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十一章 되찾은 사랑, 새롭게 피어난 원한.
2
전혈은 폭우 속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릎을 꿇고 앉았다지만 워낙 키가 커서 조금 키 작은 사람
이 서있는 것과 비슷했다. 한편으로는 너무 말라서인지 거세게
몰아치는 폭풍우를 견딜 수 있을까 싶기도 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손에서 한시도 떠난 적이 없던 애검(愛劍)
뇌성천(雷聲天)은 무릎 앞에 가로놓았다. 그리고 폭우를 뚫어
지게 응시했다.
빗물이 얼굴을 때리고, 눈썹을 지나 눈으로 들어와도 철천지
원수를 눈앞에 둔 것처럼 화염에 불타는 눈을 부릅떴다.
'졌어. 졌어. 진 거야……'
회한(悔恨)이 가슴아프게 몰아쳤다.
검을 뽑지 못했다.
적엽명의 눈동자를 본 순간, 거대한 곰이 두 팔을 활짝 벌리
고 달려드는 느낌을 받았다. 검을 뽑아서는 안 된다는 속삭임
이 들려왔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협박도 들었다.
수많은 무인과 비무를 했고, 그 중에는 생사를 점칠 수 없을
만큼 강한 자도 있었지만 이런 느낌은 한 번도 들지 않았다.
'다른 때와는 달랐어. 담담할 수 없었어. 나는 나 자신에게
진 거야. 마음이 진 거야.'
쇄각대팔검(鎖角大八劍)은 신랄하기가 폭풍우와 같다.
빠르기로는 석가의 무음검과 필적할 수 있고, 중후함으로는
범위가 익힌 대검법과 우열을 논할 만 하다. 거기에 일 초식을
전개하는 순간부터 팔 초식으로 마무리 지을 때까지 상대가 반
격할 수 없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결국 상대는 팔 초식이 끝난 다음에나 쇄각대팔검의 사나움
에서 숨을 돌릴 수 있게 된다. 그 때까지 살아있다는 전제 하
에서.
'공격할 수 없었어. 공격하고 싶었는데, 검을 겨루고 싶었는
데……'
자신에 비하면 죽기는 했지만 외관영 영주인 석두는 뛰어난
편이다. 심마(心魔)를 이기고 검을 겨뤄봤으니. 어쩌면 석두는
심마가 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는 분명 한 수 위
다. 필경 풍부한 실전경험이 뒷받침 해주었겠지.
그것만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해남파 무인들의 가장 큰 단점이라면 바로 이 부분이다.
부족한 실전경험.
싸울 기회가 없다. 장문인이 중원 진출만 막지 않았다면. 우
화대원이 있으니 사람을 죽일 기회는 종종 생기지만 그건 일방
적인 도륙이지 정당한 비무라고 할 수 없다. 산에 맹수라도 있
다면 그런 대로 아쉬운 부분을 보충하련만 맹수도 없다.
가끔씩 살수가 들어와 소란을 피울 때면 오히려 즐겁다. 자
신의 가문을 공격해 주기만 한다면. 그렇지 않을 경우, 외관영
무인들의 차지가 되어버린다.
적엽명은 실전 기회가 많았을 게다.
그가 명부객이라면 남만의 무신인 사왕을 제거한 인물이 아
닌가. 범가주인 광풍사랑 범장과 엇비슷한 무위를 보여주었던
고수…… 그런 자를 죽였다면 운이 좋다고만 말할 수 없다. 그
건 실력이다. 무공이다. 적엽명이야말로 천부적인 살수다.
늑대…… 그렇다. 비가를 들어서면서 보았던 늑대의 눈이었
다. 검은 동공이었지만 늑대처럼 잿빛으로 번들거렸다.
전혈은 애검 뇌성천을 보기가 부끄러웠다. 가문으로 돌아갈
낯도 없었다.
날이 밝으면 정식으로 도전해 볼까?
그런 생각을 가지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포기해 버렸다.
적엽명의 눈을 보는 순간 그는 깨달았다.
이 싸움은 해서는 안 되는 싸움이다.
몸은 일찌감치 물러섰는데 마음이 승복하지 못하는 것이다.
상대가 아닌 줄 자신이 아는데 고집을 부려봐야 목숨밖에 더
뺏기랴.
목숨이 아까운 것은 아니다. 실없는 패배가 속상할 뿐.
'석두처럼 시신이 되어 돌아간다면……'
그러면 마음이 한결 개운할 것 같았다.
적어도 검도 뽑지 못했다는 멍울을 지고 일평생을 사는 것보
다는 낫지 않겠는가.
승산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적엽명이 전검을 익혔다지만 쇄각대팔검 또한 무수한 세월을
거치면서 다듬어지고 다듬어진 실전의 결정체.
