
? |
廣明學校 廣盛義塾 |
桐華寺 白羊寺 |
佛敎振興會報 3號 朝鮮佛敎月報 15號 |
中央 學校 設置 沿革表 (表,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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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學 校 名 |
程 度 |
設 立 年 月 |
經 營 者 |
校 長 |
所 在 地 |
明進學校 |
中 等 |
光武10년. 2.(1906) |
佛敎硏究會 |
洪月初 |
元興寺 |
測量講習所 |
測量專門 |
隆熙3년10. (1909) |
宗務院 |
李晦光 |
″ |
佛敎師範學校 |
佛敎專門 |
隆熙4년. 4. (1910) |
″ |
″ |
″ |
佛敎高等學院 |
″ |
明治45년. 7.(1912) |
″ |
朴漢永 |
″ |
能仁普通學校 |
初 等 |
明治45년. 8.( 〃 ) |
李晦光 |
李能和 |
″ |
壹洞普通學校 |
″ |
大正2년. 1. (1913) |
四大寺刹 |
成 塤 |
壹 洞 |
能仁學會 |
佛敎專門 |
大正2년. 8. ( 〃 ) |
羅晴湖 |
羅晴湖 |
覺皇寺 |
佛敎中央學林 |
″ |
大正4년. 11.(1915) |
三十本山 |
姜大蓮 |
崇一洞 |
東光學校 |
中 等 |
大正11년. 8.(1922) |
敎務院 |
白南奎 |
″ |
佛敎學院 |
佛敎專門 |
大正11년. 9.(1922) |
總務院 |
李萬遇 |
諫洞敎堂 |
能仁女子學院 |
初 等 |
大正12년. 3.(1923) |
女子靑年會 |
禹鳳雲 |
″ |
普成高等普通學校 |
中 等 |
大正13년. 1. 인수 |
法人敎務院 |
鄭大鉉 |
惠化洞 |
佛敎專修學敎 |
佛敎專門 |
昭和3년. 3. (1928) |
″ |
宋宗憲 |
崇一洞 |
佛敎硏究院 |
″ |
昭和4년. 4. (1929) |
″ |
朴漢永 |
開運寺 |
大慈幼稚園 |
幼 稚 |
昭和4년. 7. ( 〃 ) |
″ |
金泰洽 |
壽松洞 |
中央佛敎專門學校 |
佛敎專門 |
昭和5년. 4. ( 〃 ) |
″ |
宋宗憲 |
崇一洞 |
佛敎界의 敎育運動은 본론에서 박한영을 통해 적극 검토하게 될 문제이나, 일반 애국 민족주의자들과 같이 불교계도 역시 敎育救國, 扶宗樹敎의 기치 아래 우수한 청소년을 교육시키고자 열의를 다하였다. 석전은〈佛敎와 歲暮의 興感 -靑年에게 거는 期待〉에서,
지금은 維新하는 晟明시대이니 해동불교 발흥의 萌芽가 점장하고 앞의 魔雲이 청제할 기상을 관감하였으니 미래 癸丑 歲暮 금일은 환청구불교도 수미정상에 초승하며 국민에 대한 복리가 바다와 같으며 승려의 행업은 보현문에 圓俱人하여 대동한 환희지에 안주하기 점차 증승할줄로 희감이 복생하니, 우리 청년 교우에게 불계를 짐짓 파하고 금굴을 기울여서 屠蘇酒를 滿酌勸進하고 미래불교의 진여관은 과거 불교의 顚倒邪染을 觀感하여 중생의 복전을 躬耕勉諸하기를 頂頌하노라22)
라 하며 큰 기대를 보이고 있다. 또한〈佛敎와 歲新의 想華〉에서도 불교개선을 위해 가짜 戒·定·慧를 제거하고 진짜 계정혜를 낱낱이 수증할 것, 自利·求德만을 쫓지말고 利他·公德을 함양할 것, 고루한 전문훈화에 힘쓰지 말고 학교를 일으켜 지식을 넓혀 英才 培養에 힘 쓸 것, 布敎의 허명을 개량하고 성심으로 포교하여 법력을 선양할 것, 산업을 일으켜 가람과 일신을 보호할 것, 慈善事業으로 救世濟民을 실천할 것 등의 6개 조항을 제안하였던 것이다.23) 이렇듯 한영은 지금의 현재를 부활의 시대로 인식하고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사고 아래 청년승려에게 희망을 가지고 불교 교육개혁 운동을 펴나갔던 것이다. 즉,
그러한 즉, 불교전도의 활흥할 책임은 성경에 고추도 불가하고 타력을 仰賴도 불가하고 오교의 제자된 유년 노숙과 거사 비구와 男子 尼姑의 階差를 막론하고 과거 세계해상에 우리 불교의 眞慧公德을 頂戴肩荷하여 방행실천한 경우이면 미래에 황금시대는 곧 불교의 전성을 위함이라. 新佛敎를 회복하기 위하여 靑年徒弟를 양성하여 今是昨非를 어시호대각할 시절이 파근하니 슬프고 슬프다. 금일에도 집미불각하면 미래 불교계에 죄인을 면하기 어려우니 깊이 궁구할지어다.
라고 하여, 그는 그의 일생을 佛敎改革運動과 徒弟養成에 헌신하였던 것이다.
Ⅲ. 石顚 朴漢永의 生涯
石顚 朴漢永(1870∼1948)의 詩號(雅號)는 石顚, 법명은 鼎鎬이며, 호는 映湖이다. 통칭하는 漢永은 속명이다. 全北 靈龜山의 법통을 이은 백파 - 설유의 법을 계승하였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한영은 속명이고 자신도 영호, 혹은 정호로 칭하고 있으므로 마땅히 '映湖鼎鎬'로 불리워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통칭 석전 박한영으로 불리우므로 편의상 그렇게 부르고자 한다. 한영은 조선후기 대선사이며 강백인 雪乳處明(1858∼1903)의 법을 이어 받았다. 석전의 스승인 처명은 1872년(고종, 9) 15세에 안변 釋王寺의 道雲에게 출가했다. 얼마 뒤 도운이 죽자 雪竇有炯(1824∼1889)을 은사로 삼아 수학한 지 10여년 만에 마침내 茶輪翼振의 법을 이었다.(설두유형 - 다륜익진 - 설유처명) 처명은 유형이 입적한 뒤 강석을 이어받아 20여년 동안 수백여 명의 후학들을 지도하였는데 1895년(고종, 32) 강석을 문인 鼎鎬에게 맡겼다. 그는 평소 '근년에 선가의 風化가 위축됨은 학도가 내전만 전공하고 널리 世學을 통하지 못하므로 대방가들과 교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드시 天下書와 天下學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시문에도 조예가 깊어 당시의 명사인 黃梅泉 . 奇松沙 . 鄭雲藍 등과 깊이 교제했다. 저술로는 문집인《雪下集》이 있었으나 간행되지는 않았다.24)
이러한 설유처명의 법을 이은 석전 박한영는 조선의 국운이 기울어져가던 1870년(고종, 7)에 출생하여 한일합방·일제기를 거쳐 해방을 맞이하기까지 파란만장한 시기를 살다간 불교계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우리는 그의 삶의 궤적을 통해 당시 다사다난 했던 불교계의 상황과 그에 따른 고뇌를 엿 볼 수 있다. 또한 그의 삶을 추적하면 특히 그가 열중하였던 승려의 교육문제에 대하여 그 사상과 실천을 살필 수 있다. 먼저 편의상 그의 생애를 각각 1, 2, 3기로 나누어서 살펴보기로 하자.
第1期: 1기(1870∼1907)는 출생에서부터 출가하여 백파계 설유처명의 법을 잇고 강설삼장으로 지방 사찰을 중심으로 법을 폈던 시기이다. 석전은 1870년 8월 全北 完州郡 草浦面 鳥沙里에서 父 朴聖鏞, 母 晋陽 姜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찍 부친을 여의어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냈으나, 타고난 총명과 남다른 학문의 관심은 일찍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17세 되던 해에 모친이 全州 威鳳寺에서 금산화상의 삶과 죽음에 관한 생사의 법문을 듣고 전해주어 이것에 크게 감동한 바가 있었다. 이 인연으로 1888년(고종, 25) 19세에 전주 太祖庵에서 금산화상에게 득도했다. 1890년(고종, 29) 21세에 장성 白羊寺 雲門菴의 涵溟·幻應에게 사교를 사사하고, 1892년 23세에는 순천 仙巖寺의 擎雲에게서 대교(화엄, 염송, 전등록)를 수학했다. 환응·경운 양사는 당대 유명한 강백이었다. 25세 안변 釋王寺를 비롯하여 神溪寺와 乾鳳寺에서 안거하였고, 이어서 순창 구암사에서 雪乳處明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았다. 이때 당호를 '映湖'라 했다. 이때 석전 또는 石顚山人이라는 아호도 갖게 되었는데 이것은 일찍이 秋史 金正喜가 백파에게 '石顚·曼庵·九淵'이라는 글씨를 지어주면서 '훗날 제자 가운데 도리를 깨친 자가 있거든 이로써 호를 삼으라'는 부탁에서 설유처명에게 유전되어 그 이름이 전수된 것이라고 전해진다. 설유처명에게 사법한 후 龜岩寺에서 開堂하니 학인이 운집하여 종풍을 크게 드날렸다. 구암사가 근대 이후 부각되어진 것은 백파긍선 및 설두유형, 설유처명, 영호정호 등 고승을 배출시킨 까닭이었다.
1899년 30세에는 진주 大源寺에서 대강회를 베풀고 이어 장성 백양사, 합천 해인사, 보은 법주사, 구례 화엄사, 안변 석왕사, 동래 범어사 등에서 講說三藏의 대법회 등 불법을 강설 하였다.
第2期: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일본에 의한 통감정치가 시작되고 나라의 앞날이 풍전등화가 같은 상황에서 그냥 눌러 앉아 있을 수 만은 없었다. 1908년 39세되던 해, 석전은 경성에 올라와 불교개혁운동에 참여하게 됨에 따라 한영은 제2기(1908∼1911)를 맞이하게 된다. 불교 유신의 뜻을 품고 서울에 올라온 그는 龍雲奉玩(卍海)·琴巴 등과 더불어 유신운동을 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던 바로 직전 晦光師璿 등이 연합동맹 7조약을 체결하여 한국불교를 일본 曹洞宗에 예속시키려 하자 만해 한용운 . 惺月 . 震應慧燦 . 金鍾來 등과 함께 한국불교의 전통은 임제종임을 밝히고 이를 저지, 臨濟宗을 세워 독자성을 견지하려고 심혈을 기울였다.25) 그리하여 1910. 11∼1912. 6. 20 동안 처음에는 언론 등을 통해 원종을 규탄하다가 증심사·송광사·범어사 등으로 종무원을 옮기고, 한편 광주·서울·대구 등지에서 임제종 포교소를 설치하여 反曹洞宗, 臨濟宗旨를 선양하였다.
第3期: 제3기(1912∼1948)는 본격적으로 승려교육에 투신하게 되면서부터 임종할 때까지의 기간으로 그의 생애 중 가장 다사다난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한영은 1912년 43세에는 명진학교의 후신인 중앙불교 전문학원의 교장에 취임하였으며,26) 한편《朝鮮佛敎月報》를 통해, 1913년 44세에는 조선불교월보를 제호를 바꾸어 그가 직접 발간한《海東月報》를 통해 佛敎維新을 종횡무진으로 불교의 자각과 불교개혁운동을 역설하며 불교인의 자각을 촉구하였다. 45세 1914년에는 佛敎高等講塾이 건립되어 고등불교강숙의 塾師가 되고,27) 47세에는 佛敎中央學林의 강의를 맡았을 뿐 아니라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1922년까지 후학지도에 열정을 보이기도 하였다.28) 55세 1924년에는《佛日》(朝鮮佛敎會 發刊)을 창간시 백용성과 함께 편집인을 역임하였으며, 56세에는《朝鮮佛敎叢書》간행의 일을 추진하였다.
1926년 57세에는 서울 안암동 개운사에 佛敎專門講院의 설립이 되자 후학을 지도하였으며, 1929년에는 동 개운사 대원암에 佛敎硏究院의 설립이 되자 강주를 맡아 이후 20여년간에 걸쳐 불교계의 지도적 영재를 양성하기에 심혈을 기울였다.29) 1929년 60세에는 朝鮮佛敎禪敎兩宗 敎正에 취임하여 조선불교 최고 지도자로써 폭넓은 도량으로 종단을 이끌었으며,30) 1932년 63세 때에는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佛敎專門學校의 교장으로 선임되어31) 고등교육 일선에서 불교를 전하고 도제양성에 온몸을 다바쳐 불교중흥과 조국광복의 인재양성에 몸바쳤다.
그는 최근세기 불교계를 이끌어간 태두라 할 수 있는 인물로 해방 이후 禪·講脈의 傳承이 거의 다 그의 후손이라 할 정도로 선·교를 겸한 고승이었고 당시 대석학이었으므로 많은 제자를 거느렸다. 雲起 . 耘虛龍夏 . 淸潭淳浩 . 徐京保·李光洙 . 辛石汀 . 趙芝薰·徐廷柱 등은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물들로 근대 한국의 최고 지성이라 할 만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모두 직간접으로 구암사의 강맥과 연이 닿아 있다. 그 외에 재가제자로는 金達鎭, 金魚水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당시 사귄 명사로는 鄭寅普, 崔南善, 卞榮魯, 홍명희, 吳世昌, 권동진, 김경희, 안종원, 민형식, 윤희구, 여귀형 등을 꼽을 수 있다.
이외에도 특히 만해 한용운과의 두터운 관계는 남다른데가 있었다. 1913년 5월《朝鮮佛敎維新論》가 발표되자 그 題字를 손수 쓰고 있으며, 한용운의 시집에는 '次映湖和尙'이 3편씩이나 실려 있다. 그 중 한용운은 석전을 평하여 '구름 한 점 끼지 않은 보름달의 밝고 맑음'에 비유하고 있는 점을 보면 두 사람의 오고가는 각별한 정을 생각할 수 있다. 또한 당시 석전은 학인들과 청년들에게 '아직도 한용운의 강연을 못들었다니? 어서 가서 듣게'하면서 만해의 강연 듣기를 권고하였다 한다.32) 64세시에는 개운사 선원에 있으면서 중국을 다녀왔다. 그 후 광복을 맞이하여 새롭게 조직된 朝鮮佛敎 中央總務院의 初代 宗正에 취임하여 한국불교의 새로운 종단을 이끌었다. 말년에는 전북 정읍 內藏寺에 내려와 1948년 4월 8일 79세 法臘 61歲로 입적하였다.
석전 박한영의 저술로는《石顚文抄》,《石顚詩 》등의 문집과 《精選緇門集話》·《精選拈頌說話》·《戒學約詮》·《拈頌新編》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그의 독창적 사상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석전문초는《石林隨筆》과《石林草》 두 편으로 되어 있다.《석림수필》은 주로 선사상과 지계엄정정신, 그리고 시·선일치, 화엄론적인 진리를 찾는 자세 등 그의 중심사상이 담겨있고 《석림초》에는 한국고승들의 碑銘과 陰記의 塔銘, 사찰의 重建記, 그리고 고승들의 行略, 上樑文 등의 문헌이 실려있다. 한편 420餘首의 시를 수록한《石顚詩 》에는 그의 일생을 통한 생활과 교유 및 강산유력에서 느낀 감회로 엮어져 있다. 여기에 박한영은 70세 때 이러한 자신의 생애를 마치 스님의 행장을 보는 듯한 한편의 자서전격인 장술 자술시〈稀朝自述九章〉를 남기고 있다. 이것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시화한 점에서 남다른 솜씨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글씨는 碧下에게 물어서 익히었고 시가는 姜瑋의 법도를 사숙하였다. 문장의 길 들어보지 않음이 없건만 큰 솜씨 무르익어 조화가 어렵구나. 산수를 좋아하는 타고난 버릇이라 표주박 미투리로 동방을 두루 돌아 두 번씩 제주도에 건너가 보았었고 다섯 번을 東岳의 단풍에 취하였다. 서로가 뒤섞여서 짐바리를 따라가 祖宗인 白頭山에 걸음을 멈추고 서 나한봉 영락없다 머리를 조아리고 앉아서는 천지의 무지개를 보았었다. 압록강 굽이굽이 꺽이고 휘돌아서 조각배 타고 있어 하늘에 오르는 듯, 묘향의 세 폭포는 기특하기 그지없고 方丈山 天王峰은 정말로 웅장했다. 북으로 칠보대에 건너가 보아하니 叔湖는 넓어서 빗속에 가물가물. 서풍에 蘇州와 杭州로 건너가서 金陵 땅 대궐터를 굽어서 바라보고 달밤에 온갖 사연 기억해 적자하니 붓 끝에 이는 공력 헛되어 수고롭다. 반평생에 명산을 함께 다닌 벗에는 崔南善 그 사람이 정작으로 종용해서 陶潛과 陸修靜과 慧遠의 사귐이라 몇번을 되돌아서 명산을 다 다녔다. 강호와 산간에 흩어사는 지명 인사들 길이 멀다 찾아가 만나보지 않을손가. 늦게서야 鄭寅普를 따라서 노닐자니 대범하고 온화한 말 많이 들었고, 문을 닫고 익혀서 고문을 잘 했으니 눈온 뒤 소나무가 오히려 푸르렀다. 다시금 卞榮晩의 하는 말 들어보니 워낙에 지혜로워 전부를 다 통해서 흥건하게 옛일에 젖어듬 기뻐하나 歐陽修와 蘇軾의 바자로움 부실해서 저곳의 여산사람 비겨도 보지마는 뭇 산을 보았건만 하는 말 같지 못해. 서울에선 權海 와 묶기를 함께 하였고 중국의 전당에서 彗峰을 알게 됐다. 돌 같은 재주로서 시문을 엮어내서 남으로 날아가는 기러기를 배웅한다.33)
또한 〈自述石顚〉과〈石顚詩 自序〉는 석전의 생애와 면모를 잘 보 여준다.
放下着 할 길없어 한 걸음 걸머지고
눈이오나 비가 오나 남으로 북으로..
경전을 펼쳐들면 답답한 심상
늙은 나이 보노라니 이거 큰일일세.
우연히 벗을 따라 촉락을 두루보고
禪句를 실컫 듣느라고 瀟湘江에 지체했네.
국화와 소나무를 읊조리고서
城樓에 몸 기대어 웃기도 했지.34)
지난 여행 실로 모아
紀行詩를 묶어보니
지혜있는 이들은 문풍이 성해
엮어놓은 책들이 빛이 났지만..
은사님 뜻 못받들고
제자도 많지 않아
더구나 나의 글을 쓸모없는 옛자취를
어떻게 수집하여 부끄러움을 남기는가?
그래도 노년에 무료함 못이겨
나의 얽매인 정, 늙은 말은 알거야.
이 시를 펼쳐들면 지난 여행 눈에 선해
누워서 산천구경 이런거겠군.
崔南善 덕분으로 인쇄에 붙여
감격스러운 이 때를 만날 줄이야.
볼품없는 글솜씨 버릴 줄 몰랐으니
그대는 나를 위해 시냇물에 던져주오.35)
한편, 석전은 주로《朝鮮佛敎月報》와《海東佛敎》등에 논설을 통하여 불교계의 문제점이나 시사적인 내용을 발표하고 있는데, 박한영의 유신사상에 대한 글은 대부분 여기에 실려있다.《조선불교월보》제8호에〈敎而不倦하면 物亦俱化〉을 발표한 이래,〈佛敎講師와 正門金針〉,〈大夢誰先覺에 就하여〉,〈讀敎史論〉,〈仁學節本(譯)〉,〈禪學要領〉,〈佛光圓遍은 未來當觀〉,〈佛敎維新과 典籍刊行〉,〈佛敎靑年과 普通科卒業〉,〈知行合一의 實學〉,〈佛敎와 學文〉등에 한영의 불교 유신사상이 실려 있으며 13호부터 長廣舌과 獅子吼로 나뉘는《조선불교월보》논설부와《해동불교》에 각각 〈敎養徒弟는 紹融三寶〉,〈將何以布敎而生乎〉,〈多虛는 不如小實〉,〈佛敎와 歲暮의 興感〉,〈佛敎의 歲新과 想華〉〈佛敎의 興廢所以를 探求할 今日〉,〈靑年 佛敎界에 對하여〉〈朝鮮의 說法과 世界의 布敎〉, 그 외〈廣盛義塾 第二會 卒業祝賀〉등을 발표하니, 곳곳에서 그의 개혁사상 전반이 살펴진다.
石顚 朴漢永의 年譜(1870∼1948)(表, 4)
年代 |
歲 |
石 顚 의 行 蹟 |
佛敎關聯(宗團·敎育) |
1870(高宗,7) |
1 |
全北 全州, 父 朴盛鏞, 母 晋陽 姜氏 사이에서 出生 |
|
1886(高宗, 23) |
17 |
母親으로부터 威鳳寺 錦山和尙 生死法門 듣고 感動 |
|
1888(高宗, 25) |
19 |
全州 太祖庵 錦山和尙에게 得度, 出家 |
|
1890(高宗, 27) |
21 |
白羊寺·雲門菴·涵溟, 幻應화상에게 사사 |
|
1892(高宗 29) |
23 |
仙巖寺 擎雲화상에게 華嚴·拈頌·傳燈錄 사사 |
|
1894(高宗, 31) |
25 |
釋王寺·神溪寺·乾鳳寺 등지에서 안거 순창 龜岩寺 雪乳處明으로부터 전법, 堂號 映湖 |
|
1899(光武, 3) |
30 |
晋州 大源寺에서 대강회 베품. 白羊寺·海印寺·法住寺·華嚴寺·釋王寺 등지에서 불법 강설. |
1906. 元興寺 佛敎硏究會, 明進學校 設立 |
1908(純宗, 2.隆 熙 2) |
39 |
京城에 상경, 佛敎 改革運動에 참여 |
1910.佛敎師範學校 |
1910∼1912 |
41 |
李晦光의 曹洞宗 聯合 同盟 반대, 臨濟宗運動 전개 |
1910. 3월, 9월 韓龍雲 僧侶嫁娶解禁 建議書 提出 |
1912(大正, 1) |
43 |
中央佛敎專門學院 校長. 朝鮮佛敎月報 投稿 |
1912. 6. 寺刹令 頒布 |
1913(大正, 2) |
44 |
海東佛敎 主筆,發刊. 佛敎維新·佛敎 改革運動 展開 |
|
1914(大正, 3) |
45 |
佛敎高等講塾 塾師. 漢城 臨時政府 佛敎界 代表, 龜岩寺 住持 再任 |
1914 佛敎高等講塾 建立 |
1916(大正, 5) |
47 |
佛敎中央學林講義 |
1915. 11. 佛敎中央學林設立 |
52 |
朝鮮佛敎維新會 寺刹令 撤廢 建額書 提出 代表, 總務院 議事院 | ||
1922 | |||
1924(大正, 13) |
54 |
佛日발간, (編輯人 朴漢永, 白龍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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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大正, 15) |
56 |
朝鮮佛敎叢書 刊行 計劃. 開運寺佛敎專門講院 設立 |
1921.禪學院 創設 1928. 3 朝鮮佛敎學人大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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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昭和, 3) |
講院制度改善審議會 常任委員 | ||
1929 |
59 |
佛敎硏究院 校長. 朝鮮佛敎禪敎兩宗 敎正 就任 |
佛敎硏究院 設立. 1929. 1 朝鮮佛敎禪敎兩宗大會 |
1932(昭和, 7) |
62 |
中央佛傳 校長 |
1931. 全鮮首座大會 |
1934 |
64 |
開運寺 禪院 居住, 中國에 다녀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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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光復) |
76 |
敎正 就任 |
1945.9 全國僧侶大會, 中央總務院 組織 惠化專門 再開敎 |
1948 |
79 |
內藏寺에서 入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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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石顚 朴漢永의 思想
1. 禪·敎·律의 兼全
석전 박한영은 西山休靜 15세손이며 白坡亘璇의 7세손이다. 우선 그의 계보를 약시하면 다음과 같다.
