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압까지의 여정
민 21:10-20
10 이스라엘 자손이 그 곳을 떠나 오봇에 진을 쳤고
11 오봇을 떠나 모압 앞쪽 해 돋는 쪽 광야 이예아바림에 진을 쳤고
12 거기를 떠나 세렛 골짜기에 진을 쳤고
13 거기를 떠나 아모리인의 영토에서 흘러 나와서 광야에 이른 아르논 강 건너편에 진을 쳤으니 아르논은 모압과 아모리 사이에서 모압의 경계가 된 곳이라
14 이러므로 여호와의 전쟁기에 일렀으되 수바의 와헙과 아르논 골짜기와
15 모든 골짜기의 비탈은 아르 고을을 향하여 기울어지고 모압의 경계에 닿았도다 하였더라
16 거기서 브엘에 이르니 브엘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시기를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물을 주리라 하시던 우물이라
17 그 때에 이스라엘이 노래하여 이르되 우물물아 솟아나라 너희는 그것을 노래하라
18 이 우물은 지휘관들이 팠고 백성의 귀인들이 규와 지팡이로 판 것이로다 하였더라 그들은 광야에서 맛다나에 이르렀고
19 맛다나에서 나할리엘에 이르렀고 나할리엘에서 바못에 이르렀고
20 바못에서 모압 들에 있는 골짜기에 이르러 5)광야가 내려다 보이는 비스가 산 꼭대기에 이르렀더라
민 21:10-20 / [모압 벌판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그곳을 떠나 오봇에 진을 쳤다. 11) 또 오봇을 떠나 모압 사람들이 사는 땅 동쪽에 있는 광야의 이예아바림 폐허 위에 진을 쳤다가 12) 거기서 떠나 세렛 시냇가에 진을 쳤다. 13) 또 거기서 떠나 아르논강 북쪽에 진을 쳤다. 아르논강은 아모리인들의 지경에서 시작되어 광야를 지나 모압 땅과 아모리 땅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강인데, 이스라엘 백성은 결국 아모리 땅에 진을 친 것이다. 14) 그래서 `여호와의 전쟁기'에 이런 글이 써 있다. `수바 지역에 있는 와헙 마을과 이 개울 저 개울 그리고 아르논강과 15) 여러 계곡의 비탈은 아르 마을까지 뻗쳐 있구나. 모압 국경을 향하여 달려가는구나.' 16) 그곳에서 그들은 브엘이라고 하는 곳에 이르렀다. 이 브엘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무리를 모두 모아라. 내가 이 무리에게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하겠다' 하고 말씀하신 곳이다. 그래서 그곳을 `우물'이라는 뜻으로 브엘이라고 불렀다. 17) 이때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노래를 지어 불렀다. `우물아, 솟아라. 힘차게 솟아올라라. 흥겨워 우리 노래하리라. 터져 나오는 물줄기 따라 우리 함께 기쁘게 노래하리라. 18) 백성의 지도자들이 위엄 있는 홀과 지팡이로 이리저리 지휘하고 귀족들이 판 우물이다.' 그들은 광야에서 맛다나로 옮겼고 19) 맛디나에서 나할리엘로 옮겼으며 나할리엘에서 또 바못에 다다랐다. 20) 바못에서 떠나 모압 땅에 있는 평원으로 갔다. 이 평원은 광야가 내려다 보이는 비스가산 아래에 있었다.
이스라엘은 에돔을 통과하지 못하고 사해 남쪽을 지나 북쪽으로 이동하여 모압 땅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곳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요단 동쪽의 광야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우물을 예비하고 계셨습니다.
오봇에서 모압의 경계에 이르다(10-15) 이스라엘은 에돔을 통과해서 가지 못하고 남쪽 국경을 따라 내려가다가 북쪽으로 향하는 우회로를 택하게 됩니다. 이 지역은 석회암 동굴과 암석들이 대부분인 험한 지형으로 이루어진 곳입니다. 광야를 지나고 골짜기를 지나 드디어 가나안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이르게 됩니다.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에 역경과 고난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동행하시고 보호하셔서 결국 약속의 땅 앞에 서게 됩니다. 먼 길을 돌아가는 과정도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이었다는 것을 깨달아갑니다. 중요한 것은 빠른 길과 편한 길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이스라엘은 진정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브엘에서 우물을 주시다(16-20) 브엘은 우물이란 뜻을 가진 지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우물을 통해 험한 길을 걸어온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셨습니다. 홀과 지팡이는 지휘관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지휘관의 지휘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우물을 파고 있는 이스라엘은 사기가 한껏 올랐고 기뻐하며 노래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더 많이 알고 계셨습니다. 언제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예비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압 평지와 사해까지 모두 내려다 볼 수 있는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르러 하나님의 언약의 땅이 자신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감격했을 것입니다. 조상 때로부터 꿈꾸었던 가나안까지 오는 여정은 모든 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예비하심 그리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열심의 과정이었습니다.
적용: 고난과 역경의 연단을 통과해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의 실체를 보게 된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통해 당신은 어떤 소망을 가지게 되었는지 이야기해봅시다.
출애굽 사건은 단순히 기도 응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고난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불쌍해서 그들을 구출해 주신 것도 아닙니다. 출애굽 사건이 일어난 결정적인 계기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사 씨와 땅’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그들의 씨를 축복해서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실 약속이셨습니다.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신 하나님의 결정입니다.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가려고 모세를 부르신 것입니다.
< 설 교 >
약속의 땅을 향한 로드맵(17)광야의 축제
민 21:10-20 / 이동원 목사
아마도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읽은 책으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일지 모릅니다. 주인공 ‘나’는 비행기 사고로 사하라 사막에 던져 졌을 때 거기서 어린 왕자를 만나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가 여행한 별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주인공 나는 문득 타는 듯한 갈증을 느껴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주인공의 목마름을 알아차린 어린 왕자는 주인공에게 우물을 찾아 나서자고 제안을 합니다. 마침내 그들이 찾아낸 사막의 우물은 그저 모래에 구멍을 파 놓은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도르래, 두레박, 줄까지 이미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어린왕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들어봐요. 우리가 우물을 잠에서 깨운 거에요. 그래서 우물이 노래를 하고 있어요” 주인공 나는 천천히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끌어 올립니다. “물을 좀 줘요” 속삭이는 어린 왕자에게 주인공 나는 눈을 감고 물을 마시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 물로 또한 갈한 목을 적시기 시작합니다. 그 물은 축제처럼 달콤한 물이었습니다. 그 물은 일반 음식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 물은 마음까지 즐겁게 해 주는 물이었습니다. 그 물은 생명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어린왕자도 주인공 나도 더 이상 목마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광야의 순례의 여정에서도 주의 백성들은 또 한번 타는 목마름으로 고생을 하게 됩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의 행진은 지금의 요르단 국가 경내로 들어서게 되었고, 오늘의 본문은 그 여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에시온 게벨(요르단 지명으로는 아라바)을 출발하여 에돔과 모압의 경계를 형성하는 세렛 강(계곡-12절)을 지나 모압으로 들어서게 되고, 마침내 모압과 암몬의 경계선상에 놓인 유명한 아르논 강(계곡-13절)을 지나가게 됩니다.(성경 지도) 그러나 이 광막한 사막을 지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얼마나 목마름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을까요? 그러다가 홀연히 그들은 샘물이 솟는 우물을 발견하게 됩니다.얼마나 감동했을까요? 얼마나 기뻐했을까요? 그들은 바로 노래하며 축제를 시작하게 됩니다. 광야의 축제, 감사의 축제였습니다. 지금도 요르단의 사막지대에서 우물을 얻게 되면 마을 축제가 벌어지는 것은 일상적인 사건이라고 합니다.
