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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용주사, 정조대왕 효심이 빚어낸 사찰불사, 숭유억불을 밀어내다
기자명 한동민
중부일보 기사 입력 : 2022.08.18 18:26 수정 2022.08.25 09:04
◇현륭원, 또 다른 수원을 만들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1789년 그해, 조선에서는 정조가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며 현륭원(顯隆園)으로 명명하였다. 이에 수원은 읍치를 지금의 자리로 옮기는 역사적 대격변이 일어났다. 그리고 1800년 정조는 소원에 따라 아버지 곁에 묻혔다. 건릉(健陵)이다. 110년 뒤인 1899년 고종황제는 현륭원은 융릉(隆陵)으로 추봉하였다.
정조 이래 모든 국왕은 장헌세자의 직계 후손으로 왕위가 계승되었다. 장헌세자와 정조가 묻힌 수원 땅은 새로운 고향으로 여겼고, 이에 모든 국왕은 화성과 화령전 및 융·건릉을 참배했다. 국왕들의 지속적 능행과 화성에 대한 관심은 수원이 경기도의 여타 도시와 다르다는 자부심의 원천이 되었고, 서울과 경쟁하고자 하는 의식을 낳았다.
조선시대 따라 배워야 할 군주의 모범은 정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그전까지 따라 배워야 할 모범은 세종대왕이었지만 이후 정조대왕으로 바뀌었다. 매일같이 일기를 쓰고 방대한 문집을 남겼으며, 원행과 능행을 자주했던 정조대왕을 따라야 했다. 하물며 정조가 건설한 화성과 융·건릉은 체모가 엄중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직계 선조가 묻힌 융·건릉의 원찰이 바로 용주사였다. 여느 사찰과 비교할 수 없는 왕실의 관심과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셈이다. 비명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한 현륭원 조성은 왕릉에 버금가는 시설과 석물에 정성을 담았다. 화려한 병풍석과 장명등의 우아하면서도 찬란한 조각은 정조 자신이 묻힌 건릉(健陵)의 단조로움과 비교해보면 잘 알 수 있다. 병풍석을 쓰지 말라는 세조의 유언조차 무시한 채 아버지에 대한 애틋함을 표현하고 싶어했던 정조의 마음씀씀이를 볼 수 있다. 현륭원의 원찰로 건립된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때 창건된 갈양사(葛陽寺)가 있었던 곳이다. 고려 광종 때 전란으로 불타버려 잡초 우거진 채 버려져 있던 곳에 용주사를 건립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 마지막 원찰, 통합정치를 꿈꾸다
용주사는 1790년(정조 14) 현륭원의 능침수호 사찰로 건설된 조선시대 마지막 원찰이다. 당대의 고승 보경스님을 팔도도화주(八道都化主)로 삼고 중앙 관방과 8도 대관들이 시주한 8만 7천 냥으로 용주사를 건립한 것이다. 용주사는 다른 오랜 사찰들에 비해 짧은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여느 사찰에 비할 바 없는 위상과 사격을 부여받으며 나라를 대표하는 국찰로 대우받았다. 이는 정조의 꿈이기도 했다.
정조는 현륭원의 원찰인 용주사를 건립하면서 단순히 두부를 만들고 제향만 하는 조포사가 아니라 나라를 대표하는 중심사찰로 만들어 불교계를 재편하면서 사상계를 통합하고자 했다. 이에 용주사 건립 비용을 국가 재정이 아닌 전국적으로 시주금을 통해 마련함으로써 재정 낭비라는 지탄을 피하고, 자신의 효심을 세상에 널리 드러냄과 동시에 장헌세자의 명예 회복을 대중적으로 공인받는 공론화 작업을 펼친 셈이다. 이에 임금 스스로 용주사 봉불기복게(龍珠寺奉佛祈福偈)를 짓고, 재상 채제공(蔡濟恭)에게는 용주사 대웅보전 상량문을 쓰게 하였고,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에게는 용주사 주련을 쓰게 함으로써 숭유억불의 이데올로기적 도그마를 깨는 상징성을 부여했다. 또한 대웅보전 후불탱화를 어진화사 김홍도 등과 승려들을 통해 그리게 하거나 대웅보전 삼세불을 봉안하는 날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열게 한 것도 용주사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용주사 주지를 조선팔도를 총괄하는 승통(僧統)으로 임명하고, 남·북한산성의 승군들을 중심으로 하는 승군체제에 변화를 모색하고, 수원에 주둔한 장용영 외영을 강화하는 지역 방어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더욱이 용주사에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하사하여 불교의 효가 유교의 효와 다르지 않다는 점과 당시 조상에 대한 제사를 우상숭배로 인식하던 서학(西學)을 견제하려는 뜻도 있었다. 국왕의 효행을 통해 백성들에게 효성과 충성을 이끌어내고, 오래된 이단을 끌어안아 새로운 이단을 제어하는 정치적 포석이었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의승군 활동은 불교계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조선후기 르네상스기였던 숙종, 영조, 정조시대에 중창 불사가 전국적으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의 화룡점정이 1790년 정조에 의해 용주사가 원찰로 건립되면서 그 경향은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용주사가 특별한 이유