西山休靜 - 鞭洋彦機 - 月潭雪霽 - 喚醒志安 - 虎岩體淨 - 雪坡尙彦 - 退菴泰瓘 - 雪峰巨日 - 白坡亘璇 - 道峰國燦 - 正觀快逸 - 白岩道圓 - 雪竇有炯 - 茶輪翼振 - 雪乳處明 - 映湖鼎鎬
이 계보를 볼 때 석전은 서산하 15세손임을 알 수 있는데, 西山休靜(1520∼1604)의 禪·敎 一致 또는 禪·敎 兼修의 정신이 喚惺志安(1664∼1729)에 이르러 다시 진작되고, 이어 설파를 통해 이어진 화엄교학, 그리고 백파의 선서 통달과 지율 엄정의 측면이 雪竇有炯(1824∼1889)을 걸쳐 雪乳處明(1858∼1903), 그리고 석전에게 이어진 것으로 추측된다.36) 그러므로 이러한 영향하에 형성된 석전의 승풍은 크게 禪·敎 兼全 精神에 바탕한 것으로 持律嚴正, 華嚴敎學, 그리고 兼全의 詩·禪一如 思想으로 특징지울 수 있다.
먼저 한영의 선·교 겸전의 사상을 검토하면 그 연원은 조선후기 선·교 겸수의 승풍으로 소급할 수 있다. 백파의 스승인 설파상언은 화엄의 대종사로 성품이 엄준하였으며 정좌를 기뻐하되 먼 곳 다니기를 싫어하여 지리산에 오래 머물렀다. 대둔사에서 설파를 여러차례 모시려 하였으나, 나오지 않았으므로 완호윤우는 뭇사람의 신망을 저버렸다고 한탄하며 그렇지 않았으면 대둔사의 12종사의 한사람으로 끼었을텐데 아깝다고 할 정도였다. 설파의 제자로 문하가 가장 번성한 것은 백파계였다.
백파은 조선후기 선문을 중흥시킨 거장으로서 정조·철종 당시 전북 순창 구암사에서 선 뿐만이 아니라 화엄, 계율 등을 설하여 당대 명성이 드높았던 고승이었다. 그는 임제의 삼현구를 인용하여 1811년《禪門手鏡》을 저술하여 義理禪·如來禪·祖師禪의 三種禪을 주장하자, 이 때 불교계에서는 많은 논쟁이 일어났다. 草衣意恂은 이에 대해《禪門四辯漫語》를 저술하여 이를 반박하였다. 이에 송광사의 優曇도《禪門證正錄》을 지어 역시 이를 반박하였고 백파의 문인 설두는《禪源溯流》를 지어 이를 반박하였으며, 여기에 秋史도 참여하니 조선후기 선문에 유래없는 논쟁을 가져오며 선가에 활기를 불러일으켰다.37) 1812년(순조, 12) 45세에 문자를 중심으로 강의해 온 자신을 반성하고 용문암으로 들어가 5년 동안 선을 닦았으며, 定慧結社 운동을 벌여 조사선의 새 기풍을 진작시켰다. 그 뒤 운문암으로 돌아와 그의 선사상을 정리해《선문수경》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1830년(순조, 30) 구암사로 옮겨서 절을 중건하고, 禪講法會를 크게 열었는데, 팔도의 운수납자들이 모여들어서 '禪門重興의 宗主'로 추앙 받았다. 또한 화엄과 율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格外禪에 더욱 힘을 썼다.38) 추사가〈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라 제호하여 비를 지음은 백파의 진면목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라고 하겠다.39) 설두는〈白坡大禪師行狀〉을 지었으며, 설두의 제자 漢永鼎鎬는〈白坡大師略傳〉을 지어 각각 그의 생애와 사상을 널리 소개하려 애썼다. 한영은 또한 과거 백파와 추사의 일에 대하여〈阮堂은 백파에 대하여 시종 모순이 있는 둣하다〉40)라는 글을 통해 적절히 비평하고 있다. 그는 많은 저술을 남기고 있는데 이를 보기만 하여도 백파가 선과 교, 그리고 계율, 작법에까지 치우침이 없는 고승이었음을 알 수 있다.41)
백파의 법을 이은 雪竇有炯(1824∼1889)은 조계산의 枕溟翰醒에게 구족계를 받고 사교를 배웠다. 명산을 편력하다가 영구산의 백파긍선에게서 대교를 마쳤다. 이로부터 강단에서 10여년간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었으며, 겸하여 祖師禪을 닦았다. 이무렵 백파의《선문수경》에 대한 반론이 오가갈 때 설두는 다시《선원소류》를 지어 백파의 선론을 옹호하기도 하였다. 1870년(고종, 7년) 모악산 불갑사에 주석하면서 중창불사를 일으켰다. 또한 백파 스님의 행장을 알리는 大機大用의 비를 세우고 御製御筆의 閣을 건립하였으며,《기신론》을 대대적으로 간행한 예를 본받아《염송집》의 板役을 주선하였다. 1889년(고종, 26)에는 幻翁喚眞의 청에 의하여 양주 천마산 奉印寺에서 禪門講會를 열었다. 의발을 문도인 雪乳處明(1858∼1904)에게 전하였다. 설두는 鏡潭瑞寬, 涵溟太先과 더불어 조선 말기 불교계의 三傑로 손꼽힌다.42) 한영은〈靈龜山雪乳堂處明大師行略〉에서 그의 사법승 설유처명에 대하여 자세히 밝히고 있다.43)
백파긍선 - 설두유형 - 설유처명의 법을 이은 석전 박한영의 선사상을 엿 볼 수 있는 자료로는〈禪學要領〉44),〈法寶壇經海水一適義〉(續)45)〈禪話七亂〉46)및 역대 고승 비명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선학요령〉은 '做工夫十門'에서 覺察·休歇·泯心存境·泯境存心·泯心泯境·存心存境·內外全休·內外全用·卽體卽用·透出體用의 10단계로 공부의 단계를 나누고 있으니, 이것은 보조지눌의《眞心直說》의 내용과 선사상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47) 또한 參禪 三要로 大信根·大憤志·大疑情을 들고 慘話 三機로 그 단계를 나누고 있다.〈선화칠란〉에서는 呂荷亨과 선문답을 3항에 걸쳐 논하고 있다.
석전은 석림수필에서,〈법보단경의 노행자 게송에서 돈황석실 사본의 문제〉, 〈皆具와 皆證의 문제로서 이것이 圓覺에 어떤 장애가 있는가〉 하고 반문하였으며, 〈禪의 不立文字와 禪·敎 和合의 問題〉,〈三處傳心과 公案 문제〉, 그리고〈眞歸祖師說과 如來禪·祖師禪의 問題〉 등을 三學 兼全의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거론하였다.
선·교 겸전와 관한 문제는 선이 유입된 이후 조선대에 이르도록 강조되어 왔던 것으로 한용운 역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禪·敎를 떠나 불교를 말할 수 없나니 선·교는 곧 불교요, 불교는 곧 선·교이다. 선은 불교 形而上的 순리를 이름이요, 교는 佛敎的 학문을 이름이니, 교로써 智를 得하고 선으로써 定을 득하는 것이다. 정을 득해야 바야흐로 생사고해를 건너서 열반 피안에 이르게 되는 것이요, 교를 말미암지 않으면 중생을 제도하는 불교의 지침을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과 교는 새의 두 날개와 같아서 어느 하나도 궐할 수가 없는 것이니, 불교의 성쇠는 선·교의 흥차를 영향하는 것이다.48)
그러나〈禪之不立文字功不補過〉는 글을 통하여 그가 선만을 고집하는 고루한 선승이 아니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실제로 不立文字라는 말은, 친히 조사께서 말한 바가 아니며, 선가의 한 유파가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하나의 공안을 부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서, 드디어 무식한 무리들의 護身符가 되고, 졸열함을 감추는 큰 白傘蓋가 되고 말았다. 자상히 이를 논하면 初祖 達摩께서 한 잎의 갈대를 꺽어 갠지스강을 건너, 숭산 소림사 토굴에서 9년동안 벽을 향하여 관심하면서, 묵묵히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 '불입문자'의 근원처럼 보이나 달마께서 이조에게 심법을 전하면서 楞伽經 4권을 보이면서, 이 책은 부처님의 심요이다. 말하고 사행논 등을 저술하였으니 진실로 '불입문자'가 아닌 것이다. 또한 육조혜능도 금강경 한구절로 인하여 활연히 몰록 깨우치고......대중에게 설법하던 어느날, 口訣로서 금강경을 해석하니, 어떻게 불입문자라 말할수 있겠는가......臨濟大師는 그의 종문에 법풍이 가장 성하여, 모든 조사들의 어록과 게송이 바다처럼 많이 쌓이여 교장의 다량과 거의 비등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중국 강남의 蘇州·浙州지방의 모든 사원을 주유하면서 화엄경과 楞嚴經·楞伽經을 강구하였던 곳은 쓸어버린 듯 전혀 남아 있지 않고, 오직 남아있는 시방선원만이 많이 남아 있었으나, 서로 만나 안부만을 물었을 뿐, 견문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49)
고 개탄하면서, 우리나의 선원에 있어서도 남북의 산악에 몇 개 되지 않은 총림이 있으나, 그 중에 선사 역시 '불입문자'의 護身符를 짊어지고 부질없이 枯禪을 고수한 이외에, 종주로 삼는 조사에 공안의 어구에 있어서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있다. 석전은 선가에서 종으로 삼고 있는 '불립문자'라는 말은 친히 조사께서 말한 바가 아니며 선가의 한 유파에서 부연된 것으로 달마가《楞伽經》4권을 전하고《四行論》등을 저술하였고, 육조혜능 대사는 금강경의 구절로 도를 깨우치는 기연이 되었고, 口訣로써《金剛經》을 해석하였고, 임제스님은 특히 어록과 게송을 많이 남긴 것을 볼 때 불립문자는 조사의 말이 아니라는 것이 사실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불립문자라는 선종의 전매특허가 되어버린 이 문자의 공은 과의 허물을 보완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唐代 圭峰禪師가 오늘날에는 講論家는 漸敎에 치우쳐 나타나고, 참선을 하는 이는 頓門에 치우쳐 전파하므로 禪師와 講伯이 서로 만나면, 마치 北胡 南越의 간격이 있는 듯하다 했으나 수 백년이 지난 오늘날, 선·교가 쇠퇴하고 미약하여 화회할 여지마저도 없다. 참선을 하는 사람은 枯木死灰를 고수하면서 모두 성인이다고 말하며, 강론하는 이는 金文과 貝葉(경문을 가리킴)에 束閣되어, 별다른 지름길로서 달려 나아가니, 佛海에 흘러온 찌기를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이는 한갓, '불입문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니, 이 통탄할 한을 이길 수 없노라'고 하였다.
이렇게 석전이 당시 한국 선종계의 풍토에 대하여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였던 것은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으며, 격동의 소용돌이에서 일제식민지하에 신음하게 된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므로 '불입문자'를 고수하는 선만으로는 승려 및 일반대중을 개화시켜 현실의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없다는 판단에 의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는 초두에서 보았듯이 서산하 백파계를 잇는 선사이다. 따라서 많은 선승들과 교류를 가졌으며 특히〈內藏賞雪三十韻寄贈鶴鳴禪師〉에서도 보이고 있듯이 당시의 대표적인 선사 학명과는 각별한 사이였다. 학명은 茶輪益振 - 錦華雖性의 법을 이은 한영과는 동년배이며 당시 청년승려들에게〈내장선원〉을 실험적으로 설치한 선승이며 고승이었다. 뿐만 아니라 한영은 평상시 그리던 내장산에서 입적하고 있다. 내장산의 학명선사에게 보낸 글을 보면,
剡溪(會稽山 溪谷名)가 아름답다 말을 마시오
이곳의 경치란 龍門보다 뛰어나오,
화림동 좋은 경치 한번만 보려고 해도 일년이 되지.
새하얀 온 산 바윗돌 보며
새어나오는 감탄을 금할 길 없어
읊조리는 창가에 눈이 나리니
이 좋은 경치를 혼자서 즐기는게 부끄럽다.50)1
라 하니 내장을 좋아하는 한영과 그의 내면의 선세계를 잘 알 수 있다 하겠다.
또한 석전은 知와 行을 하나로 보고 지에만 편중되는 것을 경계했다.〈知行合一의 實學〉이라는 논설에서 知와 行을 하나의 一圓相으로 보았다.51) 그러므로 지행합일이라는 기본입장에서 볼 때 더욱 뚜렷이 한국불교계의 문제점이 대두되고 이것의 해답이 또한 지행합일의 그 곳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귀결점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한국불교 선종 수행의 독특성, 나아가 보편성의 논리에서 한국불교의 앞날을 걱정하고 때로는 대안을 찾기에 몰두한 그에게 있어서 하나의 수행의 좌표였던 것이었으며, 조선불교의 부흥 자체가 하나의 공안이 된 한영에게 선종 수행에 대한 비판은 불교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노파심에 표출된 것이었다.
한편, 석전 한영은 당대 교단의 대표적인 강백이었으니,〈如來藏緣起攬要〉52),〈三界唯心萬法唯識〉53)등에서 그의 교학사상을 엿 볼 수 있다. 석전의 교학사상은 대·소승불교 전반에 걸쳐 섭렵하지 않은 바가 없었으나, 그의 세계관, 실천관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華嚴哲學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문생 成樂熏은 그가 찬한 비명에서 석전을 '華嚴宗主' 로 지칭하였던 것이다.54) 그의 이러한 화엄철학은 일생동안 산수를 유람하며 읊은 4백여수의 석림시초에서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석전의 화엄철학은 그의 논설 도처에 어김없이 나타나고 있는데,〈將何以布敎利生乎也〉를 보면,
現今은 어느 시대에 可當한고, 一神과 無神이 相禪의 際會라 하니 無神敎時代는 즉 哲學的 淘汰發揮하는 秋이니 종교의 最上乘과 一合相을 지어서 엄연히 大莊嚴毗盧樓閣에 得入함이라. 惟我佛敎의 深句博한 범위는 無理不具하며 無事不說하니 衆敎體를 含攝하며 其最奧妙한 眞際는 세계 철학 대가에 過無不及임이라.
라 하여 華嚴刹海의 重重安立과 비로자나의 身身相卽하는 華嚴哲學이야말로 개방적이고 다원화되어가는 현대사회에 있어 가장 요청되는 종교관이라고 역설하니, 그의 교학사상의 근저가 잘 나타나 있다 하겠다.
문인 包光 金映遂는 '지금으로부터 약 60년전에 우리 太古禪家 내에 宗說兼通의 거물 강백 3인이 동시에 출세하셨으니, 선암사의 錦峰和尙과 화엄사의 震應和尙과 映湖를 합하여 3대 강백이다. 그러나 금봉화상은 한시에는 조예가 깊으나 삼장강설에는 오히려 泛然한 편이요, 진응화상은 삼장강설에는 인도의 세친과 중국의 淸凉 . 圭峰도 양보할 정도로 능통하지만 시문 등 문학에는 마음을 두지도 아니했던 것이다. 오직 사는 삼장강설을 주로 하는 외에 經史子集과 老莊學說을 겸하여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書法까지도 능통한 드물게 뛰어난 大宗匠이다'라고 그의 폭 넓은 학문세계를 극찬하고 있다.55)즉, 당시 진응과 함께 강회에 있었는바 진응은 학문 내용을 모두 관통하고 석전은 그 요점만을 잘 간추리니, 그 명성이 날로 널리 남북에 알려졌던 것으로 '南震應 北漢永'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던 것이다.
한편, 석전은 계율문제에 있어서 매우 엄정하였다. 당시 만해 한용운이 1910. 3, 1910. 9월 2차에 걸쳐 '僧侶取妻의 問題' 등을 중추원, 통감부에 거론하고 거듭 1913. 5월《朝鮮佛敎維新論》에서 이를 주장하자,56) 백용성은 2차에 걸쳐 이에 대한 부당성을 건의한 일이 있다.57) 이 때 석전은 '한용운 수좌가 갑자기 미쳤나?'라고 힐난하니 그의 철저한 계율 엄정의 정신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다. 이러한 승려의 지계문제에 대한 논의는 일본불교의 영향과 불교유신의 열기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영의 문생 成樂薰이 '師는 계행이 엄정하고 함부로 단월의 시주를 받지 않았으며, 도무지 성색은 바라보지도 않았다. 이는 淸凉國師가 말하는 비구니 사찰을 밟지 않으며, 거사와 함께 자리하지 않은 이가 바로 사가 아니겠는냐'라고 평하였듯이58) 철저한 지계생활로 많은 승려의 모범이 되었다. 또한 1940년 안암동 대원암 계단에서는 戒師로서 菩薩戒 및 比丘戒를 베풀고 있다. 위당 정인보는 일찍이 그가 찬한〈石顚上人小傳〉에서 한영의 인품에 대하여 '스님은 남들의 마음을 거슬리는 일이 적으나, 그렇다고 다정다감하지도 않는다. 때로는 불쑥 화를 내고 그 특이한 미소도 지으시며, 간혹 사소한 일로서 실랑이를 벌리다가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던가 할 정도로 무심하기만 하여, 마치 허공에 구름과 연기가 사라지듯 흔적이 없다. 어리석은 사람은 스님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서 物外道人을 잘못 알기도 하여, 뛰어난 스님의 법량을 대부분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으며,59)성교의 서울에서 塵俗에 섞여 살면서도 錫杖은 蕭然하여 일찍이 累되는 바가 조금도 없었다'고 칭송하고 하였다.60)
선지식들이 차례로 열반함에 이르러 한영은 더욱 계행을 엄정히 하고 만년엔 주로 서울에 머물며 속세에 드나들었지만 그 발자취 또한 청초하여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니, 마치 거울에 그림자가 스치는 것과 같았다. 이러한 경지에 의하여, 간혹 시를 지음으로 여기에 담겨진 사상이 범상치 않고 홀로 깊은 경지에 이르러 높은 격조는 고인의 걸작과 맞먹고 문장 또한 선리를 잘 표현해 걸린 바가 없었다. 이미 많은 서적을 탐독하여 아는 바가 깊고 넓어 사물에 감촉하면 물줄기가 솟구쳐 뿜 듯하며, 또 그 기억한 바와 평생 섭렵한 것을 낱낱이 들어 말하기 어렵다. 정인보는 '스님은 스스로 校正인 것도 망각하고 校長인 것조차 망각하였는데 사람들은 또 무엇을 보고 스님을 알 수 있었는가?'라고 반문하고 있으니, 한영의 인품을 알기에 족하다 하겠다.
석전은 한국 불교계에 지나친 선사상이 전해져 無碍行이 곧 대승적 보살사상이라고 왜곡되게 이해하고 파행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많음을 개탄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잘못 알고 있는 선가의 수도자, 그릇된 무애행을 질타하고 있다.
일찍이 山이 仰山에게‘자네의 眼正을 귀히 여기는 것이지 자네의 行履는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와전된 것이다. 즉 '不說行履'가 '不貴行履'로 와전되어 殺·盜·淫·妄의 네가지 바라이죄가 무애행으로 자행되었다. 깨달음의 안목이 중요한 것이지 그 행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고 되었을 때 어디 持戒의 정신이 살 수 있게 되는가. 不說이 不貴로 된 것은 큰 잘못이다.61)
이렇듯 한영은 염송에서 그 잘못된 부분을 찾아내어 밝히고 있다. 마음대로라는 것은 우주의 법대로, 진리의 법대로라는 뜻이다. 무애행은 진리에 계합한 인간 본원의 행동이 되어야 한다. 한영이 본질적인 무애행을 찾으려고 노력한 것은 한국불교의 장래를 내다 본 가르침이었고 교단의 생태를 각성케 할 위대한 설계였다 하겠다. 계율의 속성은 구속이 아니라 해탈 자율로 이끄는 위대한 속박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속박이란 自在와 自律을 의미한 수행인의 지름길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청정지계를 강조하였던 그는 불교전문학교 계율학 교재로《戒學約全》1卷을 저술하여 계성을 밝히고 승려가 지킬 계율을 조목별로 설명하였다.62)
2. 詩·禪一如
이 밖에도 박한영은 禪·詩一如의 삶을 살았고 나아가 풍부한 식견을 통하여 시승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석림수필》과《석림시초》는 그가 詩·禪一如의 정신에 입각하여 남긴 글이다.《석림수필》에서는〈上乘의 경지에 이르면 詩와 禪은 하나이다.〉,〈선문의 '불입문자'의 공은, 허물을 보완할 수 없다.〉,〈금세 문인들의 서로 비방함을 깊이 탄식한다.〉 〈세사람의 詩伴은 제각기 유·불·선 삼교를 조술하였다〉등과 석림시초 4백여수는 그의 선·시 일여의 정신이 잘 표출되어 있다. 한영은〈어찌하여 石林隨筆이라고 하였는가〉에서,
어찌하여 石林隨筆이라 하였는가? 사문 石顚이 근대 선시의 경지를 따라서 느낀대로 적은 것이다. 山禪師의 천오백명이 참선하는 대중과 京山禪師의 천칠백명의 불법의 승려들이 모두 가사를 두르고서, 비개인 날 달이 솟아 오르는 저녘에 자세를 법어를 듣는 것과 같으니, 이는 善財童子가 미륵불전에 참례하여 손가락을 한번 튕기는 사이에 지난날 선지식에게 얻었던 법문을 몰록 잊어버리고, 허전한 마음으로 文殊를 뵈오려는 삼매의 모습이다. 거울과 거울이 서로 비추고 구슬과 구슬이 서로 비쳐, 많고 많은 主와 客이 서로서로 무애자재의 경지이었다.
