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아라의 편지 Letter From Māra(=魔羅)
아잔 뿐나담모 Ajahn Puṇṇadhammo지음
김한상 옮김
The Wheel Publication No.461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2006
법륜 / 열아홉
고요한 소리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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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스러운 부하들에게
발신 마아라 나무찌 대왕
수신 전全 마군 사령관
작전대상 지역 인간계, 태양계, 지구
안건 현 상황 및 향후 역점 사업
일자 현現 불기佛紀 26세기
친애하는 나의 군사령관들이여!
충성스러운 그대들의 헌신적인 노력을 이 자리를 빌려 치하해 마지않노라.
모두 주지하고 있듯이 우리의 웅대한 전략은 전반적으 로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다. 우리의 자그마한 놀이터인 윤회계를 방황하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아직 자신들이 처 한 곤경의 본질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 므로 우리는 마땅히 그런 어리석은 인간들이 앞으로도 우리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없도록 배전의 노력을 기울 여야 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 뭐라 불러야 할까. 매우 영리한 물고기랄까, 그 한 마리가 우리의 그물을 뚫고 나 갔던 사건을 모두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본인은 그 엄청 난 실책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 그대들도 군사훈련을 통해 그 내용을 모두 숙지했을 것이니 이 자리에서 다시 자세히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도 당시에는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밝혀두고 싶다. 내 딸들의 유혹의 춤으로도 그를 흔 들 수 없었고, 나 스스로도 끔찍할 정도로 가공스런 형상 을 지어 협박도 해봤지만 그에게만은 소용이 없었다. 더 참담한 것은 그가 우리의 작은 게임(윤회)의 본질을 확실 히 꿰뚫어 본 이후에라도 내가 그를 설득해서 그 비밀을 혼자만 알고 발설하지 못하게 만들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나로선 당시 그를 거의 납득시킨 줄 알았었다.
이미 지난 일이야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한 번 뚫린 작은 구멍을 통해 이후에도 인간들의 탈출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큰 문제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최 근의 여러 징후들로 미루어 그 구멍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작아지고 있다. 우리 그물에 갇힌 어린 물고기들로선 그 그물 바깥에 진정한 행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 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들이 종국에는 통조림이 될 운명이라는 사실에 대해 생각할 틈이 없도록 그들을 엉뚱한 방향으로 내모는 일만 계속하면 된다.
나의 충성스런 군지휘관들이여! 나는 이 자리를 빌어 그대들의 성공적인 임무 수행을 치하하며, 앞으로도 각자 맡은 바 임무 수행에 최선을 다해 줄 것을 재삼 당부하는 바이다. 오늘은 그러한 우리의 다짐을 되새기는 의미에서 각 부대별로 차례차례 임무 점검을 해보기로 한다.
제1군 - ‘감관적 욕망’ 부대
그대들이야말로 나의 제1군으로 칭송받아 마땅한 용사들이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대들만으로도 능히 통제 가능하다. 제1군 예하 5개 사단, 즉 시각 사단, 청각 사단, 후각 사단, 미각 사단, 촉각 사단들은 각각 보유하고 있는 감관적 쾌락의 마력으로 우리의 희생물들을 공격하라.존재들은 너희들 곁에 오고 싶어 자신들의 일생을 다 바치고 있다. 너희들의 희생 제물은 기꺼이 그리고 앞 다투어 제단에 오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공격의 고삐를 늦춰서는 아니 된다. 우리끼리야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우리가 무기로 쓰는 상품이 겉만 번지르르한 허장성세일 뿐이라는 사실을 저 들이 눈치 챌 위험성은 늘 있다. 감관적 쾌락이라는 것이 실은 전적으로 불만족스럽고 실체 없는 가공물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머리를 짜낸다한들 완벽할 정도로 만족스럽고, 지속적이며 견고한 쾌락은 찾아낼 수 없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절대다수의 인간들 이 아직은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바보 같은 저 어린 녀석들은 모두 자신들이 지금까지 누린 쾌락만이 불 완전할 뿐, 그 어디선가에서 자신들을 영원히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요술지팡이를 어떻게든 찾게 될 것이라 믿 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생각인데도 막상 그들은 이런 것을 골똘히 파고들지 않는다. 그들은 당장에 좋은 것만 생각하지 앞으로 닥쳐올 결과 같은 것은 염두에도 두지 않 는다. 그러니 우리는 그저 그 어리석은 자들이 계속 한 눈 팔며 즐기는 일만 일삼도록 몰아가기만 하면 된다. 인간 들이 싫증내는 기색을 보이는 즉시 새 미끼를 계속 던져 주는 것이다. 그리고 성욕과 식욕처럼 기왕에 그 효력이 입증된 미끼들도 시대 변화에 맞춰 새롭게 변형시키고 새 로운 맛을 더해 주는 노력도 기울여야 한다.
