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문 의 <#둥지의_철학> 나의 철학과 그 방법
<우리사상연구소>는 이 땅에서 자기 나름의 독자적인 학문의 길을 가고 있는 학자 16분의 '학문'의 변과 ‘학문방법론’에 대한 글을 모아 책으로 출간하였다. [우리 학문과 학문 방법론...지식산업사, 2008.] 이 책에 실린 박이문 선생의 '철학’에 대한 변과 그 ‘방법론'에 대한 글을 소개한다. 두 번에 나누어 올린다.)
목적을 전제하지 않은 방법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방법의 가능성이 전제되지 않은 목적이 불가능한 것 또한 자명하다. 목적과 방법, 또는 방법과 목적 간의 관계에 대한 이 같은 명제는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지만, 실천적인 세계에서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객관적 사실이다. 목적과 방법의 위와 같이 모순된 관계는 소크라테스적 뜻에서 '변증법적이며 상호 보충적이며, 서로 얽힌 뫼비우스(Moebius) 끈처럼 순환적이다.
목적에 따라 방법의 선택은 달라진다. 목적은 크게 지적, 기술적 및 실천적 범주로 분류할 수 있고, 이 같은 각기 다른 범주들은 그 안에서 다시 수없이 많이 세분된다. '지적 목적'은 진리탐구를 함축하는 순수학문의 형태로 나타나고, 모든 학문은 각기 그것이 추구하는 탐구대상의 종류에 따라 크게 ‘철학’과 ‘과학’으로 범주화 되고, 이 두 종류의 학문은 다시 각기 수많은 종류로 세분될 수 있는 대상의 구분에 따라 세분된다. 이러한 ‘학문적 분절화’는 거의 무한히 계속될 수 있다. 목적과 방법이 뗄 수 없이 상호적으로 얽혀 있는 이상, 학문대상의 세분화 및 제구성에 따라 '학문적 목적도 상대적으로 다양하고 복잡할 수밖에 없고, 학문적 목적의 다양화에 상대적으로 그 ‘방법’도 필연적으로 다양하고 복잡하게 된다.
만일 내가 어떤 하나의 '삶의 목적'을 갖고 살아 왔다면, 그것은 어떤 것이며, 만일 그 목적이 지적인 영역에 속하는 학문이라는 ‘진리 탐구'의 범주에 속하고, 그 학문의 목적이 '철학'이라는 진리 탐구에 속한다면, 내가 추구한 철학적 인식, 진리발견의 대상은 무엇이었던가? 내가 '철학'이라는 학문의 틀에서 추구했던 것, 즉 ‘진리'는 어떤 것이었으며, 그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나는 과연 어떤 '방법'을 갖고 있었으며, 그러한 방법 혹은 방법들이 있었다면 그것을 적용함에 어떤 문제가 있었던가?
1. 가장 정밀한 #세계관으로서의 철학
#철학 이라는 학문적 개념의 다원성
그리스에서는 아주 고대로부터 '철학'이라 부르는 학문이 가장 근본적인 #진리_탐구 의 양식으로 존재해 왔고, 그러한 전통이 르네상스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서양문화권에서 전승되었고, 오늘날에는 세계 전체에서 자연스럽게 전이·유통 그리고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의 탈레스나 소크라테스, 인도의 <우파니샤드> 경(經)이나 <바가바드기타> 경(經)의 집필가들 그리고 중국의 <역>의 집필자들이나 노자, 공자, 장자,맹자 등에서 시작하여 주자, 데카르트, 칸트, 헤겔, 니체, 후설, 하이데거 프레게, 카르납, 비트겐슈타인, 콰인, 크립키, 사르트르, 푸코, 데리다, 로티 등이 추구한 문제들을 통털어 '철학적’이라 부르고, 그들의 저서를 '철학'의 범주에 넣고, 그러한 저서를 쓴 저자들을 합쳐 ‘철학자'라 부른다.