라 하고 있다. 석전은 語錄이라는 과거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보다 자유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써내려가는 수필의 형식을 취한 까닭에 대해 '수필의 체제는 반드시 古文이 아니어야 하며 語錄이 아니어야 하며, 또한 詩畵와 같아서도 안된다는 말에 어찌 구애될 것이 있겠는가? 다만, 하나의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듯이 누에고치에 실이 다하면 실마리가 나오지 않는 것처럼, 가슴속에 응어리진 말을 끊임없이 써서 나간다면, 이에 족할 터이니, 어찌 공자가 말한 '말함에 글이 없으면, 행함이 멀리 가지 않는다(言之不文 行之不遠)의 말을 본받을 필요가 있겠는가'라 하였다.
《石顚詩 》는 작품 420여수가 담겨진 漢詩集으로 그의 생활과 교유, 여행, 교유관계에서 이루어진 시들이다. 후학 서정주는 1987년 跋辭에서,
석전 영호 박한영스님은 내 나이 20전후에 몇해 동안 나를 누구보다도 더 큰 자비로 이끌어주신 恩師님으로서, 지금의 내 마음 속에서도 내 육신의 친부 곁에는 이 분이 늘 자리하고 계시니만치, 이런 분에 대하여 이런 문장의 언사라는 것을 여기 늘어놓는 것까지가 그저 송구스러운 일로만 느끼어진다......卍海 韓龍雲스님은 일찍이 石顚스님에게 바치는 漢詩들 가운데 하나에서 이 분을 구름 한점 끼지 않은 보름달의 밝고 맑음에 비유하고 계시는게 보이거니와, 그 道力의 淸淨하고 浩然하셨음을 이렇게 흠모하여 표현해 놓으신걸로 알며, 나도 또한 밝은 보름달을 보고 있다간 우리 석전스님을 다시 그리워하는 버릇이 생기게 되었다.
하니, 이 또한 석전의 詩·禪一如의 삶을 잘 그리고 있음을 보이고 있다.
한편〈上乘의 경지에 이르면, 詩와 禪은 하나이다.〉에서는 시와 선은 하나라 하면서 초의선사의 비 뒷면에 남긴 기록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박한영의 시에 대한 애정을 읽을 수 있는데 석전은 초의선사의 비 뒷면에 '詩禪 一揆'라는 취지를 간략히 서술하며, 이는 도를 함께 한 이와 서로 보면 하나의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 하며, 불교와 문학과의 관계에 대하여는 문학을 떠나서 불교를 구하는 것은 마치 花木을 떠나서 春光을 찾는 것처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하며 불교문학의 맹아를 한외로 보고 당에 와서는 시와 선의 일치가 이루어졌다고 하고 있다.
또한, 청량과 규봉은 선·교이학에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문학에도 뛰어나 청량의 화엄소서와 규봉의 원각경소는 고문격조에서 초탈하였으나 병려체로서 진고절작이라고 하고, 불전 중에서 능엄경, 정명경, 화엄경, 그리고 선문염송을 문학적으로 최상승 일류로 보고 보았다. 조선의 경우 시와 선을 겸한 분은 몇 분 안되나, 그 중 그 경지에 오른 분으로 草衣意恂(1786∼1866)을 꼽으며 석전은 그를 同道者라고 하여 자신과 비교하고 있다.
Ⅴ. 敎育改革思想의 實踐
1. 石顚 朴漢永의 敎育觀
석전 박한영은 삼국시대는 胚胎時代, 羅·麗시대는 壯盛時代, 조선시대는 老虧時代, 당시는 불교의 復活時代로 보았다. 또한 불교계의 문제를 외적인 원인보다는 내적인 것에 있다고 보며 불교가 노후한 것은 불교계에 교육이 불완전하기 때문으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조선 불교를 다시 부활하게 하기위해서 승려교육에 일평생을 매진하였던 것이다. 그는 불교의 三寶인 불·법·승 중에서 불교를 일으키는 것은 '僧'으로서 도제를 교육시키는 일이야말로 삼보를 융성·실현하는 급선무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徒弟가 삼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일제하에서 많은 민족주의 선각자들이 우리 민족에게서 救國의 길은 오직 민중의 교육에 있다고 자각하고 이를 실천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이라도 교단의 힘을 모아 영재를 계속 키우고 배출한다면 운수소관도 바꿀 수 있는 것이며, 정부의 외호 따위는 끌어들일 필요도 없고, 타 종교의 침식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이렇게 승려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그가 어떠한 교육관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하여 피교육자에 대한 교육관, 교육주체를 담당하는 교육자관, 그리고 보통교육·청년교육의 중시, 지행합일의 사상 등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석전은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은 무한한 靈覺性을 갖고 있으므로 가르침을 게을리하지 않으면 깨우칠 가능성이 있다는 긍적적인 교육관을 가지고 있었다. 더 나아가 동물도 교육을 하면 깨우칠 수 있으며 금석이라도 관철할 수 있다고 하는 교육관을 가지고 있었다. 나아가 범부와 성인이 모두 영각성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동일하나 범부는 그 영각성이 교육을 게을리 하지 않음에 의해 개발되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불교의 唯心論的 교육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화엄경의 '心佛衆生 是三無差別' 唯心偈의 정신과 상통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원효·지눌 이래 인간의 영각성, 즉 불교적 용어로 말하면 근본적으로 모든 사람의 '佛性' '如來藏'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불성을 개발하고자 노력하는데 있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被敎育者에 대한 靈覺性을 강조하고 그 영각성의 개발을 위한 것은 起信論을 중심한 元曉(617∼686)의 '一心歸源'의 정신과도 합치되는 것이다. 중생의 영각성인 '一心'은 '一心二門'으로 나뉘어 生滅門에서 생사윤회하고 있지만 그 일심의 진여를 회복하면 본래 밝고 깨끗한 자리인 것이다. 이렇듯 인간존재에 대해 불변하고 고요하며 참되고 바르다고 하는 절대적인 신뢰는 석전의 교육주체자로서의 교육 가능성을 충분히 점치게 한다. 또한 知訥(1158∼1210)의 頓悟漸修의 사상과도 그 맥을 잇는 것이다. 지눌은 석전이 말하는 靈覺性을 '空寂靈知의 心'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 공적영지한 그 본래의 마음은 원래 고요하고 맑으며 부동인 동시에 온통 밝아 모든 것을 밝게 비추어 아는 '공적영지'한 것이다. 다만 망념으로 발휘되지 못할 뿐이다. 그러한 공적영지를 회복해 나가는데 있어서 지눌은 頓悟와 漸修의 방법을 敎育學的으로 권하고 있으며 스승의 '一琢'을 강조하고 있다.63)
석전은 현재 조선불교계에 사람이 없는 것은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라 英才를 기르지 않았기 때문으로 산속에 있는 승려나 도시에 있는 승려를 막론하고 세상을 똑바로 보고 새 불교를 이루기 위해서는 청년도제를 옳게 가르쳐야 하며, 그렇지 못하면 불교계의 죄인이 됨을 면치 못하리라고 하였다. 부처가 1천2백명의 제자를 교육하지 아니하고 祖師가 도제를 보육하지 않았다면 불교가 지금까지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였다. 이렇듯 英才敎育과 靑年徒弟의 양성이 시급함을 역설하였다.
따라서 불교계가 청년도제와 영재교육을 강조하면서, 그는 이를 담당할 주체자인 강사 및 지도자들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불교계에 강사가 많으나 5종의 병에 걸려 있으니 정문일침을 놓지 않을 수 없다고 통감하면서 이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즉〈佛敎講師와 頂門金針〉에서 불교 병폐의 원인이 되고 있는 불교인을 다섯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승려 모두를 향해 이를 치유할 것을 말하였다.
첫째, 貢高로서 그 입지가 고고해서 雲 밖에 외외함을 공고라 할까 그 지견이 고매하여 우주상하를 掌果를 보는 것과 같아서 타의 추종을 불허함을 공고라할가, 그 조행이 청고하여 부용은 불속이나 티끌 속에 있어도 물들이지 못함을 공고라할가......마치 옷벗고 목욕하는 사람끼리 서로 벗은 것을 조롱하는거와 같이 우리 강사류에도 增上慢의 무리들이 치우쳐 많으니 한심하도다. 약간 경을 피람하여 고인의 조박을 조작하였으나 높은 봉할을 맞보지 못한 소이로 지혜가 열리지 못하고 견문이 고루하여 종교적 寡量文字病이 단단히 들었으니 醍 甘露는 진미로되 이 무리들에게는 독약을 이룰 것이고 그들의 혜신위치를 살펴보면 심상소학 삼사학년애 불과하고 촌 마을 훈동선생의 식견으로 圓證道安과 羅汁玄 보다 으뜸같이 생각하고 강의는 淸凉圭峰과 長水戒環 스님들에게 촌보도 양보치 않으려고 하니 이러한 무리들에게 일침을 주는 동시에 이 병의 효능은 다만 虛心博學일 뿐이니라.
둘째는 懶散으로 게으르고 산만함으로 천하 일이 제대로 이루어짐을 보지 못함이니 조실이 많고 불농불경하고도 백운단확에 안연서식하면서 실의자에 제이혼령이 될 만하거늘 무위도식 안일방종해서 고목과 같고 죽은 재와 같아서 눈면 노새무리를 이끌고 캄캄한 구렁 속을 향하여 모는 것과 같이 지도자의 자격상실을 초래하였으니 佛祖本懷는 말세중생을 구제하는 一大事로 출현하였거늘 불조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오직 게으름으로 취생몽사를 감작하나니 이 무리들에게 오직 일침을 주노니, 이 병에는 勇猛 精進 뿐이로다.
셋째는 爲我者니, 자기만을 내세우고 남을 구제하고 이타하는 마음이 없으니 불타가 초하생시 목고사방주행칠보하시고 첫 사자후 하심은 자타가 없고 높고 낮음이 없는 영원히 평등한 대광명가풍을 제창하심이어늘 대천사계해중구요 일체현성여전불한 인경이 구공의 경지는 파악치 못하고 오직 초로와 같고 몽중사와 같은 사대육신과 망상의 집결체인 오온을 망집하여 이기에만 물들고 있으니 이 병에는 忘我利生하는 길이 정문일침이 되겠노라.
넷째는 吝자이니 주공도 말하기를 驕하고 또는 린하면 족히 볼 것이 없는 위인이라 했듯이 초의목식하고 당랑부사 속에서 공수래 공수거의 무상한 뜻을 모르고 부처님이 가르치신 무욕계를 망각하고 오히려 상주물이나 기타 세속적인 취재방법으로 배각합진하고 대식번영의 꿈만 꾸다가 동산철수가 나열한 염부에 가서는 때가 이미 지났으니 후회한들 무슨 효능이 오겠는가 다만 이러한 치배들에게는 정문의 일침으로 喜捨心으로 圓滿心을 기르는 길 만이 구제방법이 되겠노라.
다섯째는 藏拙자이니 언론문자와 신분조행에 염치가 조금 있는 사람을 말함이다. 예를 들어 말하면 자기가 사범위치에 있는 듯한데 막상 처세해서 환고한즉 자기 단점이 노출되고 남을 이끌만한 능력이 없음이 보이면 심산유곡에서 寡言守弱하고 은둔생활을 영위하여 남에게도 이로움을 주지 못하고 자신을 자포자기하는 위인이 되지 말고 어디까지나 나보다 나은 사람을 찾아서 부족함을 보강하고 허와 실을 균형을 이루어서 배움이 날로 새로워지고 인격을 향상시키는 노력을 하여서 불치하문의 서언을 게명을 삼고 모르는 점을 많이 선견에게 묻고 나의 인격도야에 매진하는 길만이 장졸의 병을 제거하는 일침이 되겠다.64)
다시 말하면 석전은 남을 가르치려는 자는 첫째, 貢高를 버리고 虛心廣學하며, 둘째, 懶散을 버리고 용맹정진할 것. 셋째, 爲我를 버리고 忘我利生하며, 넷째 간탐을 버리고 喜捨圓通할 것, 다셋째 藏拙을 버리고 好問廣益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렇듯 정문에 금침을 놓아서 교육의 주체자부터 쇄신의 각오를 가지고 청년도제를 양성할 것을 촉구하였던 것이다.
한편 승려 뿐만이 아니라 일반 국민에게 있어서도 종교교육, 특히 불교교육이 필요함은 당연한 것이었다. 克 生은〈종교적교육이 국민을 가주함〉에서 청년을 교육함에 종교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무릇 청년자제를 교육함이 宗敎的 精神을 정곡으로 관주함이 없으면 도덕을 배양함과 윤리를 강명함에 급무됨을 해득키 어려운지라. 만약 종교적 정신이 모자라 도덕윤리가 급무됨을 해득치 못한 동시에 한갓 과학으로 전심전력하면 비록 至精盡美의 지경에 이를지라도 금수의 편기단능에 지나지 못할지니 어찌 능히 風敎를 유지하여 국민의 자격을 이루리요. 그러므로 문명국의 교육은 종교를 숭봉하여 도덕윤리를 전숭하여 과학의 부족한 점이 있을지라도...종교덕성으로 배양함이 없으면 과학이라 할지라도 순실한 학문이라고 칭하기 어려울지라.65)
석전 박한영은 또한 보통교육을 중시하였다. 일찍이 한용운은 '一寺一校'의 설립과 교사양성을 위한 '師範敎育'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승려교육에 관해 논할 때 승려교육의 급선무를 普通學, 師範學, 外國留學 셋을 들었다. 이 때, 첫째 보통학에 대하여 보통학은 사람의 의복·음식과 같은 것이며, 전문학의 예비과이니 종교가는 그 학력의 우열을 불문하고 다 불교전문에 종사하여 보통학을 원수보듯 하여 쫓아 배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66) 석전 역시 이와같은 보통과 중시의 교육을 볼 수 있으니 環靑邱山寺敎塾의 보통과 졸업생에게, 聳然喜歡 이외에 가일층 황황히 마음에 두려움의 정을 이기지 못한다고 하면서 새끼 제비와 어린아이에 비유하고 上人이 出雲하고 良媛이 破閨함에 비유하면서 환희와 함께 우려와 기대를 함께 표하고 있다. 또한 徐花潭선생의 장님이 두 눈이 문득 밝아짐을 만나 오히려 길을 찾지 못해 울고 있을 때 그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눈을 감고 길을 찾아 집에 돌아가게 하였다는 계도를 들어, 이것은 상당한 이치가 있으나 오히려 타당치 못하고 비평하면서,
보통학을 배우는 이는 진실로 보통교학이 어떠함을 알지 못하는 구시대 보다 금일 책임이 가장 무거우니, 호기적 망상과 허영적 부견을 일체 뇌속에서 씻어내버리고 진실로 새로운 갖가지 학술을 淹博 審問 明辦 篤行하면 미래 타수용국토라 이를 것이라.67)
라 하여 보통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한영은 청년교육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 이유는 불교전체를 짊어지고 나아갈진댄 老宿, 靑年과 居士, 比丘에 구별이 있으랴마는 사실 이행상에 대하여 완급과 경중이 없지않으므로 청년 불교인에게 더욱 뜻을 두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불교계에 청년은 보통사회의 청년보다 立命處가 조금 다르고 부담이 자못 중하니 학해에 함육하기는 일반이나 최초에 불교적 진리덕성을 腦髓에 입주한 이상에 내조는 영정하고 외양은 용건함으로 계선을 작하여 소위 古今東西에 제교제학을 관섭 달치 않는 자 없으되 納懷는 滄江霽月과 같으며 행사는 청천신일과 같아서 입세출세에 大勇大健大智慧者를 감작하면 장래불교계에 중중교영의 복성이 다시 나타나며 무량무변한 세계해, 중생해, 번뇌해, 고해중에 파라밀(도피안)하는 무수한 寶船을 지으려니와 만일 立志가 不正하고 취향이 황홀하여 전한국불교계에 고식구전하든 遺響餘風을 답습하여 다시 오지 않는 청년시대를 悠然汎過하여 교학방면에 隔墻孤立하였다가 髮에 추풍이 취과하면 후회해도 미치지 못하거니와 그렇지 못하면 학계풍조에 수파축량하되 그 가운데에...청년상인은 晨夕間에 深省勉勵치 않으리요.68)
라고 청년불교계에 대한 기대를 표명하고 있다. 그는 백양사내 광성의숙 제2회 졸업식 축사에서도69) 간절히 모름지기 부지런히하여 전일보다 가일층 세계학해에 順風闊步하여 구경은 寶積寶藏을 信手拈來하여 뭇 중생계에 널리 광명을 놓기를 지극히 바란다고 하니, 교육을 통해 불교계 뿐만 아니라 널리 사회에 利他行을 할 수 있는 인물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또한 석전 박한영은 그 배움이 행과 일치, 연결되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그는 생도에게 儒學을 설할 때에 항상 禪宗으로 말하고 승을 만나 선을 말할 때에 항상 儒典으로 깨우쳐 불법과 세간법이 둘이 아님을 현시하며 '知行合一의 實學'을 주장한 왕양명의 학풍을 언급하면서,
知行合一은 무엇을 말함인가. .오호라 다만 지와 행이 원래 二物이 아님이라. 단단한 一圓相이니 性具門 一点靈知는 萬事萬能을 구체하였고 功行門 만사만능은 일점영지의 활용이라 어찌 도를 보지 못하는가.70)
라 하였다. 이것은 당시 불교계가 깊은 꿈 속에서 깨어나 지와 행을 동시에 갖추고 실천하며 현실에 대응할 수 있는 불법을 펴기를 원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한 이론가에 그치는 인물이 아니었다. 승려교육·대중교화에 직접 투신, 헌신한 삶은 바로 그의 이러한 지·행합일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2. 僧侶敎育의 傳統과 開化의 問題
(1) 石顚의 開化敎育에 대한 反省
Ⅱ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승려의 개화교육에 대한 열의는 대단하여 1906년 명진학교를 설립한 이래 교육열은 전국 지방으로 확대되어 지방에 많은 학교를 건립하고, 연이어 1915년(大正, 4) 중앙에 불교중앙학림이, 1930년에 이르러서는 중앙불교전문학교 등이 변천되어 설립되고 있었다. 석전은 일찍이 1912년 불교고등학교 교장을 지내는가 하면 1926년에는 중앙에 강원을 설립할 것을 요청하는 열망에 의해 봉은사 소속 개운사내에 대원강원을 설립하고 강의를 맡았으며, 1929년에는 불교교육 최고기관인 불교연구원을 맡아 지도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승려의 교육문제에 대해서는 1925년경에 이르면 과거 열화와 같은 개화교육에 대한 반성과 함께 전통 강원의 교과내용에 대한 문제점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었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문제점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러한 와중 속에서 석전은 승려로써, 교육자로써 어떻게 승려교육을 이끌어갔던 것일까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석전 박한영의 청년교육에 대한 견해를 보면, 그의 청년 교육에 대한 그의 열의는 佛國少年說 -〈佛敎靑年에 바라는 期待〉에서 잘 나타난다.
세상 사람들이 불교는 老大한 敎요, 조선은 老敗의 불국이라. 춘진화비하고 일락종존하니 다시 나머지 기운이 있어 가히 소생할 것이며 다시 나머지 운이 있어 가히 회소할 것인가 하니 오호라. 우리 조선불교가 과연 老大함인가. 나는 그 말은 틀린것이라 하리라. 나의 심중 목중에 당당한 一少年이 있음이라. 무릇 사람이 늙은 자는 과거의 일을 생각하고 무릇 젊은 사람은 항상 장래의 일을 생각하나니......이제 세계가 새로 열리고 풍조가 극창하여 제종이 다투는 반와중에 당하여 비록 변혁이나 얻겠는가. 이제 신천이 아래를 덮고 신륜이 환발하고 신법령이 밝기가 일월과 같으니 돌아보건대 우리의 무리가 비록 少年이 되지 않을 수 있으랴......아, 희미한 일이라. 우리불교의 소년이여 장하도다. 우리 조선 승려의 소년이여, 금일에 대법을 革舊包新할 책임이 오로지 佛敎 少年의 두 어깨에 걸려있음이라. 소년이 문명하면 불법도 문명하고 소년이 힘이 강하면 불법도 힘이 강하고 소년이 진보하면 불법도 진보하고 소년이 豪健하면 불법도 호건하리니 밝은 해가 처음 솟아오름에 八極이 晃朗하고 황하가 한번 기울음에 만리가 왕양하고 잠룡이 騰 에 鱗爪가 양요하고 乳虎가 哮함에 위령이 진후하리니 장하도다, 우리 불교 소년이여. 아름답도다, 우리 불교 소년이여.71)
하여 지금의 세계는 계명의 시대이며 불교는 부활의 시대이므로, 일심의 노력 여하에 따라 점차 장대해질 수 있다 하였다. 즉 불교의 미래에 대한 기대를 젊은 청소년불자에게 걸고 있음을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1913년(大正, 2年)《해동불교》창간호의〈敎養徒弟는 紹隆三寶〉에서도,
어떤 것이 참 佛·法·僧인가. 마음이 정청한 것이 이 佛이요. 마음이 환하게 빛남이 이 법이요. 곳곳에 꺼리낌 없이 밝은 빛을 뿌림이 이 僧이라고 하니......이와같은즉 삼보는 참으로 위치가 없거늘 어떻게 이어 융성시키겠는가. 내가 菩提를 원만히 하여 돌아감에 얻을 바가 없는 것은 오직 증에서 상응하겠거니와 널리 방편문을 열어서 불법을 소융시키는 일은 처음 원인은 반드시 徒弟를 잘 길러서 교양을 쌓게 하는데 시작이라 하겠다...... 바라노니 오늘로부터 이후로는 摩頂하는 이유를 세 번 생각하고 무위삼보의 체를 지극히 연구하며 교체가 전진할 것을 관념하고 천하의 영재들을 힘써 살펴서 교도하고 양성하여 주면 불교를 위하여 생명을 내어놓고 헌신한 사람이 될 것이니 죄인이 되지 않아 다행하고 다행한 길이라고 할 수 있다.72)
라 하여 청년불교에 대한 희망과 영재교육·도제양성에 대한 당위성에 대해 역설하였다. 석전은 교계의 상황이 점점 쇠퇴하는 원인에 대해 첫째, 몸을 법계에 깃드리는 자들이 밖으로 머리 깎고 染衣는 입었으나 그 중심사상은 세속진의 속됨을 벗어남이 없고 가장 잘 하겠다고 규약지킨다는 납자라 하더라도 귀와 배부름을 으뜸으로 하기 때문이며 둘째, 색신을 보존하는데 급급하여 제자를 길러 불법을 소융할 인재를 기르는 공심이 없으며, 설사 도제를 양성하는 기구를 설립하여 번성케 한다 해도 사람을 의지하고 법은 의지치 않아서 재리에 허덕이는 역할에만 치중하니 비록 뛰어난 棟材라 하더라도 종단을 지도하는 이른바 간부급들의 전시물이 되어 견문학식의 진도가 투철치 못하게 된다고 말하였다. 때문에 지금 조선불교계에 사람이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니, 세계적 교학의 문호를 환히 열어 흠이 없게 함이 우리 불도들이 꼭 알아야 할 바이며, 구차히 몸만 유지할 생각만 하고 조사스님들의 아름다운 모범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을 간곡히 말하고 있다.73)
한편, 교육대상인 청년교육에 대한 열의와 함께 교육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교육체계 및 교육내용은 큰 논쟁의 핵심이었다. 교육체계 및 교육내용이 실제 교육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교육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였으나, 보통 - 중등 - 고등의 체계가 아직 자리잡지 못한 미흡한 시기였고 시험의 단계이므로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한 실정이었다. 白性郁의 경우, 승가교육의 현대화를 위해서 종래 전문강원은 가장 학술연구에 적당한 방법이므로 가급적 보존하고 자유로 맡겨 수의로 연구케 할 것이나, 조선 반도 2, 3곳에다 중등 정도 이상의 동물 및 식물학 지식과 약학 및 물리화학 등을 학습케하여 실생활상의 무식을 면하게 하고, 포교양성할 목적으로 중등이상의 방식으로 학술적 연구를 연습하여 심리학, 교육학, 반도불교사, 반도민족사, 세계종교사 등 이외 문학의 상식을 준비한 후 강원에서 2년 이상, 선방에서 1년 이상의 경력자로 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또 승려고시를 5종으로 나누어 치를 것을 제의하기도 하기도 하였다. 한편, 1918년 7월 일본유학에서 돌아오고 龍珠寺 강원의 강사를 지낸 李智光은 1920년〈佛敎敎育의 危機〉라는 글을 기고하여,
신라·고려·백제 시대의 각 고승이 旁通外學에 연구 三論이라 하였으며 혹 천문지리 혹은 산술 등에 능하였으며, 한결같이 宗乘敎育만 실시하여 사회지도자가 됨이 없었으며 布敎의 방법으로 학술을 겸하여 외국에 전도한 일이 적지 않는 등 사회문명에 공헌하였다......30本山 당국에서 교육기관을 중앙·지방으로 제정하였어도 그 실시가 불완전하며 중앙학림에 들어갈 기초학교되는 지방학교의 내용을 보면 실로 빈약하고 지방학림은 적어도 고등보통의 예비교육으로 조직해야만 한다......계급적으로 말하면 보통소학교를 졸업하고 지방학림 즉 중학교 정도의 보통학과에 宗·余乘을 가미한 학과를 졸업한 후 중앙학림에 들어가는 것이 그 순서요 신앙심을 굳게하여 종교의 진미를 맛보고자하여야 한다.74)
고 주장하였다. 즉 교육체계가 보통학교- 지방학림- 중앙학림으로 이어지는 연계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또한 분산된 힘을 결집하고 예산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聯合地方學林制의 실시를 강력히 주장하면서 '사람이 대사를 판결하려면 세계의 대세를 달관하고 대포부와 대영단이 있어야 천하에 어려움이 없는지라. 다만 하지 못할지언정 할 수 없다하여 단행치 아니하면 옳지 못하나니 內地(일본)佛敎는 宗旨가 다르고 宗派가 달라서 일반 宗制까지 같지 아니하지만 新大學會 발표 후 연합불교대학을 설립하려고 열중치 아니 하는가'라고 토로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지금 耶蘇敎는 조선에만 한하여서도 小·中·大 각 학교를 설치하여 布敎策, 또는 사회에 대한 의무를 행하고 外務는 불교의 활동이 축소할수록 자기의 기반이 견고하여 확대하여짐을 즐거워 아니 하는가'라고 하면서 만약 시기를 잃으면 불교의 일대 위기가 아니될까 우려를 금하지 못한다고 우려하였다.