친애하는 나의 군사들이여, 그대들의 임무 수행이 지금까지 성공적이었음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성욕을 예로 들어보자. 성욕이야말로 우리가 10억 년이 넘게 줄기차게 써먹은 최상의 무기이다. 그 단순한 생물학적 작용 속에 창조적 활용 가능성이 무한히 내재되어 있다. 그건 정말 얼마나 멋진 속임수인가! 그들이 그처럼 열광해 마지않는 기이하고 놀라운 변화, 그것도 따지고 보면, 감정의 흐름 이라는 전류를 약간의 잔재주를 부려서 배선配線해 놓는 일과 간단한 육체적 접촉의 설치 이외에 달리 무엇이 있는가?
달리 말하면 우리가 관여하고 있는 일은 섹스 그 자체 가 아니라 그것에 부수되는 온갖 주변적인 일들인 것이다. 즉 온갖 기대와 그에 따른 준비 행위들, 온갖 액세서리들 그리고 감정적 잡동사니들. 다행히도 세상에는 대부분의 인간들을 평생 매달리게 하고도 남을 만큼 이따위 시시한 소재들이 무궁무진하고, 게다가 우리는 한 생애 당 한 번 정도만 관여해주면 족하다. 그들은 같은 것을 더 누려보겠 다고 계속 되돌아올 테니까. 안 돌아오고 배기나? 나는 근래 이 분야에서 우리가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 두고 있다는 사실을 여기서 특별히 밝혀두고 싶다. 과학 기 술이 바로 그 대표적이고 소중한 자산이다. 은판사진술13 을 쓸 줄 알게 되자마자 그들은 여자의 나신부터 마구 찍어 대기 시작했다. 물론 우리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컬러 사 진술과 영화와 비디오 기술까지 개발하게끔 만들었다. 그 결과 인간들은 성적 욕구를 충동질하는 이미지들을 언제 어디서나 쉽게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최근에 는 인터넷을 통해 그런 자료들이 무차별로 뿌려지고 있으니,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은밀히 그런 것들을 찾아다닐 필요조차 없어졌다. (나도 웹페이지 하나쯤은 가져야 될지 모르겠다. 아니 아니지, 그런 귀찮은 일을 자초할 필요야 없겠지)
과학 기술 자체가 크게는 감각적 욕망의 산물이다. 좀 더 편리하려는 또 쾌락을 쉽게 얻으려는 인간들의 욕망 때문에 여러 발명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기술이 그들의 경제 전반을 운전하여 가뜩이나 짧은 인간들의 삶을 더욱 눈코 뜰 새 없도록 만들고 있다. 그들은 원한 다. 아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동차가, 스테레오가, 컴 퓨터가 그리고는 다시 더 새로운 자동차가, 더 새로운 스 테레오가, 더 새로운 컴퓨터가……. 우리는 그들로 하여금 이따위 갖가지 기계 장치들에 계속 욕심내도록 만들어 놓 기만 하면 된다. 일이 많아질수록 자신을 되돌아볼 시간 은 줄어들 테니까.
우리 대大적수의 가르침이야말로 이렇게 원대한 우리 사업의 유일하고 중대한 장애물이다. 그는 감관적 쾌락에 내재된 위험성을 인간들에게 거듭거듭 경고했다. 그러니 우리라고 그런 대적수를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우리는 여러 세기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그가 설파한 진리에 갖가지 엉터리 가르침을 뒤섞고 마침내 그들이 바른 법[正法]을 찾기 어렵도록 만드는 데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 또 한 인간들 중에는 ‘스승’을 자칭하고 나서는 자들이 많은 데, 그들 대부분은 신나서 우리 이론을 자기 말인 듯 떠들고 다니는 자들이다. 그 용감한 자들은 출리出離의 개념을 흐려놓는 데 만족하지 않고, “열정 그 자체가 바로 깨달음이다.”라는 황당한 주장까지 서슴없이 펼친다. 게다가 세상에는 그런 미끼를 좋아하는 물고기들 또한 무수하니 우리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밖에!