지난 수요일 저녁 우리 교회에서는 셀 컨퍼런스 도중에 놀라운 축제를 가졌습니다. 신바람 나는 광야의 한밤의 축제였습니다. TV에 소개되는 우리 주변의 어떤 축제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최고의 감동 축제였습니다. 우리 교회 모든 식구들이 함께 하지 못한 것 그리고 그 밤에 찾아온 모든 교우들을 다 수용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기만 했습니다. 내년 창립 15주년을 기념하는 때에는 밖의 큰 시설을 빌려 우리 교회 어린이부터 시니어부 까지 1-7부에 흩어져 예배하는 온 회중이 함께 하는 축제를 기획했으면 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에게는 이런 광야의 축제가 필요한 것인가요?
1. 하나님의 인도를 감사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의 본문 1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거기서 브엘에 이르니 브엘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시기를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물을 주리라 하시던 우물이라” 본문 10-15절 까지 호르산을 떠나 요르단 경내에 들어서기까지의 쉽지 않았던 그 여정을 보여준 후 갑자기 16절에서 “브엘에 이르니”라고 기록합니다. ‘브엘’은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이 브엘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으로 건넌 곳이 14절에 보면 아르논 골짜기였습니다. 아르논 골짜기는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모압과 암몬 지역의 경계를 형성하는 골짜기로 깊고 험하지만 아주 아름다운 곳(요르단의 그랜드 캐년)입니다. 보기에는 아름다운 곳이지만 이 많은 백성들이 건너기에는 너무나 너무나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험한 계곡을 지나자마자 그들을 기다리던 것이 우물이 있는 오아시스였던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기뻐했을까요? 이 모든 여정이 하나님의 인도임을 실감하는 순간이 아니었겠습니까?
우리 부모님 세대가 잘 부르던 찬송 가운데 “나의 갈길 다 가도록”(434장)이라는 찬송이 있지요. 이 찬송의 가사의 마지막 부분은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과연 이 찬송의 작시자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고난과 역경이 없는 만사형통의 인생이라고 믿어 이렇게 작사했을까요?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 것은 이 찬송의 작시자는 패니 크로스비(Fanny Crosby)라는 시각 장애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눈먼 그녀가 걸어가는 길이 결코 만사형통의 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해마다 장애인의 날 혹은 장애인의 주일을 맞이하면서 우리 교회에서는 장애 체험 대회를 갖습니다. 눈 가리개를 하고 부축을 받아보며 길을 걷다 보면 시각 장애가 얼마나 심각한 장애인가를 실감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패니 크로스비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고 노래합니다. 고통이나 시련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고통이나 시련에도 불굴하고 그 고통의 길, 시련의 길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결코 우리에게 고통과 시련이 없는 믿음의 길을 약속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요한16:33)고 말씀하신 바로 그 주님이 또한 우리에게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언약하신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의 광야의 축제도 광야의 시련을 넘어서는 그분의 인도를 실감한 감사의 축제가 아니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오늘의 우리들 인생의 광야에서 여전히 그분의 함께 하심, 그분의 인도를 믿으신다면, 어찌 감사의 축제를 준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할렐루야!
2. 하나님의 공급을 감사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걸어가는 이 광야에는 하나님의 인도만 함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 광야 길에 비록 그들이 불평했을 지라도 만나와 메추라기는 계속 공급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는 타는 목마름으로 고통당하던 순간 주께서는 브엘의 우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는 이 우물을 가르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들에게 물을 주리라 하시던 우물이라”고. 1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이 노래하여 이르되 우물물아 솟아나라 너희는 그것을 노래하라” 자, 사막을 타는 목마름으로 걸어온 이 백성이 솟아나는 샘물을 마시고 무엇이라고 소리쳤을까요? “하나님, 당신은 공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는 진실로 ‘야훼 이레’의 하나님, 준비하시고 공급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빌4:19의 말씀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동일한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인생의 광야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신 공급을 경험할 수 있었는지요? 그렇다면 우리 모두 축제를 준비함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패니 크로스비의 이야기를 하나 더 들려드리겠습니다. 그녀에게는 시각 장애도 고통이었지만 그녀가 찬송 작시자로 알려지기 전에 가난으로 더 큰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단돈 5불이 없어서 중요한 일을 처리하지 못하게 되자 그녀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주님의 도움을 간절하게 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도하고 일어난지 얼마 안 되어 누군가가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고 합니다. 나가보니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당신이 혹시 패니 크로스비이냐”고 묻습니다. “그렇다”고 하자 “찬송가를 작시한 일이 있느냐”고 다시 물으면서 “당신이 이곳에 산다는 얘기를 듣고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 집에 들렸다”고 말하더랍니다. 집을 떠나면서 악수하는 그녀의 손에 5불을 쥐어 주더랍니다. 이 정확하신 인도에 놀라면서 작사한 찬송이 바로 찬송 434장이었던 것입니다. 2절을 기억하십니까?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어려운 일 당한 때도 족한 은혜 주시네 나는 심히 고단하고 영혼 매우 갈하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이스라엘 백성의 간증이 동일한 고백이 아니었습니까? 인생의 광야 길이 결코 쉬운 길은 아니었지만 그때마다 주님은 그들의 최소의 필요를 공급하셨고 타는 목마름으로 지쳐갈 무렵 우물이 있는 오아시스에 도착하게 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십시다.
3. 하나님의 통치를 감사하기 위해서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이 우물을 발견하는 작업 속에 감취인 비밀 하나를 더 소개합니다. 18절입니다. “이 우물은 지휘관들이 팠고 백성의 귀인들이 규와 지팡이로 판 것이라”고. ‘규’는 옛 번역에는 ‘홀’이었습니다. 이것은 본래 통치자의 주권 혹은 왕권(우리나라의 옥새같은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리더의 손에 잡힌 지팡이도 역시 지도자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물을 팔 때는 본래 이런 것들이 사용되지 않습니다. 부삽이나 괭이 등이 보편적인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도구를 쓰지 않고 규와 지팡이를 사용했을까요? 창 49:10에서 그 해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규(홀)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이 규(홀)와 지팡이는 궁극적으로 메시아의 통치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분의 주권적인 통치로 이 샘물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힘들이지 않고 지팡이로 헤쳐 보니까 우물이 발견된 케이스였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여러분, 인생을 우리 힘으로만 살면 힘들고 고생길이지만 그분의 통치를 복종하며 살면 기쁨과 은혜인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살면 이 땅에서도 천국을 경험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 그의 통치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천국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천국가기 전에도 천국을 경험하기를 소원하십니다. 성령 충만의 본질은 바로 성령의 다스리심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통치를 경험하면 지금 여기에서 천국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14:17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십니다. 이런 천국을 사모하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천국가기 위해서만 예수를 믿는 자가 아니라, 천국을 살아가기 위해서 예수를 믿으셔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는 모든 곳에서 천국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이런 찬송을 진정한 신앙의 고백으로 부르게 될 것입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그렇습니다. 사막에서 조난당한 인생의 곁으로 오신 우리들의 진정한 어린 왕자이신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한 샘물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그리고 그는 이렇게 우리에게 속삭이십니다. “나와 같이 있는 곳이 바로 천국이야”라고. 이스라엘 백성이 이 브엘에서 샘물을 마신 후 그들은 이제 광야와 약속의 땅이 함께 보이는 비스가 산 꼭대기로 인도됩니다. 마지막 20절을 보실까요. “바못에서 모압 들에 있는 골짜기에 이르러 광야가 내려다보이는 비스가 산(느보 산) 꼭대기에 이르렀더라” 할렐루야! 약속의 땅이 머지않았습니다. 조금 만 견디십시오. 조금 만 기다리십시오. 노래하며 기다리십시오. 영원한 축제가 머지않았습니다. 사막의 골짜기 때문에 절망하지 마십시오. 사막의 목마름 때문에 사막의 행진을 불평하지 마십시오. 우물을 찾아 나서면서 어린왕자가 들려준 말을 기억 했으면 좋겠습니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사막에 샘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 샘은 완벽하게 도르래와 두레박이 함께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도우리가 어린왕자를 따라 나설 준비가 되어 있다면 우리는 모두 사막의 축제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물의 노래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노래 소리가 들리지 않으시나요?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 4:11)
인생 여정
민 21:10-35 / 이정원 목사(참사랑교회)
인생은 나그네 길입니다. 이것은 대중가요 가사의 한 구절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일뿐만 아니라 광야이기도 합니다. 광야는 메마르고 황량한 곳이며, 나그네 길은 외롭고 고생스러운 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광야 나그네 인생길을 다 간 후 우리의 영원한 본향에 영광스럽게 입성하게 될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하고 복된 일입니까?