한편, 그 당시 조선불교 교육사업을 보면 보통 - 고등 - 전문 등 단계화하여 계획성있게 교육기관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으니, 순서가 뒤 바뀌고 잘못 시행됨이 다시 유례가 있음을 보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비유컨대 제1, 제2층은 짓지 말고 3층집을 지어달라고 요구한 百喩經의 예와 같이, 조선불교의 교육시설은 실로 사람으로 하여금 분반케 함이 적지 않았다. 토대가 없는 건축처럼, 근원이 없는 행료처럼, 일시의 外華와 稱譽만 취하여 소위 중앙학림이라는 것을 설립한 감이 없지 않았다. 보통정도, 고등정도의 1층, 2층이 없이 오직 높은 제3층의 흔들리는 누각만이 돌연히 용출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 계후책이 없음에 地方學林이라는 즉, 고등정도의 학교를 본산에다 설립하게 됨에 따라 비로소 진루의 제2층이 성립되었지만 그것도 최하층의 보통정도의 시설이 아주 없는 까닭에 오히려 공중누각에 지나지 못하였다. 필경에 지방학림, 중앙학림이 모두 유지를 하지 못하고 水流雲空되어 안주의 한이 없지 않으니, 그 원인은 시대의 轟搖, 경제의 긴축, 종문의 분열 여러 가지 모두 이유 아님은 아니지만 본래부터 지반이 고정되지 못하고 입학의 자격자가 없었던 것이 제1원인이라 하겠다. 이러한 현상 아래 다음과 같은 제의가 있었다.
나는 이에 광언을 일진하고자 하니 만일 불교계에 채택이 된다면 나는 조선불교를 위하여 賀함을 마지 아니하련다. 그것은 從今으로 보성학교 계약의 제6조문과 같이 다시 甲 즉 전설립자에게 양도하고 그 경비를 옮겨서 불교전문학교를 설립하되 그 동일한 구내에 불교고등학교 또는 불교보통학교까지라도 겸설하여 먼저 고등학교를 개학케하며 남북선현하에 학교가 있는 각사찰의 상황을 精査하여 다소의 보조를 급여하여 불교고등학교를 4, 5처를 양의 설정하고 보통과는 각 자본산의 자임에 일임하여 전문 입학자 양성에 유감이 없게 하고 연후에 전문의 교문을 타개하여 래자를 초납하여야 사업의 순서도 도착이 없을 뿐 아니라 그 미래에 있어서도 다시 중앙학림의 覆轍을 피할가 하노라.75)
한편, 일찍이 1915년 중앙학림을 설립한 후, 1916년(大正, 5) 1월, 禪敎兩宗 30本山聯合事務所 제5회 총회에서 승려의 교육문제에 관한 사항을 결의하였으니, 中央學林에 기송하는 학생수를 체감하여 1등지에는 3인, 2등지· 3등지에는 2인, 4등지 이하는 1인씩으로 하되 단 永明·法興寺는 합하여 1인, 威鳳·祇林·成佛 3寺는 사찰의 형편에 의하여 특히 1916년도만 학생 기송을 면제하고 5·6등지의 각 사찰에는 학생 1인의 유학비 중 1/2을 감하여 3월 常置員會議時 학림 분배 중에서 감하기로 하였다. 또한 학생을 이와같이 보내지 못할 때는 매월 몇사람에 대금 6원씩을 징납케 하기로 하고, 단 위의 定額外에 더 보내는 학생은 이를 몇이라도 사절치 아니하기로 하였다. 學科에 대하여는 학칙에 의하되 단 華嚴은 3학년으로 나누어 1학년에는 懸談, 2학년에는 三賢, 3학년에는 十地로 敎授하며 楞伽經·五宗綱要·四敎儀·宗鏡錄 등은 등사판으로 인쇄하여 쓰게 하였으며, 地方學林은 각 사원 상황에 의하여 빠르고 느림을 불구하고 佛敎專門講院의 명칭을 변경하고 학과를 첨삭하여 地方學林으로 실시하기로 결의하였다. 즉, 다수 재래강원의 명칭을 지방학림으로 변경하여 운영하기로 하였던 것이다.76) 그 후 3월 第四回常置員會會議의 議論에서는 기송 인원수와 유학비를 감하는 문제에 대해 다시 논의하였다.77) 그러나 여전히 재래강원은 변경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음을 볼 수 있고, 뒤에서 언급하겠으나 1925년 경 이후에는 오히려 재래강원의 복구운동이 일어나게 됨을 볼 수 있다.
한편, 교과 개량 문제에 대하여 이지광은 중앙학림의 교과로 말하면 宗乘으로는 화엄·법화·능가·유마·염송·전정·오종강요 등이요. 그 외에 천태사교의·사분율·구사론 등 각종 綱要요. 史學으로는 조선종교사·동양불교사요, 종교로는 종교학·종교사·인도철학 및 인도종교사요, 哲學으로는 서양철학·심리학·윤리학·교육학·논리학 등이며, 語學으로는 국어, 한문으로는 주역·장자·중용·논어·포교법·체조 등이니 이것은 불완전하나마 專門敎苑에 그다지 부끄럽지 않고 內地 각 종교대학에 비교하여도 그다지 손색이 없고 거의 대학으로 인정할만 하다고 말하면서 지방학교 교과개량을 주장하였다.
금번 5개조의 학생요구중 敎科改良문제는 중앙학림 개량문제가 아니라 지방학교 개량문제를 倒錯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 요구중 개량과목은 대개 중학교 과정을 중앙학림에 設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본래 30본산 당국에서 기정사업으로써 실현하는 지방학림을 고등보통학교 즉 중학교 정도로 개량하는 일이다. 이에 대하여 나의 관견으로는 지방학림 교과에 宗乘으로 沙彌科·四集·四敎, 余乘으로 俱舍大綱, 수신에 修身要旨 . 倫理學一般, 어학으로 국어·조선어·영어, 사학으로는 本邦史·동양사·서양사·이조불교사, 지리로는 本邦地理·외국지리·地文學, 수학으로 산술·대수·기하·삼각, 博物로는 광물·식물·생리·위생 및 동물·물리 . 화학·습자·圖畵(미술)·체조 등으로 하고 중앙학림에는 지금 현행 과정에 2·3과목을 첨삭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78)
라 하였다. 1917년 전국 사찰에는 보통학교 10개소(290명), 지방학림 10개소(222명), 강원25개소(542)가 설립되어 근대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다.79) 그리고 1915년 제정된 보통학교와 지방학림의 교과과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보통학교(4년제)
修身(各 2時間) 國語(각10시간)
朝鮮語·漢文(6·6·4·4 時間) 算術(각6시간)
圖畵·手工(3·3·2·2時間) 理科(0·0·2·2時間)
農業初步(0·0·2·3時間) 唱歌·體操(各3時間)
지방학림(3년제)
修身(各4時間) 國語(各3時間)
戒律學(各6時間: 四分律3時間, 梵網經3時間)
佛敎史學(各10時間: 傳燈錄3時間, 高僧傳3時間, 佛敎史4時間)
定慧學(各7時間: 書狀, 都序, 節要, 禪要, 永嘉集, 楞伽經3時間,
金剛經, 起信論, 楞嚴經, 圓覺經3時間)
또한, 琴巴는〈論敎科改良〉에서 專門學科의 교과서는 종례 관례에 의하여 초등의 四集科와 중등의 四敎科, 고등의 大敎科는 각 본산 사법에 승인되었으니 그 原科의 경·논을 개량함은 옳지 않고 그 과목 아래에 枝蔓과 贅言을 刪定하여 敎眼을 쇄신케 함을 말하고 있다. 사교과의 경우를 예로 말하면 그 경·론의 대단은 네 과목이어늘 그 경·논에 따른 疏·抄가 매우 많으며 그 소·초에 따른 私記가 매우 많아 종일토록 迷本逐末니 經文을 해석함도 알지 못하커늘 하물며 經中의 뜻이며 나아가 뜻 외의 妙旨를 어찌 알겠느냐고 한탄하면서,
나의 일견은 그 原科下에 若疏若抄를 簡明易知者로 精選하며 경론 대지를 소통함으로 主觀을 지으며 東洋佛敎書館에 참고서적을 수집하며 各科에 一家 疏若抄로 규정하고 또는 보통 學海에 과학적·철학적 교수 방법을 參用하여 이로써 學籍이 무량하면 他日에 敎眼이 通徹한 이상에는 潭岳譚屑은 말고 復下한 裨海·雜俎라도 廣學增智에 無助는 不爲하리라. 淸 ·圭山·長水諸公의 疏若抄는 隨意科 중에 참고서라. 또 舊先生에게 執贄도 可也오 聽講도 亦可하리라. 현대에 적합한 敎務는 우리 청년의 뇌수에다 精簡한 진리와 섭생의 덕능을 充分光大함에 불과할지니 矛盾見持하신 兄弟家는 此外에 放彩高論이 有하시면 諄諄示誨하심을 統希하노라.80)
라 하여 각과에 一家의 소·초를 정하고 과학적·철학적 교수방법을 참고로 쓰면 좋지 않겠는냐고 하였다. 한편, 한영은 교과서 개량의 문제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典籍 刊行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현세계의 교당 학종이 다투어 난립하는 것을 눈·귀가 있는 자라면 보고 들을 것이며, 그 典籍이 산해숭심과 같으며 정인화장은 사람들의 눈을 艶悅케 함이 날로 깊게 하건만 유독 우리나라 불교계는 羲黃 이전 고관방을 의연히 상수함으로 수각송창에 홍일이 三竿이로되 수수한 ......대개 佛敎維新의 방법이 하나로 족함이 아니로대 원길무구자는 典籍刊行이 무선지요한 문명세정에 중허하는 바......대저 칠자벽본과 패엽경문이 고칙고이나 이제 교과도서에 적용하며 과두충전과 서미범획이 진즉진이나 이제 청년이해에 편리한가.81)
라 하고 있다. 이것은 교과개량 문제 못지않게 현 시대에 맞고 이해에 편리한 전적의 간행을 서두를 것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교육체계의 문제 및 교과개량의 문제 등과 함께 유학생 파견의 문제도 승려교육의 문제점으로 대두되었다. 1919년 3·1운동을 거치면서 1920년대 불교계의 유학열은 대단하여 유학생의 수는 급속히 증가하였다. 이는 3·1운동 이후 민족적 자각에 따른 인재양성을 목표로 한 교육열의 결과이기도 하였다. 또한 일제가 3·1운동 이후 통치방침을 '文化政治'로 전환시키면서 교육제도를 개정하였는데 그 중에는 종래의〈朝鮮總督府留學生規定〉을 약소화 시켜〈在內地官費留學生〉을 제정, 관비 및 사비 유학생에 대한 엄격한 자격조건이 훨씬 완화된 것이었다. 또한 사비 유학생에 대하여는 1920년 종래 복잡한 유학 수속을 폐지하였고 1922년에는 조선인의 일본에 대한 渡航制限이 철폐되어 사실상 일본 유학이 자유화되었다.82)
이러한 결과 1920년대 들어 일본 유학생의 수는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것은 재일 유학생 수의 증가 추이를 보면 잘 알 수 있다.(表, 5) 학생수가 증가함에 따라 자연 유학생 조직 및 단체가 등장하니 그 결과 일본지역 최초의 학우회로서 조선불교유학생학우회가 1921년 조직되었다. 1920년대 불교계의 유학열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는〈朝鮮佛敎의 敎育方針을 確定하라〉라는 글에서도 엿볼 수 있지만,83) 당시 각 본산에서 경쟁적으로 유학생을 파견하였던 것은 그들에게 미래 불교의 중흥과 대중화의 역군이 되어달라는 기대가 팽배하였던 까닭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박한영도 예외가 아니었으니〈送明湜沙彌渡日本〉에서도 그 기대를 엿볼 수 있다.84)
日帝時代 在日佛敎留學生 數의 推移 (表, 5)85)
연대 |
1910년전반 |
1910년후반 |
1920년전반 |
1920년후반 |
1930년전반 |
1930년후반 |
1940년전반 |
유학생수 |
14명 |
5∼12명 |
62명(이상) |
64명(이상) |
32명(이상) |
117명(이상) |
69명(이상) |
그런데 이 때 많은 승려가 불교계 대학 뿐만 아니라 일반대학에도 많은 유학을 갔다. 그리하여 불교와 관련된 불교학과, 종교학과, 철학과 이외에도 법학과, 영문과, 정경과 등과 같은 전혀 불교와 관련없는 분야에 진학하였던 유학생도 많았다.86) 이들이 승려의 신분으로 불교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적은 학교와 학과를 선택한 요인으로는 만해가 역설하였던 보통 학문의 필요성에서도 찾을 수 있다.87) 또한 승려 유학이 점증됨에 따라 귀국후의 취직문제를 고려하여 취직이 쉬운 학과를 선택하였을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 애당초 사찰에서 지정했던 학교를 임의로 변경하여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일제시대 불교유학생은 선택된 인재로서 자부심과 함께 교단과 출신 사찰에 대한 큰 기대를 안고 있었다. 그런데 이와같은 유학생들이 유학 도중 혹은 귀국 후 결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대처가 일반적인 일본불교의 영향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불교와 관련이 적은 학과의 선택은 교계 보수적 인사들에게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이에따라 유학생들이 불교 이외의 학문을 하면 그 이유를 막론하고 사찰로부터 학비를 거절 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을 대해〈敎門子弟進路〉에서는,
東京 京都에서 2, 3년 유학하나 그 수득하는 바는 僧道에 있지 아니하고 그 학습하는 것이 법제학, 사회학이니 함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敎門을 위하여 비탄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교문의 내지 유학생의 수득하였다는 법제학이던지 사회학이던지 2, 3년의 유학으로는 그 入門의 역을 달하지 못할 것인즉 결코 그 심오한 것을 수득치 못할 것이다. 설사 희유한 재능있는 자로서 그것을 확실히 수득한다 할지라도 차등의 학업은 교문자제에게는 外道이며 무용한 학업이다...법제, 경제 사회학을 학습코져 하려면 마땅히 還俗하여 그것에 전력할 것이다......敎門의 子弟여, 원하노니 교계의 과거를 생각하고 또 그 현상을 살피고 다시 백년의 장래를 위하여 심사하고 감히 오류되지 말고 자기의 천직에 終始하도록 지금부터 깊이 반성하기를 바란다. 교계의 부흥발전은 전혀 현대 교계 자제의 향배여하에 係在한 것이 아닌가. 그것을 생각하면 가벼히 경주하지 말고 절실히 자기의 天職에 전념하여 粉骨의 지성으로써 正道에 매진하여 활동할 것이다.88)
라고 하면서 승려의 신분으로 보통학을 전공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즉 조선불교의 도제유학을 관찰하면 불교교육의 목적과 이상에 위반되는 통폐가 자못 많았으니, 그것은 도제유학에 대하여 당시 주지 혹은 그 사승이 일정한 방침과 지도가 없이 함부로 파견하고 信心이 견고하지 못한 일부 유학생은 각종 학교에 임의로 입학하여 어떤 자는 불교와 하등의 인연도 없는 학과를 공부하는 일이 적지 않게 됨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급기야는 대처의 상태에 이르게 되고 이와같은 상태가 계속되면 사원의 재산만 소비되고 결국은 속인을 양성함에 불과하게 되는 우려를 낳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은 형편은 재경 유학생들에게도 해당이 되는 사항이었다. 이에 대하여 中央佛敎學友會의 일원인 周東元은〈全朝鮮 佛敎徒諸師의 앞에 고백하나이다〉에서 이러한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그 원인을 분석하였다. 그는 己未運動 이후에 교육열이 전 조선을 풍미할 때 불교계의 유학생은 경성의 유학생만 하여도 2백이상으로 계산되었으니 이제 150-60명 정도의 成業者를 내었어야 하건만 오히려 4∼5년 뒤에는 경성에 유학생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蕭條한 모양이니 150∼60여수가 다 중도에 그쳤다 하며, 이러한 불교의 교육현상에 대해 그 원인이 될만한 것을 스스로 몇가지 지적하였다. 첫째, 自覺이 被動的이었다. 둘째, 개인을 위하는 誠心이 교를 위하는 정성만 못함이다. 왕왕히 자기의 家庭事로써 법사의 학업을 중도에 廢케 하는 일을 볼 수 있나니 이는 법을 희생하여 개인의 속된 향락을 꾀함이 아니겠는가. 셋째, 유학생 선발에 주의가 주도치 못하였다. 적어도 교를 위하여 棟梁을 기를 때에는 학생 선택의 기준에 신중해야 한다면서 위기에 처한 조선 불교계의 운명은 무엇보다도 진정한 종교가, 그러면서도 시대와 사조에 밝은 建設的 인물에게 달렸으니 소수라도 참된 인격자를 요구할 것을 말하였다.89) 그리하여 기존의〈在京佛敎遊學生學友會〉를 새로운 각오로 조직한 것이〈中央佛敎學友會〉의 주요한 뜻이었다.90)이 뜻을 받아들여 석전은 이 학우회의 고문 직을 받아들이기도 하였다.91)
한편, 승려의 보통학 전공에 대한 유학생 당사자들의 입장은 달랐다. 승려도 보통학문을 익혀야 한다는 것은 이미 불교개혁 논의에서 제기되었던 것이었다. 승려가 과연 본분을 잃지 않고 불교만을 공부해야 하는가 아니면 개화된 사회를 이끌기 위하여 일반학문을 전공해야 하는가92)에 대한 것은 어느 한쪽만의 극단적인 주장에 머물러서는 안되는 것이다. 각 방면의 지식을 모두 익혀 통달하여야 하는 것이다. 석전 박한영의 경우에도 당시 불교계의 앞날에 대하여 기대한 것을 보면,
당시 불가의 노장들이 대체로 보편적으로 지식이 부족하고 견문이 고루할 수 밖에 없었던 舊韓末에 성장했으므로 학식이 부족하고, 학식이 있더라도 오랜 은둔생활로 말미암아 세상의 현실보다는 성품을 닦는 것에만 힘썼으나 장래 불교계를 이끌어갈 사람은 청년계층이니, 이들은 일반사회 청년과 그 立命處가 다르고 책임이 무거우므로 그들과 배움을 같이 하더라도 무엇보다도 우선 불교의 진리와 덕성을 익혀 내면적으로 흔들림이 없이 하여야 하며 또한 동서고금을 통한 모둔 학설과 이치를 두루 찾고 익혀 깊은 경지에 올라야 하니, 內典 뿐 아니라 外典도 익힐 것을 당부하노라.93)
라 하고 있으니, 석전 역시 불교계 일반을 위하여서는 新·舊學을 겸전한 진정한 인격자를 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는 결국 조선불교 전반적인 교육방침의 확정을 촉구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전통강원의 복원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먼저 五峯山人은〈朝鮮佛敎의 敎育方針을 確定하라〉에서,
만약 期因할 것 같으면 포교당을 건축하는 것보다 또 사회사업을 시작하는 것보다 무엇보다도 급무가 되고 중요한 문제는 조선불교의 敎育方針을 革新하여 確定할 것이 아닌가. 실로 조선불교의 盛刷興亡이 전혀 교육방침의 확정여부에 있다 할지라도 과언이 아니다......요컨대 朝鮮佛敎 30本山에서는 재단법인에 出資를 하루라도 신속히 완료하여 재단을 완성한 후에는 조선불교의 敎育基礎를 禪敎兩宗에 확립하여 교과연구의 기관으로는 시대에 적응한 佛敎專門學校 또는 佛敎大學을 중앙에 설치하고 禪學修行의 기관으로는 재래의 선방을 개선하여 모범적 전문도량을 상당한 장소에 5, 6개소를 지정할 것이다. 이 때에 교육방침의 방계로는 현금 각본산에서 이미 설치한 講堂制度도 현대문화에 적응하도록 개선할 것과 또 留學 方針에 대하여 재질의 선택과 학과의 지정과 차에 부속되는 조건을 제정하여야 할 것이다. 무릇 근본이 견고치 못하고 지엽이 무성할 리가 없는 것과 같이 불교의 근본되는 宗門敎育의 方針이 확정되지 못하고 불교의 발전을 기대할 수는 만무할 것이다.94)
라 하여 조선불교의 교육기초가 선·교 양종이니만큼 교학연구 기관으로 불교전문학교, 또는 불교대학을 중앙에 설치하고 선학 수행 기관으로 재래 선방을 개선하여 전문도량을 설치할 것과 본산에 설치되어 있는 강원을 현대에 맞게 개선할 것, 그리고 유학에 대하여서는 재질의 선택과 학과의 지정 등을 제정할 것 등을 촉구하였던 것이다.