용주사는 평지에 자리 잡아 일주문인 산문(山門)이 없다. 최근에 조성된 사천왕문을 들어와 매표소를 지나면 눈에 들어 오는 것은 길을 따라 자연석에 글자를 새겨 세워 놓은 선돌들이다. 가장 앞자리에 ‘도차문래 막존지해(到此門來 莫存知解)’라고 음각된 화강암이 양쪽에 서 있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마음을 비우라는 뜻이니, 어쭙잖은 사바세계의 알음알이로 덤벼들지 말라는 경고다. 그러한 선돌의 주장과 영접을 속에 홍살문과 솟을대문 형식의 삼문을 만나게 된다. 홍살문과 삼문 또한 용주사가 왕실의 원찰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절집에 홍살문의 존재는 사도세자 위패를 모신 신성공간이라는 표식이다. 양반사대부의 솟을대문 형식의 삼문을 지나면 고려시대 5층 석탑 뒤로 웅장하게 서 있는 천보루(天保樓)가 시야에 들어온다. 천보루! 국왕의 만수무강과 왕실의 번창을 기리는 의미를 지닌다. 원찰이라 그러한 거창한 이름의 누각을 세울 수 있었으리라. 대웅보전과 함께 창건 당시에 건립되어 주불전으로 가는 출입구의 구실을 하고 있다. 아래 돌기둥의 웅장함은 경복궁 경회루 돌기둥을 닮아 있다. 천보루를 지나면 앞에 대웅전이 서고 양옆으로 거대한 나유타료와 만수리실은 각기 뜰이 있는 口자 모양의 건물이다. 더욱이 툇마루가 달린 건물양식은 일반 절집의 모양이 아니다. 원행에 따라 나선 사람들의 숙박을 배려한 건축양식인 셈이다. 대웅보전 후불탱화는 단원 김홍도의 작품으로 음양법을 수용한 서양화풍으로 유명하다. 또한 용주사가 효의 도량임을 알리는 부모은중경을 새긴 탑이 대웅전과 지장전 사이에 서 있다. 정조 때 부모은중경을 새긴 목판과 순조가 하사한 동판, 석판이 오늘도 단정하게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에도 있다. 이들은 모두 용주사를 상징하는 것들이다.
대웅전의 왼쪽 범종각에는 국보 120호인 신라 양식을 계승한 고려 초기의 범종이 있다. 비천상이 양편으로 두 곳에 돋을새김되어 있고 삼존불이 한 곳에 조각되어 있는 유려한 범종이다. 범종의 가운데는 음각으로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주조 당시에 새긴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인 1923년 당시 주지 강대련 스님이 새겨 넣은 것이다. 한국의 동종은 국제적 학명으로 '코리안 벨(Korean Bell)'로 불리는 독창성을 자랑한다. 국보로 지정된 한국의 동종은 4개에 불과한데, 상원사 동종과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천흥사 동종과 용주사 동종이다.
◇호성전과 다양한 문화행사
용주사의 존재 이유는 본래 호성전(護聖殿)에 있었다. 호성전은 장조의황제(사도세자), 헌경의황후(혜경궁)와 정조선황제, 효의선황후의 위패를 모신 전각이다. 매년 적어도 6번 이상의 제향을 지냈다. 최영년(崔永年, 1856~1935)의 ‘해동죽지(海東竹枝)’(1925)에는 전국적 명물 ‘수원 약과(藥果)’를 언급하고 있다. "수원군 용주사에서 아주 잘 만드는데, 이 약과는 융릉에 제향하는 제수로 그 품격이 최고다.(水原郡龍珠寺 精造此果 供隆陵祭享之需 品爲極嘉)"라 적고 있다.
수원 약과는 이미 조선 전기부터 전국적으로 유명한 명물로 대접받아 양녕대군이 대접받았고, 병중의 인조 임금에게 입맛을 돋우기 위해 수원약과를 원했을 정도였다. 제향에 쓰였던 용주사 약과를 다시금 맛보고 싶은 것은 헛된 꿈일까?
친일승려의 대표였던 강대련 스님을 중심으로 유지되던 용주사는 해방 이후 1955년 비구·대처 분규를 빚으며 거듭났다. 1962년 관응 스님이 주지가 되면서 용주사는 안정을 찾게 되었고, 1969년 전강스님이 중앙선원을 개설하면서 용주사는 제2교구 본사로서 위상과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그렇게 지엄하던 호성전이 6.25전쟁 때 불타 사라졌다가 38년만인 1988년에 복원될 수 있었다. 이는 한국불교계가 중흥기를 맞이했음과 동시에 용주사가 자기 정체성을 확보한 사례라 하겠다. 2020년 8월 20일 새벽 화재로 호성전이 다시 전소되었다. 전쟁 때가 아닌 평시에 호성전이 불탄 것에 대한 용주사 내부의 성찰이 필요한 대목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예전과 달리 호성전 복원이 빠르게 진행 중이라는 점이다.