이러한 관례에도 불과하고 '철학'이라는 학문은 단 한가지로 정확히 정의될 수 없다. 위와 같은 이른바 대표적 철학자들이 학문의 공동적 대상과 그 목적이 과연 존재 했으며, 그들의 저서들이 주장하는 진리 내용의 공통점이 과연 존재하며, 존재한다 해도 그것이 정확히 한 가지로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늘날까지도 '철학'이라는 학문이 정확히 무엇에 대한 어떤 종류의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냐에 대한 시비가 위와 같은 철학자들 가운데에서도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철학'이라는 학문의 유일하고 보편적 규정의 불가능성에 대한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증거다.철학을 한다는 뜻에서, 그리고 #철학적_진리 를 발견하겠다는 의도에서 나는 지난 40여 년 동안 줄곧 위와 같은 '철학자'들의 저서를 두루 읽었다. 그러나 지금 뒤돌아보면, 내가 알고자 했던 핵심적 문제의 하나는 '철학적 진리 자체만이 아니라, “철학이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자기반성적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는 일이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은 사유와 탐구양식의 하나인 철학의 본질이 자기반성성에 있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철학이 어느 정도 각자 자기 나름대로 정의될 수 있고, 그 정의에 따라 철학적 목적과 방법 및 그러한 방법으로 얻어낼 수 있는 철학적 대답도 달라 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철학의 특수성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2. #발견으로서의 철학과 #개념분석으로서의 철학
철학은 서로 다르고 때로는 서로 모순되는 수많은 철학 개념규정이 존재해 왔었고 현재도 그 문제를 둘러싼 철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끝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모든 철학관들은 편이상 '세계관으로서의 철학관과 모든 명제들에 동원되는 언어의 '개념적 논리적 분석'으로서의 철학관이라는 두 개의 큰 범주로양분할 수 있다.
전자의 '철학관'은 전통적 그리고 일반 대중들의 철학관과 일치한다. 철학을 새로운 대상의 발견의 한 양식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다른 학문과 다를 바 없지만, 그 발견대상을 서로 구별되는 특수한 것 혹은 그것들을 제한하지 않고 세계, 자연, 우주 전체를 분리할 수 없는 단 하나의 통일된 인식대상으로 삼는데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철학은 다른 학문들과 구별된다는 것이다. 노자, 탈레스,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 헤겔, 니체, 마르크스,베르그송, 하이데거, 사르트르 등이 전자의 철학관을 대표한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관으로는 철학을 종교나 과학과 구별할 수 없다. 힌두교, 기독교 등의 종교는 말할 것도 없고 뉴턴이나 아인슈타인의 물리학, 우주발생과 진화에 관한 빅뱅 이론들은 다같이 하나로서의 자연·우주·존재를 총괄적 인식대상으로 삼고, 그 대상의 올바른 재현, 그림임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주·존재 전체의 그림으로서의 철학은 한편으로 확실성, 객관성에서는 과학적 그림에 훨씬 못 미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적 그림, 즉 인식에 비추어 볼 때 그 대상의 폭에서 훨씬 작고, 정서적 만족도에서 훨씬 미흡하다.
세계관으로서의 철학관의 대안으로 후자의 철학관, 즉 #분석철학적_철학관 이 고안된 것은 바로 전자의 철학관이 갖고 있는 바로 위와 같은 문제들에 근거한다. 철학이라는 학문이 그 외의 모든 학문들과 구별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의 기능이 대상의 발견'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명제들의 명료화와 정체를 이끌어낸 논리적 근거의 해명, 즉 인식의 투명성의 논리적 근거를 제공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철학관은 그것이 이른바 #분석철학 이라는 운동과 함께 생겨난 개념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근대적 의미로서의 철학의 시조로 공인된 소크라테스에서 분명하게 나타났고, 흄, 후설, 프레게, 카르납, 비트겐슈타인, 콰인, 데리다 등 분석철학자들만이 아니라 현상학적 계열에 있는 철학자들에서도 계승되고 있다. 그러나 #개념의 명료화 라는 분석철학적 철학관은 철학적 의도를 세계·한 대상들 안에서 일어나는 담론들의 언어에 내재된 언어적 의미를 해명, 즉 사유의 투명성과 엄정성 확보에만 두었다는 것이 문제다. 왜냐하면 이러한 뜻의 철학은 '응용논리학’과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모든 명제가 철학적인 것은 아니다. 그 대상이 아주 특정한 것이 아니라 자연·우주·존재, 즉 모든 것의 총체가 될 그 모든 종류의 명제가 자동적으로 철학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이 과학적 또는 종교적인 것과 구별될 수 있는 '철학적 명제'가 되자면, 그 명제의 근거가 이성에 의해 직관적인 동시에 논리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또한 한 명제가 직관적으로 아무리 참되고 아무리 투명한 논리로 뒷받침 되었더라도 그것이 특정한 대상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그러한 명제는 철학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하다.