(2)石顚의 傳統講院의 改革
한국 불교계의 전통적인 교육기관은 講院과 禪院이었다. 그러나 신교육에 대한 열망으로 1906년 명진학교가 설립됨을 시작으로 1915년대에 접어들면서 中央學林이 설립되면서 신교육 우선의 정책으로 인하여 기존 전통강원은 地方學林으로 전환되었다. 이것은 근대 교육제도가 도입됨에 따라 전통강원의 실제 효과상의 문제가 자주 거론되었던 까닭이니 불교계의 신교육 정책으로 강원은 폐교되면서 이른바 舊學중심의 교학은 소외되었던 것이다.95) 그러나 여전히 전통강원은 존재하고 있었으며, 전통강원 교육과 근대교육 간의 갈등적 양상이 나타나니 192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신학문에 대한 비판과 유학생들의 문제 등이 거론되면서 강원이 다시 복구되는 등 불교교육 제도 내에서 강원중시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1920∼30년대 근대학교의 보통학의 확산과 더불어 같은 시기에 수반되었다. 특히 釋宗圓은 1925년〈敎學硏究를 振興하라〉에서 근대학교의 획일성을 비판하면서 불교전문학교와 단과대학 설립이 필요함과 동시에 전문강원의 필요도 간과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으며, 朴勝周는〈專門講院 復舊에 취하야〉에서 당시 조선불교의 생명을 이어온 것은 전문강원에 있다고 하여 강원복구를 부르짖었다.
종래 교육연구 기관이었던 강원도 전폐하고 소위 新敎育이니 무엇이니하다가 멧돗도 못 잡고 집돗까지 잃게 되었다는 것이 진상에 가까운 비유가 아닐까?......교학 진흥에 대해서는 그 방법으로 양종 연구기관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교학의 과학적 비판적 연구기관으로 불교전문학교 또는 단과대학을 설치할 것과 교학의 종교적 교권적 연구기관으로 각처 대사원의 專門講院을 復興하라는 의미이다.96)
外面을 관찰하여서는 완연히 新佛敎國을 건설하는 듯한 감이 십분 충일한 기분을 띄였었다. 그러나 실질에 있어서는 하등 취할 만한 성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오직 발견하는 것이 있다하면 內部頹廢, 綱紀融解 뿐인 것이다. 금일까지의 조선불교가 그 생명을 잃지 않았다고 하면 그것은 講伯과 같은 주인공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금후의 조선불교가 구면목을 유지하며 신광명을 발휘하고자 할진댄 무엇보다도 강백과 같은 학자를 양성하는 專門講院의 復舊가 오직 최전의 방책이다.97)
즉, 그들이 주장하는 욧점은 불교전문학교 또는 단과대학을 설치할 것과 함께 전문강원을 부흥할 것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두 교육기관의 장·단점을 명확히 인식하여 신교육의 중시에 못지 않게 승려교육이라는 특수조건에 따른 전통교육의 가치를 재인식한 것에 따른 요구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1928년 전국 강원 학인들의 朝鮮佛敎學人大會가 개최되었다. 1928년 3월 14일∼17일간 覺皇寺에서 조선불교학인대회를 개최하였던 학인들은 당시 불교계를 개탄하면서 그를 타개하기 위한 대안으로 시대에 적응한 교화방법과 불교교육 제도의 일치와 확립을 주장하였다. 당시 학인들은 강원출신으로 先敎後禪의 입장에서 강원교육제도의 개선을 강력히 내세웠다. 그 교육제도의 근간은 초등과 3년, 중등과 3년, 고등과 4년의 틀을 유지하면서 그 교육내용에 있어서는 戒·定·慧의 삼학의 연구와 교화방식을 시대에 적응케 할 수 있는 과목들을 새롭게 제시하였다. 그리고 교육기관의 위치에 대해서는 고등강원 1개소를 경성에, 중등강원 6개소 이상을 지방에, 초등강원은 중등강원 부설 또는 그 이외 사원에 설치키로 하였던 것이다. 당시 교단의 대응은 강원제도 개정 심의위원회로 귀결되었으며, 이 때 석전은 상무위원을 맡았다.98) 같은 해 각황사에서 1925년 이래 선·교 양종 중앙 총무원과 합쳐 출발한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의 제6회 평의원 총회가 열리니 학인들은 불교고등강원을 설립 요구와 그에 따른 고등강원의 설치를 위한 예산을 요청하였다.99)
한편, 1929년 1월 3일∼5일 각황사에서 朝鮮佛敎 禪·敎兩宗 僧侶大會가 개최되었다.100) 이 대회에서는 불교계의 宗憲 제정 및 中央敎務院이 출범하는 등 불교계 통일운동에 큰 성과를 이룩하였다. 학인들은 1929년 3월 15일에 제2차 학인대회를 열고,101)강원제도 개선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는 등 노력을 지속하였다. 그런데 중앙교무원의 제7회 평의원회의가 제1회 종회가 종료된 직후인 1929년 3월 26일∼28일 각황사에서 다시 개최되었는데 학인들은 중앙의 內典 硏究科의 설치를 요구하니, 그 요구는 교무원 평의원 총회에서 기꺼이 수용되었다.102) 그리하여 1929년 4월 교무원으로부터 開運寺에 高等硏究院을 설립하고 강원을 마친 10인을 양성키로 한 것이다. 이 때 학교교장으로는 석전 박한영이었다. 이 고등 연구원은 그 이후 '中央硏究院'으로 호칭되었다. 그러므로 1929년 4월 이후 학인들의 건의와 교무원의 지원으로 개운사 강원 내 大圓庵에 학인들이 주장하였던 고등강원이라는 연구원이 발족하였던 것이다.
경성에 소재한 개운사 산내 암자인 대원암은 일찍이 1845년 祐祈스님이 창건하였는데 조선불교계에 독보적인 石顚 朴漢永을 맞아들여 1926년 10월 불교전문강원을 개설, 講壇에 主盟이 되어 開講하였다. 여기에 當寺 安月松 및 靑龍寺 주지 비구니 洪祥根 및 奉先寺 전 주지 洪月初의 재원희사로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103) 그리하여 開運寺 講堂에서는 1928년 11月에 修了式을 擧行하였다.104) 이러한 전통의 개운사 대원암강원은 1929년 4월 다시 중앙연구원을 개설하여 내전 연구기관을 설치하였던 것이다. 이 곳에서는 조선어 강좌를 하기도 하였다.105) 개운사 대원강원은 그 이후 김경응, 제위금, 봉선사 주지 박범화 및 중앙교무원의 후원금과 석전의 불전교장 연수당금 등으로 그 경제적 기반이 공고하게 되어 장차 京城을 중심으로 한 불교전문 연구의 교육기관이 확립되니 佛敎學人에 대하여 이러한 德蔭이 다시 없게 된 것이다. 개운사 강원이 이만큼 기초가 서게 됨은 개운사 대중의 열심과 석전의 희생적 노력에 의한 것이므로 봉은사 본말사간에서는 이에 대한 칭송이 자자하였다.106) 석전은 이 곳 개운사 대원강원에서 1926년 이래 20여년간을 머물면서 후학지도를 하였다. 불교계는 개화교육의 열풍이 불어 명진학교를 시작으로 각처에 보통학교를 설립하였고 이 후 보통학교 - 지방학림 - 중앙학림의 연계를 가지는 교육체계를 마련하게 되었는데 불교중앙학림 위에 다시 불교 내전을 전공하는, 지금으로 말하면 대학원 과정에 해당하는 최고 불교 연구 과정의 '中央硏究院'을 두게 되기에 이르게 되니 그 담당자는 석전 박한영이었던 것이다.107) 이것은 석전이 불교교육 개혁의 핵심에 항상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석전은 일찍이 1912년에 명진학교의 후신인 불교고등학교 교장에 취임하였으며, 1912년 45세에는 불교고등강숙이 건립되었을 때 숙사로 있었으며, 1915년 47세에는 중앙학림에 강의를 맡아 후학지도에 열성을 보이었다. 그러한 그가 1926년 중앙에 대원강원에 강의를 맡고 다시 불교 최고의 교육기관인 불교연구원의 교장이 된 것이다. 한영이 강의를 맡아오던 불교중앙학림은 이 후 1925년 불교전수학교로, 다시 1930년에는 중앙불교전문학교로 발전하였으며 1932. 11월 석전은 교장으로 취임하기도 하는데108) 중앙불전은 이 후 혜화전문학교를 거쳐 현재의 동국대학교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중앙학림이 이와같이 변화하게 된 원인은 여러가지를 들 수 있으나, 중앙에 현대식의 불교전문학교의 필요성에 따른 것과, 중복되는 강원교육과의 차별성을 갖기 위해 자연 방향을 바꾸게 된 것이라고 하겠다. 석전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승려교육을 위하여 명진학교의 후신인 불교전문학교에 취임하는가 하면 1912년에는《조선불교월보》에, 1913년 11월 이후는 주로《해동불교》를 통하여 승려교육의 개혁과 개화를 간곡히 부르짖었다. 그런가 하면 불교중앙학림에 강의를 맡아 후배교육, 도제양성에 헌신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중앙의 대원강당에 초청되고 다시 불교연구원이 개원사에 설치된 이후에는 전통교육쪽에 종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석전은 성격이 상이한 두종류의 교육기관에 두루 종사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석전이 內·外典을 함께 중시하고 新·舊學을 두루 겸전할 때 진정한 인격자가 되고 시대가 요청하는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부르짖던 것과 같은 궤의 선상에서 이해되어진다. 이것은 석전의 원융무애한 사상과 실천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만년에 많은 시간의 대부분을 중앙의 강원교육 쪽에 할애하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이 신교육 쪽보다 전통교육 쪽의 교육을 받고 성장한 배경도 그 이유 중에 그 하나이겠으나, 승려교육에 있어서 남다른 그의 철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승려교육'이라는 특수성에 비추어 볼 때, 승려에게 있어서 내전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에서도 넉넉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이후 강원제도 개선을 위한 노력은 1930년 3월 23일∼24일 개최되었던 제2회 종회에서 건의서를 제출하는 등 지속되었다. 그런 가운데 종회에서는 조선불교선교양종의 교육법이 제정되어 통과되니 교육기관은 강원, 선원, 전문학교, 연구원으로 설정하였다. 이러한 기본구도하에서 강원은 본 선·교 양종 승려의 宗乘과 余乘을 교수하여 혜학을 증진케 하는 것으로서 정하면서 강원의 규정은 별도로 정한다고 하였다. 전문학교는 당시 中央佛傳을 전제로 상정한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연구원은 강원 및 전문학교의 졸업자가 불교학의 정수를 연구하는 最高學部로 설정하였다. 이러한 교육법 안에 연구원은 강원 및 전문학교 출신자가 불교학을 연구한다는 측면에서 최고학부이다.109) 종회에서의 이러한 결정은 그 이전보다 강원의 교육제도에 대해 진전된 것이었다. 이 후 1931년 3월 제3회종회에서 강원교육제도에 대한 구체적인 토론이 전개되었다. 과거 학인대회시 학인들이 주장하였던 강원제도와 관련된 제도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기존의 조선불교청년회는 이를 해체하고 1931년 3월 23∼24일 창립대회를 걸쳐 정식으로 朝鮮佛敎靑年總同盟을 발족하였는데, 그 창립대회에서 불교계 전반에 관한 문제 12건에 대한 결의 사항을 정하였다.110) 그 결의사항에는 '강원교육 통일 촉진의 건'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총동맹에서는 제3회 종회에 강원 교육개선 촉진의 문제를 상정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한편, 석전의 문하에서 대교를 마치고 교학을 연구하던 鐵雲 趙宗鉉은 1932년 강원교육과 그 제도개선을 내놓았다. 그 개혁안의 요약을 보면,
1. 사집(초등)과 교리의 난해함부터 대뜸 인식케 한다. 書狀과 禪要는 조사의 공안을 편집한 것이다. 禪門拈頌 볼 정도자에 게 학득케 해야 적당하다.(고등졸업자 정도 可)
都序와 節要도 고등과 졸업정도에게 선교의 비판서적으로 섭 렵케 해야 한다.
2. 사교(중등)과 疏, 抄, 記 즉 楞嚴戒環疏, 起信賢首疏, 般若五家 解와 圓覺圭峰疏 등은 학인정도 이상의 교과로 벅찬 것이 다.
3. 私記는 眞價의 正解이지만 연구생 및 강사에게나 참구의 자 료로 한하여 두어야 한다.
4. 論講制는 학도의 근기에 맞지 않다.111) 이는 서로 了悟解得한 사람의 분상에서 행할 바이요, 초기로서 訓釋에도 부족한 학 력을가지고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5. 問講도 논강제와 마찬가지로 초학을 제접하는 교수방식에 맞 지 않다. 이도 硏究院의 교수방식으로 채용하는 것이 좋을 것 이다.
6. 한 강사로서 많은 科를 교수하는 것이 불가하다.
7. 교과서 개편- 현대에 적응한 敎育策으로써 內典 外典을 반 드시 必修科로 규정하여야 할 것이다.
다음과 같이 三科에 分하여 論하였다.
+-- 1 三合文(初心 . 發心 . 自警)
+-- 2 佛祖三經(四十二章經 佛遺敎經 大圓 警責文)
+-- 內典 --+-- 3 八大人覺經
初等科 --+ +-- 4 釋迦如來成道記
| +-- 5 禪林寶訓
| +-- 楞嚴經文
+-- 外典 ----- 普校 程度에 限
+-- 1 楞嚴經纂註(眞界疏 二本)
+-- 2 八識規矩直解(智旭疏 一本)
+-- 內典 --+-- 3 因明論直解(智旭疏 一本)
| +-- 4 起信論纂註(眞界疏 一本)
中等科 --+ +-- 5 金剛經宗通(鳳儀疏 二本)
| +-- 百法論直解(智旭疏 一本)
| +-- 圓覺經近釋(通潤疏 二본)
| +-- 圓覺玄談精選(朴漢永先生著 「依圭峯 疏 」
| +-- 朝鮮及中國佛敎史
+-- 外典 ----- 高普校 程度에 限
+-- 1 華嚴玄談(自天至宙 六本 淸凉疏抄)
+-- 2 華嚴三賢(自日至秋 十三本 同疏)
+-- 內典 --+-- 3 俱舍論
| +-- 4 唯識論直解(智旭疏 一本)
高等科 --+ +-- 5 華嚴十地(自麗至闕 十本 淸凉疏抄)
| +-- 拈頌選話(朴漢永先生著 一本)
| +-- 書狀
| +-- 都序
| +-- 印度及日本佛敎史
+-- 外典 ----- 專門校 程度에 限
8. 교수방법
①내·외전 강사를 다수로 하고 각과를 專任敎授케 하여야 한 다.
②내전을 재래와 같은 식으로 단과로 계체와 차제를 밟을 것이 아니라, 해당과에 한하여는 시간과 학과를 균등히 배정하야 교수하여야 한다.
③論問講制를 폐하고 그 시간을 더 이용하여 漆板敎授로 하여 야 한다.
④시험제도를 실시하여 학기, 학년 중에 엄정히 시험성적에 조 준하여 진급을 시켜야 한다.112)
조종현은 개혁안에서 編科中에 外典을 세론치 아니하고 단지 필요한 학과에 한해서 채용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아직 외전에 대한 실험과 검증을 교육 현장에서 검증받지 못한 관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어진다. 그러나 내전안에 인도·중국·한국불교사에 대한 과목을 포함시킨 것은 주목되는 것이다. 이 개정안의 근본정신은 불교를 상식적으로 교수하는 강원교육제도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러므로써 초기 佛學者의 정도- 즉 초등과에 대하야 더욱 周密한 마음을 둔 것이었다. 그는 講院敎育은 승려의 보통교육, 의무교육 기관으로 할 것이요, 佛敎最高學府는 전문적인 硏究院이라야 마땅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종래의 강원제도의 개선에 다소 관심있으신 분이면 긍정 또는 비판이 있으려니와 明眼講師 利根學人에게 무슨 구구한 설명이 필요하겠느냐고 반문하였다. 이러한 개혁안이 비록 당시 학인의 신분이었던 조종현의 의견이였으나, 그가 학업하는 곳이 석전 한영의 문하인 것을 생각한다면, 석전이 맡고 있던 대원강원과 중앙연구원이 어떠한 교과내용과 교육방법을 가지고 운영되었는가를 충분히 짐작케 한다. 특히 이 개혁안은 당시 제기되었던 문제점을 다수 수용하고 있으며, 상당히 합리적·진보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후일 한국의 名士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석전의 문하였던 사실에서도 입증되는 것이라 하겠다. 즉, 선·교를 겸한 고승이었고 당시 대석학인 그는 많은 제자를 거느렸으니, 雲起· 淸潭淳浩 . 耘虛龍夏 . 李光洙 . 辛石汀 . 趙芝薰·徐廷柱 등은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물들로 근대 한국의 최고 지성이라 할 만한 사람들이다. 그 외에 재가제자로는 金達鎭, 金魚水 등을 꼽을 수 있는 것이다.
반면 김창해, 허영호 등은 현실사회에서 진보된 두뇌의 소유자를 강원에 넣어 천년 이전의 인물로 주작하려 하며, 현대에 호흡하는 인간으로 하여금 천년 이전의 고인으로 복귀시키려 한다고 강원교육을 비판하기도 하였다.113) 이러한 논의들은 근본적으로 강원제도가 전혀 개선됨이 없음과 교과의 개편을 문제점으로 지적하는 것이었다.114)《佛敎》誌도 조선불교학인대회를 보고 학인대회의 성과를 토대로 강원제도와 그 교과과정의 개혁을 주장하는 논설을 싣고 있다. 즉, ①강원제도에 대하여는 수십종이 되는 교과목을 강사 1인이 전담 교수한다는 것은 불가하므로 마치 학교에 보통·고등·전문·대학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강원도 사집·사교로 분하던지 전 조선에 대교강원은 1·2개소, 사교강원은 5·6개소, 사집강원은 각 본산마다 사미과는 각 사원마다 정하자. ②교과서에 대해서는 화엄은 淸凉疏, 원각은 涵虛疏, 금강경은 함허의 五家解, 능엄은 戒環疏 혹은 長水義解, 기신은 元曉疏·別記를 쓰고 사집 중에는 도서·절요만을 쓰고 선요·서장은 폐지하고 고려 無依子(眞覺國師)의 법어를 쓰며, 치문은 조선 古祖師의 遺著 또는 조선의 명작을 選集하여 대용케 하고, 초발심을 배우기 전 한용운의《佛敎漢文讀文》 4卷을 읽히는 것이 좋으며 佛敎歷史를 강원 교과서에 넣을 것을 주장하였다.115)
어쨋튼 전체적으로 종합하여 볼 때 전통강원 개혁의 주된 초점은 첫째, 초학자에게 너무 어려운 과목을 부과하고 많은 과목수에 비한 강사수가 부족하다는 것, 둘째, 강원과 고등전문기관과의 연계부족, 셋째, 疏· 에 매달려 훈고학적 풍토를 벗어나지 못하고 직접 경전을 다루지 않는 것. 넷째, 조선승려 저술의 과목을 등한시하고 조선 역사를 소홀히 한다는 것, 다섯째, 근대 보통학을 겸비해야 한다는 것, 여섯째, 論講制와 問講制가 자유로운 토론 방식으로 전통강원의 장점으로 살려야 할 바이나 아무런 지식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논강제라는 것은 초학자에 불가능하다는 것 등에 중점적으로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일찍부터 여러 사람들에게 논의되어왔던 것이었다.
한편, 조종현이 내놓은 개혁안에 內典의 내용 중에 佛敎史를 넣고 있는 것은 주목되는 일이라고 하겠다. 즉 조선·중국·인도 및 일본불교사를 넣은 것을 말함이니, 이 안에는 실제로《傳燈錄》·《高僧傳》등을 포함하여 말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당시 승려의 역사인식·시대인식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판단되어지는 이유라 하겠다. 또한 대원강원 안에서 이러한 과목이 석전에 의해 교수되었을 것임은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박한영은 일찍이 최남선, 정인보 등과 함께 조선의 강산을 유력하면서 조선의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崔南善은 석림시초의 跋文에서 그가 전문가에 손색없는 조예를 쌓기도 하였다고 술회하고 있으니 이것은 그러한 사실을 반증한다 하겠다. 즉, 崔南善은〈石顚詩 跋〉을 쓰면서
스님은 故事에 깊은 조예며 통철한 식견으로 내경과 외전을 꿰뚫어보신 분인데, 외람되게도 나와같은 사람을 말벗으로 여겨주는 영광을 얻었다...... 어지러운 시기를 만나 불법 또한 쇠퇴되고 심지어는 권력을 배경으로 이익만을 추구하여 종풍은 크게 흔들리고 말았다. 이에, 스님은 몇몇 동지와 종단을 바로 잡고자 하실적에 나 역시 미비한 힘이나마 도와 조그마한 보탬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러던 중에 나와의 情誼가 두터워진 것을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없었던 바였다. 그러나 나의 간직한 뜻을 펴기에 너무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기에 언제나 혈혈단신으로 국내를 두루 유람하며 역사를 연구하고픈 생각 뿐이었다. 스님은 이러한 나의 마음을 짐작하시고 해마다 늦여름 초가을 사이엔 나와 함께 여행길을 마련하여......그러는 동안 때로는 거치른 숲사이를 헤쳐가고 금석에 끼여 먼지를 함께 털고 닦으면서 내가 하고 싶어하던 고대사에 대한 연구를 이룩한 일이 비단 한둘이 아니다. 스님은 이러한 일엔 실제로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으나 내가 좋아하는 연구인 때문에 고충을 무릅쓰고 함께 찾았었고 그것을 얻으면 함께 기뻐하시여 끝내는 專門家에 손색없는 조예를 쌓으시기도 하였다.116)
라 하였으니, 이 또한 석전의 역사인식과 金石文에 대한 안목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석전은 또한 보통학으로서 論理學의 예를 들어 논리학의 三段論法으로 하지 않을 수 없으며 더 나아가 세계 통상 설교의식을 씀이 옳으며 과학, 철학, 문학, 사회학 등을 自家 교리와 겸하여 궁구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구경에 이르러서는 중생을 복되게 하는 시도라고 하고 있으니 그의 내·외전에 대한 안목과 불교교육 개혁에 대한 꿰뚫는 탁견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117)
한편, 이러한 제문제에 대해 승가교육의 새로운 모델과 시도들이 실천되어져 눈길을 끌게 된다. 즉, 楡岾寺의 經院, 내장사의 內藏禪院, 五山佛敎學敎 및 일제하 행해진 불교순회강연 등이 그 것이다. 특히 동경 불교유학생들에 의한 강연은 사상과 언론탄압으로 강단에서 끌어내려지고 구속되기도 하였지만 민중에 대한 그들의 애정과 순수한 열정을 볼 수 있다.
