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泰愚 전 대통령 별세 세계사적 대전환기에 민주화 실천과 북방정책이란 국가 대전략으로 한국인의 자유와 활동공간을 확대한 사람 조갑제닷컴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盧泰愚) 前 대통령이 26일 오후 별세했다. 향년 89세. 지병으로 오랜 병상 생활을 해온 노 前 대통령은 최근 병세 악화로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에 입원, 집중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세계사의 전환기를 역사의 기회로 잡은 지도자> 약속을 지킨 사람 盧泰愚 대통령은 6·29 선언으로 민주화 실천 시대를 열고 서울올림픽과 북방정책으로 한국인의 활동공간을 지구촌 全域(전역)으로 확대, 제6공화국의 틀을 만든 인물로 역사에 평가될 것이다. 세계사의 대전환기, 즉 공산권 붕괴와 민주화를 둘러싼 국내외의 갈등을 절호의 기회로 삼아 전개한 국가 대전략은 역사의 大勢(대세)를 타고 한국인들의 정치적·공간적 자유를 확대했다. 비자 없이 입국 가능한 나라 수 기준으로 한국 여권이 세계 1~2위로 평가받는 토대를 만든 이가 노태우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민주화 실천에 수반되기 마련인 갈등과 낭비를 최소화하고 國政(국정)을 생산적으로 이끌었으며 미래를 향한 투자에 주력했다. 주택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한 신도시 및 주택 200만 호 건설, 세계 최고의 인천공항과 KTX 건설, 서해안 시대 개막과 全國民(전국민) 의료보험화 등. 민주화 시대의 갈등을 자율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공권력의 행사를 자제한 그는 ‘물태우’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전교조 불법화 및 범죄와의 전쟁에서 보듯이 국민의 안전과 국가 정체성 수호엔 양보가 없었다. 노태우 정부는 언론의 자유, 선거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국제적으로 인권문제가 제기되지 않은 최초의 정권이 되었고 여기에 북방정책이 더해져 對北(대북) 우위에 서게 되었으며 그 결과물이 남북기본합의서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6·29 민주화 선언이 약속한 8개항을 지켰다. 한국 현대사의 모든 정치선언 중 가장 충실하게 집행된 국민과의 약속이었다. 이 선언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대통령에 뽑힌 노태우는 민주화를 요구하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특히 총선으로 與小野大(여소야대)가 됨으로써 이른바 5공 청산 분위기가 팽배했고 서울올림픽 성공의 영광도 묻혔다. 노태우 대통령은 이를 민주적 인내심과 3당 통합으로 돌파, 정권을 안정시킨 다음 韓民族(한민족)의 미래를 향한 장기전략을 추진했다. 그는 소란스러운 민주화 실천 과정에서 자유를 위축시키지 않으면서 경제성장과 복지확대를 지속시키고, 중국과 러시아 및 동구권 진출을 성공시켜 대한민국을 格(격)과 스케일이 다른 나라로 만들었다. 1992년의 韓中(한중)수교는 韓美(한미)동맹 및 韓日(한일)수교와 함께 한국 외교의 3대 업적으로 평가될 것이다. 엄청난 규모로 성장한 韓中경제 교류는 오늘과 내일의 한국인들이 먹고사는 축이 되었다. 이러한 북방정책은, 서울올림픽 유치 및 준비를 지휘했던 노태우 대통령이 그러한 경험을 외교자산으로 살려 공산권 붕괴라는 세계사적 전환기에 선제적 대응을 한 국가 대전략이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이뤄진 韓蘇(한소)수교와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은 한중수교로 이어졌고 고립된 김일성 정권은 저자세로 남북회담에 임하여 대한민국에 유리한 남북기본합의서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참고 또 참으면서 국익확대 노태우 대통령은 ‘보통사람들의 시대를 열겠다’고 약속한 바탕에서 ‘군인 출신 대통령’은 자신이 마지막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실천했다. 