초식(招式)에서는 절대 밀리지 않는다. 어쩌면 한 수 위의
기량을 지니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자신을 가질 수 없
다. 그 점이 이해되지 않았다.
'놈과는 안 돼. 놈은…… 강…… 해.'
전혈은 눈을 부릅뜨고 있지만 좀처럼 투지가 일어나지 않았
다.
'하하! 겨우 이 정도였는가. 겨우 이 정도 무공으로 천하라
도 얻은 냥 거들먹거렸는가. 전혈아. 전혈아! 뇌성천을 대하기
가 부끄럽지 않은가. 네가 과연 전가를 떠맡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전혈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빗물과 섞여들었다.
끝없이 추락하는 마음을 다잡을 수 없었다.
문득문득 검을 섞어봐야 승패를 논할 수 있을 것 아니냐는
질타(叱咤)가 고개를 쳐들지만 이미 꺾여버린 마음은 뇌성천에
손을 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전혈은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있
었다.
이 밤이 다 가도록 앉아있을 예정이었다. 그래도 투지가 일
어나지 않으면 한 낮을 밝히고, 그래도 투지가 일어나지 않으
면 또 한 밤을 밝히고……
전혈은 쏟아지는 빗줄기 너머를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노려보
았다.
그 곳에는 적엽명이 있었다.
의자에 편히 앉아있는 모습, 손톱을 만지작거리는 여유, 허
름한 마의에 베어있는 피냄새, 늑대처럼 번들거리는 안광(眼
光)…… 전신(戰神)의 화신(化身).
지난 팔 년 간 자신도 많이 변했지만 그도 많이 변했다. 그
리고 그는 해남파 다른 무인들과는 달리 꼭 넘어야 할 산으로
부각되었다.
"이 놈의 비는 언제 그치나."
"올 여름 동안은 내내 퍼부을 모양일세."
"비가 오지 않으면 살을 익혀버릴 듯 뜨거우니 원……"
폭우가 쏟아지는 초원을 볏짚으로 만든 도롱이만 걸치고 걷
는 일행이 있었다.
아직 날이 밝지도 않은 이른 새벽이다.
십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은 부지런히 걸음을 떼어놓고 있지
만 쏟아지는 폭우를 피할 생각이라면 어림없는 행동이었다.
물에라도 들어갔다 나온 듯 흠뻑 젖은 의복, 밤새도록 먼길
을 걸어온 듯 얼굴 가득히 자리한 피로.
"제길! 뜨뜻한 물에 몸이나 푹 녹여봤으면 좋겠네."
"쉿! 이 사람들아! 목소리 좀 낮춰."
"다 왔나?"
"저기 게슴츠레하게 보이는 게 비가 아냐?"
"맞네. 다 왔네."
일행의 발걸음은 빨라졌다.
"난 가자마자 밥부터 먹어야겠어. 이거 배가 고파서."
"이 몸으로 밥이 들어가? 따끈한 물에 푹 녹이고 나서 싱싱
한 야채에다 밥 두어 그릇 후딱 해치우고 마유주 한 사발 들이
키면…… 캬!"
"흐흐…… 그럼 잠이 솔솔 오겠지?"
"어차피 이렇게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는 종부도 못할 텐데,
뭐."
"에구! 잠 잘 생각을 하니 난 벌써 눈꺼풀이 무거워지네."
"하하!"
사내들은 각양각색이었다.
앳되어 보이는 젊은이가 있는가 하면, 완숙함을 풍기는 중년
인, 집에서 손자나 쓰다듬을 노인까지 있었다. 말투도 조금씩
달랐다. 광동 사투리를 쓰는 사람부터 사천(四川) 사투리를 쓰
는 사람까지 있어 같이 이야기를 주고받지만 않는다면 일행이
라 믿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이거 다 쓰러져가는 폐가(廢家) 아냐."
"말도 못 들었나? 이미 망한 집안이라잖아."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한데."
"그래도 지금은 나은 편이네."
제법 사정을 아는 듯한 자가 나서며 말했다.
일행은 모두 그를 주목했다.
십여 명의 사내들 중에 유독 이 사내만이 해남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내들은 육지에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해남도 사정을 정확히 몰랐다.
"두어 달 전만 해도 들쥐만 바글거렸지. 과부와 딸네미가 살
았지만 계집 둘이서 집을 돌볼 수 있었겠어?"
"흐흐! 잘 하면 계집 맛 좀 볼 수 있겠군. 섬계집들의 속살
맛은 어떤지 궁금했단 말씀이야."
"쉿!"
"왜?"
"이 사람아! 목 조심해. 몰락한 집안을 일으키겠다고 발버둥
치는 인간이 이 집 둘째 아들인데……"
"사생아라면서?"