먼저 금강산 유점사는 경원설립을 하였으니〈東國經院을 소개하노라. 負 彷徨하는 學侶에게〉의 기사내용을 살펴보면 그 대강을 살펴볼 수 있다. 즉, 금강산 유점사에 1928년 근대불교 최초의 경학연구 전문기관으로 '東國經院'이 설치되었다. 동국경원은 그 명칭부터가 당시 강원과는 상이한 목적을 둔 것이었다. 유점사가 새로 설립한 十年結社 경원은 쇠폐하여 가는 조선불교계를 부흥할 주인공의 산모로서 기대되었는데, 몇 년의 단기간에 一代時敎를 졸업하고 강석에 나오는 현재의 강사 제도를 비판하여 설립된 것이다. 이는 십년을 일기로 하여 한권의 경만을 연구하는 것으로서 전공적인 시련을 의도하였다. 이 경원이 설립되기 전까지 이미 십수년전에 김동선 노화상에 의해 法華經院이 설립된 적이 있었는데, 이혼성은 당시 주지로 취임하는 길로부터 십년을 경원을 설립할 것을 숙제로 하였으며, 더욱이 운허용하, 박종하 등의 일편단정 화주로 인하여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입학자격은 연령 20세 이상∼40세 이하의 비구로 신심이 견고하고 사교과를 졸업한자로 공부하는 학인을 모아서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고 공부를 다하여 마치고 다시 나아가 교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려는 미래의 학자를 위하여 경학연구 기관으로 개설된 것이다. 그러므로 강사가 되고 법사가 되기 위한 일시적인 학인이 아님이니, 적어도 일생을 교리연구에 종사하려는 사람이다.
경원의 교과내용을 살펴보면, 1. 禪學部(염송, 전등) 2. 經學部(화엄, 법화, 반야, 방등, 아함) 3. 論疏部(대승론, 소승론)로 나누어 수의로 연구하게 하고, 수시로 내·외국의 역사, 지리, 화학, 종교사, 철학 등 필요한 학과를 방통케 하려 하였다. 그리고 그 경영은 유점사의 사업으로 매년 백미 1천 5백두 이상의 경비를 산하며 전 법화회의 회주이던 동선화상과 주지 혼성선사의 전력 주선이 전부였다. 이렇듯 불교계에서 전문 연구과정을 설치하고 그에 대한 노력을 시도하였다는 것은 불교계의 또 다른 움직임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118)
또한 鶴鳴啓宗(1867∼1929)선사에 의해 설치된 내장사 '內藏禪院'을 들 수 있다. 학명은 석전과는 그 누구보다도 가까웠던 講을 겸한 대표적인 대선사였다. 한영은 내장사에 학명의 비를 남기고 있을 정도이다.119)학명은 유점사의 동국경원과 같은 해인 1928년 설립된 내장선원은 일정 나이가 찬 승려를 중심으로 한 것이 아니라 특이하게도 어린 소년을 모아 교육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어려서부터 禪風을 익히고 歌舞까지 곁들이고 있으니 다양하고 자유로운 승가교육 방식을 보여주었다. 즉, 內藏承繼를 세우고 初心의 소년을 모아 禪理를 보이고 敎學을 가르친 것이다. 그리고 교학과 함께 농업에 힘쓰게 하고 범패를 학습하고, 찬불 등을 신작하는 그야말로 일하면서 글을 읽고, 선을 연구하면서 몸과 마음을 쾌활하게 하는 것으로써 이는 실로 이상적 선원을 시도한 것이다. 이것은 서울에서 포교당을 세우고 오르간을 치며 직접 찬불가를 짓는 등의 활동을 보인 震鐘 白龍城선사와는 또 다른 선사의 면목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내장선원규칙>의 특징을 몇가지 들어보면,
1. 선원의 목표는 半禪半農으로 변경함
2. 禪會의 주의는 自禪自修하며 自力自食하기로 함.
1). 총림의 청규에 의해 오전 학문, 오후 노동, 야간 좌선 삼단 으로 정함.
1). 동안거는 좌선위주, 하안거는 학문과 노동위주로 함.
1). 梵音은 시세에 적합한 청아한 범패를 학습하며, 또 讚佛, 自讚, 回心, 還鄕曲 등을 신작하여 창하기로 함.120)
등을 들 수 있다. 이것은 鏡虛惺牛(1847∼1912) 이래 선풍의 진작을 계승하는 것이며, 1921년 禪學院의 건립 등에 힘입은 것이라고 생각되어진다.
또한 대승사, 김룡사 등 경북 오본산이 연합하여 만든 중등교육기관을 세우니 '五山佛敎學校'가 그것이다. 일찍이 姜裕文은 '경북 오본사가 연합단일되어 당국의 인가있는 불교중등학교를 경영하겠다 하니 조선불교에 중대한 시사를 주는 것'121)이라고 말하면서 기대를 나타내었다. 그 설립취지는 종래의 舊式講院制만으로는 도저히 신시대에 적응할 인물을 양성할 수 없고, 그렇다고 해서 세속학교에만 보내서 교육한다고 불교인을 양성하는 적당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은 20여년내 학교교육의 실패로 보아 이것은 도저히 취할 수 없다 하여 新·舊를 절충하여 5본산이 각각 학교를 개설하여 왔으나 이를 연합으로 모아 중등교육기관으로 경영하자는 견지에서 설립하였다. 교과내용은 불교학과 일반중등학교와 유사한 일반학과를 설치하고 있는데, 특히 단순히 智育 편중의 학교가 아니라 종교가를 양성하고자 하는 德育에 치중하고자 하였다.〈五山佛敎學敎 學生諸君에게 一言함〉의 사설에서122) 학생들에게 대문학가 대사업가가 되어 주기를 원한다면서, 그것은 敎人的 문학가 교인적 사업가가 되기를 바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오산학교 설립의 목적과 취지를 갸름하게 한다. 이는 당시 교계의 절실한 인재양성과 그 갈망을 엿볼 수 있는 일이라고 하겠다. 기타 교육활동으로 일찍이 白龍城의 大覺日曜學校 설립,123) 불교일요학교124), 불교청년회 야학부125) 등이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새로운 시도들이라 본다.
이러한 새로운 시도들과 강원논의에 대한 영향 아래 1935년 경부터는 지방에 '改良講院'의 대거 출현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즉, 경남 사천군 多率寺 講院은 9月부터 대본산 해인사 강원에 합병하여 金法麟, 崔英煥, 金鼎卨을 강사로 맞하여 종래 형식과는 다른 改良講院으로써 경영하였으며,126) 歸州寺도 改良佛敎專門講院을 설치는 등 개량강원은 실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갔다.
또한 比丘尼講院의 출현도 들 수 있으니 南長寺에서는 嶠南講堂과 함께 부속암자인 觀音庵에 비구니 觀音講堂을 개설하여 조실이 대교과를 가르치고 華山守玉이 사교과를 가르치는 최초의 비구니 강원이 출현하였다.127) 海印寺에서 득도한 비구니 수옥은 일찌기 출가후로부터 니승에 무학자가 의외에 많음을 보고 大敎科를 마치고 滿空禪師 회상에서 捨敎入禪하여 다년간 禪理를 참구한 후 일본으로 들어가서 니승만 가르치는 佛敎專門學校에 입학하여 4∼5年 공부를 하고 조선에 돌아왔다. 그 후 상주 남장사 관음전을 尼僧專門 修學講院으로 교섭하여 맡아 가지고 3년간을 일심으로 젊은 니승을 모아서 교육하여서 1943년에 第1回 沙彌科와 四集科 修了式을 擧行하였던 것이다.
3. 大衆敎化의 理念과 그 方案
(1)大衆敎化의 理念
석전 박한영은 불교개혁의 주체인 청년불교인의 육성을 강조하고, 또한 이를 직접 몸으로 실천하기 위하여 불교중앙학교의 교장을 지내고, 경성 개운사에 대원강당을 설치, 20여년간 진력하였으며 중앙연구원(1929, 昭和 4)을 설립, 후학을 지도하는 등 그의 생애 대부분을 승려교육·도제양성에 보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불교야말로 오늘날의 뭇 종교를 含攝하고 세계철학대가에 미침에 모자람이 없는 대사상이라고 자신하면서 미래불교는 과거불교와는 달리 비상히 발전하여 점점 빛을 발하여 무변세계해를 佛花로 장엄하며 佛果로 회향될 것128)이라고 기대하면서, 현재 내지 미래에 있어 불교인의 사명과 책임이 어느 때보다 중대함을 강조하였다. 그는〈佛敎의 興廢所以를 深究할 今日〉에서 금일을 부활시대라 하면서 前代佛敎의 老朽殘習을 청산하고 미래불교의 진흥책을 강구하여야 된다고 하였다.
이처럼 불교의 미래에 대해 밝은 전망과 크나큰 기대를 가졌던 그는 청년불교에 미래를 걸었던 것처럼 대중교화에도 큰 희망과 함께 관심을 기울였다. 이 것은 그의 철저히 眞·俗不二, 自他不二의 사상을 갸름하게 하는 것이었다. 석전은 대중교화의 기본이념을 중생제도의 근본서원에 두고 있었다. 따라서 부처가 설한 교리는 출가, 재가의 모든 중생을 함께 구제하는데 있는 것이며, 보현 등 대보살은 世間相을 여의지 않고 梵行을 닦는 것이라고 하였다.129)
진·속불이, 자·타불이는 불교의 근본사상이다. 그러므로 승려 뿐만이 아니라 일반 국민에게 있어서도 종교교육, 특히 불교교육이 필요함은 당연한 것으로 대중포교의 당위성이 있게 되는 것이다. 克 은〈宗敎的 敎育이 국민을 가주함〉에서,
무릇 청년자제를 교육함이 宗敎的 精神을 정곡으로 관주함이 없으면 도덕을 배양함과 윤리를 강명함에 급무됨을 해득키 어려운지라. 만약 종교적 정신이 모자라 도덕윤리가 급무됨을 해득치 못한 동시에 한갓 과학으로 전심전력하면 비록 至精盡美의 지경에 이를지라도 금수의 편기단능에 지나지 못할지니 어찌 능히 風敎를 유지하여 국민의 자격을 이루리요. 그러므로 문명국의 교육은 종교를 숭봉하여 도덕윤리를 전숭하여 과학의 부족한 점이 있을지라도...종교덕성으로 배양함이 없으면 과학이라 할지라도 순실한 학문이라고 칭하기 어려울지라. 그러므로 사람의 부모가 된 이는 불교를 篤信한 연후에야 賢智의 子弟를 얻을 것이요, 사람의 師父가 될 자는 종교의 문의를 연구한 연후에야 현지의 제자를 얻을 것을 확단하노라.130)
라 하니 종교적 교육은 국민 누구에게나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한편, 이미 개항이래 일본불교는 종교적 입장이라기 보다는 다분히 정치적 입장에 따라 한국에 크게 진출하고 있었다.131) 이처럼 우후죽순 처럼 생겨나는 일본불교에 의한 포교소, 출장소 등과 타종교에 대한 위협은 조선불교 지도자들을 반성토록하는 계기가 됨으로써 종래의 고립적인 자세를 지양하고 포교활동을 강화하여 대중불교로서의 위상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대중교화에 대한 인식의 확대는 1924년경에 이르면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이고 있었다. 아래의 표는 그러한 성과를 볼 수 있는 것이다.
年度別 布敎 現況表(表, 6)
年度別 |
布敎堂數 |
布敎者數 |
信徒數 |
大正 5年(1916) |
5 |
37 |
73,749 |
大正 6年 |
30 |
46 |
84,866 |
大正 7年 |
39 |
54 |
89,508 |
大正 8年(1919) |
40 |
54 |
150,868 |
大正 9年 |
45 |
59 |
149,714 |
大正 10年 |
48 |
63 |
161,749 |
大正 11年 |
56 |
70 |
161,556 |
大正 12年 |
61 |
71 |
170,545 |
大正13年(1924) |
72 |
72 |
203,533 |
조선불교는 維新 이래 벌써 이십성상을 두고 포교·교육을 부르짖을 뿐만 아니라 얼마 만큼의 성과도 있었다. 최초의 포교당은 거국대표로 오직 경성 중앙에 각황교당 1개소 뿐이었던 것에 1920년에 이르러서는 전반도를 통하여 72개소가 羅列碁布하고 그에 따라 신도도 적지 않은 수확이 있었으니 전조선포교당포교사 및 신도수를 보건대 포교당수 72, 포교자수 72, 신도수 203,533에 이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132) 이 기록만을 보건대 매년 평균 13,5020인의 증가, 포교당 평균287인의 증가함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아주 빈약하며 2, 3처의 신도부에 기명한 이도 적지 않으므로 평균수도 다 정확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이만한 성적으로는 다 양호한 수확이라고 할 수 없고 동시에 방약을 개선치 않으면 더 증진할 여망이 없으리라 생각되는 형편이었다. 더욱이 布敎師 養成所가 있어 인격·규칙방법을 통일하며 각 포교당을 지휘, 감독할 것이나 아직 그런 기관이 있지 못한 동시에 설정할 수도 없게 된 형편에 있었다. 대체로 그러한 형편에 있었으니 포교의 활성화를 위하여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주장이 있게 되었다.
1. 포교사를 택임하고 자주 교체하지 말것.
2. 포교사의 회의를 종종 개최할 것.
3. 포교서적 등을 다수 간행할 것.
4. 신도의 포교당에 관한 관념을 배양할 것.
당시 불교보급에 대하여서는 여러 의견이 있었으니 吳在永의 경우 10개항에 걸친 의견을 내놓기도 하였는데 그 중 불교포교당 소재지 이외 시가지 및 여염 번성처에는 布敎出張所를 둘 것 등을 건의하였다. 석전은 불교를 세계의 어느 종교보다 우위에 두었다. 따라서 이러한 불교를 널리 포교하여 중생을 이롭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불교는 그 어느 진리보다 가장 귀한 것으로, 이것으로 중생을 이롭게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조선 불교계는 그 기본적 입장과 방법 면에서 어둡고, 공언무실의 습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당시 布敎의 현황을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방향으로 치달아서 세상과 민중의 형편에 어두워 전달이 어두운 것이다. 어떤 종류의 과학이든 아주 비근하고 아주 쉬운 현상에 기점을 두고, 더욱 실마리를 열고, 큰 걸음으로 걸어 옛사람이 보지 못한 경지에 도달하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하는 것으로, 불교는 하늘과 하늘에서 나온 인간과 인간의 실상 문제를 다루는 것인데 이 귀한 것을 바른 내용으로 친히 증명하고, 응용하여 포교하여야 할 것이다.133)
라 하였다. 또한 나아가 그는 '佛法과 世間法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여서 그것을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하나라는 實學으로 행해져야 하는데 조선불교계는 공언무실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세존을 보면 8만4천경·론과 1천7백공안이 모두 중생계에 이익되는 법문으로 중생이 없으면 어찌 佛祖가 있으며, 불조가 없으면 徒弟가 있을리 없다'134)하며 중생을 위한 포교가 불법의 실상과 중생의 방편에 어둡고 또한 설법의 내용에 있어서도 그 수준이 부녀자에 맞는 정도이므로 그 수준을 높이는 것이 과제라고 하였다. 또한 포교하는 사람들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기본적인 교육이 불완전한데다 강의 교재마저 제대로 정리되지 않고 지혜의 원력조차 미흡하여 이식은 난잡하나 이를 반성하여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려고도 하지 않는다는데 있다고 지적하였다.135)
미래불교를 진흥시키고 대중화시켜 불교의 이상인 同成成佛, 淨土世界의 구현을 위해서는 대중을 각성시키는 것이 가장 급선무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포교사, 그리고 포교교재가 그 중요문제라고 축약해 말할 수 있다. 석전은 승려교육에 있어서 그 주체를 짊어지고 있는 강사에게 일침을 가하여 각성을 요구하였듯이 대중교화를 담당할 포교사의 각성을 촉구하였으며, 대중포교의 방편으로 문서포교를 중시하였다.
그는〈將何以布敎生乎야〉에서 오늘날에 이르러 신앙하는 기관과 강구하는 요로와 건화하는 문호를 한 층 넓혀서 미신부분을 싹 고치고 智와 信으로 돌아가 향하게 하며, 헛된 부분을 고쳐서 實學을 실천하게 하고 뜨고 과장된 부분을 고쳐서 급하고 절실한 부분을 토로하여야 비로소 포교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정대한 문제라 하였다. 그러나 똑바로 실제를 주시하면 순수한 바른 이치와 방정한 덕성에 어김이 많고 황연히 뜬 空華에 유동하며 대부분 불교와 세계에 대한 심담원처는 몽상에 지나지 않고 현전한 부질없는 명예와 환신이양 이도에 주저하고 나가지 않아 옛 모양 그대로이니 참으로 슬픈 일로써 어떻게 중생을 이롭게 하고자 하겠는가 반문하면서,
스스로 포교자라고 하는 이들이 기초교육이 불완전하고 포교교재가 순수치 못하고 悲·智·願의 힘이 불충분하고 布敎意識이 어지러움워서 일시에 깊이 반성하고 개혁해 고치기 어렵고 옛부터 내려오는 관습으로 청정광명장해를 어지럽게 함이 적지 않으니 고해에 빠진 중생들을 무엇을 가지고 걸러내겠으며 쓰러져가는 불교의 명맥을 무엇을 가지고 받들어 이을 것인가.
라고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은 '布敎 四分 綱要'를 제안하였다.
첫째, 靑年徒弟를 빨리 기르되 참된 교재로 밝게 학을 넓히게 해서 다가올 시대에 포교인을 涵育시킬 것.
둘째, 교단의 밝고 바른 교재를 씹으면서도 강요를 띠게 편찬해 서 대승교리를 더욱 많이 開演할 것.
셋째, 포교하는 사람들의 자격은 悲, 智, 願 三心이 하나도 결하 지 않게하고 小我를 버리고 大我로 자신을 승화시킬 것.
넷째, 포교인이 身業과 口業과 意業이 전아하고 속되지 않으며 짝을 지여 반대되는 사람들을 헐뜯고 배타하는 견해를 쓸어 버리고 耿介한 학술로 화기있게 접인할 것.136)
이와같이 석전은 포교사의 양성, 포교 교재의 편찬, 포교사의 자질 등을 언급하면서 대중교화의 방법에까지 관심을 가지고 이를 위한 제시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927년 8월 25일에는 최초로 대구 桐華寺에서 布敎師 大會를 개최, 이로부터 포교에 새로운 機軸이 될 곳을 다짐하고 敎典 編刊에 관한 件·布敎意識 方法에 관한 件(入敎·授戒·解行)·敎會制度 및 規程에 관한 件·禮式에 관한 件·각 敎堂 관계 단체에 관한 件·朝鮮佛敎事業硏究會 조직에 관한 件·設會 위치에 관한 件·布敎 機關紙에 관한 件137)등과 같은 사항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조선불교에 있어서 발전을 도모하고 보급을 계획하여야 하는데는 무엇보다도 포교가 먼저 발전되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불교계에서는 포교에 대해서 연구와 주의를 충분히 기울이지 못한데에 대해서, 포교사 스스로가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고 포교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것을 다짐하는 것이기도 하였다.138)
(2)大衆媒體를 통한 敎化
석전 박한영이 살다간 시대는 내·외로 격동의 시대였다. 안으로는 이조불교의 억압에서 풀려나 부처의 無盡法海를 크게 펼칠 호기를 맞이한 시기였으나 그것도 잠시 일제식민지에 들어가고 만 시대였다. 또한 세계의 自由主義와 平等主義의 思潮에 따라 물밀 듯이 들어온 외세 종교와 맞부딪혀 불교계가 기지개를 펼 여유도 없이 그 역량을 시험받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맞이하니 석전은 선사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짊어지고 나아갈 청년불교에 미래의 희망을 걸고 승려교육에 매진하였다. 그것은 미래불교에 대한 희망을 청년승려에게 걸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대중교화에 대한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것은 미래불교가 이 두문제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찍이 權相老가 창간한 불교잡지《조선불교월보》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조선불교월보가 정간되자, 제호를 바꾸어 1913년 11월《해동불교》를 발간하였다. 이것은 문서포교라고 하는 대중매체에 대한 그 가치성과 효용성을 인식한 선각자적인 안목에 따른 것이었다.
'布敎'라고 말하여지는 대중교화 역시 실제의 核은 교육의 문제이다. 그 대상이 승려냐, 혹은 일반 대중이냐에 따라서 그 명칭을 달리할 뿐 그 내용은 결국 하나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궁극적인 목적은 그릇된 믿음을 버리고 바른 믿음을 가지며 이를 통해 자신이 본래 갖고 있는 영각성을 개발하여 깨달음에 이르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석전은 현 시대의 포교는 종교의 최상승과 철학의 일합상을 연구하여야 하며, 또한 이러한 것을 하기 위해서는 교단과 포교를 연구하는 기구가 더욱 문호를 개방하여 미신적인 요소는 지혜를 신앙하는 방향으로 변혁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석전은 그러한 막중한 책임을 갖고 있는 포교의 건전성에 대해 강조하면서〈將何以布敎利生乎也〉에서,
1)迷信布敎를 智信布敎로 하여야한다. 미신적이고 무속적인 불 교신앙 형태를 지혜를 확신하고 깨달음의 자성을 자기로부터 성장시켜야 하며,
2)理論布敎를 實踐布敎로 전환시켜야 한다. 현학적인 논리나 번 잡한 교설을 갖고 공리공론하는 것 보다 六波羅蜜을 실수하고 四攝法을 이행하는 실천적 종교로 바뀌어 사회와 국가에 봉사 하는 불교가 되어야 하며,
3)誇張포교에서 實質포교를 하여야 한다. 허장성세, 장광설의 환 설로써 인간을 들뜨게 하지말고 과학적이고 실제적인 사실을 열거하면서 합리적 이해를 도모하는 포교를 하여야 한다.139)
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한영은 미신, 이론, 과장을 배격하고 智信, 實踐, 實質을 주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찍이 석전은 바른 부처의 법을 함께 받들어 계승, 포교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려는 원력이 클진댄, 포교에 네가지 강요가 있음을 밝혔다. 즉, ①청년도제를 화급하게 교양 훈도함에 진정한 교과를 만들어 명백하게 할 수 있게 하고 박학하게 배울 수 있게 하여 세계적 수준에 오를 포교인을 만들어야 할 것. ②교육자료를 간결히 또한 청초하게 함은 물론 대승불교교리를 유익 유용하게 교육할 것. ③포교인의 자격을 자비, 지혜, 원력 이 세가지 마음으로 갖추게 하고 소아적인 사고를 탈피하여 대승적인 보살정신으로 체현되게 할 것. ④포교인의 언행이 청정 단아하여야 하고 또한 불편부당한 평등심으로 장양된 인격으로 사람을 제접할 것 등이 그 것이다. 이러한 포교인의 자질로서 대중을 교화할 때 불교의 미래가 밝다고 하였다.