3. #둥지 라는 이름의 세계관으로서의 철학
철학의 궁극적 목적은 단 하나의 통일된 실체로서의 자연우주 존재에 관한 단 하나의 참된 그림, 즉 인식·명제를 찾아내는 데 있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이냐의 실존적 문제를 포함해서 모든 것, 단 하나도 빠짐이 없는 정말 모든 것, 모든 현상, 모든 사건, 모든 경험들을 단 하나로 정연하게 통일해서 투명하게 이해하고, 맞게 행동하며, 옳게 살고 싶어 한다. 나만이 아니라, 그리고 철학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알게 모르게 그러한 지적 및 실존적 욕망을 갖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 같은 나의 철학적 목적이 현실적으로 실현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내재된 어쩔 수 없는 지적 꿈임을 나는 확신하다. 적어도 나의 경우 그렇다.
내가 철학에 관심을 갖고 오늘날까지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러 씨름하고 있는 이유가 그렇고, 그 동안 철학이라는 테두리에서 읽은 책들의 종류와 내가 넘나든 철학적 여러 영역들의 다양성이 위와 같은 나의 철학관을 반영하고, 나의 그러한 신념을 뒷받침한다. 내가 전통적, 사념적, 현상학적, 플라톤적, 헤겔적,하이데거적 철학에 끌리면서도 분석철학에 쏠리는 것은 나의 위와 같은 철학관 때문이며, 그와 동시에 분석철학에서 지적으로 많은 귀중한 가치를 발견하고 배움으로써 그러한 철학관에 비추어 생각하고 글을 써왔으면서도, 그와 반대편에 있는 유럽적 철학과 더 나아가서는 고대 동양철학에 매력을 느끼면서도 거부감을 느껴왔던 것도 바로 나의 위와 같은 지적 지향과 철학관 때문이다.
나는 철학이 종교나 과학과 구별되지만, 종교나 과학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세계관 (Weltanschauung)'에 지나지 않으며, 종교적 혹은 과학적 세계관과는 다른, 그러나 역시 일종의 세계관에 지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이러한 철학관에서 볼 때 철학자는 지적 '신'이 되고자 하며, 그의 관점은 '신의 관점(God's eyes' view')'를 갖고자 한다. 나는 이러한 철학적 세계관을 '사유의 둥지'로서의 철학관이라 부르고, 그러한 방식의 철학을 #둥지의 철학 이라 이름 짓고, 그러한 철학적 사유를 철학적 둥지 짓는 작업으로 파악한다. 나의 철학관은 지금까지의 여러 철학관들이나 철학적 활동의 부정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둥지의 철학관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철학활동은 물론 모든 학문들도 세계관으로서의 단 하나의 통일된 관념적 둥지를 짓는 데 필요한 다양한 부분적, 분과적 활동이며 건축양식들이라고 생각한다.
철학이 인식 대상이 아니라 어떤 대상의 한 '인식양식’으로 파악된다면, 철학은 자연·우주·존재가 될 수 없음은 물론 그런 것의 일부도 결코 아니라, 그러한 것들의 표상으로서의 인간의 관념적 표상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식은 인간의 일종의 관념적 내용 또는 그러한 내용을 함축하는 지적 활동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관념과 독립되어 있다고 전제되어야 하는 철학적 인식대상으로서의 자연·우주·존재가 인간의 의식 속에서 인식되는 순간 그것은 그냥 객관적인 자연·우주·존재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인간의 의식 속에 관념화 된 주관적 자연·우주·존재로 변신한다.