"쉿! 목 조심하라니까! 그 둘째 아들이란 인간이 살귀(殺鬼)
나 다름없어. 걸핏하면 미친 인간처럼 검을 뽑아들고 설친다니
까 목들 잘 간수해."
"성질 한 번 더러운 놈이군."
일행들은 누구 하나 기죽지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 노비(奴婢)로 있다가 면천(免賤)된 자들인지
라 더러운 일이나 힘든 일에는 이골난 사내들이었다.
해남도 출신의 사내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집을 일깨
우러 대문으로 다가설 때였다.
"응?"
사내의 발끝에 기다랗고 묵직한 무엇인가가 걸렸다.
나뭇가지라고 할 수도 없고, 통나무는 더더욱 아니고…… 촉
감이 이상했다.
사내는 발에 걸린 것을 주워들었다.
"이건 검이잖아?"
예사롭지 않았다.
동이 트지 않았고, 더욱이 폭우가 쏟아지는지라 사위를 분별
하기 힘들지만 검집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은한 묵광(墨光)은
일견하기에도 보검일 것 같다는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검이 왜 이런 곳에 있지?"
"그 둘째아들이란 놈, 알만하다 알만해. 제 생명을 함부로
굴리는 놈이니 싹수가 노란 놈이군."
"검을 내던지고 다니다니…… 어이, 그거 돌려주지 말고 땅
에 묻어버리지 그래."
"그럴까?"
"그러자구. 돌려줘 봐야 고맙다고 인사할 인간이야? 원래 무
인이란 놈들, 제 잘난 맛에 살잖아. 이번 기회에 골탕 좀 먹어
보라지."
"누구 보는 사람 없나?"
"아따! 사람하고는…… 이 꼭두새벽에 누가 본다고 그래. 얼
른 파묻어 버려."
일행의 의견은 일치했다.
가랑비도 아니고 폭우가 쏟아지는데 도롱이 하나만 내주면서
먼길을 가라고 할 수 있느냐, 무인들이란 으레 그런 놈들이니
그 놈들이 생명이라고 말한 검을 숨겨놓고 반응을 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등등 많은 원망이 쏟아져 나왔다.
연장은 검이면 충분하고, 폭우가 땅을 무르게 해놓아 서너
자 깊이로 파는 것은 간단하다.
검을 주은 사내가 막 땅을 파려 할 때였다.
"검을 그 자리에 놔."
조용한 울림이었다.
"헉!"
땅을 파려던 사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다가 난데없이 들려오는 소리에 스스로
기겁한 것이다.
사내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음성이 들려온 곳을 훑어보
았다.
역시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기
에는 귓전에 어른거리는 잔향(殘響)이 너무 뚜렷했다.
"들었지?"
"응, 응……"
여태까지 신이 나서 떠들던 사내들도 주눅이 들은 듯 음성이
들려온 곳을 흘깃거렸다. 상대가 만약 무인이라면? 검을 놓아
둔 사람이라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일이지 않은가.
"계…… 여, 여자였지?"
"으응……"
사내는 께름칙한 생각에 검을 살그머니 내려놓았다.
"저…… 우리는 해남파에서 보낸 사람들인데…… 종부를 살
펴보라고 해서……"
"……"
어둠 속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후두둑! 후둑……!
빗방울 소리가 귀신의 호곡성(號哭聲)처럼 크게 들렸다.
"헤헤! 비가 많이 와서…… 어디로 가야 할지……"
"너희는 집안으로 들어올 자격이 없어. 내 눈앞에서 사라져.
비가에 볼 일이 있거든 날이 밝은 다음에 다시 와."
또렷한 여인의 음성이었다.
"소, 소저. 헤헤! 이 근방에는 비를 피할 곳이 없어서……
죄, 죄송하지만 안으로 들어가서……"
"꺼져."
"소, 소저……"
"셋을 셀 동안 사라지지 않으면 내가 사라지게 만들 거야.
하나!"
빈말이 아닌 것 같았다.
나직하지만 여인의 음성에는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분명히
검을 묻어버리자는 말이나 아니면 계집 속살 운운한 말 중에
하나를 들었음이 틀림없다.
"둘!"
"가, 갑니다. 가요."
십여 명의 사내들은 황급히 뒤로 돌아 내빼기 시작했다.
유소청은 대문 한쪽 구석에 붙박인 듯 앉아있었다.
전혈이 떠나갔다.
애검 뇌성천을 버리고, 해남오지가 되면서 장문인으로부터
하사 받은 소검(小劍)도 버리고, 왼손 새끼손가락마저 잘라버
리고 떠났다.
유소청은 어느 것 하나 거두지 않았다.
그가 버리고 떠난 자리에 그대로 놓아두었다.
목부들이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면 장검 옆에 소검과 손가락
하나가 놓여져 있는 것을 발견했으리라.