1938년 가을 용주사 대재(大齋)가 열려 승무 등 다양한 행사가 베풀어진다는 얘기를 듣고 19살의 조지훈(1920~1968)이 용주사를 찾았다. 그날 이름 모를 승려의 승무를 보고 난 감동으로 밤늦게까지 절 뒷마당 감나무 아래서 넋을 잃고 서 있었던 그는 최승희의 승무와 이왕직의 아악 그리고 김은호 화백의 승무 그림까지 섭렵한 뒤 1939년 잡지 ‘문장(文章)’에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라는 절창을 담은 시 ‘승무’를 발표하였다. 이에 2004년 10월 ‘승무’ 시비가 용주사에 건립되어 창작의 산실임을 알렸다. 용주사는 그렇게 다양한 문화예술의 공간이었다. 조선시대에도 부처님 오신날은 인근 주민들이 찾는 명소였다. 그렇게 용주사는 지역과 함께 할 때 빛이 났던 곳이다.
한동민 수원화성박물관장
화성 용주사(龍珠寺)
경기도 화성시 화산(花山)에 있는 조선후기 현륭원의 능사로 창건된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이다. 854년(문성왕 16)에 창건하여 952년(광종 3)에 소실된 갈양사(葛陽寺)의 옛터에 창건된 사찰이다.
1790년(정조 14)에 사일(獅馹)이 팔도 도화주(八道都化主)가 되어 철학(哲學) 등과 함께 팔도 관민의 시전(施錢) 8만 7000여 냥을 거두어 갈양사 옛터에 145칸의 사찰을 창건하였다. 이 절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에 명복을 빌어 주는 능사(陵寺)로 창건되었다. 창건과 동시에 이 절은 전국 5규정소(五糾正所)의 하나가 되어 승풍(僧風)을 규정하였다. 그 뒤 1900년에 용해(龍海)가 중수하였고, 1911년에는 30본산의 하나가 되어 수원·안성·남양·죽산·진위·음죽·용인·고양·시흥 등에 있는 49개 사찰을 관장하였다.
1931년에 강대련(姜大蓮)이 중수하였고, 1955년 사찰 정화 뒤에 조계종 제2교구 본사가 되었다. 같은 해에 관응(觀應)이 불교 전문강원을 개설하였으며, 1965년 대웅보전을 중수하였다. 1966년 주지 희섭(喜燮)이 동국역경원(東國譯經院)의 역장(譯場)을 두었고, 1969년 전강(田岡)이 중앙선원(中央禪院)을 설립하여 1975년 지장전을 중수하고, 1977년 일주문을 세웠으며, 1981년 3층의 부모은중경탑을 세웠다. 1985년 불음각(佛音閣), 1986년 중앙선원 건물을 지었다. 1987년 대웅보전을 중수하고, 1988년 호성각을 지었다. 1993년 천불전을 짓고 만수리실을 개축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790년에 건립한 용주사 대웅보전이 1983년 경기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으며, 지장전(地藏殿), 시방칠등각(十方七燈閣), 범종각, 법고각(法鼓閣), 봉향각(奉香閣)과 1983년 경기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천보루, 나유타료(那由他寮), 만수리실(曼殊利室), 삼문각(三門閣), 일주문, 수각(水閣), 동별당(東別堂) 등이 있다. 또 문화재로는 1964년 국보로 지정된 용주사 동종과 2012년 보물로 지정된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 1972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금동향로, 청동향로, 용주사 상량문, 전적수사본, 용주사 병풍, 용주사 대웅전후불탱화 등이 있다.
화성 용주사 종
불교신문3335호/2017년10월4일자
글 : 최응천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고려 범종 대표 수작으로 국보 가치 충분
통일신라 종 전형 양식 구비
정교한 문양 주조기술 ‘걸작’
제 나이 잃어버린 종 아쉬움
어느 절서 옮겨온 지 불분명
국보 122호이며 높이는 144cm
지금까지 살펴본 통일신라 후기로부터 고려 전기까지의 범종의 특징을 요약하자면 전통의 계승과 새로운 양식의 정착이라는 과도기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기적 경향을 토대로 본 호에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할 고려 전기 범종이 바로 화성 용주사(龍珠寺)에 소장된 국보 범종이다.