우리가 본향에 들어가기까지는 반드시 광야와 같은 인생 여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이 여정에는 고달프고 실망스러운 일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방 종교에서는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지나간 인생을 추억할 때 허무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의 종착역은 어디입니까? 영원한 멸망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인생은 갈수록 소망이 없고 허무할 뿐입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인생이 반드시 고해인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지나간 여정을 돌이켜 볼 때마다 희열과 감동을 맛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늘의 영광과 영원한 기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며 이 광야 인생길을 거뜬히 통과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복된 사람들입니까?
비스가 산에 이르기까지의 여정
10-20절은 불뱀 사건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르 산에서 가나안 땅이 내려다보이는 비스가 산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간단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 여정을 그저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여정이 그렇게 무미건조한 여정이 아니었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광야를 지날 때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있었습니까? 때로는 마실 물이 없었고, 때로는 험한 길에서 고생을 했으며, 때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적들과 마주치기도 했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일은 그들 안에서 일어나는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불신하고 원망한 것과, 거기에 따르는 하나님의 징계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간단하게 언급된 여정이지만, 거기에는 여러 가지 감개무량한 일들이 있었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의 여정은 어떠했습니까?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기까지 우리 각자의 여정을 돌이켜 봅시다. 앞으로도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지만, 지금까지 달려 온 길도 짧지는 않았습니다. 당신이 달려 온 여정을 되짚어 볼 때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됩니까?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인생 여정에는 고비도 많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생생하게 체험한 일도 많았습니다. 유년 시절과 사춘기, 그리고 군 시절과 신학을 공부하던 시절, 교육 전도사로 학생들과 청년들을 지도하던 시절, 농촌 개척 교회와 폐광촌 목회 시절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를 여위는 슬픔을 겪었습니다. 군 입대를 앞두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던 일은 가장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심신을 연단 받았던 군복무를 마치고 하나님의 강권적인 도우심으로 총신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행복한 시절이었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경제적인 연단을 받은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농촌 개척교회 시절의 고독과, 무더기로 교인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폐광촌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폐광촌을 살려 보려고 안간힘을 쓸 때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시며 기적 베푸시던 일들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그리고 안산에 와서 목회한지도 15년이 지나고 있는데, 이 세월도 만만치는 않았습니다.
이 모든 인생 여정과 고비들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가 얼마나 풍성했는지 모릅니다.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해도 너무나도 감사하고 만족한 뿐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인생을 인도해주셨으며, 부족하나마 사용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장차 영광스러운 본향에서 과분한 상급과 위로를 주실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남은 문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모든 여정에서 더욱 최선을 다하여 충성하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인생 여정을 돌아볼 때 당신은 어떤 감회를 느낍니까?
브엘의 우물
모세는 광야의 여정 가운데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장면에 대해서는 조금 더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브엘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물을 주셨던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을 기록하고 있는 출애굽기와 민수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실 물이 없어 죽게 생겼다고 아우성칠 때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셔서 물을 주신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브엘에서 물을 주신 것은 그런 경우와도 다릅니다.
브엘에서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물을 팠습니다. 그러자 많은 물이 솟아났습니다. 성경에는 이 사건이 한 번만 기록되어 있지만,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에서 이런 일이 자주 있었을 것입니다. 광야는 물을 구할 수 없는 곳이었으며, 이스라엘은 늘 이곳저곳으로 이동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진을 칠 때마다 이렇게 우물을 파서 하나님의 은혜로 물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는 일반적인 경우이기 때문에 특별히 다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브엘에서 하나님께서 물을 주신 일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브엘에 이르니 브엘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시기를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물을 주리라 하시던 우물이라 그 때에 이스라엘이 노래하여 이르되 우물물아 솟아나라 너희는 그것을 노래하라 이 우물은 지휘관들이 팠고 백성의 귀인들이 규와 지팡이로 판 것이로다 하였더라”(16-18절). 메마른 광야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물을 파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순종했더니 시원한 물이 풍성하게 솟아났습니다. 메마른 광야에서 그렇게 우물물을 얻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기뻐하며 감격했겠습니까?
오늘 우리도 지난 인생길을 돌아볼 때 유난히 감격적이었던 일들을 얼마든지 기억할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 있어서 그것은 언제이며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특별히 풍성한 은혜를 주셨던 일들을 자주 추억하면서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심과 신실하심을 다시금 확인하고,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처럼 신실하게 인도하실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의무
브엘에서의 감격적인 사건은 우리에게 중대한 교훈을 줍니다. 기적적으로 우물물을 얻었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물을 얻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메마른 광야에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우물을 팠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건을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책임이 결합된 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물론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인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주권적으로 인도하시며 은혜를 베푸시지만, 우리의 책임과 역할을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다 아신다고 하시면서도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공급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동시에 우리가 성실하게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의 인생 여정을 온전히 인도하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지하며 성실하게 이 길을 가야 합니다. 이 여정을 마치기까지 우리의 책임을 다 해야만 합니다.
시혼과 옥을 이김
비스가 산에 도착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데는 이제 두 가지 장애물만 남았습니다. 그 하나는 아모리 족속이었고 또 하나는 바산 족속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평화롭게 지나가려고 했지만 아모리 족속의 왕인 시혼이 그 백성들을 모아 가지고 나와서 이스라엘을 공격해왔습니다. 아모리 족속은 모압을 이긴 강한 족속이었지만 이스라엘은 아모리인들을 쳐서 몰아내고 그 성읍들과 땅을 차지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모리 왕 시혼에게 사신을 보내어 이르되 우리에게 당신의 땅을 지나가게 하소서 우리가 밭에든지 포도원에든지 들어가지 아니하며 우물물도 마시지 아니하고 당신의 지경에서 다 나가기까지 왕의 큰 길로만 지나가리이다 시혼이 이스라엘이 자기 영토로 자나가기를 용납하지 아니하고 그의 백성을 다 모아 이스라엘을 치러 광야로 나와서 야하스에 이르러 이스라엘을 치므로 이스라엘이 칼날로 그들을 쳐서 무찌르고 그 땅을 아르논에서 얍복까지 점령하여 암몬 자손에게까지 미치니 암몬 자손의 경계는 견고하더라”(21-24) 이스라엘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아모리 족속의 땅을 정복했습니다. 이로써 이제 ‘왕의 큰길’은 이스라엘의 영토 안에 있게 되었습니다.
아모리 왕 시혼을 격파한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바산 길로 올라갔는데, 이번에는 바산 왕 옥이 그들과 싸우려고 했습니다. 신명기 3장에 이 전쟁에 대한 기사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산은 곡창 지대였으며, 거인족 르바임이 살고 있었습니다. 성읍 곳곳이 요새화 되어 있었고 국력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그들의 힘만 믿고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에게 붙이심으로 이스라엘은 바산 왕 옥을 물리치고 그 땅을 차지했습니다.