그녀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적엽명이 적인가? 아닌가?
적이라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적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돌아가는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점점 적이 되어가고 있다.
아직은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리고 팔 년이 지났으
니 지난 공과(功過)는 사라졌다고 하지만 해남도 무인들은 그
를 적으로 간주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전혈이 좋은 본보기다.
그녀는 전혈이 말없이 떠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숨 막히는 기(氣)와 기의 싸움에서 전혈은 졌다. 자신이 뇌주
반도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은 담담했다. 졌다는 생각마저 잊어버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신을 짓누른 사람이 다름 아닌 적엽명이고, 그에
게는 지든 이기든 상관없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해오던 터였
다.
생각을 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머릿속에, 가슴속에 각인(刻印)되었
고, 팔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지워지지 않았다.
똑같은 경우를 전혈이 당했다.
하지만 전혈의 반응은 달랐다. 그도 사내, 적엽명도 사내.
같은 해남파 무인이라면 누가 강하던 일단을 축복해 줄 일이지
만 타고 넘어야 할 대상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적엽
명을 친우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손가락을 잘라버렸다는 것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태도
다.
그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가 다시 적엽명 앞에 모
습을 드러냈을 때는 반드시 검을 뽑아 승패를 가를 게다. 같은
무인이기에 전혈의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
그녀는 가식을 버릴 때가 의외로 빨리 다가왔다는 사실을 절
감했다.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눈을 뜨면 잠자기 전에 보았던 풍경 그대로 다가왔고, 만나
는 사람들의 얼굴도 그대로였다.
세상은 고요했다.
그래서 시간이 많은 줄 알았다.
그러나 오늘, 전혈이 떠나는 모습을 보자 모든 풍경이 하루
아침에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상은 그대로일 것이다. 하지만 적엽명은 그렇지 않다. 당
장 오늘이라도 누가 찾아와 비무를 요청할 지 모른다. 그리고
숨결이 끊어진 시신을 자신이 손수 거두는 일이 발생할지도 모
른다.
그녀는 잠을 잘 수 없었다.
자괴감(自愧感)을 폭우에 씻어버리고 일어설 줄 알았던 전혈
이 손가락마저 잘라버리고 떠나갈 때는 소름이 오싹 끼쳤다.
'어느 정도 사랑하고 있는가. 아버지, 어머니, 형제…… 모
두 버려야 하는데……'
문설주에 머리를 기대고 앉은 유소청은 폭우 속에 그렇게 붙
박였다.
'소청……'
적엽명도 간밤을 꼬박 밝혔다.
그가 서있는 곳은 잎이 무성한 감나무 아래.
잎이 무성하다고는 하지만 그의 온 몸은 빗속에 환히 노출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싸움에 끼여들지 마라. 떠나는 거야. 전혈이 그런 것처
럼 아무 미련을 두지 말고 떠나…… 떠나……'
적엽명은 암울한 눈으로 어둠 저편을 바라보았다.
한치 앞을 분별할 수 없는 어둠 속이다. 폭우 속이다. 하지
만 그는 유소청의 작은 동체를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지난 팔 년 간 머릿속에서 한시도 지워본 적이 없는 여인.
창자가 삐져 나오는 중상(重傷)을 입었을 때도 그녀를 생각
하며 아픔을 참았다. 고열에 시달려 비몽사몽(非夢似夢)간을
헤맬 때도 유소청은 옆에 있어 주었다.
어떻게 잊겠는가.
유소청을 이런 식으로 만나 이렇게 갈등을 겪을 줄은 짐작조
차 하지 못했다. 시간이 훨씬 흐른 후에, 서로가 초로의 고개
를 넘어섰을 무렵에야 만날 줄 알았는데.
아직 혼인을 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뛸 듯이 기뻤다
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모르리라. 그녀는 백부의 원한만을 생각하고 있으리라.
"아직도 널 사랑하고 있어. 손을 잡아 줘. 힘들 거야."
형의 말을 듣는 순간, 유소청의 진심을 알았다.
허나 손을 잡아주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떠나기를 바라는 게다.
이번 싸움은 어느 싸움보다 힘든 싸움이다.
적을 알고 있다면 대처할 방법이나 알 텐데. 적이 어느 정도
강한지, 질 것인지 이길 것인지 파악할 수 있을 텐데.
이번에는 형체가 없는 적과 싸워야 한다.
어쩌면 팔 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도망치듯 해남도를 빠져나
가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이런 혼란 속에 사랑하는 여인을 끌어들이기는 싫었다.
'떠나. 빨리……'
꼬끼오……!
수탉이 홰를 치기 시작했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물줄기가 쏟아지고 있지만 그래도 날
은 밝아왔다.
유소청, 적엽명…… 둘은 생명 잃은 조각상처럼 움직일 줄
몰랐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