용주사 종이 원래 어느 절에서 옮겨온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이 종이 광복 이후 국보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은 144cm를 지닌 비교적 큰 외형과 완전한 보존 상태뿐 아니라 몸체에 큰 글자로 새겨진 통일신라에 해당되는 명문의 중요성 때문이기도 하였다. 기록된 명문을 살펴보면 ‘성황산갈양사 범종일구석반 야주성이만오 천근 금상십육년구 월일사문 염거(成皇山葛陽寺 梵鍾一口釋般 若鑄成二萬五 千斤 今上十六年九 月日沙門 廉居)’로, ‘성황산 갈양사 범종으로서 이만오천근을 들여 금상 16년 모월 모일에 사문 염거가 발원하였다’는 어쩌면 범종의 명문으로는 매우 간결한 내용이다. 여기서 말하는 금상 16년은 범종의 다른 쪽 몸체에 기록된 신라 제46대 문성왕(文聖王) 16년으로서 854년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일단 명문을 통해보면 이 종은 통일신라 854년에 염거 스님이 갈양사(葛陽寺)를 창건하고 그 때 이 종도 함께 주조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이 명문은 종의 제작과 관계없는, 그것도 그리 오래 전이 아닌 20세기 초에 추각된 것임이 밝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이 종의 발원자로 기록된 염거화상의 입적 년대가 20세기 초에 들어와 밝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강원도 원주에 있었던 염거화상의 승탑(국보 140호)은 우리나라 승탑 가운데 가장 오랜 예로 평가받는데, 이를 입증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 안에서 발견된 금동 탑지(金銅塔誌)였다. 이 탑지는 1914년 일본인들에 의해 승탑을 해체하면서 사라졌다가 우여곡절 끝에 발견되어 1919년 총독부 박물관에서 다시 구입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가로 17.2cm×세로 28.8cm의 방형 탑지에 기록된 명문의 내용 중에 ‘회창사연세차갑자계---염거화상탑거석가모니불, 입열반일천팔백사연의(會昌四秊歲次甲子季---廉巨和尙塔去釋迦牟尼佛, 入涅槃一千八百四秊矣)’라는 구절이 있어 염거화상이 844년에 입적한 것임을 분명히 밝혀주게 된 것이다. 이러한 가치를 뒤늦게나마 인정받아 2015년 보물 1871호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따라서 승탑 내에서 발견된 염거화상 탑지의 내용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용주사종의 명문은 염거화상이 죽은 지 10년이 지나서 종을 발원하여 만들었다는 웃지 못한 결과가 나온다. 그러나 양식적으로 가장 확실한 통일신라의 승탑과 그 안에서 발견된 탑지의 내용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분명 용주사 종의 명문이 왜곡된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 어째서 이런 명문을 종 표면에 새기게 된 것일까?
그 의문은 용주사가 있던 자리가 원래 통일신라 때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 갈양사(葛陽寺)의 옛 터로 알려져 있지만 남아있는 기록은 조선시대 1790년 정조(正祖)가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인 현륭원(顯隆圓)의 능사(陵寺)로 건립하였다는 후대의 내용만 있을 뿐이었다. 당시 용주사는 정조의 능행, 김홍도의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등의 자료를 통해 나름대로 꽤 큰 사세를 떨치기도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 갈양사에 관련된 초창의 역사를 제대로 찾을 수 없었던 용주사는 그 사격을 높이고자 의도적으로 무명의 범종에 ‘갈양사(葛陽寺)’란 사명을 새겨 넣게 된 것으로 파악된다.
그럼 이 종이 원래부터 명문이 없었다 치더라도 과연 용주사 종이 통일신라 종 양식을 구비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종은 오히려 통일신라 종의 전형 양식을 구비한 가장 전형적인 고려 전기 종으로서 그 가치가 높게 평가될 수 있다.
용주사 종의 특징을 살펴보면 종신은 상원사종과 같은 통일신라 종에 비해 홀쭉해져 세장한 느낌이다. 용뉴는 목을 구부려 천판을 물고 있으나 입 안으로는 보주가 표현되었고 앞, 뒷발로 천판을 누른 통일신라 종과 달리 왼발을 위로 들었다. 용뉴 뒤에 붙은 굵은 음통 부분은 마디를 이루며 서로 맞닿은 앙, 복련문이 아니라 위로부터 원형문과 반원권문, 당초문을 차례로 시문한 점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특히 천판 위로는 용뉴 주위를 돌아가며 용뉴와 음통을 별도로 주조할 때 생긴 주물 접합선이 한단 높게 돌출되어 있음도 독특하다. 상대와 하대는 서로 다른 문양으로 장식되었는데, 반원권을 번갈아가며 배치한 상대와 달리 하대에는 유려한 줄기로 굴곡진 연당초문이 시문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종이 통일신라 종과 다른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바로 종신 상부 면에 불, 보살의 삼존상(三尊像)과 비천상을 번갈아 가면서 새긴 점과 4개로 늘어난 당좌에서 찾을 수 있다.
즉 통일신라 종의 비천상은 833년의 연지사(蓮池寺) 종까지 2구 1조의 주악상을, 다시 통일신라 말까지는 1구의 주악상을 앞, 뒤로 배치한 것이 특징적이다. 여기에 고려시대에 들어오면 963년에 만들어진 조우렌지(照蓮寺) 종을 시작으로 주악상에서 몸을 옆으로 뉘어 나는 비행비천상(飛行飛天像)으로 바뀌게 되다가 청녕4년명(1058) 종에서부터 다시 불, 보살상으로 변화되는 양식적 변천을 보인다.