“그들이 돌이켜 바산 길로 올라가매 바산 왕 옥이 그의 백성을 다 거느리고 나와서 그들을 맞아 에드레이에서 싸우려 하는지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와 그의 백성과 그의 땅을 네 손에 넘겼나니 너는 헤스본에 거주하던 아모리의 왕 시혼에게 행한 것 같이 그에게도 행할지니라 이에 그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백성을 다 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그의 땅을 점령하였더라”(33-35절).
이 승리의 의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복하고 차지한 땅들은 비옥한 땅들이었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메마른 광야만 지나왔던 이스라엘은 처음으로 비옥한 땅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 좋은 땅들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과의 전투는 가나안 정복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 강한 왕들을 정복한 것은 앞으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들을 그렇게 정복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이 지역을 점령한 것은 가나안을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이 땅들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에게 분배되어 그들의 기업이 되었습니다.
먼 길을 돌아온 이유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에서 왕의 대로를 타고 곧장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고, 이렇게 먼 길을 돌아서 가게 하신 이유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편하고 가까운 길을 두고 멀고 험한 길로 돌아가는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여 불신앙으로 원망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불뱀에 물려 죽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가깝고 편한 길로 가지 못하고 멀고 험한 길도 돌아가야 했던 이유가 밝혀졌습니다. 그렇게 먼 길을 돌아서 가다 보니, 그들은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벌써 광대하고 비옥한 땅들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이 땅들을 정복함으로써 가나안 족속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가나안에 살고 있던 족속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엄청난 권능으로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해내신 것과, 홍해를 갈라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하신 것, 그러나 애굽 군대를 홍해에 멸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여러 가지 기적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것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을 향하여 진군해오고 있는 이스라엘이 요단 동쪽에 있는 강한 나라들을 단번에 정복해버렸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가나안 족속들은 간담이 녹고 공포에 떨게 되었습니다.
여리고의 기생 라합은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라”(수2:1-11) 가나안 족속들이 이렇게 공포에 떨게 되었으므로 이제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은 시간문제에 불과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깝고 편한 길을 두고 멀고 험한 길을 돌아서 가도록 인도하신 데에는 이처럼 선하신 뜻과 계획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고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 그것이 더 좋은 길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이처럼 선하게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로 이해할 수 없을 때에도, 고생스럽고 힘들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며 인생길을 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이곳까지 왔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걸어온 인생길에는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과 고생스러운 일들도 있었습니다. 슬픈 일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생 여정을 되돌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생생하게 확인하며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는 왜 하나님께서 험하고 먼 길을 돌아서 오게 하셨는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신실하심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광야 인생길을 걸어왔습니다. 우리 앞에는 아직 더 가야 할 여정과 싸워야 할 전쟁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여정과 전쟁에서도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승리를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생 여정을 모두 마치고 승리한 후 영원한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날까지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온전히 순종하여 이 길을 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광야를 떠나지 말라
민 21:10-20 / 박봉수 목사
네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고 갑니다. 네비게이션의 인도를 받아서 가는데 지름길로 가는 것 같지가 않고 돌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을 했습니다. 지도를 보니 직선 코스로 온 것이 아니고 먼길로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돌아갈 때는 지도상의 지름길로 가야지 하고 네비게이션의 인도와는 상관없이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웬 일입니까? 지름길인 것 같기는 한 데 산길을 넘어가는 길이었습니다. 얼마나 꼬불꼬불하고 위험한지.. 그제서야 네비게이션이 왜 돌아가는 길로 인도했는지 이해가 갔습니다. 네비게이션이 인도한 길은 ‘최적 코스’였습니다. ‘직선 코스’보다 ‘최적 코스’가 더 좋은 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는 길이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언제나 빨리 가려고 하고 먼저 가려고 하고 지름길로 가려고 하는 우리의 심리 상태와 맞지 않을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최적의 길을 나중에서야 깨닫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돔 땅을 통과해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길이 지름길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생각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남쪽 길로 해서 요단 동편을 돌아가는 길을 선택합니다. 에돔과 모압을 우회하는 길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앞 4절에서 9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돔을 가로질러 직선으로 가나안 땅을 가지 않고 에돔을 돌아서 가도록 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다가 불뱀에게 물려서 죽는 일이 생깁니다. 모세의 중보기도로 하나님은 놋뱀을 만들게 해 그것을 쳐다보는 자는 사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러한 일을 겪고 난 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을 향해서 계속해서 길을 갑니다.
그들이 가는 길은 멀고 힘든 길입니다. 과거에는 힘들다고 불평했지만 이제 그들은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힘든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브엘’이라는 곳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물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16절을 봅시다. ‘거기서 브엘에 이르니 브엘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시기를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물을 주리라 하시던 우물이라’
고난과 역경의 과정에서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길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도망가고 싶어 합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힘들고 어려운 그 길을 피하여 도망간 곳의 종착지는 어디였습니까? 큰물고기 뱃속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악독한 왕후인 이세벨이 죽이려고 하자 그는 피하여 도망갔습니다. 피하여 도망간 곳이 어디입니까? 로뎀 나무 밑입니다. 도망가서 편안하게 잘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는 거기서 죽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고난과 역경은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는 현장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강을 내시고 사막에 길을 내십니다. 평안해 보이는 곳에서는 기적이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이사야 43:19에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길이 생기는 놀라운 은총을 체험하고 싶습니까? 샘이 터져 나오는 놀라운 기적을 맛보고 싶습니까? 도망가지 말고 광야에 머무러십시오. 도피하지 말고 사막에 거하십시오.
요셉의 기적은 감옥에서 일어났습니다. 요셉이 감옥에 오기까지 그는 엄청나게 힘든 광야와 사막의 길을 걸었지만 그는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도피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지금 내가 가는 길이 지루하고 힘든 길입니까? 고통스러운 역경의 길입니까?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묵묵히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데로 전진합시다. 비록 그 글이 광야와 같은 길이 사막과 같은 길이라고 할지라도 그대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샘이 솟아나는 브엘의 기적과 응답을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물물아 솟아나라
민 21:10-20 / 노경모 목사
광야와 사막을 가려면 물이 절설히 필요합니다. 우리도 어떤 때는 사막과 같은 인생길을 갈 때도 있고, 어떤 때는 광야와도 같은 인생길을 갈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인생길에 물이 필요합니다. 물은 무엇을 말할까요? 영적인 생수도 될 수도 있고, 영적인 양식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서 필요한 돈이 될 수도 있고 일용할 양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가정이 될 수도 있고, 직장이 될 수도 있고, 건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정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갈 때 하나님은 광야길고 사막길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가데스’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그들에게 물이 다 떨어 졌습니다. 그 때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물이 없음을 인하여 불평하고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모세가 반석을 쳐서 물을 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물을 실컷 마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와 다투었다.’고 ‘므리바 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을 얻긴 얻었지만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여 얻은 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민수기 20장에 이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브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을 얻은 것은 ‘가데스’에서 물을 얻은 것과는 아주 다릅니다. 가데스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다고 불평하고 원망한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물을 얻었지만 브엘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먼저 물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물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 비록 지금은 광야 길이고 사막 길이라고 할지라도 묵묵히 하나님이 인도하시는데로 전진한다면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채우신다는 말씀입니다. 마치 브엘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물을 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광야 길을 피하거나 도망하지 맙시다. 그냥 가십시오. 불평없이 원망없이 꾸준히 전진하십시오. 그 길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길이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시는 길입니다.
자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브엘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우물물아 솟아나라고’ 오늘 우리도 이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물물아 솟아나라’는 노래는 어떤 노래입니까?