석전은 당시 다른 종교계에서는 교육기관이 들어서고 서적의 발간이 원활하나 조선불교계만은 그러한 움직임이 희미하며, 옛 상태를 고수하고 있는 형편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그는 대체로 불교유신을 구하는 방법은 한가지가 아니나 서적간행·문서포교가 무엇보다 먼저라고 하였다. 진실로 서적간행을 통한 문서포교는 화급히 서둘러야 할 사항이었다.〈佛敎維新과 書籍刊行〉에서,
불교계는 정리되지 않은 오래된 佛敎 書籍이 많으나 관심을 갖고 정리한 사람이 적으니, 같은 몸이지만 때가 낀 몸을 목욕을 하면 정신이 빛나듯, 정리되지 않은 古文을 새롭게 정성을 들여 인쇄하여 간편하게 장정하면 새로나온 서적을 대한 듯 할 것이다....... 또한 옛 것이 훌륭하고 뛰어나지만 지나치게 옛사람의 학문을 숭상하는 것은 오늘을 낮추는 실마리로 보고 오늘날 뛰어나고 생명을 이롭게 해주는 말과 글이 옛 사람보다 높은 경지에 이르러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140)
즉, 불교계의 오래된 전적을 새롭게 다듬어 간행할 것과 새로 나온 전적을 함께 받아들일 것을 말하고 있으니, 이것은 옛 것과 지금의 것을 절충하여 마음의 문을 열고 귀담아 들어 불교가 세계적 학문의 경지에 오를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141) 한영은 실제 이러한 뜻을 가지고 이능화 등과 함께《朝鮮佛敎叢書》간행을 계획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금회 이능화 박한영 최남선 제선생의 알선과 외우 장황진선생의 생철주취의 분투적 결정으로《朝鮮佛敎叢書》가 편찬되어 간행케된다 하니 우리 조선민족을 위하여 흔희작약하기를 마지 아니하는 동시에 臨渴의 요구를 마치어서 적출한 사업이라고 믿는다.142)
이 계획은 실제 실행되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당시 이러한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은 당시 불교를 이끌어 나갔던 석전을 포함한 선각자들의 노력을 크게 사야할 것이다.
일제식민지하 불교계의 잡지를 보면, 언론의 억제 속에서 1910년에서 1919년 3. 1운동까지 발행된 53권이 거의가 宗敎誌가 차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정치, 사회문제에 관한 출판을 금지하고 있었던 당시의 결과였다. 따라서 정치, 사회문제 등의 시사는 순수한 종교지에 실리는 경향이 생겨나 종교지이기는 하나 시사적인 내용을 함께 실었으므로 종교잡지가 잡지 출판계에서 높은 비율을 점하게 된 것은 時勢라 하겠다. 이 때 발행된 잡지를 보면, 기독교회보 13, 불교회보 7, 侍天敎회보 3, 천도교회보 1을 들 수 있다. 불교잡지의 경우 1945년에 걸쳐 25종이 나왔음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석전은 1910년대 《조선불교월보》, 《해동불교》, 《불일》에 직접 참여하여 불교잡지를 발간하여 대중교화를 선도해 나갔던 것이다.
한편,《조선불교월보》를 비롯하여《불교》,《금강산》등을 발행한 退耕 權相老(1897∼1965)는 국학을 널리 연구하고 이에 관련을 지어 불교사를 정립하려는데 관심을 가졌다. 그는 1917년 저술한《朝鮮佛敎略史》의 서문에서 인도, 중국, 일본 불교사는 있으나 조선불교사가 없음을 통감한다고 하면서 저작동기를 밝히고 있다. 1910년대 불교잡지의 반수 가깝게 발행한 李能和()는 1912년 능인보통학교의 교장을 지냈고 1914년 11월에는 불교진흥회가 설립되자 간사로 선출되고 이듬해 교장을 사임하고 불교진흥회 이사에 선임되었다. 이 기간 중에《불교진흥회월보》《조선불교계》《조선불교총보》를 내놓았다. 그는 1921년에는 총독부 조선사 편수위원회의 편수관, 편수위원이 되었다. 이 때가 그가 국학에 결실을 맺게된 동기로 이로부터 15년간 희귀한 자료를 수집한 것에 바탕을 두고 계속 저작활동을 하였다.《朝鮮佛敎通史》《朝鮮儒敎及儒敎思想史遺 》《朝鮮基督敎及外交史》《조선신사유고》《조선신화고유고》 등 종교관계, 국학부문의 대학자로 그 업적은 지대한 것이다.《唯心》《불교》의 발행인 한용운은 박한영, 진진응 등과 함께 임제종운동을 전개하였고, 1913년에는《朝鮮佛敎維新論》을 발행하고 1918년에는 월간《유심》지를 창간하였다. 1919년 3·1운동을 주동하여 3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1927년에는 新幹會에서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부회장직을 맡아보았다. 1930년에는《불교》지를 인수하여 사장이 되었으며 같은 해 卍黨을 조직하여 불교유신운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권상로나 이능화는 조선불교의 역사적 흐름을 파악하는 가운데 보다 나은 불교의 정립을 사명으로 국학에 힘을 기울인 입장이다. 이에 대해 박한영·한용운은 일제의 압제와 일본불교의 식민지화에 대해 한국불교의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대외적으로 투쟁했던 입장으로 그들의 개혁사상은 臨濟宗運動을 통하여, 청년도제의 교육을 통하여, 대중교화를 통하여 나타났다. 이러한 불교잡지의 속출은 민중의 계발과 불교 대중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석전의 경우, 그는《해동불교》를 1913년 11월에 창간하여 이듬해 1914년 6월까지 간행, 일반 대중교화에 앞장섰다. 이것은 불교잡지로 그 전신인《조선불교월보》의 명칭을 고친 것이다. 조선불교월보는 1912년 2월에 권상로가 창간하여 19호까지 편집해오다가 20호부터 석전에 맡아서 편집하였으나 원고가 압수되므로 해동불교로 개제하여 다시 발간하게 된 것이다. 해동불교는 그 발간사에서 발간의 목적을 조선불교의 진흥을 위하여 창간되었다고 밝히고 있는데143) 이 점은 조선불교월보의 발간취지와 일맥상통한다. 불교잡지를 간행하는 것은 조선시대를 통하면서 침체되어진 불교를 진흥시키고 대중을 계몽하는 것으로써 이 시대 불교계 선각자들의 사명으로 여기고 초유한 성거라고 여겼던 것이다.
《조선불교월보》는 매호마다 싣고 있는 '本報의 特色'을 보면 敎史와 敎理, 敎海의 行相과 禪林의 公案을 실어 학생이나 승려에게 좋은 스승이 되며 신·구 학문과 내외서적을 괄취하므로 세간·출세간, 내·외인민에게 보급되고 있다고 하였다.《해동불교》역시 이러한 정신을 계승하여 발간되었는데 그 내용 등을 보면 논설부의 長廣舌과 獅子吼를 통해서 불교계의 문제점이나 시사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석전은 이러한 불교잡지를 통하여 자신의 불교 개혁 전반에 관한 방향제시와 대중교화에 관한 의견을 실고 있는 것이다.
한편, 석전은 교화의 機緣에 따라 세간과 출세간이 있지만 불교의 가르침이 출가·재가의 모든 중생을 함께 구제하는 데에 있는 것이므로 그 시대의 변천과 民智의 발달에 따라 그 포교의 내용과 방법이 시대에 맞아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근고 이래 조선의 불교는 있으나 없는 듯한 까닭은 설법의 유풍이 보통 중류 이상은 관계가 없어서 우매한 부인 및 영혼계 뿐이라144)고 하여 종래의 설법 내용이나 방법이 중류 이상의 지성계급에는 맞지 않고 다만 부녀자나 영혼계만을 위한 설법이었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포교는 논리학의 삼단논법이나 세계일반의 布敎儀式도 참고하며, 그 내용에 있어서는 불교의 교리를 정통한 연후에 과학·철학·문학·사회학 등을 겸해 궁구해서 불교의 교리에 부합시켜 포교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특히 당시의 부녀자 및 영혼계에 대한 淨土門 일변도의 설법에 대하여 그는 정토문이 제불조사가 찬양한 바이나 무조건 묵수함은 경계하였다. 즉, '法寶壇經에 이르되 迷人은 念佛求生이요, 悟人은 自淨其心하니 그러므로 佛言하되 隨其心淨하여 卽佛淨土라 하나니, 彌陀와 淨土는 즉 자기의 性靈을 究窮樂地에 得道할 뿐이다'145)라고 하여 自心淨土와 自性極樂을 강조하였다.
한편 대중교화의 개선책에 대해서는 그는〈佛敎와 歲新의 想華〉의 글을 통해 불교의 진리와 원칙은 유신할 필요가 없지마는 법이 오래되고 폐를 이루어 顚倒의 차가 眞源에 비하면 엄연히 異敎의 邪焰이 치연하니 불교를 개선해야 하며 그에 대해 6개조항을 들고 있다.
1)거짓 戒定慧를 삭제하여 참된 계정혜를 낱낱이 수증할 것.
2)自利私德만 專注치 말고 利他功德을 涵育할 것.
3)고병한 전문훈고에 힘을 낭비치 말고 興學校廣知識하여 英才 를 培養할 것.
4)포교의 虛名을 개량하고 誠心으로 도를 펴 법력을 홍광할 것.
5)壇越所須로 信施虛霑을 반성하고 殖産産業을 經始하여 伽藍 과 一身을 보호할 것.
6)인민에 대한 자선사업 즉 의원, 고아교육, 빈민구제 등을 실 시하여 구세의 허명을 없앨 것.146)
라고 維新想華의 六條를 제시하였던 것이다. 즉, 불교인의 수행인 계·정·혜의 중시, 자리·이타의 실천 및 학교를 일으키고 영재를 키울 것, 성심으로 도를 펴고 산업을 일으켜 사찰과 자신을 두호할 것, 그리고 자선사엽, 사회사업 등을 실시할 것을 말하니 이 모두가 곧 불교를 일으켜 세우고 대중포교의 확대를 가져오는 것이라 하였다. 이렇듯 석전은 일찍이 대중교화의 방편으로 대중매체인 문서포교를 중시하고 이를 통해 포교의 이념과 방법, 포교인의 자세 등을 역설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대중교화의 구체적인 방법까지 폭 넓게 제시한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歷代佛敎雜誌(表,7)
誌名 |
發行年度 |
發行號數 |
發行人 |
備考 |
1. 圓宗雜誌 |
1910 |
2 |
金元淳 |
圓宗機關誌 |
2. 朝鮮佛敎月報 |
1912-13, 8 |
19 |
權相老 |
|
3. 海東佛敎 |
1913. 11- 14. 6 |
8 |
朴漢永 |
|
4. 佛敎振興會月報 |
1925. 3 |
9 |
李能和 |
|
5. 朝鮮佛敎界 |
1916. 4 - 16. 6 |
3 |
〃 |
|
6. 朝鮮佛敎叢報 |
1917. 3 -20. 6 |
22 |
〃 |
|
7. 惟心 |
|
3 |
韓龍雲 |
|
8. 鷲山寶林 |
1920. |
6 |
李鐘天 |
通度寺 |
9. 潮音 |
〃 |
|
朝鮮佛靑 |
通度寺支部 |
10. 佛敎 |
1924. 7-1933. 6 |
108 |
權相老, 韓龍雲 |
|
11. 佛日 |
1924. 7 |
1 |
李世暎 |
|
12. 荒野 |
〃 |
|
北京佛敎留學生會 |
|
13. 無我 |
1928. 5 |
|
|
|
14. 一光 |
1938. 12 |
9 |
曺學乳 |
|
15. 金剛杵 |
1914. 5 |
24 |
吳官守 |
東京留學生 |
16. 回光 |
|
2 |
李淳浩 |
|
17. 佛靑運動 |
|
10 |
李尙昊, 崔英煥 |
隔月刊 |
18. 禪苑 |
1931. 10 |
4 |
李寂音 |
禪學院 |
19. 回報 |
|
63 |
|
|
20. 金剛山 |
|
10 |
權相老 |
|
21. 佛敎(新輯) |
|
63 |
林原吉 |
|
22. 룸비니 |
|
3 |
梁泳祚 |
|
23. 琢磨 |
|
|
鄭昌允 |
|
24. 弘法友 |
|
1 |
李在福 |
奉先寺 |
25. 佛心 |
|
|
|
|
Ⅵ. 結 語
石顚 朴漢永(1870∼1948)의 불교개혁운동은 臨濟宗運動, 靑年徒弟의 敎育, 大衆敎化 등을 통하여 나타나는데 이런 것들이 抗日運動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불교계 자체의 自覺과 이를 위한 실천운동은 곧 抗日과 연결되는 것이었다. 개항과 더불어 밀어닥친 개화의 충격을 불교 스스로가 받아들이고 주체적으로 극복할 여유도 없이 일제의 마수에 휘말려 일본불교에 동화되고 식민통치의 도구로 침탈되었던 당시, 한국불교의 상황 속에서 박한영은 무엇보다도 한국 불교의 主體性 確立이 급선무라 보았다. 그는 당시 새로운 문명과 세계 사조에 발맞추어 불교가 개화하고 혁신하는데는 우선 불교 스스로의 자각과 주체성 확립이 서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백파긍선- 설두유형 - 설유처명의 정통 법맥을 이어받은 석전은 39세에 京城에 올라와 그의 인생에 있어 새로운 전기를 맞게되는데, 이 때 한용운 등과 더불어 臨濟宗運動을 전개하여 한국불교의 전통성과 주체성을 주장하였다. 즉, 圓宗을 세운 李晦光이 일본 조동종과 7개조 연합을 체결하려는 매교행위가 누설되자, 한용운 등과 함께 원종 그 자체를 부인하고, 한국불교의 법통은 태고 이래로 임제의 법맥을 이어온 臨濟宗임을 밝혀 일본불교에의 합종에 반대하는 맹렬한 임제종운동을 일으켰던 것이다.147)
뿐만 아니라 석전은〈朝鮮佛敎와 史蹟尋究〉148)라는 논설에서도 보여주듯이 종래의 中國 중심의 事大的 안목을 벗어나 한국 문화와 한국 불교를 바라볼 것을 강조하면서 자주적 입장에서 한국 불교의 유구성과 우수성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환기시키는 한편,〈世尊誕辰記念嘉會에 祝賀〉149)에서는 미래시대에 있어 한국불교의 역할과 사명을 강조하였다. 그는 佛敎史的 관점에서, 또는 未來觀에 있어서도 한국불교의 독자적 의의와 긍지를 내세워 한국불교의 주체성 확립에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한국불교의 주체성과 미래불교의 희망을 위해서는 불교인 스스로의 精神的 自覺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僧侶敎育·徒弟敎育 및 大衆敎化·布敎가 실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즉, 知·行合一이 요구되어지는 것으로, 이것은 당시 일제식민지하에 들어가게 된 조선과 그 불교계에 대한 미래를 희망적으로 설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먼저 被敎育者에 대하여 靈覺性을 강조하고 그 영각성의 개발을 위하여 진력하였다. 이것은 起信論을 중심한 元曉(617∼686)의 '一心歸源'의 정신과도 합치되는 것이었다. 중생의 영각성인 '一心'은 '一心二門'으로 나뉘어 生滅門에서 생사윤회하고 있지만 그 일심의 진여를 회복하면 본래 밝고 깨끗한 자리인 것이다. 이렇듯 인간존재에 대해 불변하고 고요하며 참되고 바르다고 하는 절대적인 신뢰는 석전의 교육주체자로서의 교육 가능성을 충분히 점치게 한다. 또한 知訥(1158∼1210)의 頓悟漸修의 사상과도 그 맥을 잇는 것이다. 지눌은 석전이 말하는 靈覺性을 '空寂靈知의 心'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 공적영지한 그 본래의 마음은 원래 고요하고 맑으며 부동인 동시에 온통 밝아 모든 것을 밝게 비추어 아는 '공적영지'한 것이다. 다만 망념으로 발휘되지 못할 뿐이다. 그러한 공적영지를 회복해 나가는데 있어서 지눌은 돈오와 점수의 방법을 교육학적으로 권하고 있다.150) 이 때 돈오에 있어서 교육자의 책임은 막중한 것이다. 새끼 병아리가 알에서 부화할 때 어미닭이 마지막 그 순간을 포착하여 밖에서 쪼아주는 그 '一琢'의 중요성은 참으로 큰 것이다.
석전 역시 지눌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교육 담당자인 강사들 및 불교인들에게〈佛敎講師와 頂門金針〉에서 貢高와 懶散, 爲我와 吝, 藏拙의 5종병을 분석하여 그 정신적 자각을 촉구하고 있다. 또한 돈오 후의 점수를 중요시 하였던 것과 같이 석전 역시 꾸준한 정진을 요구하였고, 스스로 제자들을 위하여 이를 실천하였다. 보통의 경우 자신의 영각성을 깨달았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몸에 배어든 습관은 의지나 지성과는 배치된 삶을 살기 쉽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신적 자각과 그 실천을 위하여《朝鮮佛敎月報》와《海東佛敎》를 통하여 승려교육과 대중교화를 위한 논설을 발표하니 주옥같은 글은 그의 사상을 충분히 읽게한다.
석전 박한영은 신학교인 明進學校의 후신인 佛敎專門學校에 강의를 맡은 이래 新·舊 승려의 교육기관에 35여년간을 두루 후학을 지도하는 일에 종사하였다. 이것은 석전의 新舊兼備·圓融無碍의 정신을 보여주는 실천이었다. 舊韓末∼日帝期 불교계의 교육개혁의 문제는 신·구학의 정비가 이루어지지 않고 실험의 시대였으므로 敎育體系에 관한 문제, 敎科課程에 관한 문제가 가장 쟁점이었다. 석전의 경우 二元的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즉, 신·구학은 각기 특성과 장단점이 있으므로 신·구학을 각각 발전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그의 행적에서도 잘 알 수 있다. 1912년 佛敎專門學校, 佛敎高等講塾, 1916년 中央佛敎學林의 책임을 맡은 이래 1926년 경성에 소재한 개운사 大圓講院에 주석하여 후학지도를 시작하였으며 1929년에는 中央硏究院의 맹주를 맡았다. 또한 1931년에는 東國大學校의 전신인 中央佛敎專門學校를 맡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의 행적을 추적할 때 그는 전통강원의 개량 쪽에 많은 관심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강원에 주석하면서 敎科改良에 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傳統없는 未來가 없으며, 더욱이 僧侶의 敎育이라는 특수성을 인식한 까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개운사 대원강원에 가장 오래 머물고, 중앙연구원의 수장역을 맡은 것이라 하겠다.
석전 박한영은 승려교육에 못지 않게 대중교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승려교육이 불교계 미래의 棟梁·英才를 만드는 것이라 한다면, 大衆敎化 역시 미래 불교계를 위해서 간과할 수 없는 중대사인 것이다. 왜냐하면 불교는 自利利他와 同體大悲의 구현을 통해 佛國土를 이루는 것을 이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이상은 대중의 교화를 통해서만이 확산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석전은《朝鮮佛敎月報》·《海東佛敎》라는 대중매체를 통해서 대중의 정신 계발과 불교의 사상을 널리 알리려 하였다. 그리고 典籍의 刊行 등을 통해서 문서포교에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러한 석전의 불교교육 개혁의 성과는 후일 많은 僧·俗 弟子의 배출로써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즉, 지금에 이르기까지 불교계를 잇는 법손의 대부분이 석전 한영의 후손임을 볼 때, 그가 남달리 심혈을 기울인 도제양성과 대중교화의 공적은 마땅히 바르게 평가되어져야 할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우리의 오랜 전통을 배경으로 하는 現代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보다 많이 西歐化하는 것으로 現代化라는 말 뜻을 파악하고 있지만, 머지 않아 미래에 큰 뜻을 갖는 전통에의 보존이 현대적이라는 개념으로 부각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 까닭은 주체성은 西歐化·近代化 이전의 선견조건이기 때문이다. 주체적 의식을 상실하지 않고 자기의 것을 보다 낫게 운영하여 온 것이 전통이며, 그 전통을 지켜 새로운 주체성을 확립하려는 것이 앞으로 우리들이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일 것이다.
參 考 文 獻
《三國遺事》
《元曉全書》
《普照全書》普照思想硏究院
《朝鮮佛敎月報》2·9·13·16··18·19
《海東佛敎》1·2·3·8
《佛敎》創刊號·2·3·5·6·7·17·30·32·43·59·93·103
《金剛杵》8, 東京
《朝鮮佛敎界》1·2
《佛敎時報》18·60
《朝鮮佛敎叢報》15
高橋亨,《李朝佛敎》경성, 1929.
韓龍雲,《佛敎維新論》京城, 1913.
姜裕文,《慶北五本山古今記要》京城, 1937.
《石顚文抄》
《石顚詩 》
《東亞日報》
李能和 編,《朝鮮佛敎通史》上·中, 下 京城, 1918
《李晦明禪師實錄》李晦明 筆寫本, 1939.
姜昔珠·朴敬勛 共著,《韓國佛敎近世百年》三寶學會, 1969.
《韓國近世佛敎百年史》民族社
《映湖大宗師語錄》
《韓國近現代佛敎資料全集》1·3·7·15·42·44·45·48·66·67,
民族社
《東大70年史》
成樂熏,〈映湖和尙碑銘〉
《韓龍雲思想硏究》萬海思想硏究會 編 民族社. 1980.
李智冠,〈韓國佛敎僧侶敎育의 史的考察〉《佛敎學報》第18輯 1981.
徐景洙,〈開化思想家와 佛敎 -僧 李東仁을 中心으로-〉《朴吉眞博士古 稀紀念, 韓國近代宗敎思想史》1984.