이는, 노동조합의 활동이 자유화되고 언론의 비판이 차고 넘치며 대통령이 코미디의 소재가 되는 민주화의 大勢(대세)를 거스를 수 없다는 확신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이런 신념과 3당 합당을 기반으로 30년만의 문민 대통령 金泳三(김영삼) 정부가 등장했다. 盧 대통령은, 이 정부 아래에서 이미 역사적 평가에 맡기기로 정치적 합의가 이뤄졌던 1979~1980년의 사건들을 소급입법으로 법정에서 다루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2년간의 수감 생활 뒤에 자유로운 몸이 된 그는 國政 경험을 정리한 회고록 집필에 전념하는 한편 수교 10년이 되는 2002년엔 중국을 방문, 韓中수교의 주역인 江澤民(강택민) 주석을 만나기도 했다. 오랜 정치적 관행으로 이어져 온 대통령 비자금 사건으로 부과된 추징금도 전액 납부, 정리했다. 역사는, 민주화의 소용돌이 그 한복판에서 참고 또 참으면서 國益(국익)확대에 애썼고 한국인들이 세계를 무대로 마음껏 활약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든 노태우 대통령에게 따뜻하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것이다. 10여 년간 身病(신병)으로 공개적 활동이 제약되었지만 아무에게도 불만과 불평을 털어놓지 않았다. 착하고 열심히 나라를 위하여 산 분이다. <어린 시절 > 여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대한민국의 제13代 대통령 盧泰愚(노태우)는 1932월 8월17일(음력 7월16일), 팔공산의 자락에 있는 慶北 達城郡 公山面 新龍洞 596(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용진길 172)에서 長男(장남)으로 출생했다. 아버지 盧秉壽(노병수), 어머니 金泰香(김태향)은 결혼한 지 8년 만에 처음으로 자식을 보게 되었다. 盧 대통령은 生家(생가)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이렇게 추억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왼편으로 바깥채에 할아버지가 계시던 사랑채, 그리고 아버지의 書齋(서재), 방앗간, 창고가 있고 마당을 가로질러 맞은편 안채에는 부엌과 할머니가 계시던 큰방, 마루, 어머니 방 등이 있었다. 집은 西南向(서남향)인데 마루에 앉아 바라보면 앞산이다. 해가 뜨면 앞산의 얼굴이 보이고, 해가 질 때는 앞산의 그림자만 보였다. 팔공산은 집 뒤쪽에 있는 데다가 너무 커서 잘 보이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팔공산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팔공산을 보게 된 것은 집에서 멀리 나다닐 수 있게 된 후의 일이다. 집 옆으로는 조그마한 개울을 따라 길이 나 있는데 저녁 무렵 아버지가 걸어서 올라오시는 모습을 사랑채에 앉아 열린 대문을 통해 바라보곤 했다. 개울 옆길을 따라 올라오시는 아버지께선 늘 책이나 유성기판을 끼고 계셨다. 아버지는 나를 서재로 불러 무릎에 앉히고 새로 사온 유성기판을 틀어 노래를 들려주시곤 했다. 나는 아버지가 안 계실 때에도 그 방에 들어가 유성기와 책, 퉁소 같은 것들을 가지고 놀았다. 盧泰愚가 만 여섯 살이 채 안 된 1938년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스물아홉 살에 별세했다. 그 뒤 盧泰愚는 동생 載愚(재우)와 함께 막내 숙부 盧秉祥(노병상)의 도움을 받아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평생 守節(수절)하면서 살다가 1999년에 90세로 별세했다. 1972년에 달성군으로부터 孝婦賞(효부상)을 받았다. 국민학교 시절 盧泰愚 소년은 운동, 음악, 독서를 좋아했다. 특히 피리와 휘파람을 잘 불었다. 잊을 수 없는 스승으로는 일본인 교사 사토 아키라(佐藤彰) 씨가 있었는데, 盧 대통령은 1988년 5월에 일본 구라사키에 살던 선생 부부를 청와대로 초청하여 오찬을 대접하고 환담했다. <將校의 길> 박정희 사단장을 모시다 盧泰愚는 1945년에 公山(공산)국민학교를 졸업, 대구공립공업학교(뒤에 대구工高로 이름을 바꿈)에 應試(응시)하여 전기과에 입학했다. 6학년 105명 중 진학한 사람은 盧泰愚를 포함, 4명이었다. 盧泰愚 학생은 대구공립공업학교로 진학하면서 生家(생가)를 떠나 대구 칠성동 막내숙부 집에 머물면서 학교를 다녔다. 이 무렵 그는 洪思容(홍사용)의 시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즐겨 暗誦(암송)했다. 