첫째, 믿음의 노래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히브리서 11장 1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브엘에서 물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면 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반드시 주십니다. 그러으로 물을 주심을 믿고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믿음의 찬양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는 내가 믿고 있음을 무엇으로 드러낼 수 있습니까? 바로 믿음의 찬양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막과 같은 힘든 길을 가고 있을 때에나 광야와 같은 어려운 길을 가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 주시고 나를 인도해 주시고 약속을 이루신다는 믿음으로 찬양을 해야 합니다. 믿음의 찬양은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믿음의 찬양은 어두움의 영을 물리칩니다. 믿음의 찬양은 기적과 이적을 일으키게 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한밤중에 기도하고 찬양할 때 감옥 문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래 전 영등포시장에 대화재가 났을 때의 일입니다. 마침 그때 신현균 목사님이 일본에서 돌아오는 길이라 차를 좀 보내라고 공항에서 집으로 전화를 하니 아내가 영등포 시장의 대 화재 소식을 전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문득 얼마전 철도청에 근무하던 남편을 여의고 어린 삼남매를 기르며 그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여집사님 생각이 나서 달려가보니 불길이 여집사님의 집쪽으로 맹렬히 옮겨 붙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처참한 광경을 눈앞에 두고 그 여집사님은 고요히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미8군의 소방차가 동원되고 장성들도 나왔는데 미군장성 한 명이 "저 여인은 무엇을 하고 있소?"라고 묻자 옆에 있던 신현균 목사가 그 여인은 크리스천인데 자기 집이 불타는 것을 보면서도 찬송을 부르고 있다고 일러주었습니다. 감복한 미군장성은 "저 여인의 집을 내가 지어주겠소"라고 하고는 몇 만 불을 희사할 뜻을 밝히고 약속대로 신설동에 더 크고 우람한 빌딩을 지어주었습니다. 환란 가운데서도 찬송하는 신앙을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반드시 놀라운 역사를 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어려운 일을 만나도 능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항상 찬송해야 합니다. 찬양은 모든 헌신 가운데 최고이며 믿음의 진정한 증거입니다.
둘째, 감사의 노래입니다.
‘우물물아 솟아나라’는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물을 주셨음을 감사하는 노래였습니다. 시편 147:7에도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찬양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노래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는 늘 그 마음과 입에서 찬송이 끊이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셨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주셨음을 믿고 감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뿐만아니라 지금까지 인도하셨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길에서 어려움이 직면했을 때 하나님과 모세에 대해서 불평하고 원망하고 거역을 했습니다. 이렇게 하게 된 이유는 바로 그들이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인도하셨고 나를 도와주셨고 나를 채워주셨는가 하는 것에 대한 감사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감사가 없으면 불평과 원망이 나오게 됩니다. 불평과 원망이 나오면 마귀가 시험에 들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가 어려워지게 됩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불평과 원망과 거역 때문에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를 못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말입니다.
셋째, 선포의 노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물을 주겠다고 말씀하신 그 우물을 향해 우물물아 솟아나라고 노래를 부릅니다. 이것은 선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이 물을 달라고 기도하거나 요청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선포하면 됩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에 마음이 묶여서는 안됩니다. 그 것 때문에 부정적으로 생각해서도 안되고 두려워 해서도 안되고 낙망해서도 안됩니다. 약속의 말씀을 믿고 담대하게 선포하십시오. 마음으로 선포하고 입으로 선포하십시오. 기도를 해도 소극적으로 기도하지 마십시오. 입 안에서만 맴도는 기도를 하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선포하는 기도를 하십시오. 이것이 믿는 자의 권세입니다. 왕되신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입니다.
얼마 전부터 제 입에서 ‘초대교회야 솟아나라’는 선포의 기도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면서 솟아나라고 선포하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외냐고요? 초대교회와 여러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시는데로 순종하면서 묵묵히 전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 길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하시는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비록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노래를 부릅시다. 믿음의 노래를 부릅시다. 감사의 노래를 부릅시다. 선포의 노래를 부릅시다. 그리하여 우리를 항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놀라운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라
민 21:10-20 / 노경모 목사
건강한 성도의 가장 간절한 소망은 하나님과 풍성한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하나님께 점점 가까이 나아가는 것을 우리는 ‘영적 진보’라 부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을 '영적 퇴보' 혹은 '영적 침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영적 침체'는 성도들만 경험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회심한 적이 없는 불신자가 일시적으로 교회 공동체 안에 있다가 때가 되어 세상으로 돌아가는 불신자들의 '배교'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러나 '영적 침체'는 한평생 성도들을 가장 괴롭히는 영적 질병이며, 그 피해는 아주 큽니다. 그렇지만 이처럼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질병인 '영적 침체'에 대해서 지금까지 가슴앓이만 해왔지 진정으로 이것에 대한 실질적인 답변을 제시받은 적이 거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에 대한 답변을 얻기를 바랍니다.
다음 이 글은 어느 목사님의 글입니다.
나는 1989년 2월 5일 L 교회를 개척한 후에 혹독한 영적 침체를 경험했다. 내게 있어서 영적 침체는 잠시 지나가는 소낙비와 같은 경험이 아니었다. 오랜기간동안 나를 무척 아프게 했던 경험이었다. 나를 쓰러뜨리기 위해 찾아 왔던 고통이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영적 침체는 나를 쓰러뜨리지 못했다. 오히려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 “우리를 쓰러뜨리지 못한 것은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목회자의 영적 침체에 관한 글을 부탁 받은 후에 많은 시간동안 글 쓰기를 머뭇거리는 자신을 보았다. 그 이유는 내가 목회자로서 경험했던 영적 침체를 다시 상기하는 것조차도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영적 침체 중에 불렀던 찬송가마저도 피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놀랄 때가 있다. 그때 불렀던 찬송을 다시 부르노라면 영적 침체 중에 경험했던 아픔이 재연되는 느낌을 갖기 때문이다.
고난을 혹독하게 경험한 사람은 고난을 이야기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피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다만 그만큼 고난의 아픔이 컸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통이 사명임을 알기에 나와 같이 영적 침체로 고통받고 있는 분들을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다. 특별히 이 글은 개척교회를 시작하거나 개척교회를 하면서 영적 침체 중에 있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또한 영적 침체를 통과해 본 적이 없는 신학생들이나 목회자들에게 예방의 차원에서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개척교회를 시작한 지 정확히 4개월이 지나서 나는 영적 침체로 쓰러졌다. 그 당시 미국교회를 빌려서 교회를 개척했기 때문에 우리 교회 예배시간은 오후 1시 30분이었다. 미국교회와 좋은 관계를 갖기 위해 오전에는 미국교회에서 영어로 예배를 드리곤 했다. 정확히 1989년 6월 13일에 미국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중에 가슴이 답답하면서 숨이 막히는 것을 경험했다. 두려움이 엄습해 오면서 절망감이 찾아왔다. 나는 예배 중에 밖으로 뛰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창백해진 얼굴을 한 채 쓰러져 있었다. 미국교회 교인 몇 사람이 따라 나왔다. 그 중에 한 분이 남자 간호원이어서 쓰러진 내 곁에서 상태를 점검해 주었다. 가슴은 뛰고, 손에는 식은땀이 났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이 찾아 왔다. 건네주는 포도 쥬스를 마셨다. 무엇인가 마셔야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날 예배를 그 당시 같이 동역했던 아무게 목사님께 부탁하고 나는 K 병원으로 갔다. 예배만 부탁한 것이 아니라 가족까지 부탁을 했다. 그 의미는 죽음이 곁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 보았지만 별 이상이 없었다. 육체적으로 나타난 것만 가지고는 나의 문제를 찾아 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내게 기다리고 있던 것은 고독한 싸움뿐이었다.
이 글을 쓰신 목사님께 다가온 영적인 침체가 얼마나 혹독했는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영적인 침체를 겪을 수가 있습니다. 이미 겪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지금 겪고 있는 분들도 있고 앞으로도 겪을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영적 침체의 성격과 내용과 크기와 깊이가 다를 뿐 우리 모두는 적어도 한 번은 겪게 되는 과정입니다. 마치 홍역을 앓듯이 말입니다.