李光麟,〈開化僧 李東仁에 관한 새 史料〉《東亞硏究》6, 西江大 東亞硏究所, 1985.
鄭英熹,《韓國開化期 宗敎界의 敎育運動硏究》檀國大 博士學位論文,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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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啓賢, 〈3·1運動과 佛敎界의 동향〉《近代韓國佛敎史論》1988.
南都泳,〈韓國寺院敎育制度(中)〉,《東國歷史敎育》,27·8合集,
〈開化期의 寺院敎育制度〉《曺佐浩博士華甲記念》.
〈近代佛敎의 敎育活動〉《近代韓國佛敎史論》1988.
高翊晋,〈碧松智嚴의 新資料와 法統問題〉《佛敎學報》第22輯.
睦楨培,《韓國現代文化史大系》5,〈韓國宗敎運動史〉高大民族文化硏究所
朴先榮,〈韓國佛敎의 人間形成論〉《韓國學報》12輯,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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魯權用, 〈朴漢永의 佛敎思想과 維新運動〉
金昌淑,〈朝鮮後期 講學의 復興과 華嚴 〉《宗敎硏究》17, 한국종교학 회, 추계발표회집, 1998.
李敬順,〈日帝時代 佛敎 留學生의 動向〉《근대불교승가교육세미나자료 집》1998.
<SUMMARY>
On the Reformation of Buddhist Education by Park Han-Young in Korean Buddhism
Song Seonkae(Teokwun)
Department of Religion Education
Education Graduate School of Dongguk University
Studies on Korean Buddhism under the rule of Japanese imperialism and its modernization can generally be divided into the three types. One is the studies on the personnels e.g. Manhae Han Yong-Woon(萬海 韓龍雲), Jinjong Paek Yong-Seong(震鐘 白龍城) and Seokjeon Park Han-Young(石顚 朴漢永), etc. Second is the studies, mainly literary, on the literatures written by them. And the last is the studies on the events e.g. 3,1 Independence Movement(3,1 獨立運動) and reformation movement in Korean Buddhism, etc.
Seokjeon Park Han-Young(1870~1948) is the Buddhists offspring of Seolyu Cheomyeong(雪乳處明) and Paekpa Keungseon(白坡亘璇), who was, as the seventh Buddhist grandson of Seosan(西山), the Seon(禪) teacher, the Commandant(律) teacher and the master of Hwaeom(華嚴), and one of the traditional personnel in Korean Buddhism. He can be different from other Buddhists Master in respect of the Master who has the Teaching and the Seon in Korean Buddhism. He is the man who efforts the Buddhists monks education, the apprenticeship training and the enlightment campaign under the difficult situation such as the Last Korean Imperialism, the Japanese imperial rule and the Korean Liberation.
This paper concerns on the Buddhists monks education and the Enlightment Movement fulfilled by Seokjeon Park Han-Young. In Ch. Ⅱ, I investigate the background of the reformation of Korean modern Buddhism in connection with the religion and education policy of the Japanese imperialism. Many Korean people have effort to the enlightment and education of Chosun people at that time. He thought that Korean Buddhism needs the self-consciousness in order to acquire the subjecthood of Korean Buddhism and the hope for the future Korean Buddhism. He made every effort for the Buddhist monks education, the apprentice education, the enlightment for the multitude and Buddhism propagation.
His life is divided to three periods in Ch. Ⅲ. The first periods is form birth to the
teaching Buddhism for the masses at Kuam-sa temple(龜岩寺). The second is the periods in which he has participated in Imjejong Movement(臨濟宗運動). And the last is the periods in which he has, in earnest, taken part in the Buddhist monks education and the Mass Enlightment.
Ch. Ⅳ is dedicated to investigate his educational thought and ideology. He has steadily practiced the unity on Seon, Teaching and Vinaya. He has stressed keeping Vinaya in spite of Seon teacher and showed us the appearance as the traditional Seon teacher. And he has taught the Buddhist Teaching based on Hwaeom Thought.
In Ch. Ⅴ, I has studies on his practicing methods on the reformation of Buddhist education. Basically, he has admitted students's intellectual intuition which is admitted from Jinul(知訥; 1158~1210) and Wonhyo(元曉; 617~686), his educational respect which put point on the development of student's possibility.
It is no exaggeration that he did, on his all lifetime, his best for the Buddhist monks education. Since the principal of Pulkyojeonmunhakkyo(佛敎專門學敎; 1912), Pulkyokodeungkangsuk(佛敎高等講塾; 1912) and Jungangbulgyohakrim(中央佛敎學林; 1916), he has been the principal of Taewonkangwon(大圓講院; 1926), Jungangyeonkuwon(中央硏究院; 1929) and Jungangbulkyojeonmunhakkyo(中央佛敎專門學校; 1931). In this respect, it seems that he has been concerned about the improvement of the traditional Kangwon(講院; Buddhist school). He has practiced the renovation of the traditional textbook as the principal. He has thought that there is no future without the tradition and recognized the characteristics of the Buddhist monk education.
He has also been interested in the mass enlightment. He thought that, if the education of Buddhist monks has made the pilar of Korean Buddhism, then the mass enlightment has been also estimated the important thing by him. Therefore he made an effort for the propaganda of Buddhist Thought and the development of masses' mind through the communication such as 'Chosunpulkyowolbo(朝鮮佛敎月報)', 'Headongbulkyo(海東佛敎)', etc. We knows his efforts for Korean Buddhism through his secular or Buddhist disciples' coming forward in succession. Modern Korean powerful and influential Buddhists are all his disciples. We should, therefore, evaluate justly his achievements for Korean Buddhism.
1)安啓賢,〈3·1運動과 佛敎界〉《近代韓國佛敎史論》1988.
南駿,〈日帝下 佛敎改革運動에 관한 硏究〉碩士學位論文, 1980, 東國大.
權璣鉉,〈龍城의 大覺敎運動과 萬海의 佛敎維新運動의 比較硏究〉碩士學位論文, 1990, 東國大.
2)李炫熙,〈日帝의 韓國敎育·宗敎 侵掠政策의 硏究〉《崔泳熙先生華甲記念論叢》
探求堂, 1987.
3)朝鮮總督府,《朝鮮彙報》, 1915, 9.
4)安啓賢,〈3·1運動과 佛敎界의 동향〉《近代韓國佛敎史論》1988.
5)〈朝鮮總督府 朝鮮におおける同盟休學の考察〉, 1929.
6)李智冠,〈韓國佛敎僧侶敎育의 史的考察〉《佛敎學報》第18輯 1981.
7)李能和,《朝鮮佛敎通史》下, 受白 磨始入禪堂, pp.991.
8)《三國遺事》塔像4 白岩寺石塔舍利條.
9)李能和,《朝鮮佛敎通史》下, pp.943-965
10)南都泳,〈韓國寺院敎育制度(上)〉,〈韓國寺院敎育制度(中)〉《歷史敎育》27·28輯.
11)徐景洙,〈開化思想家와 佛敎 -僧 李東仁을 中心으로-〉《朴吉眞博士古稀紀念, 韓國近 代宗敎思想史》1984. 李光麟,〈開化僧 李東仁에 관한 새 史料〉《東亞硏究》6, 西江大 東亞硏究所, 1985.
12)姜昔珠·朴敬勛 共著,《佛敎近世百年》pp.26-32.
13)李能和,《朝鮮佛敎通史》上, pp.616.
14)高橋亨,《李朝佛敎》. 鄭珖鎬《近代韓日佛敎關係史硏究》1994, 仁荷大.
15)《大韓每日新報》, 光武10年 7月 5日, 權相老 불교대학, 日光(創刊號, 1928)
16)李能和,《朝鮮佛敎通史》下, pp.936-937, 新文館, 1918.
17)南都泳,〈開化期의 寺院敎育制度〉《曺佐浩博士華甲記念論叢》
18)《東大70年史》, 李鐘郁(1회 졸업생으로 보조국사 법어를 저술함)懷顧談
19) 豊岩散人,〈朝鮮佛敎敎育沿革의 大槪〉《佛敎》第73號. 1930.7.
20)《海東佛敎》第4號,〈佛敎의 興廢所以를 探究할 今日〉《韓國近現代佛敎資料全集》 48. 民族社. 이하 資料全集으로 약칭함.
21)豊岩散人,《佛敎》第73號. 1930.7. 〈朝鮮佛敎敎育沿革의 大槪〉
22)映湖生,《海東佛敎》第3號, 1913, 資料全集 48.
23)上揭書, 第3號.〈佛敎와 歲新의 想華〉資料全集 48.
24) 《石顚詩 》
25)金光植,〈1910년대 불교계의 曹洞宗 盟約과 臨濟宗運動〉《韓國近代佛敎史硏究》 pp.53-92, 1996, 8. 民族社.
26)《佛敎》73號
27)《海東佛敎》4號
28)《朝鮮佛敎叢報》4號, 15號
29)《佛敎》73號
30)姜裕文, 100年史.
31)《佛敎時報》18號,《佛敎》104號
32)徐京保,〈韓龍雲과 佛敎思想〉《韓龍雲思想硏究》萬海思想硏究會編, 民族社, 1980.
33)《石顚詩 》〈稀朝自述九章〉
34)《映湖大宗師語錄》《石顚詩 》〈自述石顚〉欲放無能一着擔 來雪北雨江南 抱得殘 經增鬱 更看霜樹 難堪 偶逐淸流同洛蜀 厭聽禪句 湘潭 若吟澹菊疎松外 且倚城樓 一笑談
35)《石顚詩 》〈自序〉
36) 金昌淑,〈朝鮮後期 講學의 復興과 華嚴〉《宗敎硏究》17, 秋季發表論文, 1998.
37)韓基斗,〈朝鮮末期의 禪論〉《韓國禪思想硏究》,1984.
38)李能和,《朝鮮佛敎通史》上 590,〈白坡大師略傳〉
39)碑銘, '我東近無律師一宗 唯白坡 可以當之故 以律師書之 大機大用是白坡八十年 籍手著 力處'《講院總覽》905, 대한불교교육원 불학연구소, 1997
40)《石林隨筆》,《映湖大宗師語錄》pp45∼47.
41)著書《修禪結社文》1冊《禪門手鏡》1冊,《六祖大師法寶壇經要解》1卷,《太古庵歌科釋 》,《識智說》,《五宗綱要私記》1卷,《禪門拈頌私記》5卷,《金剛經八解鏡)》1卷,《禪要 記》1卷,《作法龜鑑》2卷,《文集》4卷.
42)著書에는 <楷正錄> 1卷, <通方正眼>, <禪源溯流> 1卷, <雪竇詩集>, <私記> 등이 있다.《韓佛全》10-1060, 上《東師列傳》卷5〈雪竇講伯傳〉,《朝鮮佛敎通史》上 604, 〈靈龜山雪竇大師行狀〉
43)《朝鮮佛敎叢報》15號.
44)《朝鮮佛敎月報》第12號
45)《海東佛敎》第3號
46)《金剛杵》通卷 8號, 1914, 6.
47)普照知訥,《眞心直說》《普照全書》普照思想硏究院, pp55.
48)韓龍雲,《佛敎維新論》〈佛敎改革案〉1913.
49)《石林隨筆》〈禪之不立文字功不補過〉, pp33-35.
50)《石顚詩 》〈內藏賞雪三十韻寄贈鶴鳴禪師〉
51)《朝鮮佛敎月報》 第18號 1913. 7〈知行合一의 實學〉
52)《海東佛敎》13號, 1913, 2.〈如來藏緣起撮要〉
53)上揭書, 13號.〈三界唯心萬法唯識〉
54)成樂熏, 前揭 碑銘.
55)金包光,〈映湖和尙行蹟〉《石顚文抄》
56) 내용요약 -각국은 바야흐로 帝國主義的 植民活動을 서두르고 있는데 우리만이 구태 의연할 필요가 없다. 戒律이란 踐根 중생을 위해 방편적으로 만든 것일 뿐이다. 수천년동안 조금도 변동없다는 것은 무리하다. 승려에게도 取妻를 허락하여 인구 를 증식케 한다면 교세 확장에 도리혀 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모든 승려를 理 判과 事判으로 나누고, 사판승에 한하여 外典과 內典을 충실히 겸전한 자로써 대 중포교를 목적으로 嫁娶시키자고 주장하였다.
57) 韓普光,《龍城禪師硏究》1981. 백용성는 1926년 5월 持戒生活禁止에 대한 1차 建白書 를 127명 비구 명의로 총독부에 제출, 9월 2차 지계 건백서 총독부에 제출.
58)〈華嚴宗主映湖堂大宗師浮屠碑銘幷序〉,'師戒行嚴正 不受檀施 度外聲色 淸凉國師傳 所稱 足不履尼寺之塵 脇不着居士之席者 師之謂矣'
59)鄭寅普, 〈石顚上人小傳〉《石顚詩 》
60)〈石顚上人小傳〉 '上人持戒彌苦 晩寓城郊間 跡混塵俗 而一錫蕭然 未嘗以餘自累'
61)《石林隨筆》
62)《戒學約詮》1924, 4. 22., 내용목차- 第一章 總敍戒體, 第二章 別顯戒相(沙彌, 比丘· 比丘尼, 菩薩戒, 楞嚴經四種律儀), 第三章 結勸修學
63)朴先榮,〈韓國佛敎의 人間形成論〉《韓國學報》12輯, 1978.
64)《朝鮮佛敎月報》 第9號,〈佛敎講師와 頂門金針〉資料全集 44.
65)克 生, 上揭書, 第16號〈宗敎的敎育이 國民을 가주함〉資料全集 44.
66)韓龍雲, 《朝鮮佛敎維新論》〈論僧侶之敎育〉京城, 1913.
67)《朝鮮佛敎月報》第16號〈佛敎靑年과 普通科 卒業〉資料全集 45.
68)龜山 沙門,《海東佛敎》第4號〈靑年佛敎界에 對하여〉
69)上揭書, 流星身 詞林部,〈白羊寺內廣盛義塾 第2回卒業式祝辭〉
70)《朝鮮佛敎月報》 第18號,〈知行合一 實學〉
71)《朝鮮佛敎月報》 第14號〈佛國少年說〉-佛敎靑年에 바라는 期待,
72)《海東佛敎》第1號〈敎養徒弟는 紹融三寶〉資料全集 48. 民族社, 1996.
73)上揭書, 第1號 1913.
74)《佛敎叢報》第20號〈佛敎敎育의 危機〉1920. 3. 資料全集 42.
75)憂憂生,《佛敎》第20號〈佛敎敎育事業에 對하여〉
76)《朝鮮佛敎界》 1號 p.89. 1916. 4. 資料全集 49.
77)上揭書, 第2號. 1916. 6, 上同
78)《朝鮮佛敎叢報》第20號〈佛敎敎育의 危機〉 1920. 3.
79) 南都泳〈開化期 寺院의 敎育制度〉《現代史學의 諸問題》, 남계 曺佐鎬博士回甲記念 論叢, 1977. 불교전문강원 출신은 중앙학림별과 입학자격을 줌으로써 지방사원의 교 육제도에 대한 정비를 꾀하였다.
80)《朝鮮佛敎月報》第 13號 資料全集 44.
81)《海東佛敎》第17號〈佛敎維新과 典籍刊行〉
82)阿部洋,〈解放前 韓國における日本留學〉第2部
83)五峯山人,〈朝鮮佛敎의 敎育方針을 確定하라.〉《佛敎》2號, 1924.8.
84)《石顚詩 》〈送明湜沙彌渡日本〉
85)李敬順, 日帝時代 佛敎 留學生의 動向《僧伽敎育》2집, 1998, pp261
86) ____ ,〈일제시대 불교 유학생의 동향〉《근대불교승가교육세미나자료집》pp.98. 1998, 5.〈참고1〉
87)韓龍雲,〈論僧侶之敎育〉《朝鮮佛敎維新論》
88)《佛敎》第5號〈敎門子弟進路〉資料全集 48.
89)《佛敎》第17號〈全朝鮮佛敎徒諸師의 앞에 告白하나이다.〉
90)上揭書, 第17號〈中央佛敎學友會組織과 住持〉 불교소식난
91)《佛敎》28號
92)南海生,〈伽倻衲子의 '背恩忘德'을 읽고〉《佛敎》30號, 1926. 12.
93)《海東佛敎》第5號〈靑年佛敎界에 對하여〉
94)五峯山人, 《佛敎》第2號, 1924.8.〈朝鮮佛敎의 敎育方針을 確定하라.〉
95)당시 강원의 소외현상은《佛敎》第43號 金剛沙門 김기정, <金剛山 楡岾寺의 經學設立 을 듣고> 참조.
96)釋宗圓,《佛敎》第7號, 1925, 1〈敎學硏究를 振興하라.〉資料全集 1, pp.98-101
조선불교좌담회- 교육문제,《金剛杵》第23號, 1937. 3 同上, 53, pp.42-51.
97)朴勝周,《佛敎》第32號, 1927. 2. 同上 p.30-32.〈專門講院復舊에 就하야〉
98)《佛敎》102號
99)<財團法人朝鮮佛敎中央敎務院第6會平議員總會會錄> 資料全集 66. p.715-16, 이에 대 하여 백반은 <新春과 講院期待>《佛敎》第55號, 1929. 1에서 '작금의 學人大會에서 개량할 조건을 중앙기관에 헌책함까지 불구하고 모른체 하심은 그네들의 의사가 어 디 있을까로 반문.'
100)<朝鮮佛敎禪敎兩宗僧侶大會會議錄>《資料全集》67, p.16.
101)《東亞日報》1929. 3. 19,〈佛敎學人大會〉
102)《佛敎》第59號, 1929, 5. <佛敎硏究院生募集廣告> 參照.
103)上揭書, 第27號. 1926. 9.〈開運에 開講〉
104)上揭書, 第54號. 1928. 12.〈開運寺佛專修了〉華嚴三賢部(6人) : 朴永春 . 金炳奎 . 趙 宗泫 . 金炳夏 . 朴茂根 . 金永宣 趙宗鉉, 華嚴玄談部(11人) : 李淳浩 . 裵性元 . 金炯 鎭 . 李性燁 . 黃普眼 . 鄭和振
105)上揭書, 第68號. 1930. 2. 記事〈開運寺 講院에서 朝鮮語 講座〉
106)《佛敎時報》第5號. 1935. 12. 開運寺 大圓講院의 成立 鞏固
107)《佛敎》73號
108)《佛敎》104號《佛敎時報》18號
109)金光植,〈1930년대 佛敎界의 講院制度 改善問題〉《근대불교승가교육세미나자료집》 조계종 교육원, 1998.
110)《東亞日報》1931. 3. 29.〈佛敎靑年總同盟創立大會 終了〉
111)《李晦明禪師實錄》李晦明 筆寫本, 1939.
112)趙宗鉉,〈講院敎育과 制度改善〉《佛敎》第93號, 資料全集 15, pp.35-49.
113)許永鎬,《佛敎》第103號. 1933, 1.〈朝鮮佛敎敎育制度의 缺陷과 改善〉
114)琴巴生,《朝鮮佛敎月報》第13號, 1913. 2.〈論敎科改良〉
115)《佛敎》46. 7合 , 1928. 5.〈朝鮮佛敎學人大會를 보고〉資料全集 7, pp. 3.
116)六堂 崔南善에 대해서는〈崔六堂〉,〈同崔六堂三防峽述懷〉,〈洛山寺與盧松溪崔六堂 共賦〉,〈秋夜訪 崔六堂不遇〉등이 있다.
117)石顚山人,《海東佛敎》第3號, 1941. 1.〈朝鮮의 說法과 世界의 布敎〉
118)《佛敎》第41號, 1927. 12. 15.〈현재 楡岾寺 東國經院. 높은 수준으로 경영됨〉上揭 書, 第44號, 1928. 2. 資料全集 7, pp48-51.〈東國經院을 紹介하노라, 負 彷徨하는 學 侶에게〉
119)《石林草》〈內藏山鶴鳴禪師舍利塔銘竝序〉
120)姜裕文,〈內藏禪院一瞥〉,《佛敎》第46.7合號. 1928.4.5. 資料全集7, pp82-83
121) ____ ,〈朝鮮佛敎中等敎育問題〉, 《金剛杵》第23號 1937.3. 資料全集 53, pp60.
122)《慶北佛敎》34號 〈五山佛敎學敎 學生諸君에게 一言함〉
123)《佛敎》第48號 1928.6. 資料全集 7, pp.97.
124)김진원,〈불교일요학교 경영안〉《佛敎》第99號 1932.9. 資料全集 15, pp.19-25.
125)불교청년회 야학부《東亞日報》1921.5.1. 新聞資料集 上, pp.462.
126)《佛敎時報》 第4號. 1935. 11.〈多率寺講院이 海印寺講院과 合倂〉
127)上揭書, 第96號. 1943. 7. 〈南長寺 觀音講院의 尼僧講院生 修了〉
128)《朝鮮佛敎月報》第13號,〈讀敎史論〉(續) 資料全集 44.
129)《海東佛敎》第6號,〈佛敎全體와 比丘一衆〉
130)克 生, 《朝鮮佛敎月報》第16號〈宗敎的敎育이 國民을 가주함〉資料全集 44.
131)睦楨培,《韓國現代文化史大系》7,〈韓國宗敎運動史〉高大, 民族文化硏究所, pp.143.
132)《佛敎》第21號, 資料全集 3.〈布敎에 대한 芻議〉
133)《海東佛敎》第2號, 1913.12〈多虛는 不如小實〉
134)《海東佛敎》〈知行合一의 實學〉
135)石顚山人,〈朝鮮의 說法과 世界의 布敎,〉《海東佛敎》第3號, 1914, 1.
136)映湖生,〈將何以布敎利生乎아〉《海東佛敎》第2號
137)《韓國近世佛敎百年史》布敎編年, pp.25-26.
138)《佛敎》40號
139)《海東佛敎》第2號〈將何以布敎利生乎也〉
140)《朝鮮佛敎月報》第 17號,〈佛敎維新과 書籍刊行〉1913.
141)《朝鮮佛敎月報》第19號〈신어신문호불채청〉 1913. 8
142) 金泰洽,《佛敎》第17號,〈朝鮮佛敎叢書 刊行에 對하여〉
143)《海東佛敎》創刊號,〈海東佛報緖言〉'海東佛敎는 何爲而發也오, 憂其海東佛敎의 零 替不振하야 思欲發揮於盡世界而發也니라'
144)上揭書, 第3號.〈朝鮮의 說法과 世界의 布敎〉
145) 上揭書, 上同
146)《海東佛敎》第2號,〈佛敎와 歲新의 想華〉
147)《朝鮮佛敎通史》下935-939,《李朝佛敎》p.920-925.《東亞日報》1920, 6. 20.
148)《海東佛敎》第8號.
149)《海東佛敎》第7號.
150)朴先榮, 〈韓國佛敎의 人間形成論〉《韓國學報》12輯,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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