盧泰愚 학생은 대구공업학교에서 3학년을 마친 뒤 경북중학교에 편입시험을 쳐 합격, 4학년에 입학했다. 1950년 6·25 남침 직후 경북중 6학년이던 그는 학도병으로 육군에 자원입대, 헌병부대 교수부에서 사병으로 근무하다가 1952년 정규 육사 1기(통산 11기) 시험에 합격, 진해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다. 동기생은 200명이었고 全斗煥(전두환) 생도도 있었다. 盧 생도는 럭비부를 만들어 3士체육대회에서 우승했다. 陸士(육사)는 1954년 초여름 화랑대로 이전했고, 盧泰愚 생도는 1955년 졸업, 소위로 임관된 후 5사단에 부임하여 사단장 朴正熙 장군의 총애를 받았다. 盧泰愚 대위는 1959년 5월31일 同期生(동기생) 金復東(김복동)의 여동생인 세 살 아래 金玉淑(김옥숙)과 결혼식을 올렸다. 式(식)의 사회는 全斗煥(전두환) 대위가 보았다. 신혼 생활 중 渡美(도미)한 盧泰愚 대위는 1959년 11월에 미 육군 특수전 학교 심리전 과정을 수료하고 귀국했다. <제5공화국 出帆, 서울올림픽 主導> 대장 전역,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 盧泰愚 대위는, 196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 ROTC 창설 및 교관 요원으로 근무 중 朴正熙(박정희) 소장이 지휘한 5·16 군사혁명을 맞이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朴正熙 장군은 盧 대위를 특명조사관으로 쓰는 등 특별히 아꼈다. 盧泰愚는 육군방첩부대 보안계장, 최고회의 연락장교, 육사 졸업생들의 총동창회 북극성회 4代(대) 회장, 방첩부대 정보과장을 지냈고, 육군대학에서 공부한 뒤 1968년엔 20사단(사단장 윤필용) 60연대 1대대장으로 부임했다가 그해 11월 초 맹호부대에 소속되어 越南(월남)전선에 파견되었다. 그는 재구부대 대대장으로 근무하면서 戰功(전공)을 많이 세운 뒤 1969년 10월 귀국했다. 육군참모총장 수석 부관, 8사단 21연대장 등을 거쳐 1974년 1월1일 준장으로 진급, 공수 여단장으로서 9여단을 창설했다. 1978년에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근무한 뒤 소장으로 진급, 수도권을 방어하는 9사단장으로 근무 중 朴 대통령 弑害(시해)사건(10·26 사건)과 12·12 사건을 겪었다. 1980년의 격동기에 수도경비사령관 및 국군보안사령관으로서 全斗煥(전두환) 장군을 도와 혼란을 수습하고 제5공화국을 출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盧泰愚 장군은 1981년 대장으로 轉役(전역), 정무제2장관에 임명되어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작전을 지휘했고, 체육부장관, 내무장관, 대한체육회 회장,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을 역임하면서 올림픽 준비사업을 主導(주도)했다. <6·29 선언으로 대통령 당선> 민주화 실천시대를 열다! 그는 1985년 2·12 총선에서 민정당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된 직후 民主正義黨(민주정의당) 대표로 임명되었다. 집권여당을 이끌면서 12代 총선으로 분출하기 시작한 국민과 야당의 민주화 욕구에 대응하고 올림픽 준비와 경제성장을 정치적으로 뒷받침해야 하는 難題(난제)를 맡았다. 1987년 6월10일 민정당은 盧泰愚(노태우) 대표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이날부터 시작된 학생, 야당, 종교인을 주축으로 한 민주화 대시위에는 중산층까지 加勢(가세)하여 정부와 민주화 세력이 정면 대결하는 局面(국면)으로 치달았다. 6월29일 盧泰愚 대표는 기득권을 포기하고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전폭적으로 받아들이는 역사적 결단을 내렸다. 그는 ‘국민화합과 위대한 국가로의 전진을 위한 특별선언’(6·29 선언)을 발표, 대통령 직선제 改憲(개헌) 등 전면적인 민주화를 약속, 극적으로 局面을 전환하고 그해 12월18일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6·29 선언 8개항 1 대통령 직선제 개헌 2 공명한 선거관리 3 김대중 사면 복권 4 국민 기본권 보장 5 언론규제 철폐 6 지방자치와 사회단체의 자율 보장 7 정당활동의 보장 8 사회淨化(정화) <전환기의 국가 大戰略: 민족의 活力을 드높이고 활동공간을 드넓히다> 與小野大 극복, 통합의 리더십 발휘 1988년 2월에 취임한 盧泰愚 대통령은 1987년 6·29 선언에서 약속한 8개항의 실천을 國政(국정)의 중심과제로 삼았다. 