이렇게 변신된 자연·우주·존재를 그것과 구별하여 #세계 라고 부를 수 있다. 내가 철학을 '세계관'으로 부르는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가 접하고 우리에게 비친 자연·우주·존재는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야생적' 상태로서가 아니라 이미 관념으로 표상된 언어적 재현을 통해 '의미'로 '해석된 존재’, 즉 ‘문화’다. 그 이전의 원초적 상태와 논리적으로 결코 동일할 수 없는 '문화화된 자연·우주·존재는 전자와 차별화해서 ‘세계’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이 때 세계는 곧 '세계관'이다.
왜냐하면 ‘세계’는 문화로서 총체적으로 관념화 된 인식체계이기 때문이다. 철학이 자연·우주·존재의 관념화 된 세계인식 양식 활동 이라면 그러한 활동의 산물로서의 철학은 곧 #세계관이다.
세계관으로서의 철학은 발견된 자연·우주·존재의 그냥 재현이 아니라 인식 주체의 의식에 의해서 감각적 경험의 범주와 해석의 과정을 걸쳐서 어떤 의미를 띤 존재로서 재구성된 관념적 건축물이다. 그리고 그러한 관념적 건축', 즉 세계관으로서의 철학이라는 ‘건축활동', 그 동기 및 '건축구조'는 새의 ‘둥지 짓기’, 그 동기 및 그 건축구조와 같다. 새들은 둥지를 튼다. 그 동기는 짝짓기, 새끼 낳고 키우기 등을 통해 자신의 유전자를 매개로 생존과 번영이라는 모든 생명체의 궁극적 욕망의 충족, 즉 '존재의 의미 즉 행복에 희구'에 있다. 새들이 트는 둥지의 구조는 건축학적 본질은 '조화와 행복'이다. 새들이 짓는 모든 둥지는 기술적, 경제학적, 생태학적, 미학적 그리고 실용적 모든 관점에서 건축의 백미다. 그 구조에서 우리는 모든 것들의 조화를 발견하고 따듯한 행복감을 피부로 공감한다.
새들의 #둥지_짓기, 그런 활동의 의도, 둥지의 구조가 그러하듯이, 철학도 인간이 트는 둥지 틀기 활동이며, 그 활동의 밑바닥에는 ‘행복’이라는 원초적 동기가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 그러한 의도를 충족시킬 수 있는 건축구조를 지향한다. ‘새들의 둥지'와 #철학의 둥지 의 차이는 전자가 본능에 의해서 본능적 목적을 물리적 차원에서 자연으로 구성되는 데 반해서, 후자는 의지에 의해서 인간적 목적을 관념적 언어적 차원에서 언어·문화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철학은 인간인 그가 우주 안에서 물리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아주 복잡하고 헷갈리게 인식하고 있는 모든 현상, 사실,사건들, 그가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혼탁한 정서적 경험들을 총망라한 것을 일관성 있고 조화롭게 정리하여 하나의 통일된 전체로 파악하고자 욕망의 표현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적 활동으로서의 철학은 모든 차원에서 지적으로 만족하고, 정서적으로 편안할 수 있는 자연·우주·존재의 #지적_둥지_짓기 이며,세계관으로서의 철학은 관념적, 언어적으로 지어진 지적 건축물, 즉 둥지이다.
‘철학적 둥지’, 즉 '둥지'로서의 철학은 어떻게 설계되고, 조립되는 것인가? 그러한 둥지 짓기와 지어진 둥지는 각기 철학자의 철학관에 따라, 그리고 그 철학자의 설계능력, 건축기술에 따라 달라진다. 기계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철학적 둥지 짓기의 보편적 방법은 무엇인가? 그런 것은 없다. 그렇지 않다면 '나의 철학적 방법'은 무엇이었으며, 그 방법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던가?
긔림: 새 둥지, 〈우리 학문과 학문 방법론>, 박이문의 <철학여정>(2019.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