위대한 불의 선지자 엘리야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 왕도,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영적인 침체를 경험했습니다. 단체적으로 영적인 침체를 오랜 기간 경험했던 사람들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 있을 대 고역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가 상달되어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셔서 강퍅한 애굽의 바로왕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내시기 위해 애굽에 열 가지의 재앙을 내리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로 인해서 그들이 애굽에서 나오게 될 때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곧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처럼 그렇게 쉽게 되지가 않았습니다. 뒤에는 애굽 군대가 추격해옵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 막혀 있습니다. 그들은 마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앙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고 영적인 침체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홍해를 건너서 광야 길로 걸아가는 그들에게 물이 떨어 졌습니다. 먹을 것이 걱정되었습니다. 그들에게 또 영적인 침체가 재발되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40일이면 들어갈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1년이고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30년이 지납니다. 지루하고 힘든 광야 길과 사막 길을 갑니다. 그들에게 계속적으로 끊임없이 영적인 침체가 찾아오고 영적인 침체가 재발됩니다. 마치 감기를 달고 사는 사람들을 처럼 말입니다. 물론 이들의 불신앙과 불순종 그리고 거역함이 영적인 침체의 원인이었지만 하여튼 이들처럼 아주 혹독하고 지루한 영적인 침체를 경험한 사람들은 드물 것입니다.
이제 가나안을 앞두고 이들에게 하나님은 영적인 침체를 벗어나기 위한 처방을 내리십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땅을 파라’는 것입니다. 땅을 팔 때 영적인 침체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브엘에서 하나님은 물을 주시겠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물물아 솟아나라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땅을 팠다는 사실입니다. 18절의 말씀을 볼까요?
‘이 우물은 지휘관들이 팠고 백성의 귀인들이 규와 지팡이로 판 것이로다 하였더라’
여기서 ‘규’란 지휘관들이 갖고 사용하는 지시봉, 지휘봉을 말합니다. 백성의 귀인 즉 신분이나 지휘가 놓은 사람들이 갖고 다니는 지팡이는 싸구려 지팡이가 아닙니다. 막쓰는 지팡이가 아닙니다. 좋은 재질로 된 그리고 멋진 장식이 있고 조각이 되어 있는 좋은 지팡입니다.
백성들이 이 우물을 주도해서 판 것이 아닙니다. 노동자나 천민 계급의 사람들이 우물을 판 것이 아닙니다. 손에 흙을 묻히지 않고 힘든 일은 잘 하지 않는 백성의 지도자들이 손수 삽이 아니라 그들이 갖고 있는 귀하고 값비싼 규와 지팡이 로 물이 터져 나올 때까지 땅을 팠습니다.
하나님이 우물물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땅을 팔 필요도 없었고 땅을 파지도 않았을 것인데 이렇게 지도자들이 그들이 갖고 있는 규와 지팡이로 땅을 판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땅을 파라고 명령을 하신 것 같습니다. 물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은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기적적인 방법으로 물을 주실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땅을 파라고 명령을 하셨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과 사막 길을 가면서도 영적 침체에 빠지지 않도록 하시 위함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할지라도 우리는 땅을 파야 합니다. 마치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땅을 팠듯이 말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침체를 이기는 하나님의 처방이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자, 그렇다면 땅을 파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첫째, 자기의 일을 계속해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주신 꿈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계속해서 자기의 일을 합니다. 지금 자기가 하는 일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꿈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아주 미미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그 일을 했습니다
그는 남의 집에서 종으로서 일을 성실하게 했습니다. 감옥에서 가서도 그는 자기의 일을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게 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일을 해 나갔습니다. 그 감옥에서 왕의 떡 맡은 비서관과 술 맡은 비서관이 왔을 때에도 그들을 정성껏 섬기면서 자기의 일에 최선을 다해서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하찮아 보입니까? 하나님의 약속과는 너무 동떨어져 보이는 아주 사소한 일입니까? 그래도 계속해서 최선을 다하면서 일을 해 나갑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현재의 일에 감사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는 영적인 침체가 잘 들어오지를 못합니다. 영적인 침체가 온다고 할지라도 쉽게 극복이 됩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너무 힘들다고 생각하고 이 일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불평이 생기고 원망이 생기면 마귀가 그것을 매개체로 이용하여 영적 침체를 심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침체가 와서 힘들어하는 분들을 보면 자기가 하는 일이 힘들고 어렵다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지금까지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지켜주시고 공급해 주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나에게 일할 수 있는 팔 다리를 주시고 입을 주시고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그 일을 감당해 나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적은 것에 충성할 때 하나님은 더 큰일을 맡기십니다.
제가 강도사 고시를 준비하기 위해서 두 주간 강원도에 있는 기도원에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스무 살 갓 넘어 보이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이 자매는 조울증으로 이 기도원에 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원 원장이 아주 지혜가 있으신 분이셨습니다. 이 자매의 우울증이 많이 호전이 되었는데 그 비결이 무엇이었는지 아세요? 물론 그 병 낫기를 위해서 기도했겠지요. 그리고 공기도 좋고 여러 자연 환경이 좋은 이유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사실은 매일 아침마다 원장님이 이 자매에게 일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기도원 내에 있는 길의 양쪽에 돌맹이들을 주워서 쌓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걸어 다니면서 발에 걸려 돌맹이들이 무너지고 나중에는 이리저리 돌맹이들이 뒹굴게 되어도 그 다음 날 아침이 되면 또 돌을 쌓기 시작합니다. 길 양쪽을 예쁘게 꾸미기 위해서입니다. 원장님의 말씀은 이 자매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이 없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길을 자기가 예쁘게 꾸민다는 목적을 가지고 돌을 쌓는 것입니다. 일을 안하게 되거나 멈추게 될 때 그 병은 그 심해지기도 하고 낫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영적인 훈련을 더 집중해서 하는 것입니다.
운동선수들에게도 슬럼프가 옵니다. 어떤 사람은 장시간 이 슬럼프에 때문에 힘들어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은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을 그것을 단 시간 내에 잘 극복하고 다시 필드에 나는 분들이 있습니다.
운동선수들이 슬럼프가 올 때 무엇으로 극복을 하는지 아세요? 훈련입니다. 슬럼프 전보다 더 강력한 훈련을 합니다. 자기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침체가 오면 더 경건 훈련에 힘써야 합니다. 억지로라도 더 자기 자신을 채찍질 하면서 힘쓰십시오.