盧 대통령 在任(재임) 5년간은 국내외의 전환기가 겹친 시기였다. 國內(국내)에서는 민주화의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國外(국외)에서는 소련 및 東歐(동구) 공산권이 무너졌다. 대통령은 전면적 민주화와 북방정책이란 국가 대전략으로 세계사적 전환기에 창의적으로 對應(대응)했다. 국회를 정치의 중심무대로 삼고, 민간부문의 자율과 경쟁을 촉진했으며, 공산권 붕괴의 好機(호기)를 이용해 서울올림픽 성공을 이어받은 북방정책으로써 국가의 活路(활로)를 열었다. 盧 대통령은 튼튼한 韓美(한미)동맹을 바탕으로 남북관계에서도 주도권을 잡고 ‘남북기본합의서’를 이끌어내었다. 언론자유가 滿開(만개)하고 사회 各(각)부문의 자율성이 획기적으로 提高(제고)되었으며, 권위주의적 관행이 완화되고, 지방자치 선거가 실시되었다. 盧 대통령은, 東歐(동구), 러시아, 중국 등과 修交(수교)하여 냉전시대 禁斷(금단)의 땅이던 유라시아 대륙을 한국인의 새로운 활동공간으로 활짝 열어놓았다. 특히 1992년 韓中(한중) 수교는 세계에서 가장 급속하게 성장하는 13억 중국시장을 한국 경제와 연결시킴으로써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만들었다. 韓中무역액은 수교 17년 만에 韓美-韓日(한일)무역액을 합친 것보다 많아졌다. 盧 대통령은 한국 경제의 장기적인 발전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사회간접자본에 집중 투자했다. 영종도 신공항(인천 국제공항), 경부고속전철(KTX), 서해안 개발 사업을 시작했다. 특히 주택 272만 호 및 수도권 신도시 건설로 주택문제를 획기적으로 해결했다. 盧 대통령은 1988년 총선으로 국회가 與小野大(여소야대)가 된 상태를 극복하여 國政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1990년 초 三黨(삼당)합당을 단행했다. 민정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이 합당, 민주자유당(민자당)으로 재출범했고, 이 안정된 보수연합 구도 덕분에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자당 후보 金泳三(김영삼)이 당선될 수 있었다. <달라진 나라, 달라진 삶> 일을 많이 한 대통령 ● 1987년에 3200달러이던 1인당 국민소득은 5년 사이 7200달러로 늘어났다. 노사분규가 늘었지만 근로자의 소득도 5년간 倍增(배증)하여 내수시장이 커지고 중산층이 충실해졌다. 노동소득 분배율은 1987년 53%에서 1991년엔 60%로 늘었다. ● 1987년 224억 달러였던 우리나라 순외채가 1992년에는 110억 달러로 줄었다. 무역규모는 이 기간 거의 배로 늘었다. ● 1977년부터 시작된 국민의료보험제도를 1989년 7월 도시지역 일반주민에게까지 확대·적용했다. 1987년 51%에 지나지 않던 의료보험 수혜자가 1992년에는 95%로 증가했다. 극빈층에 대한 의료보장제도도 확대하여 1990년엔 모든 대상자가 혜택을 보게 되었다. ● 국민연금제도를 확대했다. 1988년에 10인 이상 고용 사업장을 가입시키고 1992년에는 5인 이상 사업장에까지 확대·실시했다. ● 저소득층을 위한 사회개발 및 지원예산이 1987년의 1조6000억 원에서 1992년엔 4조6000억 원으로 늘었다. 저소득층을 위한 임대주택을 36만7000호 건설했다. ● 1988년 67개소이던 노인시설이 1992년 123개로 증가하고 수용 인원도 1만7000명에서 2만5022명으로 늘어났다. 9만1000명에게 사상 처음으로 老齡(노령)수당이 지급되었다. 취약계층을 보호하기 위해 사회복지 전문요원을 洞(동) 단위로 3000여 명을 고용했다. ● 전교조를 해산시켰다. 법적으로 엄정하게 대응하여 1만2000명이던 가입자가 150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잔류를 고집한 교원들을 해직시켰다. ●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경찰관 2만4400여 명을 증원, 국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民生(민생)치안을 확보했다. ● 언론자유를 보장함으로써 6·29 선언 이전에 32개이던 일간신문은 121개로, 7개 방송사는 14개로, 1404개이던 주·월간지는 6570개로 급증했다. <약속을 지킨 대통령> 한국인의 활동공간 확장 盧泰愚 대통령은 6·29 선언에서 국민과 약속한 정책을 충실히 지킨 사람으로 기록될 것이다. 