따라서 용주사종에 보이는 불, 보살의 삼존상과 비천상이 함께 나오는 것은 고려 전기의 과도기적 양상을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당좌는 원형의 연화문 주위를 고사리형의 당초문으로 두른 약간은 도식화된 형태로서 통일신라 종에 비해 아래쪽으로 치우친 하대 바로 위에 배치되었다. 특히 1058년에 제작된 청녕4년명 종에서 처음 등장하고 있는 4개의 당좌를 구비하고 있는 점에서 용주사 종은 절대로 통일신라 종이 될 수 없는 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통일신라 종의 명문 기록은 성덕대왕 신종을 제외하고 종신 표면에 이처럼 보기 싫게 음각시킨 예는 결코 볼 수 없다. 물론 글씨의 형태도 유려한 통일신라 서체와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종 가운데 이 정도의 크기를 지닌 종에 처음부터 명문을 새기지 않은 예가 그리 흔치 않지만 원래부터 명문이 없다는 것이 불행이 되었는지 용주사 종은 결과적으로 후대에 왜곡된 명문을 새길 수 있었던 빌미를 제공해 주고 말았다.
그러나 이 용주사 종은 원래의 명문이 없더라도 단정한 외형과 정교한 문양, 주조기술 면에서 당대를 대표하는 걸작으로서 국보로 지정받아 전혀 손색이 없는 종이라고 평가된다. 그 제작 시기는 일단 청녕4년명(1058) 종보다 뒤늦으며 새로운 형식의 삼존상이 등장한 점으로 미루어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중반쯤 제작된 범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여음(餘音)
용주사 종의 명문은 문화재 가치를 파악하는데 있어 남겨진 기록뿐 아니라 같은 시기의 유물을 비교하여 형식과 양식의 분석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어쩌면 가장 기본적인 미술사 연구 방법론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좋은 사례이다. 비록 제 나이를 잃어버렸지만 이제라도 국보 용주사 종이 지닌 의미와 그 가치에 대한 평가가 새롭게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기대된다.
용주사 효행박물관 소장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
불교신문3644호/2021년1월13일자
기자명 : 이분희 문화재전문위원·불교중앙박물관 팀장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전” 칭송
현세부모 봉양 안주하지 않고
윤회苦까지 종식…‘해탈’ 지향
불교 효행문화의 진수 알리는
‘세계 유례없는 성보문화재’
“부모은혜 고마움 느끼는 것은
자기의 중심을 세우는 것으로
어려운 세상 살아가는 버팀목”
서울에서 1시간 거리 정도 지척에 위치한 화산 용주사(조계종 제2교구본사)는 지금은 우리가 쉽게 가 볼 수 있는 정겨운 사찰이다. 융건릉에서 병점 방향으로 가다 보면 왼쪽이 넓게 트이면서 용주사가 반긴다. 정조는 이 길을 가기 위해 한강에 배다리를 설치하고 길 위의 백성들을 만나면서 아버지 사도세자를 만나러 먼 길을 떠났었다. 용주사 일주문을 들어가 경내에 들어서면 왼쪽에 용주사효행박물관이 있다. 효행이란 종교와 이념을 넘어서는 인간의 소중한 가치이다. 효행박물관이라는 박물관 명칭이 따뜻하게 다가온다.
요즈음은 사찰에 가면 성보박물관을 종종 볼 수 있다. 수많은 사찰의 성보문화재는 신앙의 힘과 원력, 뛰어난 장인이라는 삼박자가 잘 맞아 조성된 것이다. 사찰에 봉안된 성보문화재는 당연히 예경의 대상으로 불전에 모시지만, 도난과 화재 등에서 보호하기 위한 대안으로 박물관이 설립되었다. 현재 박물관에 소장된 성보문화재는 다른 사찰과 구별되는 독창성이 있어 그 안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찰의 역사적 문화적 특성이 뚜렷하다.
용주사 효행박물관의 대표적 문화재는 과연 이름에 걸맞게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佛說大報父母恩重經版)>이다. 이 경판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부모님의 은혜의 귀중함과 그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 것인가를 새긴 것이다. 이 경판이 용주사에서 만들어진 배경에는 조선의 성군 정조대왕이 있다.
➲ 정조의 효심 가득한 용주사
조선시대의 중흥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군주로 영조와 정조를 꼽는다.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는 탕평책을 실시하여 관리를 골고루 등용하는 등 시회적·정치적으로 큰 업적을 남겼다. 특히 83세까지 천수를 다한 조선에서 가장 장수한 왕이며, 52년 동안 왕위를 누린 인물이다. 그러나 나이 들어 어렵게 얻은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비정한 아버지이기도 하다.
사도세자 죽음의 배경에 대해 당파 싸움에 희생되었다는 설과 영조가 보기 드물게 장수하여 그 정적이 바로 그 아들이 된 것이라는 설 등 분분하지만 영화의 소재가 될 만큼 드라마틱한 내용이다. 결국 손자인 정조가 왕위를 계승하였고 정조는 할아버지의 장점을 본받아 사회개혁을 이루어 내어 역사의 진전된 발전을 이루어낸 현명한 왕이었다.
특히 정조시대는 문화의 르네상스시대라 일컬을 정도로 문화의 부흥을 일으켰는데, 이는 본인의 문화적 소양에 기인한 바가 큰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동국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정조가 그린 파초도에서 그의 예술적 기량을 엿볼 수 있다. 이외에도 여러 저술과 강론을 남겼으며, 그의 기개가 느껴지는 서예도 능했음을 알 수 있다.