새벽기도회에 나가십시오. 수요예배에 안 나오셨던 분들은 수요예배에 나오십시오. 금요기도회에 나오십시오. 회사가 늦게 끝나서 못나오는 것은 어떡하겠습니까. 안 그런 분들은 버스타고 전철타고 나오십시오. 나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킵니다. 나오면 찬양하게 됩니다. 찬양은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합니다. 나오면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기도는 우리의 영육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영적인 침체가 왔을 때는 사람들은 자기 안의 작은 공간에만 머물러 있으려 합니다. 밖으로 나가기를 싫어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영적인 침체가 심해집니다. 나중에서 영적으로 죽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침체가 온 사람들은 생각에 깊에 빠지는 것은 좋지가 않습니다. 성도들과 어울려야 합니다. 함께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2:22에는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영적인 침체 속에 있습니까? 지금 부터라도 땅을 파십시오. 영적인 침체를 경험하지 못한 분들이 계십니까? 예방적인 차원에서라도 땅을 파십시오. 우리가 하는 일을 감사함으로 계속하십시오. 하나님이 다음이 길을 인도하실 때 까지 말입니다. 그리고 경건에 훈련에 더욱 더 힘을 씁시다. 그리하여 영적인 침체를 멋지게 극복하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물의 노래
민 21:10-20
신자가 성경을 봐야 하는 이유는 성경을 읽어야 믿음 좋은 신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철저하게 가려져 있는 하나님을 알아가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가려져 있는 분입니다. 때문에 누구도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없습니다. 이 말을 달리 말하면 세상은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게 되어 있다는 뜻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면서 구원을 받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란 글자 석자를 아는 차원이 아니고 사도신경을 외우고 주기도문을 외운다고 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도 아니며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을 10번, 아니 100번을 읽었다고 해서 아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 이런 것들이 하나님을 아는 증표가 되어버리면 구원의 근거가 아주 이상하게 되어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시는 분이라는 것을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를 죽이신다는 것은 우리의 본성 자체를 깨뜨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즉 옛사람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고전 3:16절이나 고후 6:16절에 보면 우리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란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라는 뜻인데 이 성전의 의미는 야곱을 통해서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야곱이 에서와 이삭을 속인 일로 인해서 집을 떠나게 된 후 한 곳에 머물렀을 때 꿈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광경을 보고 그 곳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곳 이름을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던 일을 아실 것입니다. 그때 야곱은 서원하기를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나를 지켜주시고 양식과 입을 옷을 주시고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이때만 해도 야곱은 하나님은 자기를 지켜주고 자기를 살려주는 분으로만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벧엘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그때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저는 자로 돌아왔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어서 돌아왔습니다. 야곱이란 약탈자란 뜻입니다. 그 약탈자의 모습이 깨어진 자로 다시 벧엘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창 3:15절에 다시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때의 벧엘은 의미가 다릅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야곱과 말씀하셨던 그 장소에 거하신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때의 하나님의 집이란 의미는 놀랍게도 하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야곱이란 인간자체를 의미합니다. 야곱이 곧 벧엘입니다. 그러나 처음에 야곱은 하나님이 거하실 거처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의해서 못된 인간성이 깨어지고 은혜로 풍성케 되었을 때는 하나님이 거하실만한 거처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곧 성전이라는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하나님보다도 나를 앞세우는 우리의 본성을 죽이시고 대신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케 해서 하나님이 거하실만한 거처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성전 삼겠다고 하신 말씀을 우습게 여기지 마십시오. 마지막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만 남기시고 다 멸하신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성전입니다. 그리스도와 우리가 각각 다른 성전이 아니라 참성전이신 그리스도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실 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교회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교회는 죽은 자들의 모임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깨어지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케 된 자들이 오직 하나님께만 관심을 두고 모이는 무리를 가리켜서 교회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외에는 교회란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지상에는 수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눈에 보이는 교회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관심 두고 있는 교회는 성전된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그 교회만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성전된 교회의 교인 같으면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겠습니까? '나는 눈에 보이는 것에는 마음두지 않겠다'는 마음입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싸움은 언제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싸움입니다. 어느 쪽에 뜻을 두고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시는 것은 보이는 것에 미련 두고 살아가는 인간 본연의 욕망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에 모든 소망을 두는 새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십니다. 그럴 때 놋뱀, 즉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린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깨어진 참된 이스라엘, 즉 참된 교회의 신자로서 세상을 살아갈 때 그 사람의 삶의 모습이 어떻게 보여지는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물을 두고 노래하는 장면입니다. 이 우물의 노래가 어떻게 참된 신자의 삶에 대해서 말해주는지를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문제로 삼고 싶은 것은 감사가 지속적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거의 일회성의 감사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은 한번 소유한 것에 대해서는 감사를 하지 않는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유한 것은 감사의 목록에서 제외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또 다른 새로운 감사의 조건을 만들어서 그것을 얻기 위해서 땀흘리며 살아가는 것이 지금의 인간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감사의 조건을 만들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애쓴다는 것은 이미 이전의 은혜에 대해서는 잊었다는 뜻입니다. 이전의 것은 작아 보이고 새로운 것이 더 커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커 보이는 새로운 것이 주어지지 않은 이상 그 사람은 이전에 있었던 감사와 기쁨은 사라진 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것에 대해서 낙심하고 불행을 느끼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은 지금까지 고요하고 평안한 인생을 살아오셨습니까? 아니면 바다에서 파도가 치듯 흔들리는 인생을 살아오셨습니까? 저는 여러분께 아무런 일이 없는 평안한 삶을 사셨는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묻고 싶은 것입니다. 바다에서 파도가 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고요한 그런 삶이었는지 아니면 파도가 없으면 고요하다가도 파도만 치면 이리 저리 흔들리는 그런 마음으로 살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생에 파도가 치면 그 파도에 따라서 마음이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파도가 칠 때마다 흔들리는 마음과 원망으로 하나님을 찾아 나올 수는 없는 문제이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오늘 이시간에 도대체 왜 파도가 칠 때 고요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지 못하는가에 대해서 깨닫고 파도에 상관없이 고요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고 살아가는 그런 신자되는 것에 우리의 모든 소망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인생에 파도가 칠 때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은 파도 속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고요하게 해 줄만큼 힘이 되는 것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도 힘으로 여기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풍랑 속에서 그 실체를 확실하게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널 때 풍랑이 일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두려워하면서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예수님은 풍랑에 두려워 떠는 제자들을 향해서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 말은 '너희가 나를 믿는다면 풍랑에 상관없이 너희들 마음은 평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우리의 힘으로 여긴다면 우린 풍랑에 상관없이 평안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지 못한 이유는 내 인생을 내 힘으로 스스로 책임져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불어닥치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길밖에 없습니다. 내 인생은 내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니까 하나님이 듯대로 하시겠지라는 믿음이 우리를 고요함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풍랑 속에서의 고요함, 이것이 곧 안식이며 구원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리켜서 교회라고 합니다. 오늘 모든 것, 그리고 내일의 모든 것도 선하신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가는 그 겸손함이 있는 신자가 곧 보이지 않는 교회의 교인인 것입니다.