在任(재임) 기간의 업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대통령 직선제 개헌(민정당 총재 및 후보 시절) 2 정치활동의 자유 보장 3 언론자유 확대: 신문·출판의 자유화 4 사회단체 자율적 운영 보장 5 勞使(노사)관계 자율화: 노조에 대한 정부 개입 금지 6 여성권익 보호 및 사회참여 확대: 가족법·모자보건법·保育法(보육법) 제정 및 개정. 공무원 채용 남녀구분 폐지 7 지방자치 시작 8 서울올림픽 성공 9 유엔 가입 10 韓中(한중)-韓蘇(한소)수교 11 東歐(동구) 공산권 국가들과 수교 12 남북대화의 진전과 기본합의서 도출 13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 발표 14 KTX, 영종도 공항, 도로, 항만 등 사회간접자본 확충 15 서해안 개발 시작 16 5대 신도시 및 주택 272만 호 건설 17 토지 공개념 도입 18 全국민 의료보험화 19 국민연금 확대 20 중학교 의무교육 확대 21 전교조 불법화 및 해산 22 범죄와의 전쟁 선포 盧 대통령이 주도한 전면적 민주화와 북방진출은 1948년 建國, 1961년 군사혁명에 이은 세 번째의 國家改造(국가개조)이고 구조개혁이었다. 이 개혁에 의하여 대한민국은 소란하지만 活力(활력)이 넘치는 生動(생동)하는 ‘민주·자유·번영’의 국가로 거듭났다. 盧泰愚 대통령은 1987년 大選(대선)의 구호대로 보통사람들이 역사의 主役(주역)이 되는 세상을 만들어놓고 1993년 2월25일 퇴임, 청와대를 떠나 한 시민으로서 서울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盧 대통령의 호는 陸士(육사) 생도 시절의 스승이기도 한 趙淳(조순) 부총리가 지어준 庸堂(용당)이다. 盧泰愚 대통령은 부인 金玉淑 여사와의 사이에 딸 素英(소영·1961년 출생), 아들 載憲(재헌·1965년 출생)을 두었다. <盧泰愚 대통령 年譜 > 민주주의를 실천하다! 1932 8월17일 대구광역시 동구 신용동 596번지에서 出生 (음력 7월16일) 1951 7월 경북고등학교 졸업 1955 9월 육군사관학교 (제11기) 졸업, 육군소위에 임관 1974 10월 제9공수특전여단장 (준장) 1978 1월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 (준장) 1979 1월 제9사단장 (소장) 12월 수도경비사령관 (소장) 1980 8월 국군보안사령관 (중장) 1981 7월 전역 (대장), 정무제2장관 9월 국가안전보장회의 위원에 임명 1982 3~4월 체육부장관 4월~1983년 7월 내무부장관 1983 7월~1986년 5월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장 1984 10월~1985년 4월 대한체육회 회장 1985 2월 제12대 국회의원,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1987 6월10일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됨 6월29일 ‘국민화합과 위대한 국가로의 전진을 위한 특별선언’(6·29 선언) 발표 9월14일 백악관으로 레이건 美 대통령 방문(한국의 정치발전, 韓美 통상마찰 해소 등 안보협력 등에 관한 광범위한 의견교환) 12월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 투표 12월18일 중앙선관위, 盧泰愚 후보를 제13대 대통령선거 당선자로 확정, 공고 1988 2월11일 나카소네 야스히로 前 일본 수상 예방 받음(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방안 등 공동관심사 논의), 李賢宰 국무총리 내정자·洪性澈 비서실장 내정자 발표 2월19일 새정부 내각명단 발표(부총리 羅雄培, 외무 崔侊洙, 내무 李相熙, 재무 司空壹, 법무 丁海昌, 국방 吳滋福, 문교 金永植, 체육 曺相鎬, 농수산 尹勤煥, 상공 安秉華, 동자 李鳳瑞, 건설 崔同燮, 보사 權彛赫, 노동 崔明憲, 교통 李範俊, 체신 吳明, 문공 鄭漢模, 총무처 金容甲, 과기처 李寬, 통일원 李洪九, 정무1 金潤煥, 정무2 趙敬姬, 법제처 玄鴻柱, 보훈처 全錫洪) 2월25일 대통령 취임 2월26일 제6공화국 제1차 국무회의 주재 3월10일~4월22일 각 부처 및 道政 업무보고 청취 4월26일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5월7일 개각(안기부장 裵命仁, 내무부장관 李春九) 5월9일 청와대 국무회의 주재(4대 國政지표 제시 ) 7월7일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 