만약 인간들이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하거나 아니면 좀 더 고약하게도 욕망을 자제하고 명상 수행까지 행하는 불행한 상황이 닥친다 해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자칫 그런 상황을 방치하다가는 그들이 정말 우리 손아귀를 빠져나 가는 길을 찾아내는 위험천만한 사태까지도 벌어질 수 있다. 그들이 우리의 속임수에 의한 행복이 아닌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면 우리는 속수무책이 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상황에 이르기 전에 모든 수단 을 강구하여 그들의 주의를 산란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혹시 그들이 수행을 한답시고 조용히 앉더라도 적어도 한 동안은 그 마음을 딴 곳을 헤매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설사 그 대상이 불선한 것일지라도 잠시라도 집중된 마음은 그 대상을 영상화하고 붙잡게 되는데, 이렇게 생겨난 공상이야말로 우리에게는 실로 유용한 무기이다. 저들이 자신들의 신체의 참된 본성을 관찰하는 단계에 이르도록 방치해둬서는 안 된다. 그대들도 잘 알고 있겠 지만, 백치가 아닌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끌고 다니는 살덩어리 몸뚱이가 본질적으로 불결하고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어리석게도 겨우 남들과 잘 어울리고 싶어 그 냄새나는 몸뚱이를 쉬지 않고 씻어대고 향수까지 뿌려댄다! 그렇게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신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소위 특정 모습을 ‘아름다움’이라고 강조하는 고도의 술수를 써서 인간들의 관심을 늘 자기 외모에나 두도록 만들면 된다. 그거야말로 참으로 손쉽고 효과적인 계략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들이 몸에 관한 마음챙김을 하지 못하도록 세상의 온갖 풍설을 속삭여 주는 일을 등한히 해선 안된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지? 몸의 추함에 대 한 명상(부정관)은 ‘생의 부정이요 극도의 긴장이며 억압적’이라고 속삭이라는 말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이 바로 그런 말이니, 이보다 더 쉽고 효과적인 방법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들에게 한꺼번에 두 마리 토끼(세간과 출세간)를 잡을 수 있다는 허황된 믿음을 줘야 한다는 것도 잊어서는 아니 된다. 그런 방법들이 일단 먹혀들기만 하면 그 다음에는 아무런 걱정이 없다. 명상이든 뭐든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두 라. 두 가지 중에 어느 것도 버려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한, 그들은 여전히 우리 손아귀에 들어 있는 것이다.
마아라는 팔을 올려 머리 뒤로 깍지를 끼고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다음 편지를 구상한다. 잠시 휴식의 틈이 생기자 여비서가 컴퓨터 앞으로 다가가 무선 마우스를 움켜 쥔다.
“마아라님은 제1군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네요.”
그녀는 연신 마우스를 클릭해 화면을 바꿔가며 천인천녀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핀다. 그러다 백조가 늘씬한 목에 천상의 감로수병을 걸고 우아한 자태로 떠다니는 연못가에서 멋쟁이 천인들이 노니는 장면에 화면을 고정시킨다. 재미있게 뛰놀던 천인들이 이따금 감로수를 마시러 다가서기라도 하면 백조들 이 장난스럽게 물보라를 일으키며 수면 위로 날아오른다.
“어떻게 즐기는 게 재미있는 건지 마아라님은 정말 잘 아시네요!”
마아라가 음흉하게 대답한다.
“허허, 그걸 이제야 알았소? 그래, 아무리 제1군이 강력하다고 해도 만사불여튼튼이라 했으니 지원군을 보내서 나쁠 게 없겠지.”
여비서는 어느새 천인들의 놀이판에도 싫증이 났는지 또 다 른 세상들을 향해 점점 빨리 마우스를 클릭한다. 마아라가 그런 그녀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한다.
“자, 이제 그쯤 해두고 다시 일을 시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