지금 광야를 떠돌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상적으로 보면 참으로 비참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떠도는 나그네 인생입니다. 여기저기 왔다갔다하면서 떠돌아다니는 나그네입니다. 농사를 지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늘에서 많은 양식이 내려오는 것도 아닙니다. 겨우 하루 분의 양식만 주어졌습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은 거지입니다. 내일의 것이 없고 오늘 주어진 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하루하루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만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가리켜서 교회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마 6:31절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것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내일의 것을 가지고 염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하는 것은 오늘의 것으로 감사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내일의 것을 스스로 정해놓고 그것을 확보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말합니다. 즉 이방인들은 내일의 것을 확보하기 위해서 오늘을 살아가는데, 언제나 내일의 것은 오늘 것보다 더 좋은 것이기를 기대하는 습성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런 습성으로 살지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내일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고 하나님의 소관이기 때문입니다. 내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오늘 하루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곧 교회의 특징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중요한 의미를 언제나 미래에 둡니다. 미래가 좋아야 인생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래라는 것이 과연 여러분에게 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미래는 영원한 미래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내일이 미래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내일이 오면 내일은 오늘이 되고 다시 또 내일이 있게 됩니다. 결국 세상에서의 미래는 죽음으로 끝날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은 인간이 좋은 미래를 통해서 행복과 기쁨을 얻고자 한다면 평생토록 죽을 때까지 행복도 기쁨도 없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성도라면 내일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좋은 내일을 기대하며 살기보다는 언제나 오늘에 충실하고, 오늘에 최선을 다하며 살뿐입니다. 오늘은 현재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내일도 오늘이요 모레도 오늘입니다. 이렇게 내일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하나님께 맡기고 최선을 다하는 신자야말로 풍랑에서도 고요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17절, 18절에 보면 '그 때에 이스라엘이 노래하여 가로되 우물물아 솟아나라 너희는 그것을 노래하라 이 우물은 족장들이 팠고 백성의 귀인들이 홀과 지팡이로 판 것이로다'라는 이스라엘의 노래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노래하는 그 대상을 보면 거창한 것이 아니라 단지 우물물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에 주의를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물물에 대해서 감격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인생에 깊은 의미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가나안을 향한 길은 평탄하고 가기 좋은 길이 아니라 골짜기와 비탈로 이어지는 그야말로 힘들고 어려운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렇게 험난한 길로 인도하신 뒤에 브엘로 인도하셔서 우물에서 물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시는 우물에 감격하며 노래를 부릅니다. 우물의 물은 이스라엘에게 새롭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전에도 이 우물을 통해서 하나님이 물을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은혜로 여기지도 않았던 것이 지금에는 놀라운 은혜로 느껴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옛날에는 하찮게 보이고 작은 것으로 보여서 은혜로 여기지도 않았던 것이 지금에 와서는 은혜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골짜기와 비탈길로 이어졌던 힘든 광야생활, 즉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힘든 인생살이 속에서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힘이 팔팔하고 자기를 의지하고 살 때는 은혜도 아니고 하찮게만 보여진 것이 어려운 인생살이를 거듭하면서 자신을 의지하는 것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시점에서 다시 이전의 것을 바라보니까 그것이 놀랍게도 큰 은혜였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자신의 힘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음을 비로소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물물의 은혜를 험한 인생의 여정을 지난 후에 비로소 발견한 것입니다. 우물물의 은혜를 발견 한 후 그들은 우물물로만 행복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행복이란 환경이 아니라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달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귀한 교훈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인간은 언제나 미래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환상 때문에 오늘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시시하게 봐버리는 것입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자신의 힘을 의지합니다. 자신의 능력과 재주로 얼마든지 미래를 확보할 수 있다고 믿고 자신의 원하는 미래를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은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찾아서 행진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삶을 살았던 인간이 험한 인생을 지내고 난 후 노년에 옛날을 회상할 때 '그때가 좋았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인생을 힘들게 살아가신다면 그 인생을 통해서 잃어버린 은혜와 감사를 되찾을 귀한 기회인줄 알아야 합니다. 예전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귀한 은혜인줄도 모르고 그냥 무시하고 지나쳐버렸던 것이 힘든 인생 속에서 참으로 귀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오늘 주어진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신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성전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처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성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옛사람이 죽어져야 합니다. 보이는 것에 매이고, 큰 것만 기대하고 살면서 감사도 잊어버리고 은혜도 잊어버리고 조금만 풍랑이 불어도 흔들리고 낙심하고 원망하며 살았던 우리의 옛사람이 깨어지고 부서진 그 자리에 하나님의 집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으로 살아가십니까?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고, 작은 것에 감격하고, 작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고 살아가십니까?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안다면 그 신자는 참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작은 것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여러분 주위에 가득히 넘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풍랑이 일어도 작은 것에 담겨 있는 은혜는 여러분의 주위에 넘치고 있습니다. 그 은혜를 마음에 담고 살아간다면 풍랑 속에서 그 마음은 고요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스스로 생각할 때 자신의 인생이 너무 험하고 골짜기와 비탈길로 이어지는 인생의 연속이라고 생각되어지신다고 해도 행여 그것으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다만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 되게 하시기 위해서, 우물물을 두고 노래할 수 있는 그런 신자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인생 속에서 잃어버리고 지나쳐 버린 은혜와 감사를 찾아가시면 됩니다.
이젠 더 이상 환상에 지나지 않는 미래에 매여 살지 마십시오. 미래에 대한 환상은 오늘에 대한 감사를 잃어버리게 합니다. 오늘에 대한 감사를 잃어버린다면 결국 그 사람은 기쁨과 행복이 없는 오늘을 살게 될 것이고, 그 삶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어질 것입니다. 오늘 행복한 사람은 내일도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기쁨이 없고 행복이 없는 사람은 내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날마다 두려움과 흔들림으로 불안한 세월을 살아가는 인생으로 끝나버릴 것입니다.
우물의 노래가 여러분 삶과 가정에서 솟아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우물물을 주시기 위해서 언제나 말씀으로 함께 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작은 것의 은혜와 감사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큰 것을 기대하는 욕심 안에는 불만과 원망만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지금껏 여러분 자신을 힘들게 하고 괴롭히고 낙심케 했던 것은 힘들고 어려운 환경이 아니라 오늘에 만족하지 못하고 작은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살았던 나의 욕심인 것을 아시고 그러한 마음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이 다스려 주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으로서 인생을 살아가는 신자의 최선의 삶입니다. 아무쪼록 이러한 삶으로 자라가기 바랍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고 작은 것을 노래할 줄 아는 신자되어서 은석교회의 모든 신자들이 우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겸손한 사람으로서 보이지 않는 교회의 신자로서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보여주는 신자되기 바랍니다.
모압까지의 여정
민 21:10-20
허락보다 용서가 쉽다는 말은 가족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라 신자와 하나님 사이에 늘 따라다니는 말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을 왜 믿으십니까?”라고 물으면 “구원받기 위해”라고 답할 것입니다. “구원받아서 무엇하시겠습니까?”라고 물으면 아마 대부분 말을 못 하거나 성경을 조금이라도 공부하신 분은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위해 살겠다고 답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위해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라고 물으면, 이제 질문은 받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구원받아서 무엇 하시렵니까? 은혜받아서 어디에 쓰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한(구별된) 주의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구원받았기에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고, 은혜받았기에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하나님을 믿는 것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우리의 신앙과 삶에 너무 깊숙이 뿌리 내리고 있습니다. 여행을 가기 위해선 몇 개월에서부터 몇 년에 이르기까지 준비하곤 합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도 하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구별되려면 선교지에 방문하기 위해 준비해야 하는 것으로 삶의 방향을 움직여야 합니다. 여행을 가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신앙생활 하는 것이 진지한 삶과 신앙의 모습인지 고민해보라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인들의 상당수는 하나님 나라의 회복에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신앙생활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에 합당한 모습인지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만족과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할 뿐입니다. 이러한 가벼움은 민수기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탐욕, 불평과 불만,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습과 똑같이 우리 삶에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의 지속된 불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셔서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백성들은 불뱀 사건이 일어난 곳을 떠나, 오봇, 이예아바람, 세렛 골짜기, 그리고 더 나아가 아르논 강 건너편에 진을 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르논 강을 건넜으므로 이제 “돌아가자”라는 말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르논 강의 길고 험난한 길의 영향도 있겠지만, 아무리 불신하고 돌아가려 해도 하나님의 이끄심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브엘(우물)로 계속 진행하였는데, 브엘은 하나님이 물을 주시겠다고 약속한 우물이 있는 장소입니다. 17절의 노래는 “우물의 노래”라는 별칭이 있는데, 우물을 파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응원하기 위한 노래로 보입니다. 땅에서 우물이 나왔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 비옥한 땅에 이르렀음을 알려주는 표지가 됩니다. 불신과 원망, 불평과 어리석음으로 가득했던 광야 여정이 드디어 마무리되는 순간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조금만 더 진지했더라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더 깊이 고민했더라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 기도하며 생각해봤다면 이렇게 긴 시간을 광야에서 허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방황한 이스라엘의 모습이 곧 나의 모습과 같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지만, 하나님이 원하는 일에는 부담스러워하는 이중적인 신앙의 모습.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만, 결국 내 뜻과 생각을 합리화하려는 모습. 은혜와 성령의 충만을 위해 기도하지만, 정작 은혜와 성령의 충만을 통해 무엇을 하려는지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없는 삶을 사는 모습이 내 앞에 놓여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짊어지세요.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세요. 이렇게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하나님은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씩 채워주실 것입니다. 채워주시지 않아도 주를 기뻐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