발표 9월17일 올림픽 개막식 참가(개회선언), 訪韓한 다케시타 일본수상과 韓日 정상회담 10월15일 서울 장애자올림픽 개회식 참석 10월19일 제43차 유엔총회 연설: ‘한반도에 화해와 통일을 여는 길’ 10월21일 레이건 美 대통령과 정상회담 11월3~14일 말레이시아, 호주,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방문 11월4일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와 정상회담 11월7일 호크 호주 수상과 정상회담 11월10일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 11월12일 사날 볼키아 브루나이 국왕과 정상회담 12월5일 개각(국무총리 姜英勳, 부총리 趙淳 등) 1989 1월30일 訪韓한 호크 호주 수상과 정상회담 2월27일 訪韓한 부시 美 대통령과 정상회담 3월20일 중간평가에 관한 담화 발표 7월19일 개각(안기부장 徐東權, 내무장관 金泰鎬 등) 9월11일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 천명 특별연설 10월18일 미국 상·하 兩院 합동회의 연설: ‘전진의 동반자-변화하는 세계 속의 韓美 관계’ 11월18일~12월4일 유럽巡訪(독일, 헝가리, 스위스, 영국, 프랑스) 11월21일 콜 독일연방 수상과 정상회담 11월22일 쉬로시 헝가리공화국 대통령과 정상회담 11월23일 헝가리 의회 연설: ‘화해와 새 시대를 함께 여는 동반자’ 11월25일 들라므라즈 스위스 대통령과 비공식 정상회담 11월28일 대처 영국 수상과 정상회담 12월27일 신설 3부 장관 임명(문화 李御寧, 환경 曺京植, 공보 崔秉烈) 1990 1월22일 신당창당 합의문 발표 3월17일 개각(부총리 李承潤 등 15개 부처) 5월9일 3黨 합당으로 민주자유당 총재 취임 5월25일 일본 국회 연설: ‘변화하는 세계 속의 새 韓·日 관계’ 6월5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정상회담 6월6일 부시 美 대통령과 정상회담 9월19일 개각(농수산 曺京植, 건설 李相熙, 환경 許南薰) 12월14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정상회담, 모스크바대학 연설: ‘냉전의 벽을 넘어, 평화와 번영을 향하여’ 12월27일 개각(국무총리 盧在鳳 등) 1991 1월9~10일 訪韓한 가이후 일본 수상과 정상회담 2월18일 개각(부총리 崔珏圭, 건설 李鎭卨, 서울시장 李海元) 4월20일 訪韓한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정상회담(제주) 5월24일 국무총리에 鄭元植 임명 5월26일 개각(재무 李龍萬, 동자 陳稔, 보사 安弼濬) 6월29일~7월7일 미국, 캐나다 공식방문 7월2일 부시 美 대통령과 정상회담 7월4일 멀로니 캐나다 수상과 정상회담 9월17일 남북한 유엔동시가입 9월20~30일 유엔 및 멕시코 방문 9월23일 부시 美 대통령과 정상회담 9월24일 유엔총회 연설: ‘평화로운 하나의 세계 공동체를 향하여’ 9월25일 살리나스 멕시코 대통령과 정상회담 11월8일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구축을 위한 선언’ 발표 12월18일 한반도의 비핵화와 관련한 특별발표 1992 1월5일 부시 美 대통령과 정상회담 1월16일 訪韓한 미야자와 일본 수상과 정상회담 3월24일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6월5일 국가환경선언 선포 8월14일 回甲 8월24일 ‘韓中 수교에 관한 특별담화’ 발표 8월27일 세라노 과테말라 대통령과 정상회담 9월18일 중립선거관리내각 구성 결단과 관련한 청와대 대변인 발표 9월20~25일 유엔 방문 9월21일 브룬트란트 노르웨이 총리와 정상회담 9월22일 유엔총회 연설: ‘평화와 번영의 21세기를 향하여’ 9월24일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 아시아협회 초청 연설: ‘새로운 세계질서와 韓美 동반관계’ 9월27~30일 중국 방문 9월28일 楊尙昆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 9월29일 李鵬 중국 총리 내외 접견, 江澤民 중국 黨 총서기 면담 10월9일 개각(국무총리 玄勝鍾, 내무 白光鉉, 법무 李正雨, 공보처 柳赫仁, 정무1 金東益), 공정선거관리를 위한 중립내각 출범에 즈음한 대통령 담화문 발표 1993 2월25일 대통령 퇴임 2021 10월26일 별세 |
[ 2021-10-26, 15:22 ] |