정조는 왕이 되자마자 “본인은 장헌세자(莊獻世子: 사도세자 思悼世子, 1735~1762)의 아들이다”라고 천명할 정도로, 그의 부친의 삶을 애달파했다. 그는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를 천하제일의 복지(福地)라 하는 이곳 화산(花山)으로 옮겨와 현릉원(뒤에 융릉으로 승격)이라 하였다.
현릉원의 능사(陵寺)로 용주사를 중창하고 비명에 숨진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능침사찰은 대부분 운영되는 사찰 가운데 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에 비해 용주사는 왕실에서 주도하여 세운 특이한 경우이다.
정조는 용주사의 설립계획을 치밀하게 구상해서 빠르게 실행에 옮겼다. 1790년 2월에 용주사의 입지를 선정한 것을 시작으로 그해 9월에 대웅전에 불상을 점안하여 마무리 하였다. 용주사 건립에는 총 216일 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총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정조의 측근이자 수족들이 총동원 되었는데, 채제공(蔡濟恭, 1720~1799)과 김홍도(金弘道)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친숙한 인물이다.
정조는 직접 ‘용주사’라 사명(寺名)을 지었다. <정조실록>에 실린 부친인 장헌세자의 꿈에 용이 구슬을 안고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정조가 태어났다는 기사와 <화산용주사상량문>에 “아 대궐의 임금이 처음으로 사찰의 이름을 내리신 것은 평상시 부처의 덕을 갚고자 한 까닭이다”라는 부분에서 그 사연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세계의 유례없는 효행본찰(孝行本刹)이라는 이름으로 용주사를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이다.
➲ 부모의 은혜를 새기다
사람들은 보통 불교에서 효는 중요한 덕목이 아니라고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인도 초기 경전에서부터 석가모니부처님 스스로가 효행을 실천한 인연 설화를 서술하고 있다. 불교에서 효는 현세의 부모 봉양에 안주하지 않고 윤회 속 괴로움을 종식시켜 해탈로 지향한다는 점이 효행을 구현하는 가장 큰 특징이다.
<부모은중경>은 내용이 길지 않으나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간략하게 구성되어 있는 완성도가 높은 경전이다. 정조는 보경당 사일스님에게 <부모은중경>에 대한 설법을 듣고 섣달그믐과 단옷날에 <부모은중경> 게송을 인쇄하여 배포하도록 하였다.
정조는 1796년 목판과 동판의 간행을 완성하였고, 이후에도 영구히 후세에 전하고자 돌에 새겨 용주사에 내려 주었다. 석판은 경문을 반전하지 않고 글자 그대로 새긴 석경(石經)인 것이다. 용주사본은 당대 최고 기량을 갖춘 자비대령화원에 의해서 밑그림이 그려지고, 주도한 인물은 김홍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용주사 <부모은중경>은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종분은 본문 격으로 석가모니부처님이 고골(枯骨)에게 예배하고 이가 곧 전생의 부모일지 모른다고 설명하는 여래정례도(如來頂禮圖)를 시작으로 한다.
이어 임신에서 양육까지의 은혜를 10폭으로 그린 것을 담았다.
①회탐수호은(懷耽守護恩)은 임신을 하여 몸가짐을 조심하는 은혜
②임산수고은(臨産受苦恩)은 해산에 임박하여 고통을 이기시는 은혜
③생자망우은(生子忘憂恩)은 자식을 낳고 근심을 잊는 은혜
④연고토감은(咽苦吐甘恩)은 쓴 것을 삼키고 단 것을 뱉어 먹여 키우시는 은혜
⑤회건취습은(回乾就濕恩)은 진자리 마른자리를 가려 누이는 은혜
⑥포유양육은(哺乳養育恩)은 젖을 먹여서 기르는 은혜
⑦세탁부정은(洗濁不淨恩)은 손발이 닳도록 깨끗하게 씻어주신 은혜
⑧원행억념은(遠行憶念恩)은 부모의 곁을 떠날 때 걱정하시는 은혜
⑨위조악업은(爲造惡業恩)은 자식을 위해 악업으로 나아가시는 은혜
⑩구경연민은(究竟憐愍恩)은 자식을 평생 애처롭게 여기고 걱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다음은 불효의 죄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지수제건(指數諸愆)과 부모의 은혜가 막중함을 비유하여 설명한 원유팔종(援喩八種)의 내용이다. 용주사판은 원유팔종 가운데 주요수미(周遶須彌周) 장면만 변상으로 새겼다. 수미산을 백 번 천 번 돌더라도 부모의 깊은 은혜를 다 갚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마지막 장은 부모의 은혜를 갚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계발참회(啓發懺悔)는 사경ㆍ독송하며 삼보를 공양하는 것을 설하고 있다. 아비타고(阿鼻墮苦)는 불효를 행하면 아비무간지옥(阿鼻無間地獄)에 떨어진다는 과보를 설하고 있다. 상계쾌락(上界快樂)은 이 경전을 조성하면 은혜를 갚는 것이 되어 부모가 하늘에 태어나게 된다고 설하고 있다. 상계쾌락도를 새긴 것은 용주사판이 유일하다.
유통분은 설법을 들은 대중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겠다는 맹세와 부처님이 경전의 이름을 ‘대보부모은중경’으로 정한다는 내용이다. 이 경전은 부모에게 보은하는 방법으로 <부모은중경>의 간행과 배포가 중요함을 설하였다. 오늘날 용주사 간행의 <부모은중경>은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전으로 칭송하고 있다
필자가 첫 번째로 소개하는 성보로 용주사의 부모은중경판을 꼽은 것은 새해를 맞아 불심에 담긴 효심을 음미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부모의 은혜에 고마움을 느끼는 것은 자기의 중심을 세우는 것으로, 어려운 세상을 헤쳐 나가는데 버팀목이 된다”는 어느 스님의 법문을 들었던 것이 생각난다. 코로나19로 효행의 길은 더욱 멀기만 하다. 힘든 세상살이를 헤쳐오신 모든 부모님들이 늘 건강하시기를 기원한다.
※ 필자 이분희 문화재전문위원은…
불교중앙박물관에서 ‘학예업무 총괄’을 맡고 있다. 동국대 대학원에서 조선 전기 아미타불상에 대한 내용으로 석사, 한국 탑안에 봉안된 불상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문화재전문위원으로 불교문화재 관리에 대한 업무와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화성 용주사 삼세불상
이야기가 있는 조선시대 불상
불교신문3351호/2017년12월6일자
불교신문 기사 입력 : 2017.12.04. 13:36
기자명 유근자 동국대 겸임교수
조선 정조의 ‘효심’ 깃든 당대 최고의 성보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 반영
왕실 대작불사 진행과정 보여줘
언뜻보면 닮은 듯하지만 개성 뚜렷
전국서 활동한 조각승 대거 참여
사찰불사에 효심이 녹아든 사례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에 위치한 용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본사로 효행의 본산이라 일컬어지는 절이다. 조선후기 효심이 깊었던 정조대왕(1752~1800)이 아버지 사도세자(1735~1762)를 위해 능침사찰로 용주사를 창건했기 때문에 ‘효의 사찰’이란 이름을 얻었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꾼 정조는 아버지 능침 사찰을 용주사(龍珠寺)로 정했다.
용주사는 억불숭유 정책을 내세운 조선시대에 오대산 상원사와 함께 명실상부한 왕실의 원찰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다. 정조가 사도세자로 잘 알려진 아버지 장헌세자의 무덤을 이장한 것이 계기가 되어 용주사는 짧은 공사기간으로 1790년에 건립되었다. 왕실의 원찰이자 왕의 능침을 관리하고 명복을 비는 재를 지내는 능사(陵寺)의 역할을 수행한 사찰로 전체 조영을 계획해 새롭게 창건한 절이라는데 의의가 크다.
조선의 왕으로서 대표적인 효자를 상징하는 정조대왕이 살았던 18세기의 조선은, 사대부 중심의 사회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나서 대대적인 혁신이 요청되던 시기였다. 개혁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강력하게 실현시키고자 왕권 강화 정책을 펴 나갔는데 정조는 그 명분을 효에서 찾았다. 그는 비극적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양주 배봉산에 있던 묘를 경기도 수원 화성 근처 현륭원(융릉)으로 옮기고, 여러 차례 능행(陵行)을 갔으며, <대부모은중경>과 <오륜행실도>를 간행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은 한편으로는 정치적으로 효라는 대의명분을 강조하여 보수적인 세력이 왕권 강화에 반발하지 못하도록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조 자신의 정통성과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반영한 것이었다.
정조는 보경당 사일스님에게 <부모은중경>에 대한 설법을 듣고 <부모은중경>을 간행하였다. 국왕이 발원하여 <부모은중경>을 간행하였다는 것은 숭유억불의 조선사회에서 갖는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 정조는 섣달 그믐과 단오날에 <부모은중경> 게송을 부적 대신 집안에 붙이도록 인쇄해 나누어주게 할 만큼 백성들에게 배포하는데 적극적이었다.
용주사에는 나무, 돌, 금속으로 만든 세 종류의 <부모은중경> 판본이 전해지고 있다. 이 경전은 글을 모르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게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김홍도로 하여금 밑그림을 그리게 했다고 한다. 부모님의 은혜가 지중함을 10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경전의 첫 장면은 부처님께서 전생의 부모의 뼈를 보고 절하는 ‘여래정례(如來頂禮)’로부터 시작된다.
용주사본 ‘여래정례’ 장면은 제자 18인이 땅에 엎드려 절하는 석가여래를 둥글게 에워싸고 있다. 한 무더기의 뼈를 보고 엎드려 절하는 석가여래의 주변에는 눈부신 광채가 햇살처럼 퍼지고 있다. 서서 목례만으로 예를 나타내던 이전의 석가여래에 비해 완전히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혀 합장하고 있는 모습은 파격적이다. 한 무더기의 뼈는 곧 사도세자의 유골이고, 허리를 굽혀 절하는 석가여래는 정조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킨 것은 아닐까. 이를 반영하듯 화면 향우측 끝 스님들 사이에 세속 인물이 보이는데 정조로 추정된다.
아버지 장헌세자의 능침사찰로 용주사를 건립한 정조는 능행 때마다 용주사를 찾았을 것이다. 1790년 용주사를 세운 6년 후인 1795년에 정조는 손수 부처님께 복을 비는 <어제화산용주사봉불기복게(御製花山龍珠寺奉佛祈福偈)>를 지었다.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한 조선시대 국왕이 부처님께 복을 비는 게를 짓고 이를 책으로 간행한 것은 정조가 유일하다. 그는 <기복게>에서 자신을 소자(小子)로 지칭해 게를 지어 바치는 대상이 부처님인지 아버지인지를 모호하게 하였다. 부모님께서 길러주신 은혜가 있으니 부모님을 공양하고 잘 공양하는 것이 은혜에 보답하는 복전(福田)이라고 해, 게를 작성하는 목적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공양하고자 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용주사의 중심 불전은 대웅보전으로 불전 안으로 들어가면 중앙의 높은 불단에 사바정토의 석가여래, 동방유리광정토의 약사여래, 서방극락정토의 아미타여래가 모셔져 있다.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가 있는 세 부처님의 명칭은 용주사 창건에 관련된 인물들을 기록한 <본사제반서화조작등제인방함(本寺諸般書畵造作等諸人芳啣)>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후기 삼세불 사상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적 의미를 뜻하는 삼세불 개념에 공간적인 개념이 더해지고, 극락왕생을 바라는 아미타신앙과 현세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약사신앙이 결합되어 탄생한 것이다. 정조는 과거와 현재의 고통을 뒤로 하고 아버지 장헌세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할 목적으로 용주사에 삼세불상을 봉안한 것으로 보인다.
대웅보전의 삼세불상 위에는 다섯 마리의 용이 조각된 닫집이 있고 뒤에는 김홍도가 그렸다는 웅장한 후불도가 있다. 대형의 불상이 사라지는 18세기 후반에 1미터가 넘는 크기로 조성된 용주사 삼세불상은 왕실의 원찰이기에 가능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용주사 삼세불상의 가장 큰 특징은 세 부처님의 모습이 각기 다르다는 점이다. 언뜻 보면 닮은 듯 하지만 자세히 보면 개성이 뚜렷한 다른 모습이다. 조선후기에 조성된 삼세불상은 대부분 수조각승 한 명의 지휘 아래 여러 보조 조각승들이 동참했기 때문에 유사하게 표현되었던 것과는 다르다.
세 부처님 모두 유난히 큰 귀, 머리 중앙의 반달형 중간 계주, 머리와 육계를 구분하지 않은 채 육계 위에 원통형의 정상 계주를 표현한 것은 공통점이다. 넓게 열린 가슴 앞에 연꽃잎 형태의 주름, 두 무릎 사이에 펼쳐진 율동감 넘치는 옷주름은, 비슷하면서도 세부 표현에서는 차이가 있다. 또한 자비로운 모습의 석가여래, 입꼬리가 약간 위로 올라간 아미타여래, 근엄한 모습이 강조된 약사여래의 얼굴 표정에서도 미묘한 차이가 감지된다.
이처럼 비슷하면서도 다른 특징을 가진 이유는 세 불상의 조각승이 서로 달랐던 데서 찾을 수 있다. 대웅보전 닫집에서 발견된 ‘삼세상원문(三世像願文)’과 ‘본사제반서화조작등제인방함’에는 조각승에 관한 정보가 담겨있는데, ‘삼세상원문’에는 불상 제작에 상계(尙戒), 설훈(雪訓), 계초(戒初), 봉현(奉玹) 등 20명의 조각승이 참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본사제반서화조작등제인방함’에는 본존인 석가여래는 전라도 정읍 내장사의 계초스님이 담당했고, 아미타여래는 전라도 지리산 피근사의 봉현스님이 조성했고, 약사여래는 강원도 간성 건봉사 상직(尙植)스님이 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세상원문’에는 상계로 기록된 조각승이 ‘본사제반서화조작등제인방함’에는 상직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같은 인물이 잘못 기재된 예이다.
석가여래를 조성한 계초스님과 아미타여래를 제작한 봉현스님은 전라도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조각승 상정(尙淨)을 계승한 유파로 생각된다. 용주사 삼세불상은 왕실 주도로 단기간에 완료해야 했던 불사였기 때문에 강원도와 전라도 등 전국에서 활동한 조각승들이 참여하였다.
‘삼세상원문’에 의하면 불상은 8월16일부터 시작해 9월30일에 완성했으며 10월 초에 점안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이렇듯 빠른 시일 안에 완성해야 했기 때문에 각 지방의 뛰어난 조각승들이 동참했을 것이다. 용주사 삼세불상은 세 명의 수조각승이 개성적인 조형 감각으로 각자의 기량을 발휘한 당대 최고의 불상이다.
용주사 삼세불상은 아버지 장헌세자에 대한 정조의 효심이 사찰 불사에서 어떻게 반영되었고, 18~19세기의 불상제작이 줄어든 상황에서 왕실 불사와 같은 대형 프로젝트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잘 알려주는 자료이다.
용주사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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